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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 발췌독 (가와이 하야오, 나카자와 신이치 공저)

(16-21쪽에서 발췌)

 

 

크리스트교에 대한 위화감

 

나카자와 : 저는 [성서]는 무척 좋아합니다. 예수에 대해서도,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인 갈릴리 시대의 예수는 매우 좋아합니다. 그 당시 예수는 거의 '불교'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사상을 아름다운 말로 표현했지요. 하지만 십자가는 실어합니다. 물론 예수도 싫어했겠지만요. 대중의 어리석은 기대에 휩쓸리고 만 예수가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중은 그 모습이 보고 싶어서 기대에 부응해 일을 추진하려 했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 체험은 트라우마가 되어 침잠하고 말았죠. 그리고 거기서 종교가 발생한 셈입니다. 저는 외상성 신경증에서 발생하는 종교는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갈릴리 호반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을 때의 예수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 감동은 붓다가 설법할 때의 광경을 방불케 하죠. 붓다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평범하게 죽어갔지요. 배탈이 나서 죽었으니,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셈이지만 붓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듭니다.

 

가와이 : 나도 그런 점을 좋아해요.

 

나카자와 : 불교의 어떤 점에 관심이 있었는가 하면, 선생님께서 조금 전에 '풍토'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역시 그것과 관계가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전에도 선생님께 말씀드렸을지 모르지만 저는 처음에 원숭이학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원숭이학자가 원숭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사진에서 묘한 감동을 느낀 적이 있었지요. 인간과 동물 사이에 거의 거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둘의 관계가 대칭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지요. 붓다가 깨달음을 얻을 때도 설법을 할 때도 반드시 동물들이 붓다 주의로 모여들지 않습니까?

 

가와이 : 네 그렇지요.

 

나카자와 : 열반에 들었을 때도 제자들보다 더 많은 수의 동물들이 찾아와서 슬퍼하죠. 불교 주위에서는 항상 이런 대칭 관계가 전면에 나옵니다. 인간과 동물이 대칭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동화적 혹은 신화적인 광경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인간과 신 사이에 어떻게 하면 엄청난 비대칭의 관계를 형성할 것인지에 전력을 쏟아왔는데, 오로지 불교만이 대규모의 종교이면서도 대칭적 관계를 중시해왔죠. 물론 유대교나 이슬람교, 크리스트교도 신 앞에서의 인간의 평등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신과 인간 사이의 엄청난 비대칭을 전제로 한 평등인 셈입니다.

 

가와이 : 절대적이죠.

 

나카자와 : 예수가 받은 십자가형의 의미도 이 절대적인 비대칭을 전제로 하고 있죠. 유대교에서는 신과 인간 사이의 비대칭이 거의 절대적이어서, 명령을 받을 뿐 상호간에 사랑의 교류 같은 것이 발생할 여지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크리스트교에서는 예수가 스스로 희생함으로써, 사랑의 유동流動이 일어날 수 있는 회로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가와이 : 그렇군요.

 

 

일신교가 형성하는 인간과 신의 비대칭적 관계

 

(...)

 

나카자와 : (...) 그것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가 고대국가의 동반자로 탄생해서 국가의 개념에 필요한 엄청난 비대칭을 가장 중요시해왔던 셈인데, 그런 종교의 역사를초월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가 국가를 초월하는 것이 종교의 미래 과제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대칭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겠지요.

 

가와이 : 그렇지요.

 

나카자와 : 조셉 캠벨이 미래의 종교는 불교에 접근하게 될 거라고 한 말도 이 점과 관계가 있지 않을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대담을 9.11테러 직후인 지금 시작하려고 하신 걸 보면, 선생님께서는 그런 것을 이미 의식하신 게 아닌가요? 미국과 이슬람 원리주의의 관계, 그것은 압도적인 비대칭의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죠.

 

가와이 : 그런 셈이죠.

 

나카자와 : 미국은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에서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은 매우 가난합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이런 압도적인 비대칭 관계가 이번 테러의 원인 중 하나인 셈이죠.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트교는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 제물로 바치는 듯한 행동으 취할지도 모르지만, 이슬람은 그것을 부정하겠지요. 테러와 희생의 사상은 매우 비슷합니다. 둘다 비대칭을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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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쪽 발췌)

 

 

종교와 과학의 접점

 

(...)

