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7/10

1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10/05
    아를의 하얀 햇빛
    겨울철쭉
  2. 2007/10/04
    스위스, ‘서쪽숲’을 만나다(4)
    겨울철쭉
  3. 2007/10/02
    프라하,동화속 풍경?
    겨울철쭉

아를의 하얀 햇빛

아를의 하얀 햇빛

남프랑스의 아를. 스위스를 떠나서 간 이 곳에 온 것은 순전히 고흐 때문이다. 고흐가 그림에 담았던 햇빛을 직접 보고, 피부에 담고 싶어서다.

아비뇽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아를. 남프랑스의 첫 느낌은 ‘밝다’는 것이다. 이곳의 태양은 어느 곳보다 밝게 빛난다. 이곳보다 위도가 더 낮은 동남아 같은 곳보다 더 밝은 빛을 띈다. 그 빛은 모든 것을 희게 빛나게 만든다.



모든 것에 흰색이 섞여들어간다. 왜 고흐가 유화를 그리면서 흰색 물감을 그렇게 많이 사용해야했는지 알 수 있을 것같다. 들판에도, 나무에도, 론강의 강물에도, 집들에도 흰색이 넘치고 눈부시다. 그것은 강렬하기는 하지만, 뜨겁다는 느낌보다는 ‘밝다’는 느낌.

고흐가 그렸던 몇군데 장소를 찾는다.
첫날 밤은 하늘이 흐려서, 밤늦게 까지 기다렸는데도 아쉽게 론강에 비치는 별빛을 보지는 못했다.
이튿날. 고흐가 그렸던 랑그루아 다리를 찾아간다.(이제는 아예 반 고흐 다리로 불린다.) 버스가 다닌다고는 하지만 시간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를 시내에서부터 운하를 따라 걸어가기로 했다. 지도에서는 그리 멀어보이지 않는 그곳까지 따가운 햇빛을 맞으며 40여분을 걸어서 도착했다. 자갈길을 걸으면서 벌써 발이 아프다.

고흐는 햇빛이 있는 현장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이런 곳을 매일 그림을 그리기위해서 오갔을 것이다. 마치 농부가 자신의 밭을 갈기위해서 찾아가는 것처럼, 하나의 노동처럼.



다리와, 주변의 들판을 둘러본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도 흰빛이 가득하다. 한참을 들판을 바라보았다. 어찌보면 평범하고 단조롭기 그지없는 들판에서 고흐는 어떻게 그렇게 살아있는 장면을 포착하고 그려낸걸까. 자연의 깊은 곳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고흐는 그 곳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과 함께 찾아낸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깊이 느끼고 포착해야 가능한 일이다.



천천히 걸어돌아오면서 발견한 건, 반짝거리는 무언가였다. 그것은 흔들리는 나뭇잎.
바람은 나뭇잎은 흔들고, 햇빛이 반짝거린다.
그 흔들림은 사진으로도 잡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반짝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흐는 다소 거칠고, 역동적인 붓터치를 통해서, 정지한 화면에 반짝거리는 빛의 강렬한 움직임을 그려넣었다.

시내에 들어와서 고흐가 머물렀던 요양원과 고흐가 그렸던 ‘밤의 카페’(이제는 이름이 반 고흐 카페)를 둘러본다.



아를 시내에는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로마 시대에 갈리아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였기 때문이다. 아를의 햇빛에 받아 빛나는 그 유적들도 무척 아름답다. 하지만 고흐는 고집스럽게 ‘어디에나 있는’ 밀밭과 들판, 복숭아나무, 빨래하는 여인, 추수하는 농부를 그렸다. 고흐는 평범한 것들 안에 있는 진실을 만날 수 있게 캔버스에 담았고,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다.

모든 것을 가장 밝게 빛나게 하는 아를의 햇빛 아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방법을 다시 생각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스위스, ‘서쪽숲’을 만나다

스위스, ‘서쪽숲’을 만나다

사실 스위스를 일정에 잡으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산이 뭐 어딜가나 똑같지”라는 게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이내 알게되었다.



스위스에서 닷세를 보내는 동안 하루는 이래저래 이동하는 날이었고, 사흘은 날씨가 흐렸다. 알프스의 깊은 산은 항상 구름을 만들어내서 흐린날이 더 많다. 그렇지만 그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인상적이다.

수만년 동안 빙하가 만들어낸 U자형 계곡(나는 이게 교과서에만 나오는 개념인 줄 알았다)은, 목축을 하는 마을 바로 뒤편에 3000-4000 미터짜리 절벽을 만들어놓는다. 그 밑에는 빙하가 녹은 자리에 호수가 만들어지고, 석회질의 흰빛이 섞인 물은 청록색으로 빛난다. 이제까지 자연에 대한 내 관념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규모의 경관이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서부터 펼쳐진다.

