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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1 언어수업 교재를 슬며시 들춰봤다.

오랫만에 보는 반가운 시들이 눈에 들어온다.

신경림의 목계장터, 한용운의 님의 침묵, 심훈의 그날이 오면, 조지훈의 승무

서정주의 숨막힐 듯 대단한 구절들, 김영랑의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아름다운 시어들,

김춘수의 꽃과 백석의 여우난 곬족, 이형기의 낙화, 유치환의 깃발

교과서에서 보았던 시들이 갑작스레 한꺼번에 기억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온다.

더불어 교과서 밖에서 보았던, 김남주 박노해 김지하들의 시도 함께...

그리고 바로 보이는 것은 시들 밑에 나와있는 문제들.

시의 주제 소재 등등을 가지고 만들어낸 문제들.

 

난 고등학교 다닐때 문학수업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를 좋아했지만, 시의 주제와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외우라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난 한용운의 님이 조국과 부처가 아닌 사랑하는 애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의도만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난 시와 소설들의 주제와 소재등을 외우지는 않았지만

시험점수는 괜찮게 나왔다.

 

만약 내가 고등학교에서 시에 대한 수업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내가 더 자유롭게 시를 만나고 시를 만들고 시를 노래했다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지금보다 훨씬 창의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지금보다 훨씬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잘난 입시교육 덕분에

나에겐 시가 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늦진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처음 시를 만난것이 학교가 아니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言)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거기에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나의 입은
이름 부를 줄
몰랐고,
나는 눈멀었었다.
그런데 무언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이,
그 불에 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갔다.
그리고 난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이,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순량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걷히고
열리는
것을,
혹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만신창이가 된,
구멍 뚫린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만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내 자신이 심연의
순수한 일부임을 느꼈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서 멋대로 날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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