 

나카자와 : (...) 저 역시 과학과 종교를 매개하는 장소에 설 수 있는 것이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가능합니다. 왜 불교가 그런 역할을 할수 있는가하면, 불교는 '야생의 사고'에서 발달한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과학이라고도 할수 있으니까요. '야생의 사고'와 과학은 본질적으로는 대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아니 대립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이제까지 과학이 이룩한 성과를 전부 준비한 것이 바로 '야생의 사고'인 셈입니다. 부싯돌을 가공하는 신석기인들의 사고와, 연구실에서 최신 실험기구를 가지고 실험하는 현대 과학자의 사고는 결국은 똑같은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고고학에서 밝혔듯이, 약 3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대뇌 구조는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구의 현대과학만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발달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이 본래 갖고 있는 과학이나 기술 능력과, 현대과학으로서 비정상적일 정도로 발달한 것 사이에는 어떤 다른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바로 그 다른 요소가 그리스나 크리스트교와 관련이 잇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크리스트교적인 어떤 요소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과학기술은 현대와 같이 급속도로 발전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인 거죠.

 

가와이 :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자주 거론되는 이야기지만, 근대과학은 유럽에서 발달했다기보다 크리스트교 문화권에서만 발생했죠. 중국의 역사와 문명을 연구한 니담이 말했듯이, 지식은 중국인들도 많이 갖고 있었죠. 하지만 지금의 기술과 연결되는 과학기술은 특별히 크리스트교 문화권에서만 발생한 셈이지요. 이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이야기해왔듯이, 크리스트교 문화권의 신은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라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겁니다. 말하자면 신을 대신해서 인간이 자연에 대해 '모든 걸 내가 한다.'라는 사고가 탄생한 셈이 아닐까요?

 

나카자와 : 그렇지요. 본래 동물이나 자연은 신이었으니까요. 그러니 틀림없을 겁니다. 구석기 시대의 유적을 봐도, 곰이 신이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이누어로도 '카무이'는 곰이며,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 즉 신과 동일한 단어로 표현되었지요. 곰이 신이었던 시대의 신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가와이 : 그렇겠죠.

 

나카자와 : 숲 속에 살면서 가을에는 강에서 인간과 똑같이 연어를 잡기도 하죠. 때로는 인간에게 곰의 고기와 털가죽을 가져다주는 친절한 '할아버지' 입니다. 이 곰 안에 처음부터 깃들어 있던 '초월성의 씨앗'이 어느 틈엔간 성장하고 거대해지면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죠. 그 씨앗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제 직감으로는 그 비밀은 샤머니즘 안에 있는 듯 합니다.

 

가와이 : 그건 어째서죠?

 

나카자와 : 아직 이것은 단순한 직감일 뿐입니다만, 어떤 미개사회에선 샤머니즘 과 야생의 사고는 공존하고 있습니다. 신화의 논리에 의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행위와, 초월적인 영역과의 시도하는 샤머니즘은 완전한 공새관계에 있는 셈이죠. 그런데 어느 시기가 되자 갑자기 야생의 사고가 미치는 영향력이 축소도기고 샤머니즘이 확대되기에 이릅니다. 이런 변화는 아무래도 국가라는 문제하고도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샤머니즘에 의한 패권의 확대는 아시아의 고대국가에서 최초로 발달했지요.

 

가와이 : 그렇군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슬람교와 샤머니즘의 관계

 

나카자와 : (...) 실제로 평소에는 상인이었던 모하메드도 그야말로 소박한 성격의 파트타임 샤먼과 같은 면을 갖고 있지요. 그렇게 소박했던 이슬람교가 고도의 종교로 성장하게 된 때는 13세기 즉 몽골제국과 격돌했던 시기입니다. 이때를 경계로 이슬람교는 소박한 종교로서의 성격에서 탈피하는데, 묘하게도 같은 시기에 전세계에서 종교사상의 혁명적인 비약이 일어나죠. 일본에서도 몽골제국과 접촉하면서 그 영향으로 가마쿠라신불교가 나타났지요.

 

가와이 : 그거 재미있는 지적이군요,

 

나카자와 : 가마쿠라신불교의 내부에서 정토진종과 같은 일신교에 가까운 종교가 탄생한 셈입니다. 그와 비슷한 현상이 전세계에서 일어났죠. 티베트 불교도 이때 비약적으로 진화했습니다. 유럽에서도 크리스트교 신학이 경이적으로 발달하죠. 그 때까지 아랍 세계의 사람들은 그리스철학을 번역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는데, 몽골제국과 충돌한 이후 자신들의 신학을 만들어냈던 겁니다. 놀라울 정도로 수준 높은 것을 만들기 시작했지요. '알라'가 '진여'와 거의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관념의 세계로 올라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라고 이즈쓰 선생님은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몽골제국의 종교란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하면, 국가적 규모의 거대한 샤머니즘이었지요. 실제로 몽골제국이 석권한 지역에서는 야생의 사고 낳은 결과라는 의미의 신화는 거의 전멸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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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쪽 발췌)

 

 

불교는 어떻게 해서 탄생했나?

