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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지양하는 국가(공동체-정치)로의 몸부림 [김상봉 편지8]

"(...) 가족공동체를 지양하지 못하는 사회에 참된 의미의 국가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족은 자유로운 만남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내가 내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은 자유의 현실태일 수 없습니다. 참된 자유와 보다 더 큰 만남을 위해 우리는 가족을 벗어나 더 큰 전체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자기를 실현해야 합니다. 국가는 그처럼 보다 더 확장된 만남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인간이 창안한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혈연관계가 자동적으로 사람들을 묶어주는 가족과 달리 국가는 사람들이 공유된 뜻과 이상을 통해 결속할 때만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국가가 없습니다. 2000년 전의 성씨가 아직도 이어지는 이 나라에서 국가는 여전히 씨족연립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단 국가기구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회적 공동체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재벌이나 학벌에서 보듯 가족주의 또는 족벌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곳이 한국사회입니다. 차이라면 과거의 벌열가문이 지금은 ‘고소영’ ‘강부자’ 등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뿐, 이 나라가 우리 모두의 나라가 아니라 소수 족벌의 나라인 것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결과 국가기구는 평소에는 소수의 집단에 의해 사적으로 장악되고, 위기에 처하면 모래성처럼 해체되어 버립니다. 모두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 국가가 민중의 비판과 저항에 직면하는 것은 정해진 순서인데, 국가기구가 비판하고 저항하는 민중을 서슴없이 적으로 간주해 공격할 때 전쟁상태를 종식시켜야 할 국가가 도리어 민중을 적으로 삼아 전쟁상태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註1]

 

(...)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지배의 종류를 나누면서 정치가가 시민을 지배하는 것은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지배라는 점에서 주인의 노예지배나 가부장의 가족지배와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간단히 말해 정치적 지배란 동등한 친구들 사이의 지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국가권력을 장악한 자들은 동료 시민을 친구로 보지 않는 것은 물론, 아예 사람으로도 보지 않습니다. 용산 철거민들이 사람으로 보였다면 시너통이 가득한 농성장을 무차별 공격할 수 있었겠습니까? 철거민뿐입니까? 이 나라의 권력자들은 자기들에게 반대하는 모두를 무조건 적으로 만듭니다.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교육은 크게 다를 수 없으므로 어디서나 교육자들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데, 한국의 권력자들은 그런 교사들을 싸잡아 적으로 만듭니다. 평교사도 모자라 이제는 일제고사를 통해 교장들까지 줄을 세우겠다고 나섰으니 대다수 교장들이 반정부집단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저들의 탐욕과 미련함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일제고사다 언론법이다, 그렇게 부지런히 모두를 적으로 만들면서 그들은 한 줌의 지배세력으로 고립되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무르익으면 폭풍이 몰려오고 저들은 썩은 과일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듯 몰락할 것입니다. 겨울이 가고 봄입니다. 그렇듯 우리 역사에도 머지않아 봄이 올 것입니다. 우리의 일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조용히 그 때를 기다리며 새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겠지요. (...)"

 

출처: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4) 정부 수립 60년,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나<下> [편지-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11730275&code=210000&s_code=af078

 

[註1]-본문에서 발췌-
1811년 홍경래의 반란 이래 이 나라의 역사는 이미 왕조시대부터 민중봉기와 항쟁의 연속이었습니다.
1862년 이른바 진주민란을 효시로 삼남지방을 뒤흔든 농민항쟁이 일어났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터졌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있었고, 10년 뒤 광주학생운동은 이름과 달리 함석헌이 가르치던 평안북도 오산학교까지 번진 전국적 봉기.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반란사건에 이어 1950년 비극적인 전쟁이 있었고,
1960년 4·19혁명으로,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예고 없는 지진처럼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그 직접적인 결과로 박정희의 독재가 종말.
1980년 5월 부마항쟁에 응답하듯이 광주항쟁이 터졌고,

1987년 길고 고통스러운 투쟁 끝에 마침내 우리는 민주주의를...

