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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소설 한 편

 

  PC통신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글을 올리시는 분이 계십니다.  물론 PC통신부터 지금까지 저는 그분 글을 몰래 읽고만 옵니다. 참 재미있는 인연인데요.  지금도 이 분은 매일 글을 올리고 계시고 저는 그 글을 거의 매일 읽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거 같습니다.  20대 백수때 한 번 그 분이 계신다는 전주의 판자로 된 조그만 성당엘 찾아가 뵈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20대가 가장 악몽같았습니다.  지날수록 점점 안정되어가는 느낌이랄까요?   그렇게 20대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을때 우연히 PC통신 에듀넷이라는 곳에서 이 분 글을 읽게되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참 재미있었고 특히 이 분의 소설이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그 소설은 저랑은 좀 상관없는 신학생, 신부님 얘기였는데요.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게 느껴졌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도 잼있었던 그 느낌만은 아주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뽄드공장다닐때 통신으로 신학공부를 시작해서..  파업들어가기전 가톨릭통신교리신학원서 제적 당할때까지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었답니다.

 

  에듀넷이 개편되며 '열두제자'라는 동호회가 없어지며 그분의 글을 읽지 못했는데요.   우연히 '검색'을 통해 그 분의 블로그를 알게되어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고민많던 제 20대 후반과 30대 초중반은 이 분의 글 덕분에 슬기롭게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http://blog.daum.net/syj1212ad  

 

  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syj1212ad&categoryNo=7

 

 

  이 분의 소설을 영화로 맨든다면..  아마 바다를 바라보며 '바보' 하는 현경이의 독백?  같은데 혹은 주제곡?에 이런 노래들이 쓰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오래된 미래-04-오래도록.mp3 (5.46 MB) 다운받기]

 

 

 

 

[노래를 찾는 사람들(10년을 보내고) - 6. 바다여 바다여.mp3 (6.89 MB) 다운받기]

 

 

PC통신 시절 캡쳐해놓았던 그 분의 소설을 옮겨 이 밤에 다시 읽습니다.

 

 

 

 

 

  제  목 : <소설> 대숲 속의 바람소리.1.
 검색어 :
 올린이 : syj1212 (송영진  )   99/04/19 00:25   읽음 : 25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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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도 광주신학교 시절, 문예공모애 응모해서 대상을 받은
소설을 올립니다. 신학생 시절에 소설이라고는 처음 써본
미숙한 작품이지만, 신학교와 신학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대숲 속의 바람소리.1.

                                    송 영진

 잠결에 누군가가 나를 깨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잠에 취한 눈을 겨우
뜨고 올려다 보니, 웬 시커먼 그림자가 침대 모서리에 걸터 앉아서, 자고 있는
내 얼굴을 굽어 보고 있었다. 요한이었다.
 몽롱한 눈빛으로, 무슨 영문인지 몰라 그를 바라보자,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 나가고 싶어."
 나는 그냥 멍청하게 누은 채로,내 귀에 방금 들린 소리가 무슨 소리일까
하고 생각하며, 그의 얼굴만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창 밖에서 비치는 희미한 빛을 받아, 그의 얼굴이 마치 먹물이 번진 수묵화
의 인물 그림 같았다. 나는 잠이 덜 깨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뭐라고 그랬냐?"
 "나가고 싶어"
 "어디를?"
 "여기서 나가고 싶어. 이제 그만 나가고 싶다구."
 그는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장난감 인형같았다. 안녕하세요, 나가고 싶어요,
저는 나가고 싶은 인형이예요. 나가고 싶어요. 나가고 싶다구요. 나가요.
나가고 싶어요.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그와 마주 앉았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나가고 싶다는 거냐?"
 "응"
 만일,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이, 자고 있는 나를 깨워서 그런 말을 중얼거
다면, 나는 아마도 그래 잘가라 하며 건성으로 손이나 잡아 흔들어주고, 도로ㅗ
드러누워서 이불을 뒤집어 썼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나느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찾아 신고, 잠바를 걸쳤다.
 시계를 보니 열두시를 지나고 있었다. 기숙사는 깊은 어둠과 정적 속에
잠들어 있었다.
 "얘, 나가자.옥상으로 가자."
 옆침대에서 자고 있는 학생들을 깨우기 싫어서 그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
다. 침실이 4층에 있으므로 옥상은 우리들의 좋은 대화장소였다.
 옥상에 올라가니, 서늘한 밤공기가 상쾌하였고, 멀리 지평선에는 송정의 야경이
이 가물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학교 주변의 아파트 창문들에는 불빛들이 거의
꺼져 있었고, 옥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도시는 피곤에 지쳐 떨어진 것처럼
침묵 속에서 쉬고 있었다.
 우리는 옥상 난간에 나란히 기대어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도시의
밤하늘은 별로 어두워 보이지 않는 대신에 별빛이 희미했다.
 "나가다니,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냐?"
 "이제 그만 나가고 싶어."
 "그래, 나가고 싶다는 얘긴 벌써 몇번이나 들었어. 대체 왜 나가겠다는
거냐?"
 "그냥..."
 "무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 아무 이유도 없어. 그냥 나가고 싶은 것 뿐이야."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학생이 신학교를 나가는 이유에는 어떤 이유들
이 있다고 그랬드라? 혹시 잠이 안오니까 나한테 장난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건 그렇고,여태까지 잠도 안자고 뭐하고 있었냐?"
 "이것 저것 생각했어.그러다가 너한테 이야기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뭘?'\"
 "내가 여기서 나가고 싶어한다는 걸."
 "글쎄 그건 이제 충분히 알아들었다구. 그런데 그것 말고 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
 "없어. 나는 다만, 너한테 그 말만 하고 니 방에서 나오려고 했었어."
 그에게는 조금도 장난기가 없었다. 어찌 보면 백치같기도 한 표정으로 나직
나직 중얼거리고 있는 그가 혹시 몽유병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대숲 속의 바람소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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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기 침실로 비척비척 걸어들어가는 걸 보고 난 후에야,나도 방으로 돌아
와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방금 전의 일이 어쩐지 비현실적인 꿈 속의 일
같았다.이년째 잘 지내던 애가 갑자기 나가고 싶어하다니,더구나 이유도 없이
그냥 나가고 싶다니, 왜, 왜? 나는 잠이 달아나버려,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던
이불을 걷어내리고, 창문에 비치는 희부연한 빛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요한, 그는 그동안 정말 열심히 살았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바보같은 태도로
나,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다구. 나가고 싶단 말이야 하고 중얼거리는 자동
인형이 되어버렸다.
 침대에 누워, 그에 관해서 곰곰이 생각을 더듬다보니, 입학 후 얼마 안되어
나에게 들려준 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식구들이 어느날 가족회의 비슷하게 둘러 앉은 일이
있었지.평소에 자신들의 생활에만 바쁘던 가족들이 모이게 된 것은 내 진학문
제 때문이었어. 먼저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지.
 내 생각에는 법학과가 젤이야. 니 적성으로 보나, 우리나라의 현실 상황으로
보나, 법대 가는게 딱 좋을 것 같구나.
 아버님께서는 행여나 판사 아들을 두게 되지나 않을까 기대하시는 것 같았는데
,왜 우리나라의 현실 상황이 결부되어야 하는 건지는 잘 이해할 수 없었어.
 평소 건강이 안좋으시던 어머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난 니가 의사 선생님이 되어서 사회에 봉사하면 좋겠구나.
 명문대학을 나와 괜찮은 회사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형이 나섰어.
 아버님,학과 같은 건 중요한게 아니예요. 그저 출세하려면 서울대에 가야 한답
니다. 뭐 출세할 생각이 아니고 먹고 사는거나 해결하기를 바란다고 해도 지방
의 국립대학은 가야지요. 그 나머지는 다 쓸데 없는거예요.
 낮이고 밤이고 피아노만 두들겨대는 누나는, 내가 대학에를 가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어.
 니가 가고 싶은대로 가려무나. 니 인생 니가 사는거지 뭐.
 나는 참으로 고민스러웠어.왜냐하면 나는 우리 집안의 귀염둥이 막내아들이었기
기 때문이고, 그리고 난 신학교에 가고 싶었거든.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
 저, 신학교에 가고 싶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애가 갑자기 실성을 했나 하시는 듯한 표정이 되셨고, 어머님
께서는 마치 내가 몽달귀신이라도 되어버린 것처럼 질겁을 하셨지.
 형이 즉각 반대했어.
 너,괜히 사춘기적 감상으로 그러면 안된다.그게 얼마나 힘든 길인지나 아냐?
니가 정말로 어떤 신념이 없이 막연히 그러는 거라면 아예 집어치워라.
 나는 오랫동안 고민해야 했어.내가 가고 싶어한다는 사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그 어떤 신념이라니, 그게 뭘까. 과연 나한테 그런게 있는 걸까.
생각해보니 나한테는 그런게 없는 것 같았어. 결국 나는 신학교도 법학과도
의학과도 아닌 공과대학에 원서를 내고 말았어. 내 친구들이 거기에다 원서를
많이 냈기 때문이었지.
 집에서는 입학등록금을 챙겨주긴 했지만, 타박이 심했어.
 이 돌대가리 멍텅구리야.남들 공부할 때 소설만 읽더니 겨우 그런데로 가고
마는구나. 이 철없는 것아. 그러길래 3학년 때 만큼은 학생회고 쎌이고 다
그만두라고 그랬더니 듣지 않고선, 지가 무슨 열심한 신자라고 쫓아다니면서
쓸데없이 신학교 갈 생각만 하고, 결국 꼴 좋게 되었구나.
 나는 내 꼴이 어떻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성당은 왜 들먹거리는
는지 알 수 없었어. 다만 주일미사 빠지지 않고 열심히 나간 것 뿐이었는데
말이야."

 그는 후에, 더 이상 귀염둥이 막내 아들로서의 역할을 그만두고, 자기가
원하던 신학교에 끝내 들어오고 말았다. 그의 가족들은 하도 어이가 없었는지
쓰다 달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대숲 속의 바람소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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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튿날 아침, 그는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태연히 성당에 나타났다.
평소때와 다름없이 성무일도를 바쳤고,묵상을 했고,미사에 참례하였다.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좀 알쏭달쏭해졌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일까, 멀쩡하잖아 하며 속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첫째시간 수업에 그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둘째시간에는 원래
수업이 없었으므로,나는 그가 침실에 드러누워 있지나 않나 하고 그의 방에
찾아가 보았다.그의 침대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밖으로 나와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성모상 앞에서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벤치에 혼자 앉아 턱을 고이고, 운동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나는
그에게로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말없이 앉았다. 그가 나를 보더니
씩 웃었다.
 그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냐? 학교를 나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냐?"
 "아니,옛날 생각을 하고 있었어."
 "옛날?"
 "음, 군대에 있었을 때..."
 "군대에 있었을 때라니?"
 내가 호기심을 보이자,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수색대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24km 행군에 참가한 일이 있었지.
행군코스 중에는 철책 옆을 지나가는 길도 있었어.그래서 행군 도중에,
난 난생처음으로 철책을 구경하게 되었지. 그건 충격적인 경험이었어.
그곳의 풍경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이,세 겹의 철조망이 아득하게 뻗어
있다는 것만 빼고는,서부영화의 한 장면같은 대초원의 평화로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었어.
 하늘도,산도,들도,우거진 갈대밭도,푸른 골짜기도,모든게 너무나 비옥하고
평화롭게 보였어.똑같게만 보이는 남쪽의 하늘과 북쪽의 하늘,그리고,다를
것 하나 없는 이쪽 땅과 저쪽 땅, 그 평화스러운 들판 가운데를 무심한
철조망이 지나가고 있었지.
 그러나,다음 순간, 나는 그 평화스러움 속에 교묘히 감추어진 전쟁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어.감쪽같이 위장된 초소와 진지들,그리고 거기에
설치되어 있을 야포와 중기관총들,비옥하게만 보이는 들판에 가득 깔려
있을 지뢰들,크레모아들.나는 그런 전쟁의 냄새를 맡았지. 그건 슬픔이었어.
갑자기 인생무상을 생각하게 되었다면 좀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될까.
 바로 거기에,남북을 갈라놓고 있는 거대한,그러나 보이지는 않는 벽이
있었어.하늘을 나는 새들마저,그리고 산기슭을 뛰노는 노루들마저 감히
넘나들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살기등등하고 원한이 서린 투명한 벽이 하늘
끝까지 높이 서 있었어.그건 국토를 갈라놓고,민족을 갈라놓고,가족들을
갈라놓은 벽이겠지만,그것은 또한, 나 자신에게도 하나의 벽이 되어
다가왔어.
 하느님을 피해 달아나다가 세상 끝에까지 가서 막혀버린 기분이었지.
그래,그것은 이 세상의 끝이었어.철책 너머에는 또 다른 세상이란 없었어.
그냥 거기가 지구의 끝이었어."
 "하느님을 피해 달아났다는 게 무슨 말이냐?"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처음에 신학교에 가려다가 주저앉아 버린 뒤에,일반대학에 엉거주춤
다니면서,그래도 신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과,그냥 주저앉아 있고 싶은
마음사이에서 오락가락했었어.하느님은 날 자꾸 부르시는 것 같은데,
그런데 난 요나처럼 달아나고 싶었지.그러다가 마치 도망가는 심정으로
입대했었는데,철책을 보는 순간,더 이상 달아나는게 불가능할 거라는 걸
느꼈어.거대한 벽이 날 가로막은 거지.그래서 난,하느님을 향해서 돌아섰어.
말하자면,나는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었던 손오공이었던 셈이지."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런데,넌 다시 달아나려 하는구나."
 그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성모상을 바라보았다.우리 곁에 앉아서,우리의
이야기를 다 들으셨을 성모님은 아기 예수를 안고 빙긋이 미소짓는 표정
이었다.마치 석가모니의 미소처럼.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대숲 속의 바람소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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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그는 아예 강의실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저 성당의 감실 앞에
서 무릎을 꿇고 있거나,산책로를 거닐거나 할 뿐이었다.아직 아무도,그가 방
황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중간고사 준비하느라,각자
자기 공부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야간 자습시간에,슬그머니 그의 등 뒤로 다가가 어깨너머로 훔쳐보니,편지를
쓰고 있었다.그는 취침시간이 될 때까지 그렇게 계속 편지만 쓰고 있었다.
 취침시간에 우리는 다시 옥상에 올라갔다.어제와는 달리,이젠 나가고 싶은
이유를 찾아냈을까.나는 속으로 뭔가를 기대하며,그와 나란히 옥상 벤치에
앉았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무슨 편지를 그렇게 오래 썼냐?"
 "여자애한테 보내는 거였어."
 "누군데?"
 "우리 성당 앤데, 그앤 거의 매주마다 나한테 편지를 보낸단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너,혹시 그애 때문에 신학교를 나가려는 건 아니냐?"
 그가 허허허 하고 웃었다.
 "천만에.난 여자에겐 관심없어."
 "그래도 그런 사이라면..."
 "편지를 줄곧 보내는건 그쪽이지 내가 아냐.그앤 나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어."
 "물론 너야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그게 어디 일방적으로 되는 일이냐?"
 그는 마음대로 생각하려무나 하는 듯이 씩 웃었다.
 "도대체,니가 나가고 싶어하게 된 이유가 뭐냐? 여자? 공부? 건강? 이도 저도
아니면,돈에 쪼들리냐? 아니면 신학생 중에 누가 보기 싫어진거냐? 아니면
학교 밖에 뭔가 근사한 일이라도 생겼냐? 대체 왜 나가고 싶다는거냐?"
 그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불쑥 대꾸했다.
 "겨우 그 정도 뿐이냐? 뭐 또 다른 건 없냐?"
 "모르겠다.내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건 그런 정도 뿐이다."
 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어느 경우에다 갖다 붙여도 잘 안맞는 것 같다.나도,내가 나가고 싶어하는
이유를 누군가가 설명해주면 참 좋겠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일을 누가 설명해주냐?"
 "혹시 또 모르지.본인은 모르는 이유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제대로 딱 짚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우리는 밤하늘의 잔별들을 보면서 침묵에 잠겼다. 나는 그만 들어가서 자고 싶었다
싶었다.도대체 뭐에 대해서 고민하는지도 모르는 판이니,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대숲 속의 바람소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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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를 빛고을이라고도 부른다.밤에 신학교 옥상에서 도시를 내려다 보면,
빛고을의 현란한 야경이 속세의 달콤한 유혹이 되어 다가왔다.붉고,푸르고,
노란,네온싸인과 가로등의 열,그리고 빌딩창문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들,
차량의 헤드라이트와 고리의 등불이 뱀의 혓바닥처럼 매끄럽게 흐르면서,
밤에 외출할 수 없는 신학생들을 유혹하는 것이었다.
 간간히 눈에 뜨이는 교회의 붉은 네온 십자가들도 도시의 그림자를 밟고
서서,어두운 밤하늘에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도시의 야경 속에 섞여있는
네온 십자가는 어쩐지 별로 성스럽게 보이지가 않는다. 그것은 충장로를
지나며 보았던 쇼윈도우 안쪽의 아가씨들 같기도 했다. 어서 오세요.바겐
세일 기간이예요.저희 백화점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구경만 하시고 가셔도 좋아요.오세요.이리 오세요.가지 마세요.
감사합니다.또 오세요.아저씨,이리 오세요.놀다 가세요.쉬었다 가세요.
 우리는 한동안 말을 잊고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가 둘 사이의 정적을 먼저 깨뜨렸다.
 "도시의 야경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무질서 때문인 것 같아."
 "무질서라..."
 "제멋대로,뒤죽박죽 섞여 있지만,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현란한거야."
 "그래도,여기엔 어떤 질서와 균형,그런게 있어."
 "난,창조 이전의 혼돈을 말한 건 아니었어."
 "나도 알아"
 "나,대학 다니던 때의 일이 생각난다.당시에 난 괴짜라고 불렸지.괴짜,
이단자,배신자,친구들이 날 그렇게 부르던 때가 있었어.왜냐구? 난 그들의
획일주의에 반기를 들었었기 때문이야.
 대학생이라면 한달에 한번은 미팅해야 사람대우를 받는다든지,맥주 정도는
맹물처럼 마실 줄 알아야 하고,당구도 배워야 하고,디스코도 신나게 출 수
있어야 하고,분위기 좋은 다방 몇군데쯤은 단골로 정해두고 다녀야 하는 것
정도는 사소한 것에 속했어.날씨 좋은 봄날,수업받는데 찬성하면 이단자였고,
남들 데모하러 나가는데,혼자 강의실에 남아있으면 배신자였어.
 난 거기에 반항했어.그런 무언의 압력은,그들이 그렇게나 반대하는 전체주의
또는 획일주의와 별로 다를 바 없는 또하나의 전체주의였어.언젠가 존경하는 인물을
인물을 조사할 때,당당하게 박정희의 이름을 써넣은 것도 어쩌면 일종의
반항심이었을거야.고등학교 졸업하면서,난 그 사람이 더이상 하늘이 내려준
영웅이 아님을 알게 되었지만,또 다른 획일을 거부하고 싶었던 거야.
 뭐거 뭔지 모르는 신입생일지라도,의식화 된 척 흉내를 냈고,누군가가 대통령을
을 독재자라고 욕할 때 곁에서 맞장구 치지 않으면,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된
스파이로 의심받기 딱 알맞았지.하지만 난 그렇게 했어.
 남들이 모두 데모하러 나갔을 때 난 혼자 강의실에 남아 있었지.강의하러 들어오시
들어오신 교수님도 아마 속으로 내 욕을 하셨겠지만,내 소신은 분명했어.
강의가 끝난 후에라도,데모할 시간은 많이 있다는 거였지.
 그런 내 행동들,즉,전체 대학생들이 하는 걸 하지 않는 내 행동들은 정말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지.친구들은 처음에는 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욕하곤 했었지만,결국에는 괴짜대우를 해주는 것으로 그치더군."
 그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으며,나는 도시의 불빛들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거기에는 길게 늘어선 아르곤 가로등의 행렬이 있었고,도로변을 따라 줄줄이
서있는 건물들의 네온사인이 있었고,제 갈길로만 달리는 차량들이 있었다.
그것은 결코 창조 이전의 혼돈이 아니라,제각각 특유의 원칙대로 질서를
지키고 있는 다양성이었다.
 그에게 한 가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넌 지금,신학교에도 그런 획일주의가 있더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뭐,꼭 그런 건 아니야."
 그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대숲 속의 바람소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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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고사가 임박해지자,학급의 분위기가 차츰 경직되어 가고 긴장감을 띠기
시작했다.모두의 눈빛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평소에는 성덕
이 깊어 보이는 학생들마저 시험이 다가오니 이기주의자의 전형적인 표본으
로 변하고 있었다.
 신학교에서의 시험,그것은 에집트를 탈출하려는 이스라엘 백성의 앞에 놓인
갈대바다였고,성금요일 수난이었고,베를린 장벽이었고,비무장지대를 흐르는
한탄강이었다.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사랑해 주지 않으면 안될 우리 자신의
삶이었다.
 아무리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인류를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신학생들일지라도,답안지를 메꾸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니 시험기간 중에는 아무도 소등시간을 준수하지 않았다.다들 조그만
전기 스탠드를 머리 맡에 켜두고서 밤늦도록 침대에 엎드려 시험공부를 하
였다.야간 대침묵 규칙은 아예 없는 거나 같았다.
 시험공부에 바빠지기 시작하면서,나도 그에 관해 신경쓸 겨를이 없게 되었
다.
 그는 다른 사람과 다름없이 일과시간표에 따라,잠자리에서 일어났고,전례에
참석했고,밥을 먹었으므로,나는 그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
다. 그러나 그가 수업을 제대로 받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형이상학과 근대철학사 시험 전날 밤,옆책상의 경훈이 나지막이 말을 걸어
왔다.
 "요한 형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요?"
 요한은 자습실 구석 그의 자리에서 뭔가를 읽고 있었다.
 "요한이 왜?"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지 요새 시험공부를 통 하지 않고 있어요."
 경훈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뭐,지 일은 지가 알아서 하겠지."
 나는 건성으로 대꾸하였다.
 신학교의 시험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나처럼 일반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진학한 경훈이나 시험공부가 힘들기는 마찬가지
였다.특히나 철학과목은 더욱 그러했다.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이름을

