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32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7/02
    20051224 -- 농민열사 추모집회
    땅의 사람
  2. 2006/07/02
    20051211 -- 2차 평화대행진
    땅의 사람
  3. 2006/07/02
    20051120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땅의 사람
  4. 2006/07/02
    20051113 -- 2005 전국 노동자대회
    땅의 사람
  5. 2006/07/02
    20051112 -- 2005 전국 노동자대회 전야제
    땅의 사람
  6. 2006/07/02
    20051022 -- 불꽃축제 그리고 TBS
    땅의 사람
  7. 2006/07/02
    20051002 -- 지리산 빨치산 유적지 답사
    땅의 사람
  8. 2006/07/02
    20050828 -- 아버지를 위해 (동영상)
    땅의 사람
  9. 2006/07/02
    20050911 -- 맥아더 동상 철거 및 주한미군 철수 결의대회
    땅의 사람
  10. 2006/07/02
    20050829 -- 늦은 휴가
    땅의 사람

20051224 -- 농민열사 추모집회

2005. 12. 24. 광화문 동화면세점앞 농민열사 추모 촛불집회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1211 -- 2차 평화대행진

2005. 12. 11.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와 한반도 평화실현을 위한 2차 평화대행진' #1 #2 #3 #4 #5 #6 #7 #8 #9 #10 #11 #12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1120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고즈넉하고 포근한 곳입니다. 숙소였던 마을 노인회관에는 메주냄새가 은은하게 나고 둘러보면 토담집도 있고 낯선이를 경계하는 요란스런 개 짖음도 있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4백여 원혼들이 아직도 잠들지 못하는 곳입니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1 #2 #3 #4 1951년 1월 단양면 영춘면 주민 가운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노인, 어린아이들과 영월등지에서 남쪽으로 피난을 가다 길이 막혀 더 내려가지 못한 강원도 사람들등 줄잡아 400여명이 곡계굴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1951년 1월 20일 오전 10시쯤 미군 비행기 4대가 갑자기 곡계굴을 행해 4시간동안 집중 폭격을 가했고 피난민들은 흰 옷을 흔들어 피난민임을 알렸으나 폭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폭탄 파편이나 기관총에 맞아 쓰러졌으며 좁은 굴을 빠져나오 못한 사람들 대부분이 질식사 또는 소사했습니다. 그 곡계굴을 답사하고 왔습니다. #5 #6 곡계굴 대책위원회 엄한원 회장님. #7 대책위원회 조병우 조사부장님 #8 #9 노인회관옆에 임시로 유골과 유물을 보관해 두었습니다. #10 #11 #12 오리걸음으로 걸어가야만하는 이곳에 3-400명이 피난와 있었습니다. #13 #14 #15 #16 #17 #18 굴속에 물이 차서 더 이상 답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19 #20 #21 곡계굴의 4백여 원혼들은 노근리의 4백여 원혼들과 왜 다른 대접을 받고 있는가? 주요언론과 정부의 무관심속에 곡계굴은 울고 있습니다. #22 자주민보의 이창기 기자님. 민간인 학살에 관하여 취재하고 인터넷 방송 [청춘]과 함께 다큐멘터리도 제작하였습니다. #23 경산시 민간인 학살 피학살자 유족회 최승호 조사부장님. 1950년 7-8월에 경북 경산의 코발트 폐광 수직갱도와 인근 골짜기에서 대구 형무소 재소자와 경산 청도지역의 보도연명원 약 3500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 10대 정도의 군용 트럭에 사람들이 실려 왔는데 내려올 때는 빈 트럭이였다고 합니다. 학살은 약 열흘 동안 진행되었는데, 포승줄에 묶여 산채로 수장되기도 했고 흉기로 가격당하거나 기름에 태워지기도 했습니다. 경산 코발트 광산에는 지금까지도 수습되지 않은 유골들이 반세기 전의 한을 그대로 품은 채 기름덩어리에 파묻혀 있습니다. #24 #25 이 곳에서 학살당한 원혼들을 위한 위령제입니다. #26 #27 #28 #29 유족회 임시 거처인 컨테이너안에 유골들은 방치되고 있습니다. #30 #31 #32 유골과 같이 묻혀있던 탄피와 탄두. 어떤이는 말합니다. 거기 유골들이 조선시대나 그 이전 시기의 유골 일 수도 있지 않냐고... 그럼 여기 있는 당시 군경이 사용하던 M1의 탄피와 탄두는 무엇인가요... #33 A지역 수직갱도의 입구. 깊이 100m정도의 이 수직갱도에 물이 차 있었는데 민간인을 수장하거나 총살하여 갱도에 밀어넣었다고 합니다. 시체가 쌓여 더 이상 학살할 수 없어 이 산 골짜기 골짜기 마다 학살을 자행해 시체가 즐비했다고 합니다. 산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입니다. #34 #35 B지역 수직갱도. 이곳에서도 학살을 하고 시체를 밀어넣었다고 합니다. #36 #37 #38 수평갱도 입구. #39 #40 수평갱도 안에 방치되고 있는 유골들. #41 왼쪽의 두개골에는 도끼로 찍은 듯한 함몰한 흔적이 있습니다. #42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유골. #43 사랑니가 그대로 있는 두개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망자가 10대혹은 20대로 추정) #44 #45 정부와 지자체의 무관심속에 유골이 묻혀있는 이 곳에 버젓이 골프장 건설을 하고 있습니다. #46 답사일시 : 2005. 11. 20. 답사주체 : 나라사랑 청년회 길사랑__사진1__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1113 -- 2005 전국 노동자대회

