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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디아스포라 기행-추방당한 자의 시선


디아스포라 기행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많은 언론에 추천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순전히 (내일 이 책에 대해서 글을 쓸 것이다) <만남>-서경식,김상봉 대담 때문이다. 그 전에는 목차를 보고는 그냥 독특한 여행책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의 첫 목차는, '마르크스의 무덤'. 나는, 마르크스의 커다란 두상이 놓여있는, 그렇게 꾸며진 마르크스의 무덤을 좋아하지 않았다. 런던에 가서도 그 곳에 가지는 않았다.

***

서경식, 서준식의 동생. 이렇게만 알고 있었다. 서준식 선생에 대해서라면, 그분을 실천과 글을 통해서 알 수 있었고, 떠나시게 된 이유를 나중에야 듣게 되었다. 그러나 존경하는 분의 형제라고 해서, "그렇구나"하는 이상의 별 생각은 가질 수 없었다. 그러다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을 읽고, 아...하고 감탄 혹은 탄식. 왜 아직까지 이런 분을 몰랐을까, 지금, 처음 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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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만남>이라는 책을 만나고, 또 길을 돌아서 다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커다란 두상이 얹힌 무덤의 주인이 아니라, 한명의 디아스포라로 등장한다. 그도, 고향에서 뿌리뽑히고 흩어진 자, 디아스포라였던 것이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디아스포라 기행, 여행기가 아니라 살아있거나 혹은 이미 죽은, 디아스포라들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디아스포라는 어떤 이들인가,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 중에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한 후에, 전혀 예상치 못하게, 집에 돌아가 가스벨브를 틀거나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리는 낙관주의자들이 있다.(..) 누군가 죽으면 그 사람은 이제 어깨의 짐을 전부 내려놓았구나하고 쾌활하게 생각해보곤 한다.  - 50쪽에서 재인용, 한나 아렌트 "우리 망명자들" 중에서

서경식도 이 구절을 읽고 갑자기 자살한 유쾌한 친척을 떠 올리고, 자신도 이렇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존재 자체가 동요와 불안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저런 정치적 이유로 공동체에서 분리된 망명자들, 이주자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민족적, 문화적 근원으로부터 분리된 이주민 2,3세들 소수자들. 이들은 정도와 양상의 차이가 있지만, 자신의 존재와, 존재하는 곳에서 근원적인 불일치를 경험한다.

서경식과 같은 재일 조선인은 모어-모국어가 일치하지 않는다. 모어는 일본어이고 일본어로 사고하지만 모국어는 한국어, 그것은 오히려 생소하고 거칠게 입안에서 맴도는 언어다. 디아스포라는 조국(선조의 출신국), 고국(자신이 태어난 나라), 모국(현재 '국민'으로 속해있는 나라)가 분열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내셔널리티의 분열과, 그리고 영혼을 구성하는 언어의 분열은 개인에게 항구적인 상처와 균열을 새길 수밖에,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일지는 나와 같은 '내국인'들에게는 생각하기 힘들다.

더구나, 이런 분열이 살인적 폭력에 의한 경우에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란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여성 미술가 시린 네샤트는 어떨까, 우간다에 살던 인도 이주민의 후손으로, 이제는 영국에 망명해서 살아야하는 자리나 빔지는 어떨까. 백인 사회에서 자라난 코리언 입양아들은 어떨까. 그리고, 자신의 모어가 파시스트의 끔찍한 폭력의 언어가 되어 버린 독일계 유태인 시인, 강제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파울 첼란에게는 어떨까. 그리고 바로 지금, 재일조선인과 고향에서 쫒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라크 사람들과 파리 방리유의 이민2세들과 르완다 난민들과 코소보 사람들과... 그리고, 우리 옆에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어떨까.

<만남>에서 김상봉은, 서경식은 타자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특이한 존재라고 말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것을 상상하기도 힘든 것이다. 영혼이 어떻게 그것들을 견딜 수 있을까. 디아스포라에게라면 그 자신의 영혼의 고통 덕분(?)에 타자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 오히려 우리 모두에게 공동체의 윤리가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하려면 서경식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예를 드는 것은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서경식은 솔직하게, "보편적인 고통같은 것에 저는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만남>356쪽)

그러나 서경식이, 한명의 디아스포라로서, 우리와 대화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고통의 차이를 과시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대화하고 만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도 오히려 만남에 나서야한다. 그/녀들의 고통이 대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상상하기 힘든 것이라고 해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들을 통해서 세계를 만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타자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래서 오히려 디아스포라를 만나는, 나와 같은 '내국인'에게 요구되는 윤리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에 함께 하기 위해서 "있을 수 없는 비국민"(잭 시라이)이 되는 것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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