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5/10

민주노총 지도부 사퇴 이후.

민주노총 지도부 사퇴 이후, 우리가 내부 혁신을 위해 투쟁했던 것들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그 결과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볼 시점이다. 모든 것은 아니겟지만, 조금씩 그것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그리고 함께 싸웠던 나는 어떤 이야기들을 했었나?

 

아래는 우선, 내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함께한 입장들이다.

[공공연맹사무처활동가]민주노조 정신의 회복을 위해, 총연맹 지도부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281] 미봉책의 결과는 민주노조운동의 몰락뿐이다 

[성명] 지도부 총사퇴를 시작으로 민주노조운동의 근본적이고 철저한 혁신에 나서자

[284] 현장에서부터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그러나, 지난 포스트(민주노총 혁신, 절망이...)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투쟁은 그 구조적 한계 때문에 운동주체들이 목적한 성과는 얻을 수 없는 한계에 갇혀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투쟁은 '비극'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투쟁을 촉발시켰던 민주노총 사무총국 15명의 동지들을, 최소한 이수호 위원장의 신중함 같은 것조차 없이 단칼에 잘라버린 비대위(중집)을 보면서 드는 생각만은 아니다.



강승규 사건 이후 이수호 위원장의 사퇴, 비대위 구성과 그 이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다시 확인할 뿐이다. 모든 논쟁은 정파적 구도 속에서 이해되고 규정되었으며, 정작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위한 모든 주장들은 정파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따라서 운동의 위기를 촉진한다는 역설에 직면하게 되었다. 비대위 구성은, 지도부의 사퇴가 새로운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는 대중적 힘에 의해서 강제된 것이 아닌 이상, 위기의 당사자들이 위기를 미봉하기 위한 수습기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는 내가 이전에 민주노총 조직혁신안에 대해서 비판했던 것처럼(민주노총, 혁신의 대상이 혁신을 이야기하다 ) 노동자운동 위기의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거나 (이번과 같은 경우에는) 재확립하는 방식으로 위기의 해결을 자처한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직접적으로 이번 강승규 사건의 직접적이거나 잠재적인 공범들이 다음 민주노총 선거에 다시 출마할 것이다. 그리고, 설사 이들과 연관되지 않은 세력이라고 할지라도, 비리를 양산하고 운동의 위기를 증폭시켰던 운동구조를 온존해왔던 점에 대한 자기비판을 통해 선거에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이 투쟁의 과정에서 지도부를 비판했던 사람들이 곤혹스러워했던 것은 조합원들은 수수방관, 혹은 냉소했다는 것이다.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반응들이 많았다. 비리의 문제점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이러한 운동구조를 바꾸어내야한다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대중들은 노동자운동의 위기가 강승규를 잘라내고, 이수호 집행부를 퇴진시킨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비극은, 위기의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위기와 투쟁하려했다는 점에 있었다. 지도부의 비리는,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는 점을 인식했어야하지 않을까? 90년대 중반 이후 십여년간 고착되어온 노조운동의 제도화는, 노조가 투쟁의 기관이 아니라 대중을 통제하는 기구로 변화하는 역설을 보여주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노조에 대해서 아마도 유일하게 인정하는 효용일 이 대중통제는, 사업장 단위의 노사협조주의와 대정부 차원의 사회적 합의주의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단지 간부, 활동가들의 주관적 노선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노동자 대중 스스로의 후퇴가 있다. (이런 점에서 김승호 사이버노동대학 대표가 말한 것처럼("어느 쪽도 운동의 진정성이 엿보이지 않는다") 이 문제들이 활동가들의 노선 때문에 생겨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조차도 원인이 아니라 결과가 아닐까? 우리는 대중의 물질적 조건을 비판함을 통해서 단순히 과거의 구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조건의 새로운 운동을 개시할 수 있어야한다.) 특히 노조의 조합원으로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들의 후퇴가 있다. 상시적 구조조정으로 인한 고용불안 속에서, 조합원들은 실리적 이해에 침윤되어갔다. 비정규직에 대한 배제는 사측과 안정적으로 타협할 수 있는 조건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비정규직 투쟁과 정규직 노조가 어떻게 관계를 가질 것인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정규직 노조 운동이 자신의 조합원들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들까지 통제하는 입장에 설 것인지, 따라서 노동자운동의 역사적 대립물이 될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사용자와 유착하고 타협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은 단지 노조관료들만은 아니다. (정규직) 조합원들 역시 이러한 타협구조 속에서 창출되는 노사관계의 안정화를 명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동의해주었던 것이다.

