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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2/29
    오아시스와 장애인 영화에 대한 단상(4)
    장작불-1
  2. 2006/12/28
    장애인-비장애인 논란을 지켜보며 드는 생각들...
    장작불-1
  3. 2006/12/25
    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장애운동사적 의미에 관해
    장작불-1

오아시스와 장애인 영화에 대한 단상

이 블로그를 찾는 분이 누구신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앞서, 저의 글에 어떤 분이 트랙백이라는 걸어두었기에, 잠시 그 곳에 다녀왔습니다만...

(저는 컴맹에 가까운지라...ㅠㅠ 한글 작업만 주구창창... )

 

그래서, 상당히 어색합니다. 누군가가 이 곳에 다녀가고 있다는 사실이...

 

사실, 만들 때에는 제가 쓴 글을 차곡차곡 모아놓고 싶은 바람(별로 쓴 것도 없지만서리...)도 있고, 무엇보다 '장애' 문제 '인권' 문제의 상관성과 장애인권운동의 방향이나 구체적 기획 등을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 하는 소박한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막상 만들고 나니, 하도 야릇한 느낌이 들어 지워버리려고 했는제, 지우는 방법을 찾지 못해 결국 남겨 두었음다. (지금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왜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인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처음인지라..아마도 이런 묘한 심사에 시달리는 것이겠죠.) 그런데 하루 지난 다음 날 보니, 무려 20여분이 왔다갔다는 내용이 뜨고, '무슨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비워두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에 글을 올려두었는데,

 

무려 160여분이 다녀갔다는 기록이나오더군요. (억! 소리가 났습니다.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구요...)

 

어떻든, 그래서 아직 이 블로그를 어떤 용도로 쓰는 것이 적절한지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만든 것이 저이니, 그냥 방치해두지 못해, 지난날 썼던 글을 하나씩 올리고 있습니다.

 

이 글은 '장애코드로 문화읽기'라는 장애문화 공동체에 제가 올린 것인데... 막상 지난 글을 올리려고 하니, 앞서 '제 글을 차곡차곡 올려두고 싶다'는 생각과 달리, '제 글을 울궈먹는다'는 생각이

들어, 이처럼 약간의 거부감이 생겨나는 듯 싶기도 합니다. ....  블로그에 대한 제 입장이 분명해지면, 덜하려나...

 

아, 어떻든, 왜 이 글을 쓰는지 여전히 묘연한 상황에서, 주절주절 거렸습니다.

 

아래는 말씀드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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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와 '장애인 영화'에 대한 단상(斷想).


이 글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를 둘러싸고 생겨난 논란과 관련하여, '장애인 영화란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아야 할까' 라는 물음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한 글이다. 이를 위해 <오아시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몇몇의 글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는 장애인의 현실(장애인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 퍽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장애인인 공주 명의를 빌려 새 아파트에 들어가 사는 그의 오빠, 공주와 한 집에 있는데도 상관 없다는 듯이 성관계를 맺는 이웃 부부, 종두네 가족 사진 찍을 때 짐짝 부리듯이 공주의 훨체어를 옮기는 종두 형, '너 변태지, 저런 얘에게 성욕이 생기데...' 라고 말하는 경찰까지. <오아시스> 이전에도 장애인 등장 영화, 예컨대 <고양이를 부탁해> <안녕 유에프오> 등을 보면 장애인과 관계 맺는 비장애인의 모습이 드러나긴 했으나, 이처럼 선명한 방식으로 나타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장애 여성의 현실/삶을 다루지 않았다'는 식의 적지 않은 비난을 몇몇의 비/장애 여성들로부터 거세게 받았다. 가령 장애여성 <공감>이란 단체 구성원인 박주희씨는 '오아시스는 없다'는 글에서 "강간은 사랑이 아니"며 "감독의 상상처럼., 장애 여성은 비장애여성이 되길 염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해야 할 일이라면, 장애 여성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의사 표현을 한다"고 주장하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장애여성"으로 그려 두었다 비판했다. '영화 <오아시스>에서 보여주지 않는 것에 관하여'의 홍성희씨는 "종두와 달리 공주에 있어서는 환상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으며,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서의 현실적인 삶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 즉 "진짜 장애여성으로서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반면 류미례 감독은 '정상화의 관점에서 본 영화 <오아시스>의 소중함' 이란 글에서 <오아시스>는 기존 장애인 등장 영화와 달리 장애인을 특별하게 다루지 않는, '장애 문제에 관한 조용히 스며드는 계몽 영화'라는, 그들과 더러 상반된 주장을 했다. <오아시스>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다르지 않다'고 습관/상투적으로 읊조리는 비장애인들로 하여금 '진정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는가' 라고 두 시간 내내 묻고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주장은 제 나름의 일리가 있는 듯 하나, 꼼꼼히 따져보면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다. 우선 류미례 감독의 경우, <오아시스>가 '장애 문제에 관한 조용히 스며드는 계몽 영화'라 주장하는데, '계몽 영화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남아 있다. 만약 영화에서 등장하는 비장애인들의 일방적인 태도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계몽 영화'라 한다면, 비장애인들의 태도를 '사실적'으로 그리기만 한다면 그것이 곧 '계몽 영화'가 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언급한 다른 장애인 등장 영화와 <오아시스>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의 물음 등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 류미례 감독처럼 '내가 장애인을 평소 어찌 대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적 태도를 취할 것인가도 남아 있다. 나로선, 이 대목에 대해 회의적이다. 우리들 대개는 어떤 영화를 볼 때,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읽고자 하는지 의식하기 보다 영화 소비자로서 등장 인물들의 행위가 '좋았다/나빴다'는 식의 정서적 반응/인상만이 남을 가능성이 크다 생각한다. 영화 속 인물들의 부정적인 모습에 대해 자신의 삶의 태도와 무관하게, (타자의 부정적인 모습에선)'나를 예외로 한다' 할까. 그런 점에서 <오아시스>는 장애 문제에 대한 '계몽의 가능성이 있는 영화'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창동 감독은 <오아시스>를 만든 목적이 '장애인의 현실이니 장애 문제니 등을 다루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다는 것이다. 즉 그에게 '장애/인 문제'는 부차적이었거나, 거칠게 말해 고려/계몽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조용히 스며드는 계몽 영화'라는 류미례 감독의 비평은 감독의 의도/목적에 바탕해서 글을 썼다기보다 장애 운동이란 차원에서 정리한 것이라 짐작된다. '장애 여성을 수동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박주희씨나 홍성희씨의 비판도 이창동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관심하기 보다, 얼핏 보면 수동적으로 그려지는 장애여성이 등장하는 영화 <오아시스>가 낳을 수 있는 부정적 효과에 주목한 바가 아닐까 싶다. 다만 류미례 감독이 생각한 것과 달리 이들은 대개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장애인을 어찌 생각하는가'에 대해 성찰적 태도를 취하기 보다 '장애 여성은 사랑하는 사람이 억울하게 잡혀가도 말도 못하는 사람이다'는 식으로 오해/이해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주목하여 비판한다.

