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보이는 창 44호 2005년 6, 7월호

 

남해바다에서 스치다  


형, 이 편지를 보내게 될까요, 아니면 그저 썼다가 다이어리 갈피 속에 넣어두게 될까요? 편지를 다 써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제 친구들과 시내에 나갔습니다.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얗게 핀 벚꽃이 점점 지고 있었습니다. 빨간머리 앤을 기억하세요? 주제가와 함께 흩날리던 꽃잎들, 분수처럼 솟구치던 꽃잎들. 하지만 제 기분은 앤처럼 달뜨지 못했답니다. 제게는 벚꽃이 지는 게 왜 이리도 슬픈지요. 꽃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처럼 또는 이제 기억나지 않을 사람처럼 그렇게 떨어집니다. 거리마다 붐비는 사람들 모두 꿈길을 걷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가는데, 저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까닭 없이 서럽고 또 아팠습니다. 가끔씩은 눈물이 나기도, 기억이 나기도, 떠올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별것도 아니라는 것을 문득 깨닫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눈물도 나고, 가슴에 피가 나기도 하고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울어보기도 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참 나약해서 이렇게 술에 기대어 끄적거리나 봅니다.

형이 계신 곳은 어떤가요? 그곳에서도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나요?
형과 헤어지고 형이 걷는 모습을 쳐다보다 전 돌아서서 터미널로 향했습니다. 경주행 버스에 올라타 늦은 오후가 되어 경주에 도착했지요. 소주 한 병을 사서 황룡사 터에 갔습니다. 소주가 맑고 맵기를 바라며 한 모금 축였을 때, 들녘 너머 석양이 빨갛게 타올랐습니다. 황룡사터에서 그렇게 두세 시간쯤 있었나봅니다. 금당이 섰던 자리에는 부처님을 세워뒀던 커다란 주춧돌이 있었습니다. 네모난 두 개의 큰 구멍에 발을 끼웠을 테지요. 제 발로 서지 못해 주춧돌을 필요로 했던 부처님, 아무리 큰 부처도 그렇게 지지해줄 무엇이 필요했었나 봅니다. 하물며 인간 따위가 제 발로 서기가 쉽겠습니까. 이제 와서 얘기지만 형은 제게 그런 주춧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전 혼자이지요. 폐사지의 적막처럼 누구도 저를 잡아줄 수 없음을 잘 압니다. 스스로 탑이 될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리 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이럴 때 형이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점점 나아지겠지요. 그러길 빌어야겠지요. 넋두리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여전히 이 편지를 부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군요. 건강하세요. 술잔에 벚꽃잎을 띄울 날이 있겠지요.

― 1999년 윤지가

 

1. 주관적 겨울


계절은 주관적이다. 사시사철 겨울인 이에게 사시사철이란 본디 의미가 없으니, 무상하고 또 무상하다. 계절은 그저 바람과 같아서―, 라고 말해두고 싶다. 바람은 이름이 없으며 눈금도 없다. 바람은 흐르고 또 흐른다. 계절도 그렇지 아니한가. 흐르고 또 흐르는 것, 멈춤이 없고 그래서 멈춰있는 것과 같다. 계절은 영원하다.

어디 계절만 그러한가. 많은 것들이 또한 바람과 같다. 사랑은 그저 바람과 같아서―, 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인생은 무릇 바람과 같아서―, 라는 말도 가능하리라.


그렇게 무상하게 계절을 바라보는 이에게도 봄날이 다가오지만, 그 봄날이 지나가면 다음 계절은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다. 그래, 다시 계절은 주관적이다. 사시사철 겨울인 이에게 본디 의미 있는 것은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자기 자신이리라.

 

2. 남해바다에서 스치다


윤지가 내게 편지를 보냈을 때, 난 어느 계절을 건너고 있었을까? 네 인생을 짧게 논하라, 고 문제를 낸다면 나는 ‘짧았던 여름, 그리고 나머지는 긴 겨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확률상으로 저 편지의 시점도 겨울이었을 것이다.

으레 사람들은 겨울을 혹독한 계절로 비유하곤 한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진눈깨비가 날리며 칼바람이 살을 에이고 아무것도 피어나지 않는 황무지 같은 계절. 하지만, 겨울은 그 자체로 혹독한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대설주의보니 눈사태니 하는 것들은, 다시 힘주어 말하지만, 무릇 사건들은, 모두 다, 인간들이, 지어낸 것, 에 지나지 않는다.

 

내게 겨울은 평온했다. 뜨겁지 않은 모든 것이 겨울이다. 지구의 시간도 그렇다 하지 않던가. 이른바 빙하기란 지금보다 불과 섭씨 몇 도밖에 낮은 기온이 아니었다고. 빙하기의 여름은 여름답지 않았을 것이다. 도무지 열정을 제 자신으로부터 끌어낼 수 없는 시간이란 모두 빙하기인 것이다. 여름이 동해바다 수평선을 따라 치솟는 높고 거센 파도라면, 겨울은 남해바다 섬들 사이 호수처럼 쓸쓸한 만조일 것이다.

