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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그리고 동감

지음님의 [인권을 석방하고, 국가를 구속하라!] 에 관련된 글.

 

"확실히 무언가 뒤바뀌었다. 누가 죄를 짓고 있는가? 누가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누구의 땅을 누가 빼앗으려 하고 있는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이며 누가 무법천지를 만들고 있는가? 누가 누구를 구속하고 있는가?"

 

들이 울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by 빼트

황새울에 들불을 놓다 by 안프로
평화의 땅 지키다 by 솟대

 

평택 주민 인터뷰

 

아이들 아빠를 풀어 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박래군 인권활동가의 아내 정종숙 님의 탄원서)

 

060329 : 적부심 결과 석방!

 



두 활동가의 얼굴에서 우리를 보아주세요.
- 박래군, 조백기 활동가의 재판에 앞서 판사님께 드립니다.


박기범(동화작가)

판사님,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린시절 누군가 장래희망이라는 것을 물으면 많은 동무들이 판사나 법관 같은 대답을 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 또한 그런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물론 자세히 알아서 하는 대답은 아니었지요. 한 나라의 판사로 살아가는 일, 그 자리에서 해야 하는 일들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에 대해서까지는 가늠하기조차 어린 때였으니 말입니다. 솔직히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어려움이나 고충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린시절 판사나 법관이 되고 싶다고 말하던 동무들이, 그 까닭을 물을 때 언제나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어서’, ‘옳지 못한 일을 가려내어 사람들이 다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라고 말하던 바람만큼은 또렷이 기억합니다.

판사님, 저는 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평범한 시민입니다. 하지만 법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거나 법을 잘 모른다는 것 때문에 제 삶이 크게 불편했던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세상 사람들이 상식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와 규범을 자의식으로 갖는 것만으로도 사는 일에는 무리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모든 사람들이 법을 자세히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로부터 더할 수 없이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을 일러 ‘법 없이 살아도 좋은 세상’, ‘법 없는 세상’이라 말해온 것도 아마 그와 같은 까닭이리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살면서 느꼈다면 못된 짓을 벌이는 자들이야 말로 ‘법’을 샅샅이 살피고, 법률 문구의 범위와 한계, 적용 범위들을 조밀하게 따져 준비하는 것 같다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법의 그물망을 피해 못된 짓을 하기 위해, 또는 법 조항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 그네들의 못된 짓을 법 조항 뒤에 숨어 합법적으로 하기 위해 말이지요. 아니, 그렇다고 하여 제가 법 자체의 존재 이유를 몽땅 무시하거나 법질서의 필요를 깡그리 뭉개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힘없고 약한 이들을 불의에서 지켜주는 일, 강자와 다수의 횡포 앞에서 소수자들과 약자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일, 그리고 온갖 억울함과 부당함 앞에서 저마다 개인의 삶과 목숨, 정신의 기본 권리를 지키는 일에 법은 꼭 해야 할 역할로 고맙고도 소중한 울타리가 되어야 하니 말입니다.

판사님, 살아오면서 법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 때문에 답답함이 목까지 치미는 일은 지금이 처음입니다. 제가 판사님께 드리는 글에 어떤 말을 쓸 수 있을 것인지. 저는 지금 엊그제 잡혀간 두 사람을 위한 탄원의 글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평택 미군기지확장을 위한 토지 강제수용 과정에서 그것에 맞서 시위를 벌이다 지난 3월 15일 연행, 18일 구속된 박래군, 조백기 두 활동가를 풀어주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 일, 용역 깡패들을 앞세워 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힘으로 일흔 넘은 노인의 척추를 부러뜨리고, 약한 여자들에게까지 무차별 폭력을 벌이고 있는 속에서 오히려 그 약한 이들과 함께 맨몸으로 선 활동가들은 잡아 가뒀습니다. 이미 판사님께서는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아 알고 계시겠지요. 전쟁 기지를 만들기 위해 주민들을 쫓아내는 일, 한 평생 땅을 일구어 곡식 거두는 일 밖에 모르는 농민들에게 땅을 빼앗는 일은 그 자체로 삶을 빼앗는 일입니다. 고향을 빼앗는 것으로 그이들의 마음을 빼앗고, 뿐 아니라 생명의 씨앗을 뿌리던 들에 살육의 전쟁 무기를 들이는 일로 이 땅의 평화마저 빼앗으려 하고 있습니다.     