 

이번 강승규 사태와 같은 명백한 도덕적 사안에 대해서 철저한 처리는 필수적이다. 그것조차 없이는 노조운동이 다시 대중으로부터 인정받고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길조차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과정을 통해서 드러난 것처럼 그것은 단지 필요조건일 뿐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우리는 정세 속에서 강승규 비리 사건의 엄정한 처리라는 자명한 목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으로 많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미망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구도였다. 정파간 논쟁 구도에 의해 지도부 비판이 과잉결정된 것처럼 지도부의 퇴진이 상징하는 논쟁의 자명함 속에서 우리들의 입장도 과잉결정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극은, 그 때 그 곳에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초의 목적을 다가갈 수 없는 구조적 한계, 우리들의 무능에서 생겨난다. 우리가 제기하려고 했던 문제들은 지도부 사퇴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노조운동의 구조를 바꾸어내는 대중적 운동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아마 모두들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도부 사퇴'만'을 말할 수 있었다. 말해야할 것을 알면서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 갇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긴, 더 이상 우리가 어떤 발언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강승규 사건과 지도부 사퇴 이후에 우리는 한편으로는 민주노총의 상층부를 '혁신'하는 것이 사실상 별로 가능하지도 유용하지도 않은 조건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김승호 대표의 지적처럼 민주노총 자체가 가지는 역사적 한계는 그 물질적 구조 속에 온전히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비리사건으로 극적으로 드러난 노조운동의 위기는 노동자운동의 위기의 반영이라는 점, 그것은 단위 사업장 현장에서부터 존재하는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투쟁이 단지 노조운동의 도덕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넘어서는, 노동자운동이 정당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 (따라서 어떻게 노동자운동이 노동자 대중 속에서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훨씬더 지난한 과정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다시 깨닫게 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윤선애, 하산

 윤선애, 하산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냉큼 주문했는데, 오늘 늦게 사무실에 들러보니 도착해있었습니다.

 

새벽 때와도 많이 다르지는 않지만, 목소리 속에 이제는 고요함이 있군요.

노래들이, 조금 쓸쓸하고, 차갑고 촉촉하지만, 아득하기도 하네요, 윤선애 스스로의 표현으로 '습한 공기와 투명해서 빛나는'.

하지만, '하산'한다는 것의 의미.

 

앨범제목과 같은 '하산'은 맨 마지막곡입니다.

 

하산 (김정환 작사, 이현관 작곡)

 

저 아래 사람들 사는 아파트 상가
아스팔트 길 건너 산동네 불빛
멀수록 아늑하게 반짝이는데
그래 약속 하는 거야.
영원히 산다면 세상은 이리 아름답지 않아.
스스로 간절한 줄 모르는 빛일 뿐이지.
세상을 포옹하는 늦은 하산
발걸음은 어둔 산에 묻히고
삶이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으로 이어진다.

 

영원히 산다면 세상은 이리 아름답지 않아.
스스로 간절한 줄 모르는 빛일 뿐이지.
세상을 포옹하는 늦은 하산
발걸음은 어둔 산에 묻히고
삶이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으로 이어진다.

 

 

아래 사이트에서는 샘플을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puljib.com/bluealbum/?S_Type1=album&S_Type2=06&table=greenmusic&Mode=View&B_SEQ=41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민주노총 혁신, 절망이거나 희망 혹은 미망

민주노총 강승규 비리 사건 이후, 그 사건도 사건이지만 그보다 더 뻔뻔스러운 민주노총 지도부에 절망했다. 그러고도 계속 자신있게 버틸 수 있는 조건이 참담하다. 또 이를 막을 수 없는 우리의 한계, 나의 한계가 가슴 답답하다.

 

민주노총 사무총국 15명의 동지가 사직서를 냈다. 사회단체와 각 연맹과 지역본부 활동가들의 성명서, 호소문이 쏟아지고 있다. 오늘은 시국토론회도 진행되었다. 나 역시도 이러한 작업에 이런 저런 방식으로 같이하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지도부가 사퇴하는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절망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것이 하나의 '운동'으로서 민주노총을 바꿀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 시도들은 애당초 성공을 거의 기대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다. 민주노총을 혁신하고, 이를 통해서 노조운동의 혁신에 계기로 삼자는 우리의 주장은, 그래서 슬프게도 미망(迷妄)일 수 있다.

 

"어느 쪽도 운동의 진정성이 엿보이지 않는다"

참세상뉴스에 실린 김승호 사이버노동대학 대표의 글이다.

 

거친 댓글들이 이어 달린다. 소부르조아, 운동을 그만해라는 말까지.

 

그러나 가치판단들과는 무관하게 민주노총의 건설과정과 그 한계에 대한 그의 지적은 그 자체로 사실명제들이다. 민주노총은 건설 당시부터 변혁지향적 민주노조의 구심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노총을 혁신한다고 하는 것은 애당초 이 프로젝트가 가진 한계, 그리고 그의 논리적 귀결인 국가권력과의 타협, 그리고 그 효과로 나타난 오늘의 비리사건 전체를 바꾸어내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노총 혁신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노총을 넘고,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가능하지 않은 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투쟁은, 어쩌면 정세의 호기를 만나 이수호 집행부를 퇴진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민주노총'을 쟁점으로 하는 한 애초의 목적은 달성할 수가 없을 것이다. 구조적 한계. 그런 점에서 우리의 투쟁은 미망일 수 있다.

 

우리에게 비극은, 이것이 미망일지라도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에서 시작된다.(그런 점에서 다시 비극일 지라도 김승호 대표와는 달리 한번 더 그것에 대면해야한다. 그리고 스스로 비극의 조건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가 '진정성'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진정하기 때문에 비극일 수 있다.) 

지금은 다만 여기서 시작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비극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 조건을 분명하게 인식해야할 것이다. 운동의 결과로 그 한계들을 집단적으로 깨닫게 될 때, 비록 비극적이었을지라도 이 운동은 어떤 종류의 성과를 남길 수 있다.