 

그 겨울 어느 때쯤엔가 윤지를 만났었던가. 줄거리는 없었다. 만날 수밖에 없던 필연도, 계기도, 우연도, 아무것도 없었다. 있었다면 그건 그저 스쳤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십 년 전 혹은 그 훨씬 전에 어떤 연주회를 갔을 때 그녀도 거기 있었다, 그러나 그저 스쳤고, 그날 찍은 사진 한 장 달랑 남았을 뿐인데, 십 년 후 혹은 그 훨씬 이후에 그녀를 알게 되고 얘기를 나누다가, 같은 연주회, 같은 시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집에 돌아와 사진을 찾아보니 그날 찍은 사진 속에 스치듯 지나가는 행인1 혹은 행인2쯤이 그녀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우리 언제 자기 앨범 속에 스치다 멈춰버린 무수한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는가. 그저, 이 사람만 없었으면 사진이 더 좋았을 텐데, 라고만 하지 않았던가.

 

윤지는 그렇게 두 번째 만남이 첫 번째 만남이었던 행인1 혹은 행인2였다. 꽤 오랜 동안, 종일동안, 매일, 수다에 수다를 거듭하고, 별나라와 지구 세계의 생사, 성속, 의미와 무의미 혹은 간(間)의미에 대해 때론 억지와 치기로 때론 사명감 어린 어조로 얘기를 나눴던 듯하지만, 알 도리는 없다. 그것이 망각의 힘이고, 그래서 남은 건 이 편지 한 장뿐이다.

 

3. 천 개의 관음

 

내 생을 두고, 열심히 달렸던 듯하다, 라고 난 말하지 못한다. 허덕, 터벅, 헐떡거리며 때론 기고 때론 걸었고 또 때로는 시간에 그저 몸을 싣고 소일했다는 편이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어쨌든 러닝머신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는 않았다. 대견하다. 하지만 눈을 들어 돌아보니 그저 제자리이다. 러닝머신의 법칙이다. 오랜 시간 벨트에 실렸던 그 시간이, 바로 지금 이 풍경 속에 그대로다. 그리하여 추억이란, 무량수한 과거를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는 걸 바로 지금 확인시켜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편지도 그 추억과 같다.

 

난 여전하다. 여전히 겨울이다. 황룡사 폐사지 드넓은 벌판에 소복이 쌓인 벚꽃 같은 설원에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느낌으로 숨을 쉰다. 멀리 반월성을 배경으로 첨성대가 별을 가리키고 그 별이 나를 위무(慰撫)하는 세월 속에 내가 앉아 있다. 이런 내가 어떻게 장육존상을 세워주는 주춧돌일 수 있겠는가. 제 발로 서지 못해 늘 발을 끼워 나를 지탱할 바위를 찾아 헤매었다. 윤지 또한 내게 한때는 주춧돌이었다. 인간이란 서로에게 그러하다. ‘人’. 시효가 만료하면 떠나지만 그러기 전까지 서로는 서로에게 기대어 탑을 세운다.

이제 서로 더 이상 주춧돌이 아니기에, 다시는 윤지와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추억’이 그러하듯이, ‘편지’가 그러하듯이, 어떤 이에게서 나를 느낄 것이고 나 역시 그러할 것이다. 무수한 내가 어떤 이들 안에 있을 것이고 무수한 윤지를 다른 이들에게서 발견할 것이다. 살다 보면 문득 낯선 이에게서 그 누군가를 느끼게 된다. 불에 탄 낙산사, 화마에서 무사했던 관음보살이 그러하다던가.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천 개의 팔로 우리를 보듬는다는 관음. 우린 늘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살지 않는가. 관음을 알아보는 밝은 눈을 가지게 되는 날, 우리 서로에게 관음으로 현시한 것일 테니, 비로소 제 발을 기단으로 삼아 탑이 된 것일 테니, 그 순간 겨울은 물러가고 벚꽃 환한 숲에 앉아 술 한 잔에 꽃잎 띄워 영원한 과거로 또는 미래로 침잠해도 좋으리라. 봄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4/06 14:01 2007/04/06 14:01
글쓴이 남십자성
태그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blog.jinbo.net/redgadfly/trackback/26

댓글을 달아주세요


BLOG main image
남십자성입니다. 트위터 : @redgadfly 페이스북 : redgadfly by 남십자성

카테고리

전체 (142)
잡기장 (36)
삶창연재글 (15)
무비無悲 (15)
我뜰리에 (3)
울산 Diary (7)
캡쳐 (4)
베트남 (33)
발밤발밤 (18)
TVist (10)
탈핵 에너지 독서기 (1)

글 보관함

달력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전체 방문자 : 467245
오늘 방문자 : 31
어제 방문자 : 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