그리고 20여년 동안 이제 과거와 같은 대규모 민중봉기나 항쟁은 더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더니, 지난해 아무도 예상 못한 촛불항쟁이 백일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역사에 눈 밝은 사람이라면 이것이 오랜 고요 뒤에 찾아올 새로운 봉기의 전조라는 것을 모를 수 없을 것입니다.

 

 

* 윗 글은 박명림이 묻거나 문제를 제안하고, 김상봉이 답하거나 철학적으로 풀어내는 서간대화의 여덟번째 편지이다. 둘의 역할 분담의 성격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김상봉의 글이 더 많은 유익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게 사실이다. 참고로 그의 편지 2와 4는 여기(http://blog.jinbo.net/radix/?pid=59)에 옮겨다 뒀고 6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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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ublique1: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김상봉)

[편지3]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 김상봉

 

(...) 공화국이란 무엇입니까? 원래 이 낱말은 로마인들이 나라를 가리켜 부른 이름입니다. 라틴어로는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는 ‘공공적인 것’(public thing)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푸블리카라는 형용사는 포풀루스(populus), 즉 인민(people)이라는 명사에서 만들어진 낱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레스 푸블리카를 레스 포풀리(res populi)라고 풀이했는데, 이 말은 ‘인민의 것’(people’s thing)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인민이란 계급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고 나라 구성원 전체로서 겨레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나라가 특정한 집단이 아니라 ‘모두의 것’일 때 그것은 참된 공화국인 것입니다. 키케로는 공화국을 처음 고전적으로 정의한 사람인데 그에 따르면 인민이란 “합의된 법과 공공 이익에 의해 결속된 다중의 공동체”인 바, 나라가 그런 인민 모두의 것이요, 모두를 위한 것일 때 그것은 공화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법치와 공공성이야말로 공화국의 기준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국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정확하게 진단하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민주국가가 자동적으로 공화국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많은 나라에서 공화국은 군주국의 반대말로 이해되고, 민주국가와 거의 같은 말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민주국가냐 군주국가냐 하는 것은 국가의 통치형태에 관한 문제로서, 국가의 실질적 온전함을 판단하기 위해 그것이 공화국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고전적 이론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법치와 공공성의 원리가 지켜진다면 군주국가도, 과두제 국가도 민주국가도 모두 공화국입니다. 반대로 그 원리가 실종되면 아무리 형식적으로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는 국가라 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공화국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화국과 민주국가의 관계에 대해 때때로 철학자들은 역설적으로 들리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는데, 독일의 철학자였던 칸트는 공화국과 가장 거리가 먼 정치체제가 민주국가요, 거꾸로 군주국가야말로 진정한 공화국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좋은 정치체제라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른바 자유선거에 의한 민주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자기 나라를 (인민) 공화국이라 부르는 것을 단지 위선적인 말장난이라 치부할 수 없으며, 거꾸로 우리가 형식적으로 민주화를 이루었다 해서 마치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안이한 생각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주의의 위기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또 다른 하나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국가는 본래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전혀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는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민주정이냐 과두정이냐 아니면 군주정이냐 하는 것은 나라의 통치형태를 구분하는 이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선출하면 그것이 민주적 통치형식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양 민주주의의 요람이라 할 고대 그리스인들의 구분기준으로 보자면 선거를 통해 국가권력을 위임하는 국가형태는 민중이 권력에 참여하는 민주정과는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과두정 곧 소수에 의한 지배체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필연적으로 극소수의 재력가들만이 생업을 밀쳐두고 선거에 뛰어들 수 있으므로, 절대 다수 민중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거가 아니라면 무엇을 통해 권력을 위임하는 것이 민주주의적인 제도이겠습니까?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정치형태를 추구했던 아테네인들에 따르면 그것은 추첨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권력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국회의원도 판사도 행정관도 모두 추첨으로 뽑았습니다. 예외적으로 그들이 선거를 통해 뽑았던 공직이 꼭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장군입니다. 그런데 아테네인은 자기들이 선출한 장군들의 명령에 복종했으나, 그들의 과오에 대해서는 민회에서 가차 없이 탄핵함으로써 장군들의 권력이 민중의 주권 아래 있음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테네인들이 가르쳐준 민주주의입니다. 