그 자연은 이제까지 인상적으로 보았던, 인간이 만든 모든 건축물들을 왜소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에펠탑이든, 빅벤이든, 브란덴부르크문이든, 어떤 것을 그 근처에 가져다 놓아도 장난감처럼 보일 수밖에 없을 테고,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비교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자연만이 만든 풍광은 아니다. 사람들이 만든 건물은 자연의 거대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목축업이 만든 푸른 초원은 더 넓게 시야를 확장시킨다.)



거대하다는 느낌을 넘어 그것은 숭고함을 느끼게한다. 자연에서 느끼는 숭고함이란 감정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걸까. 사람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전에 ‘레미제라블’에 공연에 대한 느낌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의 내면에 진실로 충실하고, (그것이 비극일지라도) 운명에조차 맞설 때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자연의 숭고함은 그와 같지는 않다. 그것은, 압도적인 어떤 힘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고, 그 앞에서는 자신의 운명에 대면할 때 가지는 감정을 갖게 한다. 그 안에서도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자연의 위대한 힘을 또한 인정한다는 것. 또는 온갖 운명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지켜낸 위대한 인간과도 같이, 수만년 동안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온 위대함에 대한 감정이랄까.



다시,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 숭고함 앞에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내가 충실해야할 나의 내면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스위스에서의 여행이 좋았던 것은 단지 그러한 자연이 그곳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의 여행은, 여행자를 ‘생각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새로운 볼거리를 쉼없이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산을 오르거나 내리면서, 한걸음 한걸음 계속 변화하는 광경은 끊임없이 새롭다.) 오히려 그냥 그것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그 속에서 그 자연은 눈앞 시야에 틈을 벌여준다. 그곳 뒤에서 ‘나’를 만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충실해야할 나는 누구인가. 내가 가졌던 사고와 이념, 감정들은 무엇이고,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제까지 살면서, 나 자신보다는 오히려 나의 어떤 의무감, 책임감 같은 것들이 나를 대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자신을 지워가거나 억압하면서.

심지어 운동에 대해서도 그렇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그것은 어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먹을거리를 만들고 자신의 노동으로 세상을 만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그들의 권리를 위한 정의가, 어떤 대의명분 이전에 “내가” 운동하게 하는 근원적인 동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고흐의 그림 ‘감자먹는 사람들’과 막 추수가 끝난 남프랑스 아를의 들판에서도 그것을 다시 생각한다.)

스위스에서 마지막 일정을 보낸 루체른. 운좋게도 그날 날씨만은 맑았다.
그날 오른, 알프스 봉우리들이 보이는 ‘리기쿨룸’이라는 산을 천천히 걸어내려오다가 문득 산속 마을의 벤치에 앉았다. 날씨가 흐려서 정작 그곳에 갔을 때에는 눈보라만 보았던 알프스 최고봉이라는 융프라요흐와 그 밑의 숲이 보이는 곳. 그리고 MP3 플레이어에서 이적의 ‘서쪽숲’이라는 노래가 흘러 나온다.



나 어릴 적 어머니는 말했죠
저기 멀리 서쪽 끝엔 숲이 있단다
그곳에선 나무가 새가 되어
해질 무렵 넘실대며 지평선 너머로 날아오른단다
오, 내 어머니, 오, 난 가지 못했죠
오, 난 여기서 언젠가 언덕을 넘어 떠나고 말리라 노래만 부르죠

커갈수록 사람들은 말했죠
어디에도 서쪽 숲같은 건 없단다
너는 여기 두발을 디딘 곳에
바위틈에 잡초처럼 굳건히 견디며 버텨야한단다
오, 내 어머니, 오, 난 가지 못했죠
오, 난 여기서 언젠가 언덕을 넘어 떠나고 말리라 노래만 부르겠죠


노래를 듣다가 뭉클해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먼길을 떠나 바로 여기서 서쪽 숲 앞에 선 느낌이었고,
천천히 자리를 일어나면서 다시 조금 커가는 느낌이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프라하,동화속 풍경?

지금은  피렌체.
베를린에서, 프라하, 비엔나를 거쳐서, 스위스에 있다가, 남프랑스(아를과 아비뇽)를 지나서 막 이탈리아 도착. 한동안 인터넷이 잘 안되는 유스호스텔 숙소에 주로 있다보니 아주 늦은 여행기를 올린다. 지나간 다른 곳들은 차근차근. 일단 프라하부터.

프라하, 동화같은?