가진 서양의 철학자들이 무슨 말들을 지껄였는지 암기하는 것은 참으로
따분한 일이었다.우리는 우리나라의 원효나 퇴계에 대해서 공부하는게 더
즐거울거라는 생각도 해 보지만,커리큘럼에는 동양철학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요한은 철학과는 상관이 없는 공대 출신이면서도,철학과목 시험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요약한 것을 복사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주기까지 하였다. 그런 그가,이번에는 시험이 있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이번에도,그에게서 뭔가를 기대했던
경훈이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시험기간이라 자습실의 소등시간은 열두시까지로 연장되어 있었다.고3 수
험생들의 입시지옥과도 같은 열기가 자습실에 가득하였다.그러나 요한은
소설책이라도 읽고 있는지 유유자적한 모습이었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대숲 속의 바람소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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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험을 치르고 나서 강의실 밖으로 나오자,눈부신 햇살이 피곤하고 졸린 몸
위로 가득히 부서져 내려왔다.산책로에 들어서니,숲의 향기가 훈훈하게 코
끝을 스쳤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 돌아보니 요한이 따라오고 있었다. 전혀 시험공부
를 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도 태연히 앉아서 답안지를 메꾸고 있던 좀전의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말을 건넸다.
 "시험은 잘 보았냐?"
 "뭐 그저 그렇지."
 "혹시 백지 답안지 낸 건 아니고?"
 "웃기지 마라.답을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백지로 내냐?"
 "넌 시험공부도 안했잖아."
 "시험공부야 안했지만,수업시간에 들었던 것을 다 기억하고 있었지.학점에
신경쓰지 않고 무심한 태도로 시험에 임하니까 오히려 시험보기가 더 쉽더
라."
 문득,시험기간만 되면 신학교에서 나가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한 둘씩 나타
나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너,혹시 시험이 지겨워서 나가려는 건 아니냐?"
 "글쎄...시험이 지겹긴 하지.기도생활보다는 공부에 더 매달리는 신학생들을
보는 것도 짜증스럽고,학점에 연연하는 걸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어.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나가고 싶은 건 아니야."
 우리는 나란히 산책로를 따라 묵묵히 걸었다.
 이십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는 산책로는,우리들에게는 세계일주 여행 코스와
같았다. 사하라 사막같은 메마른 황토흙길과,대초원의 푸른 잔디밭길이 있었고,
아프리카의 밀림같은 숲 속을 지나는 작은 오솔길과,한국의 전형적인 농촌 풍경
속의 밭둑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고,주택가 옆을 지나는 고속도로처럼 잘
포장된 길도 있었고,모스크바를 연상케 하는 보안대 옆을 지나치는 길도 있었다.
보안대와 신학교 사이에는 철조망과,가시가 많은 탱자나무 울타리가 가로막고
있었다. 그 구간을 지나면 밤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우리는 숲으로 들어가 페인트 칠이 얼룩얼룩 벗겨져가는 벤치에 앉았다.
울타리 너머로 보안대 건물과 그들의 테니스장이 내려다 보였다.
 신학교에서는 바깥 세상이 모두 내려다 보인다.신학교가 워낙 고지대에 위치
하고 있어서,우리는 매일 속세를 내려다 보며 산다.오직 우러러 보는 건
하늘 뿐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내가,다시 신학대학에 가겠다니까 식구들이나 친구들은
날 미친 놈 대하듯 했었더랬는데... 이제 신학교에서 나가면,그 사람들은 날 제저
제정신으로 돌아온 사람으로 생각할까,아니면 곱배기로 미쳤다고 생각할까?"
 "글쎄...아마 곱배기로 미쳤다고 생각들 하겠지."
 "내 생각에도 그래.내가 신학교에 가겠다고 했을 때,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서라면 꼭 신부나 수녀가 될 필요는 없는 거란다.
평신도의 성소도 매우 중요하단다.또,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지.신학교 안에
만 하느님이 계신건 아니야.니가 지금 있는 그곳에서 하느님을 찾아라.그런데
사실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아마,이 미친 놈아,새삼스럽게 신학교는 무슨
신학교냐.뭐 그런 정도의 말이었겠지."
 그가 갑자기 쓴 웃음을 지었다.
 "지난 여름 방학 때 본당신자들이 학사님,학사님 하며 대우해주는 바람에 무척
당황했어.난,그때까지도 스스로를 미친 놈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다 늙어서 뒤늦게야 신학교에 입학한 미친 놈.그런데 나에게 ~님자 경칭을 ?
는 것이었어.정말 쑥스러웠지.뭔가 잘못된 것 같기도 했어.
 이 세상엔,학사님,학사님,또는 신부님,신부님 하고 떠받드는 사람들을 주변에
거느리지 않고서도,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거룩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
그런데 속에 든건 쥐뿔도 없으면서 신자들로부터 학사님 대우를 깍듯이 받는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학생들이 있단 말야.그들은 밖에서는 거룩한 체 하며
살다가,학교에 돌아오면 적나라한 본색을 드러내지.이기적이고,시기심 많고,
탐욕스러운..."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언젠가 라디오에서 '돈 까밀로와 뻬뽀네'를 선전
하던 광고 문구가 생각났다.신부님,신부님,우리 신부님.신부님은 어쩜 그렇게
힘도 세시고,권투도 잘하시고,총도 잘쏘시고,노래도 잘 부르시고,달리기도 잘
하시고,싸움도 잘하시고,욕설도 잘하시고,거짓말도 잘하시나요.신부님,우리
신부님.죠반니노 과레스끼의 배꼽잡는 명작 소설.가격은 삼천오백원.지금 서점
으로 가십시오.
 나는 그가 제2의 종교개혁을 원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다만, 자기가
왜 신학교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지, 그 이유를 스스로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겠지.그러다보니 이것 저것 생각이 떠오르고,떠오르는 생각을 뒤적거리다
보면 평소에 하지 않던 말도 하게 되는 거겠지.나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대숲 속의 바람소리.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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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아침기도 시간에 요한은 성당에 나타나지 않았다.한번도 전례시간에
늦거나 빠진 적이 없었던 그였다. 성무일도의 찬미가가 끝나고,시편낭송이 시
작되어도 그의 자리가 비어있는채로 있자,나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성무일도가 끝나고 묵상시간이 다 지나가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미사시간
에도 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결국 그는 신학교를 자퇴하기로 결심한 것일까.
그러나,아침 식사 시간에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식당에 들어서는 그의 모습
을 보고,나는 그가 그저 늦잠잔 것 뿐이겠거니 하고 생각하였다.식사를 마치고
나서 그는 아무하고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침실로 곧장 들어가버렸다.그의 방
을 지나치면서 들여다보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그는 수업도 빠졌고,
저녁기도도 하지 않았다.
 그의 하루 일과는 오로지 먹고 자는 것 뿐이었다.아무에게도 말 한 마디 건네
지 않았고,아무도 그에게 왜 그러느냐고 묻지도 못했다.나도 그저 그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다만 끼니를 걸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행일 뿐이었다.식사시
간이 되면 말없이 식당에 와서 밥만 먹고 다시 침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민하는 신학생들의 발작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나,지금부터 고민할
테니까,너희들,나한테 말도 걸지 마라.세상만사가 다 귀찮다.수업이고 전례고
뭐고 나도 모르겠다.고민이 없어질 때까지 잠이나 잘테니까 괜히 간섭하지 말고
내버려둬라.아마 그런 태도일 것이다.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냥 내버려두는 법
은 없다.누군가가 가서 이렇게 말한다.너 어디 아프냐? 아픈게 아니라고? 그럼
기도시간에 왜 안들어가냐? 야,아무리 니가 고민 중이라도 신학생으로서 할 건
해야지 안그러냐? 자,자,일어나라.성당에 가자.너 이러면서 무슨 염치로 밥은
먹냐?
 요한에게도 누군가 가서 그런 말들을 했을 것이다.만일 그가 식사마저 하지
않으면,또 누군가 나서서 그의 침실로 밥을 날라다 주기까지 하겠지만,고맙게도
그는 그러지는 않았다.고민하는 것은 영혼의 문제이지 육체의 문제는 아니므로
먹을 건 다 먹겠다는 것 같았다.
 그로 인하여 학급의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마치,이제부터 신나는 서부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극장 관객들의 분위기 같기도 했고,뭔가 알 수 없는 일이
생기려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어린애들 같은 분위기 같기도 했다.
 대의원인 현수가 나를 자습실에서 가만히 불러내더니 물었다.대체 요한이 왜
저러냐? 나는 그가 지금 신학교를 그만둘까 말까 고민 중인 것 같다고 대답했
다.규칙대로 사는 걸 좋아하고,자기 자신 규칙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는 현수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전례고 수업이고 다 빠지면서 지 멋대로 산다는게 말이
되는 거냐고 분개하듯 말했다.그러면서,반 전체 분위기를 생각해서라도 그러지
못하도록 이야기 좀 잘해 보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요한은 벌써 며칠째 그런 식으로 살고 있었다.
 경훈이도 요한에 대해서 걱정스럽다는 듯이 내게 말을 건네왔다.
 "대체,요한 형이 왜 그러는 거예요?"
 "신학교에서 나가고 싶대."
 "그건 우리도 알고 있어요.하지만 다른 사람들 생각은 조금도 해주지 않으니
너무하는 것 같군요."
 "다른 사람들 생각이라니?"
 "그렇잖아도 성소가 흔들리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한 형이 그렇게 공공연
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면,다른 애들도 덩달아서 신학교에서 나가려고 할
거예요.요즘,괜히 나가고 싶어하는 애들이 늘어가는 것 같다구요."
 "그랬었나? 하지만,내 생각으로는 요한이 신학교를 그만 두는 것 하고,자기네들
들이 신학교를 그만두는 것하고 연관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안그래?"
 "논리적으로는 그렇죠.그래도 전 요한 형을 한 대 갈기고 싶어요."
 요한보다 훨씬 체구가 작은 경훈이 과연 그를 한 대 갈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이 들긴 했지만,심각한 표정의 경훈 앞에서 감히 웃을 수는 없었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대숲 속의 바람소리.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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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이 그렇게 변해 버린지 나흘째가 되던 날 밤에,나는 잠자기 전에 늘 하던
대로 성당에 가서 감실 앞에 무릎을 꿇었다.어둠에 잠긴 넓은 성당에 두세명의
신학생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은채 요한을 생각하였다.
 '요한,니가 너만의 세계로 더욱 깊이 들어갈수록,학급의 분위기도 더욱 살기등
등해져가고 있다. 너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피곤해진다는 것이다.대체 니가 왜
그러고 있는지,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다는 것
이다.요한,그러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해라.'
 한참을 그렇게 무릎꿇고 있었지만,나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없었다.머
릿속이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처럼 뒤엉켜 뒤죽박죽이 된 느낌이었다.나는 먼 섬
에서 비쳐오는 등대불빛같은 감실등을 조용히 응시하였다. 그 붉은 빛은 조금의
깜박임도 없이 바로 그 자신이 명상에 잠겨 있는듯이 어둠과 정적 속에서 고요히
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대숲 속의 바람소리.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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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을 나와 침실로 가면서 만남의 방을 지나치는데 방 안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들여다보니 대여섯명의 학생들이 요한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거기
에는 현수와 경훈도 있었다.현수가 나를 보더니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였다.그
들은 마치 노련한 수사관들인 양,요한을 둘러싸고,그가 왜 신학교를 떠나고 싶
어하는지 그 이유를 캐내기 위해 유도심문을 하는 중이었고,결국에는 떠나지
말도록 설득할 작정인 것 같았다.
 그들 사이에 끼어 앉은 나는,어쩌면 요한이 신학교를 떠나고 싶어하게 된 진
짜 이유를 말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기 시작했다.동료들의 이 정성을 안
다면,넌 그 이유를 억지로 지어내서라도 말하라. 너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면
면,그것을 해부하고 분석하고 추리하고 종합해서 해결책들을 연구하고,너에게
다시 제시할 것이다.적어도 여기 모인 사람들은 너를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
었다는 만족감 정도는 얻게 될 것이다.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그들의 이야기
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이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들은 장황하고 지루했다.제각기 신학교에 오게
된 동기들하며,신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 겪은 어려움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요한은 진지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자신의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이미 소등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우리는 작은 촛불 하나를 탁자에 세워놓고
있었다. 그 희미한 불빛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우리들의 모습은 마치 영화에서
본 강신술 모임같이 보였다. 자,죽음의 세계를 외로이 떠도는 영혼이시여,우
리가 청하노니,우리에게로 내려오시라,내려오시라.여기 당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를 들으시라.삶과 죽음의 근본은 결국 하나이며 같은 것.당신과 접하기를 원하
며 청하노니,당신의 지혜와 능력으로써 우리에게로 내려오시라,내려오시라.
당신의 신비스러운 죽음의 베일을 이제는 벗으시라.오,이승과 저승 사이를 방
황하는 영혼이시여.
 나는 차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요한의 대답은 여전히,그냥 나가고 싶을 뿐
이며 자기 자신도 왜 나가고 싶어졌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었다.나는
마침내 신경질 부리듯 한 마디 내뱉고 말았다.
 "그렇게 나가고 싶으면 나가버리지 뭘 망서리고 있냐? 나갈테면 빨리 나가버
려.괜히 비실거리지 말고."
 요한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마치 나를 잡아
먹을듯이 대드는 것이었다.어떻게 그런 몰인정한 말을 할 수 있느냐,무슨
문제가 있으면 서로 도와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그래서 같이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나갈테면 빨리 나가라니,그게 어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할 소리냐
너는 형제애도 모르냐.등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내 가슴 속에서 악마적인 충동이 일었다.뭔가 대꾸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다들 웃기지 마라.공동체 운운하는데,너희들은 공동체에 대해서 말할 자격도
없다.그동안 너희들은 누가 성체조배를 오래하면,혼자만 거룩한체 한다고 빈정
거리고,누가 공부 좀 열심히 하면,신학교 생활에서 공부가 전부는 아니라며
방해했었다.또 너희들이 외출할 때,혼자 자습실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으면
괜히 부담감만 준다며 미워했었지.그게 형제애고,그게 공동체냐? 너희들이
지금,요한을 붙들고 이야기하는 까닭도,얘가 전례도 빠지고 수업도 빠지고
그러니까 그게 눈에 거슬려서 그러는 것 아니냐? 나갈 때 나가더라도 규칙이
나 잘 지키다가 나가라는 거냐? 규칙만 잘 지키고,너희들 눈에 거슬리지만
않으면 속으로 아파하든,슬퍼하든 너희들은 관심도 두지 않는다.그동안 요한이
고민하고 방황하는 동안,너희들은 시험공부에 바빠서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제 우리 반이 단체로 생활면에서 지적을 받을 것 같으니까 괜히
불안해진 거 아니냐? 누가 나가든지,자기만 살아 남으면 그만이라는 너희들
속셈이 빤히 보인다.너희들은 지금,신학교를 떠나지 말라고 요한을 설득하고
있지만,실상은 떠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다들 떠나도 자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쾌감을 누리려는 것이다.다들 가면을 벗어라.괜히 걱정해 주는
척 하지 말아라,이 위선자들아."
 성질이 급한 현수가 왜 나에게 주먹을 한 방 먹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다들 무겁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만남의 방에서 뛰쳐 나온 나는,
문 앞에 서서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서 잠을 자야 할지, 아니면 다시 성당으로
가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지,잠시 망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대숲 속의 바람소리.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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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날은 외출이 가능한 수요일이었다.학생들은,모처럼 날씨가 좋구나 하며
며 거의 다 외출해버렸다.요한도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신학교에서의 외출날 오후는 시간이 멎어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학생들이 돌
아올 때까지,모든 사물들은 나른한 졸음에 잠겨 있다가,학생들이 모두 돌아와
저녁기도를 시작하면 돌연 활기를 띠고 움직임을 시작한다.
 요한은 저녁기도가 다 끝나가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저녁식사 시간에도,끝기
도 시간에도,그리고 잠잘 때가 되어도 그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술래가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자 이제부터
찾는다 하고 눈을 딱 뜨고 찾으러 다녔는데,아이들은 어딘가에 숨어 있는게
아니라,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가버린 것이고,그것도 모르는 술래만 애들아
어디에 숨어있니,이제 그만 나와라,내가 계속 술래 해줄테니까 다들 그만 나와
하다가 앙 울음을 터뜨려 버리는,바로 그 술래의 심정이 요한을 기다리는 나의
심정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날 밤에도, 그 다음날에도 돌아오지 않았다.대체 어디 간거냐?요한을
본 사람은 없어? 혹시 무슨 말 들은거는 없냐? 그렇게 묻고 다니던 구역장 부제
제들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무단외박,그것으로 인해 그가 퇴학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나는 제발 전화연락이라도 해주기를 기다렸다.
 또 하루,아무 연락도 없이 그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는 구역장 부제
들이나 학생들이나 모두 그에 대해서 포기해버리는 것 같았다.그러나 나는 삼
일만에 돌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것은 예언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있었던 기간과,예수님이 무덤 속에 계시던 기간을 연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삼일이 지나고 사일째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고,아무런 연락도 해오지 않았다.아예 신학교를 떠나버린 것이라면 전화
라도 걸어서,응,나야.말없이 떠나서 미안한데,내 짐 좀 보내줘.응,우리집 주소
로. 그러기라도 하면 덜 답답할 것 같았다.
 학생들은,그가 스스로 떠나버렸든,아니면,무단외박 때문에 퇴학을 당하든,
동료 한 사람이 신학교를 나가게 된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도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나에게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떠나버린 그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의 책상에는 책과 노트가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대숲 속의 바람소리.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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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오일째 되는 날 저녁에 돌아왔다. 마치 방금 전에 나갔다가 돌아온 것처
럼,그렇게 태연한 모습으로 돌아와서는,돌아왔다고 보고하기 위해 구역장 부제
들과 담임신부님과 학생처장 신부님을 찾아다녔다.
 우리는 모두,너무 태연한 그의 모습에 기가 질려,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볼 생
각도 못했다. 그날 저녁,그는 전과 다름없이 성무일도서를 펴들고 저녁기도를
바쳤고,함께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마친 뒤, 요한과 나는 말없이 함께 산책로를 거닐었다. 서녘 하늘에
흐르는 붉은 저녁 노을이 무척 아름다왔다. 그 노을을 멍하니 바라보던 요한이
불쑥 입을 열었다.
 "군대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무슨 일?"
 "이등병 두 놈이 탈영한 일이 있었어. 전입온지 한달도 안된 신병들이었지.군
대생활이 너무 힘들었는지,어느날 아침에 둘이서 같이 달아나 버린거야. 전 부대
가 발칵 뒤집혀서 수색에 나섰지. 바로 코 앞이 북한 땅이었어. 보안대장과 헌
병대장이 부대에 들이닥쳤고,사단 전체가 들썩거렸지.철책에 있던 부대들에는
전부 비상이 걸렸는데,아침에 나간 그 두 놈은 저녁때가 되어가도 발견되지
않았어.아무 흔적도 없었어.그러다가는 월북으로 처리될 판이었지.신병들이
그렇게 감쪽같이 후방으로 내빼거나,월북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모두들 당황했어.결국,그날 저녁에 잡긴 잡았는데, 바로 부대 안에서
였어.그놈들은 부대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지하유류고에 숨어
있다가 발견되었지.추위와 굶주림과 공포로 오들오들 떨다가 서로 꼭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더군. 그 두놈은 부대 밖으로는 전혀 나가지도 못했지만,
군법회의에서 징역 이년을 선고받았지."
 그가 갑자기 나지막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때 그 탈영병들을 잡으면 일주일간의 포상휴가를 주겠다는 대대장의 약속이
있었어.그런데,유류고에서 그들을 발견한 병사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지.
단지 잠들어 있는 걸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었으니까."
 나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그가 무슨 뜻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하며,속으로 헤아리기에 바빴다.산책로가 끝나고,학교건물이 나타나자
그가 말했다.
 "나,지금 학생처장 신부님께 가야해.갔다와서 다 이야기 해줄께. 혹시 늦더라
도 기다려 줄래?"
 나는 그러마고 약속했다. 그는 건물의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묵주기도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차임벨 소리가 허공에 가득 흩어지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대숲 속의 바람소리.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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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끝기도가 끝나고 자습시간이 되어도, 그리고 자습시간이 끝나고 취침시간
이 되어도, 학생처장 신부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를 침대에 누워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창 밖에서 비쳐오는 희부연한 빛을 바라보며 누워 있다가,
나는 그만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잠결에 인기척을 느껴 눈을 떠보니, 그 언젠가처럼 그가 침대 모서리에 걸터
앉아 있었다. 그는 아무 말없이, 자기는 다만 하나의 검은 그림자일 뿐이라는
듯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도 잠이 덜 깬 눈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성모상 뒤쪽의 대나무 숲을 스쳐가는 바람소리가 창 밖에서 들려왔다.
 우리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에서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결에 다시 잠이 들었다.