 

나 역시 김승호 대표가 던진 아래의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예 질문으로 구성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지금 시작하는 이 투쟁 속에서, 계속 걸으면서 우리들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과연 한국의 민주노동운동이, 기존의 정파 혹은 계파들 그리고 거기에 속한 활동가들이 이런 역사적 과업을 짊어지고 나갈 수 있을까? 과연 이 진통을 산고로 삼고서 노동운동의 신새벽을 열어 제낄 수 있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독서일기] 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비버리 실버 지음, 백승욱.안정옥.윤상우 옮김 / 그린비
 
 
'노동운동의 위기'가 몇가지 사건을 통해서 가시화되면서 올해 상반기에 많은 논쟁들이 있었다.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것이 상층조직들의 위기가 아니라 현장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위기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은 '노동운동의 메카'라고 하는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이다. 정규직 노동자들과 사내하청 방식으로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나마 좌파적인 집행부라고 하는 이상욱 집행부마저도 애초의 기대에 한참 미달하는 합의안을 비정규직을 위한 것이라고 들고 나왔다.
 
여기서 당연해보이기 때문에 주목하지 않았던 몇 가지를 다시 생각해보자. 왜 남한 노동운동의 핵심부대는 자동차 공장들인가? 그리고 위기는 노동의 불안정화와 이를 통한 노동자운동의 분할을 통해 시작되는가?
 

이 책을 읽는 것이 놀라운 독서경험인 것은, 이렇게 남한의 노동운동사의 특수한 역사를 세계체계의 변화와 함께하는 세계 노동자운동의 일반적 경향 속에서 읽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노동의 힘>은 노동운동을 하고 있거나 관심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보아야할 책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제시하는 수많은 쟁점을 모두 언급하거나 소개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눈에 띄는 몇가지를 언급하자.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20세기의 산업'인 자동차 산업의 예를 통해서 노동자운동의 세계적 동학을 이해할 수 있다. 실버는 "자본이 가는 곳에 갈등이 따라간다"고 말한다. 생산의 재배치에 따라서 노동자 집단이 형성되고 투쟁이 시작된다. 실제로 2세기, 세계의 전투적인 노동자 투쟁은 자동차 공업의 이동에 따라서 미국->서유럽->남유럽->제3세계(남아공, 브라질, 한국)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아마도 다음 순서는 중국이 될 것이며, 중국에서 일어날 거대한 노동소요는 노동정치만이 아니라 중국과 세계의 운명에도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노동자들의 권리만이 아니라 정치적 변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노동소요가 민족국가의 정치변동에 주는 영향은 새로운 투쟁의 주체들이 해당 국가의 시민권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는지 통합되어 있는지도 영향을 준다. 그리고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투쟁이 집중되는 지역이 정치 중심지와 가까운지 여부도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이에 따라 북유럽과 남유럽, 남한과 브라질의 경우를 비교할 수 있다. 우연성에 기반한 물질성의 요소들을 사고해야한다.)
 
노동자들의 작업장 교섭력은 포드주의 생산 덕분에, 그리고 이후에 도입된 JIT(Just In Time:적시생산시스템) 때문에 오히려 증대했다. 비교적 소수의 인원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라인을 멈출 수 있었다. 자본의 대응은 생산을 공간적으로 이동하고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을 재조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의 이동에 따라 갈등도 이동했으며 기술혁신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일본의 경우다. 이 경우는 완성차 핵심 노동자들에 대한 종신고용의 보장과 광범위한 하청계열화에 의해서 갈등이 예방된다.(이중적 린생산) 다른 국가에서도 이런 방식은 모방되었지만 핵심노동자들에 대한 '종신고용' 보장없이는 효과가 없었다.(인색한 린생산) 이 전략의 성공은 하청 체계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었는데, 일본 외에는 이런 조건을 창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은 60년대까지는 농촌지역 노동예비군과 주로 상근남성노동자들의 가족으로 이루어진 여성노동력을 활용함으로써 별다른 저항없이 하청체계를 관리했고, 그 이후에는 이 체계를 동남아시아로 확대했다.)
 
