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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 <전태일 평전> 중에서

나와 마주보고 삽질을 하던 그 배가 사장배 이상으로 앞으로 쳐지고 키는 1.7m나 될 사람이 어디서 얻어쓴 건지 기름에 쩔은 운전수 모자를 쓰고 바지는 군복바지에 흰 고무신을 신었네. 런닝샤쓰는 구멍이 벌집처럼 뚫린 것을 입고 오른손엔 목장갑을 끼었는데 손가락은 다섯 개가 다 나오고 손바닥 부분만 장갑구실을 하는 것일세.

얼굴은 일을 할 때나 쉴 때나 꼭 마도로스가 지평선을 바라보는 그런 표정일세. 그저 무의미하게 사물을 판단하지 않고 사는 사람 같았네. 삽질을 하나 점심을 먹으나 시종 무표정일세. 만약에 그 기름에 쩔은 운전수 모자를 벗겨버린다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바보가 되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네. 그만큼 그 모자는 그 사람을, 그 돌부처 같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잇는 그 사람 전체를 육체의 맨 꼭대기인 머리 위에 서서 감독하면서 그를 속세의 사람과 같이 만들어버리고 있었네. 지금 현재 삽질을 하고 있으니 말일세

사실 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 때에 절은 모자가 하고 있는 걸세.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敗者)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

그렇다! 저주받아야 할 불합리한 현실이 쓰다 버린 쪽박이다! 쪽박을 쓰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부서지지 않게 잘 쓰든지 아니면 아예 쓰지를 말든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저 무자비하게 사회는 자기 하나를 위해 이 어질고 착한 반항하지 못하는, 마도로스 모자를 쓴 한 인간을, 아니 저희들의 전체의 일부를 메마른 길바닥 위에다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렸다. (18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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