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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21
    노동자, 소외를 넘어 소비의 주체로? (박노자)
    tnffo

노동자, 소외를 넘어 소비의 주체로? (박노자)

아래에 옮기는 글에서 박노자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사람들(노동자)이 갖는 '소비 욕망'을 야구에서부터 섹스투어까지 어디서나 찾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상품의 생산자로서의 노동자가 --맑스의 말처럼-- 자기가 만든 상품에서 소외되고 소비의 주체에서 멀어지는 것이 이제는(21세기에는) 아니라, 더 많은 외적 대상을 소비 품목(상품)으로 삼음으로써 --심지어는 스스로도 계급시스템의 상위그룹에 소비대상으로 노출하면서 동시에 하위그룹을 상품으로 소비하는--, 자본주의가 기획하고 조장하는 "분리통치"와 '소비-욕망-시스템'에 깊숙히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의 창궐에 충실히 복무한다는 것. 그러므로 "자본이 없을 때에 앎이란 얼마나 맛이 있게 되는지", 즉 인간의 이런 욕망 시스템에 부응할 새로운 세상은 무엇일지, 이런 것을 "자본주의 '이후'"의 그림으로 한번 고민해 보자는 것인 듯하다. 물론 각자가 저열한 본능적 욕망을 제어하여 엄숙한 성인군자가 되자는 도덕적 훈계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분리-지배-시스템'에 사람들이 익숙해지거나 그것을 즐기는 경향성을 갖게 된 원인은, 물론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그런 경향성이 더 노골화 되고 강화되도록 함으로써 자기(자본주의) 시스템의 작동을 원활하게 하려는 자동적이고 구조적인 동력에 있는 건 사실이겠지만, 어쩌면 사람들의 이런 경향성 자체가 본연적으로 자본주의에 더 잘 조화되고 그래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이끈 때문은 아닌지 하는 의심도 든다. 만약에 이런 의심이 조금이라도 사실이라면 인위적으로 꾸미고 제시될 '자본주의 이후' 시스템의 모습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사람들에게 먹혀들지(잘 적용될지) 약간은 의문이다. 여기서 인류학적 인간 개조론이나 교육론이 나오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인간을 개조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신의 몫이다.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면, 다만 그 본능적 욕망에 충실한 인간을 가둘 다른 류의 감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예컨데, 도덕 말고, 나를 나의 존재론적 가치로부터 소외시키는 족쇄로서의 감옥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무사히'(타인과의 충돌없이) 실현시키기 위한 인위적 틀로서의 감옥 같은 것...

 

 

[펌] 박노자, 한일야구부터 섹스투어까지

 

"What constitutes the alienation of labour? Firstly, the fact that labour is external to the worker – i.e., does not belong to his essential being; that he, therefore, does not confirm himself in his work, but denies himself, feels miserable and not happy, does not develop free mental and physical energy, but mortifies his flesh and ruins his mind. Hence, the worker feels himself only when he is not working; when he is working, he does not feel himself. He is at home when he is not working, and not at home when he is working. His labour is, therefore, not voluntary but forced, it is forced labour"

"노동의 소외란 무엇인가? 첫째,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재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노동자의 실존적 존재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노동자는 그 노동에서 자신을 확립시키지 못하는 것이고 그 반면에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노동자는 노동 과정에서 불행하고 불쾌하게 느끼고, 유쾌한 심신의 기운을 발산하지 못하는 반면 그 심신을 파괴시킨다. 노동자는 노동하지 않을 때만 행복감을 느끼고 노동할 때에 불행감을 느낀다. 노동하지 않을 때에 집과 같은 느낌이고 노동할 때에 '바깥'이다. 즉, 그의 노동이란 자원적이지 않은, 강요받은 노동이다." (『경제-철학 초고』(1844))

 

 (...)『경제-철학 초고』에서 마르크스가 "노동자가 많이 생산할수록 덜 소비한다"고 적고 있을 만큼 생산자를 소비자로 보지 않았는데, 21세기 벽두 자본주의의 제1철칙은 바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不二'입니다. 자본주의가 바뀌었다면 그게 바뀐 것이지요. 노동자가 5주 휴가 동안 그리스에서의 호텔과 각종의 휴양 서비스를 소비할 수 있는 유럽은 그렇다 치고도, 5주 휴가가 없는 이 '중간적' 준주변부의 대한민국에서마저도 노동자가 '노예 노동'의 8~10시간을 꾹 참고 견디고 나면 소비할 수 있는 것은 소주와 삼겹살 이외에도 많습니다. '한일전'에서 우리의 위대한 대한민국이 쪽바리들을 깨부셨다는 국민적 승리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의 유명 연예인의 표정연기와 예쁜 하얀 살갗의 이미지, 달콤한 유행가의 소리, 그리고 백화점에서의 판매원 아가씨의 친절한 웃음과 존대말….

 

(...) 착한 사람 마르크스는, '완성된 인간'이 되기를 지향하는 노동자가 당연히 자기 상품화를 거부하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 상품화를 노동자가 즐길 수도 있다는 걸, 아직 원시적 축적 상태인 그 당시의 영국 자본주의를 보고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지요. 그러나 노동자 밑에도 노동자가 있고, 노동자 위에도 노동자가 있는 오늘날의 완숙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위에 있는 노동자에게 밑에 있는 노동자의 자기 상품화란 '즐거움' 그 자체가 될 수 있지요.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가는 전문직 남성 정규직 노동자가 여승무원의 섹시한 외모와 상냥하고 친절한 말투, 매너 등 강요받은 그 친절을 안 즐기나요? 은행에 들르는 정규직 노동자는, 창구에서 노동하면서 그 친절도의 평가를 손님한테 받아야 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무조건적 친절'을 안 즐기나요?

 

사진 편집: 레디앙

 

(...) 복합화된 자본주의 사회라는 피라미드에서는, 약간이라도 높은 위치를 점한 노동자는 거의 당장에 그 생활 양식/성향상 '새끼 자본가'로 둔갑되지요. 부동산과 주식 투자 등을 통해서 자본의 세계와의 연계를 모색해도 그 밑에 있는, 보다 가난한 여성/저숙련/외국인/청년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꺼립니다. 분리통치가 지금처럼 완벽해질 수 있다는 걸 마르크스가 예측할 수 있었나요? 자본주의의 주기성 - 필수적 공황의 도래, 이윤율저하 원칙 등 때문에 노동자들이 구조적 고통을 받게 돼 있지만, 약간이라도 체제 속에서 안정된 위치를 갖게 되면 그 체제의 아주 보수적일 일부분이 되고 맙니다. 감옥이 즐겁고 달콤하기만 하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 감옥의 종신 수인을 자청할 확률은 매우 높지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비자본주의적 대안의 매력을 보여주자면 (...) 자본이 없을 때에 앎이란 얼마나 맛이 있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게 더 효율적일 걸요. (...) 다른 차원에서 자본주의 '이후'를 '가시적으로' 준비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한일야구부터 섹스투어까지-[나의 혁명론⑦] 맑스의 꿈…현대 노동자들이 누리는 것, 레디앙,  2009년 03월 19일 (목) 09: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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