 

지금 우리처럼 선거로 국가권력을 위임하는 체제는 민주적 지배가 아니라, 소수지배(oligarchy) 곧 소수의 잘난 사람들을 뽑아 나랏일을 맡기는 정치체제인데, 이 체제의 가장 큰 위험은 부자들만이 선거에 나갈 수 있고,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가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국가로 전락하게 되며, 인간의 참된 자유와 자기실현 그리고 온전한 만남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또 다른 무엇보다 자본의 지배는 결코 나라의 공공성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원래 공화국의 반대말은 레스 프리바타(res privata)입니다. 말 그대로 ‘사사로운 것’(private thing)이라는 뜻이지요. 여기서 사적인 것이 무엇이냐면 집안일입니다. 그런데 로마인들이 말하는 집안일은 바로 돈 버는 일, 곧 경제였습니다. 영어에서 경제를 뜻하는 이코노미(economy)란 말은 원래 그리스말로 가정관리를 뜻하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를 그냥 영어로 쓴 말인데, 그리스인들에게서도 역시 집안일은 돈 버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은 오이코노미아라고 하든 레스 프리바타라고 하든 돈 버는 일을 사사로운 집안일로 보고, 나랏일과 엄격하게 구별했는데, 이는 돈이 절대로 공공적인 가치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키케로가 공화국의 조건으로서 공공적인 가치를 말한 까닭은 우리의 삶에는 개인이나 가정으로는 실현할 수 없고 오직 국가를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는 어떤 공공적이고 일반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더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모든 시대, 모든 겨레에 열려 있는 과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은 무엇이 국가가 추구해야 할 공공적 가치일 수 없는가 하는 부정적 기준은 명확히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돈을 벌고 부자가 되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국가가 추구할 공공적 가치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시대 이래 대다수 한국인들에게는 “잘 살아보세”가 국가가 추구해야 할 공공적 가치인 것처럼 오해되어 왔습니다. 오죽하면 진보정당에서조차 ‘민생정치’가 구호로 쓰이기도 하는데, 이는 잘 살아 보자는 말을 약간 우아하게 표현한 것이겠지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아마도 누군가는 ‘모두가 잘 사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공공적인 가치가 아니겠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산다’는 술어는 그 자체로서는 결코 ‘모두가’라는 보편적 주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니 도리어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은 그 자체로서는 철저히 사사로운 욕망으로서, 그냥 내버려두면 나의 경제적 이익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경제적 이익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잘 살기 위해 필요한 돈이 사적으로 점유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플라톤의 철학을 독점할 수 없으며, 베토벤의 음악을 자기 지갑에 넣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에게 개방된 존재로서 그 자체로서 공공적인 것이요, 모두에게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돈은 사적 소유의 대상이어서 나의 지갑에 든 돈은 그 자체로서는 나를 위해 좋은 것이지 남을 위해 좋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 겨레가 오로지 돈을 벌고 부자되는 것 외에 다른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들의 나라는 야수적인 무한경쟁 속에서 해체되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상태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것도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한 겨레가 참된 공화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히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상의 공공적인 가치와 보편적인 이상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파편화시키고 분열시키는 사사로운 욕망, 곧 경제적 욕망을 규제하고 승화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인들은 자유, 평등, 박애를 말하고, 독일인들은 하나됨과 정의와 자유를 나라의 근본으로 삼습니다. 함석헌이 그리도 자주 말했듯이 국민적 이상이야말로 나라의 참된 기초이니, 우리 또한 이제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과연 우리가 더불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 벌고 부자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으니 도대체 어떤 고귀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나라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안타까운 물음을 선생님께 떠밀면서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khan 입력 : 2009-01-18, 17:28수정 : 2009-01-18 17:28)

 

  

[편지1-김상봉: 공화국 논의가 필요한 이유](각항의 번호와 제목은 옮겨온 자의 것임. 기타 주변설명은 'Rep.2' 참조)

 

