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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6/30
    특수교사의 교육적 행위는 어디까지일까? (3)
    장작불-1
  2. 2010/06/27
    통합교육 현실과 장애학생의 교육권 (6)
    장작불-1
  3. 2010/06/13
    장애를 가지다? 장애가 있다?
    장작불-1
  4. 2010/06/11
    장애인권교육 단상
    장작불-1

특수교사의 교육적 행위는 어디까지일까?

사건은 간단하다.

 

자폐성 장애학생이 통합반(원적반) 영어 수업 시간에 소란을 피워, 비장애학생들의 공부를 방해했다.

영어 교사는 특수교사를 불렀고, 특수교사는 장애학생을 지도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특수교사는 어머님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말을 잘 듣질 않으니, 학교에 열흘 동안 오지 않게 하려는데, 동의하느냐?'고 물었고, 어머니는 '알겠다'고 했다.

 

다음 날, 어머니는 '아이가 학교에서 문제 행동을 일으켰다고 해서 집으로 보내 학교에 열흘 동안 오지 마라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특수교사에게 따져 물었고, 특수교사는 해당 상황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이런 특수교사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학교엘 찾아갔다.

 

교장과 교감, 특수교사 2명, 부모님과 그리고 나.

 

특수교사 해명 요지는, '지난 번 아이가 문제 행동을 일으켰을 때, 4일 동안 학교오는 것을 금지시키고 나니, 그 문제 행동이 줄어들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거듭 문제 행동을 일으켰기에, 학교오는 것을 금지시켰고, 분명히 어머님도 동의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교사의 이런 판단, 즉 학교 오는 것을 금지시키니깐 아이가 좋아졌다는 것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않으셨고, 때문에 그 자리는 약간 언성이 올라갔고, 서로 각자의 입장만을 제시하는 식으로 흘렀다.

 

우쨌든, 결론은,

 

어머니가 원치 않는 방식임을 미처 알지 못했으며, 그 점에서 있어서 소통이 충분치 않았고, 어머니가 서운하게 생각하게 된 점에 대해, 교사로서 사과드린다는 식으로 상황은 매듭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나로선 앞의 글에서 썼듯이 통합교육과 장애학생의 현싱이란 점의 차원에서도 고민을 다시 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번 방문을 통해 특수교사의 교육적 행위를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과 만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특수교사는 그 행위가 '부적절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진 않았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와 다시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머님의 이해가 적절치 못한 대목이 있다는 내용이 주되었고 소통에 있어서 충분치 못했다는 식의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행위의 의도, 즉 '교육 행위'였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나 역시, 그것이 '교육 행위'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다만, 교육 행위라고 해서 학교를 보내지 않는 것이, 설령 그것이 장애학생에게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적절했는가 라는 점이다.

 

나로선 '적절치 못했다'고 주장한 반면, 교사들은 적절성 여부보다는 오히려 '이후에 장애학생에 대한 개입의 소극성'을 주로 이야기하였다.

 

맞다. 이런 일 터지면, 어느 교사라 하더라도 해당 아이에 대한 교육적 행위를 실행하기가 쉽진 않다. 부모님들은 대체로 학교 내에서 조용히 있는 것이 별 문제 없이 학교 다니는 것이고, 따라서 교사들은 가급적이면 문제 여지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이 일도 결국, 통합교육이 잘 되지 않는 아이를 통합시킨다고 원적반에 보내었고, 그것이 사단이 되어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사들은 가급적이면 특수학급에 아이를 돌볼 가능성이 크고, 그렇게 3학년까지 보낼 수 있다. 그리 되면 통합교육인가? 아니면 반통합교육인가?

 

어렵다.

 

다만, 나로선 여전히 학교에 보내지 않는 행위를 교육적 행위라는 교사들의 의견에는 이해가 가지만, 동의는 하질 않는다. 그것은 '차별'이기 때문이다.

 

 

"모든 요구가 권리 주장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이 실현 가능한지 인간 생활에 근본적이고 긴요한지 여부를 따져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 존엄성을 도무지 유지할 수 없는 것, 그것을 존중하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사회를 인간다운 사회라 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닌 것이 인권의 대상이 된다."(류은숙, 인권을 외치다, 푸른숲,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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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교육 현실과 장애학생의 교육권

대학의 간판만이 한 명의 삶을 거의 결정짓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

 

이 결정의 격전지인 인문계고등학교.

