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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식행위

지난 6일 오산 미군기지 내 생물식별검사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살아있는 탄저균 배달 사건에 대한 현장조사가 사건 발생 70여 일이 지나서야 겨우 이루어진 것이다. 지난달 12일 합동실무단을 구성하고 나서도 20여 일 만의 일이다. 한미합동실무단은 이 자리에서 당시 탄저균을 배달받아서 이 탄저균 샘플을 다루고 폐기하기까지의 과정을 재연하는 미군 측의 상황설명을 들었다.

오산기지에서 이날 있었던 이 일련의 행사가 정말 ‘조사’이기는 한 것인지 부터 의문이다. 70일이 지난 시점에서 이미 현장은 말끔하게 정돈됐고, 방역을 끝낸 상태였다. 미군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애초에 탄저균 부스러기라도 나올 리가 없는데 새삼 뭘 조사하고 말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럼 남은 일은 그저 미군 측의 설명을 듣는 일 뿐이었다. 흡사 학생들 안보견학 같은 행사가 ‘조사’라는 이름표를 달고 주한미군 시설 내에서 진행됐다.

이날 오산 미군기지 방문의 주체는 ‘한미 합동실무단(Joint Working Group)’이다. 지난 달 23일 미 국방부의 자체조사 발표가 있었고, 그 다음날 주한미군의 성명 발표가 있었다. 주한미군은 성명을 통해 "본 합동실무단은 생물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양국 상호 간의 능력을 보장하면서, 상호 생물 방어 역량을 협력하기 위해 정례적으로 공동 회의를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한미군이 생각하는 합동실무단의 목적은 사고 원인 조사나 재발 방지 방안 논의 따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세균전 능력 향상’이라는 말이다. 합동실무단을 ‘주한미군 탄저균 배달 사고 진상 규명을 위한 한미 합동실무단’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사실은 민망한 일이다.

그 합동실무단이 학생들 안보견학 같은 조사를, 그것도 단 하루짜리로 진행했다. 그리고 그 5일 뒤인 11일쯤에 보고서를 내겠다고 한다. 사건발생 두 달이 다 돼서야 ‘실무단’이라는 것을 만들고, 겨우 하루짜리 조사 아닌 조사를 진행하고, 일주일도 안돼서 보고서를 낸다는 일정만 놓고 봐도 이 일련의 행사는 여론 무마를 위한 요식행위라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고위험성 세균의 반입에 관한 국제법과 국내법을 모두 위반한 이 사건의 조사는 그야말로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리려 하고 있다.

2000년 2월에는 미군에 의한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이 있었다. 2002년 6월에는 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도 홍대 앞에서는 매주 마다 한 번꼴로 폭력, 기물파괴, 성범죄 등 갖가지 미군범죄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 발생빈도도 증가하고 있다.

그동안 주한미군은 사실상의 치외법권을 누려왔다. 사건이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오히려 제대로 된 조사를 벌여 진상을 밝히고 처벌과 재발방지대책을 세우는 일은 더 어려웠다. 수 십 년 동안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곪아왔고, 이제는 탄저균 같은 치명적인 독성물질을 들여오면서도 국제법과 현지 국내법을 무시할 수도 있고, 당국에 통보조차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언제쯤 우리는 이 ‘치외법권’의 딱지를 떼고 주한미군을 제대로 조사하고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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