저자는 따라서 세계자동차산업의 주요추세가 이중적 린생산으로 나가는 한, 미래에 발생할 자동차 노동자들의 주요한 소요는 하청체계의 하층 노동자들에 의해서 주도될 가능성이 클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이들의 강력한 불만이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과 병행하는 것은 아니며 더욱 상층 노동자들은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을 갖고 있지만 불만은 훨씬 작은 듯하고 또한 불만은 높지만 구조적 힘은 적은 하층 노동자들과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격리되어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한다. 이런 분할은 중심-주변의 지리적 분할에 조응하고 종족성, 거주지, 시민권의 차이와 중첩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세계노동정치에도 중요한 함의를 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은 남한의 노동자운동의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일정한 양보와,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비타협적 탄압'이라는 현대자동차 사측의 입장은 (불완전하더라도) 이중적 린생산을 지향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작업장 교섭력의 문제나, 노동자들이 가지는 불만에 대한 진단도 일치한다. 이런 과정을 통한 노동자운동의 약화는 단지 자동차 산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노동자운동의 주력인 자동차산업에서 벌어지는 운동의 약화는 전체 노동자운동에 파급된다. 생산의 (중국으로의) 공간적 이동을 통한 '산업공동화'와 함께 벌어지는 '정규직-비정규직 분할'은 이렇게 해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불러온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이런 난점이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면, 이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실천들 또한 우리만의 것은 아닐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럼 21세기에도 자동차 산업이 계속 노동소요를 몰고 다니는 선도산업일 것인가? 여전히 노동소요를 동반하겠지만 20세기와 같은 파금력을 갖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자본은 노동소요를 피해 공간적으로만이 아니라 부문간에도 이동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저자는 '새로운 선도산업'을 검토한다. 반도체산업, 운수산업 등이다. 이러한 비교를 위해서는 자동차 산업 이전, 즉 19세기의 선도산업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바로 섬유산업인데, 여기서 저자는 중요한 비교지점을 보여준다. 자동차산업만큼 작업장 교섭력을 갖지 못했던 섬유노동자들은 (비록 자동차노동자들처럼 실질적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또한 그 때문에) 강력한 전투성을 보여주었다. 부족한 작업장 교섭력을 '연합적 힘'으로 극복해야했기 때문에 지역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연대성을 보여주었다. 많지는 않지만, 이들이 성공한 경우도 민족해방 운동과 결합하는 등을 통해 연합적 힘을 배가시킬 때 가능했다.
 
반도체 산업과 같이 21세기에 선도산업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업종에서 노동자들의 처지가 20세기의 자동차 산업보다는 19세기의 섬유산업과 유사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그렇다면 새롭게 형성되는 노동자운동은 지역을 근간으로 연합적 힘을 확보할 수 있어야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해볼 수 있다.
 
(한편, 남한에서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전투적인 투쟁이 가지는 의미를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사고해볼 수 있다.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전투적인 투쟁을 시작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들이 구축한 연합적 힘은 80년대 자동차노동자들의 강력한 구조적 힘과 결합하여 폭발적인 투쟁과 성과를 만들어냈다.)
 
자동차 산업 이후, 새로운 부문의 노동자운동에서 주목할 업종은 운수부문과 도시의 시설관리부문이다. (우연찮게 이 두 부문 모두가 현재 민주노총 안에서는 공공연맹이 포괄하고 있는 업종이라는 점에서 더 흥미롭다.)
 
생산의 세계화는 필연적으로 운수/물류의 중요성을 증대시킨다. 이 부문은 지역적 재배치를 의식적으로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을 가진다. 이러한 강력한 구조적 힘이 이미 주어진 것이라면 문제는 이 운동이 전체 노동자운동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가 된다.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까지 대변하면서 노동자운동을 진전시킬 것인가 혹은 적절한 양보에 타협할 것인가는 이들이 가진 힘에 비추어 중요한 운동적 쟁점이다. 현실에서는 당장 진행되는 운수산업부문의 조직적 재편과 관련된 쟁점이 연관된다. 운수부문의 노동자만 별도로 뭉치자는 입장과 보다 광범위한 공공부문으로 뭉치자는 입장이 구체적인 쟁점으로 형성되고 있는데, 운수/물류 부문 노동자들이 가지는 구조적 힘의 향방은 노동정치 전반과 관련하여 중요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남한의 국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운수의 전략적 중요성을 '동북아 중심국가 - 동북아 물류허브'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한편, 남한의 민족주의적 좌파는 민족적 발전전략 속에서 남북철도 연결을 통한 TKR-TSR 구축이라는 전망을 제시하는 데, 이는 남한의 국가가 가지는 발전 전략과 일치한다. '민주노동자전국회의'의 일부는 '통일운동의 활성화에는 운수산별노조가 도움이 된다'는 입장을 가지는 데 이런 맥락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가지는 국가에 대한 타협성, 코포라티즘 성향을 생각한다면 운수/물류 부문이 가지는 전략적 중요성은 노동자운동이 아닌 국가에 활용될 우려가 크다.)
 
한편, 도시의 시설관리노동자들도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차지한다. 도시가 쉽게 이동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도 구조적 힘을 가진다. 특히 금융화된 '세계도시'에서 그렇다.(관련해서는  <경제의 세계화와 도시의 위기>/사스키아 사센  참고) 그러나 이는 충분히 지역에 근거한 연합적 힘을 전제할 때 가능하다. LA에서 SEIU가 진행했던 "건물관리인을 위한 정의" 켐페인-조직화 전략은 이들의 힘을 보여준다.(영화 '빵과 장미'에 생생하게 그려졌던 그 운동이다.) 
 
남한에서도 특히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주력은 이러한 도시의 시설관리노동자들로 형성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공공연맹의 조합원 10만명 중 비정규직 조합원이 약 1만명 정도 된다고 추정할 때, 이 중에서 최소한 7500명 이상은 지방자치단체나 공기업 또는 민간기업에 고용된 공공시설환경관리분야의 노동자들이다.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 내 환경미화원, 도로보수원 등과 시설관리노조 조합원. 민주노총에 직가입된 각 지역일반노조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한편, 이런 상황은 이 부문의 노동자들이 지역에 강하게 기반한 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아직 부족하지만 지역일반노조나 지역공공서비스노조의 사례가 그것을 예증하고 있기도 하다.
 