------------------------------끝---------------------------------

 

 


     <소설>


               자이로스코프

                                             송영진

"조금만 비켜줄래?"
갑자기 누군가가 종아리를 톡톡 건드렸다.
뒤돌아보니, 어린왕자처럼 눈이 반짝이고 볼이 붉은 꼬마아이가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뭐라고?"
"조금만 비켜 줘. 내 로보트가 지나가게."
그러고 보니, 조그만 로보트가 내 발에 걸려 붕붕거리고 있었다.
"응, 그래. 이쁘게 생겼구나. 이름이 뭐니?"
"누구 이름?"
"응?--누구 이름이라니?"
"내 이름? 아님, 로보트 이름?"
글쎄...난 어느쪽 이름을 물어봤던 것일까?
순간 혼란스러워졌다.
로보트를 위해 길을 비켜 주었다.
아니는 시큰둥한 표정으로,로보트의 뒤를 따라 또박또박 걸어가버렸다.

로보트도 제 갈 길은 알아서 간다.

창 밖에서 비 내리는 풍경을 멍청하게 바라보며 서 있는 내 모습이 초라했다.
로보트도 제 갈 길은 고집스럽게 알아서 가는데...난...
잠시 그 꼬마아이와 로보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을 돌려
현경의 모습을 찾았다.
그녀는 여전히 창가에 놓인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비가 내리는 늦가을 오후의 터미널은 한산했다.

사람들은 멍한 표정들로 앉아 있거나 말없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젖어 있었다.
터미널을 떠나거나, 이제 막 도착한 버스들도 젖어 있었고,
차에 오르는 사람들, 내리는 사람들, 그들을 떠나 보내거나 맞아들이는
사람들 모두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헤어짐도, 만남도 다 젖어 있구나."
하염없이 빗줄기만 바라보며 앉아있는 현경의 옆에 털썩 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야위어 보이고 피곤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녀도 젖어 있었다.
현경이가 여전히 창 밖을 보며 말을 받았다.
"이 사람들은 헤어지기 위해 여기 있을까? 아니면 만나기 위해 여기 있는 것
일까?"
"헤어짐의 장소는 늘 만남의 장소를 겸하는 법이지..."
"그래요, 만남은 헤어짐의 시작이고."
"헤어짐은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지."

비에 젖은 세상이 언제나 마를까...

"정말 오랫동안 같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짧은 시간은 아니었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그때, 그날도 비가 내렸다.
그날 오후, ㅊ읍의 조그만 간이 정류소에 버스가 멈추고, 차에서 내리자,
나는 빗줄기를 뚫고 그냥 걸어가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곧장 길가 가게 처마 밑으로 들어가서, 잠시 기다려 보기로 했다.

가을 비, 그리고 처량한 나그네, 어두운 하늘...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이 짙었다.
이렇게 내 여행의 첫 날은 가을비와 함께 시작되는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날 한두 편의 시를 끄적거리지.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라든가,
또는 가을엔 호올로 걷게 하소서......
아, 나는 혼자였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는 쓸쓸한 나그네의
모습도 시의 좋은 소재가 되겠네...

"저, 혹시 방향이 같으면 같이 받고 가실래요?"
낯선 여자 하나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자이로스코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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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저 말입니까?"
"그래요. 저는 이쪽으로 갈 건데..."
그 여자가 가리키는 방향에 나의 목적지가 있었다.
잠시 망설였다.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 머리를 길게 길러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아직 소녀라고 해야 할까, 여대생같은 모습......
도대체 낯선 남자에게 우산을 같이 받고 가자고 권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니.

"고맙습니다. 그러죠."
멋적게 대답하고는 그녀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저는요, 저어기 성당으로 가는 길인데요."
그녀가 팔을 뻗어 멀리 보이는 성당을 가리킬 때 손가락에 금으로 된
묵주반지가 보였다.
작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하얀 손, 여린 팔목...

"제가 우산을 들죠."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그리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우산을 같이 받기에는 불편하였다.
두 사람 모두 한쪽 어깨가 젖어들고 있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끔씩 서로의 체온이 부딪쳐 오고 있었다.

시골길에는 오가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
그냥 비만 내리고 있었다.
같이 걸으면서, 이런 때 남자 쪽에서 대화를 이끌어가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디까지 가시지요?"
"예,저는,그러니까..."
나는 여자 앞에서 완전히 얼뜨기가 되어 있었다.
말을 더듬고 있구나, 이 바보야.
아마 얼굴도 빨개져 있겠지?
낯선 여자 앞에서 당황해서 쩔쩔매는 꼴이라니.

"저도, 그 성당에 가는 길입니다."
"어머나, 그래요? 잘 되었네요. 어쩐지 그럴 것 같았어요."
그녀가 웃었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긴 미소짓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그녀의 미소를 보자, 잠시 호흡이 멎었다.
"그 성당에 다니시는 분이세요?"
"아뇨.여행 중에 한 번 들러보려는 겁니다."
"그래요? 이곳 신부님과 잘 아시는 모양이죠? 저도 지금, 신부님을 만나
뵙고 싶어서 여행 중에 들르는 건데. 그럼, 어디서 오시는 길이세요?
실은 아까 버스 안에서 그쪽 모습을 죽 보고 있었어요."
"아...예, 그랬군요."
"뭐랄까,우산도 없이 처량하게 서 있는 모습이 안쓰럽고, 아무래도 같은
방향일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고...어때요, 제 예감이 잘 들어맞았지요?"

그녀는 계속 활발하게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사실 전 비를 좋아하거든요...
이 비가 그치면 곧 겨울이 오겠지요. 겨울도 좋아요...가을비도 좋아하지만
눈 내리는 걸 싫어할 여자는 없을 거예요. 어때요, 저기 저 들판에 눈이
내려 쌓이면 정말 멋있겠지요?... 눈이 내리는 모습은 멋있는데, 그런데
무차별하게 다 덮어버리는 건 싫어요. 진실이 왜곡되고 감추어지거든요.
그렇게 생각되지요? 하얀 눈에 덮인 들판, 도시, 어디든 우리 눈에 안보이는
감추어진 모습들이 사실 더 중요한 현실이 아니겠어요?...어떻든 그래도,
좋군요.모처럼 이렇게 비가 내리는 시골길을 걷는다는게...더욱이,뜻하지
않게 동행도 생기고...그녀가 웃고 있었다.
나는 가끔씩,그래요, 예, 그렇군요 라고 한 마디씩 대꾸할 뿐이었지만,
그녀는 쉽게 쉽게 이야기를 해나갔다.
나는 전혀 낯선 남자에게 이렇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아가씨도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성당이 가까와지고 있었다.
내 오른 쪽 어깨와 그녀의 왼쪽 어깨가 비에 젖고,
가끔씩 바람이 빗줄기를 흩어놓아 우산을 받으나마나 하게 하고 있었다.

성당은 고요했다.

마치 깊은 산 속에 숨어 있는 오래된 절의 마당에 들어선 것처럼,
성당은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우리는 잠시 성당 마당 한 가운데 서서 종탑에 높이 서 있는 십자가와
그 십자가 끝의 피뢰침을 올려다 보았다.
"십자가와 피뢰침을 볼 때마다 재미있어요.그런 생각 안들어요?"
"글쎄요..."
그녀는 또, 십자가와 피뢰침의 함수관계에 대해서 한참동안 열변을 토할
기세였다.

하지만, 나의 손가락은 사제관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고,
저 안쪽에서 딩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것 같군요. 월요일도 아닌데..."
"그럴 수도 있겠죠. 전 약속없이 그냥 왔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진 않았어요.
워낙 바쁘게 다니시는 신부님이라서요."
"저도 미리 연락은 하지 않았죠...우선 사무실에 한 번 들러볼까요?"


                    (다음에 계속)


 제  목 : 자이로스코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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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당을 가로질러 사무실 쪽으로 갔다.
커다란 성당, 그 옆에 멋있게 서있는 사제관,
그리고 마당 한 구석에 작고 낡은 사무실 건물...
디귿자 형으로 이들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사무실 문을 당기자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약간 어둠침침한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낯익은 아주머니가 반겨 맞았다.
사무장 일을 보고 있는 아주머니였다.
"아이고, 학사님, 어쩐 일이세요? 지금, 방학도 아닌데..."
"예, 며칠, 시간이 생겨서요.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그런데, 신부님은 지금
안계신 모양이죠?"
"예, 어디 좀 가셨어요. 곧 오실거예요. 여기 앉으세요."
그녀는 우리 두 사람에게 의자를 권하고는 급히 사무실에 딸린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마 차 대접할 준비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맞은 편 의자에 앉은 나의 동행인이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처음부터, 학사님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랬어요? 어떻게 알았죠?"
"검은 양복에, 그 뺏지, 게다가 학사님의 분위기는..."
"분위기는?"
"확실히 수도자 같은 분위기를 풍겨요. 그 멍청해 보이는 눈빛하고...
어머나, 죄송해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학사님 손가락에 낀 묵주반지도 눈에 잘 뜨이더군요.
하여간에 버스에서 처음 볼 때부터 줄곧 지켜보고 있었지요.
제 텔레파시가 안 느껴지던가요?
말을 건네보려고 했는데,계속 깊은 생각에 잠겨 계시더군요.
비 내리는 날엔 그렇게 늘 말이 없으세요?"
"말이 없다기 보다는...글쎄요, 말할 상대가 없었죠."
"이젠 말상대가 생겼으니 다행이시겠네요."
"말상대를 해 주실 겁니까?"
"그럼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제가 한 역할은 대체 뭐였지요?"
"그로ㅎ군요. 전, 속으로, 상당히 활달한 여자로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지요. 또 어지간히 심심했던 거로구나, 낯선 남자에게 이렇게
쉽게 말을 붙이고 우산을 같이 받자고 권하다니...라고 말입니다."
"세상에, 어쩌면...그럼 저를 바람기 있는 여자로 보았던 거군요."
그녀가 살짝 눈을 흘겼다.
"아마도 십중팔구는 신학생일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용기를 낸 것 뿐인데...
실망이군요. 사람보는 눈이 그렇게 없다니, 역시..."
"역시?"
"아니요, 말 안할래요."

바람이 창문을 흔들고 지나갔다.

뜨거운 커피가 비에 젖은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잘 웃고, 줄곧 재잘거리던 그 아가씨는 커피를 마시면서부터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창 밖으로 비를 뿌리며 지나가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매우 고혹적이었다.

나에게 간단하게 몇마디 안부를 묻던 사무장 아주머니는 몹시 바쁜 듯
곧 다시 밀린 업무에 열중하였고,
우리 두 사람은 바람과 빗소리와 한가로움을 즐기며 편안하게 쉬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여유를 되찾고,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윤기나는 긴 머리가 어깨까지 늘어뜨려져 있고,
청순하면서도 귀여운 얼굴에 한 번 웃으면 장난기가 넘치는 눈,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피곤하고 지쳐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별로 긴 여행길이 아니었는지, 핸드백보다 약간 큰 가방 하나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마신 커피잔들을 챙겨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사무장 아주머니가 말렸지만, 그녀는 고집을 부렸다.

비가 내렸고, 바람이 불었다. 그녀는 말없이 소파에 깊숙이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고, 나는 바람 소리와 빗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졸음에 빠져들었다.

바람소리가 내 잠을 깨웠다.

창문이 바람에 덜컹거렸다. 밖에는 어둠이 깃들고 있었고, 그녀도 앉은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리게 보였다. 어린아이처럼
쌔근쌔근 잠자고 있는 모습이 무척 피곤했던 것 같았다.
사무실에는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사제관에는 아직도 인기척이 없었고, 성당도 어둠에 잠겨 있었다.
오늘은 저녁미사가 없는걸까?
사무장님은 저녁식사 준비하러 가셨나?
아무도 없는 드넓은 세상 한 가운데에 우리 두사람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적막감이 들었다.
어둠이 낯설었고, 고요함이 싫었다.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한 소녀를 이 어둠의 침묵에서 보호하고 있는 듯한
사실이, 혼자가 아니면서도 동시에 어쩔 수 없이 혼자라는 사실이 두려웠다.

전등 스위치를 찾아서 불을 켰다.
사무실을 점령하고 있던 어둠이 건물 밖으로 물러갔다.
밝은 빛을 받자 그녀가 잠을 깼다.
그녀는 잠시 눈을 깜박거리더니 자기 앞에 서서 굽어보고 있는 나를 올려다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웠다.
"무척 피곤했던 모양이로군요."
"예, 조금...신부님은 아직 안오셨어요?"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아직..."
"신부님이 끝내 안 오시면 어떻게 하지요?"
"사무장님보고 사제관 열어달래서 자고 갈 생각입니다."
"하긴, 학사님은 그래도 되겠네요."
"......"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안을 서성거리며,
벽에 걸린 게시판들을 들여다 보았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자이로스코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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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지 않아 우리는 사제관의 주인을 만나 저녁식사를 대접받을 수 있었다.
그는 우리 두 사람을 보자 반겨 맞으며,
자신이 바쁘다는 사실에 오히려 미안해 하였다.
"어이구, 모처럼 찾아온 귀한 손님들인데...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였던가?"
"아니요."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대답하였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어려운 고비 때마다 늘 힘이 되어주던 신부님이었다.
신학교에서의 생활모습은 후배인 나에게 항상 모범벅인 것으로 비쳤고,
나는 본받을 만한 훌륭한 선배가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고 자랑스러웠다.
신중함과 정의감의 조화, 성실함, 온유함 등은 두드러지게 눈에 뜨이는
그의 덕성이었다.
누구든지 찾아가면 편하게 쉬게 해 주었고,
고민을 잘 들어 주었고,
의로운 분노를 함께 터뜨릴 수 있는 신뢰감이 가는 선배였다.
이번 여행길에 첫번째 방문지로 이 성당을 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하룻밤, 선배 신부님과 모처럼 만의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가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우리가 가끔씩 그러했던 것처럼.
비록 사전에 연락하거나 시간 약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은 채 곧장 찾아왔다.

