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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만 잘하면 훌륭한 사람 되나?

주말에 코엑스에서 하는 유아도서전 가판에 나갔다. 워낙 큰 행사고 사람도 바글바글하고 실내라서 답답하고 암튼 최고로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터라 나름 맘의 준비를 하고 갔다. 신종플루 때문에 예년의 절반 정도라고 하지만 그 정도도 너무 많아서 숨막히고 답답했다. 하기사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는 확실히 예전보다 적어 보이더라.

 

솔직히 나는 어린이 그림책에는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우리 회사가 또 그 쪽으로 책을 많이 내기때문에 관심을 가져볼까해서 이번 유아도서전은 규모가 크다하니 다른 회사 가판들 다니면서 구경좀 해봐야지 했다. 그런데 구경다닐 여유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막상 행사장에 가보니 내가 가 볼만한 가판은 별로 없었다. 학습만화, 완구, 이런 것을 파는 가판이 많았고 제일 많은 건! 영어교재를 파는 가판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영어관련 상품을 파는 가판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했다. 우리 회사 바로 앞 가판도 잡다한 영어관련 상품을 판매하는 곳이었는데, 마트처럼 아예 장바구니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이 부모님들 조금은 미친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가르쳐야 할까? 뭐 영어든 뭐든 배워서 나쁠 건 없지만, 마찬가지로 배우는 것이 꼭 영어일 필요는 없는거다. 그림책도 못보고, 만화책도 못보고, 영어공부를 해야만 한다면! 요새 애들은 학교가기도 전에 지옥이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영어 못해서 한 맺힌 사람들도 아니고 어른들이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나도 영어 더 잘하고 싶고, 영어 더 잘하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좋은 게 많다. 영어를 많이 잘한다면 그토록 원하는, 세익스피어와 제인오스틴을 원서로 볼 수도 있을 것다. 하지만 내가 그 나이에, 10살 이전에, 영어공부를 했다면 영어는 잘 했을지 몰라도 다른 것은 지금보다 더 못하게 됐을 거다. 어쩌면 영어원서를 볼 정도로 영어는 잘하지만 소설책을 읽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감성을 형성하지 못했을 거고, CNN뉴스를 보고 다 알아들으면서도 정작 내 머리로 무언가를 판단할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영어공부 한다고 다들 그렇게 되는건 아니지만, 나의 상식으로는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면, 결국 무언가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면 다른 것들은 얻지못하는 수밖에 없다. 이대로 온 나라가 미쳐서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영어교육에 몰두한다면 이 아이들은 정말 영어는 잘하지만 그 잘하는 영어로 소설도 못쓰고, 자기주장도 못하는 정말이지 영어만 잘하는 바보가 될 거 같다.

 

출세하고 떵떵거리고 살고 싶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이 죄다 영어잘하면 내가 영어 잘하는 건 장점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남들이 다 영어 잘하니까 나는 그냥 다른거 잘해서 세상에 보탬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하면 안되나? 어차피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 넘쳐나는데. 영어 잘해봤자 아무 출세도 못하는데 도대체들 왜 그리 영어에 목을 매다는지. 미국가서 학위 받아오려고 그러나? 근데 그럴 수 있는 재력이 되는 사람은 아주 많지는 않을텐데. 그냥 여행다닐 때 써먹을 정도의 영어는 지금 나 정도면 된다. 초중고 학교에서 배운영어만으로도 충분하다. 영어만 잘해봤자 아무 것도 안될텐데 마치 영어만 잘하면 다른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나 보다.

 

정말이지 이 아이들이 유창하게 영어로 된 조지오웰의 소설을 아무런 감동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술술 읽어내려가게 될까봐 두렵다. 그 뛰어난 영어실력을 가지고도 생각이 없고 가치관이 없어서 결국 지금 나처럼 초보 회화수준의 언어만 구사하게 될까봐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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