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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12
    [연재] 이명박 vs 아고라 :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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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8/12/12
    비폭력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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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명박 vs 아고라 :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①

[연재] 이명박 vs 아고라 :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①
다시 화두가 된 “민주주의”
 
이명박 정부 취임 이후 어느 때 보다도 민주주의에 대해서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이라며 사회의 모든 분야를 자기의 입맛대로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마을 이장부터 지방의회까지 직접선거를 통한 선출직이 늘어났고 최근에는 교육감 까지 직접 선거를 통해 뽑습니다. 그러나 과거보다도 개인이 사회에 대해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불가능해보이고 무력감마저 들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확장되었을까요? 민주주의는 과연 무엇일까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데모크라시)는 그리스어의 “데모스”와 “크라티아”의 합성어입니다. “데모스” 민중, “크라티아” 힘, 지배, 통치를 뜻합니다. 여기서 힘, 지배, 통치는 정부의 권력처럼 위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스스로 통치하는 힘들의 연합으로서 협력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국민이 마땅히 결정해야 할 일이 일방적으로 결정됩니다. 이러한 정치 형태는 민주주의라 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출발하였고 그들이 말한 민주주의는 시민이 공동 생활의 중요한 결정을 직접 참여하여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자기의 공동 생활의 중요한 결정에 직접 참여 할 수 없는데 민주주의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대의제는 과연 민주주의인가?

그러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아니고 자기의 결정 권한을 타인에게 위임하는 대의제가 되었습니다. 국가의 탄생과 근,현대의 경제시스템 도입 이후 직접민주주의는 민주주의에서 불가능한 어떤 것이 되었고 선거를 통한 대의제를 민주주의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거 이후 어떤 통제 장치도 없이 대의제 기구를 장악하면 모든 것이 결정되어 끝나버리는 것은 민주주의가 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대의제 민주주의는 모순 그 자체입니다.

운명과 같은 우연처럼 현재 이명박 정부의 독선에 맞서 투쟁을 하고 있는 그 중심에 포털사이트 토론방 “아고라”가 있습니다. 아고라는 그리스 시대 토론의 광장이고 자유로운 공공영역의 이름입니다. 어떠한 생활을 해야 하는가? 어떤 정치형태를 계속할 것인가? 그러한 문제들이 아고라에서 논의되었다고 합니다. 포털사이트 토론광장 아고라가 싸우고 있는 것은 이명박 정부를 넘어서 바로 대의제 민주주의 그 자체입니다.


대의제 다시 생각해 볼 일

대의제 민주주의가 과연 민주주의인가? 다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또한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인 공동 생활에 대한 공동 결정권은 현실에서 어떻게 가능한지? 이를 실현하는 것은 과연 불가능한 일인지? 우리는 언제나 차선 혹은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

참고 자료 :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 김종철/이반 옮김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연재를 시작하며...
[필자주] 많은 사람들이 현재 진행형인 촛불 시위를 두고 제 2의 민주항쟁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민주항쟁” 사람들은 무엇을 두고 제 2의 민주항쟁이라 말하는가? 촛불을 든 민중들의 민주적 요구들은 무엇이며 어떤 요구들이 억압되었기에 이토록 장시간 끈질기게 분출되고 있는가? 저는 “촛불은 무엇이다”라고 규정하고자 이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미 규정된 것으로 촛불을 규정하기보다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우리가 한계로 느끼는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상상력이 보이지 않을까하는 바램에서 이 연재를 합니다. 저 조차도 잘 정리가 되지 않았으며 현재 진행형입니다. 연재 글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작성할 예정이고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연재글 순서
①이명박vs아고라
②선거와 민주주의
③세계화시대 민주주의는 있는가?
④민주주의의 대안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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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한국 철학

 한권으로 읽는 한국 철학


황광욱, 정성식, 임선영 지음

동녘출판사


2008년 12월 6일


시립도서관에 목요일 날 반납했어야 하는데 반납하지 못했다. 김교빈 교수의 한국철학 특강을 들으며 한국 철학에세이를 빌려보려고 했는데 그 옆에 한권으로 읽는 한국 철학이 더 마임에 끌려 빌려오게 되었다.


크게 3부로 구성되어있는 책이다. 1부 정신, 2부 진리, 3부 변혁이라는 주제로 단군, 최치원, 정몽주, 송시열, 최제우, 원효, 지눌, 서경덕, 이황, 장제두, 왕건, 정도전, 조광조, 이지함, 홍대용, 정약용을 소개하고 있다.