1. 대항체로서의 국가를 넘어 : (...) 우리는 아직도 나라를 생각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폭력에 저항하는 데는 영웅적인 용기를 보였으나, 과연 무엇이 바람직한 나라인지 생각하는 일에는 게을렀던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바람직한 국가에 대해 생각하는 일에 서툰 까닭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엇보다 고전적 사회주의 이론이 국가를 소멸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알게 모르게 국가에 대한 적합한 인식은 물론 바람직한 국가에 대한 상상을 억압해온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시즘에 따르면 바람직한 국가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퇴행적인 일로 치부되는 까닭에 엄연히 국가의 울타리 속에서 살고 있고 내심으로도 국가의 소멸 따위는 믿지 않는 사람조차도 짐짓 국가의 파괴와 소멸을 입에 올릴 뿐 바람직한 국가를 어떻게 형성하고 건설할 것인지를 물을 수 없었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고, 아직도 그 관성이 다 청산되지 않은것이 국가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첫 번째 이유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 지난날 많은 사람들이 단지 국가폭력만이 아니라 그 국가에 대항하여 싸웠던 사람들의 공동체 속에서 치유하기 어려운 심리적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주위에서 국가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공동체에 대해 조건반사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드물지 않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공동체를 불신하는 사람에게 바람직한 공동체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의미를 가질 리 없으니, 이들의 관심은 온전한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국가기구 또는 일체의 공동체에 포획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것뿐입니다.


2. 공동체적 만남의 장으로서의 국가: 하지만 탈주의 자유란 망상일 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폴리스 속에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스스로 형성함으로써 그 주인으로 자유를 누리거나 아니면 국가의 노예로 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즉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서로의 상처를 감싸고 치유하면서 우리 자신의 역사로부터 우리가 꿈꿀 수 있는 바람직한 나라의 이상을 이끌어내는 일입니다. 여기서 제가 이웃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상적인 나라를 꿈꾸는 것이 무슨 단체나 조직이 아니라 온전한 만남의 문제라는 것만은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참된 나라를 꿈꾸는 것은 국가기구에 종노릇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무슨 추상적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오직 너와 내가 온전히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의 자유는 참된 만남 없이는 가능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우정 없이 행복이 있을 수 없다면 참된 만남이란 가장 중요한 개인적 욕망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욕망이 충족되고 자유가 실현되는 만남의 지평이 바로 나라입니다.


3. 공화국과 민주주의: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공화국입니다. 그것은 실현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구별하자면 민주국가에서 더 나아가 온전한 공화국을 세워야 한다는 것, 그것이 지난번 촛불항쟁을 통해 명확히 표출된 시대정신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공화국이란 나라가 공공적 기관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의 불완전한 예외를 제외하면 왕조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나라의 국가기구는 한 번도 온전히 공공적 기관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소수의 권력집단이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사적으로 점유한 수탈과 억압의 도구가 국가기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공공성이란 나라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어서 그것을 상실하면 나라는 더 이상 나라일 수 없으며 우리가 그런 나라의 지배를 받고 살아야 할 까닭도 없습니다. 나아가 민주주의 역시 공공성의 원리가 없다면 내용 없는 형식으로 껍데기만 남는다는 것을 우리는 지극히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이명박 정부의 폭정에서 똑똑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즉 지금까지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서도 이제는 공화국에 대해 말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1)왜 공화국 논의가 필요한가 (上), 경향 입력 2009-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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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찾기를 넘어서는 진보운동을... (김상봉)

시대적-역사적 요청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진보진영이 '권리찾기'를 위한 노력에 운동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그런 운동을 진보적 가치의 중점 사항으로 여겼던 것이 어느정도는 사실이겠다. 요즘 많이들 부르짖는 소수자나 장애인 권리찾아주기, 혹은 더 나아가서는 페미니스트들의 '권리찾기'(를 넘어 다시 자기네들의 '권리 만들기')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범주에 스스로를 묶는 방어적(외양은 적극적인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방어적인) 진보를 지양하고 진정한 의미의 진보가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자는 좋은 말씀이 있기에, 옮겨오면서 몇 자 보탤까 한다. [나의 어설픈 '보태는 말씀'이 지겨울 경우 아래의 펌글로 바로 이동해도 됨.]

