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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 폐사지, 일몰

도종환 시인의 시어를 좋아한다

후배는 최근 교단에서 벗어나 요양중에 쓰여진 시들이 맘에 든다 하지만

난 이전부터 사람과 세상에 대한 애정이 녹여져 낱말이 된

그의 시를 읽으면서 위안을 얻곤 했다

 

 

 

 

폐사지

                                                                 - 도종환



열정이 식으면서 노을도
하늘 한쪽을 폐허로 만들고 있었다
마음이 잿더미인 사람들은
떠도는 동안 자주 폐허와 만나곤 했다
사원들은 수백 년을 걸어서
마침내 폐허의 완성에 이르렀지만
우리가 쌓은 성채가 무너지는 데는
채 몇 해가 걸리지 않았다
기울어진 내 성벽의 전돌이 허리를
땅에 대는 순간 폐허의 벌레들이 달려들어
내 생애를 분해해서는 땅속 깊이 내려갔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비문 하나 남기지 못한
왕국은 바로 잊혀지고
노을은 어둠으로 바뀌어 흔적 없이 지워졌다
영생의 선약 같은 말씀 한 모금 만들지 못하고
약초 뿌리 몇 개를 캐다만 나의 행로는
적막과 함께 마른 풀냄새를
바람에 흘려보내게 될 것이다
신화를 허공에 벽화처럼 새기고 싶어 하던 날들을
새들은 저희의 목소리로 비웃을 것이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은 반드시
폐허의 긴 복도를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길게 누운 채 마모되어 가는
돌부처들이 먼저 알았을 것이다
제국의 영광을 위해 이룩한 모든 것들도
폐허의 제단에 바쳐야 하는 날이 온다는 것을
나무의 씨앗과 뿌리에게 자신의 영역 전부를 맡기고
나머지도 새들의 잠자리로 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폐허의 따뜻하고 편안한 품 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일몰



지평선을 향해 해가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구릉 위에 있는 무너진 절터에서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사암으로 쌓은 성벽의 붉은 돌 위에도
노을은 장밋빛으로 깔리고
폐허는 황홀하였다

그가 폐사지 근처 어디를 혼자 떠돌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거기서였다
젊은 날 그와 나는 새로운 세상을 세우고 싶어 했다
비슷한 시기에 둘 다 뇌옥에 갇혔고
그가 맨 앞에서 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 흘리면
내 옷을 찢어 피투성이 된 그의 얼굴을 감쌌고
내가 쓰러지면 그가 옆에서 울었다

왕국이 가장 강성할 때 지은
거대한 사원도 무너져 있었다
끝이 안 보이는 병사들을 사열하던
왕의 테라스는 적막하였고
햇빛을 하얗게 달구어 공중으로 튕겨내던 창들도
영원히 하늘을 찌르지는 못했다

일몰 속에서 나는 우리가 꾸었던 꿈도
이루어지지 않은 꿈의 파편들도
다 그것대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꿈은 언제나 꿈의 크기보다 아름답게
손에 쥐어졌다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안타까움이 남아 있는 날들을
부축해 끌고 가는 것이다
내일은 다시 내일의 신전이 지어지리라
시대의 객체로 밀려나 폐허의 변두리를
걷고 있을 덥수룩한 수염의 그를 생각했다
익명의 쓸쓸한 편력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지평선을 넘어가는 해가 그를 보고 있을 것이다
찬란한 폐허 위에 그와 내가 함께 있는 것이었다

 

 

박근재의 한국의문화유산중에서 황룡사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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