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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책세상) 발췌독

마취술은 수술의 기술에 종속되는 하위 기술이므로 그 목적과 수단의 모든 구체적인 면에서 상위의 기술인 수술의 기술에 따라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획득의 기술이 가정생활에 종속되는 하위 기술이라면 물자를 조달하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가족 성원들의 행복한 삶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한도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마취사가 안전하고 성공적인 수술이라는 상위의 목적을 망각한 채 제 흥에 겨워 "마취술의 한계에 도전한다"면서 극단을 달리면 그야말로 큰일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획득의 기술도 가정의 행복이라는 상위의 목적을 무시한 채 "돈벌이의 한계에 도전한다"고 굴어서는 안 된다. 혹시라도 두 기술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더 많은 부의 획득"을 목적으로 가정생활을 관리한다면, 가정의 행복은 사라지고 가정인지 공장인지 알수 없을 정도로 가족 모두가 혹사당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경제 행위에서의 목적 합리성이 독립되어 따로 노는 것을 피하고 철저하게 가치 합리성의 차원에 복무하도록 묶어두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95쪽)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활동에서 목적의 추구는 무한하지만 수단의 양은 그 목적에 의해 제한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를 보았다. 또한 정말 제대로 사는 법을 아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행복한 삶을 지향하는 폴리스의 운영기술 politikon 과 가정관리 기술을 상위의 기술로 삼고, 거기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획득의 기술은 그 하위의 기술로 종속시킨다고 하는 그의 주장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솔론에 반대하여 인간이 필요로 하는 물자의 양에는 어떤 자연적인 한계가 있음이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수술을 위해 마취를 하는 경우 마취약이 무한정 필요하지는 않다. 무한정 마취약을 가지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목적은 분명 수술이 아니라 자살이거나 환각 상태일 것이다. 행복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물품, 예를 들어 무기의 양은 결코 무한정이 아니다. 만약 무한정의 무기를 가지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삶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목적으로 삼는 무기 장사꾼이거나 다른 무엇일 것이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처럼 "모든 사물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매사에는 시종始終이 있다." 재화를 조달하기 전에 자기가 그것을 무슨 용도로 쓰려고 하는지, 그것을 쓰는 것이 자신의 행복한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정확히 알아야만 무엇이 얼마만큼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은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돈부터 벌고 보자는 식으로 시작하면 그야말로 본말과 시종이 바뀌고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삶 자체가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97-8쪽)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찬가지로 위와 같은 분석을 상품에 적용하고 있다. 어떤 상품이든 생긴 모습인 형성을 보자. 예외 없이 모두 그 물건이 목표로 하는 이런저런 용도에 부응하도록 생겨 있다. 구두의 생김새에는 신기 편하도록 한다는 것 외의 다른 어떤 목적도 드러나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상품의 일차적인 용도는 그것을 사용하여 발에 신는 것, 즉 사용가치에 있다. 그런데 똑같은 구두를 사용하더라도 목적이 전혀 다른 방법이 있다. 그것을 팔아 다른 물건을 얻거나 돈을 버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도 분명히 그 구두를 쓰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 목적은 신발의 구체적인 형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에서 보기 좋으라고 만들어놓은 고려 청자를 요강 따위로 쓰는 것과 마찬가지 행위가 된다. 따라서 상품을 교환하여 돈이나 다른 물건을 얻는다는 용법인 교환가치는 사물의 일차적인 용도라고는 할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품 교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불만과 염려가 녹아 있다. 교역의 목적이 단지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교환행위도 각각의 물건들이 자기들을 '생긴 대로'사용해줄 바른 임자를 찾아가는 과정일 뿐이니 자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이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교환에 들어가는 상품은 원래의 생김과는 전혀 다른 목적에 복무하게 된다.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덧씌워진 '돈벌이'라는 목적은 궁극적을 상품의 형상에 영향을 미친다. 쉽게 말해서 팔리기만 한다면 품질이든 뭐든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109쪽)

 

 

 

알렉산더 대왕은 언젠가 당대 최고의 요리사들을 거느릴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이미 스승 아리스토텔레스가 평생 동안 이용할수 있는 요리사를 갖춰주었다고 말하며 거절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달리기와 다른 운동으로 땀을 낸 후 몸을 씻어 입맛을 돋운다. 그러면 이 세상 어떤 음식도 산해진미가 된다." 이렇게 수면, 운동, 건강의 조화 속에서 '잘 먹는다는 것'을 추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자들은 맛잇는 임식을 찾아 오늘은 바닷가재, 내일은 캐비어, 함 돈을 펑펑 쓰면서 살게 마련이다. 비록 자기들은 훌륭한 삶을 산다고 만족스렁누 표정을 짓겠지만 따지고 보면 못 배운 게 지인 불쌍한 자들인 셈이다. 반면 알렉산더 대왕처럼 '행복한 삶'에 대해 지혜를 가진 자들이라면 큰 돈 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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