 

이 사건은 부산의 인문계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영수(가명)는 자폐성장애가 있는 고등학교 2학년이다. 자폐성장애라고 해도 비교적 양호한 축에 속하는 영수는 학교 생활도 잘 적응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영수는 통합반(원적반)에 있을 때, 평소 수업 시간에는 조용히 있는 편이지만, 영어 듣기 시간 때는 한 번씩 고함을 지르면서 다른 아이들의 수업을 방해하곤 하였다. 영수에겐 영어로 말하는 것이 듣기 싫었나보다. 어쨌든 영수는 아이들이 영어로 말할 때면, '하지마, 하지마' 라고 하며 소리를 질렀다.

 

어느 날 영어 수업 시간.

 

영수는 영어 듣기를 싫어했는지, '하지마, 하지마' 라고 외쳤고, 영어 교사는 특수교사를 불러서 영수를 특수학급에 데리고 갈 것을 요청했다. 근데 영수는 교실 바깥에 나와서도 고조된 감정이 가라앉질 않았는지 교사에게 양말을 벗어 던지거나 특수교사에게 약간 대들었다고 한다.

 

이에 특수교사가 '너 이러면 집에 보내버린다'고 하면서, 정말 영수를 집에 보내버렸다. 학교 부장교사나 교감, 교장 어느 누구와도 논의하지 않은 채, 일종의 체벌 형식으로 특수교사가 자의적으로 '열흘 동안 학교에 오지 말고, 집에 있어라'고 한 것이다.

 

아이의 엄마가 황당한 것은 당연한 사실. 교사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예의 저 사건을 언급하면서 특수교사가 '열흘 정도 학교 오질 마고 집에 있는 게 낫겠다'고 하였고, 엄마는 엉겹결에 '알겠다'고 해서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엄마는 교사에게 전화를 걸어 '열흘 동안 학교 오지 마라는 것이 누구의 결정이냐? 이것이 교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냐?'고 따졌지만, 교사는 별 말없이 '어쨌든, 10일 동안 학교 나오지 마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4일째 되는 날, 교감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정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니,

 

교감 왈, '나도 잘 모르는 일인데, 알아보겠다' 고 한 후, 나중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하는 말이 '교사가 아이들이 많다 보니깐 힘들다 보니 그리 한 것 같다. 아이가 좀 괜찮아졌으면, 학교를 보내시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5일째 되는 날, 이 어머니는 나를 찾아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었다.

 

참,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이것은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른 명백한 차별행위이기 때문에 인권위 진정을 하게 되면, 학교로서는 빼도박도 못하는 일이다.

또한, 학교를 상대로 언론에 공론화시키면 말 그대로 이 학교는 반인권적 학교로 비판받을 것은 뻔하다. 게다가, 지금 이 엄마는 이 일로 인해 상처를 너무 깊게 받았기에 자녀의 자퇴를 결심했다고 한다. 더 이상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 아이를 학교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 주 화요일 오후에 학교 교장과 교감, 특수교사, 그리고 어머님과 내가 만나기로 했는데, 이 자리에서 어머니는 자퇴 의사를 밝히겠다고 한다.

 

학교로서는 이 일이 외부에 발설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퇴 사유에 적힐 내용이 '학교 현장의 교육 차별로 인해 학교를 관둔다'는 식으로 적힐 상황이기에 극구 만류할 일은 분명하나, 나로선 부모 의사를 존중하되, 이 일을 어떻게 하면 공적으로 접근하여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지 고민이 된다.

 

재발방지 차원에서 시교육청에 문제제기를 하고, 그리고 시교육청으로 하여금 학교에 공문을 보내 이와 같은 차별 행위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식의 환기를 담은 내용을 보내는 것 정도일 듯한데, 내 고민은 결국 '통합교육 현장에서 장애학생의 현실'이란 점에서 참으로 딜레마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신혜련선생님의 말처럼 장애학생이 특정 반응을 보인다면, 그 시간 만큼은 아이에게 특수학급 입금을 시키는 것만이 하나의 방도같은데, 과연 특수교사들은 이런 해결방식에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다고 해서 장애학생은 통합해야 하니, 무조건 원칙대로 특수교사 수업 시간 이외에는 들어와서는 안 된다 라고 하겠는가? 그리하여 원적반 선생으로 하여금 알아서 해결하시라고 해야겠는가?