불교는 인도에서 나고 중국에서 갈려졌으며 한국에서 통합되었다는 다소 거친 해석이 있는데 여러 가지로 수긍이 가는 말이다. 원효의 사상은 꼭 한번 살펴봐야겠다. 대중들과 함께 대중들 속에서 깨달음을 실천하는 멋진 사람이다. 산속에서는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고 하더니 그것이 무릇 대중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빛을 내는 것이 깨달음이 아닐까? 화담 서경덕 또한 멋지다. 그의 기이론도 꼭 공부하고 싶다.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한 답가로서 정몽주의 단심가는 참으로 멋진 응수이다. 오늘날 비꼼과 비판만이 난무하는 응수의 시대에 귀감이 될만 하다.


기회가 된다면 서경덕,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실학적 전통과 철학도 읽어보고 싶다.


민족정신


현재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물으면 사람들이 무엇이라 이야기 할까? 아마 한(限)이라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역사서에 묘사된 한민족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이렇다 한다.


동방을 이라고 한다. 이는 만물이 근거하여 나오는 것이다. 동방의 사람은 성품이 어질어서 만물을 살리기를 좋아한다.(중략)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기를 즐겨한다.


부여는 현토의 북쪽 천리에 있다. (중략)함께 어울려 예절로서 술 자리를 베풀고, 사냥하는 달에는 하늘에 제사지내고는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큰 모임이 연일 계속되는데 이것을 영고라고 한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중략) 그 풍속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청결한 것을 좋아한다. 또 저녁이 되면 남녀가 예고 없이 모여 무리를 지어 노래하기를 즐긴다. 10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큰 모임을 여는데 이것을 동맹이라고 한다.


그러하기에 한민족의 정신은 어울려 노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숫자 3에 대한 이야기

1은 아버지, 2는 어머니, 3은 자손이다. 3은 진보와 변화 발전이고 질적 도양의 변증법적 지양이다. 하늘과 사람과 땅이라는 구조와 고구려의 삼족오도 이런 천지인 사상이 기본요소임을 보여준다.


이방원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져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더 읽고 싶은 책 : 화담 서경덕의 철학사상, 한국실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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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괴물의 탄생


우석훈 지음(출판사 개마고원)


2008년 12월 3일(수)


전주시립도서관에서 괴물의 탄생을 빌렸다. 이번에도 빌리려고 했던 책은 빌리지 못했고 신간에 꽂혀있는 우석훈의 책을 빌렸다. 그가 썼다는 4권의 경제학 시리즈 중 마지막 책이다.  괴물의 탄생에서 괴물은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연상되었다고 한다. 갑옷을 입은 사람이 표지인 리바이어던은 사람이 몸을 이루어 거대한 집단이 된 괴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우석훈은 이명박이라는 괴물의 탄생을 바로 그 갑옷의 몸을 이루는 공범자로서 우리를 상정하고 있다. 3부 13강으로 구성되어있는 책은 경제학에 대한 인문교양서 정도로 읽어주길 요구하고 있다. 읽어보니 그 말이 이해가 간다. 구어체로 쓰여 읽기도 편하고 개념도 그리 어렵지 않아 여는 경제학 책에 비해 읽기가 수월하다. 1부 세계 경제의 흐름과 경제이론의 변화에서는 대략적인 자본주의의 역사와 경제이론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2부는 한국 자본주의의 형성과 위기를 3부는 한국 경제의 대안과 3가지 과제를 서술하고 있다.


경제학에는 부자의 경제학과 노동자의 경제학이 있다는 말과는 다르게 우석훈은 나쁜 경제학과 좋은 경제학으로 경제학을 구분한다. 부르조아 경제학과 프롤레타리아 경제학이라는 구분 사이에 우석훈이 강조하는 것은 국가와 시장의 영역과 다른 제3의 경제학적 역할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한국 경제가 어떻게 삼성 공화국이 되었는가 그리고 급속한 경제 개발이 낳은 중앙형 시스템의 비극에 대한 분석은 상당히 흥미진진한다. 특히 지난 10년간 만들어진 지역토호와 중앙토호의 유착의 문제는 지역 운동 속에서 보다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토건 전주라는 강의가 있는데 이 개념은 우석훈의 개념인지 다른 이의 개념을 가져다 썼는지 모르겠지만 통렬한 비판이다. 일곱 번째 강의에서 토지에 대한 우석훈이 이야기는 토지 문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경자유전이라는 헌법(121조) 조항에 대한 이해는 더욱 그러하다. 가진자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경자유전은 오히려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우석훈은 앞으로 수도권 개발을 둘러싼 대결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누가 이기느냐 보다는 그 대결이 낳을 뼈 아픈 상처를 예고하는 것이다.


