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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1/30
    장애학생 폭행 사건 앞에서, 드는, 단상1(2)
    장작불-1
  2. 2007/01/25
    운동의 방법적 차이를 인정하는 법?
    장작불-1

장애학생 폭행 사건 앞에서, 드는, 단상1

사실만을 적시하자면 이렇다.

지적 장애 학생이 학교에 다녀왔는데, 머리에 ‘무엇인가 뾰족한 것으로 콕콕 찌른 듯한’ 상처가 났었다. 아이 어머니는 장애 학생의 담임을 의심했다. 담임은 이전에도 다른 장애 학생을 때린 적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학교 어머님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 어머니는 언론 매체에 이 사실을 알렸고, 공론화가 되었다. 그리고 사건 이후, 아이의 어머니와 학부모회장 등은 해당 교사를 경찰에 폭행죄로 고소하였다. 아이를 폭행했다는 ‘실질적 증거’는 없었다. 교사가 자신을 때렸다는 사실에 대해, 맞은 장애 학생은 자신을 때린 사람이 교사라고 지시하기도 했으나, 경찰에서는 ‘이것만으로 범죄를 입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하였다. 경찰은 다른 참고인, 교사에게 이전에 맞았던 장애 학부모를 만나고자 했으나, 이 조차 여의치 않았다. 결국 조사는 지지부진했고, 해당 고소 건은 아직까지도 조사 중인 상태이다.

동암학교 학부모들은 해당 경찰서 앞에 가서 수사 촉구를 위한 집회를 하기도 하였으나, 증거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이처럼 시간이 길어지자, 학교의 게시판에는 아이의 담임을 성토하는 부모들의 글이 이어졌다. 그 글의 대다수는 교사가 이 아이를 때렸다는 확신을 담은 것들이었고 교사를 비난, 성토하는 글들이었다. 그리고 부산시 교육청 앞에서 집회를 하여 해당 교사의 징계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사태가 갈수록 악화되자, 학교는 교사에게 사표를 권고했다. 사건 이후, 약 3개월이 지난 후, 결국 교사는 사표를 제출했고, 학교가 수리하여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사표 제출 이후, 교사는 변호사를 선임하여 자신의 사표가 부당한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며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장애 아이의 어머니와 학부모회장, 운영위원장(전부 장애아동 부모들임) 세 명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또한, 학교 게시판에 자신의 실명을 올린 어머님들 약 30여명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그리하여 장애아동의 어머니들은 ‘특수학교 폭력 추방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이번 건이 아니라, 해당 교사가 지난날 폭행을 저질렀던 사례(부모들이 보았던)를 정리한 진정서를 가지고 부산시 교육청에게 해당 교사의 파면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장애 학생에 대한 폭행이 해당 특수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부산지역 특수학교의 문제임을 주장하면서 특수학교의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교실의 CCTV 설치와 교육청 직속으로 ‘특수학교 폭력 대책 기구’를 설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단순하지가 않다. 사건을 하나하나 떼어놓고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가장 중요하면서도 사건의 발단이었던 ‘학생 폭행’ 건이다.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이, 가장 핵심이다. 그런데 여기에 지적 장애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지적 장애인의 경우, 이들에 대한 보호의 책임은 누가 지는가? ‘학생 안전 관리 소홀’에 대한 책임이다. 이는 1차적으로 담임교사이고, 학교장이다. 따라서 이들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합리적 절차’이다. 그런데 언론 매체에 해당 사실을 알리고, 교사를 고소하였다. 언급하였던 바, 이는 ‘교사에 대한 불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때렸으리라 짐작되는 일’이 ‘때렸다’고 둔갑되었다. 결국 이는, ‘명예훼손’의 빌미가 되었다. ‘더 이상 폭력교사를 학교 현장에 둘 수 없다’는 어머니들의 비분강개가, 오히려 어머니들의 처지를 어렵게 만들어 버린 형국이었다. 이것은 경찰 조사 준비 중이다.