 

게다가, 문제는 학교 현장에서 관리자들이 종종 장애학생이 약간의 문제 행동만 해도 곧바로 '특수학급에 보내버리는 게' 또한 현실 아닌가? 그들의 인식은 단순하다. '어차피, 공부도 안 되는 얘들. 굳이 학교 현장에서 공부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이들의 인식을 대놓고 비판하기 어려운 것은 이들의 비판 앞에 내세우는 논리라고 해봤자, 원론적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장애학생도 교육권이 있다는 것. 그러나 현실은 이들의 교육권이 실현되기엔 너무 척박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말이다.  

 

왜 통합교육을 하는가?

단지 장애학생의 교육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장애학생도 교육권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너무 수세적이고 수동적인 논리다.

 

어쩌면 장애학생과의 통합교육을 통해 유익할 수 있는 부분을 마련거나 생성해 내어야 한다. 그것이 특수교사와 장애인교육에 관심하는 사람들이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통합교육의 척박한 현실을 고민하다 보니, 결국 이러한 고민의 귀결점이 장애인과 왜 함께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듯하다.

 

지금 내가 제출하는 논리란,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과 태도를 습득함으로서 우리 자신의 인간다움을,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자신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정도이다.

 

요약하자면, 장애인을 도와줌으로서 우리는 인간일 수 있다, 뭐, 이런 논리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심정적이고, 개인적 수준에 머무는 논리이고, 또한 시혜와 동정으로 대상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높다. 그로 인해 장애문제를 결국 개인문제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인식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제출되는 '장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런 방식의 접근은 다소 부정적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니도 장애인이 언제 될지 모르니, 장애인을 차별해선 안 된다'는 논리란 것은, 다소 슬퍼지 않은가?

 

다시 돌아와보자. 무엇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가를 짚어보자.

 

통합교육을 실시하는 학교 현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두고 볼 때, '장애학생은 공부를 해도 소용 없으니, 그냥 특수학급 가는 게 낫다'는 식의 교육 현장의 배제이다. 이것은 일정 정도 진리치를 담보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예 특수학급에서 수업을 듣는다면 어떨까? 그리 했을 때, 어떤 문제점이 발생할까? 어느 의미에서 우리 나라의 고등학교 교육 현실에서 시도해봄직한 일 아닌가?

 

물론 통합교육이란 말이 무색해질 것이나, 정작 통합교육의 의미란 것이 학교 현장에서 적용되고 있지 못한 게 사실 아닌가? 적어도 학교 현장의 비장애인 아이들한테 '니도 장애인이 언제 될지 모르니, 장애인을 차별해선 안된다'는 식의 논리가 먹혀들 가능성은 거의 없질 않겠는가?

 

가치만을 말하고 주장하기에는 현실의 척박함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 하는 문제가 정말이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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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가지다? 장애가 있다?

전현일(미국 IFDD 대표) 대표님으로부터 메일이 왔다. 내용인 즉, 장애인을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규정하고 부르는 것이 좀 더 타당하다는 것이었다. 아래가 그 메일의 내용이다.

 

****************

 

신체장애인, 발달/지적장애인, 장애아동, 학습장애학생, 자폐아....

 

이런 단어에는 그러한 장애를 갖인 사람을 일괄적으로 규정지어 버리는 함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을 칭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그들을 일반 비장애 사회와 구별하며. 그러므로 무의식중에 차별을 불러오고, 따라서 그들에게 사회적으로 격하된 차별이 자연히 있게 됩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을 폄하해서 부르는 말들이 우리사회에도 많지요. 하지만 발달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의 인격, 존엄성을 무시하는 말이라고는 흔히들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자사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일찍이 People First라는 단체를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장애인이기 전에 먼저 사람이라는 주장을 한 것이지요. 그 결과 미국의 모든 법령, 해당 관공서, 신문 등 모든 곳에 용어가 바뀌었습니다. 발달장애인이 아니고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이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가 아니고 진정으로 차별을 없애고 당사자의 인격과 인간으로써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통합된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미국 장애인 차별금지법은 “장애를 가진 미국인 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이라고 번역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그까짓 말이 뭐가 그리 중요한 것이냐”고 반응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이 불러오는 영향은 의외로 강력하며 커다란 사회적 오해를 불러온다는 것을 우리 모두 경험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 치하에 “죠센징”이 그랬지요.