사회적 경제, 제 3부분이 전체 경제에 10%로만 차지하더라도 그것이 국가와 기업 문화에 미칠 영향과 외부적 충격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국가와 기업에게 이런 부분에 대한 대승적 투자를 호소하면서 책을 마무리 하였다. 우석훈은 한국과 비슷한 스위스 경제 모델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앞으로 지역 경제 문제와 경제 분석 일반에 활용할 만한 인용문이 많이 있어 반가웠지만 한번 읽어서는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부터 인용할 구절이 있으며 포스트 잇을 부쳐 표시를 해놔야 겠다.


인용할 만한 통계


한국 전쟁 전 21.4%였던 도시화율이 2005년에 80.8%가 되었다.(160P)

제주도 땅 외지인 60%, 20~30% 지역토호, 나머지 30~40% 농민과 현지 거주인(1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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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 에세이

 동양철학 에세이


저자 : 김교빈, 이현구 그림 : 이부록

출판사 : 동녘

2008년 11월 19일(수)



아트앤스터디에서 김교빈 선생의 한국철학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다. 그러던 차에 도서관에 김교빈 선생의 책이 있기에 빌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철학에세이도 있었다. 차라리 한국철학에세이를 빌릴 걸 후회했지만 이 좋은 정보 또한 동양철학 에세이가 아니었으면 모를 뻔 했다.


머리말과 들어가는 말을 통해 동양철학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동양에는 철학이라는 용어가 없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철학이라고 번역한 필로소피는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동양이 사유들은 도를 깨닫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엄밀한 이미에서는 철학이 아니라 도학이라고 했어야 합니다.”


“성인은 귀이(耳)와 입구(口)와 임금 왕(王)을 합친 글자입니다. 글자 그대로 귀와 입을 가지 사람이 임금 노릇을 한다는 뜻입니다.”


“도는 걸어가면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도는 생각과 실천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사는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옳은 길을 실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도를 깨치는 것에 필요한 것은 지혜가 아니라 수양을 통한 덕임을 말하면서 동양철학은 지혜로운 사람보다 어진 사람을 높였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양철학이 오늘날 전성기를 누리고 있으나 대부분 상품화된 도덕과 신비주의로 나타나는데 문제를 지적하며 동양철학의 신비적 해석도 시대를 넘어선 보편적 가치의 부여도 거부하며 그 사상의 시대적 한계와 의미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까지 살펴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 했다. 공자, 노자, 묵자, 장자, 맹자, 순자, 법가, 명가, 농가, 주역의 순으로 해설을 해논 동양철학 에세이는 다양한 동양 사상에 대한 소개이다.


춘추 전국 시대 제가백가의 사상을 다룬 동양철학 에세이는 각 사상의 핵심을 원문을 통하여 쉽게 설명하고 있어 보기에 막힘이 없다. 어떤 사상이 맞는가 보다는 어떤 사상이 왜 그시기에 특별히 채택이 되는가에 대한 설명이 더욱 감칠 맛 난다. 중국의 격변기에 나타난 다양한 사상들. 도덕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될 듯 한 비도덕적인 현실에서 공자는.......


어떤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그 시대의 역사적 특징을 이해함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20대에는 묵자처럼 치열하게 살다가 30-40대에는 한비자처럼 영악하게 살고, 50-60대에는 공자나 맹자처럼 근엄하게 살다가 70-80대에는 노자나 장자처럼 유유자적하며 살기도 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사람도 때로는 공자처럼 그리고 때로는 노장처럼 살기를 원하기도 한다.


20대에는 사회변혁을 위해 치열한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 쇠약해저 버린 내 몸 둥아리를 붙잡고 얼마나 많이 울었으며 참회했던가? 그 순간 참회를 도와준 불교의 경전과 노장의 글들이 얼마나 새로웠던가를 떠올려본다. 한 이념에 사로잡혀 있던 나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유물론 철학이 아니면 모두가 쓰레기라는 생각이 지배하던 젊은 시절이 얼마나 철이 없던 것인지?