두 번째로 ‘해당 교사의 파면’ 건이다. 교사를 사표를 제출했고, 수리되었다. 그러나 교사는 ‘부당한 압력’에 의해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다 주장하면서 복직을 위한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18일 교육부에서 ‘교원소청심사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이것은 해당 교사의 법적 권리이다. 따라서 공적으로는 이 권리를 ‘존중’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심사위원회’에서 교사의 요구를 타당하다고 인정한다면 적어도 ‘법적’으로는, 다시 ‘교사직’에 설 수 있다. 그런데 부모들은 ‘이런 폭력교사는 학교 현장에 절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교사의 파면’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날 교사에게 자신의 아동이 맞았다고 주장하는 어머님들의 진술서를 확보하여 교육청을 제시하려 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해당 진술서는 짧게는 1년 길게는 몇 년 전의 것들이다. 여전히 ‘증거’ 능력이 미약하다. 물론 어머님들이 직접 본 것을 작성한 것임으로 징계의 대상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교사의 파면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두 번째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세 번째, 명예훼손 건이다. 경찰 조사 이후, 어떻게 결론 날지 모르나 명예훼손의 여지가 있는, 그런 글들이 있기도 하다. 다만, 현재 세 명(아이 엄마, 학부모회장, 운영위원장)의 경우 무혐의로 인해 불기소가 될 듯하다. 문제는, 30여명의 일반 어머니들이다. 만약 이들 중, 명예훼손으로 몇몇이 기소된다면, 이후 정식 재판 청구와 항소 등을 통해 벌금을 상당히 낮추기는 하겠으나, 해당 교사 ‘정신적위자료’를 제기하며 민사소송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악의 시나리오인데, 사정이 이리되면 상당히 난감해진다. 명예훼손의 경우, 항소심까지 가면 아예 ‘무죄’로 선고받을 수도 있고, 최악이라 해도 벌금 5십만원 전후로 추정된다. 문제는 기소사실을 전제로 하여 민사소송으로 갔을 경우, 그가 말하는 ‘정신적위자료’가 얼마가 될 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명예훼손으로 인한 금액보다는 많으리라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까지 된다면, 결국 명예훼손으로 기소가 되리라 예상되는 몇몇 어머님들만이 속된 말로 덤터기를 쓰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가장 바라는 것은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어머님들이 경찰/검찰 조사에서 무혐의로 풀려나오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되지 않고 검찰로부터 ‘기소’당했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언급한 바, 약식 기소(이른바, ‘벌금형’)라 하더라도, ‘기소’만으로도 민사소송이 가능하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특수학교 폭력 추방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에 대해서이다. 언급한 바, 현재 이 곳에서 요구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이 중, ‘해당 교사의 파면’ 건은 언급했으니 차치하자. 나머지 두 건, ‘교실 내 CCTV 설치’와 ‘부산시교육청 직속 폭력피해대책기구’ 요구 건이다. 우선, CCTV건은 차치하자. 이는 교권과 인권 문제가 함께 있는 것이기에, 매우 많은 고민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다. 다만 ‘... 폭력피해 대책기구’는 설치 가능하다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해당 ‘비상대책위원회’의 명칭이다. 그리고 여기에 장애운동가로서 나의 고민이 자리한다.

‘특수학교 폭력 추방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이러한 기구 이름은 특수학교 내 폭력이 어느 정도 만연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폭력을 하는 당사자는 누구인가 라고 했을 때, 특수교사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특수교사는 장애학생을 직접 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이 기구의 이름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들의 좌절감이나 배신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 특수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의 장애 학생에 대한 물리적 체벌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물리적 체벌의 수준이나 정도가 곧바로 ‘폭력’이 될 수 있는지, 모든 물리적 체벌이 ‘폭력’인 것인지가 남아 있다. 한 가지 짐작하는 것은 이번 사건은 특수교사와 장애아동 부모의 신뢰 관계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될 개연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보이는’ 대목은 아니다. 따라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라고 반문하면, 답하기 어렵다.

나는 장애인권운동가이다. 장애인의 ‘인권’ 확보를 위해 ‘인권’ 침해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 문제를 풀어나간다. 지적 장애 학생이 맞은 것은 ‘인권 침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식의 몇몇 교사들의 ‘구타와 폭행’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들과 같은 교사들은 더 이상 학교 현장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지난번 어린이집 장애아동 폭행 사건을 맡았을 때도 폭행을 당한 아이 어머니와 함께 경찰서와 법원을 들락거리기도 하였다.