주말에 도착한 프라하에는 무척 많은 사람들이 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온 관광객들이 많은데, 가까우면서도 물가가 상대적으로 싼 이곳에 주말이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프라하의 舊도심은 중세 건물들을 보전하면서, 마치 ‘동화 속 나라’같다. 너무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도시들의 전경

유럽의 도시들을 다니다보면 한 가지 일반적인 특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도시의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전경들이 고풍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로 뭉뜽그릴 수는 없다. 각 도시들(내가 간 주로 각 국가의 수도)은 그곳이 가장 정치적, 경제적으로 흥기할 당시의 건물들이 주로 전경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런던과 빠리는 19세기의 건물들, 암스테르담에는 17세기의 건물들, 오스트리아에는 합스부르크왕조가 융성했던 18-19세기 건물들이 주로 도시의 전경을 형성한다. 그런 점에서 프라하의 중세적인 풍광은 한때 보헤미아 왕국,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융성했다가 16세기 이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흡수된 이곳의 역사를 보여주기도 하는 것같다.

중세적인 풍광, 색감

프라하의 유명한 건물들은 주로 그런 시기에 지어진 것들이다. 프라하성, 까렐교, 화약탑 등 주요한 관광지이며 유명한 건물들이 그렇다.

그런데, 이런 풍경들은 왜 ‘동화속’처럼 보일까?
우선, 풍광자체가 미적으로 아름답다. 내가 놀라면서도 의야했던 것은, 정작 많은 곳에서 자연적인 풍경은 한반도와 그리 다르지 않은 곳들도 많은데 왜 이렇게 다른 느낌이 들까했던 점이다. 그것은 주로 그곳의 사람들이 만들어 더한 풍경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색감.
(하지만 지금 다녀온 알프스는, 자연적 풍광자체가 다르다는 점은 언급하자)

한반도의 옛 건물들은 주로 자연속에서 튀지않고, 자연과 유사한 색을 사용해서 그 속에 묻히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그런데, 이 곳은 자연의 색과는 대비되는--주로 보색으로 건물들을 짓고, 그것은 뚜렷하게 드러나고, 풍광 속에서 나름의 미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한반도의 옛 건물들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다른 미적 효과를 만든다는 점).

녹색의 산 속에, 하얀벽과 빨간 지붕으로 만들어진 집들이 드문드문 있을 때, 그것은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재밌는 색감의 조화를 이룬다.



중세적인 풍광, 동화

한편,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에 더해서 '동화 속같다‘는 느낌은 이내 조금 씁쓸함?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우리가 어릴 적부터 듣고, 읽고, 영상으로 접했던 ’동화‘가 거의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다소 괴기스러운 민담들을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로 재창조한 그림형제의 영향이 크긴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이’라는 근대적인 개념을 발명하고, 어린이들에 ‘적합’하다고 판단된 관념과 관행을 만들어낸 것이 유럽이라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어린이라는 개념과 “어린이용”의 여러 가지 것이 그대로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들도 있었다. (그들은 성장기에 ‘보호’받지만 한편으로는 과소인간으로 절하되고 시민권에서 배제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프라하의 풍광이 동화스럽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프라하라는 도시의 역사와, 어린이와 동화라는 근대적 발명품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을 것같다. 이런 역사들이 만나서 “동화같은 도시 프라하”라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이 흥미롭다.

내가 이 도시에 간 것이 주말이었기 때문이었겠지만 이곳은 마치 말그대로 “관광지”같은 느낌이다. 번잡한 기념품가게, 여행객을 상대로 뭔가 팔아보려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곳이 가장 낭만적인 도시라고 말하지만, 내 느낌은 별로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무척 아릅답다는 것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다.)

(순전히 개인적인) 내 느낌과 어느 정도는 취향으로, 오히려 낭만적인 곳은 빠리인 것같은데, 어떤 낭만적인 분위기라는 것은 건물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곳의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건물들이 만드는 풍광은 어쩌면 덜 아름다울 수 있어도 빠리가 더 낭만적인 도시로 느껴진다. (빠리가 낭만적인 도시로 느껴지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원인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같다.)

여튼 프라하는 가볼만한 도시. 아름답다.

***

국립박물관 앞에 바슐라프 광장.
이곳은 1968년 ‘프라하의 봄’과 잇따른 소련군의 침공이 이루어진 곳이다. 시간이 늦어져서 박물관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 앞에 어쩌면 별로 눈에 띄지않게 거리에 놓여진 십자가를 볼 수 있었다. 바로 프라하 봉기를 촉발했던 Jan Palach, Jan Zajic 두 청년의 분신이 일어난 장소.

다시, 사회주의에 대해서 묻게 된다. 누구를 위한 누구의 사회주의? 인민을 위한, 인민 스스로의? 혹은 사회주의 조국 수호를 위한, 소련에 의한? 그러나 한편으로 두 청년이 원했을 것이 자신이 싸운 이 도시를 북적거리는 관광지로 만드는 자본주의는 아닌 다른 것이었을 수도 있을 텐데.. 지금 이 거리의 사람들은 무엇을 원할까.

이곳에 장미꽃이 놓여있다. 긴 시간이 지나서 이렇게 죽음이 기억된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열사들이 사리진 곳에 우리는 변변한 상징도 없구나. 겨우 남아있는 청계천, 전태일 열사의 동판 말고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