2005. 11. 13. 노동자대회 광화문 #1 #2 #3 #4 35년전엔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쳤고.. 지금은 노동법을 준수하라고 한다. 별로 달라진게 없는......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행사장 무대쪽에 걸어둔 현수막을 칼로 찢은 피의자(아래사진)를 현장에서 잡았다. 목격자가 있는데 본인은 혐의를 부인합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치졸한 행동입니다.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1112 -- 2005 전국 노동자대회 전야제

2005. 11. 12. 노동자대회 전야제 여의도 한강 고수부지(서강대교아래) #1 #2 #3 #4 #5 #6 #7 #8 일본에서 전야제에 참석하러 오신 분들입니다. #9 #10 #11 #12 #13 #14 #15 #16 어머니뻘 되시는 청소용역 노조원들입니다. #17 #18 #19 #20 전태일상을 받은 노조 분들입니다.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1022 -- 불꽃축제 그리고 TBS

2005. 10. 22. 여의도 63빌딩앞 불꽃축제 별로 내키지 않는 행사이지만 일때문에 이 자리에 있어야했고 있어야 한다면 불꽃이라도 찍어야지라는 생각에 셔터를 눌렀다. 행사가 끝나고 차막힌 여의도를 벗어나 원효대교를 건너 서울역방향으로 갔다. 한참 가다보니 라디오 TBS에서 교통안내가 나오는데 서울불꽃축제 때문에 온 도로가 정체라고 리포터가 말한다. 가만히 들어보니 교통정체는 객체고 주체는 불꽃축제다. 물론 불꽃축제때문에 차가 많이 밀린건 사실이지만 원효대교는 한산했다. 그런데 원효대교가 한산하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몇년전 청계천 복원공사를 위한 철거를 하던 시기였다. 일요일, 새벽어둠이 걷힐 무렵 청계천 7가를 지날때 그 곳 사거리에 폐타이어가 타며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걸 보았다. 마치 전쟁터같았다. 그것은 청계천 노점상들이, 포크레인을 동원해서 바리케이트를 철거하는 철거반들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그때도 TBS는 청계천로가 막힌다는 말은 했지만 청계천 복원에 대한 노점상의 저항이라는 말은 없었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TBS는 서울시의 한 기관이다. 다시말해 서울시장의 명령에 의해서 서울시정 홍보도 하고 뉴스도 내보낸다. TBS의 PD나 카메라맨들은 대부분 계약직이고 관리직만 서울시 공무원이다. 언론이 공기(公器)라는 말을 다시한번 곰곰히 생각해 본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1002 -- 지리산 빨치산 유적지 답사