 

장애인 보다는 장애를 가진 사람, 지적장애인 보다는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 장애아동 보다는 장애를 가진 아동, 학습장애학생 보다는 학습장애를 가진 학생, 자폐아 보다는 자폐증을 가진 아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우리 한국사회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차별을 없애려는 노력의 중요한 한 발자욱이 되리라 믿습니다.

 

********************

 

전현일 대표님의 메일에 장애인계에서 활동하는 몇몇 사람이 답멜을 보냈는데, 내용이 아래와 같다.  

 

2. 보내주신 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고 저 또한 그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글을 쓸때도 좀 길지만 그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장애우'란 용어에 대한 논란이 있었을 때 제가 함께걸음에서 긴 장문의 글을 2회에 걸쳐 썼기 때문에 그 때 고민을 좀 했었죠. 일부 사람들은 영어식 표현 아니냐고 했지만 전 '사람'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됐습니다. 장애는 특징이죠.

 

3. People First 운동의 의미와 영향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안으로 제시한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에서 누가 장애를 의도적으로 가진 사람이 있나요? '가지다'라는 동사는 자발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볼 때 '장애를 가지다'는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 더 낫지 않을까요? 나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시각장애인이라고 하여 차별적인 언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말에서는 모든 수식어가 피수식어 앞에 온다는 점에서 '시각장애인'에서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당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또한 굳이 People First 운동의 취지에 따르더라도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이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언어와우리말 간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무작정 people first 방식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4. 사실 장차법을 만들 때 그 표현을 가지고 논란을 했었거든요. "장애를 가진"이란 능동적,주체적 표현과 "장애가 있는" 이라는 현상적 혹은 존재적 표현 결국은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규정되었답니다.

제2조 (장애와 장애인) ①이 법에서 금지하는 차별행위의 사유가 되는 장애라 함은 신체적ㆍ정신적 손상 또는 기능상실이 장기간에 걸쳐 개인의 일상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초래하는 상태를 말한다.

②장애인이라 함은 제1항에 따른 장애가 있는 사람을 말한다.

 

5.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는 표현이 가지고 있는 깊은 뜻을 생각할 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아오면서 당연히 나는 장애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회가 장애인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장애를 특혜와 면제의 조건 쯤으로 여기면서 장애를 강조하는 것이 요즘의 우리 모습입니다. 특히 장애인단체에서는 이런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야 더 많은 특권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런데 이 사회에서 장애인단체는 정치적 힘을 더욱 얻어가면서 비장애인과 다른 점만을 더욱 강조합니다. 보편보다는 특별을 강조하는 풍토가 가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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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보면,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는 보는 게 좀 더 타당하다는 의견 같다(지운 내용 2-3가지가 있는데, 모두 이와 같았다)

 

근데, 나는 의견이 약간 다르다. '장애를 가진'이란 표현보다, '장애가 있는'이란 표현이 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유는 '가지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소유의 의미이고, 장애인에게 장애는 그 사람의 정체성의 일부분이란 점에서 '소유'가 될 수 있긴 하나,(오늘날 사회에서) 근본적으론 장애인이 된 원인을 두고볼 때, 자신이 원한 것이기보다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등록장애인의 90% 이상이 이른바 후천적 장애인이다) 

 

반면 '장애가 있는'이란 표현은 어느 분의 답글에서처럼 존재론적 차원에서 규정되는, 따라서 '장애가 있는 상태'가 강조된다. 그러나 각각의 사회적 지원 체계의 수준/방식에 따라 그 장애 상태는 덜해질 수 있거나 혹은 장애 상태 그 대로일 수 있다. 때문에 '장애인'에 대해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게 오늘날 '장애' 개념에 견줘볼 때 좀 더 타당하지 않나 라는 것이다.

 

물론, 가진 것도 하나의 상태일 순 있지만, '있다'라는 동사와 견줘볼 때, 전자가 정태적 뉘앙스라면 후자는 동태적 뉘앙스가 좀 더 드러난다  

 

가지다/안가지다 있다/없다라는 축은 동일하지만,

<장애인이 살아가는 데 있어 장애인콜택시가 있음으로 인해, 장애를 덜 가지다/더 가지다>

<장애인이 살아가는데 있어 장애인콜택시가 있음으로 인해, 장애가 덜 있다(하다)/더 있다(하다)'>

 

생각하면 좀 더 분명하게 구분된다. 앞의 문장은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뒤의 문장은 장애인콜택시가 있어 장애인의 외출이 그 만큼 자유로워졌다 (장애가 덜하다) 것을 말해준다.

