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certified copy는 <사랑을 카피하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개봉한다.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증명서>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1. 이 영화는 줄거리나 영화 소개를 알고 보면 재미 없어질 수 있다. 스포일러가 있으면 재미가 반감되는 영화다. 마지막 반전이 있다고 할 순 없겠고. 중간쯤부터 반전이 있다. 그래서 더욱 영화 내용은 모르고 보는 게 낫다.
2. 하지만 영화 스토리의 구조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극명하게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닮은 영화는 <비포 선셋>이다. 에단 호크가 작가가 되어 파리의 고서점('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 사인회를 열고 그곳에서 줄리 델피를 만나 하루 동안 파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시종 일관 대화를 나누는 영화. 물론, <사랑을 카피하다>는 그게 전부는 아니다.
<비포 선셋>과 마찬가지로 영국 작가 제임스 밀러(윌리엄 쉬멜 분)는 자신의 책 출판을 기념해 이탈리아 투스카니에서 강연회를 연다. 이곳에서 그는 한 여성(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줄리엣 비노쉬 분)의 전화번호를 건네 받고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프랑스인으로 그의 책을 6권이나 샀으며, 자신이 경영하는 골동품 샵에 초청해 함께 드라이브를 떠난다.
영화 속의 장소 이동,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보다는 둘의 대화에 매료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3. 줄리엣 비노쉬가 출연하게 된 일화가 재밌다.
프랑스의 여배우 줄리엣 비노쉬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쉬린>(2008)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인 중 하나로 카메오 출연을 약속하고 이란을 찾았다. 그녀의 남는 시간을 위해 이스파한(이란의 대표적인 페르시아 유적지)의 여행 가이드를 자처하고 나선 키아로스타미가 여행 중 차 안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이라며 문득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그걸 다 듣고 신기해하는 비노쉬에게 키아로스타미가 진지하게 물었다. 이게 실화라는 걸 믿을 수 있겠나. 그녀가 그렇다고 하자 키아로스타미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그건 실화가 아닐세. 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것인가…. 어느 쪽이 진실이건 이 한 토막의 진위 게임으로 키아로스타미는 비노쉬의 흥미를 충분히 끌었고,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꼭 출연하겠다는 그녀의 약속을 그 즉시 차 안에서 손가락 도장으로 받아냈다. <서티파이드 카피>의 탄생 일화다. (씨네21 2010-02-11)
4. 줄리엣 비노쉬는 이 영화로 칸느에서 여우주연상(2010)을 수상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본격적으로 해외에서 처음 찍었고, 자신이 각본을 쓰지 않은 첫 영화라 한다. 그래도 '여정'에 주목하는 영감님의 시선은 여전하다. 그 '여정'의 끝이 어디인지는 명료하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5. '보증된', '공인된'이라는 뜻을 가지는 'certified'라는 단어가 흥미롭다.
최근 내가 생각하는 주제와 잇닿아 있기도 하다.
영화 속에 잠깐 나오는 어떤 초상은 로마시대 초상으로 오랫동안 믿어져 왔는데,
불과 50여 년 전에 그것이 사실은 복제품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이런 경우가 한 둘인가.
유럽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동굴벽화가 알고 보니 그 마을 노인들이 어릴 적 그려놨던 낙서였다던가.
어느 시점에서 다중이 믿고 있고 진실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뒤집히기도 하고,
또 그와 같은 사실을 보증하던 전문가집단의 학설이 상상의 소산이었다는 게 밝혀지기도 한다.
그 '여정'의 끝은 영화처럼 명료하지 않은 것 뿐이기만 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