2005. 10. 2. 지리산 빨치산 유적답사기행 이성근(통일광장)선생님과 함께.. 행사주체 : 민족통일애국청년회 역사기행모임 해토머리 빨치산(partisan) '파르티잔(partisan)'은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이며,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말이나, 현재는 유격대원·편의대원(便衣隊員)을 가리킨다. 따라서 에스파냐어에서 나온 게릴라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발음이 어색한건 소련식 발음을 그대로 우리가 사용한 것이라 그렇고, 그리고 빨치산하면 뉴앙스가 가지는 한국인 특유의 거부감으로 감히 발음하기도 눈치를 보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소설 태백산맥과 이태원작의 영화 남부군에서 빨치산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빨치산은 그들이 가진 순수한 이상과 신념을 가지고 힘겹게 일본과 미국에 대항했고 민족통일에 이바지했습니다. 비참한 최후만큼이나 역사적 소외를 받아오며 정권의 비인간적인 온갖 회유공작을 받다 돌아가신 분도 있고 굳굳하게 이겨내어 북으로 송환되신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송환되지 못하고 운명하시고나마 유해만이라도 이북으로 송환되신분도 있습니다. (2005.9.30. 비전향장기수 정순택선생 운명. 2005.10.2. 판문점통해 유해 북측인도... -서울신문 : 통일부 당국자는 “남북 간에 상대측 지역의 유가족에게 유해를 전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남북 관계의 화해와 인도적 문제 해결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고 밝혔다.) 기행을 떠나기전에 이성근 선생님과의 토론회 #1 #2 #3 이성근 선생님 약력 1931. 전북 순창 쌍치면 피노리 출생 1946. 전북 농업학교 입학, 5학년 재학중 625전쟁을 맞이함. 1950. 쌍치면에서 로동신문 선전사업 1951. 회문산에서 로령학원 수료 회문산에서 전북도당 보위병단 특공대 2소대 문화부소대장 덕유산에서 5.1병단 2소대 문화부소대장 지리산에서 남원군 유격대 정치지도원으로 복무 1952. 장안산에서 전투중 체포 광주에서 사형구형 1967. 대전에서 비전향장기수로 출소 1968. 결혼하여 남매를 둠. 1969. 전북 김제 후생의원에서 조수생활 1975. 후생의원원장(이봉기)과 전직 김제군수(채기묵)의 신원보증으로 사회안전법상 보호관찰처분 받음. 1985. 서울로 상경 구멍가게, 독서실, 공사장경비등으로 생활 1994. 김영삼정권당시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대회의 가입 2000. 통일광장에서 소식지 사업 #4 반선에서 뱀사골대피소로 오르는 길에서 심마니 능선에 있는 비트에서 일행을 앉혀놓고 설명하신다. #5 #6 #7 석실출판사.. 세~네개의 엄청나게 큰 바위가 서로 엇갈리어 포개져 공간이 만들어진 석실. 이곳에서 당시 전북판 로동신문을 발행 했다고 합니다. #8 석실앞에서 이성근선생님.. 광각렌즈(15mm)로 찍어서 뒤의 바위가 작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큰 바위. #9 “반선에서 8-900m의 거리, 개울가 옆이며 그곳에는 멍석 크기의 평평한 바위가 있고, 이 주변에 온돌 아지트가 있었다. 주변에 너덜강이 있으며 그곳에 <미싱과 무기와 실탄>을 비장하였다. 화개재나 반야봉, 만복대나 정령치 어느 곳도 적들이 들어 올 수 없는 곳이 뱀사골이다. 이 바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이 산내면 쪽이어서 아주 알맞은 장소이다. 최전방에 보초를 세웠고 그 후방에 보위대가 심마니 능선을 장악하고 있었다. - 이성근선생님 블로그 달궁의 (팔 하나 눈 하나 그리고 총 아홉 발) 에서...