노장 사상 말고라도 다양한 사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기쁘다. 특히 묵자나 명가, 농가는 새롭기도 하거니와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어느 면에서 보면 공자는 플라톤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의 쓰임과 덕의 강조, 그리고 중국과 그리스의 시대적 배경이 닮은 꼴이다. 비슷한 시기의 사람이기도 한 걸 보면 인류사 속에 어디가 더 잘 난 것도 더 못 난 것 도 없지 않은가?


지금 나와 우리에게 필요한 성인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때를 모르면 철부지라고 하였다고 한다. 어린이는 추운데도 반팔을 입고 나가려하고 더운데도 긴팔을 입고 나가려 하여 철부지라고 한단다. 옛 사람들은 절기를 모르면 철부지락 했단다. 지금이 무엇을 해야 할 때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입춘, 청명, 하지, 동지 등 24절기는 이름부터가 생활 밀착형이다. 철을 들게하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각성시킨다. 그러나 지금 달력은 어떤가? 일요일은 쉬는 날, 말 일은 세금 내는 날.

과연 현대인은 철들 수 있는가? 기독문명의 천지창조 신화로부터 시작된 그레고리력에 대한 인간의 비합리성을 꼬집는 저자의 들어가는 말은 동양철학은 비합리적이라고 왜곡하는 서양철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동양철학 에세이를 반납하고 한국철학 에세이를 대여해야 겠다.

한국철학 에세이로 새롭게 만나게 될 사상과 사람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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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혁명

 주권혁명


저자 : 손석춘

출판사 : 시대의 창


2008년 11월 8일(일요일)


비폭력 교과서을 반납하기 위해 도서관에 들렀다. 아직도 김민기 책은 들어오지 않았다. 책을 두 권 빌렸는데 한 권은 동양철학에세이고 한권은 주권혁명이다. 촛불 까페의 사람들이 요즘 읽고 있다기에 빌려보았다.


손석춘 교수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원장이다. 최근 들어 정세에 대해서 책을 많이 쓰는 연구소이다. 촛불 이후 쓰여 진 책이어서 기대가 되었다. 특히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니체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마르크스와 니체의 결합이라는 주제가 책속에 포함되어 있어 더욱 궁금했다.


책은 단숨에 읽었다.

그러나 읽고 나니 기분이 묘하다. 마르크스를 해석하는 방법과 니체에 대한 의견이 그리고 대안들이 상당 부분 나와 해석이 다르다.


저자는 서문에서 신자유주의 착취 체제가 노골적인 이유를 세 가지 들었다. 1. 수탈과 침략체제에서 이익을 누리는 세력이 민중에게 진실을 조직적으로 숨기거나 속이고 있기 때문이고 2. 실존사회주의의 몰락과 진보세력이 무능이고 3. 진실을 외면하려는 민중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민주주의를 제안했으며 저자는 민주주의를 생명체로 볼 때, 민주주의의 탄생(자유주의) -> 성장(사회주의) -> 위기(신자유주의) -> 성숙으로 새로운 민주주의 발전 이론을 제안하였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민중을 행방하는 주권혁명으로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신자유주의 대안으로 민주경제론과 분단체제의 대안으로 통일민족경제와 새로운 세계를 단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글을 읽는 와중에 내가 느낀 것은 새로운 촛불운동의 자발성과 역동성을 감지한 저자의 감흥과 전혀 새로운 것 없는 저자의 철학이 만났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발전 이론은 그야 말로 논리가 이해하기 힘들고 억지스럽다. 역사를 발전사관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인류사를 보면 인간은 점차적으로 자유와 평등이 확대되어온 것은 맞지만 현재의 위기를 성숙으로 가기 위한 이행 정도로 도식화시킨다면 이것은 지나친 낙관이다. 진실에 대한 조직적 은폐라는 전제 조건도 이데올로기가 그저 허위의식에 불구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정치 선동으로 허위의식을 걷어 내면 혁명을 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고에서 비롯된다. 어떤 사회 체제는 그 시대를 유지하고 재생산해내는 주체의 재생산을 전재로 하고 주체의 재생산은 진실의 은폐로서가 아니라 그 주체의 동의를 전제한다는 현대의 주체화 양식을 너무 가볍게 보는 전제이다. 말 그대로 전혀 새로울 게 없는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민주주의 발전 단계로 보자면 사회주의의 몰락과 진보의 무능도 역사적 단계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의 전제 조건은 공허함 그 자체이다.