 

(...)

 

나카자와 : 불교가 어떻게 탄생했는가에 대한 일본이늬 연구 중에서는 미야자카 유쇼 선생님의 [불교의 기원]이 매우 선구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요. 불교는 마가다 왕국이라는 고대 제국의 외곽에서 탄생하여 제국을 안에서부터 부정하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위의 책에 따르면, 붓다가 최초로 만든 불교 교단 '상가Samgha'는 본래 붓다의 출신 부족 즉 사카족의 거주지인 히말라야 산록지대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던, 수장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의 성격을 띤 원原국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절대로 거대한 죽가는 이루지 않는 공동체의 원리를 복원하려 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 미야자카 선생님의 생각이죠. 불교를 제국 안에서 제국을 부정하는 사회 원리를 만들고자 하는 운동으로 생각한 거죠.

 

가와이 : 과연 미야자카 선생님답군요.

 

나카자와 : 붓다는 "나 이전에 일곱 명의 붓다가 있었다."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작은 부족국가의 전통 속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지혜있는 사카족 사람들이 자기 이전에도 일곱 명이나 있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자신은 전혀 새로운 설법을 한 것이 아니라 그런 붓다들 중의 하나라는 겁니다.

붓다라는 인물이 그런 사상을 갖고 갠지스 강가로 갔더니 거기에는 마가다 왕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있었습니다. 이 국가를 통해 그는 제국이라는 것이 지혜를 해체하고 여러 모로 균형을 깨뜨리고 있는 현실을 보았지요. 제국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종류의 철학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도철학 가운데 그 어느 것을 봐도 모두 어떤 식으로든 제국원리와 공범 관계에 있다는 걸 발견했지요. 따라서 해체되어가는 지혜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 철학은 아니라는 사실을 붓다는 깨달았지요. 철학은 단지 세계를 해석하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해석의 철학을 부정하고 그것들을 전부 초월한 실천의 형태를 만들고자 했지요. 법(法, Dharma)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상가의 사회 원리도 그런 도전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가와이 : 제국주의와 전혀 관련이 없는 종교죠.

 

나카자와 : 제국의 내부에 존재하고 젝국도 붓다의 가르침을 비호했지만, 제국의 원리를 안에서부터 해체해간 셈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탈구축脫構築의 원리에 의한 '종교가 아닌 종교', '지혜로서의 비종교'가 만들어진 거라고 할 수 있죠. 붓다는 그런 식으로 종교 아닌 종교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아까 선생님께서 과학기술의 세계 안에서 살고 있으면서 과학기술과는 다른 지혜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불교가 아닐까?'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바로 그런 것을 붓다가 하고자 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와이 : 그건 어떤 의미죠?

 

나카자와 : 사카라는 작은 왕국은 얼마 후에 마가다 왕국에 의해 멸망당하죠. 작은 부족왕국은 전부 멸망하고 맙니다. 그런 미래를 붓다는 전부 예견하고 있었지요 .실제로 눈앞에서 사카왕국은 정복당한 셈이지만, 그는 그럼으로 해서 야생의 지혜를 가진 부족국가의 사상을 사장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제국의 세력이 확대해가는 세계 속에서 지혜의 지속을 실현하고자 했지요.

이제 현대에 있어서 불교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붓다와 똑같은 삶이나 전략을 다시 한 번 실현하고자 한다면, 불교는 일신교적이며 초국가적인 거대제국이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고 글로벌 스탠더드가 세계를 정복해가는 이 세계 안에서, 그런 것은 인간 정신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고 그 속에서 지혜가 생명력을 갖도록 하는 방법으로서 거듭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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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쪽에서 발췌)

 

 

화폐와 신은 닮은 꼴

 

가와이 : 어떤 유럽 사람에게 제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솔직히 단 한번으로 끝난 부활을 진심으로 믿지는 않지요? 지금 우리가 흉내 내고 있는 개인주의나 온갖 물질적인 것이 크리스트교를 배경으로 해서 성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이 믿는 건 뭔가요?" 그랬더니 그가 "돈입니다."라고 진지하게 대답하더군요.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돈은 안심입명의 경지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나카자와 : 그 말씀을 들으니 화폐는 신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가와이 : 그렇지요. 돈만큼 보편적인 것이 없을 겁니다. 어쩌면 지금 지구 전체에 군림하고 있는 주체는 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카자와 : 그냥 돈이 아니라 돈 '님' 이죠.