 

 

한편, '장애가 있는 사람'과 '장애인'에 대한 구분하면서 '장애가 있는(가진) 사람'이라는 표현이 좀 더 적절하다는데, 이는 한국어와 미국어의 특징을 좀 더 비교해봄직한 대목이다. 가령 전현일 대표님이쓰신 "미국 장애인 차별금지법은 “장애를 가진 미국인 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고 하지만, 한국어로서 이 문장은 좀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이는 지금껏 장애를 가진/있는 사람과 장애인을 구분하지 않은데서 오는 낯설음일 수도 있다)

 

 

 요컨대, 이렇게 구분한 의도가 결국 (장애보다는) '사람'을 강조하자는 것인데, 한국어에서 '장애를(가) 가진(있는)사람'과 '장애인'으로 구분했을 때, 실제 '사람'이 강조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는 좀 더 숙고해봄직하다. 장애와 존재(사람)을 구분하자는 의도는, 일견 타당한 듯 하지만, 정작 장애인 당사자(존재)에게 장애는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분이라는 점에서 '이를 구분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좀 더 논의되어야 할 대목이기 때문이다.  

 

 

전현일 대표님은 미국에서의 이러한 구분이, "진정으로 차별을 없애고 당사자의 인격과 인간으로써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통합된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나, 요는 한국 현실에서 '장애'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과 미국과는 좀 더 차이날 법한 대목이 있다. 가령 우리는 조선시대의 유교문화권에서 자라왔고, 때문에 건강한 몸과 신체의 중요성을 제기하는 문화적 패러다임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 등은 장애인운동을 한다는 나를 비롯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예외일 수 없을 만큼 강고하다.  때문에 '장애를(가) 가진(있는)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 실제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장애'가 강조될 것인지 아니면 의도하신 것처럼 '사람' 이 강조될 것인지는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전현일 대표님의 문제제기를 계기로 장애담론에 대한 한국 사회에서 의견들이 다양하게 제시되면 좋겠다는, 그런 소박한 바람을 가져본다. 실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장애담론이란 것은 선진국의 이른바 '장애학'을 소개하는 정도이고, 장애운동에 대한 이론화도 무족하다. 물론 장애운동 한 귀퉁이에서 발을 담구고 있는 나 역시도 이런 부족한 현실에 대한 책임이 없진 않기에 대놓고 불평도 할 수 없는 처지이다. -_-;

 

 

전현일 대표님의 메일 내용을 계기로 한국 사회 장애담론에 대한 고민을 좀 더 해보아야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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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권교육 단상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장애이해교육'이니 '장애인식개선교육' 등에서 대체로 이루어지는 교육 내용은, 아니 학생들이 받아들이는 수준은 '장애인을 도와줘야 한다. 배려해야 한다'는 식의 도덕적 훈계의 확인이다.

 

사실, 이런 교육은 기존의 관점/태도를 더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낳기 어렵다. 오히려, 왜 도와줘야 하는가? 왜 장애인을 배려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함께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아래 글은, 인권교육센터 '들'의 상임활동가인 한낱님이 쓴 글이다. '장애인을 도와줘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장애인과 어떻게 하면 함께 살 수 있는가' '장애친화적인 환경을 어떤 식으로 구성할 것인가' 하는 관점의 변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장애인인권교육과는 차별적이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한, 근본적인 문제와 마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인권교육은 '도발적'일 필요가 있다. 도발적이라 함은 기존에 견지하는 관념에 대해 정면으로 묻고 스스로 자기 생각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권'의 출발도, 이런 '도발'과 '감행'에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

 

한낱님의 말처럼 '인권이 나와 상관없다고 여긴다면, 그저 남의 이야기라면, 그것은 도덕 이야기이고, 하나마나한 소리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남는 과제는, '도대체 장애인의 인권과 당신의 인권이 어떤 상관성이 있는가'를 논리적으로 우리 각자가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성글더라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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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 날다] ‘몸’으로 통하다

대안학교 청소년들과 함께 장애인권 공감하기

한낱
 
"청소년들과 함께 '장애인권교육' 해본 적 있어요?”