실버는 책의 끝 부분에서 "이 책에서 수행한 분석은 전후의 세계적인 사회협약들이 노동에게도 자본에게도 안정된 해결책을 제공하지 못했으며, 특히 단순히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게 만들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노동운동의 우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협약이 해결책이 아니며, 좌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히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다. 여기에 현재의 논쟁 구도 속에서 좌우파 모두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구성해야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처방은 물론, 운동의 노선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가는 시도 모두를 요구한다. (백승욱 선생은 옮긴이 후기에서, 지역적-국가적-국제적 수준에서 연합적 힘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복수의 보편성에 대한 사유와 사회운동적인 노동자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책의 어느 부분을 읽는다고 해도, 이 책은 다른 세계의 문제를 서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바로 어제 오늘 참세상 뉴스, 매일노동뉴스에 실린 노동기사를 보면서 드는 의문, 바로 지금 방금 누군가와 논쟁한 운동의 쟁점과 연결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처한 노동운동의 조건이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저자들이 그 보편성을 탁월하게 추출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남한 노동운동의 전투성에 대한 과장된 환상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처한 물질적 조건을 객관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강력하게 '보편적인' 구절 중 하나인 책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자. 이 말은 당위적이거나 예의 하는 말이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에서 노동소요가 세계정치에 미친 영향에 대한 분석에 입각한, 구체적인 진술이다.
 
"...따라서 21세기 초에 세계의 노동자들이 마주한 궁극적인 도전은 단순히 노동자들 자신의 착취와 배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아니라, 진정으로 이윤을 만인의 생계에 종속시키는 국제체제를 향해 나아가는 투쟁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청계천을 보며, 전태일 동판을 고민하다.

어제(10월7일 금요일) "노동자·장애인·서민 외면 서울시 규탄 및 민생 국감 촉구 기자회견"을 서울시청 앞에서 진행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가운데 민주노동당 서울시당과 민주노총 공공연맹,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공무원노동조합 서울본부, 장애인이동권연대, 노숙인 인권과 복지를 실천하는 사람들, 은평뉴타운 한양주택공동대책위 등의 단체가 참가했다.
 
* 관련 내용은 링크 참조 :
 
이명박 피해자들이 모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명박의 불도저식 개발정책이 서울의 노동자, 빈민, 장애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 지 보여주는 압축적인 자리였다. 이명박은 거대한 청계천 테마파크 행사 속에서 '보이지 않는 자들'은 철저하게 배제되고 탄압하고 있다. 정명훈을 초빙하기 위해서 서울시향을 해체하고 단원들을 해고하고, 예술단체를 민영화하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청계천 공사를 위해서 노점상은 폭력적으로 철거된다. 이미 친환경적인 '한양주택'은 뉴타운 아파트 건설을 위해서 철거 위기다. 주민들의 공동체는 파괴될 것이다. 
 
최근 민주노동당 서울시당과 공공연맹 등이 함께 진행한 서울시 산하기관 비정규직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비정규직의 처지는 열악하기 짝이없다. 수천억, 수조원이 드는 공사들을 위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이 강요되고 있는 실정이다. 노동자 피땀을 착취해서 테마파크를 '시민'의 이름으로 만들고 있다. 노동자는 시민이 아닌가?, 상황이 이렇게 부당할 수가 있는가! 분통이 터진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이 마침 청계천 길목이었다. 공사가 끝난 청계천 길을 지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주변 광경이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당장 기자회견에서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한 장애인 동지들이 이야기한 좁거나 군데군데 끊어진 인도(휠체어는 커녕 목발도 짚고 갈 수가 없을 정도다 '청계천 새물맞이' 그들만의 축제 ), 전혀 눈에 띄지 않는 노점상과 또 한번의 노점상 철거가 예정된 동대문운동장 등이 눈에 들어왔다. 청계천은 시멘트 덩어리였고, 주변의 상가들은 새로 맞춘 '일관된' 간판을 달고 있었다. 새간판을 달았더라도 구식 상가들은 곧 철거되고 이런 저런 '타워'들이 들어서겠지.
 
이명박의 청계천 복원 정책은 강북 구 도심을 재개발하고 금융세계화에 조응하는 '세계도시'를 만들기 위한 시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스키아 사센은 금융세계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세가지 지역 유형으로 수출자유지역, 역외금융센터, 세계도시를 들고 있다. 세계도시는 세계 경제활동에 필요한 운영과 관리, 금융이 집중되는 장소다. <경제의 세계화와 도시의 위기>/사스키아 사센 )
 
그런 목적에서 진행되는 만큼 청계천 복원이 생태적이거나 문화적이거나, 약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리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청계천 복원에 대한 비판들은 정당하지만,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해온 실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한계적이기도 하다.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전태일 기념사업회의 노력으로 '전태일 거리'가 조성되었다. 전태일 동상과 함께 전태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글을 담은 동판이 모금으로 제작되었다.
 
전태일을 기억하고 이것을 공간에 남기는 문제는 무척 중요하다. 그런데 고민은, 그것이 이명박의 이벤트 속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전태일이 지키고자했던 사람들을 희생하면서 만든 공간에 전태일의 공간이 조성된다는 역설.
 
