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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료들, 경제교육 받으러 제네바로

스위스는 물가가 아주 비쌉니다. 따라서 교육 비용도 만만찮을 것입니다.

 

북한은 남북경협의 일환으로 한국의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경제학자와 경제관료들, 그리고 기업가들로부터 경제교육을 저렴한 비용으로 아니면 무료로(한국의 재정지원으로)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봄이 어떠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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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지금 제네바로 간다, 공부하러!

북한 관료들의 스위스 시장경제 연수 프로그램 단독 입수
대형 슈퍼마켓 둘러보고 영국 교수 강의도 들어

▣ 제네바=윤석준 / 유학생 semio@naver.com

유난히 청명하던 지난해 가을 국제기구의 도시 스위스 제네바에 14명의 북한 중견 관료가 6주간의 일정으로 입국했다. 이들은 제네바에서 자주 열리는 국제회의에 얼굴을 내밀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바로 스위스 개발협력청과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가 1997년부터 벌써 7년째 운영하고 있는 북한 중견관료 교육 프로그램인 ‘민주주의, 경제, 개발: 21세기 도전에의 화답’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북한 관료들의 소속기관은 외무성(5명)뿐만 아니라 식품보건성(2명), 무역성(2명), 경공업성(2명), 큰물피해대책위원회(3명) 등으로 다양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 4명은 여성 관료여서 눈길을 끌었다.

첫주엔 국제관계와 유엔 시스템 집중학습


△ 제네바의 국제협상응용센터 건물. 북한 관료들은 이곳에서 7년째 시장경제 연수를 받고 있다. (사진/ 윤석준)

이들의 교육 프로그램을 위탁 운영하는 스위스 제네바의 비영리 민간단체인 ‘국제협상응용연구센터’(CASIN) 관계자는 “북한 관료들이 이곳에서 국제경제와 세계무역 체제에 대한 이해를 비롯해 경제외교와 관련된 최근의 경향 및 유엔 등 국제기구와 다양한 국제사회의 주체들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북한 엘리트들에 대한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북쪽 관료들이 그들의 경제 작동원리를 좀더 잘 이해해, 경제개혁을 성공적으로 이행하고, 국제무역 시스템과 무역협상에 성공적으로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선 시장경제 원리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기 위해 미시 및 거시 경제이론 교육이 이뤄졌고, 이어 쌍무협정과 다자간협정 등 국제무역에 대한 학습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제네바에 자리잡은 주요 국제기구들, 가령 유엔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국제무역센터(ITC), 세계무역기구(WTO)와 지역기구들, 즉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에 대한 이해도 병행됐다. 프로그램은 모두 6주에 걸쳐 진행됐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수업이 진행됐고, 때로는 수업 뒤 저녁 숙제로 읽을거리들이 부과되는 등 상당히 밀도 있는 연수 프로그램이었다. 국내의 일부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 관료들의 해외연수가 단기연수라는 점에서 그 실제적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선 북한 엘리트들은 첫 주 프로그램(2004년 8월23~29일)에서 국제관계와 유엔 시스템을 집중적으로 학습했다. 제네바에 유엔 유럽본부와 다수의 유엔 산하기구들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 관료들이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지적된다. 이를 위해 첫 사흘은 국제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다자간 외교에 대한 기본 세미나들이 진행됐다. 그리고 넷쨋날에는 유엔 유럽본부를 방문했다. 제네바대학의 게발리 교수(정치학)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에 대한 일반이론과 유엔과 북한의 관계를 점검하는 세미나를 열었다.

둘쨋주에는 시장경제 시스템에 대한 이론 학습과 함께 이의 실제적 이해를 돕기 위한 프로그램이 이뤄졌다. 우선 이론 수업에 앞서 그 주 월요일 아침에 들른 곳은 다름 아닌 대형 슈퍼마켓이었다. 이곳에서 야채와 과일의 집하, 포장, 배송의 모든 절차를 직접 체험하면서 공급망 관리(Supply Chain) 이론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특히 이 대형 유통업체는 수년 전 북한 공산품을 공급받아 판매한 인연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실물경제 체험에 이은 본격적인 경제이론 수업은 사흘 동안 런던정경대학(LSE)의 페트로풀루 교수에 의해 진행됐다.