그동안 청소년들과 함께 '청소년인권교육'을 해 본 경험은 꽤 있다. 장애인권 활동가나 장애인 당사자 분들과 '장애인권교육'을 해본 경험도 꽤 있다. 자기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뿜어져 나오는 인권의 목소리는 명쾌하면서도 우렁차다. 그런데, 비장애 청소년들이 대다수 모인 자리에서 장애 인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인권이 내 얘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로 남아 버릴 때, 그것은 인권교육이 아닌 도덕 교육으로 흐르기 쉽다.

어떻게 내용을 구성해야하나 혼자 난감해하다가 장애 인권단체 활동가 몇몇에게 조언을 구했다. 청소년들과 함께 장애 인권 교육을 진행했던 경험담을 쭉 듣게 되었다. 그이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 역시 나의 고민과 맞닿아 있었다. 대부분 초․중․고등학교에서 진행되는 장애 관련 교육은 ‘장애이해교육'인데, ‘몸이 불편한 장애인 친구를 잘 도와주어야 한다, 특별히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청소년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

'학생들이 서로를 돕겠다는데 뭐가 문제냐?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시작 아닌가?' 라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조금만 질문의 방식을 달리하면, 인권의 시선과 도덕의 시선이 가진 근본적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비장애인은 도움을 주는 주체로, 장애인은 도움을 받는 대상으로 고정되는가?' 거리에 나온 장애인을 보면 불편한 시선을 보내고, 사실상 장애/장애인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장애인을 도와주어야 한다,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입장만을 되풀이 한다. 이러한 껍데기 도덕을 깨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등한 주체이며 같이 삶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느끼고 생각해보는 것이 장애인권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다. 나아가 '장애인은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 아니라, 장애 친화적으로 구성되지 못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소수자/약자화 된다는 것'을 이야기해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

어떤 식으로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 ‘몸’을 매개로 청소년들과 소통해보기로 결심했다. 나에게 ‘몸’이 나의 경험, 상처, 기억이 담겨있는 공간이듯, 장애인에게도 ‘몸’은 그러한 공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장애가 불우하고, 불행한 족쇄가 아니라 나와 같은 혹은 나와는 조금 다른 경험과 기억이 담긴 ‘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장애인권 문제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하면서.

날개 달기 - 자화상, 내가 보는 나

자화상 그리기를 하려면, 나와 만나는 시간이 열려야 한다. 준비해간 몇 가지 사진자료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몸'하면 떠오르는 느낌이 뭐냐고 묻자 '야하다, 더럽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내 몸을 봐도 그런 느낌이 드나? 왜 우리는 '몸' 하면, 누군가의 벗은 몸, 그것도 잘 빠진 몸매의 남성과 여성을 떠올리게 될까?" 질문을 던지며 현대 여성 화가 제니 사빌의 자화상을 보여 주었다. "이런 자화상 본 적 있어요?"

 
위 사진:[제니 사빌의 자화상]


다소 충격을 받은 듯 한 친구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어떻게 저런 모습을 사람들 앞에 보일 수 있냐'는 투의 야유. 곧이어 "거울을 자주 보나요? 내 모습을 뚫어지게 본 적 있나요?"라고 묻자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공포를 느낀다고 대답한 친구도 있었고, 위로를 받는다고 대답한 친구도 있었다. 여러 아마추어 혹은 프로 화가들이 그린 자화상들을 쭉 보여주고, 마지막으로는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을 보여주며 그녀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위 사진:[프리다 칼로의 자화상들]


프리다 칼로는 18살 때 전차 사고를 겪고, 대부분의 신체가 부서지는 경험을 한다. 그 때 병원 천장에 거울을 붙여놓고 자신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다. 퇴원 후에도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자화상의 느낌들이 모두 다르다.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림의 색감도 구도도 달라지는 것……. 졸고 있던 친구들도 일어나 이야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몇몇 여성 친구들은 상당한 감정이입을 했다. 프리다 칼로 자화상에 대한 느낌들을 먼저 나누고, 프리다 칼로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사연이 담긴, 자신의 인생 이야기가 담긴 자화상을 그려보기로 했다.