나는, 사건을 이처럼 공론화시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지적 장애학생들의 권리와 인권을, 몇몇 불성실한 교사들로부터 보호하고 싶었다. 적어도 이렇게 공론화되고 나면, 아닌 말로 ‘두 대 때릴 것 한 대 때리고, 한 대 때릴 것 때리지 않는 것’으로 갈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대개 어머님들이 그런 것처럼 ‘장애아를 데리고 사는 내가 참아야지’라고 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눙치고 넘어가는 식보다는 힘들고 괴롭기도 하지만, ‘고소’가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내가) 믿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근래 들어와서는 흔들리고 있기도 하다. 이는 나중에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겠다.) 물론 해당 개인에게는 미안한 정서가 적지 않다. 적어도 그는 이와 같은 일이 ‘법적 고소’를 당할 만큼 심각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개연성이 클 것이다. 이전에도 아이를 때리는 일은 종종 있었을 테고, 그것은 이른바 ‘사랑의 매’로서 언제나 용인되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법적 고소’를 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도 자신의 과오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옳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서설이 너무 길었는데, 이처럼 내 신념의 한 자락을 밝힌 것은 이번 사건 앞에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정작 내 자신이 헷갈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사건이 일어났을 때, 경찰 고소 이후부터 개입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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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방법적 차이를 인정하는 법?

 

07, 1, 25, 01:31



교육권연대 일일호프를 앞에 두고 빚어진 논란,

운동의 방법적 차이와 역할에 대한 인식



‘일일호프 해보자. 돈을 벌면 좋고, 못 번다 해도 홍보효과 있지 않겠는가’

일일호프 제안의 맥락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동의했다. ‘일이야, 박간사가 알아서 하니깐, 하면 좋지’ 정도 수준이 아니었나 싶다. 일을 추진했고, 각 단체들이 맡을 금액 등을 분담하였다. 단체 규모 등을 고려하여 차등 분배했고, 분배 금액에 대해 구성원 모두 동의했다. 목표액은 1백만원.


반론이 있었다.

‘돈 1백만원 벌려고 일일호프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차라리 돈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각 단체 분담금을 합쳐서 돈을 내자. 그리고 일일호프 말고 다른 일도 많은데, 굳이 일일호프라는 수단/방법을 택하여, 교육권연대를 홍보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름, 타당한 반론이다. 주장을 거칠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 ‘교육권연대의 홍보/활동 차원에서 일일호프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가능하지 않다.’ 이 논란의 핵심을 짚어보자. 


나는, 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활동이든지 간에 그 활동 과정과 결과 속에서 ‘교육권연대의 필요성을 환기/의식하는 활동’이 되어야 하는 것이, 활동의 ‘원칙’이라고 한다면, ‘일일호프’라는 수단/방법이 최고나 최선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최악은 아니라고, 적어도 ‘원칙’을 배반하거나 거스르는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단, 내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되어야 한다. ‘교육권연대의 필요성을 환기/의식하는 활동’으로서 일일호프를 준비한다면, 그에 따르는 부수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교육지원법의 내용을 담은 홍보물이라든지 부산지역 부모들의 활동을 담은 영상물/소식지 등이 최소한의 준비일 수 있겠다. 이를 통해 그 자리에 온 장애 학생 부모들이 예의 ‘교육권연대의 필요성을 환기/의식한다면’, 그런 계기가 된다면, 이를 두고, 나는 일거양득이라고 말하겠다. 비록 많은 돈을 번 것은 아니라 해도(많은 돈을 벌면, 더욱 좋겠지만), 돈도 벌고, 구성원/단체 간 결속력도 강화시켰으니 말이다. 만약 이런 준비 없이, 여느 시민사회 단체들이 하는 것처럼, ‘하루 술 먹고 노는 마는’ 식이라면, 이것은 아니 하는 것이 옳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구성원 간 결속력을 높이기는 커녕, 서로에 대한 실망만을 가득 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기실 어떤 단체이든지 간에 이러한 행사를 준비하면서 서로에 대한 존경과 관계의 깊이를 확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서로 실망하면서 행사를 준비하고 소모적으로 치루어낸다. 우리 또한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내가 교육권연대의 홍보/활동 차원에서 일일호프를 하자고 주장한다면, 적어도 저 정도의 준비는 해야 한다. 그것이 내 책임이고, 의무이다. 만약, 해당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면, 다시 말해 교육권연대 구성원 간 결속력을 다지는 계기로서 일일 호프를 활용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내 역량 부족이고, 기획 실패이다.


반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 있다. 일일호프보다는 다른 활동 방안/수단을 통해, 교육권연대 활동 홍보를 하자는 것이다. 일일호프를 교육권연대 활동의 근본/원칙에 어긋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선 여기에서 나는 해당 ‘근본/원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말을 길게 하기 어렵다. 다만, 교육권연대의 활동 ‘근본/원칙’에는 해당 일일호프가 ‘그르기 때문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며, 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 나로서는 예의 선택을 ‘존중’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내가 취해야 할 처신이 있다면, 최대한 깔끔하게 방법적 이견을 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번 한 번 서로 방법적 이견이 다르다고 해서 이후에도 함께 하지 않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들 대다수는 ‘좋은 게 좋다’ 식의 미봉적 선택을 취하며, 나 또한 여기에 따랐다.