하지만 박주희씨가 '장애 여성이(의 관점에서) <오아시스>를 읽었다'는 대목은 앞서 '조용히 스며드는 계몽 영화' 라는 것 만큼이나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다. '장애 여성의 관점에서 읽는 것과 비장애 여성의 관점에서 읽는 것이 어떤 차이가 나는가, 장애 여성이라 할 때, 모두 같은 생각을 한다 할 수 있는가' 등의 물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오늘날 장애 여성의 현실/삶을 그려내지 못했다'는 비판은 <오아시스>라는 영화의 목적과는 다소 거리가 있고, 그래서 비판의 초점이 모호하다. 그럼에도 이 같은 논란은 장애/인 문제와 관련한 담론의 빈약한 우리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 어떤 매체에 등장하거나 다루어지는 장애/인 문제에 대해 장애인 당사자의 시선으로 읽고 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해 보는 것은, 비록 그것이 작품 목적/의도와 거리가 있다 해도 장애/인 문제를 다시 환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장애인의 현실에선 말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대목이 있다면 이 같은 논란이 생기게 된 '그렇다면 장애인/여성 영화란 무엇인가. 장애인/여성 영화는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아 내어야 하는가'에 대한 생산적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난날 <오아시스> 논란은 저 정도 수준에서 그친 채, 끝나고 말았다. 여기에서 그 까닭을 해명하는 것은 나로선 무리인 바, 다만 이 논란을 통해 마련된 '장애/인 영화는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아야 할까'에 대한 물음과 관련하여 내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해보고자 한다.

