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트 영역으로 건너뛰기

올림픽을 보며 드는 잡스런 생각

하늘소님의 [변해 간다는 것] 에 관련된 글.

아래 글의 말미에 운동권의 무소유를 주장했다던 동기의 얘기를 이어가 보자.

사실은 그 동기녀석도 운동권이었고 지금도 자신이 했던 말을 실천하면서 살고 있다. 그가 학생운동권이었을 당시, 양말 한 짝, 상하의 한 벌, 운동화 한 켤레가 그가 가진 전부였다. 양말은 매일 빨아서 신고 옷도 더러워지지 않게 잘 빨아서 입고 운동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런 삶을 살고자 했던 동무들도 있어서 대여섯명이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 중에는 양심적 병역거부선언으로 유명해진 오모씨도 있었다. 그런데 그 동기녀석이 얘기했던 무소유는 단지 금전적, 재산적 소유를 넘어서서 심지어 우리가 취미생활쯤으로 여기는 각종 스포츠도 금해야 할 대상이었다. 사람들이 그런 운동을 하기위해서는 각종 시설이 만들어져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소요되는 많은 재정은 물론이고 자연의 파괴가 수반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구는 여가를 위해 혹은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지만 누군가는 그 사람들의 여가를 위해 노동을 착취당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말이었다. 월드컵에 사용되는 축구공이 베트남의 어린이 노동착취를 통해 만들어 진다는 사실이 이를 확인해 준다.

 

그에 비하면 나는 너무나 소비에 익숙해진 삶을 살고 있었고 지금도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앞으로도 이런 삶의 양식이 획기적으로 전환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접은지 이미 오래다. 자본의 안락함에 흠뻑 적셔진 몸과 마음을 단지 진보운동을 했다는 약력으로 탈색하기에는 나 자신이 그런 삶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어느 순간에는 그런 자본주의 삶을 갈구하는 혹은 그에 대한 욕망이 솟아 오르는 것을 느끼기까지 하니 말이다.

 

방향을 살짝 틀어서 올림픽 얘기를 해 보자.

중국은 이번 올림픽을 통해 국가마케딩에는 확실히 성공한 듯 보인다. 그 열기에 묻혀 올림픽 기간에 발생한 신장 위구르 지역의 테러도 단신처리되어 끝났고, 자신들의 4대 발명품을 세계에 자랑하며 문화적 전통성을 세계에 한껏 과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가 위신' 때문에 개막식에서 예쁜 얼굴과 예쁜 목소리를 조합하는 열성을 보이기까지 하면서 그야 말로 '100년의 꿈'을 이루려 했다. 

이런 올림픽에 대해 혹자들은 자본주의 스포츠가 원래 그렇고 올림픽은 그 상징이기때문에 올림픽 관련 방송에 관심이 없다고 하기도 한다.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고 동의하면서도 나는 열심히 중계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저 선수들이 저 무대에 서기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과 땀을 흘려야 했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왜 그들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를 생각한다. 다른 잘사는 국가의 선수들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운동을 하는 선수들은 생존의 문턱에서 헉헉대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몇몇 잘나가는 엘리트 선수들이야 문제가 없겠지만 대다수의 선수들은 국가대표가 되어서 올림픽에 출전했다고 해서 그들의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역도에서 그 무거운 쇳덩이를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고 마루바닥에 처박혀야 했던 선수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가 운동을 그만두고 일반인으로 돌아 왔을 때 그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각종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고 그것이 몇 차례 쌓여야 그나마 국가에서 주는 연금이라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선수는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고 그런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메달을 따지 못하면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들도 또 다른 형태의 '비정규직'인 샘이다. 

 

마르크스는 소외를 설명하면서 분업의 발생으로 인해 인간은 소외된다고 보았다. 원시공산사회에서는 소규모의 인간집단 혹은 개별인간이 생산과 소비에 이르는 전과정을 담당하면서 필요에 의한 노동을 했기 때문에 인간의 유적 소외, 본성으로부터의 소외는 없었다는 것이다. 무소유의 삶을 주장했던 동기녀석은 스스로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삶 속에서 스스로 소외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 역시 삶의 과정에서 필요에 의한 운동이 아니라 생존의 차원에서 그리고 사회적 강제에 의해서 메달을 따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려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또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오늘도 올림픽 경기를 열심히 볼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