전태일 거리 조성을 위한 동판 모금이 9월22일 마감 이후 이달 30일까지 추가로 진행된다. 애초에, 10만원 하는 동판을 여자친구와 함께 신청할까하는 생각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나 역시도 청계천 복원의 의미에 대해서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지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청계천을 지나고 나서는 그런 생각이 사라져버렸다. 공간에 물질적으로 기념물을 남기고 이것을 통해서 기억을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태일 다리, 거리 조성은 여전히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뜻 '나도 하겠소'라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 가슴쓰릴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본문] 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옮긴이 후기

 

노동의 힘
비버리 실버 지음, 백승욱.안정옥.윤상우 옮김 / 그린비
 
 
이 책에 대해서 혹은 이 책을 읽고 하고 싶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전에 우선 이 책의 "역자후기"를 소개한다. 역자후기를 모두 그대로 타이핑해서 옮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저작권 침해일 수 있는데, 책 홍보도 되는 셈이니 그린비 출판사에서도 너그럽게 봐주지 않을까 싶다. ** 저작권 침해 지적이 들어오면 바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 '펌'하지는 말아주세요.)
 

금융세계화는 노동운동을 최종적 위기에 빠뜨렸는가? 노동운동은 역사적으로 지양된 운동 또는 사멸중인 잔여적 종인가? '노동의 종말'이라는 선고는 어떠한가? 이런 의문들이 떠나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한국사회에서 달아오른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논쟁 역시 이런 위기가 20세기 말에 비로소 시작된 최초의 경험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장기 20세기에 노동(운동)의 위기는 계속 반복된 경험이었으며, 위기의 시간에 노동운동은 운동의 새 동학과 토대를 발견하며 재정립하였다는 점을 역사는 보여준다. 우리가 비비러 J.실버의 저작에 주목하는 첫번째 까닭은 바로 여기, 즉 이 책이 좀더 장기적인 역사적 동학을 분석할 필요성을 제기함으로서 우리가 서 있는 현재의 자리를 검토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실버가 20세기 노동운동의 장기동학을 분석하며 노동소요에 주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경험공간의 변동속에서 위기를 지양할 수 있는 토대와 지평을 발견하는 대중운동의 실천이성에 착목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점 때문에 실버의 작업은 그 동안 세계체계 분석의 대표적인 취약점인 대중운동의 동학에 대한 분석을 본격화하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이다. 세계체계 분석은 근대자본주의 세계체계라는 분석단위에 전지구적인 접근을 시도해왔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자본에 의해 체계구조가 전환되어온 측면에만 초점을 맞춰왔다는 비판에 늘 취약했다. 그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된 반체제 운동에 관한 논의도 1968년을 전후해 세계 사회운동의 지배적 담론에서 벌어진 전환에만 논의가 한정되어 왔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노동과 노동운동이 겪어왔던 역사적 존재형태의 전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분석이 소홀했다고 할 수 있다. 실버의 작업은 바로 이런 공백을 메우고, 세계체계 분석과 대중운동의 장기동학 분석을 접합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이것이 우리가 실버의 저작에 주목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이런 시도는 노동운동을 노동운동의 경험공간에 가둬둔 채 논의하기보다는 논의의 지평을 노동운동 외부에서 노동운동을 약화시켜온 요인들로까지 확장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바로 그런 장점이 있기에 노동우동의 최종적 위기론에 대한 세계체계 분석의 정면도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실버는 노동--자본의 동학을 전지구적·역사적으로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최종적 위기론을 거부하는 동시에 노동운동의 진정성과 의지의 낙관만이 길은 아니라는 점도 인식하고 있다. 근대의 세계-역사적 과정은 노동계급과 노동자운동이 카타르시스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비극적·위기적(파국적) 상황을 겪어왔다는 것을 모두 보여준다. 실버가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현상과 새롭고 유례없는 현상을 구별하여 안내하는 곳은 바로 이런 두 상황 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의 주요 장점은 바로 노동운동의 장기동학을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현상과 유례없는 현상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는 바, 이런 인식지평은 그녀가 노동운동의 역사를 지역적 수준과 세계적 수준을 가로지르는 장기동학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비로서 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과 노동계급이 지속적인 형성과 재형성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런 문제설정 덕택에 우리는 노동계급이 형성을, 통상적으로 제기되는 "누가 노동자인가?"라는 질문 속으로 던져버릴 위험성에서 비껴서 있게 된다. 노동계급의 역사적 존재형태라는 문제가 자본에 의한 노동시장의 분단, 인종·민족·젠더 등 비계급적 토대에 따른 노동계급의 배타적 자기동일성의 형성, 국가에 의한 시민권의 경계 분할 속에서 이뤄지는 지속적인 경계긋기의 과정으로 역사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건은 (재)형성을 추동하는 기제를 어떻게 분석하느냐가 된다. 실버가 자본이동, 제품주기, 세계정치의 측면에서 노동운동의 지역적·세계적 추세와 근대세계체계의 변화가 맞물리는 지점, 즉 시간의 동학과 공간의 동학이 맞물리는 접합을 분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체계 수준에서 자본이동과 제품주기의 변화(역사적 자본주의와 공간·기술·제품·조직·금융적 재정립)는 특정 지역에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낳는 요인이기도 했지만 노동운동의 중심지를 새로운 곳으로 옮기는 요인이기도 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런 계기들이 맞물리면서 노동계급이 새롭게 형성되고 노동운동이 중심지가 비서구로 옮아온 주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현재 중국으로 가는 전지구적 자본이동과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는 노동운동의 중심지가 중국으로 옮아갈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중심지 이동이 기존 지역적 노동운동의 최종적 위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실버의 논지 중 하나이다. 자본의 공간 재정립은 기존 노동운동의 중심축을 지역적으로 이동시킬 수는 있지만, 다른 형태의 새로운 재정립들 때문에 기존의 공간에 새로운 노동-자본의 갈등관계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방식은 단순히 갈등이 영원하리라는 선언이 아니고 노동-자본간 모순 관계의 역사적 전화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요청으로 읽어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버에 따르면 현재 노동운동이 겪고 있는 위기에 대한 해답이 출현할지(즉, 노동운동의 재정립이 이뤄질지)는 두고봐야 할 일로, 경험과 그에 적절한 새로운 대응만이 말해줄 수 있는 일로 남아있다.
 
