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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떨림(동경이야기, 오즈 야스지로)

 

 

식상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자신만의 색을 찾아나가길 원하는 이들(혹은 그를 통해 재미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식상하다는 말은 그리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식상하다는 말에는 뻔하거나 진부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면 ‘너는 재미없는 인간이야’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식상함을 저주하는 우리(자주 듣는다고 해서 그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는 직접 겪어 보지 않아도 영화나 드라마, 소설을 통해서 세상의 온갖 충격적인 더러움에 대해서는 모두 알아버렸고, 세상의 운영원리도 대충은 꿰고 있다(딴거 있을까? ‘힘쎈놈이 이긴다 + 인간은 원래 외롭다 = 사는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정도의 결론만 있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충 아는 거다). 이렇게 위대한 진리를 알고 나니 웬만한 일은 재미없고 식상한 일이 되어 버린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더 많은 새로움, 더 많은 자극, 더 많은 특이함, 더 많은...’ 이렇게 살아가게 되는게 아닐까? 정말이지 끝이 없다. 그렇게 끊임없이 감정을 착취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식상하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들이 정말로 식상한걸까? 혹시 그 식상함들은 언젠가 눈을 돌려 자신들을 봐달라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건 아닐까? 방을 한 번 둘러보자. 책장에 꽂혀 있지만 읽지 않은 책들이 있다. 사놓고 아직 보지 않은 영화들이 있다. 침대 밑에서 구조되길 기다리는 동전과 볼펜들도 있다. 어릴 적 쓴 일기와 고등학교 때 친구와 주고받던 애매한 편지는 책상 서랍 속에 묻혀 있다. 식상함이라는 말로, 너무 익숙해서 재미없다는 느낌으로 버려지고 있는 일상의 흔적들이 우리 주위에 널부러져 있다.


<동경 이야기>에는 버려진 일상의 흔적들이 있다. 일상은 삼각대 다리를 잘라내고 담아낼 사람의 눈높이에 카메라를 맞추면서부터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여행가서 쓸 공기배게를 찾으려고 주고받는 노부부의 대화 속에, 목욕하고, 밥 먹고, 간식 먹고, 잠자는 - 심지어 여관의 시끄러운 유흥 속에서 일상은 발견된다. 일상은 더 이상 식상한게 아니라 발견되길 기다리는 삶의 흔적이 된다. 그렇다고 일상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일상은 삶의 내밀함을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얇은 표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삶에 표층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오즈는 일상을 보여줄 뿐 말하지 않는다. 과도하게 의미 부여된 것은 일상의 모습도 아닐뿐더러, 감정을 착취하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오즈의 뛰어남이 있다. 표층을 통해서 삶의 내밀함을 보여주는 그의 방식이 그것이다. 내면성이 배제된 상태에서 드러나는 표층의 모습인 일상. 그 일상이 조금씩 쌓여 축적이 이루어질 때, 일상의 농도는 점점 짙어지게 되고, 일상의 농도를 통해 그 삶이 거쳐 왔을 심연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영화 막바지에는 늙은 여인의 죽음이 있다. 스필버그라면 늙은 여인의 죽음을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게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죽음이 극화된다면, 바로 그 순간 일상은 그 맛을 잃고 표류하게 되고, 전통적 가족상이 붕괴되어 가는 일본의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오즈는 죽음을 극화시키지 않는다. 오즈는 편안하게 돌아가셨다는 늙은 여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즈는 영상이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솔직히 이야기 한다. 대신 오즈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그 죽음의 얼굴을 연상하게 한다. 오즈에게는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 적극적인 정치적 주체로 발화토록하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과 언제나 공존하지만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죽음의 일상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는 한편의 영화라는 외연을 넘어 관객의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동경이야기>에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이 충만함이 있다. 그것은 신선함과 재미, 새로움과 활력으로 삶을 채워나가는 데에만 익숙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하나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다시 한 번 그 메시지를 되돌아 본다. (여백이라고 불러야 더 적당할 것 같은) 결여는 그 자신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에 보충할 수 있다. 일상 속의 결여를 채워나가는 것은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있는게 아니다. 오즈는 나의 결여(나의 결여는 식상함이 아니라 식상함이라는 말로 매도되는 일상에 대한 애정의 결핍이다)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동시에 그 결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자신 밖에 없다고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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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영화이다보니 참 좋은 영화를 낳는 모티브가 되었다.
그 가슴 따뜻한 등 돌린 식사가 나오는 카페 뤼미에르...


세속적 각성이라고 하면 그야말로 남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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