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역전시키는 죽음
- <마이 라이프 위드아웃 미 my life without me> -

 


 

 

‘나 하나쯤 없어도 세상은 잘만 굴러 간다.’

이 말은 참이다. 케케묵은 변증법적 유물론 식으로 말하자면 세상이란 ‘나의 의식 바깥에 객관적으로 독립해서 실재’한다. 따라서 내가 태어나기 전이나 죽은 후에도 세상은 존재하고, 내가 죽은 내일도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며, 등교, 하교, 출근, 퇴근, 술자리, 교통사고, 신문과 뉴스, 천재지변과 음주가무, 희노애락이 지구상엔 뒤죽박죽 일어날 것이다. 요컨대 어제 같은 오늘과 오늘 같은 내일로 점철될 세상은, 나 하나쯤 없어도 끄떡없다. 그건 마치 지구 저편에서 강대국의 미사일 공격으로 혹은 공격용 헬기의 기총사격과 열화 우라늄탄으로 민간인이 죽어 나가도, 끄떡없이 밥을 먹고 변을 봤던 오늘의 내 일상만큼 끄떡없는 것이다. 끄떡없다, 세상은. 세상은 과연 나의 의식 밖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며 끄떡없다. 아, 빌어먹을 Diamat!!!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뭔가? 나의 의미는 뭔가?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다 가는가? 위인전으로 쓰여질 어떤 인간들의 삶과 죽음에 비해, 나란 인간의 생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살다 가고 싶지 않다. 지금부터라도 똑바로 살아야겠다. 허나, 그것은 마음뿐이고, 여전히 세상은 나 하나쯤에 아랑곳 않고 공고하고 오히려 나날이 강대, 창대, 막대해지고 있으니 그에 반비례하여 왜소해지고 과소해져서 급기야 말소 될 것만 같은 난 억울하다.

이 말들을 ‘슬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하나? 끄떡없는 세상을 그저 끄덕거리며 용인할 때, 저 말은 정말 참이 된다. ‘나 하나쯤 없어도 세상은 잘만 굴러 간다.’ 이 말은 참인가? 질문을 바꿔보자. 참이었으면 좋겠는가? 그게, 네가, 원하는, 바인가?


 

 

 

그 여자, 스물세 살. 밤이 되면 대학에 청소하러 나가는 여성노동자. 고등학교도 마치지 않았고, 열일곱에 첫애를 출산한 두 아이의 엄마. 너바나의 공연장에서 만난 한 사내와 열반 같은 하루하루를 살던 어느 날, 길어야 두 달이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암 환자, 그녀. 가난했지만 행복했고 불우했지만 즐거웠던 삶의 시간과 작별을 앞둔 여자. 영화는 초입에 상황 세팅을 마친다.

이쯤 되면 영화 줄거리가 어떻게 될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영악한 관객은 벌써 머릿속에서 영화 한 편 다 찍었다. 플롯을 전개하고 클라이막스를 찍고 마침내 엔딩씬 마치고 크랭크업 했을 거다. 흔한 소재, 뻔한 줄거리, 익숙한 설정이다. 거기에 원제를 를 <죽기 전에 하고 싶은 10가지>로 바꿔놓으면, 그야말로 영화가 어떻게 될지 뻔해진다.

이 뻔할 것 같은 영화에 대한 관객의 뻔한 어림짐작을 배신하는 것이 감독 이자벨 코이셋의 힘이다. 최루성분을 최대한 걷어내고 감독은 오롯이 스물세 살 그 여자에 초점을 맞춘다. ‘시한부’ 영화의 익숙한 공식은 죽음에 대해 널뛰듯 바뀌는 환자의 태도와 그에 장단 맞춰 울고불고 하는 주변 인물의 눈물 선동인데, 이 영화엔 그런 것이 없다. 오히려 무심하게 흐르는 건조한 음악과 눈을 긴장케 하는 핸디 촬영기법이 감정 고조를 저지하고 눈물샘을 진압한다. 영화 줄거리는 감독에게 그저 사건의 표면일 뿐이다. 감독의 카메라는 그 기저를 향해 깊숙이 향해 있고 여성 감독의 섬세한 손길은 주인공 앤(사라 폴리 분)의 눈길이 되어 그윽하게 세상을 본다. 그런 그녀에게 세상은 나와 무관한/할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 언제나 ‘마이 라이프’다. 다만 ‘위드아웃 미’일 뿐, 내가 없어도 세상은 나와 이어져 있다. 객관적으로 나의 의식 밖에 독립해 있는 세상이라고 객관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이 우길지라도, 그 책이야말로 객관적으로 나의 의식 밖에 존재할 뿐, 무관하고 무관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감독의 이런 생각은 종교적 세계관이 전제된 호스피스의 생각과도 다르다. 얼핏 보면 이 영화는 시한부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가는 여정을 그린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다. 호스피스의 죽음관은 ‘죽음이 끝’이라는 걸 인정한다. 그리고 환자로 하여금 그 죽음을 받아들여 평화로운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감독의 생각은 다른 듯하다. 긍정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죽음은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에 불과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녀는 죽음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삶이 충만한다. 그녀가 죽음을 삶으로 역전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그녀는 삶을 향해 걸어간 것일지도 모른다.


 

 


삶을 향한 그 여자의 여정은 이러하다. 딸들에게 사랑한다고 매일 여러 번씩 말해주기, 남편에게 조신한 신부감 구해주기, 애들이 열여덟이 될 때까지의 매년분의 생일 축하 메세지 녹음하기, 가족 모두 웨일베이 해변으로 놀러가기, 담배와 술을 마음껏 즐겨보기, 내 생각을 말하기, 다른 남자와 사랑을 한 후 기분이 어떤가 알아보기, 날 몸 바쳐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들기, 감옥에 계신 아빠 만나기, 인조 손톱 끼워보기, 머리 모양 바꾸기.

소박하고 하찮은 이런 일들이 그녀의 삶을 되살린다. 그녀는 죽기 전에 해야 할 10가지 일들을 수첩에 적어나간다. 그리고 하나씩 행한다. 그리고 그녀가 죽었을 때, 그녀가 행한 이 일들이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을 풍만하게 살찌운다. 세상은, 나의 품안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잠재적으로, 실재한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그들의 삶 속에서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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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7 14:09 2006/11/07 14:09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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