식사시간에, 현경과 나는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아직까지도 우리가 서로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김현경 아녜스, ㅈ대 국문학과 3학년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그녀가 나보다 서너살 아래라는 것이 밝혀졌고,
그녀는 자기를 동생처럼 대해달라고 애교있게 인사했다.
통성명하는 두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던 신부님이 한 마디 거들었다.
"음,이 친구,보기에는 이렇게 가냘픈 여학생 같아도,알고보면 대단한
사람이라구. 학교에서는 여전사로 불리는 아주 맹렬투사야. 남학생들도
무서워하지."
"뭘 그렇게 무서워한다는 거지요?"
"배짱과 용기가 대단해. 남자들도 쉽게 못할 일을 척척 해내지.시위대
맨 앞에서 화염병 던지는 건 일도 아니라고. 아마 운동권 지도부의
핵심멤버일걸?"
어쩐지 아까 처음 만날 때부터 나를 압도하더라니...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현경이가 반박하고 나섰다.
"신부님, 과장이 너무 심해요.어쩌다 겨우 데모 한 번 참가한 걸 가지고...
저도 알고보면 순진한 소녀예요."
"아,거야 물론 순진하겠지. 하지만 요새는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들이
더 무섭다구. 물불을 안가리고 덤벼들거든.세상이 험한 줄도 모르고.
경찰에서 대학가의 요주의 인물 중의 하나로 김현경을 꼽고 있다는 것을
내가 다 알고 있지."
"어머, 설마요."
"으음. 아냐,정말이야.혹시 미행당해 본 적은 없나? 가택수색이나 뭐,
임의동행같은 건?"
"없었는데요."
그러나, 순간 현경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밤이 깊어갔다.
밖에선 여전히 비바람이 치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예전의 선후배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원했다.
현경이는 피곤해서 쉬겠다며 배정받은 방으로 먼저 물러갔고,
응접실에서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가 먼저 침묵을 깼다.
"너, 어쩐 일이냐? 방학도 아닌데 어떻게 왔어?"
"그냥, 떠나왔지요."
"아주 나왔어?"
"아뇨. 도로 돌아갈 거예요."
"......"
"신학교를 그만두고 싶어졌어?"
"모르겠어요. 신부님이 언젠가 말씀하셨죠? 세 번쯤은 보따리를 싸게 될
거라고요.이게 아마 첫번째인 것 같아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나침판을 잃었어요."
"응? 뭐라고?"
"방향이 안 보여요."
"짜식... 내 참, 새삼스럽긴..."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다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학교 당국의 허락은 받고 나온거니?"
"약간 변칙적이긴 하지만, 며칠 쉬겠다고 말은 하고 나왔지요."
"누구한테?"
"학생처장 신부님께 말씀드렸지요. 쉽게 허락하시던데요."
"적어도 무단 외박은 아니구나."
"처음엔 말없이 나오려고 그랬지요. 그랬는데, 만일에 다시 되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어쩌나 싶어서, 후회할 짓은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무턱대고 찾아가서, '신부님,며칠만 주십시오. 쉬고 싶습
니다.' 그랬더니, 한참을 쏘아보시더군요."
"그러더니 그냥 허락해주셨어?"
"아마 제 눈에 광기가 서려 있었겠죠?"
"그러고 보니 네 꼴이 영 말이 아니다. 대체 무슨 고민을 어떻게 했길래..."
"학교에서 나오는 길로 우선 여기부터 들렀지요. 하룻밤 자고 가려구요.
신부님과 오랫만에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고."
"그래,잘 왔다. 마침, 오늘 밤에는 내가 별 계획이 없었다. 날씨도 이렇고
하니까, 찾아 올 사람도 없을거고....그런데, 나침판이 어떻게 되었다고?"
"모습을 감추었다니까요. 전례 때도, 기도 때도, 수업 때에도, 도대체
신학교 안에서 나침판의 바늘이 안 보이는 거예요."
"신학교 밖에서는 보이고?"
"많이 보았습니다."
"어떻게?"
"쇠 파이프에 맞아 죽기도 하고, 분신자살하기도 하고..."
"결국, 그런 이야기구나? 난 또 뭐라고."
"아뇨. 꼭 그런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처음으로 흔들렸습니다."
"뭐가?"
"처음 입학할 때는 사제로서의 삶이 최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급반으로 올라와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야,그렇지. 당연한 이야기야.하지만 중요한 건 너의 소명의식이
아니겠니?"
"무엇을 위한,누구를 위한 소명의식이지요?"
"하느님과 세상...그리고, 너 자신 !"
"그래요,사제직은 그 다음 문제일 뿐이지요."
"그래서 신학교를 나오고 싶다?"
"의미를 찾고 싶습니다. 삶의 의미, 결단의 의미,기다림의 의미, 포기와
선택의 의미들..."
어요."
"마음의 문을 자꾸 닫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게 아닐 겁니다."
"아냐,넌 신학교 입학 전에는 순수한 열망이 있었어. 하느님과 세상을
위해 헌신 봉사하겠다는. 그런데 입학 후에는 현실에 안주하고, 타성에
빠지기 시작한거야. 그런 생각은 안해보았니?"
"오히려 저희들 신학생들을 그렇게 만드는 건 아닐까요?"
"누가?"
"우리 교회가요. 신학생들로 하여금 해야 할 말도 못하게 하고, 아무런
행동도 못하게 하고...옳은 건 옳다고, 그른 건 그르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단지 신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렇게 못하고 있다면, 우리가
포기할 것은 바로 그 신분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꼭, 시국문제 뿐만은
아닙니다. 교회 내의 문제도 그렇고, 우리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할 말을 못한 건 없잖아?"
"왜 없어요? 많지..."
"너무 성급하구나. 예수님은  3년의 활동을 위해서  30년을 기다리고
준비하셨다. 그런데 우리 사제들은 일생동안 사제로서 살기 위해
겨우 6년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칠 뿐이지. 그렇다면 교회가 신학생들을
제약하는 게 아니고 보호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어?"
"어떤 작가가 옛날에 공산주의를 포기하면서 이런 말을 했지요.'얻은
건 이데올로기요, 잃은 건 문학이다.' 저도 비슷한 표현을 쓰고 싶군요.
'얻은 건 도그마(Dogma:교의)요, 잃은 건 신앙이다.' "
"허허허...너무 낙심하지 마라. 네 입으로 말했지 ? 세 번의 보따리싸기
중에서 첫번째라고. 그러니 앞으로도 많은 고민을 더 해야 할텐데 처음부터 극단적?
?

결론을 내리면 곤란해. 지금 네가 하는 말들도 나에겐 상당히 혼란스럽구나.
너 스스로도 무슨 고민이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아. 우선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에 대응하는 교회의 자세에도 불만이 있는 것 같고, 교회 내
의 민주화 문제에도 불만이 많은 것 같고, 사제직 자체에도 여러가지
회의를 느낀 모양인데...뭐, 어떻든 좋아....... 또, 길거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분신자살하고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신앙인이
다 분신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예수님이 요구하는 십자가는 그런 의미가
아니지? 예수님이 너에게 요구하는 십자가는 좀 더 적극적으로 신학교
생활에 충실하게 임하는 것일 수도 있지. 너, 지금, 이런저런 고민이
있다고 해서 신학교를 나왔댔자, 현경이 만큼도 투사가 되지 못할 건
분명해. 결국 어정쩡한 룸펜이나 될까."
"그건 그렇겠지요. 그래서 고민하는 겁니다. 신학교에 머물러 있으면
점점 의미를 잃어가고, 그렇다고 과감하게 신학교를 떠날 용기도 없고...
신학교에서 나오면 어정쩡한 룸펜 밖에 안된다고 하셨죠? 그런데 사실,
지금의 제 모습이...신학생으로서의 제 모습이 그렇게 어정쩡한 꼴로
느껴지는군요."
"확실히 나침판을 잃긴 잃은 모양이구나."
"어떻게 해야 하지요?"
"이 자리에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지만...처음으로 되돌아가거라.
네가 맨 처음,부르심에 응답하겠다고 결단을 내릴 때의 그 순수함으로
되돌아가거라. 선배 사제들, 그리고 이 제도 교회가 널 실망시키기만
한다고 좌절하지 말고...그리고, 널 실망시키는 그런 모습들에 너 자신도
이미 물들어 있는 점은 없는지 반성해 보고......너에겐 나침판보다는
자이로스코프가 더 필요하겠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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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자이로스코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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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 잠자리에 누웠어도, 답답한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꿈 속에서, 나는 대나무 숲을 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대나무들이 흔들렸다.
바람은 항상 대숲 속에 머물고 있었다.

고요한 새벽이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성당으로 향하는 나의 온몸을
찬 새벽 기운이 씻어내렸다.
성당 문을 열자 감실의 붉은 불빛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리고 그 앞에 그림처럼 앉아 있는 현경의 모습이 보였다.
발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다가갔다.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그녀를 바라본 순간 멈칫했다.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침묵을 지켰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신경쓰이고 있었다.

마침내 현경이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계속 무릎을 꿇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자, 성당은 다시금 깊은 정적에 잠겨들었다.
아침묵상한답시고 감실 앞에 무릎 꿇고 있었지만,
머리 속에서는 울고 있던 현경의 모습만 가득 어지러웠다.

한동안을 그렇게 더 머물러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무릎이 뻣뻣해진 듯 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먹구름이 짙게 덮여 있어 또 다시 빗방울이 떨어질 듯 했다.
차가운 바람이 살랑 불었다.
어깨를 움츠리며 주위를 한 바퀴 둘러 보는데 사제관 현관에서 현경이가
나를 손짓하며 불렀다.
"식사하세요, 학사님!"
그녀의 얼굴을 보니 언제 울었나 싶게, 아주 맑고 깨끗하고 밝아져 있었다.
사제관 쪽으로 향하는 나를 맞으며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비가 또 올 것 같죠?"
"그래요.이제 좀 개이려나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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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자이로스코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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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목적지를 고개 너머의 순교자 묘지로 예정했다고 말하며 성당을 하직했다.
예전처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아파해 줄 선배 대신 그냥 친절한 상담자를
만났을 뿐이라는 느낌에서 서둘러 벗어나고 싶었다.
"저는, 그럼 이만 떠나겠습니다.느닷없이 찾아와서 너무 폐를 끼쳤습니다."
"내가 별 도움이 안된 모양이구나. 그래 다음 행선지는 어디냐?"
"우선, 순교자묘지 참배하고, 그리고 나서 요한에게 갈까 합니다."
"아--전에 ,신학교 그만 둔 그 친구 ?"
"예, 지금 갓 결혼한 새신랑인데, 한 번 만나보고 싶군요."
"그것도 좋겠군. 널 며칠 여기다 붙잡아 놓고 함께 계속 이야기하는 것도
괜찮겠지만 고민이라는 건 결국 혼자 해결해야 하는 법. 네가 누구와
야기 하든, 어차피 너 자신 안에 해답이 있을테니까...그래, 요한을
만나거든 내가 안부 묻더라고 전해주고...비가 와서 산길이 미끄러울텐데
조심하고..."

그냥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었는데, 의외로 현경이가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길이 험하다고 말려도 듣지 않았다.
"산길이 무척 가파로운데..."
"전, 이래뵈도 공인받은 운동권이예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까짓 산길쯤이야 하는 태도였다.
신부님마저 옆에서 거들고 있었다.
"둘이 같이 가면 덜 심심하고 괜찮겠구먼."

내가 마음내켜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현경이 따지듯이 물었다.
"제가 함께 가는 것이 귀찮으세요?"
나는 우물쭈물 하였다.
"뭐, 별로...귀찮은 건 아니고...같이 가지 뭐..."
그럼 순교자 묘지까지만 데려다 주세요."
"그 다음엔 어디로 갈건데? 집에는 안갈 건가?"
신부님이 묻자, 현경이가 가볍게 대답했다.
"그냥 발길 닿는대로 갈 거예요. 저 지금, 가출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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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자이로스코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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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첫번째 목적이었던 선배 신부님과의 만남이 별 소득이 없었음에
허탈감을 느끼며, 또 한편으로는 석연치 않은 감정을 품으면서 성당 대문을 나
섰다.뭔가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다.
내가 신부님에게서 기대했던 건 이런게 아니었는데,
구구절절이 옳은 말만 해주는 것 같은데도 별로 가슴에는 와 닿지 않는 것...

현경이는 과연 산길을 잘 걸었다.
가출했다는 말을 불쑥 내뱉어 신부님과 나를 어이없게 만들고서는
별다른 해명도 없었던 그녀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또 다시 수다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두 시간쯤 걷고나자 조금 헐떡이는 듯 했다.
그녀의 뺨이 발그레 상기되어 건강하고 이쁘게 보였다.
"조금만 쉬었다 가지요."
"저어기 고개 마루까지만 가서...곧 또 비가 올 것 같기도 하고...아직도
갈 길이 멀었는데..."
"얼마나 남았는데요?"
"삼십분은 더 걸어야 할 걸...왜, 자칭 운동권이라며 자신만만하더니, 벌써
지쳤어?"
"천만예요.지쳐서 그런게 아니라, 고지대라서 산소가 희박해서 그런 거예요."

갑자기 길이 급경사가 되면서 바윗돌이 많아졌다.
먼저 높은 곳을 디디고 선 나는 팔을 뻗쳐 현경이가 뒤따라 올라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녀는 순순히 내 손을 잡고 따라 올라왔다.
그녀의 따뜻한 손에 땀이 배어 있었다.
잠시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바람이 한 줄기,뺨을 스쳐 지나갔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순교자 묘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는 여전히 우산이 없었다.
또 다시 현경의 우산을 같이 써야 될 형편이었다.
사제관에서 우산을 빌릴 걸 하고 후회했다.
비를 피할 곳도 마땅치 않을텐데...조바심이 생겼다.

비가 내렸다.

차가운 빗줄기가 무심하게 내리고 있었다.
인적이 끊긴 깊은 산 속에,순교자 묘지가 축축하게 젖은 채 누워 있었다.
그 묘지 앞에,방황하는 신학생 하나와 수수께끼 같은 묘령의 처녀 하나가
나란히 섰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현경이가 우산을 받쳐 주었다.
내 젖은 몸이 현경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고,
현경의 우산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깊은 산 속,적막감과 함께 시간이 멈추었다.
그리고...온 우주 전체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비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 내릴 것만 같았다.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자이로스코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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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묘지 옆의 큰 나무 그늘로 들어가 서서,골짜기를 내려다 보았다.
멀리,비안개가 보얗게 깔려 있었다.
현경이가 여전히 골짜기 쪽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불쑥 질문을 던졌다.
"신학교는 왜 들어가셨어요?"
"신부되려고."
"신부는 왜 되려고 하죠?"
나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이 받아 온 질문이던가?
또 스스로 얼마나 많이 물었던 물음인가?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기나 하는지...
묵묵히 앞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이유가 뭘까?"
"사랑하기 때문이겠지요."
"나는 하느님을 사랑해..."
"하느님과 결혼하신거로군요."
"아직은..."
"중간에 실연당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겠지."
"삼각관계도 생기겠군요."
"......?"
"살다 보면,하느님보다는 한 여성을 더 사랑할 수도 있지 않을까...아니면,
신학생은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하느님은 그 신학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든지.."
"하느님과의 사랑은 차원이 달라."
"물론 다르겠죠.성소자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건 분명 차원이 다른 이야기겠지요.하지만..."
"하지만?"
"결국은 그게 그거 같아요"
"......."
"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배제해야 하는거죠?"
"배제하는 게 아냐.포기한 거지.우리는 세상 모든 남자,여자,어린이,노인
다 사랑해.그리고 그건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고."
현경이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뭔가를 곰곰히 생각하였다.
나는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향을 잃었다고 투덜대던 내가 지금 열을 내며 자신있는 척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정말,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현경이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자이로스코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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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교리서는 다 읽었어요.사제의 독신제에 대해서 교회가 어떻게 가르치는
지도 알구요.그건 대단히 고귀하다는 것이지요.아무나 받을 수 없는 은총이라
는 것이지요.그런데..."
"그런데?"
"부자연스러워요."
"응?"
"부자연스럽고,어색해요."
"인간적인 가치척도로 생각할 때는 그렇지."
"무한히 많다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과 같다는 말을 들어보셨어요?"
"......"
"밤하늘의 별을 몽땅 너에게 줄께...라고 말하는 건,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과 같은 뜻이예요.이 세상의 모든 돈이 다 내 돈이라는 건, 나는
무일푼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거지요."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한 다는 것은,아무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지요."
"그런...가? 그럴듯 하게 들리긴 하지만...이상하군"
"아니예요.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사랑은, 사랑이라는 것은 돈이나, 별이나, 어떤 눈에 보이는 물질하고는
달라.그건 한계가 없어. 또 그것은 핵무기보다 더 강한 폭발력을 지녔어.
아주 작은 사랑도 순식간에 전 세계를 뒤덮는 거대한 사랑으로 성장하게
되지.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야. 그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란 말야.다미안 신부님이 몰로카이섬의
나환자들하고만 같이 살았지만,그는 그곳의 환자들만 사랑한게 아냐. 그는
전세계의 나환자들을 사랑한 것이고,나아가서는 전 세계 인류를 사랑한거야.
우리 성소자들,사제들,수도자들의 삶은,바로 그런 위대하고도 거룩한 야망의
삶이라고 할 수 있어.그래서 기꺼이 모든 걸 포기하고 이 길을 선택한
욕심꾸러기들이야. 전세계인류를 사랑함으로써, 세상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지.이것은 곧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고,하느님과의
사랑인거야."
내가 흥분해서 정신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현경이가 빤히 보고 있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이 바로 그거로군요?"
"그렇지"
"하느님을 사랑한다,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겉으로 보기에는 그 말마디
가 거창해도 실은 단순하고도 쉬운 곳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군요?"
그렇지"
"이해할 수 있어요.하지만...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어요.왜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가장 인간적이고,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하지 않는 거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핵으로 해서 핵폭발을 일
으킬 생각은 왜 하지 않지요? 왜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은 사랑하면서도,
그 어떤 한 여자를 사랑하는 일은 포기하는 거죠? 이 자리에서,저에게
독신생활의 의미라든지,정결이니,동정이니 교리서에 있는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저는 인간적인,살아있는 인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정말,사랑은 해보셨어요?"
그녀의 눈빛이 타오르는 듯 했다.
빗소리가 요란했다.
우산 속에서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서서 말없이 서로의 눈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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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자이로스코프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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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묘지에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나면서, 나는 현경을 향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가 포기하는 것은,사랑하기가 아니고,사랑받기...,그러나,우리는 포기함
으로써 더 큰 사랑을 받게 된다고 믿어.사랑이라는 건 결국,줌으로써 받는 것
바로 그거잖아?"
"......"
"하여간에,아무리 논쟁을 한다 해도,이건 분명해.결혼한 사람들이 결혼생활?
잘 해나가면서도 하느님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하느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인간적인 사랑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야."
현경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의 눈길이 마주쳤다.
그러다 현경은 곧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나의 가슴은 공허했다.
내가 한 말이 진실이라고 스스로 믿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말들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위선자일 뿐이었다.

우리는 한 우산을 같이 받고 있었지만,산길을 벗어날 때까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산 아래 마을로 들어섰을 때쯤엔 비가 거의 그쳐 있었다.

나의 다음 목적지는 요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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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자이로스코프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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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신학교를 떠난지도 꽤 되었다.
그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가 떠나던 날의 장면이 기억에 선했다.

요한을 신학교에서 떠나 보내는 일은 의외로 간단했다.
다들 시험공부에 바쁘던 시기여서 그랬는지,겉으로 호들갑 떨며 작별을 아쉬워
하는 사람도 없었고,구석방에 끌고 들어가서,미리 몰래 사두었던 소주병을 밤새
기울이는 일도 없었다.
어느 외출날 오후에 잠깐 볼일이 있어 밖에 나가는 것처럼 모든게 담담하고
평온했다.
아니 다들 무심했다는 게 보다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너 잘난체 하더니 결국 나가고 마는구나.
잘난 너는 밖에 나가서 잘 먹고 잘 살아라.
못난 우리는 안에 남아 이렇게 우리 식대로 어우러져 살겠다......