판사님, 법에 대해 무지하다 할 제가 이번 일을 안타까워하던 중 우리 헌법에 ‘평화적 생존권’이라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사회의 모순과 아픔 앞에서 강자만을 대변하는 일이 너무도 잦아 저는 잘 모르는 말로 이 나라의 법을 원망하기도 많이 했습니다. 이 나라의 법은 권력과 돈과 힘과 무기를 가진 자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엉터리 법일 거라는 성급한 판단을 갖곤 했습니다. 법은 기댈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헌법에 ‘침략당하지도, 침략하지도 않으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평택의 285만평 들녘은 마땅히 보장되어야 하는 것 아닌지, 그 땅에 목숨을 붙이고 살아온 주민들의 삶은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 아닌지 하고 말입니다. 그것도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법의 보호 속에서, 법 집행을 담당하는 공권력의 보살핌 아래에서 말이지요.

판사님, 저는 두 활동가의 석방을 바라는 절박한 마음에 판사님 앞으로 띄울 편지를 쓰겠다 하면서도 법이라는 것, 법정이라는 말 자체에서부터 두렵고 주눅이 들어 한날 밤을 꼬박 아무 말도 쓰지 못한 채 지새웠습니다. 그러다가 이윽고 기억 속 어린 시절 판사가 되고 싶다 말하던 동무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어서 판사가 되고 싶다던, 옳고 그름을 가려내어 사람들이 다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고 싶어 판사가 되고 싶다던 어린 목소리들에서 용기를 내었습니다. 기억 속 제 어린 동무들이, 그리고 지금도 판사와 법관을 꿈꾸는 많은 어린이들이 막연한 채 말하는 그 말들 안에는 법의 존재 이유와 구실, 책임을 모두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사려 깊은 법철학, 그리고 세상에 대한 따스한 사랑의 실천을 법으로 하고 계신 판사님 앞에서 저의 말들은 어쩌면 어설프기 짝 없는 건방진 얘기에 지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판사님, 그럼에도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잘은 몰라도 법의 해석과 적용에는 어떤 입장, 관점으로 다가서는가에 따라 때로는 판이하게 갈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윤의 경제논리와 권력의 안보논리에 따른 잣대로 바라볼 때와 땅에 발을 붙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삶의 자리에서 바라보았을 때. 박래군, 조백기 두 활동가의 구속 사유는 ‘업무집행 방해’라 알고 있습니다. 답답하고 답답하여 뒤집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농사 준비를 하는 땅에 포크레인을 밀고 들어와 짓밟고 파헤치는 경찰과 용역 깡패들의 행패는 ‘업무집행 방해’가 아닌지, 아니 그것은 단순 ‘업무집행 방해’ 정도가 아닌 ‘삶을 방해하는’, 삶을 짓밟는 행위를 저지른 일이 분명합니다. 삶을 짓밟는 행위 앞에서 그 삶을 지키고자 하는 맨 몸의 몸부림이 ‘업무집행 방해’라면 저는 그 어떤 자리에서라도 그 ‘업무들’을 방해할 것입니다. 그것은 저 뿐 아니라 지금의 사태를 안타깝고 슬프게 지켜보는 수많은 이들의 마음이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박래군, 조백기 두 활동가를 잡아 가둔 것은 단순히 개인 두 사람을 구속한 것이 아니라 삶의 자!
리에서, ‘생존’과 ‘인권’, ‘평화’의 가치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모두 결박시킨 것에 다름 아닙니다. 삶을 빼앗기는 자리에서라면 업무집행 방해는 계속될 것입니다. 생존을 지키기 위한, 평화를 지키기 위한 ‘업무집행 방해’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인권활동가를 잡아 가두는 것으로는 이러한 ‘업무집행 방해’를 끝낼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박래군과 조백기가 생존과 인권, 평화를 지키기 위한 자리에서 계속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작 ‘업무집행 방해’를 막기 위해서라면 몇 사람을 붙잡아 가두어 공포와 불안을 느끼게 하는 정치 협박이 아니라 과연 ‘업무집행’의 내용과 과정이 온당한 것인지를 가려내는 살펴야 합니다. 

