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 줄리아'의 세 가지 의미와 우리의 빙being
양돌규
<빙 줄리아>(Being Julia, 2004)는 2차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인 1930년대 영국의 화려무비한 런던 극장가로 우리를 옮겨놓는다. 무대의 주인공은 줄리아(아네트 베닝 Annette Bening 분). 그녀는 영국 변방 채널 제도(Channel Islands)에 속해 있는 저지 섬 출신으로 무명의 여우에서 출발했지만 오래 전 유명을 달리 한 연극 스승 지미 랭튼(마이클 갬본 Michael Gambon 분)의 지도와 그녀 자신의 열정으로 탑 배우의 위치에 오른다. 하지만 갈채와 커튼 콜에 가려진 그녀의 삶은 권태롭기 그지 없다. 요컨대 무대 뒤에서 이어지는 그녀의 인생은 무대 위의 인생과는 다른 것이다. 무대가 그녀의 직업적 전장(戰場)이라면 무대 뒤는 그녀의 생활의 전장이다. 두 전쟁터는 서로 다른 줄리아를 요구하고 또한 다른 프로토콜에 따라 움직인다.
스타덤에 오른 성공의 외양과는 달리 그녀는 두 전쟁터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두 삶을 모두 해내기 위해 위험한 줄타기를 감행한다. 무대에서의 열정을 위해 젊은 미국 청년 톰과 애정행각을 벌이기도 하고 톰에 대한 집착과 질투에 괴로워하다가 무대 위로 달아나기도 한다. 무대와 일상은 그녀에겐 자전거 페달과도 같은 것이다. 두 페달은 끊임없이 엇갈리고 밀어내지만 멈출 수가 없다. 페달을 밟아야 고공의 한 가닥 외줄에서 떨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외발 자전거가 미끄러지듯 그녀의 삶도 이어지지만 무릇 삶이란 곡예하듯 위태롭기만 해서는 괴롭기 마련이다. 중심을 잡는 것에만 몰두하다가 어느샌가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때 직시할 필요가 있다. 바로 자신 스스로에게 말이다.
줄리아의 눈에 들어온 풍경이란 가령 이런 것들인데, 극장 제작자인 남편 마이클 고슬린(제레미 아이언스 Jeremy Irons)은 점잖고 품위 있는 유능한 사업가이지만 그 뒤로는 영리만 밝히고 부부애가 없는 그리고 젊은 신인 여배우 에이비스 크라이톤(줄리엣 스티븐슨 Juliet Stevenson 분)과 바람난 사내다. 또한 권태의 늪에서 구해내 가슴 속에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겉보기에 투명하고 순수한 미국 청년 톰 펜넬(샤운 에반스 Shaun Evans 분) 역시 뒤로는 에이비스 크라이톤과 연애를 즐기며 그녀의 배역을 줄리아에게 청하는 가증스럽고 뻔뻔한 면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이들에 둘러싸인 줄리아에게 충고와 고언을 하는 애정어린 시선들도 없지 않은데, 아들 로저(Tom Sturridge 분)는 그녀에게 무대 위와 커튼 뒤의 삶의 일치에 대해 충고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로 하여금 자전거 페달을 멈추고 자신의 두 발로 그네를 뛰듯 사뿐하게 걸음을 내딛게 하는 이는 작고한 스승 지미 랭튼이다. 지미 랭튼은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는 줄리아의 분신이기도 하면서 또한 아니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는 그녀의 내면에 위치하면서도 밖에 위치한 그런 존재로 성찰과 반성을 가능케 하는 자의식 자체에 다름 아니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선 존재로서의 지미 랭튼은 자전거 두 페달 사이에서 동요하지만(그것은 줄리아의 동요이기도 한데) 궁극적으로 그녀 자신이 무대 안팎을 자신의 삶으로 재통합시켜내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이 스스로를 배반하고 자꾸만 자기 자신과 괴리시켜낼 때, 그것을 이겨내는 방법은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찾을 수밖에 없다는 다소 뻔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말해준다.
영화가 결말로 치달을 수록 우리는 초반의 지루함과 클리셰한 느낌을 털고 줄리아에게 몰입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그녀가 열연하는 새 연극의 초연에서 마치 시원한 맥주 한 파인트를 입안에 털어내듯 호쾌한 느낌을 맛볼 수 있다. 그것은 그녀의 연기가 연기가 아닌 진짜 삶의 그네에 올라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무대의 안과 밖의 경계는 사라져버리고 그럼으로써 자기 삶이라는 진짜 연극에서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 당당하고 거침없이 스스로의 삶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제62회 골든 글로브(2005) 뮤지컬, 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아네트 베닝의 연기는 반짝반짝 빛난다. 'being Julia'라는 제목의 의미가 '줄리아다움'과 becoming의 의미로서 '줄리아되기'라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는 씨네21 기사의 분석은 탁월한데, 관객으로서의 우리들은 한 가지 의미를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아네트 베닝의 줄리아 되기'이다. 만약 이 영화를 보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삶에서 당당한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자극을 받는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아네트 베닝의 호연에 기대는 바가 클 것이다. 문제는 영화가 막을 내린 후 '줄리아'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신의 다양한 삶의 전장에서 being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 것이냐에 있다. 그건 영화의 교훈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삶의 당위이며 저 높은 곳에 걸린 초월적 명제가 아니라 늘상 부딪히는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