특히 계보학의 선구자인 니체 철학에 대한 분석은 납득하기 힘들다. 사회구조와 주체성이라는 문제를 혼합해보려는 시도는 이미 있어왔지만 수직적 나무구조에 초극하는 주체를 결합하는 것은 변증법이 아니다. 니체는 인간이라는 초극의 주체가 어떻게 수동화되어가는가를 서양 역사를 냉혹하게 분석하여 죽어간 주체를 살리기 위해 그리스 시대 주체화양식과 주체의 역능을 복원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니체의 계보학적 관점을 버리고 니체의 문제의식을 가져다 쓰는 것은 니체를 왜곡하는 것이 아닐까?


민주주의는 과연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인가? 오히려 나무의 성장을 위해 뽑혀온 무수한 잡초들의 제거가 바로 물질문명에 바쳐진 민주주의의 피는 아닐까?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조직화 양식이 꼭 나무형 일 필요가 있는가? 주권혁명이 제시하는 새로운 헌법과 새로운 주체의 탄생은 정말 절실하지만 그 방법과 절차는 너무나 빈곤하다. 경제 발전론의 단계에도 한 말이 만치만 더 이상이야기 해야 무슨 소용인가? 결론을 위해 서론이 있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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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교과서

 

비폭력 교과서


2008년 10월


오랜 만에 시립도서관에 갔다. 김민기의 책을 빌리기 위해서이다. 28,000원이나 하는 책을 사기에는 고민이 많이 된다. 도서관을 이용하라는 보리 누나의 조언으로 도서관에 갔으나 김민기의 책은 도서관에 없었다. 읽고 싶은 책으로 신청을 해놓고서는 책 쇼핑을 했다. 언제나 책 쇼핑은 즐겁다. 비폭력 교과서라는 제목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장을 넘기니 비폭력 저항운동에 대해 이런 저런 그림과 사례들이 소개되어있다. 폭력과 비폭력 논쟁이 많았던 촛불을 떠올리며 빌렸다. 폭력과 비폭력 논쟁에서 항상 아쉬웠던 것은 그것이 불의에 대한 불복종의 의미가 퇴색된 채 형식 논리로 되어버린 경우이다.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이나 사회의 권위주의적 형태에는 무관심한 채 시위대의 폭력 행위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되는 폭력과 비폭력 논쟁은 정말이지 답답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구호를 외치는 것 이외에 물리력으로 한번 해보려는 한탕주의나 상상력의 빈곤도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현실이다.


비폭력 교과서는 비폭력운동의 사례를 풍부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양한 방법의 비폭력 행동을 그림을 그려 주기도 하고 사례를 소개하기도 하고 비폭력 행동을 실현하는 조직들이 원칙과 규율도 소개하고 있어 눈에 잘 들어오고 재미있기도 하다. 필리핀의 아키노는 독재 정권에 맞서는 시민들의 비폭력 행동으로 총파업, 수업거부, 가두행동, 국영티비와 재벌이 소유하고 있는 신문의 구매 및 광고 게제 거부, 공공요금 납부 거부, 불매운동, 정부계 은행에서 예금 인출 등을 호소하였다고 한다. 이정도면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 비폭력 교과서는 대안적 삶과 운동으로서의 자기 혁신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듯하다. 비폭력적 삶의 자세와 단체의 규율은 새겨볼 만한 게 많다.


간디의 자서전을 잃으면서 비폭력 운동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비폭력이라는 것이 단순히 무저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진이 금지된 곳에서 행진을 시도하고 노동자의 파업을 호소함과 동시에 물레를 돌려 투쟁하는 사람들의 가족들을 돌보는 정성이 놀라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간디와 같은 비폭력을 바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생사가 오가는 처절한 자본과 권력의 폭력 앞에 비폭력만이 대안이라고 말하기에는 여전히 쉽게 동이하기가 힘들다. 샤파티스타의 무장 투쟁도 총을 들었지만 폭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총보다 더 무서운 말과 민주주의가 샤파티스타의 무기임은 확실하다.


우리의 상상력이 다양함을 요구하고 비폭력의 정신이 불의에 대한 불복종에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비폭력 교과서는 읽고 토론할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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