영화 <여섯 개의 시선> 중 여균동 감독의 <대륙횡단>을 보면 장애인의 외출 장면이 등장한다. 대개 가족과 함께 외출하던 주인공 김문주. 어느 날 그는 혼자 외출해 보리라 마음을 먹고 목발에 의지한 채 나오는 중, 아파트 문을 잠구다가 키를 땅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다. 그런데 지나가던 위층 아주머니 왈, '아이구,,, 문주 어디 나갔다 오는가 보네.. 엄마는? 열쇠 떨어뜨렸네.. 자 내가 열어줄께... 집에 들어가서 엄마 기다리고 있어...' 라고 말하며 바깥으로 나오려던 그 이를 되려 집 안으로 밀어 넣고 만다. 아주머니로선 '호의/선의'를 베푼 것이었지만 김문주로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장면, 즉 비장애인의 호의나 무관심이 장애인에겐 난감한 일로 다가가는 일이 장애인의 일상에서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대다수 비장애인들은 이런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호의가 예의 장애인에게 '고마운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소박한 (그러나 장애인 입장에선, 때론 폭력적인) 바람말곤 없다는 것이다. 마치 <오아시스>에서 강간 혐의로 종두가 잡혀나가던 순간, 경찰서에서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한 분노와 자책, 그리고 자괴감 등이 폭발하여 캐비넷에 머리를 박치기 하던 공주에게 '아가씨... 모두 끝났어요... 이제 안심해요' 라고 말하던 올케의 모습처럼 말이다. 여기에서 나는 비장애인의 호의가 장애인에겐 어떤 식으로 엇나가거나 뒤틀리는지에 대한 관계 맺기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장면들이 담겨 있다면, 그것을 일러 '장애인 영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와 유사한 상황을 저지르곤 하는 비장애인들이 그런 엇갈림의 장면/영화를 보았다면, 그나마 장애인을 달리 대할 수 있는 가능성, 류미례 감독의 표현을 빌자면 '계몽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쓰고 나니, 중언부언한 듯 하다. 이 글에서 나는 <오아시스>를 둘러싸고 오간 비판들을 통해 장애인 영화는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아야 할까 하는 물음에 대해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관계 맺는 방식, 그 중에서 특히 비장애인의 호의가 장애인의 실제 삶에 어떤 식의 부정적/긍정적 영향을 미치는가를 관객들이 보고 헤아릴 수 있을 때, '장애인 영화'일 수 있음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았다. 물론 이는 매우 기본적인 수준의 답변이고 이후로도 이 물음은 지속되어야 하고, 그에 따라 풍성한 논의가 따라야 할 것이다. 하기에 '장애 운동'을 한다는 우리들이 해야 할 몫이란 장애 차별의 현실을 구체적 영상에 담아낼 수 있도록 좀 더 섬세하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 맺기 방식에 대해 관찰/성찰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들의 삶이 곧 운동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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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비장애인 논란을 지켜보며 드는 생각들...

지난 8월달에, 대한항공에서 지적(정신지체, 발달, 정신 등) 장애인 탑승 거부 사건이 있었죠.

 

오늘(28일) 위드뉴스를 보니깐, 국가인권위 진정을 받아들여 '철회'하겠다고 했다고 나오던데요.

 

그런데, 당시 이 사건이 촉발이 되어, 인터넷 다음에서 꽤나 논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반응을 나름대로 분석해서 보고 있는데, '장애인-비장애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분들이 적지 않더군요. 그러다가 지난 6월 즈음에 다음 아고라에서 '장애인-비장애인' 논란이 있었더군요.

저도 '장애 운동가'랍시고 '비장애인'이라는 말을 썼는데, '왜 일반인/정상인을 일러, 비장애인이라고 해야 하느냐' 라는 문제제기는, 타당성 여부를 떠나 검토할 필요는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헤아려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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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비장애인’ 논란을 지켜보며
드는, 몇 가지의 생각들. .


‘장애인’이라는 용어는 1981년 제정된 심신장애자복지법이 1990년에 장애인복지법으로 개정될 때, 당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장애자의 ‘자(者)’라는 글자가 ‘놈 자’라 하여 인격을 비하하고 일본식 표기이므로, 이를 ‘사람 인(人)’자로 바꾸어주라고 요구함으로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은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공식적인 법적 용어로 자리 잡았고, 다수 사람들은 ‘병신’이나 ‘불구자’, ‘비정상인’이 아닌 ‘장애인’으로 호명했다. 물론 ‘장애인’이라는 용어 역시 임의적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존재 규정의 측면에서 볼 때, 진일보했다 할 것이다. 이는 지난날 ‘장애를 가진 사람’을 규정했던 용어와 대비해서 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장애인’을 일컬었던 단어를 나열해보자면, ‘병신, 불구, 폐질자, 앉은뱅이, 절름발이, 절뚝박이, 반신불수, 찐따, 쩔뚝이, 난쟁이, 곰배팔이, 외다리, 외발이, 외팔이, 장님, 맹자, 소경, 봉사, 애꾸, 외눈박이, 벙어리, 아자, 귀머거리, 백치, 정신박약아, 정박아, 미치광이, 정신병자, 미친 사람, 조막손, 육손이, 곱추, 꼽추, 곱사등이, 문둥이, 나병환자’ 등 정신/신체적 결손에만 주목한 호명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단어들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장애를 가진 존재’에 대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범위 내에서 저와 같은 부정적 용어는 점차 소멸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몇 년 전부터 이른바 진보적인 언론 매체를 중심으로 ‘정상-비정상’의 구도를 탈피하고, ‘장애’를 기준으로 ‘장애인-비장애인’이라는 구도로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소수자였던 장애인이 다수자를 규정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비장애인’이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제기되자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일련의 사람들이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동의/공감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곧잘 제시한다. 내용인 즉, 비장애인은 ‘장애’를 기준으로 제시된 용어이고, ‘비(非)’라는 용어가 대체로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일반인’ 혹은 신체/지적 기능에 있어 ‘장애’가 없다는 점에 주목하여 ‘정상인’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장애인의 반대어/개념은 비장애인이 아니라 일반인 혹은 정상인이라는 것이다. 이들 주장을 호의적으로 해석하자면, 장애가 없는 자신들을 정의하는데 있어 ‘장애가 없는 상태’에 주목해야지, ‘장애가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정의/언어화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장애인과 대비되는 차원이 아니라, 본래적 속성에 주목한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이란 인터넷 싸이트에는 ‘아고라’ 라고 불리는 게시판이 있다. 장애인-비장애인 논쟁은 이 게시판에서 일어난 일이다. ‘민아’라는 아이디를 쓰는 어느 (여)학생이 “‘비장애인’이란 말 쓰라고 강요하지 마세요”라는 글에서 촉발되었는데, 내용인 즉, 장애인 행사(이 말도 쓰고 나니, 이상하다.)에 자원 봉사하러 갔는데, 인사말을 하던 중 ‘저희 같은 정상인.... 어쩌구 저쩌구’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장애인이 인상을 쓰면서 ‘정상인은 잘못된 말이다. 비장애인이 맞는 말이다’ 라고 하여 ‘과연, 그런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장애인이 하라는 대로 했다고 한다.)

