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14일(일요일, 22일차) : 하노이

 

- 아침에 은행에서 2,000,000VND을 찾았다.


- 그리고서 추옹극장 앞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오늘도 배드민턴 치는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이 카페는 장사가 잘 된다. 바나나 잎으로 싼 떡을 사먹었다.
 

- 결국 호텔을 바꿨다. 체크아웃하고 부랴부랴 짐을 싸서 나왔다. 애플호텔로 갔다. 하루 8달러짜리 방이었다. 싸지만 시끄럽고 열악했다. 하노이 물가를 생각하면 대안이 없었다. 이 호텔은 우리가 빨래를 맡겼던 호텔이었고 뚱뚱한 지배인으로부터 하롱베이, 싸파 투어에 대한 설명을 듣기도 했던 곳이다.
 

- 호텔에서 나와 서둘러 혁명박물관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 공원의 공중화장실을 들렸다. 1,000VND이라 해서 500VND짜리 동전 두 개를 줬는데 동전이라 안 받는다고 한다. 쓰지도 않을 화폐를 왜 찍었을까? 나중에는 일본 관광객 버스가 도착했는데 아줌마 하나가 빨리 안 나온다고 베트남 말로 화를 내서 황당했다.
 

- 혁명박물관은 여느 박물관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옛 호아로 수용소 사진,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된 사진 등 수많은 역사적 기록들과 옛 베트남 금성홍기, 디엔비엔푸 전투 때의 사진들, 그리고 디엔비엔푸로 식량을 나르는 모습을 찍은 사진들, 그리고 그때의 자전거 등이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다른 박물관들과 대동소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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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실 때문에 인근 서점에 갔다. 우리가 베트남 교재를 샀던 서점이다. 인근 껌빈잔 집이 영업을 하지 않았다. 당 뚜이 쩜 일기 베트남어판과 하노이 지도를 샀다. 그리고서 카운터의 여직원에게 당 뚜이 쩜의 묘지에 대해 물었다. 그 여성은 다른 청년을 불렀다. 그가 자세히 가르쳐줬다. 9번 시내버스를 타고 O Cau Giay에서 내려 32번 버스로 갈아타라고 했다.
 

- 서점을 나와 길거리에서 분짜를 먹었다. 옆 자리에는 공사장에서 일하는 듯한 베트남 아저씨들이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먹는지 가르쳐줬다. 자신들이 주문한 두부도 나누어줘 함께 먹었다. 분짜는 굉장히 맛있었지만, 한국인인 내가 느끼기로는 국물이 너무 적었다.
 

- 여성박물관을 들렸다. 이곳은 점심시간에도 관람이 가능하다. 베트남여성연합의 역사에 관한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여기엔 각종 구술을 받은 증언들과 사진 등이 있어 전시 기법이나 기획에 있어 훨씬 다채롭고 세심한 노력의 흔적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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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여성박물관 상설 전시는 약간 황당했다. 소수민족 의복 전시나 결혼 풍습에 관한 전시관은 왜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것들은 따로 모아 민속박물관 같은 걸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상설 전시 중 볼 만한 전시관은 베트남 독립운동과 전쟁 당시 여성 게릴라들의 활약상을 담은 전시관이다. 이곳에는 프랑스 치하, 미국과의 전쟁기의 남과 북의 베트남 여성 전사들의 활동들을 담고 있다. 수많은 여성 투사들의 삶과 유품, 관련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다른 박물관과 내용적으로는 차이가 없을지라도 훨씬 그 수준이 높았다. 여기서 우리는 당 뚜이 쩜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가 남긴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그녀의 삶이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 당 뚜이 쩜(Dang Thuy Tram). 1942년생. 그녀는 1967년 하노이 의대를 졸업하고 꽝나이의 뚝포 전선으로 뛰어든다. 부상당한 병사들과 주민들을 치료하던 그녀는 1970년 6월 22일 사살당한다. 그때 미군은 작전을 마친 뒤, 베트콩의 유류품들을 정리하고 소각했다. 그런데 한 미군이 그녀의 일기장을 챙긴다. 곁에 있던 베트남 통역관이 “그건 태우지 말라”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30여 년이 훨씬 지난 뒤, 노인이 된 이 미군은 그녀의 일기를 번역해 영어판으로 출판하고 난 뒤, 원본을 돌려주기 위해 당 뚜이 쩜의 부모를 찾아 나선다. 그녀의 어머니는 생존해 있었다. 뒤에 그녀의 어머니도 미국으로 초청되기도 한다. 원본이 베트남에 전해지고 뒤이어 그녀의 책은 베트남어판으로 출판돼 공전의 히트를 치며 베스트셀러, 또한 스테디셀러가 되고 TV를 통해 극화되어 그녀의 이름은 베트남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 박물관 직원들에게 그녀의 묘지로 가는 길을 물어보니 주로 호안끼엠을 중심으로 나와 있는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새로 산 지도에도 보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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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성 열사 Liet Si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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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아로 수용소는 옆에 새로 지은 빌딩 때문에 많이 허물었고 일부만 남아 있다. 원래 호아로 수용소 자리에는 절이 있었고 도자기를 생산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이 수용소를 지었다. 담장에 박힌 유리 조각들이 인상적이었다. 수용소에는 당시 갇혀 있던 베트남 투사들의 모형이 있다. 한쪽 발목을 잠금장치로 묶인 채 토론하고, 아픈 사람을 돌보는 모습들. 징벌방처럼 보이는 곳도 보였다. 길로틴도 하나 전시되어 있었다. 길로틴 곁에는 프랑스에 의해 효수 당한 이들의 머리를 담던 바구니와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었다. 전시실을 나오면 바깥에는 옛날 독립투사들이 호아로 수용소를 탈출하기 위해 땅굴을 파고 탈옥했던 구멍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우리네 서대문 형무소와 비교할 수 있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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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의 옛 도자기, 옛 회화는 시간이 없어서 건너 뛰었다. 1900년대 초중반부터 시작된 근대 미술은 한국 근대 회화와 유사해보였다. 하지만 나중에 독창적인 방식의 장르가 출현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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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관을 나와서 그 안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20,000VND×2명=40,000VND. 비쌌다. 그러나 그곳 웨이터에게 물어서 당 뚜이 쩜 묘지 가는 법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스마트하고 영어도 잘하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잘생긴 남자 보기가 어찌나 힘든지. 미술관에서는 17시부터 어떤 행사가 열렸다. 미술계의 원로인 듯한 사람이 나와서 연설을 했고 뒤에는 아오자이를 입은 여성들이 꽃다발과 상을 들고 있었다.
 

- 호텔로 돌아와 호텔 앞에서 맥주(비아 허이)를 마셨다. 많이 마셨다. J는 방에 들어가고 비아 하노이 2병을 사서 마셨다가 다시 비아 허이를 마시러 나와 혼자 2잔을 마셨다. 그 가게 아들(23세), 조카딸(16세)과 얘기를 나눴다. 나중에는 네덜란드 부부도 함께 합석해서 마셨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가본 적이 있다는 얘기를 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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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6 09:13 2010/12/16 09:13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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