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바람은 복사열을 실어 나른다. 열풍熱風은 마이너스 한풍寒風이다. 반대도 참이다. 마이너스를 실어 나를 수 있는가? 있다. 바람이 몸소 보여준다.

바람이 던지는 질문은 차이에서 나온 질문과 같다. 차이가 없다면 '물음'은 없다. 바람이 묻는다. "더우냐?" 난 <올드보이> 이우진처럼 냉소를 흘리며 뇌까린다. "질문을 제대로 던져야지." 다시 바람이 고쳐 묻는다. "춥지 않느냐?"

춥다. 몹시.

그 사내들은 서로 달랐다. 이우진은 답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물음은 바람과 같았다. 오대수는 대답하려 했지만 종국에 대답은 필요 없어졌다. 바람이 바라는 바는 '평형'이다. 압력과 기온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마침내 평형에 이르려 하는 것이 바람이고 질문이다. 이우진의 질문은 '평형'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우진과 오대수의 평형. 종국에 등호가 성립되는 시점에서 이우진은 죽는다. 그것은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그들은 평형 상태에 도달했는가? 완전한 평형은 있을 수 있는가? 그런 것은 없다. 등호는 머리 속에서 사유된 포착이다. 삶은 영원한 부등호다. 아니 차라리 같지 않음, ≠ 혹은 비근함, ≒이다. 이우진이 죽는 순간 평형은 깨졌다. 평형에 도달한 순간, 평형은 깨진다. 더 이상 복수는 없다. 그리고 오대수는 이우진 없이 나아간다. 망각의 힘을 통해서 '사랑해요 아저씨'에 화답한다. 최면은 아버지를 아저씨로 만든다. 삶에 필요한 것은 진실만이 아니다. 오도, 오인, 왜곡과 착각이 삶에 더 필요할 수 있다. 눈밭처럼 하얗게 15년을 지우는 건 가능할까. 혹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사는 생존법의 진화한 버전이 아닐까.

그래, 정공법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떡해. 이미 저질러 놓은 삶이 있는 걸. 남아 있는 시간이 짧아서 괴로운가, 아니면 살아온 세월 때문에 괴로운가? 자명한 질문은 할 필요가 없다.

근친간이 어쩌면 가장 확실한 사랑의 방법이 아니겠느냐는 그애의 말에 난 寒氣를 느낀다. 근친간은 화끈하지 않았다. 근친간은 추운 것이다. 피와 육체의 교합, 혈연과 섹스의 동맹은 '배신'에 대한 확실한 안전판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게 가능하냐?" 우문이다. 가능성을 물을 때가 아니라 이유를 물어야 할 때다. 근친간에 대한 욕망은 적대 때문이다. 산낙지를 씹어 먹는 세상은 더운 피의 영속성에 보험 들게 만드는 거다. 그 보험이 보험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출구가 없는 사람들에겐 눈 가리고 하는 아웅도 보약이며 국민연금보다 든든하다.

세상은 이런 몸부림조차도 합천댐으로 몰아 세웠다. 그 입 다물라! 댐에서 발원한 복수심이 평생을 흘렀다.

세상이 잔혹하면 복수가 상석에 앉는다. 복수의 빛나는 총탄으로, 뭐 어떠한가. 잔혹할대로 잔혹해진 세상에 무릇 모든 복수처럼 이 복수도 잔혹했지만, 세상에 복수가 쉬운가. 영화니까 가능한 거다. 영화의 잔혹함은 차라리 앙증맞다. 되갚음은 미래 시제의 다짐일 뿐, 좀처럼 현재가 되지 못한다. 되갚음은 빚이다. 빚 갚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잘 만든 영화는 잘 쓴 문장을 볼 때처럼 화가 난다. 살리에르가 그러했듯 찬사보다 태생에 대한 원망이 앞선다. 왜 있잖은가, 신을 원망하던 그 대사들. '왜 이렇게 낳으셨나이까!' 우정의 유목주의는 슬로건이지 결코 육화된 내 체질이 아니다. 그래, 난 겉 다르고 속 다르다. 감탄보다 시샘이, 배움보다 자학이 앞선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카피조차 질투한다. 이래서 되갚을 수 있을까. 복수는 나의 것일 수 있을까.

바람은, 안다. 바람이, 가르쳐 준다. 바람은, 되갚음의 방식으로, 플러스에 대한 마이너스로, 마이너스에 대한 플러스로 평형에 도달하지만, 그건 '양'으로 측정될 수 없는, 그래서 '앙갚음'이 아닌 계속 비움으로써만이 가능한 되갚음, 잔혹하지 않은 운동이다. 바람은 예측하지도, 계획하지도 않는다. 비우고 비워 비움조차 비워야 분다.

바람이, 참으로 바람이 중요한데, 미적지근한 오후의 끈끈한 훈풍이 암담하다. 내 허파는 왜 숨을 쉬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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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7 14:05 2006/11/07 14:05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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