‘민아’라는 이의 주장은 ‘정상인/일반인을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글에서 제시하는 두 가지의 근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신체적/정신적 기능이 정상적인 사람들은 ‘정상인’ 또는 ‘일반인’이고, 신체적/정신적 기능에 ‘장애’가 있는 비정상인 사람들은 ‘장애인’이다. 띠라서 ‘장애인’의 반대말은 ‘정상인’ 또는 ‘일반인’이다. 그러므로 ‘정상인/일반인’을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② 그리고 장애인을 염두에 두어 배려의 차원에서 비장애인으로 부르거나 혹은 장애인이 일반인을 일러 비장애인이라고 부르기를 원한다고 해서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동정이다 (따라서,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장애인을 동정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 ①번의 근거는 이후 점검하기로 하고, ②번의 근거는 실제 많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내용이다. 인용문을 보자

“민아님, 당신처럼 정상인과 장애인과 벽을 두는 우리 정상인을 때문에, 그들의 살 권리, 살아갈 용기를 잃는 장애인을 위한 최대의 배려입니다.. 그래도 님아..정상인이라는 말을 굳이 써야겠습니까?” (떠나자, 민아님!! 답변해 주세요) “비장애인이라는 말은 장애인에 대한 자그마한 배려라고 생각하면 좋을듯 싶습니다.”(제트, 말에는 어감이라는게 있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는 호칭사용이 필요한 것입니다. 장애인들은... 자신의 몸이 남들보다 약하다는 이유 때문에 열등감과 소외감을 느끼는 정도가 매우 심하다는거죠. 이러한 장애인들의 특성을 이 글쓴 님처럼 비장애인이라는 단어가 국어문법상으로 잘못된 말이고 장애인들 스스로가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며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장애인들은 육체의 결함과 함께 정신적 결함도 함께 가지고 있으므로 장애인의 반대말은 "정상인" 이다라는 말은 통용이 안되는 거죠?”(문경지교) “그거 한 가지만 가지고도 굳이 자연 법칙상 10%나 차지하는 신체장애(본인들이 원해서 된 것도 아닌데)를 자존심 상하게 할 거까진 없지 않아요?(ttzkldf)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분은 '장애' 즉 이른바 '비정상'이 사회적 표준이 되어 그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관심과 노력이 전제되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에 의해 상처받는 우리의 이웃을 조금 더 생각 했으면 합니다.”(햇빛아래)

인용한 글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주장이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배려하기 위해 쓸 수 있는/쓰는 용어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민아’들은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장애인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동정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비장애인이라는 우월적 처지에서 장애인을, 이른바 봐준다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동정’과 ‘배려’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정상인’이라는 용어에 대한 반감 차원에서 비장애인이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기도 하다.) 적어도 저 위의 인용문에서 등장하는 일련의 진술들을 통해서는 ‘배려’와 ‘동정’에 대한 명확한 구별을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여기에서 ‘배려’와 ‘동정’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 배려 :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거나 보살펴주는 것
* 동정 :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을, 또는 그런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알아주고 마음 아파하는 것, 또는, 그런 마음으로 도와주는 것

사전적 의미 차원에서 볼 때 위의 진술들은 ‘동정’에 가깝다. ‘배려’가 실천적 의미에 가깝다면, ‘동정’은 어려운 사정을 헤아리고자 함(마음 씀씀이)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동정’이 나쁘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요는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비장애인이라고 부른다고 할 때, 이 호명의 조건이 장애인에 대한 배려나 동정에서 기인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그런데 마음 씀씀이와 실천이 간단하게 분리될 수 있을까? 여기에 ‘동정’과 ‘배려’를 객관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 즉 누군가의 말 한 마디나 행동 하나를 두고 그것은 ‘동정’이니 ‘배려’이니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한편 장애인의 입장에서 비장애인으로 부르는 것은 어떤 내용을 의미할까. 이는 장애여성인 김효진의 글 <장애인 관련 용어에 대한 고찰>에서 적절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사회적 약자로서 범주화되는 장애인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장애를 기준으로 한 장애인 중심의 이분법적 사고”인데, “힘 있는 다수의 의도적인 편가르기나 분리와는 달리” 사회적 약자가 자신을 정체성을 구축하고 저항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있다.