글쎄 요한이 공동체 안에서 특별히 모난 행동을 한 적이 있었던가.
그저 약간 더 열심히 살았고,진지하게 살았던 것 뿐이지 않는가.
공동체라는 것은 그 속성상 쌀밥 속에 섞인 돌멩이같은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
모양이었다.반드시 가려내어 멀리 뱉어야만 하는 걸까.
설사 돌멩이가 아니고 다이아몬드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한의 짐보따리는 별로 크지 않았다.
대부분의 소지품들을 나중에 바자회때 이용하라고 남겨두었고,
쓸만한 책들도 후배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다.
입학할 때는 가진 거라곤 작은 트렁크 하나밖에 없던 신학생들이 졸업할 때는
용달차 한 대 분량으로 늘어있는게 통상적인 일이다.
괜찮아 보이는 난초 화분 두어 개와,조촐한 오디오 제품을 곁들이면
금상첨화...

그러나 요한은 다 두고,훌훌 털고 가볍게 떠나갔다.
평소에도 별로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던 그였었다.
요한은 싱글싱글 웃으며 신학교를 떠나갔다.
남아 있는 우리도 웃으면서 그를 보냈다.
야,청첩장은 잊지말고 보내야 한다.알았지?
돈벌면 가난한 동기생들 챙겨줘라.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있어.그동안 여러가지로 고마왔다."
"그래,잘 가."
"너 그런데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쓴답시고 괜히 애먹지 마라.너 자신의 이야기를
써.오로지 진실만을 말할 것.그게 글쓰기의 첫번째 원칙 아니니?"
"네 이야기는 곧 내 이야기.그러니 굳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낼 것도 없지."
그는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싱긋 웃었다.
"신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라고 해서, 맨날 신학이나 철학 이야기만
할 필요는 없잖아? 라틴어 문구를 섞는다고 품격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하여간에,열심히 쓰고,열심히 살아라.기도해 주라.그럼,나,간다."

요한이 신학교를 떠난 뒤 얼마 안 있어,그가 ㅂ해수욕장 근처의 조그만 읍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결혼했다는 소식이 뒤를 이었다.
짜식,되게 빠르기도 하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말았다.
결혼선물 삼아서 그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대숲 속의 바람소리"원고를
복사해서 보내주었다.
그는 엽서에 고맙다는 짧은 글 하나 보내오고는 별 논평을 하지 않았다.

 

 제  목 : 자이로스코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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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을 시작하면서,나는 요한을 만나보고 싶었다.
아니 꼭 만나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와 마주 앉으면 뭔가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신학교를 나가기 전에 무척이나 방황하고 고민하며 나를 성가시게 하던 그였었다.
이제는 내가 그를 필요로 하게끔 되었다.
그는 좋은 상담자가 되어 줄 것 같았다.
게다가 마침 그의 집 근처에 바다가 있으니, 철지난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거닐며 바다구경을 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ㅂ읍으로 가는 버스는 자주 있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잠자코 같이 걸었던 현경이가 뭔가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저....,이제는 어디로 가실 건가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ㅂ읍에 사는."
"그럼,여기서 우리 헤어져야겠군요."
현경이의 표정이 왠지 쓸쓸해보였다.
나는 잠시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웃고 떠들며 수다스럽게 이야기할 때는,그녀의 모습은 천진난만하고 깜찍한
개구장이 같았지만,말없이 먼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는 또 더없이
애처로와 보였다.
"정말로...집에서 가출한거야?"
그녀가 대답대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별로 바쁜 일이 없다면,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점심이나 같이 먹는 게
어떨까...해수욕장 구경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제가 곁에 있는게 불편하지 않으세요?"
"뭐,별로."
"친구분하고는 시간 약속하지 않았나요?"
"내가 그곳에 도착한 다음에 전화를 걸기로 했어."
그녀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머뭇거리며 말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ㅂ해수욕장 안내를 부탁드릴께요.....지금쯤이면
무척 황량한 경치겠지요?"
"철이 지난 해수욕장은 묘한 느낌을 줄거야."
"겨울 바다는 더러 가보았지만,이렇게 비내리는,청승맞은 가을철엔
처음이군요."

백사장에 드문드문 짝을 지어 거닐고 있는 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바다는 잔잔했다.
몇 시간 사이에 깊은 산 중에서,탁 트인 바닷가로 나오니 가슴부터 시원해
지는 듯 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 처럼 해변을 거닐었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어두웠다.
바람도 불지 않는 바다 위에 구름이 낮게 그리고 두껍게 덮여 있었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연인들이 겨울에 이곳으로 오면 헤어진다는 징크스가 있죠?"
"나도 들었어.하지만,지금은 겨울이 아니니까..."
"우린,연인이 아니기도 하구요."
"헤어질 일이 없겠군."
"......"
현경이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만난 것도 아니니까...,만남이 없었으니 헤어짐이 있을리가 없지."
"만남이 없었다구요?"
그녀가 반문했다.
무슨 뜻이냐고 따져 묻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우린 서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잖아? 또,이제 시간이 되면 각자의
길을 갈테고.우리가 만난 건 인연이 아니고 우연일 뿐,이건 만남이라고
할 수 없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긴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인연이든,우연이든,중요한 건 지금 여기 우리가 서로의 곁에 있다는 것
이라고 생각해요.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그러시지만...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잖아요?...전...오빠를...이렇게 불러도 괜찮겠지요?
오빠를 잘 알려고 노력했고, 잘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가 쑥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현경이는 나에 대해서 조금 알았다고 해도, 난 현경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
"뭘 알고 싶어요.?"
"이름,신분은 이미 알고 있고...음...대체 지금 뭐하고 다니는지 말해줄
수 있어?"
"뭐하고 다니냐구요?"
"이번 여행의 이유..."
"그냥 목적없이 돌아다니는 거예요."
"경찰에 지명수배 되어서 도피 중인가?"
"아니요."
"그럼,정말,괜히 바람이 나서 떠돌아 다닌다는 거야?"
"그것도 아니라고 말하겠어요."
"다 큰 처녀가 혼자 여행한다는 건 위험한데..."
"신학생하고 함께 다녀도 위험할까요?"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현경이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우린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게 아니지...."
그녀는 말없이 걷고만 있었다.
모래 위에 우리 두 사람의 발자국이 길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감추려는 게 아니고,표현하기가 힘들어서 그런거예요."
"뭐를?"
"나라는 사람을..."
"......"
"그래요,저도 한때는 여전사 소리를 들을만큼,맹렬 운동권이었어요.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글쎄요...,오빠가 잠시 신학교 밖으로 나와 있는 것과 상황이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그녀는 더이상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말없이 백사장을 따라서 걷고 또 걸었다.
"경찰에 쫓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만도 다행이군."
"......"
"방황?...이념에 대한 고민?"
그녀는 대답대신 미소를 지었다.

 

 제  목 : 자이로스코프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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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제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군.아마 ㅈ시로 가는 버스는 아직
있을거야.여긴 막차가 일찍 끊어져.터미널까지 데려다 줄께...결국 현경에
대한 것은 수수께끼로 놔둬야겠군..."
"그런데...제가 왜 ㅈ시로 갈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야? 뭐,어떻든 여기서 출발하는 버스는 다 ㅈ시행이니까..."
"지금,당장은 갈 곳이 없군요.정해진 목적지가 없다는 뜻이예요."
"그래도 현경이네 집은 있을 거 아냐? 가족도."
"있지요.하지만 지금은 안돼요."
"왜?"
"전 ,지금..."
"무단가출?"
"아뇨,피신 중이예요."
"응?"
내 눈이 커졌다.
"아니,그럼 정말...,아 참, 아깐 수배중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래요,지명수배된 건 아니예요.하지만,전 지금,모두에게서 피신 중이예요.
경찰로부터,가족들로부터,친구들로부터,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갈수록 복잡해지는군."
"미안해요.아직은 뭐라고 설명하기가 힘들군요.나중에...나중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그때는 다 말씀드릴 수 있을 거예요."
"알겠어. 그건 그렇고,오늘 밤엔 어떻게 할건가?"
"사실은,ㅊ읍에 친구가 한 명 있어요.원래는 ㅊ읍성당에 들러 신부님을 잠깐
뵙고 그 애한테 가서 ,거기서 며칠 묵으려 했었는데,그만...,오빠를 만나면
서부터 그만,...여기까지 저도 모르게 따라오고 말았군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정말 대책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슬픔이 가득 들어있다는 것을 느끼자,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때서야 처음으로,우리가 우연히 동행이 된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다.
각자의 궤도를 따라 돌던 두 떠돌이 별이 한치 오차도 없이 어느 지점에서
만나 충돌하듯이...예정되어 있었지만,아무도 그것을 미리 정하지는 않은...
예정도,예상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나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전 피신처를 찾아야하고....어때요...피신처가 되어주실래요?"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녀를 굳이 떠나보낼 이유도 없었고, 아직은 떠나보낼 때가 안된 것같기도
했고...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현경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녀를 터미널까지 바래다 주려던 계획을 바꾸어 공중전화를 찾아서
요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한은 기꺼이 우리 두사람의 휴식처가 되어줄 친구였다.

 

 제  목 : 자이로스코프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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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왜 이렇게 늦게 전화를 걸었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야,내가 하루종일 기다리고 있었는데,대체 뭐하다가 이제서야 연락하는 거냐?
"음,좀 그렇게 되었다."
"거기,어디냐? 내가 거기로 나갈테니까 기다려.바로 갈께."

요한의 모습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가 서로 악수를 나눌 때,나는 우리 사이의 우정이 아직 그대로임을
느낄 수 있었다.
요한은 자기가 일하는 서점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별로 크지 않은 서점인데,한 쪽 구석에 도서 열람실을 갖추어 놓은 것이
특이했다.
주로 동네 아이들이 공부방으로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요한은 별로 큰 돈 벌고 싶은 욕심은 없이,그저 삶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서점에서 그의 아내를 소개받았다.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그녀가 오래 전부터 요한을 말없이 좋아하고 따르던
그 아가씨임을 알아보았다.
내가 의미있는 웃음을 요한에게 지어보이자,요한도 담담하게 웃었다.
요한이 방황끝에 결단을 내렸을 때,자연스럽게 그녀가 아직도 곁에 머물러
있음을 깨달았고,전혀 그녀때문에 신학교를 그만 둔 것이 아니었음에도,
처음 한동안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요한 부부와 현경이와 나는 요한의 집에서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현경이의 활달한 성격이 여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현경이는 그들 부부에게 기꺼이 환영받았다.
요한은 나와 현경이가 어떻게 만난 사이인지, 어떻게 동행이 된 것인지
물어보려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동안의 일을 대강 들려주었다.
그는 별다른 질문없이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자이로스코프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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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요한이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월이라는 게 무섭긴 해."
"어떻게?"
"변화라는 점에서."
"넌, 신학교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변한게 별로 없는데..."
"속으로 변했지."
"당연한 거 아냐?"
"당연한 것이지."
"그럼, 받아들이면 그만이지."
"그래도 아쉬워."
"옛날이?"
"미련일까?..."
"후회가 아니고?"
"후회는 아니야.난 그런대로 지금 생활에 만족해.아내와 나는 서로 사랑하고
있고,...그런데..."
"그런데...뭔가 덜 채워지는 게 있다는 것?"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간절해지는 것 같아."
"돌아가고 싶니?"
"글쎄..."
정말 '글쎄'였다.항상 최선을 다해 살았던 요한이었다.
진지한 자세로 삶을 대하고,후회없는 삶을 엮어가기 위해 애를 쓰던 그였었다.
그런만큼 그는 방황할 때도 그 방황에 철저했고, 결단은 분명했으며,
그리고는 홀가분하게 훌쩍 신학교를 떠나갔던 그였었다.

그런데 이제는 많이 변했다.
'결다'과 '확신'이라는 두 단어가 그의 원래 이미지였다면
지금은 '엉거주춤'이 그의 별명이 될 것 같았다.
여전히 밝고 활달한 모습이었지만,뭔가가 부족하였다.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허전함이 있었다.

요한은 나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겪고 있는 방황과 혼돈을 그는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술상을 치우고 잠자리에 들 때, 그가 한 가지 질문을 하기는 했다.
"지금도 그곳 분위기는 여전하니? 약간 오만하고,위선적이고,아집에 싸인듯한,
그리고 때로는 독단적인 흑백논리하며... 행동보다는 말이 더 많고, 본질적인
문제는 접어두고 절차에 대한 토론이 길고, 또 원칙적인 문제를 따지는 일이
많고, 결과보다 원인에 더 관심갖고, 신앙보다는 신학이 더 우위를 차지하는
그런 분위기는 아직도 여전하니? 분위기라는 표현보다 고질적인 병폐라고
표현하는 게 더 낫겠구나."
나는 대답대신 웃었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내가 궁금해 한 건, 요한의 말투였다.
그런 식으로 신학교를 바라보고 문제를 제기하는 그의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밤, 창밖에서는 또 다시 빗줄기가 후두둑 떨어지며 바람이 창을 흔드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자이로스코프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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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좀처럼 개이지 않았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요한부부는 일 나가고, 현경이도 어딜 갔는지 집 안이 조용했다.
나는 방바닥에 길게 누워 빗소리를 듣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잠에서 깨어보니 현경이가 옆에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잠에서 깬 기척을 듣자,그녀가 책에서 눈을 떼며 말을 걸어왔다.
"저...자이로스코프가 뭐예요?"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자이로스코프를 생각했다.
어뢰,선박,미사일 등의 관성유도장치로 사용되어 일정한 방향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라고 떠듬떠듬 설명하자,그녀가 또 물었다.
"근데...왜 오빠에게 자이로스코프가 필요하지요?"
"방향을 잃었다는 거겠지..."
"방향?"
"그것말고도,많이 잃었기 때문에..."
"그래서...이렇게 비 오는날 낮잠만 자는 거예요?"
나는 쓸쓸하게 웃었다.
"잃은 걸 되찾으려고...여기 온 거예요?"
"......"
"그 잃어버린 이야기 좀 해 주세요."
현경이가 몸을 돌려 옆으로 누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빗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제가....그 잃어버린 걸 찾는데 도움이 될 수는 없을까요?"
"......나한테 현경이 피신처가 되어줄 힘만 있다면..."

이 비는 대체 언제 그칠까...
우리 두 사람을 작은 방 안에 가두어놓고,
온 세상은 빗소리로 가득차고 있었다.

문득,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면,이렇게 빗소리나 들으며
현경이와 마주보며 누워있는 이 아늑한 느낌을 계속 내 것으로 할 수 있다면...
하는 막연한 소망같은 것이 가슴을 따뜻하게 하면서,
나는 다시 서서히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현경의 눈빛이 포근하다고 생각하며...빗소리는 자장가가 되었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자이로스코프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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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자 비가 잠시 멈추는 듯 해서,현경이와 함께 바닷가로 나갔다.
방파제 위에서 아낙네들이 산낙지와 해물들을 팔고 있었다.
우리는 구름이 짙고 낮게 덮인 바다를 바라보며,
산낙지를 안주로 해서 소주를 마셨다.
그녀는 술을 잘 하는 편이 아니었다.
소주 몇잔에 어지러워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방파제 끝으로 걸어갔다.

방파제 끝에는 등대가 서 있었다.
우리는 등대 벽에 기대고 서서 먼 수평선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술기운에 얼굴이 붉어져 있었고,
바람에 머리카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었다.

"저 바다에 누워...외로운 물새 될까..."
언젠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던 노래를 작은 소리로 흥얼거리던 그녀가
노래를 갑자기 멈추더니 말했다.
"저 바다에 누워서 자고 싶어요."
"......?"
나는 그녀가 술김에 바다로 뛰어들까봐 긴장하였다.

"바다가 포근해 보여?"
"이젠 정말 쉬고 싶어요."
그녀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턱을 고이더니,한숨을 쉬었다.

하염없이 바다를 보던 그녀가 나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제가 바다로 뛰어들면,건져주실 거예요?"
"난 헤엄을 못치니까,뛰어들기 전에 말려야겠지..."
"인공호흡은 할 줄 알아요?"
"......?"

내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가 닿았다.
현경의 입술이 탐스럽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며,
나도 그녀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가을바다가 가득 들어있었다.
나는 현경의 얼굴을 내 쪽으로 돌리게 하고선 얼굴을 마주대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이제 그녀의 눈 속에는 내 얼굴이 가득 들어있었다.

백사장 한쪽 끝, 절벽 위에 초라한 천막을 친 찻집을 발견하고,
우리는 거기 들어가 잠시 쉬기로 하였다.
바다가 보이는 쪽에 자리를 잡고 나란히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백사장에도, 찻집 안에도 다른 사람은 없었다.
커피를 내 온 찻집의 아가씨는 무슨 책인지 열심히 읽고 있었다.

천막 틈으로 바닷바람이 스며들어오는 찻집 안에
첼로 협주곡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바람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문득 현경이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내가 현경의 피신처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어깨에서 쉬고 있는 한 영혼을 위해 나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날이 저무는 바다 위를 물새 두마리가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듯,
어디론가 나란히 날아가고 있었다..

 

 제  목 : 자이로스코프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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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밤에 마신 술기운이 덜 깬 요한과 내가 그냥 잠자리에서 뒹굴고 있을 때,
부엌에서는 두 여인이 달그락거리며 아침식사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두 사람은 계속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끔씩 명랑하게 웃곤 했다.

누은 채로 담배를 피워 물던 요한이 말을 건넸다.
"현경이가 너를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어떻게?"
"내 아내와 내가 처음 만나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그때 아내가 날 바라보던
그 눈빛."
"이젠 전문가가 다 되었구나"
"사랑하지?"
"누가?"
"너."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건가?"
"그럼."
"난 그녀에 대해서 아는게 하나도 없어."
"나도 내 아내에 대해서 아는게 별로 없어.신비이지."
"그런 뜻이 아냐."
"마찬가지야."
"......"
"속일 수 없어.분명해."
"......"

요한은 마치 고해성사를 주는 사제처럼 물었다.

"어떻게 할래?"
"뭘?"
"현경이를..."
"뻔한거 아냐?"
"어떻게?"
"그냥, 서로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
"그렇게 될까?"
"되겠지...되도록 애써 봐야지."
"하지만,현경이는..."
"가슴아픈 추억이 되겠지."

요한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잔인한 이야기야."
"슬픈 이야기지."
"사랑이라는 걸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말아..장난처럼..."
"현경이가 정말 날 사랑한다면, 나를 그냥 이대로 놔두겠지.내가 나의 길을
계속 가도록...그 길이 아직 어떤 길인지 혼란스럽긴 하지만..."

요한이 나를 뚫어지듯 바라보았다.

나는 혼자 중럴거렸다.
"어차피 바위섬엔 파도가 계속 부딪쳐오겠지.그냥 의연하게 바위로 남아 있거나,
잘게 부서져서 파도에 섞여 버리거나,여러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겠지.
하지만 바위섬이 잘게 부서져서 파도와 섞여 버리면,등대는 어디다 세우지?"
"......"
"그래도, 좀 괴로울거야.아니, 지금 난 괴로워..."

       (다음에 계속)

 

 제  목 : 자이로스코프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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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터미널까지 전송나오겠다는 걸 굳이 사양하고,우리는 그의 집 대문에서
그냥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나를 떠나 보내는 요한의 표정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살짝 스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웃으며,서로의 행복을 빌며,어깨를 토닥거리며 그렇게 헤어졌다.