- 사진으로 보기에는 좁은 바위같지만 어른 20-30명은 올라서도 될 만큼 넓고 평평한 바위다. 물이 흐르는 계곡 #10 #11 #12 #13 #14 #15 #16 #17 #18 습한 날씨때문인지 나무 이끼에 무엇인지 모를 풀이 있다. #19 단심폭포 단심은 충성의 마음을 의미한다. 625때 빨치산들이 붙인 이름인데 김일성장군께 충성을 맹세한 폭포라 한다. 지금은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20 #21 수명이 길기로는 은행나무도 있지만 우리 겨레는 느티나무에 정을 더한 것 같다. 느티나무는 산에서 마을로 들어 와서 우리 겨레의 정서적 특성을 뚜렷이 하고 있다. 마을마다 그 중심에는 어김없이 느티나무가 있었으며 때로는 동구 밖이나 자주 넘나드는 영마루에도, 성황당 돌무지에도 심지여는 논밭에 서 있는 한 채의 정자 곁에도 느티나무가 포근한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느티나무라 하지 않고 정자나무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그 정자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이 깃든 당산나무라고도 하여 그 마을의 액운을 쫓고 평안을 기원하는 신앙의 나무이기도 하다.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 우리 겨레와 함께 수수천년 함께 해왔다. 나는 이 조국강산을 사랑한다. 노고단과 성삼제에서, 그리고 반야봉과 정령치 자락에서 흘러드는 물이 달궁에서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며 우렁우렁 바위가 굴러가는 듯 물보라로 골짜기를 채우기도 한다. 반세기 전만 하여도 심원계곡을 이룬 정령치나 노고단 쪽에는 다락 논밭이 등고선을 따라서 일구어져 있었다. 물론 두 세평 정도의 귀틀집도 있었으며 여기도 당산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지금 말하려는 <달궁 느티나무>도 심원계곡과 정령치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만나는 한 모서리에서 수령은 알 수 없으나 두 아름드리가 될 정도의 거대한 자태로 반세기 전이나 다름없이 서 있다. 나는 이곳을 <달궁 느티나무 터>라고 부르며 유격근거지로서 그 성격을 갖추는 유적과 사실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었고, 음식점이 들어섰고, 등산객들이 분비는 곳으로, 천양지판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달궁 느티나무 터>는 정령치에 오르는 서쪽도, 반야봉에 오르는 동쪽도, 노고단에 오르는 남쪽도 그리고 동북으로 나가는 산내면 마을 모두가 여기 달궁을 거치지 않고는 통할 수 없다. 유격전사들이 밤낮으로 오고 가는 행군의 요충지였다. 또한 여기는 유격대사령부를 보위하는 천에의 요지이다. 반야봉 한 자락에 50년대 남원군당부와 남원군 유격대지휘부가 있었으며, “뱀사골”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군사적 의의를 얻게 된 곳이다. 끝으로 여기는 바로 유격활동이 벌어진 곳이다. 지휘부와의 인적 물적 연계가 여러 형태로 이루어진 곳이며 대기시간, 휴식시간, 교양오락신간 등이 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이루어 졌던 사연 얽힌 유격의 현장이다. - 이성근선생님 블로그 달궁의 (달궁 느티나무) 에서... #22 느티나무 옆 공터. 지금은 넓은 주차장으로 변했지만 그때는 2-300명의 빨치산이 모여서 대기, 휴식, 교양오락의 장소 이기도 하였다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0828 -- 아버지를 위해 (동영상)