즉 사회적 약자 운동의 차원에서 장애인-비장애인 구도는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약자로서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했던 구체적 경험을 통해 제시하는 것이기에 나름의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해 환자로부터 시작하여, 절름발이, 병신, 불구, 장애자, 그리고 비정상인이라는 개념 규정을 '당해왔고', 이는 장애인으로 하여금 자기 존재가 어디인가 결핍되거나 부족하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부정적인 용어들로 이루어져왔음을 밝히고 있다.

이렇듯 ‘장애가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장애가 없는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장애’의 유무라는 일부의 차이로 인해 ‘병신’이나 ‘불구자’로 언어화 되었다. 하지만 이들 용어는 언급했듯이 장애인 스스로를 규정한 말이 아니라, ‘차이’ 나는 상황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소수의 사람들을 그처럼 규정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운동적 실천을 모색했고 그 결과 ‘장애인’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또한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장애를 가지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을 비장애인이라는 용어로서 규정했다.

이는 앞서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비장애인’으로 규정화한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표면적으로는 ‘비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쓰지만, 쓰는 의도는 다르다는 말이다.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장애인에 대한 배려/동정 차원에서 스스로 비장애인으로 규정하여 ‘정상-비정상’이라는 언어 구도에서 비켜서고자 하는 반면, 장애인은 저항적 도구 차원으로 비장애인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주장은 각각 일견 타당한 대목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런 물음이 가능하다. 장애인이라는 단어는 신체적/정신적 장애라는 인간 존재의 하나의 특성에 주목하여 규정화한 것이다. 그런데 비장애인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장애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짝개념으로서만 성립 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용어가 ‘장애가 없는 사람들의 특성’을 보여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을까.

언급한 두 가지의 근거, ‘약자의 정체성 구축을 위한 저항적 차원으로서 쓴다’는 것과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쓴다’는 것이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두고 ‘비장애인’이라고 부를 만한, 불러야 한다 라는 주장의 필요조건은 되기 어렵지 않을까 라는 것이다.

한편 이 두 가지의 주장과는 또 다르게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비장애인’으로 불러야 한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장애 문제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해결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들의 주장은 앞서 두 가지보다 (과학적 사실에 바탕한다는 점에서) 좀 더 설득력을 지닌다. 다음 글을 보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05년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장애인 숫자는 2000년의 145만 여명에서 215만 여명으로 약 70만 여명이 늘어났다. 매년 평균적으로 약 14만 여명이 증가했는데, 이 중 89%가 각종 질환이나 사고 등에 의한 후천적 요인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산업재해로 ‘장애’를 갖는 숫자가 매년 35,000여명이고, 교통사고로 임시 혹은 영구적 장애를 갖는 인원이 매년 100,000여명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노동부, 2002; 건설교통부, 2004). 게다가 이러한 사고 말고도 내외부 신체 기관의 질환 등으로 인해 장애인이 되는 비율이 전체 장애인 중, 약 52%에 이르고 있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05년). 이러한 일련의 수치들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 중 어느 누구도 ‘장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해준다. 즉 ‘장애’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박용민, 2006)

이 글에 따르면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언제나 ‘장애를 가질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저항적 수단’이거나 ‘배려의 차원’보다는 (과학적 차원에서) 좀 더 설득력이 높은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이러한 과학적 사실이 있다 해도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서 장애인의 짝개념으로서 비장애인이지, 이것이 ‘일반인이 아닌 비장애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충분한 근거가 되기에는 미흡하다는 점이다. 즉, 사회적 차원에서 장애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과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일러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차원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만약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장애인이 될 노출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면, 이는 ‘비장애인’이기보다는 ‘예비/잠재적 장애인’이라고 표현/언어화하는 것이 좀 더 적절/설득력이 높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인간언어의 특징이 대상/사물 현상을 기술하고 특성을 포착하여 이론화/명제화하는 것이라고 할 때, 비장애인이라는 명제어는 장애인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 진위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서 정리한, 개념의 내포와 외연에 주목해보자)

정리하자면, 비장애인이라는 단어는 장애인의 짝개념으로서 쓸 수 있는 말이지, 어느 상황에서나 비장애인이라고 말하기에는 곤란하지 않을까 라는 것이다. 어떤 언어 상황 앞에서 장애인이라는 존재가 자리한다면 그 때에는 비장애인이라고 쓸 수 있고 또한 써야 한다고 (심정적으로, 혹은 과학적 이유로) 생각하지만, 장애가 없는 상황에서 비장애인이라고 쓰는 것은 얼마간 어색하다는 것 정도이다.