버스가 한 대 새로 들어오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로보트를 몰고 다니다가 나에게 막히자 길을 비켜 달라고 요구하던
꼬마아이도 자기 엄마인듯한 젊은 부인의 손을 잡고 줄에 서 있었다.
다른 손으로는 로보트를 꼭 쥐고 있었다.
자기 주인의 손에 잡힌 로보트는 더 이상 붕붕거리지 않았다.
꼬마아이가 버스에 올라탔다.버스가 떠났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전,이제 ㅊ읍의 친구에게로 가겠어요....어디로 ...가실건가요?"
"학교로...돌아가야지."
"신학교?"
"응"
"잃었던 건 찾았나요?"
"아니"
"그럼,체념?"
"내가 헤메고 다녀도,그건 여전히 그대로 놓여 있을거야."
"그대로 놓여 있으면 뭘해요?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데"
"미련스럽게 밖으로만 돌아다니며 찾다가는 아예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다는
는 생각이 들었어. 알아내고,찾으러 다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느끼고
깨닫는 것이라는 걸 현경이가 가르쳐줬어."
"제가요?"
"......난,...돌아가겠어."

현경이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바보..."

            (다음에 계속)

 

 제  목 : 자이로스코프.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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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오빤 바보야"
"응?...왜?"
바람이 갑자기 불어와 두 사람을 휘감고 지나갔다.
나는 정말 바보처럼 그녀에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오빤,목적지 없는 미사일 같아.어디로 날아갈지,날아간 다음엔 어떻게 할지
알지도 못한 채 자꾸 날아가려는,아주 위험한 미사일이야,그것처럼 위험하고
어리석은 건 또 없어!...바보"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빗소리만 더욱 크게 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빗소리만 듣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 미사일은...애초부터 목적없이 발사되지는 않았어.만일 목적도 방향도 다
잃어버렸다고 해도, 아직 기회는 있어.그리고,또...아무 대책없이 혼자서
날고 있지도 않아."
현경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자이로스코프..."
우리의 시선이 서로 부딪혔다.

나는 더이상 빗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점점 커져가는 빗소리,바람소리,그리고 비안개에
더욱 흥건히 적셔지고 있었다.

그녀의 타는 듯한 시선이 나에게서 떠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버스가 들어왔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경이도 따라 일어났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작고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었다.
현경이의 눈이 젖어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야위고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가 내 손바닥에 작은 종이쪽지를 쥐어주었다.
그녀의 주소와 전화번호였다.
다시 한 번 그녀가 싱긋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버스를 향해 걸어갔다.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뒤돌아보고 싶은 걸 참고 그대로 버스에 올랐다.
비안개처럼 서글픔이 밀려왔다.
자리를 잡고 앉아 멍하니 창 밖의 빗줄기만 바라보았다.

갑자기 누군가가 버스 밖에서 유리창을 두들겼다.현경이었다.

"오빠, 이 우산 가져가세요.이젠 비 맞지 말아요..."
그녀가 차 안으로 들이미는 우산을 얼떨결에 받아들자,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빠른 동작으로 대합실 처마 밑으로 되돌아간 그녀가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끝---------

 

 제  목 : 어설픈 소설가의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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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 시절에 써서 신학교 교지에 실렸던 소설 두편을
이제 다 올렸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읽어준 몇몇 분과..격려해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혼자서 이 공간을 독점하다시피 했는데도
참아주신 다른 분들께도 미안하고,고맙습니다.

첫번째 소설은 신학생들의 삶에
두번째 소설은 신학생들의 고민에 촛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세번째 소설은...언제일지 모르지만...
신부로서의 삶과 고민에 촛점을 맞출 것입니다.

신학생들과, 신부들을 사랑하는
세상의 모든 현경이를 생각하면서...

익산에서 송영진 신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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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세번째 소설을 올리며...
 검색어 :
 올린이 : syj1212 (송영진  )   99/06/08 13:29   읽음 : 12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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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거울을 보니 산적 두목처럼 수염이 길게 자랐습니다.

이틀동안 면도를 안했더니..

왜냐구요? 소설땜에...

쓸 때는 무지 힘들었는데...완성하고 보니 아주 짧군요...참..내..

소설 쓴다고 사목을 소홀히 하지는 않으니 걱정마시고,

그냥 묵상소재로나 삼아주십시오. 쑥스럽군요...

 


 제  목 : 미성년자 관람 불가 소설?????
 검색어 :
 올린이 : syj1212 (송영진  )   99/06/08 13:33   읽음 : 1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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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분한테 미성년자 관람 불가 소설이 될 것 같다는 농담을 했는데..

올리기 전에 다시 읽어보니까,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군요..

혹시 그런 느낌이 드는 대목이 있다면 일종의 상징으로....

소설기법상 들어간 대목으로 이해하시고...

또 혹시 신부님의 실제 체험담 아니냐고 묻지 마시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지만,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할지는 읽는 사람 마음이지요.

소설이라기 보다는 성서묵상 정도로 받아들여도 ......

그냥 재미로 읽어도 그만이고...

그럼 이제 올리겠습니다.

 

 제  목 : 아이구 이런 죄송합니다...
 검색어 :
 올린이 : syj1212 (송영진  )   99/06/08 13:41   읽음 : 1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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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긴 경우에 토막이 나면서 글자가 없어지는군요...

편집기에 들어있는 글들의 문장을 짧게 다시 잘라야 하겠습니다.

잠시 후에 그 작업이 끝난 다음에 올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목 : <소설>성당의 밤.1.
 검색어 : 소설
 올린이 : syj1212 (송영진  )   99/06/08 14:18   읽음 : 17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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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성당의 밤.1.송 영진


      성당의 밤

                      송 영진


 일요일 낮

강론이 길어진 탓에 미사도 그만큼 늦게 끝났다.
제의방에서 제의를 벗으며 창 밖을 보자,눈송이가 바람에 날리는 것이 보였다.
성탄절엔 전혀 내리지도 않던 눈이,성탄절 지나고 나니 자주 내리고 있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잠시 눈 내리는 모습을 보다가 제의방을 나서자,
벌써 많은 신자들이 성당을 나가고 있었고,
일부는 통로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느라  어수선하였다.
성당을 둘러보다가 고해실 쪽을 보니,고해실 문 위 꼬마 전구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가 고해성사를 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고해실 안에 들어가 잠시 앉아 있으려니,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와서 짧은 고백을 하고 나갔다.
그저 한 두 사람 정도로 끝나겠거니 했는데, 할머니들이 계속 들어왔다.
늘 듣던 내용의 고백과, 늘 주던 보속이 반복되었다.
도대체 죄라는 것이 무엇일까.
전혀 죄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을 거의 습관적으로 고백하고,
그러면,또 기계적으로 사죄경을 외워주고...
마치,특별한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약을 찾고,
그러면 마음이나 편하라고 소화제와 영양제를 적당히 섞어서
무슨 특효약인냥 건네주는 것 같은,
그런 고해실의 일상적인 모습들...

귀로는 고백을 들으면서,
눈으로는 고해실 창 밖으로 눈송이들이 떨어지는 모습만 멍하니 보고 있는데,
이번엔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고백한지는 오래 되었구요..."

무척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얼마나 오래 되었길래요?"
"...한...몇년 된 것 같아요..."
"미사 참례는요?"
"......"

잠시 침묵.

"미사도..."
"예..."

그리고 다시 침묵.
나는 잠자코 기다리다가 재촉하듯이 말하였다.

"말씀하시지요."

젊은 여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몇년 동안 미사참례도 안했구요...하느님을...믿는 마음도 엷어졌고..."
"......"

"그리구...천주교에 대해 회의를 많이 품었구요..."

나는 오늘은 '왜요?'라는 질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잠자코 듣다가,짧은 훈화와 평범한 보속이나 주고 끝내고 싶었다.
얼른 고해실을 벗어나서,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눈 내리는 들판의 경치를 보면서 한가로운 오후 휴식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어쩐지 예사롭지 않은 사연을 지닌듯한,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나를 고해실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여인은 머뭇거리는 태도로 계속 말을 이었고,나는 커피 생각을 접어두기로 했다.

"저...그리고...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요."
"......?'

나는 목소리의 주인과 나 사이를 막아놓은 하얀 천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를 향해 천천히 말했다.

"사랑이...사랑한다는 것이 죄는 아니지요."
"......"

또 다시 침묵.
이러다가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사랑말고...무슨 죄 될 일을 하셨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그분은..."
"...예..."
"그분...사랑해선 안 될 사람이거든요."

이번엔 내가 침묵을 지켰다.
이럴 때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도록 놔두고,
나는 그것을 말없이 경청하기만 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였다.
그러나,내가 침묵 속에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 여인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그분도,자매님을 사랑하십니까?"
"......"

이 침묵을 긍정으로 보아야 할까? 부정으로 보아야 할까?

"하지만..."
"......"

"하지만...너무 힘들어요..."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의 목소리에 흐느낌이 섞여 있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고해실에서 흐느끼며 우는 일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사랑해선 안될 사람이라면...대체...어떤 사람이길래..."
"그분의 직책이...아니...신분이..."

울먹이는 여인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자주 듣던...,아니 어쩌면 정말 귀에 익은 목소리와 말투 같았다.
그러나 선뜻 누구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웠다.
여인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목소리와 말투를 감추려고 애쓰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도 들었다.

여인이 계속 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사랑이 죄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아무래도 그분이 저 때문에..."

여인의 중간중간 생략되는 말들이 무엇인지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은,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아름답다.
더욱이 손이 닿지 않을만큼 멀리 있는 사람을 애타게 사랑하는 사람은,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더욱 아름답다.

웅성거리던 성당의 소음이 점점 줄어들더니
고해실 밖은 마침내 정적 속에 잠겼다.
이제 신자들은 모두 다 집으로 돌아가고 성당이 텅 빈 것 같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고해실 안에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어떻든 사랑이 죄는 아니지요.
...하지만...너무 집착하지는 마시고..."

그리고 나서 더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더 이상 길게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 세상에 사랑해선 안될 사람이란 없는 법이다.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고해실 문을 나섰을 때,
성당 안에는 할머니들 몇이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만 보일 뿐,
젊은 여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성당 마당에는 발목까지 빠질만큼 하얀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성당의 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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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의 밤.2.

 일요일 저녁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생각했다.

어느 군부대에서,성탄절을 맞아서 연애편지 경연대회를 열었다.
부대장은 사병들에게,
애인에게서 온 편지에 '사랑'이라는 말이 제일 많이 적힌 사람에게
포상휴가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사병들은 애인들에게 그 사실을 연락했고,
애인들은 사랑이라는 말을 가능한 많이 적어서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몇십장의 종이에 사랑한다는 말만 가득 적어 보내기도 했다.
드디어 한 사병이 뽑혀서 포상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그가 받은 편지는 한 귀절만 간단하게 적혀있는 편지였다.

"내리는 눈송이마다에 사랑을 적어 보냅니다."

눈이 내려 쌓이는 마당을 보면서,
내일 새벽미사에 올 신자들을 위해서 눈을 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힘들게 눈을 치워야 할 사람에게는,눈 내리는 경치가 마냥 낭만적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커피 향기가...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소리가...
그리고 낮에 들었던 그 여인의 목소리가 눈송이처럼 가슴에 쌓이고 있었다.

과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말이 논리적으로 맞는 말일까...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없다.
결혼할 수 없는 사랑이 있을 뿐이다.
사랑이란, 종점에서 내리기 위해 준비하는 여행이 아니다.
종점에 도착했다고 해서 여행을 멈추면 사랑은 끝난다.
사랑이란 하나의 과정,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바람에 가볍게 날리며 느릿느릿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날카롭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놀라 일어나 보니,
눈은 멎어 있었고, 아직 오후시간인데도,
잔뜩 흐린 날씨 탓에 벌써부터 어둠이 방 안으로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병자성사를 청하는 전화였다.
몇달째 병자 봉성체를 다니던 노인의 집이었다.
이제 그 노인의 상태가 위험해 보인다고,
노인의 며느리인지 딸인지 무척 당황하고 허둥대는 목소리였다.
곧 가겠다고 말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눈이 얼마나 쌓여있을지가 걱정되었다.

병자성사 가방을 챙겨들고 나서려는데, 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엔 요한 부인의 전화였다.
오랫만이다,잘 지냈냐,그런 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고 간 후에 그녀가 말했다.

"저,혹시 우리 그이한테서 무슨 연락이 없었어요?"
"요한이요?...아니요,왜요?"
"현경씨를 만나러 간다고 나갔는데, 너무 늦도록 연락도 없고...
무슨 일 생긴 것만 같고..."
"현경이가 거기 갔었어요?"
"아니,온게 아니라, 오려는걸 그이가 말리고, 만나러 나갔거든요.
여기도 위험하고 그래서..."
"위험이라..."

요한이 운영하는 서점이 얼마 전에 압수수색 당했던 일이 기억났다.
사회과학 서적들을 몽땅 압수당하고, 요한도 한동안 곤욕을 치루었다고 했다.

"얼핏 듣기로는, 신부님 계신 곳으로 현경씨를 보내려던 것 같던데...
현경씨는 만나셨어요?"
"현경이도 못 만났는데...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요즘 뉴스에 자주 나오는...그 단체 있잖아요.
계속 지명수배되고 구속되는 사람들..."
"아,그거...무슨 반국가단체라나 뭐라나 꽤 긴 이름이었는데...
요한이가 거기 관련되었습니까?"
"아뇨, 우리 그이보다는 현경씨가요...
관련된 정도가 아니라,핵심멤버였거든요. 지금 수배중이예요."
"...그랬군요..."

새삼스럽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현경이가 말해준 적은 없었지만...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아가씨였다.

"아침 일찍 터미널로 나갔는데...아직 아무 연락이 없네요."
"그래요...아마 날씨가 이래서 길이 막힌 거겠지요...
혹시,무슨 연락이 오면 전화드릴께요."
"그럼,전화 끊을께요."

그녀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신문이나 TV뉴스를 건성으로 본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회주의 무슨 동맹이라는 긴 이름의 지하단체와 현경이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단체 회원들을 다 잡아서 사형이라도 시킬 것 같던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던 뉴스에 짜증이 나서 TV를 꺼버렸던 기억이 났다.

어떻든, 나에게는 죽음을 앞둔 노인이 현경이나 요한의 안부보다 더 급했다.
마음이 급해서, 서둘러 방문을 잠그고 나서는데
마루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현경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을까...
그녀는 마루 기둥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지치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녀 곁에는 조그만 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가만히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그녀가 눈을 떠 올려다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왜 이러고 있어? 들어오지 않고..."
"불러도 아무 기척이 없길래...잠깐 어디 가신 줄 알았어요."

내가 소파에 앉아 잠든 사이에 온 모양이었다.

"언제 왔는데?"
"조금 아까요."
"들어가자."

현경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손이 차가왔다.

방에 들어가 불빛 아래에서 본 현경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무척이나 지치고 남루한 모습이었다.

"커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커피를 타며,
혹시 아까 낮에 고해성사를 본 그 젊은 여자가 너였느냐고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지금 눈 앞의 현경의 모습과,
그녀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 젊은 여인의 고백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목소리와 말투가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현경이인지 아닌지를 바로 알아차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의 둔감함과 무심함이 한심할 정도였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 현경이에게 미안해 하며 말했다.

"근데,어쩌지? 나 지금, 병자성사 주러 가야 하는데...저녁, 아직 안먹었지?"
"다녀 오세요.기다릴께요."
"그 집이 멀어서 좀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괜찮겠어?"
"전 괜찮아요..."
"그럼 이따가 같이 저녁 먹자."
"지금 길이 온통 빙판이예요. 차는 두고 가세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전거로 가세요."

자전거로 가기엔 너무 먼 곳이었다.
그러나 체인도 미처 준비하지 못한데다가,
눈만 오면 시내버스도 끊기는 고갯길을 넘어가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노인의 아들과 며느리가 노인을 지키고 있었다.
노인은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누워 있었다.
이미 저승에 한 발 들어선 것일까...그 얼굴에 죽음의 공포가 서려있다고 느꼈다.
격식을 차릴 여유도 없이
영대와 성수병과 성유를 차례로 꺼내들고 즉시 시작하였다.

마지막 안수기도를 하기 위해 노인의 머리에 손을 얹을 때까지도
노인은 아무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병자성사 예식이 다 끝났지만,그냥 일어서지 못하고,잠시 노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묵묵히 노인을 내려다 보다가 무슨 이야기든 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노인의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마음 편히 먹고, 이제 하느님 만날 준비 하세요.
...이제 좋은 곳으로 가실거예요."

노인이 내 말을 알아듣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 걱정 마시고...우리가 할아버지 위해서 기도했어요."

노인의 손에 갑자기 힘이 주어졌다. 노인이 내 손을 꽉 잡았다.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노인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노인의 표정이 밝아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여전히 겁먹고 초조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일어서서 나오며 아들에게 성당 전화번호와 애령회장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일렀다.

"일이 생기거든, 바로 연락주세요."

아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하나의 관문일 뿐이라고 했다.
누구나 거쳐 가야 할 문, 결코 마지막일 수 없는 문,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지막이다, 다 끝났다고만 생각하는 문...
병자성사 줄 때마다, 임종을 앞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남은 가족들을 위로하기가 왜 그렇게도 어려운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숨을 거두기 전에, 일생동안의 죄를 총고백하고
홀가분한 모습으로 임종을 맞기도 하였다.
그런 때의 병자성사는
마치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하는 축복기도 같은 느낌을 주었다.
여행...어차피, 우리는 여행 중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주는 세례성사와,
저 세상으로 떠나갈 사람에게 주는 병자성사는 결국 같은 것이 아닐까...
여행의 출발점에서 새로 시작할 여행을 위한 축복기도로서...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성당의 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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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의 밤.3.


  일요일 밤

돌아오는 길은 더 멀게 느껴졌다.
완전히 어둠에 잠긴 시골길, 인가도 없고,
가로등도 없이 눈에 덮인 밤길을 자전거로 달리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바람까지 차가왔다.

사제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식탁에 따뜻한 밥상이 차려져 있고, 화장실에서는 물소리가 들렸다.
내가 오기를 기다리며, 현경이가 저녁식탁을 차려 놓은 것이었다.
세상의 남편들이 퇴근 후에 집에 들어서면 이런 기분일까...
저녁 식탁을 준비하고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의 모습은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식탁의자에 앉아서 현경이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마치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직장에서 퇴근하고 온 남편같은 기분에 잠겼다.
다른 때 같으면,
불꺼진 캄캄한 사제관을 들어서기가 싫어서 괜히 마당에서 서성거리다가,
방에 들어와서는 멍하니 앉아서 적막감을 달랬을 것이다.

화장실에서는 계속 물소리만 들리고 아무 기척이 없었다.
샤워 중인가...그러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싶었다.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너, 안에 있냐?"

아무 대답이 없었다.
화장실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사제관 마루 밑에 현경의 낡은 운동화가 놓여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현경이가 화장실 안에 있는 것은 분명했다.
문을 더 세게 두드렸다.
그래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서랍에 넣어둔 화장실 열쇠를 급히 찾기 시작했다.
평소에 잘 쓰지 않던 열쇠라서 맞는 것이 어떤 건지 알 수 없었다.
열쇠 꾸러미를 전부 들고 와서, 하나씩 꽂아 보기 시작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는 것이 먼저 보였고,
그리고 문 뒤에 현경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놀라서 현경이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현경이는 수건을 머리에 감은 것 말고는 전혀 옷을 입지 않은 알몸이었다.
아마도 샤워를 하고 나서 빨래를 하던 중이었던 것 같았다.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현경의 모습에 마음은 급했지만,
그녀의 알몸에 손을 대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현경이를 안아 들고 방으로 가서 침대에 눕혔다.
밝은 불빛 아래,
길게 누은 현경이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알몸이 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이불을 덮어주고 나서,
그녀의 심장이 뛰는지 확인하려고 무심코 가슴에 손을 대었다가,
현경의 젖가슴이 만져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 이불 속에서 손을 빼고 말았다.