우리 아버지는 몸도 정정하신데 고향에 가시기를 꺼려하신다. 고향의 선산과 종가집을 장손이 사업을 한다며 사업자금으로 모두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버렸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신거나 다름없이 생각하시는 아버지는 이 모든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고 생각하시기 싫어하시며 고향을 찾지 않으신다. 하지만 누구보다 흙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는 누구보다 고향에 가고 싶어하신다. 부족하나마 아버지를 위해서 기록을 남겨본다. 2005.8.28. 작은 아버지와 사촌동생들과 벌초하는날 런닝타임 : 8분 6초 * 아버지께 보여드렸더니.. 왜 이리 짧냐고 하신다.. 다행이다. 그래도 보고는 싶으신거니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0911 -- 맥아더 동상 철거 및 주한미군 철수 결의대회

2005. 9. 11. 맥아더 동상 철거 및 주한미군 철수 결의대회 인천 자유공원(맥아더 동상 앞 비둘기광장) 주최 : 전국민중연대, 통일연대, 미군강점 60년 청산과 9.8 범국민대회 인천지역준비위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과격 보수주의자.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집회내내 호각을 불며 방해하는 반공아저씨. #29 #30 #31 #32 #33 #3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0829 -- 늦은 휴가

2005. 8. 27 - 8. 31 휴가 집안 문중에서 단체로 하는 벌초에 참석하려고 일부러 휴가도 늦게 잡았다. 휴가기간중에 잠시 여수에 들렀다. 전남 여수는 내가 한창 시절에 그곳에서 젊음을 보낸 군대 근무지이다. 10여년만에 처음 와본다. #1 2005. 8. 28. 밤 늦게 여수에 도착했다. 여수 오동도 방파제에서 바라본 여수항의 야경 #2 여수 시내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나오는데 육교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장애인을 위한 장치이다. 특이하네.. 지하철에 설치된건 많이 봤는데 육교에 엘리베리터가 있다니.. 차라리 건널목을 만드는게 돈이 적게 들지않을까....위험해 보이는데... #3 돌산대교의 야경.. 많이 본 야경이지만 그래도 여기온 기념으로 한방... #4 #5 돌산공원위에 우뚝선 돌산대교 준공 기념탑... 누구 말마따나...박정희가 생각난다.. 돌산도 끝에 있는 향일암의 주차장에 가서 차안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일찍 해돋이를 사진찍고자 했다. 근데 밤 1시쯤 잤는데 눈떠보니 9시다....으이구... 그나마 구름이 많아 제대로 된 해돋이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에 위안을 갖는다. #6 향일암을 오르다 보니 돌을 조각해서 기둥을 만들어 두었다. 양쪽에 두개 있었다. 상당히 큰 바위 한 덩어리를 깍아서 만들어 두었는데... (가운데 노란색 라이터) 이렇게 큰 조각을 해야 암자의 권위가 서는건지.... 향일암의 묘미는 향일암에 이르는 계단이다. 한사람이 겨우 다닐만한 공간에 길을 만들어 한층 운치를 돋군다. #7 #8 #9 #10 #11 #12 #13 #14 향일암에서 바라본 남해바다. 바로 아래보이는 주차장옆 돌출된 숲속에서 몇달동안 군생활을 했다. #15 기독교에 이어 불교에도 돈과 이름은 불가분인가?... 이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진다.. 권정생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지금 한국에 오신다면 십자가 대신 똥짐을 지실지도 모른다고... <우리들의 하나님/권정생/녹색평론사/96.12월 1쇄> #16 #17 대웅전뒤로 보이는 바위덩어리들이 마치 두부를 자른듯 장관을 이룬다. #18 #19 #20 #21 돌산은 갓김치가 특산물이다. 군시절에 태풍이 전라도 지역을 덮쳤을때 쓰러진 벼를 세우는 대민지원을 나온적이 있다. 그때 농민들이 참으로 주신 막걸리와 갓김치는 그 이후 먹은 어떤 술보다 달고 맛있는 안주였다. 혼자먹기엔 아까워 4만원어치(12Kg)나 갓김치를 샀다. #22 향일암 주차장옆 군부대. 예전 생각이 나서 아는 척을 했더니..이상한 눈으로 본다. 얼마전에 군부대 초병이 총을 뺏기는 사고가 나서 그런가... 그저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할 듯 싶네.. #23 무술목 해안. 돌산도는 재밌게 생긴 섬이다. 쉽게 말해 눈사람처럼 생긴 섬인데 눈사람의 목부근이 무술목이다. 이쪽 해안과 반대편 해안의 거리가 수십미터에 불과하다. #24 #25 여수 시내. 여수는 항구도시라 쉽게 배가 보인다. 서울에서는 보기힘든 배가.. #26 여수 오동도. #27 오동도로 가는 길에 여행온 듯 한 수녀님들. #28 신발이 특이하다. 수녀님 신발이 정해져있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낯설다. 하기야 더울땐 이런 신발이 최고입니다. 오동도안에서 #29 #30 #31 #32 #33 #34 #35 오동도에도 군초소가 있었고 여기서도 한 반년 근무했었다. 이곳이 들어가는 입구인데.... 민간인통제구역일텐데....통제한다는 표시가 없다. #36 #37 이럴수가.... [net]란 영화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혼란이 왔다. 여기 분명히 파출소만한 제법 큰 군초소가 있었는데... 어쩜 이렇게 흔적도 없이 치웠을까... 내 기억이 도둑맞은 기분이였다. #38 여기에는 화장실만한 발전실이 있었는데... 그게 고장이 나서 밤새 고치는 걸 도운적도 있었는데.. #39 겨우 찾은 흔적.. 바윗길을 좋게 하려고 시멘트를 발라뒀다. #40 저기 저 바위에서 기타치며 노래도 부르고 고기도 잡고 좀더 깊숙한 곳에서 기합도 받았었는데... #41 고래를 잡고 팔자 걸음으로 내려오던 계단... #42 오동도 등대에서 바라본 등대직원 기숙사 지붕.. #43 만성리해수욕장으로 가는 길목의 터널. 차가 한대겨우 지나갈 공간이지만 터널 중간중간에 주머니처럼 공터를 만들어 차가 서로 엇갈려 갈 수 있다. 하지만 이 터널은 한의 터널이다. 일제시대때 주민들을 동원해서 손으로 팠던 터널이고 여순사건때는 대한민국 군과 경찰은 반란군에 가담했다고 터널 뒤에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주민들을 집단총살했다고 한다. #44 #45 #46 #47 #48 만성리 해수욕장. 이곳에서 전투수영이란 야영훈련을 했다. 군에서 전투라는 단어는 영어의 관사같다. 전투축구...전투식량...전투부대... #49 만성리 해안의 검은모래. 예전엔 검은색 작은 콩만한 모래였는데... 이제는 좁쌀만하다.. #50 #51 해변에서 마을을 보며.. #52 여수여행을 마치고 다시 길을 떠나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