이 긴 글의 너무 시시한 결론 같다. 이는 글에서도 드러나듯이 ‘장애’라는 용어의 근본적인 한계/부정성에서 기인한다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장애인-비장애인’ 구도는 ‘장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또 다른 용어 정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적어도 운동적 차원의 방식으로는 썩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일 수 있을까? 어려운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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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장애운동사적 의미에 관해

이 글은, 장애인에 대한 호명 문제를 두고 '장애우'라고 부를 것이냐, 아니면 '장애인'이라고 부를 것이냐를 두고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장애운동사의 관점에서 살펴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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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장애운동사적 의미에 관하여> -



이 글은 '장애인-장애우' 논쟁이 한국 사회 장애운동사에서 어떤 의미가 함의되어 있는가를 소략적으로 정리한 글이다. 처음 의도한 것은 '장애인-장애우' 논쟁을 통해 '장애'라는 개념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그러나 내 역량 부족으로 인해 논쟁 과정을 정리한 수준의 글이 되었다. 그럼에도 장애인-장애우 논쟁이 식어 가는 이 시점에 문제를 제기한 박지주씨들과 당사자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정리한 글이 없다는 점에서 이 글의 쓰임이 어느 정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 해 본다.

'장애우' 라는 용어에 관한 문제 제기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별 다른 호응을 얻지 못한 채 개인의 '불만' 정도로 치부되었고 연구소 역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장애인이동권연대 전 사무국장인 엄태근씨와 지난날 연구소에 적을 두기도 했던 박지주씨가 이동권연대와 연구소의 게시판, 그리고 장애인 뉴스 싸이트 등에 기사를 올려 '장애우'라는 용어의 문제성을 적극적으로 환기했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상당수 장애인들이 '장애우'라는 용어가 지닌 문제성에 공감하면서 연구소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엄태근씨의 문제 제기는 설득력이 높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으나, 연구소 입장에선 문제 제기의 쟁점이 무엇인가에 대한 오해를 불러 올 만큼 거친 대목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왜 그들은 장애우라는 말을 유포하는가" 라는 글에서 엄태근씨는 연구소를 일러 "장애인을 주체화하지 않고 대상화"하고 있으며, 연구소와 국가관료를 등치시켜 "장애인들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하여 이 같은 엄태근씨의 문제 제기는 '장애우'라는 용어의 타당성 여부라는 논쟁의 공통 지반을 마련하지 못한 채, 연구소와 감정적 대립을 불러왔다. 이동권연대 사무국장으로 있던 엄태근씨의 정치적 입지와 거친 문제 제기로 말미암아 장애 운동계에서 장애우 연구소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가 라는 생성적 논의/긴장의 장을 형성하기 보다는, 거칠게 말해 '연구소를 씹고 밟음으로서 이동권연대가 크려고 한다'는 오해와 억측을 불러온 것이다.

이동권연대나 엄태근씨가 실제 이런 의도를 지녔는가 하는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다시 따져봐야 할 문제지만, 사실 나로선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해 지금 연구소의 존재 의미/정체성을 비판하기엔 더러 비약적이란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이유인 즉, 이는 이후 연구소의 해명에서 드러나듯이 한국 사회 장애 운동사에서 연구소의 역사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엄태근씨의 문제 제기는 그 의도야 무엇이었든지 간에, '장애우'라는 용어와 연구소의 현재 활동 상황을 혼용하거나 비약함으로서 '장애우' 용어에 대한 논의의 생산성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허나 이를 두고 엄태근씨의 거친 문제제기에만 책임을 두기 어려운 것이,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연구소의 응대 방식도 그 책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소는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해명 과정에서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단체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정체성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불성실하거나 안이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우선, 단체의 지향성을 드러내는데 있어 어떤 단체 이름을 쓰는가 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엄태근씨의 논의에 나 역시 동의한다. 그리고 어느 단체의 표지/이름이란 것은 사회 변동의 차원에서 혹은 단체의 정체성 변동의 산물로서 바뀔 수 있고 또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임을 밝히고 논의를 이어나가 보자.