‘일일호프의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후 활동을 고려하여 이번에는 분담금을 내도록 할 것이다. 다만 현재 책정된 금액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대목이 있으니, 다소 감한 금액 정도는 낼 용의가 있다’


나는 방법적 이견을 달리한 단체의 해당 제안을 ‘호의’로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방법적 이견’을 확인한 마당에 굳이 아니 내어도 될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안한 이가 언급하였던 것처럼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사실상 ‘논리적’ 차원이고 인간관계이니 만큼 ‘정서’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사실 내가 ‘호의’로 해석한 대목도 상대방에 대한 내 호의적 정서가 개입해 있다. 만약 상대방이 다른 이였다면, 나와 정서적으로 공감대 형성이 덜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깨끗하게 ‘거절’했을 개연성이 높다. ‘방법적 이견이 다른 마당에 굳이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후에 다른 계기가 되면, 함께 해 보자’ 정도로 언급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 돈을 두고, 마치 우리를 ‘동정’하는 식으로 이해했을 개연성이 높다. (그래도, 상대방이 주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대부분 일반적 사람이라면 그처럼 ‘거절’을 당했다면, ‘알겠다. 그럼 그리 하시라’고 말하면서 거두어들일 것이다. ‘나는 갑갑할 것, 딱히 없다.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당신들의 처지 아닌가’ 식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연대하는 구성원으로서 방관자의 위치로 서는 것이다. 이것이 ‘정서의 작용’이며, 대부분 사람이 보이는 평균적 행위이고, 일상의 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나의 모습에서 드러나듯이 평균적인 사람들 대다수는 해당 제안을 ‘불편해 하면서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언급한 바, 우리들은 ‘깔끔하게 방법적 이견을 인정’하여 적어도 이 사안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사안을 매듭짓는 형태가 아니라, 이후 관계를 고려하여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제안을 수용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각각의 심리 동학을 엿보면 어떨까?


일단, 방법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나, 주는 입장에서는 말했듯이, ‘이후에 함께 활동을 계속 할 테니, 그래도 아예 손 놓아 버린다면, 서운함이 더욱 커지 않겠는가. 그러니 모든 금액은 우리 입장에서는 어려운 일이고, 이 정도의 성의라도 보여주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라고 인식했을 개연성이 높다. 받는 입장에서는 깔끔하고 합리적으로 ‘받지 않는’ 것이 가장 최선인지도 모르나, 대부분 ‘받는다’. 물론 받으면서도 예의 호의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언급했듯이 ‘아니 받으려다가, 주는 것이니 주는 사람 입장에서 무안해할까봐 받는다’ 식의 생각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또 다른 정서적 서운함을 낳기도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어렵게, 하는 것인데, 왜 이처럼 거칠게 대하는가.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 아닌가?’ 라는 식의. 뭐, 내가 독심술가가 아니니 이 정도로 정리하자. 다만 이와 같은 심리적 작용들이 오가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서로 아니 해야 좋을 계약이라는 것이다. 해서 서로 손해 보는 계약이라고나 할까? 서로의 욕망이나 기대를 서로 달성시킬 ‘의지’나 ‘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서로 기대하고 있으니, 어찌 관계가 파토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다면 ‘돈’을 아예 아니 내는 것이 ‘타당한 처신’인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사실 받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호의’로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지 모른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는 사람과 정서의 공감대가 큰 사람이라면, ‘호의’로 이해하고 ‘감사함’을 표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는 사람과 정서 공감대가 크지 않은 사람이라면, 혹은 얼마간 정서적 불편함을 안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방법적 이견을 달리 한 마당(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욕망을 좌절시켜 버린 사람에 대한 정서)에 그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한다 해도 ‘불편함’을 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속된 말로, ‘미운털’이 이미 박힌 상황에서 주면 주는 대로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그 사람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평균적인, 일반적인 인간관계이며,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 정도의 수준과 차원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다.