 

그러고보면 권리라는 개념이 무슨 엄청난 진보적 가치를 담고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 태생적 연원으로 봤을 때, 힘 쎈 부자놈들이(힘이 쎄서 부자가 되고 부르조아가 됐는지 그 역인지는 따질 필요도 없이) 저희들 맘대로 땅을 구획치고는 '이건 내꺼다' 라고 외치는 배타적 권리가 그 뿌리일 것이다. 힘이 없어서 무주공산에 널린 권리를 미처 행사하지 못한 자들은 나중에 인권이라는 개념에 구원을 요청해 보지만, 권리의 속성은 언제나 강자의 논리였던 것이 우리네 역사 아닌가 (아니 우리네만이 아니라 동물의 왕국에서 더 자연스러운 질서). 그렇게 권리란 본연적으로 상호적 관계 속에 있으므로, 힘이 없거나 기회가 없어 '구획치기'를 못한 놈이 있기에 구획친 놈의 권리가 의미있는(?) 것이지, 모두가 똑같이 구획치고 사방에 땅주인만 있고 고용할 일꾼이 없다면 그런 구획치기의 의미는 무화되고 어떠한 권리도 발동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실상은 그렇지가 않고 힘센놈의 권리가 충실히 작동되는 것이 현실이니, 이제 권리 개념은 항상적 대결과 투쟁과 저항를 낳을 수밖에 없도록 규정되어진다는 말이겠다.

 