연구소가 '장애우' 라는 용어에 대해 문제 제기를 받고 처음 해명한 글은 2002년 겨울호 회원소식지에 실려 있다. 그러나 연구소의 소식지라는 무게를 가진 책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 실린 '장애우'에 대한 해명은 단순 소박함, 그 자체로 일관하고 있다. "처음 '장애우'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함께 살아야 할 세상이지만, 아직까지 장애인들이 살기에는 너무나 열악해서 우리 사회가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풀어가고자 하는 의도이다... 지금은 워낙 많은 곳에서 '장애우'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그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모두 나올 수는 있지만, 장애인을 지칭하는 단어에 대해 너무 얽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2002년 겨울호 연구소 회원소식지)라는 진술은 이를 보여준다. 이는 '장애우' 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를 단지 용어에 대한 문제성 정도로 인식했지, 장애인의 정체성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별 달리 주목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런 연구소의 무성의한 태도는 장애인 당사자인 박지주씨들로 하여금 분노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 글에 대해 박지주씨들은 "사회적 약자가 되는 기준과 그 배려는 누가 하는 것입니까? 또한 더디더라도 함께 가자는 외침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장애우 용어의 지속적 사용은 끊임없이 장애인을 사회적 주변부의 존재로 무언가 계속 받아야하는 비생산적인 보호의 대상으로 낙인하고, 그런 영향으로 정책·제도·인식을 만들어 왜곡된 구조를 양산해 낸다고 봅니다"라고 연구소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언급했듯이 '장애우'라는 용어 사용이 이처럼 문제성을 내장했는가 하는 문제는 다시 따져 봐야 할 문제다. 하지만 연구소의 이런 무성의함과 안이함이 장애인들의 이와 같은 분노, 혹은 논의 초점을 흐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할 수 있다. 이런 목소리가 거세지자 연구소는 2003년 2월호 함께 걸음을 통해 '공식적'으로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해 해명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연구소는 지난 소식지에 실었던 '장애우' 용어에 대한 해명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왔다는 점에 대해선 밝히고 있진 않다. 또한 글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과 달리 '장애우'라는 용어 비판에 대해, "이 용어를 만들어 낸 동기나 과정,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말로서 '장애우'라는 용어가 생겨난 의미를 해명하고, 되려 이를 제기하는 이들의 태도를 더러 불온시한다. 이는 2003년 4월호 함께 걸음에 실린 "장애우(友)를 사용하는 우(優)를 범하지 말라"라는 글에서 "문제는 내용, 즉 맥락인데 여전히 장애 가진 사람을 대상화시키며 동정의 눈길을 바라보는 관점이지 '장애우' 용어 자체가 시혜적 관점을 부각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으로 반복된다.

물론 이는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박지주씨들의 문제 제기가 <장애우 라는 용어를 하루 빨리 바꾸는 것이 장애인 복지에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연구소의 정체성에 걸맞다> 라는 식의, 본래 맥락과 다른 차원에서 제기된 비판으로 인해 기인된 바가 없지 않다. 예컨대 2월 호에 대한 박지주씨의 반론 글 중에서 "초기 연구소를 만드신 분들이 장애가 있다고 해서 당사자 주의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진술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당사자주의가 무엇인가 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박지주씨는 '이 사회에서 배제 당한 채 살아온 중증장애인들만이 당사자주의에 합당하고, 하기에 우리 목소리는 정당하다'는 식의, 더러 단순한 논리를 전개함으로서 오해를 불러왔다.

이런 식으로 문제 제기자와 당사자 간의 논점 일탈로 인해 '장애우-장애인' 논쟁의 요체, 즉 '장애우라는 용어를 장애인으로 바꾸는 것은, 오늘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장애인의 삶의 자존감을 조금이나마 복원하는 데 있어 필요한 사안인가' 라는 논의는 초점화가 되지 못한 채, 감정적으로 대립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났다. 그러다 보니 현재까지 두고 본다면 연구소 입장의 최종본인 4월 호에서도 논의의 진척은 안 되고, '장애우' 용어에 대한 거듭된 해명에 이어 결국 문제 제기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무엇이라 부르든지 간에 '취향의 문제다' 라는 식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장애우다 라고 표현한다면 주체성이 결여"된 것이지, 혹은 "나는 장애인이다 라고 말하면 주체적인" 것인지 라고 물으며, "'나는 장애우다'라는 표현이 익숙지 않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틀린 것이 아닙니다. 1인칭으로 사용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장애용어에 대한 선택권은 당사자들에게 있습니다. '장애인'이라는 용어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문제 맥락을 흐리면서 눙쳐 버리는 연구소의 입장은, 적어도 '장애우'라는 용어를 단체 명으로 삼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궁색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지금 우리가 초점화 삼고 있고, 또한 삼아야 하는 것은 '장애우' 용어의 틀리고 맞음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합당한가, 혹은 설득력이 있는가 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장애인-장애우' 논쟁과 관련하여 일련의 과정을 짚어보았다. 그렇다면 이 논쟁이 무엇을 낳았는가를 정리하는 장이 필요하겠으나, 언급했듯이 내 역량 상 이는 어려운 대목이다. 다만 이 논쟁을 지켜본 사람들의 입장을 살피고 난 다음, 무엇을 낳아야 하는가와 관련하여 소략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대체로 다섯 가지 정도의 반응을 보였는데, 첫째는 장애 운동이 여느 사회 운동처럼 내구성도 부족한데 이런 '용어'에 대한 논쟁은 장애계 내에서 분열만 불러오고 소모적이다, 그러니 싸우지 말고 대동단결하자 라는 식의 '좋은 게 좋다'형. 둘째는 장애인을 사용한다고 주체적이고, 장애우를 사용하면 비주체적인가 라는 식의 '논점 흐리기'형. 셋째는 '우(友)'는 운동적 관점이기에 장애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장애우라 부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의 '막가파'형. 넷째는 장애인이란 법적 용어가 존재하고 연구소가 이를 바꾸자고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용어 사용을 사람들의 선택에 맡기고 그것을 존중하자는 '취향선호주의'형. 다섯째는 나는 '장애인'이지 '장애우'가 아님을 조목조목 밝히고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매김하고자 했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소수이긴 하나, 비록 '병신→불구→장애→?'라는 담론적 변화를 제시하진 못했으나, '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지점과 방향을 헤아리는 글도 있긴 했다. 여기에서 '장애인-장애우'논쟁의 의미를 장애운동사의 차원에서 새겨볼 수 있다.