더불어 날갯짓- '도움 주기'에서 '함께 살기'로

친구들의 그림 실력에도 놀랐지만, 자신을 표현해내는 방식도 놀라웠다. 어떤 친구는 자신의 잘려진 머리카락과 다시 자란 머리카락을 동시에 그려 놓고, 어렸을 적 머리를 잘렸던 기억에 대한 상처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또 어떤 친구는 화면 가득 자신의 감정에 따라 다른 색깔로 빛나는 눈을 그려 놓았다. 거리 화가가 그린 캐리커처 느낌으로 나른한 자신과 에너지를 얻은 자신의 모습 두 가지를 그린 친구도 있었다. 도화지를 네모 칸으로 모두 분절시켜놓고, 자신의 각각의 신체 부위를 하나 씩 그려 넣은 후, 각각의 사연을 발표해준 친구도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집 떠난 파란 강아지로 그린 친구도, 코스프레 복장을 한 자신의 모습을 그린 친구도 있었다. 친구들의 그림을 보면서 서로 질문하기도 하고, 그림의 느낌을 이야기해 주기도 했다.

 
위 사진:[청소년들이 그린 자화상]


자화상 감상을 나눈 후, 바로 장애여성들이 그린 자화상과 장애 여성 사진전에 전시되었던 사진 한 컷을 보여주었다. 내가 내 몸을 느끼고 사유하듯, 장애 여성도 자신의 몸을 느끼고 사유한다는 점을 덧붙였다.

 
위 사진:[출처: 장애인권교육네트워크]


장애,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장면을 묻자, ‘휠체어, 목발’과 같은 보장구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도움 받는 모습, 구걸하는 모습 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왜 우리는 그런 모습만을 떠올리게 되는 걸까?",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애가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라고 묻자 몇몇 친구들은 당황스러워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랑한다면 장애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라고 대답한 친구들이 많았다. 어떤 친구는 "누군가의 상반신만 사랑하거나 하반신만 사랑할 수도 있는 걸까?"라고 묻기도 했다. 장애인에게 장애는 분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며, ‘장애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라는 대화를 나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연애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가는 극장에 갈 때, 식당에 들어갈 때도 진입로가 없어서 벽에 부딪혀야 하는 지극히도 ‘불편한 현실’과 연관된 문제라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위 사진:[사진출처: 경향신문]


스웨덴 장애 여성과 한국 장애 여성의 하루를 비교한 그림을 보면서도 친구들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장애인들이 살아가기 힘든 것 같아요." 등과 같은 이야기를 던졌다. "스웨덴보다 한국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심한 이유는 뭘까?"를 질문했고, 그것이 장애 친화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은 뭔가 부족한 존재,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남게 되는 것과 연관된 문제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머리를 맞대어

프랑스의 공익 광고를 보고 나서 나눈 대화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휠체어 중심, 수화 중심, 점자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이 된다. 광고를 보고 나서 한 친구가 아주 핵심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제가 지금 보다 훨씬 편해질 것 같아요." 청각 장애를 가진 친구의 감수성이 빛을 발하는 시간이었다. 장애 인권 수업이라고 해서 장애를 가진 친구를 의도적으로 더 발표시키거나, 그 친구를 신경 써서 수업하는 것은 오히려 장애 당사자 친구에게 부담감을 갖게 한다. 자연스럽게 ‘함께’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종종 이 친구는 작은 활약들을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교육을 정리하며 스웨덴에서는 외국 이민자들이 장애인으로 분류된다는 이야기를 해주자, 친구들이 다들 놀라워했다. 통역 지원과 언어 학습 지원을 위해 장애인으로 분류된다는 점, 이와 같은 사회에서 장애는 우리 사회처럼 족쇄가 아니라 정당하게 편의를 제공받아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이야기도 더불어 나눴다.

'장애인에게 내가 무엇을 해줘야 하는가'에서 '장애인과 함께 살기 위해 무엇이 변해야 하는가'로 문제의식을 '약간은' 이동할 수 있었던 시간. 언제나 그렇듯 인권교육이란 변화를 일굴 수 있는 작은 날갯짓에 불과하다. 이 작고 우연적인 계기를 자기 삶의 돌풍으로 만드는 것은 참여자의 몫. 인권교육에서 중요한 건, 역시 '무엇을 매개로 서로 공감할 것인가'를 잡아내는 일이란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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