여기서 출발해, 우리가 이 책에 주목하는 세 번째 이유는 실버가 과거를 보면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개념의 창을 제시하여 이를 구체적인 조사분석과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운동의 장기동학이 두가지 시계추식 진동, 즉 맑스식 노동소요와 폴라니식 노동소요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인식과 발견이 그것이다. 폴라니식 노동소요는 생계의 권리를 약속한 기존의 사회협약(노동의 부분적 탈상품화)이 파괴되거나 약화되면서 일어나는 사회적 정당성의 위기에 대한 반격에서 기인한 노동소요를 가리킨다. 전지구적 수준의 경제변화와 자기조절적 시장의 확산은 노동자들의 시장교섭력을 약화시켜 노동의 (허구적) 재상품화를 강화함으로써 이런 정당성의 위기를 낳고 있다. 폴라니식 노동소요가 노동의 허구적 상품화와 사회의 자기방어 운동이라는 이중적 운동('시계추 운동')에 관계한다면, 새로운 차이--경향, '단계'(실버)--에 연루되는 것은 맑스식 노동소요라고 할 수 있다. 맑스식 노동소요는 수익성의 위기를 해결하고자하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재정립들이 (새로운 중심지와 산업의 등장을 포함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잇달아 새로운 노동계급을 형성하고 강화시킴에 따라 나타나는 노동-자본 갈등의 산물이다.
 
이처럼 유형화하게 되면, 결국 노동의 힘이 어디에 원천을 두고 있느냐는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실버가 도입하는 것이 에릭 올린 라이트의 구조적 힘과 연합적 힘이라는 개념화이다. 구조적 힘은 노동자가 놓여있는 경제체계 안에의 위치 때문에 얻게되는 힘, 즉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의 공급이 부족한데 따른 시장교섭력(이것은 폴라니식 노동소요와 관련있다.)과 특정 노동자 집단이 핵심산업의 작업공정 내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에 따른 작업장 교섭력(이것은 맑스식 노동소요와 관련있다)을 가리킨다. 새로운 산업의 등장은 시장교섭력을 약화시킬 수 있지만, 작업장 교섭력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구조적 힘의 새로운 도약을 향한 새로운 경향은 아직 미약한 상태이다.
 
이럴 때 노동운동의 장기동학에서 요청됐던 힘의 원천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포함해) 기업과 산업차원을 초과하는 지역적·사회적·국제적 수준에서 다양한 형태의 집단 조직을 형성한 결과 얻게된 연합적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제 노동운동이 임금과 작업조건의 개선으로 환원되지 않는 노동자들의 운동, 즉 '노동운동'(labor movemebt)에 한정되지 않는 '노동자운동'(worker's movement)이라는 표상을 자기화해야한다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합적 힘은 결국 노동운동이 경계긋기 전략들, 즉 노동시장의 분단, 노동계급과 시민권의 분절에 도전하는 국내적·국제적 수준의 사회운동적 노동자운동으로 재정립되어야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노동운동이 시대적 성취를 이뤄낸 과거의 특정한 역사적 조직형태에 고착되어서는 안되며, 노동운동은 늘 그것을 둘러싼 더 큰 사회운동의 일부로서 존재해왔다는 것을 새삼 다시 확인해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길은 보장되지 않은 길이다. 더욱이 현재 새롭고 유례없는 현상 중의 하나는 노동자운동의 동학과 세계정치의 동학이 맺고 있는 관계의 변화이다. 금융세계화가 기존 노동운동을 약화시키고 있지만,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중심지는 아직 뚜렷이 부상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세계적 규모의 전쟁, 즉 대규모 군사동원없는 하이테크 군사세계화는 20세기의 세계전쟁과 달리 노동자-병사의 동원을 극소화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동원과 노동자-시민권의 근대적 연계고리가 끊어지고 있다. 중심부 노동자들이 군사세계화를 시민권의 확장과 연계할 여지는 거의 없다. 용병활용은 상징적이며, 군사세계화는 재정을 악화시켜 외려 사회보장에 대해 역진성을 갖는다. 세계화 시대에 국제적인 교섭력이 취약한 비서구 세계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서구 중심부 노동자들에게도 금융세계화와 군사세계화에 맞서는 새로운 국제체제의 수립이라는 의제가 아킬레스 건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버의 작업은 오늘날 노동과 노동자운동의 위기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향을 정립하는 데 필요충분한가? 꼭 그렇지는 않다. 그렇지만 실버 역시 이 문제를 의식하고 있는데 이는 실버가 '누가 노동자인가?'라는 질문에 해독제를 제시하고자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노동의 중심성은 계속 전위되어왔기 때문이다. 노동의 역사는 노동의 개념과 노동의 조직방식이 일의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에 따라 노동자의 개념도 변해왔다. 가치와 사회관계(구체적 노동의 추상적 노동, 즉 자본으로의 전화로 표현되는 노동-자본 관계)의 생산이라는 맑스적 노동의 형상으로 포착할 수 없는 노동의 새로운 형상들이 문제가 된다.
 