교육권연대의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일일호프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가능하지 않다(가능하다 해도, 다른 일로서 교육권연대의 활동을 하는 것이 좀 더 낫다)는 상반된 주장을 살펴보면서, 방법적 이견이 다른 상황 앞에서 일반적으로 어떤 식의 관계 흐름이 구성되는가를 정리해보았다.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일호프이든, 찻집이든지 간에 어느 활동이든 ‘교육권연대 활동을 해야 할 필요성을 의식/환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며, 만약 이와 같이 되지 않는다면, 흔히 볼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 ‘해서 서로 상처와 불신만 쌓고 마는 것’이라면, 아니 하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오늘 회의 때, 일일호프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면서, 이 점을 먼저 환기하면서 시작하였다. 그 결과, 내가 전전긍긍했던 것과는 다소 다르게, 어느 의미에서 간단하게 ‘하지 말자’고 결론 내렸다. 일을 중심적으로 해야 할 ‘발달부모회’의 입장이었는데, 이에 대해 나는 ‘존중’한다. 전교조나 한울, 그리고 뇌병변이나 참배움터의 경우 당일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반면, 발달은 가장 많은 인원을 차지하며, 따라서 발달의 선택에 따라 일일호프를 하거나 말거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면 좋고, 아니 해도 그만이다’는 전교조나 타 단체의 입장은, 사실 그들 입장에서는 ‘취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였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형편이니 말이다. (여기에서 표를 파는 노동은, 일단 차치하자.) 그런데, 일에 대한 실질적 준비, 예컨대 홍보물을 비롯하여 영상물의 제작 등은, 내가 담당해야 할 몫이었음을 고려한다면, 결국 당일 서빙 문제만이 남은 과제였다. 그처럼 간편하게 ‘과업이 부담스러우니 하지 말자’고 결론 내릴 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단, 방법적 이견을 달리하는 것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존중의 태도를 취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논의는, 내가 전전긍긍했던 것과는 다르게, 언급했듯이 퍽 간단하게 ‘하지말자’는 결론으로 끝이 났다. 이유는, 내가 제시한 우려 중의 한 가지,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 회의에서 ‘하지말자’고 결정한 우리의 판단이 틀렸다거나 타당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로 하여금 고민을 하게 만든 것은 ‘책임과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 만약 내가 일일호프를 꼭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내가 ‘자원봉사자’를 섭외해서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 또한 그 정도의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이는 구성원 모두의 공통된 태도이기도 하였다. 즉 일일호프에 대한 매력을 크게 느끼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과 역할’ 문제는 여전히 나로 하여금 고민을 하게 만든다.


언급했듯이, ‘발달’은 타 단체들에 비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도자 단체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거나 역할을 생성하려 하기보다는, ‘왜, 우리는 이 만큼 하는데, 타 단체는 저것만 하는가’ 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는 발달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며, 어느 단체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발달이 교육권연대 내에서 이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존경과 지지의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며, 충분히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른스러우면서도 품위 있는 태도일 것이다. 문제는, 저 정도의 인식 수준으로는 하나의 조직/단체가 성장하기가 요원하다는 것이다. 그런 안타까움이, 이번 일련의 상황을 통과하면서 내게 들었던 생각의 한 자락이다. 발달이 ‘하지 말자’고 내린 결정의 배경에는, 저 정도의 인식 수준에서 일처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방법적 이견을 달리한 한울의 입장을 존중했듯이, 예의 발달의 입장도 존중한다. 내가 보았을 때, 두 단체의 행위 수준은, ‘일을 추진하는 합리성과 어른스러움’의 차원에서 볼 때,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두 단체만 해당하는 것이 아님은, 지금까지 누차 언급했던 바이다. 즉 우리들의 대개 수준이 저처럼 어느 의미에서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조악한 수준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우리가 이 사회를 좀 더 낫게 해 보기 위해 사회 운동을 하고 있으니, 어찌 우리 사회가 발전이, 품위가 있겠는가 싶기도 하다... 너무 위악적인 진술인가??? (한 가지 환기하자면, 이런 평가는 퍽 거칠기는 하나 어떻게 하면 좀 더 낫게 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처럼 구구절절 쓸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이번 사안을 통과하면서 ‘방법적 이견을 달리하는 이들과의 소통’ 문제를, 한편으로는 ‘책임과 역할’ 문제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하였다. 아직까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떤 처신이 좀 더 어른스럽고 품위 있는가를 말이다. 만약 내가 일일호프를 ‘강행’했다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을까? 언급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밟았을까? 아니면 최악은 피해갔을까? 글쎄, 내 능력으로 보자면, ‘최악’에 가까웠을지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이번에는, 아니 한 게 더 나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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