다시 현경의 손목을 잡고는 맥을 찾아 짚어보았다.
가늘고 약하기는 하지만, 고르게 뛰는 맥박에 일단은 안심을 하였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당황하지 말자 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들은 풍월대로 양주를 한 모금 먹여야 하나...
다행히 먹다 만 양주가 조금 있었다.
양주병을 꺼내다가 우황청심환이 생각났다.
액체로 된 우황청심환 병을 찾아내서,
현경이를 안아 일으키고, 입에다가 조금씩 흘려 넣었다.
입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보다는 입 밖으로 흘러 내리는 게 더 많았다.
그녀를 다시 눕히고는 입가에 흘러내린 청심환 액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기 보다는 편안하게 잠든 것 처럼 보였다.
나는 현경의 손목을 잡고 맥박 뛰는 곳을 짚은 채로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아직도 저 우산을 갖고 계시네요..."

언제던가...이곳에 본당신부로 부임한 것을 축하한다면서,
분말세제며, 화장지 등을 사들고 찾아온 그녀가
옷장 위에 올려 둔 우산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녀와 헤어져 신학교로 돌아가던 날,
더 이상 비맞으며 다니지 말라고 건네준 그녀의 우산을
나는 이삿짐 쌀 때마다 잊지 않고 챙겨 갖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정작 비 오는 날엔 그 우산을 쓰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을 그냥 옷장 위에 모셔두기만 하였다.

그녀는 다정한 친구처럼, 동생처럼,
어떤 땐 남 몰래 숨겨놓은 연인처럼 가끔씩 찾아오곤 했었다.
오면 그저 함께 식사하고, 음악 듣고,
일상적인 평범한 이야기나 나눌 뿐이었다.
어디에도 지하단체의 여전사 모습은 없었다.
점점 더 성숙해지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만 보였을 뿐,
정부전복을 꾀하거나 체제를 부정하는
반국가,반민족 극렬분자의 모습은 아니었다.
언제나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긴 머리를 날리면서 찾아와서,
내 방에 온통 그녀의 향기를 남겨놓고는
언제 다시 오겠다는 약속도 없이 가버리던 그녀였다.
자주 오는 것도 아니었고,
와서는 자기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하려 하지 않고,
나도 묻지 않았다.
그녀를 오랫동안 못보게 되어 내가 궁금해 할 때쯤 되면
그녀는 천연스럽게 나타나곤 했지만,
이렇게 도망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언제 눈을 떴는지 현경이가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몹시 기운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물어보고 싶은걸?"

내가 반문하자.그녀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일어나 앉으려 하였다.
그러자 이불이 흘러내려서 그녀의 하얀 젖가슴이 드러났다.
그녀는 '어머' 하고 놀라며 가슴을 가리고는
이불을 뒤집어쓰며 도로 누워버렸다.
자기가 옷을 입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와서 보니까,현경이가 화장실 안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길래...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변명하듯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얼굴만 조금 내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제 옷 좀 가져다 주실래요?"
"옷?...잠깐만...가져다 줄께."

그녀는 다시 이불 속으로 숨어버렸다.
화장실로 가서 그녀의 속옷을 찾아 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세탁기를 멈춘 다음 들여다 보니,
물 속에 내 옷가지들과 현경의 속옷이 함께 엉켜있었다.
세탁기를 계속 돌릴 수 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화장실 벽에 걸려있던 그녀의 겉옷들만 들고가서 그녀에게 물었다.

"속옷...갈아입을 것...가방 속에 있어?"
"없어요."
"갈아입을 옷도 없이 빨래를 하려고 했단 말야?"

그녀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거라도 주세요."

옷을 건네주자 받아들고는 이불로 몸을 감싼 채 힘들게 일어나 앉았다.

"저...잠깐만 비켜 주실래요?"

나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보다가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 한 가운데 서서,
밤하늘에서 한 송이 두 송이 눈이 내리는 것을 올려다 보았다.
얼굴에 와 닿는 눈송이들이 시원하였다.

현경이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말했다.

"다 됐어요.들어오세요."

방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옷을 다 입고 침대에 걸터 앉아 있었다.
나하고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의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숙여 외면하였다.

"일어나지 말고 그냥 누워있어...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괜찮아요...며칠동안 잠을 제대로 못잔 것 뿐이예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묻는 말에 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수줍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배고파요."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성당의 밤.4.

  성당의 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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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몇 술 뜨지도 않고서 숟가락을 내려 놓았다.
얼굴이 해쓱해 보였다.

벌써 한 달째 피해 다닌다고 했다.
형사들이 어떻게 알고 추적하는지,
한 곳에서 이틀 이상 머물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짐작할 만 하였다.
돈도 없이, 갈아입을 옷도 물론 없이,
사람들 눈을 피해 숨어 다녀야 하는 숨가쁜 시간들이었다.

"이제 그만 자수할까봐요."
"......"

"가족들, 친구들이 저 때문에 고생을 너무 많이 해요."
"곧 있으면 정권이 바뀔텐데..."
"정권이 바뀔 가능성이나 있나요? 또,바뀐다고 해도 달라질 게 있을까요?"

그녀의 눈이 번쩍 빛을 쏘았다.

"달라지겠지..."

 내 목소리가 나에게도 자신없게 들렸다.

"근데...그 TV뉴스는 어디까지가 사실이야?"

현경이 피식 웃었다.
나는 갑자기 그녀 앞에서 초라해지는 것을 느꼈다.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그거 다 거짓말이예요. 다 조작이라구요."
"물론, 그럴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런 단체는 있지도 않아요. 우린 단체 같은 건 만들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모임은 있었잖아."
"무슨 강령이니, 선언문이니,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모여서 토론이나 하고 그랬을 뿐이예요."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기운없어 하던 현경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사랑의 아픔에 울던 고해실의 젊은 여인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현경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요한 부인의 말로는...현경이가 지도부의 핵심멤버라던데..."
"지도부는 무슨...후배들과 토론 몇번 한 것 뿐인데..."
"정권유지를 위해서 희생양이 필요했던 건가?"
"그런다고 정권이 유지될까요?"
"한 번 잡으면 내놓기 싫은게 그거니까...그래도 정권 말기이고...
아직,희망은 있어."


"근데...요한이는 만났었어?"
"아뇨...못만났어요...아마 검거됐겠지요."
"요한이도 같은 단체였나?"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사랑이 죄가 되는 세상이구나."

내가 요한의 이야기를 듣고는 탄식하자 현경이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몸에서 다시 기운이 빠지는 듯 했다.

"자기들이 정해놓은 방식대로가 아니면,
사랑이든 뭐든 다 죄라고 하지요...그건 천주교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점도 있긴 하지..."
"친동생이 아니라는 걸 신자들이 알았다면,
전 여기 드나들지도 못했을 거예요."

현경의 화살이 엉뚱한 데로 향하고 있었다.

"친동생으로 알고 있었으면서도, 신자들,...
그 사람들... 그런데도 계속 곱지 않은 시선들이었어."
"얼마나 눈치 보였는지 몰라요
...정말,신부님을 사랑하는 게 그렇게 큰 죄인가요?"

현경의 따지듯 묻는 말에 내 눈이 커졌다.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 나오는 걸 듣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날...사랑했었어?"

현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원망이 가득 담긴 듯한 눈빛이었다.
다시 한 번 더 물어보려다가,
스스로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멈추었다.
빨래를 꺼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현경이가 자기가 하겠다고 일어서더니 비틀거렸다.
놀라서 그녀를 부축하자 쓰러질 듯 몸을 기대었다.

"어지러워요."
"우선...침대에 가서 누워라. 안되겠다."

그녀는 순순히 내 팔에 기대어 따라왔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채 그녀가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나는 그녀의 어깨까지 이불을 잘 덮어주면서 혼잣말 하듯 대꾸하였다.

"민주화도 좋고,운동도 좋지만..."

그러자 현경이가 감은 눈을 뜨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내 몸 생각하며 일하다가는 일 못해요."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빨래 건조대를 꺼내서 펼쳤다.
이 작은 사제관에 빨래 건조대를 놓을 곳은 침대 옆 공간 뿐이었다.
세탁기에서 빨래들을 꺼내어 널기 시작하는데
그런 내 모습을 현경이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빨래를 널다 보니 현경의 속옷도 널게 되었다.
내 옷들 가운데에다가 그녀의 옷을 널면서,
또다시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바로 마를거야..."

그녀와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그녀가 누워있는 곁에 걸터앉았다.
현경이가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더니 내 손을 잡았다.
손이 뜨거웠다.

그녀는 밤새 신음소리를 내며 앓았다.
내 품 안에 날아와 지친 날개를 접고,
내 곁에서 쉬고 있는 한 마리 작은 새...
현경이가 나에게서 안식처를 구하고,
나를 보호자로 선택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작은 성당에서 혼자 지내는 내 모습이 딱하다며,
자상하게 이것 저것 누나처럼 챙겨주던 현경이었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는 올 때마다 빨래를 말끔하게 해 놓거나,
별미를 만들어서 영양보충을 시켜주기도 하였다.

사제관에 아름다운 처녀가 드나드는 것을
신자들이 예사롭게 보아 넘길 리가 없어서 늘 조심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신자들은 현경이를 내 친동생으로 알고 있었다.

"동생분이 신부님하고 많이 닮았네요."

신자들 말에, 처음엔 동생이라니? 하며 어리둥절하다가
현경이를 가리킨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예 하며 얼버무리며 넘어갔었다.

"신자들이 동생하고 오빠가 많이 닮았다고 그러더라."
"어,그건 나한테는 욕인데..."

내 말을 듣더니 현경이가 농담을 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녀는 친동생처럼 스스럼없고 자연스러웠다.
게다가 그녀는 진짜 친동생이 아니면 알 수 없을
그런 내 어린 시절의 일들까지도 알고 있어서,
신자들은 그녀가 내 친동생이 아닐거라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대체 내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었냐?"
"당연히 어머니한테 들었지요..."

언제 또 어머니하고는 친해졌을까?
현경의 수완에 놀랄 뿐이었다.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 살고 계시면서
아들 얼굴도 자주 보지 못하는 어머니와,
역시 가끔씩 찾아오는 현경이가 사제관에서 마주치는 일이 드물어서
친해질 기회가 없었을텐데,
언젠가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모습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같기도 하고, 친정어머니와 딸 사이 같기도 하였다.
나보다 더 어머니를 자주 찾아뵈었던 것이었을까...

"어머니한테 효도 좀 하세요. 기다리시던데..."
"거긴 또 언제 갔었어?"
"지나는 길에 들러서 인사드린 것 뿐이예요. 나 예쁘죠?"
"참, 나 원..."

현경이가 사제관에 오래 머물러 있다가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저, 왔어요."

하고 불쑥 들어서서는, 먼저 빨랫감을 확인하고,
그 다음엔 냉장고를 열어보고,
어질러져 있는 방을 치워주는 것이 정해진 순서처럼 일정했다.

"어휴...홀아비 냄새..."

현경이가 창문을 열어젖혀 환기시키면서
청소하고 빨래하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동안
나는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며 내 할 일을 하였다.
나는 그녀가 나타나면,

"왔냐?"

한 마디 던지고,
기껏해야 커피를 타주는 정도가 그녀를 반겨 맞는 내 태도의 전부였지만,
무심하고 무뚝뚝하기까지 한 나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늘 한결같았다.
물론 가끔은,

"누가 신부님을 좋아해서 이러는 줄 알아요? 불쌍해서 그러는 거지..."

라고 토를 달기는 했지만......

현경이가 날 보고 싶어해서 찾아오든 불쌍하게 생각해서 찾아오든,
그녀는 올 때마다 사제관을 환하게 바꿔놓았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성당의 밤.5.

         성당의 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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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갔다.
밖에선 소리없이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찬 물수건을 현경의 이마에 얹어주거나,
갈증을 느끼며 물을 찾는 그녀에게 한 잔의 물을 갖다주며
옆에 앉아 있어주는 것이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간호일 뿐이었지만,
앓고 있는 그녀를 두고 잠들 수가 없었다.
나는 현경의 곁에서 밤새 그녀를 지킬 작정이었다.

현경은 바람이었다.
나는 들판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였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슬그머니 다가와서 가지를 흔들어 대고,
나무 그늘에 머물다가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리는 그런 바람이었지만,
들판에 혼자 서 있는 나무는 바람이 불면 잎사귀를 흔들어 반겨 맞고,
바람이 떠나면 침묵 속에서 하늘만 우러러 보며 바람을 떠나 보냈다.

그 바람은 나무를 뿌리채 뽑을 만큼 거친 태풍은 아니었다.
늘 기분좋게 살랑거리는 봄바람이었다.
빈 들판에 꽃향기를 퍼뜨리고, 나비가 날게 하고,
나른한 졸음에 취하도록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미풍이었다.

이제 이 바람이 오늘 밤 폭풍이 되었다.
한 순간 격렬하게 휘몰아치다가 갑자기 뚝 멎어버리기도 하는 돌풍이었다.

그녀가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을 보며, 형광등을 끄고, 작은 촛불을 켰다.
촛불 빛이 잠든 그녀의 얼굴을 평화스럽게 비추었다.
몇년 전,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결 더 성숙하고, 더 예뻤다.
방황하던 그 시절에 비하면, 이제는 자기 신념에 투철한,
뚜렷한 의지가 얼굴에 새겨져 있었다.
조금 야위어 보였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현경의 신음소리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잠들어 있는 그녀를 보며,
낮에 고해성사를 본 그 여자가 과연 현경이었을까 생각하였다.
그러고 보니, 현경이가 미사참례 하는 걸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 때마다 미사 시간을 피해서 찾아온 때문이지만,
다른 곳에서라도 미사참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손가락에 늘 끼고 다니는 묵주 반지 말고는
천주교 신자라고 할 만한 점이 없었다.

교회에 대해서 늘 냉소적이었지만, 드러내놓고 비판한 적도 없었다.
신앙과 종교에 대해서 자기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도 않았고,
자신의 애정관도 겉으로 드러나게 표현한 적이 없었다.

나는 현경이가 신앙에 회의를 품고 있는지 어떤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녀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게 누구일지 그것도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나 있는지,
어떤지도 짐작하지 못했었다.
현경이는 우리의 대화가 그런 쪽으로 흐를듯 하면
의식적으로 말머리를 돌리곤 했었다.

고해실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와 말투는
현경이의 목소리나 말투와 너무 비슷했다.
만일에 그 여인이 현경이었다면...그러면 그 대상은 나였을까...
아니면 누구 다른 사람이었을까...
그동안 너무 내 생각만 하며 살았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녀의 눈빛, 손짓,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기억해내려 애쓰면서
혹시 거기에 어떤 간절함같은 것은 담겨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였다.
늘 명랑하던 현경의 모습 어딘가에,
사랑의 아픔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이 숨어있었던 것은 아닐까...
표현해선 안되는 사랑,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동생이라는 위장 속에 감추었던 건 아닐까...

현경이를 본 것은 늦은 오후였고, 고해성사는 점심 때쯤이었으니,
그 여인이 현경이가 아닐 가능성이 물론 더 컸다.
지명수배되어 도피 중인 현경이가 고해성사만 보고 밖으로 나가서
오후가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낼 만한 장소는 이곳에 없었다.
목소리만으로 그 여인이 현경이일지도 모른다고 자꾸 생각하는 것은
나의 헛된 기대감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는 사이라면
고해성사는 현경이가 아니라 내가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랑해선 안될 사람이라는 말은 그녀가 나에게 할 말이 아니라,
내가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이었다.
늘 현경이를 무뚝뚝하게 대했으면서도,
현경이 마음 속에 내가 들어있기를 바란다면,그건 내 이기심일 뿐이다.
만일에 현경이 마음 속에 내가 있다면,
그동안 나는 현경을 너무 잔인하게 대한 것이다......

그 여인이 현경이가 아닌데도
나 혼자서 괜히 헛된 상상만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내 마음 속에 현경이가 자리잡고 있는 크기에 비해,
현경의 마음 속에 나는 아예 없을 수도 있었다.
현경이는 그저 나를 친한 친구나 오빠로서,
아니면 친한 신부님으로서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정말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여기에 가끔 들르는 것은,
나를 좋아해서라기 보다는 혼자 지내는 것이 딱하고 불쌍해 보여서
보살펴 주고 싶은 마음에서 그러는 것 뿐일 수도 있었다......

........................

밤이 새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미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현경이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나는 본연의 임무 수행을 위해서 몸을 일으켰다.
한 숨도 자지 않고 그녀 곁을 지킨 것 때문에 피곤하지는 않았다.
나 혼자만의 생각에 몰두해 있었던 것이 나를 더 피곤하게 하였다.

마당에는 더 많은 눈이 쌓여 있었고, 여전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성당의 밤.6.


     성당의 밤.6.


 월요일 새벽

오늘같은 날씨에 미사참례하러 올 신자들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가끔씩 신자들을 기다리다가
결국 혼자서 라틴어로 미사드리곤 하는 때가 월요일 새벽이었다.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올지 모르기 때문에, 미사 준비는 해야만 했다.
싸리비를 찾아서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한 두 사람 다닐 정도의 좁은 길을 내는데도 제법 힘이 들었다.
눈을 다 쓸고 돌아보면, 그 위에 도로 눈이 덮이는 일이 반복되었다.
시간이 다 되어 눈 치우는 일을 중단하고 성당에 들어가려는데,
마루 밑에 놓인 현경의 신발이 보였다.
너무 낡아서 이제 그만 버려야 할 정도의 운동화였지만,
그래도 여자 신발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신부 혼자 사는 사제관에 낯선 여자의 신발이 놓여있는 것을 신자들이 본다면...
나는, 현경의 신발을 잘 안 보이게 감추어두었다.
불필요한 오해는 피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미사시작 시간이 다 될 무렵,
눈을 하얗게 머리에 인 할아버지와 아줌마가 차례로 성당에 들어섰다.
정말 대단한 신앙이었다.
성가도 없고, 강론도 없는 새벽미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신자들은 미사가 끝나자 서둘러 돌아갔다.

나는 행여나, 현경이가 그 사람들 눈에 뜨일까봐 조마조마했다.
그녀가 낮에 들러서 머물다 가는 것과,
하룻밤을 지내는 것은 엄청나게 다른 일이었다.
그것은 사제의 양심으로도 해명될 일이 아니었다.
무조건 안되는 일이었다.
변명이 통하지 않는 매정함...
내가 예수님이라고 하더라도 신자들은 그런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함박눈이 나를, 현경이를, 아니 우리를 보호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날씨라면, 현경이를 추적하는 사람들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신자들도 사제관에 들르지 않을 것이다.

미사 전에 눈을 쓸어 길을 낸 곳에
다시 눈이 쌓여 언제 눈을 치웠는지 표시도 나지 않았다.