판사님, 제가 아는 박래군, 조백기 두 활동가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자리에서 그 삶과 생존, 인권과 평화를 지키는 일에 그 평생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절 독재정권 아래 반인권적 행태가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관행으로 횡행할 때에는 법이 손닿을 수 없는 자리로 몸을 던지며 아프고 고달픈 목숨들의 삶을 함께 지켜왔습니다. 그 말은 곧 ‘어길 수밖에 없는 법’에 대한 불법 행위를 저지른 거였겠지요. 박래군, 조백기 두 활동가는 법을 통한 어떠한 처벌 앞에서도 힘없고 약한 이들이 억눌리고 빼앗기는 일에 눈 감지 않고 함께 하려 해왔습니다. 판사님, 지난 구속영장실질 심사 때 박래군 활동가는 “우리가 실정법을 어긴 것은 사실이지만, 실정법으로 인권을 묶을 수는 없다. 부당한 것에 저항하다가 구속된다면 그것이 인권운동가의 운명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신념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저는 그 말 앞에서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만큼의 인권이라는 것이 어떻게 얻어진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판사님, 이 글을 쓰기 전 어젯밤 박래군 활동가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평소 제가 누나라 부르는 활동가의 아내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시간 활동가의 아내 역시 판사님께 드릴 탄원의 글을 쓰려는 중이라 했습니다. 저는 지금 진행되는 상황들에 대해 다시금 물었고, 시골에 계신 활동가의 늙은 부모님과 중학교 2학년과 5학년인 두 아이의 안부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아직 시골의 늙은 부모님께는 말씀을 못 드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의외로 아주 의연하다고 하더군요. 아이가 걱정할까 싶어 지난 실질 심사 때 선처라도 호소했으면 나왔을지 모르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둘러말하니 이제 열세 살 된 아이는 “아빠가 나쁜 일 해서 잡혀간 거 아닌데 왜 봐 달라고 해야 해요?” 하고 말하며 엄마에게도 판사님한테 쓰는 편지에 비굴하게 하지 말고 당당하게 쓰라고 얘기했다 합니다. 판사님, 편지를 시작하면서 아직 제 소개를 드리지 못했는데 저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을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사람답게 사는, 더불어 사는, 함께 나누며 사는, 힘없는 이들의 슬픔을 전하는 이야기를 쓰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만나다 보면 저 스스로가 동화작가라는 것이 한 없이 부끄러워질 때가 많습니다. 활동가의 딸아이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또한 그랬습니다. 박래군 활동가의 딸아이 뿐 아니라 조백기 활동가의 집에 있는, 그리고 날마다 경찰과 용역 깡패가 밀고 들어올까 떨고 있는 평택 대추리, 도두리의 너른 들을 뛰노는 아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판사님, 부탁드립니다. 박래군과 조백기 두 활동가에게 덧씌워진 ‘업무집행 방해’라는 죄목을 용역 깡패를 앞세운 정부 집행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삶을 송두리째 빼앗길 위기에 처한 평택의 농민들, 그리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생존과 인권, 평화의 자리에서 보아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가난하고 힘없이 살며 생존과 인권, 평화를 함께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지금 모두 그 자신이 박래군이고 조백기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법의 이름으로 가두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 땅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과 인권, 평화를 법의 이름으로 가두어 두지 말기를 바랍니다. 떨리고 울렁거리는 마음 누르며 써 내린 글, 그 마음은 제대로 담지 못한 채 중언부언 길고 지루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판사님, 저희들의 마음,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마음을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며칠 뒤 법정에 설 박래군과 조백기 두 사람의 얼굴에서 저희들의 얼굴을 보아주세요. 경찰과 용역 깡패의 행패와 같은 업무집행 앞에서 흙구덩이에 맨몸으로 드러눕는 그 땅의 허리 굽은 농민들을 보아주세요. 생명의 곡식을 품에 가득 가꾸어 가려는 꿈이 짓밟히고 있는 들의 울음을 보아주세요. 박래군과 조백기 두 사람의 얼굴은 바로 이러한 우리 모두의 얼굴입니다. (2006.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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