권리의 속성은 그렇게 늘 배타적이고, 이런 배타성의 성숙된(!) 면모가, 적극적으로는 나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고 타인을 죽이는 것도 나의 권리이고, 소극적으로는 내 이웃이 굶어죽든 아파죽든 타인의 비참과 불행을 방관하는 것도 나의 권리라는 주장으로 나타날 수도 있겠다. 이러한 성격의 권리에다 대고 야만과 반인류을 거론하며 도덕적-종교적 설교를 아무리 늘어놓아봤자 그것은 소 귀에 경 읽기라는 사실을 작금의 이스라엘-미국 사례가 잘 알려준다. 잘 못 자란 권리의 성격때문이 아니라, 권리개념이 함축하는 원래의 속성이 그러한 것이므로, 이제는 배타적 상호성에 바탕하는 '권리찾기운동'을 지양하고 보다 정의롭고 공정한 보편적 권리를 어떻게 만들고 지켜낼 것인지를 함께 건설적으로 고민해 보자는 것이 아래에 옮기는 글의 취지로 보인다. [참고로 아래의 글은 진보신당 당원들을 상대로 쓰여진 것인 듯한데, 나는 그 당과는 전혀 상관도 없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지만 옳은 말씀이기에 퍼온다. 사족으로 한 마디만 더 하자면, 이곳 '진보 블로그'에서는 사람들이 펌질보다는 풀질(설을 푸는 행위)을 더 좋아하는 듯한데, 나는 자꾸 이런 펌질만 하자니 좀 뭣하지만 그냥 이게 내 수준이려니 하고 간다. 이하 펌글이고 -진보신당 어쩌고 하는- 도입부는 생략한다, 좀 보편적인 글의 외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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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정당정치의 존재 이유…"권리찾기 운동을 넘어서야" (김상봉) // (...) 지금까지 정치적인 진보 운동이란 권리를 찾는 운동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적 노동운동은 자본가에게 빼앗긴 노동자의 권리를 찾는 것이고, 진보적 여성운동은 남성에게 빼앗긴 권리를 찾는 것이며, 진보적 장애인운동은 비장애인에게 빼앗긴 권리를 찾는 일일 것이다. 부당하게 권리를 침해당할 때 우리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회는 타인의 권리를 부당하게 약탈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배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왕조시대와 식민지시대 그리고 독재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오는 동안 그나마 이 정도의 사회적 평등과 정의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빼앗긴 권리를 찾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그것을 되찾으려 하는 운동이 진보적 정치운동이라면 그것은 당파적인 계급투쟁을 벗어나기 어렵다. 참된 진보 운동은 권리 찾기 운동이 모두를 위한 것일 때 정당성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노동자의 권리 찾기가 단순히 좁은 의미의 노동자계급의 이익 추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해 좋은 일이 될 때 보편적인 정당성을 얻게 된다. 이런 이치는 여성해방운동이나 장애인 인권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참된 진보적 정치 운동이란 어떤 특정한 계급이나 집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권리 찾기를 뜻하는 바, 이런 문맥에서 보자면 진보적 정치 운동이 추구해 온 정의란 어떤 사람도 부당하게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 사이에 권리의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이며, 평등이란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기준에 따라 권리를 행사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처럼 진보 운동이 모든 사람을 위한 운동이라는 것이야말로 그것의 대중성을 담보하는 근거이며 진보 운동의 현실적 힘도 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빼앗긴 권리를 찾고, 확보한 권리를 지키는 것이 진보적 정치 운동의 궁극 목표가 되어버린다면, 내가 생각건대 더 이상 진보 운동에 미래는 없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순수하게 권리만이 문제라면 나의 권리와 모든 사람들의 권리는 원칙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리는 자기의 대상에 대한 권리이다. 권리의 충돌과 불균형이 생기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 사이에 대상에 대한 권리의 양이 다르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런데 누구도 자기의 권리를 홀로 지킬 수도 없고 빼앗긴 권리를 홀로 되찾을 수도 없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권리를 되찾고 지키려는 운동은 반드시 집단적 연대와 결속을 통해서 일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빼앗긴 민족의 권리가 문제라면 민족이 하나로 결속할 것이며, 빼앗긴 노동자의 권리가 문제라면 노동자 계급이 단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권리를 찾고 지키려는 욕구 자체는 자기의 권리를 확장하려 할 뿐 그것을 스스로 제한하려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대상이 무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자기의 권리를 확장하려는 의지는 자연스럽게 자기와 같은 사람들과 연대하는 대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배제함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그리스의 자유 시민들이 노예를 배제하고 자기들만의 자유와 권리를 추구한 것이나, 서양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제3세계를 식민지화하면서 자기들만의 시민적 공화국을 추구한 것, 그리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에 눈감으면서 자기들의 권익을 추구하는 것이 근본적으로는 한편과 연대하면서 다른 편을 배제하는 일이 모두 권리개념의 본질로부터 같이 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보운동이 일종의 자기모순에 봉착한 근본적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명목상으로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의 균형을 지향하지만 권리 개념 그 자체는 권리의 보편적인 향유라는 진보적 이상을 자체 내에 포함하지 않는 까닭에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당파적인 담합과 배제로 퇴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이 정말로 새로운 진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려면 바로 이 권리의 개념을 넘어서야만 한다. 권리의 개념은 대상에 대한 욕망에 기초한다. 그리고 이 욕망이 결국 나와 너 사이의 대립을 낳고, 이 대립이 보편적 인간해방과 만남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대상에 대한 권리의 극대화가 아니라 너와의 참된 만남에 대한 욕구가 진보적 상상력을 추동하고 진보적 운동을 이끌어 가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면 우리가 투쟁하는 것은 투쟁 자체를 원해서도 아니고 그것을 통해 대상에 대한 권리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도 아니며, 오직 불평등하고 왜곡된 만남을 지양하고 너와 나 사이의 참된 만남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권리의 균형 역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참된 만남을 위한 조건으로서 요구되는 것이다. 참된 정치란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는 것이다. 참된 만남에 대한 지향이 다른 모든 정치적 이념들을 인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이념도 불화의 씨앗이 될 뿐이다. 그런 경우 우리는 진보의 이름으로 안팎으로 싸우면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일상화된 불화 속에서 진보적 이념의 현실화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일상화된 불화는 우리를 하나 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오직 싸움이 만남을 위한 것임을 잊지 않을 때, 진보적 정치운동은 갈라진 사람들을 하나로 만나게 하고 그 만남 속에서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레디앙 2009년 01월 12일 (월) 08:50:27 김상봉 / 미래상상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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