오늘날 노동은 가치와 자본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삶 일반, 따라서 사회성의 (재)생산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돌봄노동을 포함한 가족 안팎의 정동노동/감정노동과 그 상품화, 폐미니즘의 기여). 우리가 노동의 일반화 또는 일반화된 노동으로 개념화해 보려고 하는 이런 경향은 노동의 최종적 위기론에 대한 또 다른 대답의 방향이다. 유럽의 대령실업과 사회적 위기는 노동의 소멸이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예증한다. 사회적 삶 일반, 즉 사회성의 (재)생산이 노동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노동이 잠재적으로 정치적인 행위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란 공동체·사회성을 어떻게 구성·조직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의 전화는 여전히 공동체의 재구성에서 핵심을 차지한다.
 
문제는 노동중심성의 전위(표상, 의미, 조직, 실천 등)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와 함께 사회적 삶 일반을 (재)생산하는 일반화된 노동은 노동자들이 여전히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정치의 (잠재적) 주체라는 것을 함의하면서도 노동자운동의 방향이 달라져야함을 뜻한다. 노동의 현실과 개념 자체의 역사적 변화에 토대를 둔 '사회운동적' 노동자운동이 그에 대응하는 하나의 길이 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실버(그리고 라이트)의 연합적 힘에 관한 논의에 동의하면서도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이를 보완해 발전해 나갈 필요성을 느낀다. 연합은 다양한 (잠재적) 정치주체들의 동일화를 뜻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노동자운동의 과제와 페미니즘의 과제는 노동의 일반화와 노동-가족의 상호작용 속에서 공감의 계기를 확장하고 있다. 두 운동은 기차의 레일처럼 어느 한쪽 없이 자신의 과제를 온전히 이루어낼 수 없다. 하지만 두 운동이 추구하는 보편성은 서로 감축 불가능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복수(複數)의 보편성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며, 이렇게 감축 불가능한 차이 때문에 소통이 더욱 필요하다. 이런 소통없이 기업이나 산업에 토대를 둔 노동 중심성을 전위해 지역적·국가적·국제적 수준에서 연합의 힘을 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운동적 노동자운동은 이런 인식에서 출발해야할 것인데, 이는 지난 노동운동의 추세를 연구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버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페르낭브로델센터의 연구집단이 실시한 공동작업에서 시작된 실버의 연구는 한편에서 노동(운동)의 역사를 다룬 이 책의 발간으로 진행됐고(이 책 『노동의 힘』은 출판된 이후 많은 연구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20005년에는 미국 사회학회의 최우수 출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에서 세계자본주의의 헤게모니 교체를 분석하는 지오반니 아리기와 공동작업으로 진행됐다. 아리기와 함께 펴낸 『근대세계체계의 카오스와 거버넌스』(1999) 이후 실버는 아리기와 함께 20세기말 이후 세계체계의 변화를 19세기와 대조하는 여러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노동의 힘』은 실버와 아리기의 장기 20세기에 대한 다른 작업들과 함께 읽을 때 비로소 그 온전한 그림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번역작업에는 기획에서 출판까지 약1년의 기간이 걸렸다. 공동작업은 시간을 줄여주기도 하지만 번역용어의 통일에서 문체의 조정까지 예상치 못한 작업에 시간을 쏟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번역을 할 때 늘 그렇듯이 이 책을 번역하면서도 적절한 번역어를 찾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일례로 실버가 데이비드 하비에게서 빌려와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는 데 중요하게 사용한 'fix'라는 용어를 우리는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재정립'으로 번역했는데, 본래의 함의를 완전히 담아냈다고 할 수는 없다. 하비는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영어 'fix'에 담겨 있는 이중의 의미인 '수선'이라는 함의와 특정한 방식으로 '고정' 시킨다는 함의를 동시에 포함시키려 했는데, 한국어에는 그에 상응하는 단어를 찾기 힘들어, 이 두가지 함의를 어느정도 담을 수 있는 '재정립'으로 번역하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백승욱이 서문과 I~II장을, 윤상우가 III장과 부록을, 안정옥이 IV~V장을 번역한 뒤 번역자들이 번역을 서로 돌려보며 오역을 수정하고 용어와 문체의 통일을 이루도록 노력했다.
 
위기의 시대에 사회과학적 분석력의 중요성에 다시 힘을 실으려 노력하는 도서출판 그린비가 있기에 이 책의 출판이 가능했다. 편집과정에서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준 데 대해 편집부에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이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논쟁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2005년8월
옮긴이 일동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