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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02
    '가족'을 지양하는 국가(공동체-정치)로의 몸부림 [김상봉 편지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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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지양하는 국가(공동체-정치)로의 몸부림 [김상봉 편지8]

"(...) 가족공동체를 지양하지 못하는 사회에 참된 의미의 국가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족은 자유로운 만남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내가 내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은 자유의 현실태일 수 없습니다. 참된 자유와 보다 더 큰 만남을 위해 우리는 가족을 벗어나 더 큰 전체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자기를 실현해야 합니다. 국가는 그처럼 보다 더 확장된 만남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인간이 창안한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혈연관계가 자동적으로 사람들을 묶어주는 가족과 달리 국가는 사람들이 공유된 뜻과 이상을 통해 결속할 때만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국가가 없습니다. 2000년 전의 성씨가 아직도 이어지는 이 나라에서 국가는 여전히 씨족연립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단 국가기구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회적 공동체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재벌이나 학벌에서 보듯 가족주의 또는 족벌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곳이 한국사회입니다. 차이라면 과거의 벌열가문이 지금은 ‘고소영’ ‘강부자’ 등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뿐, 이 나라가 우리 모두의 나라가 아니라 소수 족벌의 나라인 것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결과 국가기구는 평소에는 소수의 집단에 의해 사적으로 장악되고, 위기에 처하면 모래성처럼 해체되어 버립니다. 모두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 국가가 민중의 비판과 저항에 직면하는 것은 정해진 순서인데, 국가기구가 비판하고 저항하는 민중을 서슴없이 적으로 간주해 공격할 때 전쟁상태를 종식시켜야 할 국가가 도리어 민중을 적으로 삼아 전쟁상태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註1]

 

(...)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지배의 종류를 나누면서 정치가가 시민을 지배하는 것은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지배라는 점에서 주인의 노예지배나 가부장의 가족지배와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간단히 말해 정치적 지배란 동등한 친구들 사이의 지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국가권력을 장악한 자들은 동료 시민을 친구로 보지 않는 것은 물론, 아예 사람으로도 보지 않습니다. 용산 철거민들이 사람으로 보였다면 시너통이 가득한 농성장을 무차별 공격할 수 있었겠습니까? 철거민뿐입니까? 이 나라의 권력자들은 자기들에게 반대하는 모두를 무조건 적으로 만듭니다.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교육은 크게 다를 수 없으므로 어디서나 교육자들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데, 한국의 권력자들은 그런 교사들을 싸잡아 적으로 만듭니다. 평교사도 모자라 이제는 일제고사를 통해 교장들까지 줄을 세우겠다고 나섰으니 대다수 교장들이 반정부집단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저들의 탐욕과 미련함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일제고사다 언론법이다, 그렇게 부지런히 모두를 적으로 만들면서 그들은 한 줌의 지배세력으로 고립되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무르익으면 폭풍이 몰려오고 저들은 썩은 과일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듯 몰락할 것입니다. 겨울이 가고 봄입니다. 그렇듯 우리 역사에도 머지않아 봄이 올 것입니다. 우리의 일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조용히 그 때를 기다리며 새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겠지요. (...)"

 

출처: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4) 정부 수립 60년,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나<下> [편지-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11730275&code=210000&s_code=af078

 

[註1]-본문에서 발췌-
1811년 홍경래의 반란 이래 이 나라의 역사는 이미 왕조시대부터 민중봉기와 항쟁의 연속이었습니다.
1862년 이른바 진주민란을 효시로 삼남지방을 뒤흔든 농민항쟁이 일어났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터졌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있었고, 10년 뒤 광주학생운동은 이름과 달리 함석헌이 가르치던 평안북도 오산학교까지 번진 전국적 봉기.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반란사건에 이어 1950년 비극적인 전쟁이 있었고,
1960년 4·19혁명으로,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예고 없는 지진처럼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그 직접적인 결과로 박정희의 독재가 종말.
1980년 5월 부마항쟁에 응답하듯이 광주항쟁이 터졌고,

1987년 길고 고통스러운 투쟁 끝에 마침내 우리는 민주주의를...

그리고 20여년 동안 이제 과거와 같은 대규모 민중봉기나 항쟁은 더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더니, 지난해 아무도 예상 못한 촛불항쟁이 백일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역사에 눈 밝은 사람이라면 이것이 오랜 고요 뒤에 찾아올 새로운 봉기의 전조라는 것을 모를 수 없을 것입니다.

 

 

* 윗 글은 박명림이 묻거나 문제를 제안하고, 김상봉이 답하거나 철학적으로 풀어내는 서간대화의 여덟번째 편지이다. 둘의 역할 분담의 성격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김상봉의 글이 더 많은 유익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게 사실이다. 참고로 그의 편지 2와 4는 여기(http://blog.jinbo.net/radix/?pid=59)에 옮겨다 뒀고 6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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