 

가와이 : 게다가 이 정도로 달러가 유통된다는 것은 곧 달러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지요. 돈은 가장 신뢰할 수 있으며 강력한 힘을 가진 것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모두가 깨닫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이 상태로는 안심입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죠.

 

나카자와 : 신과 돈의 유사점을 든다면, 둘 다 영원을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은 영원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변화하고 소멸해가지만 신은 영원하죠. 인간이 왜 화폐를 만들어냈을가요? 가치를 가진 것이 파괴도고 풍화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가와이 : 그렇군요.

 

나카자와 : 그래서 그것을 금화로 만들었던 겁니다. 금화는 잘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금화의 가치를 갖고 다니면 일단 발생한 가치는 소멸되지 않으며 축적도 운반도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화폐를 만든 거죠. 신과 화폐 둘 다 부패하지 않으며, 소멸되지 않고, 해체되지 않느다는 조건을 갖추고 있죠. 결국 크리스트교의 신이라는 것은 이처럼 영원한 신이며, 그런 생각을 저속하게 표현한 형태가 바로 화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와이 : 그것이 저속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죠.

 

나카자와 : 화폐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리스의 미다스왕은 "화폐(황금)은 대지를 죽일 것이다."라고 하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

 

가와이 : 옳은 말입니다. 화폐는 대지를 죽이지요.

 

나카자와 : 대지가 죽은 후에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의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것, 보존 가능한 것, 운반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크리스트교의 신과 화폐가 무척 닮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해서 불교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영원 자체에 대해 말하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이 세계에는 없다고 하죠. 그것은 열반(니르바나), 번뇌가 없는 상태, 즉 '죽음'이므로 이승에서의 행복에 집착하는 사람은 가고 싶어하지 않는 곳이지요.

 

가와이 : 그렇죠.

 

 나카자와 : 이 세계 안으로 영원을 끌어들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가와이 : 불가능하죠.

 

나카자와 : 그런데 크리스트교는 영원을 끌어들인 셈입니다.

 

가와이 :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죠.

 

나카자와 : 착각이지요. 하지만 그 결과 유럽에서는 수학이 발달할 수 있었죠. '무한' 이라는 생각을 발달시킨 것은 크리스트교가 발달한 서구입니다. 그 이전에는 무한은, 이 세계에는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혹은 이 세계로는 끌어들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 세계에 화폐라는 것이 만들어지면서 그야말로 아인한 형태로 무한이라는 것이 들어오고 말았죠. 돈은 점점 늘려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행복양의 증대를 의미한다는 생각이 생겨나죠. 따라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요즘 같은 세상에는 화폐나 금이 곧 신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 되었습니다. 다만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 신이지만요.

 

가와이 : 그렇지요. 우릭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안심은 가져다주지 않죠.

 

나카자와 :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안심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그런 생명체가 주위의 세계와 다른 아주 작은 부분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어떻게든 지속해보라고 하는 것이 생명이라고 하는 셈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탄생한, 우주 속의 외딴 섬과도 같은 자신이라는 존재에 집착하는 한, 생명은 행복해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의학에서는 어떤 식인가요? 일단 태어난 개체를 어떻게든 연명해가기 위해 외부의 악영향을 배제하지요. 또 내부에 암세포와 같은 형태로 이상즉식이 시작되면 어떤 수로든 그것을 제거해서, 태어난 개체를 가능한 한 오랜 시간 지키려고 애쓰지요. 그러고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화폐에 대한 사고 와 똑같다고 할 수 있지 않나요?

 

가와이 : '즉정 가능한 것을 어떻게든 가능한 한 많이, 가능한 한 오래'라는 식으로 생각하니까요.

 

나카자와 : 마음속에 불교가 자리잡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아무래도 행복이 아닌 것 같군.' 하고 생각하게 되지요. 그런 점에 대해 철학자나 종교가들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와이 : 옳은 말이에요. 나도 그런 걸 생각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껴 여러 모로 시도는 해보고 있지만, 상당히 어렵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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