신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서둘러 사제관 문을 열고, 현경이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미사 집전 때의 경건한 마음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현경에 대한 걱정이 앞서고 있었다.
방을 들어서면서, 촛불을 끄지 않고 그냥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촛불이 밝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그리고,
현경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빨래 건조대 뒤에 서 있었다.
좀더 누워있지 왜 벌써 일어났느냐고 말하며 다가가다가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옷을 다 벗은 채였다.
나는 또 다시 본의 아니게 현경의 알몸을 보게 되었다.
어제 빨아서 널어놓은 속옷이 그 사이에 다 말라서
 그걸 입으려고 했던 것 같았다.
내가 없는 새에 입으려고 서둘렀는지
입고 잤던 겉옷은 벗어서 방바닥에 널려 있었고,
손에 속옷을 들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엉거주춤 선 채 두팔로 가슴을 가렸다.

"어...미안."

나도 당황해져서 그녀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말없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등 뒤로 다가와 말했다.

"저...이것 좀 도와주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하나도 없었다.
현경을 향해 돌아서자, 그녀가 내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등 뒤로 팔을 올려 브래지어 호크를 잠글 기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잠그는지 알 수 없었다.
현경이가 시키는대로 그럭저럭 그 작은 호크를 찾아서 채워주자,
그녀가 나를 향해 돌아서며 미소지었다.

"고마워요."
"......"

마주 선 그녀의 속살이
지금 밖에 내리고 있는 함박눈보다 더 눈부시게 하얗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보다 더 어색한 모습으로 서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돌아서서 옷을 마저 다 입기 시작했다.

우리는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아서 촛불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저 때문에 힘드시죠?"
"......?"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눈빛으로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자기 한 몸도 주체 못하면서,
무슨 거창한 일이나 하는 것처럼...만일에 제가 친동생이라면,
속 좀 그만 썩이라고 야단치셨겠죠?"
"야단만 치냐? 두들겨 패지..."

내가 무뚝뚝하게 대꾸하자, 그녀가 소리내어 웃었다.

"그럼, 두들겨 패세요."
"이렇게 허약한 아가씨를, 어디 때릴 데가 있다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촛불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오빠..."

현경이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말없이 그녀를 돌아 보았다.

"오빠..."
"부르지만 말고 말해."

그녀가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하더니,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내 눈길을 피했다.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나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으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조금씩 울먹이기 시작하더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몸이 약해지면서, 마음도 약해진 것일까...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한국 제일의 투사 아가씨가 왜 이러니...약한 모습 보이지 말아..."

나는 그녀를 달랬다.

"미안해요."

그녀는 여전히 울먹이며 말했다.
나는 현경이를 번쩍 들어 무릎 위에 앉히고,
마치 갓난 아기를 어르듯 토닥거렸다.
현경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계속 훌쩍거렸다.
뭐라고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냥 그녀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내 품에 안겨 있는 작은 병아리...
어떤 땐 강인한 독수리 같던 그녀가 작은 병아리로 변해 있었다.

"널 지켜줄께...걱정마."

현경은 말없이 자기 두 팔을 내 등 뒤로 돌리더니
힘주어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성당의 밤.7.


       성당의 밤.7.


  월요일 아침

설겆이를 하고,
쌀을 씻어 전기 밥솥에 넣고,
밥상을 차리는 동안 날이 밝기 시작했다.
현경이는 자기가 하겠다고 우겼지만,
고집부리지 말고 그냥 쉬라고 달래어 침대로 보냈다.
TV에서는 현경이가 속한 단체 회원들 중,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검거되었다는 뉴스가 흘러 나왔다.
검거된 사람들의 죄목은 무기징역내지는 사형까지도 가능한 것들이었다.
도피 중인 사람을 숨겨주고 있다가
불고지죄와 범인은닉죄로 구속된 사람도 있었다.

"짜식들...웃기고 자빠졌네...아예 전국민을 다 잡아가라..."

투덜거리는데, 아직 검거되지 않은 지명수배자 명단이 나오고 있었다.
거기에 김 현경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었다.
제법 큰 액수의 현상금과 일계급 특진이 걸려 있었다.
김 현경에게 붙어있는 죄목으로는 무기징역감이었다.

어느 틈에 현경이가 옆에 와서 앉았다.

"너, 대단한 사람이더구나... 조직 서열 3위이던데?"

농담조로 던지는 내 말을 현경이가 쓸쓸하게 웃으며 받았다.

"오빠 죄목도 만만치 않아요...불고지죄에 범인은닉죄."
"김 현경이를 고무찬양한 죄도 있지."

뉴스가 끝나고,
미끈한 다리의 각선미를 자랑하는 여자모델이
뭔가를 선전하는 광고가 이어졌다.
TV를 끄고, 현경이를 돌아보았다.

"이젠 좀 괜찮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 기운이 없긴 하지만...잠을 자고 났더니 많이 좋아졌어요."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전화 벨이 울렸다.
요한의 부인이었다.
내가 먼저 물었다.

"남편한테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어요?"
"예,아직...아무래도...저, 현경씨는 만났어요?"
"예,지금 옆에 있는데, 바꿔드릴까요?"
"바꿔주세요."

수화기를 현경이에게 넘겨 주었다.
현경이는 수화기를 들고 말없이 듣기만 하다가,
예, 알았어요 하며 간단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여동생을 여기로 보내겠대요."
"여동생이라니?"
"요한씨 처제요...숨어 있을만한 암자가 있대요.
이곳으로 여동생을 보낼테니까, 기다리래요."
"언제 온대?"
"오늘 저녁에요."
"근데,요한의 부인은 요한이가 거기 관련되어 있다는 거 알고 있나?"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부인도 회원이예요."

나는 혀를 찼다.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럼, 지금 지도부만 구속하는 것이 아니었나?"
"지도부라는게 따로 없는데요, 뭐...자기들 마음대로 기준 정하고,
아무나 닥치는 대로 구속하고...그리고 나서 짜맞추는 거예요."

도대체 죄인이라는 기준이 어디에 있을까.
착하고 여리기만 한 이 사람들이, 왜 다들 교도소에 가야 하는가.

"아무리, 산 속 깊은 곳의 암자라고 해도, 안전할 수 있을까?"
"여기보다는 낫겠지요."
"그래도...여긴 밀고하거나 그럴 사람은 없어..."
"글쎄요...그것도 그거지만, 제가 젊은 여자라는 사실도..."
"그건 그렇군..."

한숨을 쉬었다. 현경이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나에게는 힘이 없었다.
현경이처럼 젊고 예쁜 여자는, 젊고 예쁘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나처럼 젊은 신부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갑자기 내가 속한 이 교회가 몹시도 인정없고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에게는 그녀를 숨겨줄 한 뼘의 공간도 없을까?

그녀와 함께 말없이 아침식사를 하였다.
나도, 현경이도 계속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눈은 멈추었지만, 날씨는 계속 흐리고 어두웠다.
다른 때 같으면, 마당과 골목길에 쌓인 눈을 깨끗하게 다 치웠겠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다.
오고 가는 사람도 없어서 다들 눈에 덮여 잠든 세상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말없이 커피를 마시며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동안 시간은 쉼없이 흘러갔다.

현경이는 여전히 기운없는 모습이었지만, 누으려고 하지 않았다.
다 마른 빨래들을 개어서 옷장에 집어넣고,
방청소를 하고, 설겆이를 하였다.
저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였지만,
 괜찮다면서 하도 고집을 부려서 말릴 수가 없었다.

현경의 뒷모습은 영락없이 가정주부 같은 모습이었다.
아무리 몸이 안좋아도,
자기 아니면 살림할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성당의 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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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의 밤.8.


 월요일 낮

점심을 먹으며,
음악이나 들으려고 라디오를 켜자
마침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 흘러나왔다.
늘 즐겨 듣던 곡이었다.
격정적이고도 힘찬 피아노 소리에 속이 다 풀리는 느낌이었다.

곡이 끝나자 토막뉴스가 흘러나왔다.

명동성당에서 천막치고 농성하던 사람들이 자수하기로 하고,
자진 철수했다는 소식이었다.
성당 측에서 자수할 것을 종용했다고 했다.
내가 알기로는 그동안 미사전례에 지장이 많으니
나가달라고 재촉했던 걸로 알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에 난로하나 제공해 주지도 않았던 성당이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현경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현경이는 묵묵히 밥만 먹고 있었다.
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숟가락을 내려놓자, 현경이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요?"
"미안하다...신부로서..."
"미안해 할 것 없어요.그렇게 될 줄 알았는데요...어디 한 두번인가요?"

한숨만 나왔다.

"언젠가, 노동자들 농성장에 있었을 때 일인데요...
경찰이며 구사대가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대고,
각목이며 쇠파이프로 마구 폭행하면서 밀고 들어오자 ...
숫적으로 부족했던 노동자들이 계속 밀리다가 근처 성당으로 들어갔지요.
근데 거기 관리인인지 누구인지, 우리를 못들어오게 막는거예요.
제가 사제관으로 달려가서 도와달라고 애원했어요....
근데, 그 성당 사제관...
어디서부터 신을 벗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번쩍이는 대리석을 깔아놓은 건물이었는데, 현관문도 안열어줬어요.
바쁘다나 어쨌다나...사제관 안에서는 왁자지껄 웃음소리 들리고...
결국 노동자들은 물벼락에 몸이 꽁꽁 언 채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길거리에서 개처럼 끌려가고, 정말 생지옥이었는데...
전 엉엉 울면서 성당을 향해 이를 갈았지요...그
날 말고도 그 비슷한 일은 많이 겪었어요..."
"지금도...이를 갈고 있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숟가락만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저는 크고 멋있는 교회엔 아예 가까이 가지도 않아요...
세상과 너무 멀어요. 오히려,작고 초라한, 담장도 없고,
대문도 없는 교회들이 세상과 가까이 있지요.
아니, 그보다는 교회 건물도 없이 맨 몸으로 뛰는 분들이
더 백성을 사랑하지요."

이번엔 내가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 걸칠 것도 없는,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의 적나라한 모습과 맞닥뜨렸을 때...
어떤 분은 그 속으로 뛰어들기도 하지만...
어떤 성직자는 외면하고 피해가지요."

현경의 눈에 나는 어떻게 비칠까...

"거룩하다는 것이 깨끗하다는 것인가요?
마음이 아니라 껍데기만 깨끗하면 거룩한건가요?
진흙탕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구하려면
진흙탕 속에 뛰어들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물론 그렇지..."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어떤 신부님들은 깨끗한 것과 고급스러운 것을 혼동하기도 하더군요..."

현경이는 어디서 그렇게 기운이 나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발가벗은 채 매달렸다는 것을 다들 잊고 있는 것 같아요.
벽에 똑같은 십자고상을 걸어 놓지만...
그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는
온갖 가식과 위선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예수님한테 입혀드린다고
예수님이 고마워할까요?...
언젠가 제법 청빈하다고 소문난 수도회 수녀님들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수도복, 옷값이 무척 비싸더군요."

내가 계속 침묵을 지키자, 현경이도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도 그 마음 변치 말아..."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백성들의 알몸을 보게 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저한테 얼마나 대단한 사명감이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그녀의 입에서 알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애써 그 기억을 지웠다.

"세상이 좋아질 날이 오겠지...현경이 같은 사람이 있는 한...
좋은 세상이 올거야."
"글쎄요..."

현경의 표정이 쓸쓸해 보였다.

"며칠 잠을 못잤다고 힘없이 쓰러지기나 하는...
이렇게 약한 제가 일을 하면 얼마나 하겠어요?"
"몸보다는 정신력이겠지...신념과 의지력...현경이는 강해."
"......"

"어떻든...몇년 전에 방황하던 그때의 모습이 아니라서 보기 좋구나."
"오빠두요..."

현경이가 말머리를 돌렸다.

"어젯밤엔 저 때문에 고생했지요? 밤새 잠도 못주무신 것 같던데..."
"괜찮아..."
"좀 주무세요, 피곤할텐데..."
"정말 괜찮아. 현경이나 가서 쉬어. 아직도 기운이 없어보여."
"어제 그렇게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그리고...고마워요."
"난, 행복하고 좋던데,뭘..."
"몰라요."

내가 씩 웃자, 현경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럴 때 그녀의 모습은 아직도 수줍음 잘타는 나이 어린 소녀일 뿐이었다.
무기징역에 해당되는 죄목으로 수배 중인
극렬분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 쪽이 그녀의 진짜 모습일까...

"쉬고 있어. 나, 밖에 좀 갔다 올테니까..."
"어디 가시게요?"
"응...가게에 가서 물건 살 것이 있어서..."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성당의 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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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의 밤.9.


 월요일 저녁

시내 도로는 온통 빙판이었다.
자동차들이 엉금엉금 기어 다녔다.

나는 은행에 가서 저금해 놓은 돈을 다 찾고,
그 다음엔 신발가게에 가서 현경의 운동화를 샀다.
그리고 옷 집에 가서 두꺼운 겨울 파카를 사고,
속옷 가게로 들어갔다.
성당을 나서면서, 현경의 신발 크기를 확인했기 때문에
운동화는 쉽게 살 수 있었지만, 속옷 사이즈는 알 수 없었다.
사이즈는 커녕, 여자 속옷을 고르는 것부터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또 어디서 어떻게 고생하게 될지 알 수 없는 현경이를 위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싶었다.

"뭘 찾으셔요?"
"여자 속옷이요..."
"누가 입을 건데요?"

점원 아가씨가 누가 입을 것인지를 물어왔다.
그런 건 왜 물어볼까?
나는 얼굴이 붉어져 있었지만,
내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집사람한테 선물하려고 그러는데요..."
"사모님 몸 칫수가 어떻게 돼요?"
"글쎄요...아가씨하고 좀 비슷하긴 한데..."

사이즈를 물어오는 점원 아가씨의 몸매를 보면서,
현경의 벗은 몸과 비교해 보았다.
현경이가 더 날씬한 것 같았다.
현경의 알몸을 보았던 것이 다행이구나 싶으면서도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는 생각만 났다.

아가씨가 골라주는 대로 받아들고,
겨울 내의와 양말도 몇켤레 사고, 또 뭐가 필요할까 생각했다.
여자들이 여행할 때 챙겨가야 할 물건들이 무엇이 있는지
더 이상은 알 수 없었다.
일단 성당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잠시라도 현경을 혼자 놔두는 것이 불안하기도 하였다.
길을 걷다가 교통순경만 보아도 불안할 정도였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잔잔한 첼로 협주곡이 흐르고 있었고,
현경이는 침대에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몇년 전, 바닷가 천막 찻집에서 함께 듣던 그 곡이었다.
그 후에 그 곡이 담긴 CD를 사서 가끔씩 듣곤 했었다.
현경이는 그 CD를 틀어놓고 듣다가 잠든 모양이었다.

운동화와 파카와 겨울내의는 현경의 가방 옆에 놓아두고,
브래지어와 팬티와 돈봉투는 가방 속에 넣어 주었다.
아마 그 돈이라면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현경이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들여다 보며,이불을 잘 여며주고,
나는 방바닥에 길게 누웠다.
첼로 협주곡 CD는 계속 돌고 있었다.
현경이와 나란히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던 찻집을 생각했다.
보금자리를 찾아 날아가던 물새 두 마리가 눈 앞에 보이는 듯 했다.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 속에 빠져 있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문득 잠에서 깨어났을 땐 벌써 날이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언제 그랬는지,
현경이가 내 위에 이불을 덮어주고는 내 곁에서 자고 있었다.
그녀는 내 팔을 베개삼아 베고, 품 속에 안겨 있었다.
어린 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는 모습이 몹시도 애처롭게 보였다.
현경이를 가볍게 감싸안아 주자, 그녀가 내 품 속으로 더 파고 들었다.

맨 방바닥에 누워 있었지만, 방은 따뜻하였고,
고요하고 평화스러운 오후였다.

멀리서 아득하게 전화벨 소리가 들리고,
전화를 받아야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점점 깊은 잠에 빠져들어갔다.


                   (다음에 계속)


 제  목 : <소설>성당의 밤.10.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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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의 밤.끝.


 월요일 밤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깨어 놀라 일어났다.
전화는 어제 병자성사를 준 노인의 집에서 온 것이었다.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렇게 쉽게 떠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병자성사를 늦지않게 준 것이 다행이었다.
애령회장 집에는 벌써 연락했다고 했다.
당장 내가 할 일은 없었다.

내일쯤 들러서 연도를 바쳐주고...
장례미사는 모레 오전이 되겠구나...
잠이 덜 깬 채로 생각하면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곁에서 자던 현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우선 이불을 대강 개켜서 침대에 올려 놓으려는데,
여러번 접은 종이쪽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현경의 편지였다.

"오빠, 잠든 사이에 말없이 떠나서 미안해요.
너무 곤히 주무셔서 깨울 수가 없었어요.
사주신 옷과 신발, 그리고 돈, 고마워요. 잘쓸께요.
요한씨 부부가 모두 체포되었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 여동생도 연행되었구요.
이렇게 걱정만 끼쳐드리고 떠나서 정말 미안해요.
곧 바로 연락 드릴께요. 오빠도 조심하시구요.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어제, 오늘, 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았어요.
저에게는 정말 행복한 날이었어요.
저도 저의 모든 것을 다 드리고 떠나는 느낌이예요.
오빠, 사랑해요."

급하게 갈겨쓴 글씨였다.
그 쪽지 외에는 방 안 어디에도, 현경의 흔적은 없었다.

언제 연락받고, 언제 떠난 것일까...

무심하게 깊이 잠들어버린 자신을 책망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루 밑에 있던 현경의 낡은 운동화도 보이지 않았다.

미끄러운 골목길을 달려 큰 길까지 나가보았다.
혹시나 하고 시내버스 승강장까지 걸어갔다.
길 양쪽의 승강장을 모두 찾아 보아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마치 현경의 뒤를 따라 걸어가듯이...

자동차들이 제법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빙판이었던 길이 이제는 다 녹아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늘 그렇듯이 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길가에 멈춰서서,
자동차들 달리는 모습을 오랫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밤하늘에 별들이 떠 있었다.
차가운 별빛이었다.
현경이는 또 내 가슴 속 어느 별로 뜨고 있는 것일까...
가슴 가득 적막감이 밀려왔다.

자동차들의 소음을 뒤로 하며,
골목길에 들어서자 작고 초라한 성당 건물이
어둠 속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울타리는 있지만,
대문은 없는 이 성당도 현경이를 보호해 주지는 못했구나......
급하게 떠나간 현경을 생각하자 가슴이 아려왔다.

마당에 들어서자, 아직도 마당 가득 수북이 쌓여 있는 흰 눈을 밟으며,
검은 양복을 입은 두 남자가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끝  -------------------------

 


 제  목 : 어휴...다 끝났다...
 검색어 :
 올린이 : syj1212 (송영진  )   99/06/08 14:40   읽음 : 18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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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다 끝났다...

소설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는 대목이 있는데...

이 소설 올리면서, 실제로 그 협주곡을 틀어놓고 작업했습니다.

몇 달동안 구상하고...며칠동안 쓰고...다시 며칠 동안 고치고...

다시 며칠동안 컴퓨터 작업하고...오늘 드디어 올렸습니다.

그동안 기다리던 몇몇 분들께 선물로 드립니다.

아직도...그 뒷 이야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고뇌하는 사제가 있는 한...그리고 그런 신부님들을 사랑하는

김현경이 있는 한 저는 계속 소설을 쓸 것입니다.

불필요한 사족이겠지만...김현경은 제 머리 속에만 있는

완전 가공인물임을 다시 한 번 더 밝혀둡니다.

아무래도 제가 현재 신부라는 점 때문에 노파심에서...

그럼 다들 행복한 날들 되시기를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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