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최종적 귀결은 표면적인 것만 두고 보아서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단체 이름을 바꾸거나 고수하는 것 정도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중증 장애인들이 자신들을 규정하고 불리는 용어를 거부했다는, 이른바 '장애 담론'의 주체 변화/확장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은, 특히 '장애우'에 관한 문제 제기의 축을 이루고 있는 중증 장애인은 어떤 선택권/결정권도 없이 가족과 국가에 의해 배제/박탈당해왔다. 이는 그들을 호명하는 방식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9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장애인에 대한 호명은 중세적·봉건적 용어라 할 수 있는 '병신'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를 전후로 하여 산업 발달로 생겨난 후천적 장애인을 일러 이 사회는 '불구자'라는 용어로서 규정했다. 즉 "불구자라는 용어는 선천적인 장애보다 후천적 장애의 발생이 더 중요해져 가는 사회적 변동의 산물"이며, 이는 비장애인들의 새로운 인식의 결과로서 자리잡았던 것이다. 이 같이 후천적 장애/인의 증가는 장애인에 대한 호명을 복잡하게 했으며, 이런 혼란 상은 1980년대 초반 법전과 일상적인 언어에서부터 여실하게 드러난다. 당시 장애인에 대한 지칭은 법전으로 명시된 언어는 "불구자·심신장애자·심신박약자·신체 장애자"였고, 언론 매체에 사용된 구체적 용어는 "맹인·장님·소아마비·하반신 불구자·귀머거리·곱추" 등으로서 뒤섞인 채로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장애 운동계의 당사자들의 문제 제기로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장애인'이란 용어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장애인'이란 용어가 비장애인들 혹은 우리 사회의 삶의 자리까지 아주 조금이나마 실질적으로 스며든 것은 불과 몇 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이유인 즉슨, 오늘날 장애인의 현실, 이동권과 교육권, 그리고 노동권의 열악함에서 드러나듯이 우리 내면에는 여전히 장애인에 대해 병신·언청이와 같은 낙인(烙印)이 자리잡고 있음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애인'이란 법적 용어가 생긴 지 벌써 20여 년이 지났으나, 우리의 생각이나 행위는 '병신→불구자→장애인'이란 담론 변화와는 무관하거나 동떨어진 채로, 실질적 내용은 여전히 비장애인들로 하여금 장애인을 '병신'이라고 부르게끔 되어 있다는 것이, 오늘날 장애인이 처한 현실이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애우'라는 용어는 이런 실질적 내용이 부실한 상황에서 운동적 동력을 견인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기에 오늘날 '장애인-장애우' 논쟁은, 비로소 '장애인'이란 호명이 한국 사회에 '보편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즉 그런 장치마저도 거부해도 될 만큼의 운동적 역량을 견인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징표라고 하겠다. 근자 들어 전국에서 조금씩 생겨나는 중증장애인독립센터는 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다만 우리가 좀 더 멀리 지향할 바란, 객관/현상적 지칭인 '장애인'이란 용어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이 사회에서 장애인이란 정체성을 담아내면서도 한 명의 동등한 인간으로서 보편적/실질적 지위를 지향하는 언어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민중'이란 개념이 이 사회의 변혁 운동에 참여하는 구성원 전체를 일컫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필요 조건으로서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는 '장애인-장애우' 논쟁이 '맞다, 틀리다', 혹은 '각자의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식이 아니라, 좀 더 다양하고 설득력 있는 근거와 목소리를 가지고 치열한 논쟁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 지칭은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서 대상에 대한 인식의 폭과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되살리고 이를 지향한다는 장애 운동을 한다는 연구소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운동의 대상으로 선택'당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선택'하는' 지점에 서 있다는 사실을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김규항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지금 여기에서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 장애 운동의 원칙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지금까지 언제나 호명의 대상으로 불려왔던, 즉 배제/박탈당해왔던 그 이들의 고통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태도, 신영복 선생의 말을 빌자면 '하방연대(下方連帶)' 바로 그 지점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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