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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다. 나는 고층아파트에 살지만,
고층아파트는 12동 뿐, 나머지는 5층 이하의 나즈막한 아파트들이다.)
(여기도 우리 동네다. 옛날에는 고위직 가족들이나
외국인 기술자 가족들이 살았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문득 87년이 떠오른다. 포항에서 광양으로 이사온 지 2년 째, 난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없는 형편에 그래도 남들 다 하는 거라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해엔 인신매매단에 관한 흉흉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테레비에선 서울의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연일 데모하는 소식이 나왔고, 같이 테레비를 보던 엄만 "너 대학교 가서 데모질 하면 다리몽댕이 분질러버린다"라고 위협하곤 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외부 사람들(포스코 사원들은 주택단지 내에 살고 있었고, 그래서 단지 외의 사람들을 '우리'는 '외부 사람들'이라 불렀다.)이 데모를 하는 바람에 광양 장에 나갈 수 없었던 일이다.
원래 광양은 김양식으로 유명한 곳이었다.(김양식이 대한민국 최초로 시작된 곳으로 알고 있다.) 그 바다는 제철소가 들어설 곳으로 낙점됐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바다는 땅이 되었다.
그로 인해 강제이주를 당해 삶터를 잃어야만 했던 원주민들이 동네로 들어가는 길목 - 전남동부건설노조가 얼마 전에 막았던 - 을 막은 것이었다. 장날이라고 버스 타고 광양에 나갔다가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들고 씩씩대며 걸어들어온 엄마의 말에 따르면, 외부 사람들이 퇴비더미로 길을 막았고, 동네 사람들에게 그 퇴비를 던져대는 통에, 그거 피해서 걸어들어오느라 고생바가지를 썼다는 거다. 어디 나갈 때 포스코 마크가 찍힌 옷을 입고 나가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 회사에서 보상금은 아쉽지 않게 줬을텐데 왜 저 난리들인지 몰라.
그게 어디 단지 보상금만의 문제였으랴. (아쉽게 줬는지 아쉽지 않게 줬는지는 알 수 없다.) 어부였거나 농부였던 그들이 생소한 지역 혹은 생소한 직업군으로 내몰리며 겪었을 어려움과 고통을, 억만금이라도 '보상'할 수 있었을까.
우리 동네는 참 예쁘고 깨끗하고 조용하다. 어른들은 그래서 살기 좋다고들 한다. 학교 앞엔 오락실도, 떡볶이 장사도, 뽑기도, 만화가게도 없다. 그래서 애들 교육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하지만 코딱지만한 동네,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훤해서 별별 소문이 다 도는 동네, 아빠들은 똑같은 작업복, 애들은 똑같은 교복을 입지만 집전화번호부터 아빠들의 직위가 들어있고, 누구네 아빠는 차장, 누구네 아빠는 부장, 아빠 직책 따라 애들 씀씀이도 달라서 계급의 차이가 더 잔인하게 드러나던 동네. 아빠의 대학 나온 직속상관 딸과 한 반에 있어서, 죽어도 그 애는 이겨야만 했던 고졸 주임 어린 딸래미의 오기.
난 우리 동네를 죽도록 싫어했고, 지금도 싫어한다.
1년이면 두세 번도 찾아가지 않는 우리 동네,
잊고 살고 싶은데, 이렇게 또 내게 가슴 아프게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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