“학구열과 영어실력에 놀랐다”


△ 스위스 해외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한 북한 관료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그 다음주에는 북한이 가장 관심을 쏟고 있는 개발 전략에 대한 학습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제네바대학의 개발학대학원에는 제3세계 개발 관련 전문인력이 많이 포진해 있다. 따라서 어떤 나라의 개발 문제는 이곳에서도 가장 내실 있게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처음 이틀간은 제네바에서, 그 뒤 사흘은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서 진행됐다. 베른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주관한 스위스 개발협력청 담당자들을 비롯해 외교 당국자들이 직접 나서 북쪽 연수생들과 잇단 대화와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스위스가 기술적 지원을 통해 베트남의 대외 개방에 큰 도움을 준 적이 있어 북쪽 관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대외경제 협상전략도 주요한 연수 과목 가운데 하나였다. 넷쨋주(2004년 9월13~19일)에는 대외경제 협상과 외국인 직접투자(FDI)를 유치하기 위한 전략을 익히는 데 연수의 초점이 맞춰졌다. 이 프로그램은 연구센터가 장기간 준비해온 사례연구 위주로 이뤄져 마치 경영학석사(MBA) 프로그램 같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수 프로그램은 시간이 흐를수록 전문성을 더했다. 다섯쨋주에는 제네바에 자리잡은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 유엔무역개발회의, 국제무역센터 등을 방문해 관련 전문가들로부터 국제무역 시스템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특히 국제무역센터에서는 이곳의 제품 평가 시스템을 활용해 국제시장에서 북한 상품들의 경쟁력, 시장접근성 등을 즉석에서 평가해주어 북한 관료들의 주목을 받았다.

마지막 주는 주로 유럽연합(EU)에 대한 학습에 할애됐다. 유럽 통합의 역사적 전개 과정과 이론적 배경을 학습한 일행은 사흘간의 일정으로 브뤼셀을 방문했다. 이 기간 동안 유럽연합의 주요 기관을 방문하고, 기관별 북한 담당자들을 만나 상호 관심사를 주고받았다. 특히 연수에 참여한 북한 관료들의 영어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나 영어 강의와 전문가들과의 의사소통에 큰 불편이 없었다고 한다. 브뤼셀 자유대학에서 참가한 세미나에서 우연히 북한 연수생들과 마주쳤던 한 대학원생이 “북한 관료들의 높은 학구열과 영어실력에 놀랐다”고 전해줄 정도로, 마지막 주까지 이들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고 한다. 이른바 ‘코에 바람 넣는’ 연수는 아니었던 것이다.


△ 북한은 관료의 스위스 경제연수뿐만 아니라 언론인의 해외 연수도 추진했다. 베를린-브란덴부르트 언론연구소에서 연수 중인 북한의 한 언론인. (사진/ 연합)

남북경협에 대한 프로그램도 포함돼야

이 교육에 참가한 북한 관료들은 프로그램 마지막 날인 10월1일 수료증을 받고 다음날 평양으로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에도 이 프로그램은 가을 무렵에 제네바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미 북한 관료들만을 대상으로 지난 7년 동안 지속해온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올가을에도 차질 없이 진행될 예정이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은 제네바대학 내 국제학연구소, 유럽학연구소, 개발학연구소의 풍부한 연구인력 및 인프라를 바탕으로 한 수준 높은 이론 강의와, 제네바에 위치한 유엔 유럽본부 및 여러 산하기구들을 실제로 체험하고 해당 전문가들과 직접 토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서방국가의 프로그램들보다 상당히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해에도 지난해와 비슷한 내용으로 진행될지, 아니면 다른 새로운 연수 프로그램이 추가될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이전의 연수 프로그램은 다자외교와 개발협력 시스템 구축 등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지난해에는 시장경제의 기본 개념과 원칙, 국제무역과 통상외교, 경제개혁 과정 등에 대한 이해를 돕는 프로그램으로 채워졌다. 북한의 실정과 현안 이슈에 맞춰 조금씩 연수 프로그램을 개선하고 있는 셈이다. 북한 당국의 요구도 연수 프로그램에 많이 반영하고 있다. 해당 교육기관에서는 북쪽의 입장을 감안해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고 있어 더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북쪽이 지난 7년 동안 꾸준히 연수에 참여한 것으로 봐서는 이 프로그램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한겨레21>이 단독 입수한 스위스 시장경제 연수 프로그램 문건. 6주간 빡빡한 일정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북한의 경제개혁과 경제개발에 있어 남한을 배제한 북한과 서방과의 관계를 주로 다루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후원자가 스위스개발청이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구성에 후원기관의 이해관계가 반영된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는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북한 경제개혁과 경제개발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서방국가가 아닌 남한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최소한 남북경협에 대한 논의라도 이 프로그램의 일부로 포함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제네바에서 활동하는 한 국제개발 전문가는 “한국의 경제개발 역사는 세계 유수의 국제개발학 대학원 과정에서 훌륭한 연구사례로 활용되고 있다”며 “이러한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노하우를 북한과 공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핵 문제로 한반도에 전쟁 위험이 또다시 엄습하고 있는 지금이지만, 이러한 정세와 상관없이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남쪽의 개발학 전문 연구기관과 교육기관, 그리고 남북경협 관련 기업들이 북한의 빈곤 퇴치와 지속적 발전을 위한 이론적·실무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다각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겨레 21] 2005년05월25일 제5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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