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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의 교훈,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총파업’의 교훈

 

“또 ‘뻥파업’되는 것 아니냐? 현장투쟁 동력도 없고, 준비도 안됐는데---”,

“파업이 목표가 아니라 파업한다는 선언으로 정치권에 압박하려는 것 아니냐?”,

“민주노총 지도부의 일방적인 총선방침 때문에 조직이 갈등하고 분열됐는데, 총파업이 가능하냐?”

‘비정규직 철폐와 정리해고 중단, 노동법 전면 재개정’을 내걸고 2012년 8월에 총파업투쟁에 돌입하겠다는 민주노총 지도부의 선언과 호소에 대해 현장과 지역 노동자들은 가슴이 설레기보다는 우려가 깊다.

 

왜 그런가?

지난 몇 년간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전혀 준비해오지 않았다.

오히려 2012년 총대선 대응을 중심으로, 그것도 무리한 총선방침을 강행하고 잘못된 야권연대를 추진하면서 민주노총 조직은 심각한 조직적 갈등과 분열에 휩싸이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 지도부가 “지도부를 밟고 나가라”며 총파업을 호소한들 그 진정성은 현장과 지역의 노동자들로부터 신뢰받기 힘들다. 

총파업은 지도부가 아무 때나 꺼내 쓸 수 있는 ‘호주머니 속의 칼’이 아니라 노동자계급투쟁의 ‘역사적인 산물’이기 때문이다.

지도부의 결단과 의지도 중요하지만, 총파업은 그것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미 지난 십수 년간에 걸쳐 형해화되고 무력해진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현장과 지역의 노동자들을 패배주의와 무기력으로 몰고 가버린 상황에서, 하루아침에 지도부가 총파업을 ‘선언’한다고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총파업 투쟁’의 역사를 보면 분명해 진다.

 

총파업은 ‘호주머니 속 칼’이 아니다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몇 차례의 총파업투쟁이 전개됐다.

1990년과 91년 두 차례의 전노협 사수 총파업, 1996~97년 역사적인 노동법 개악저지 총파업, 1998년 5월 정리해고제 철회 총파업, 2000년 5월 총파업과 의회투쟁의 결합 및 2001년 7월 김대중 정권 퇴진 총파업의 무산, 그리고 2006년 선진노사관계 로드맵 저지 총파업에 이르기까지, 민주노조의 역사가 곧 ‘대중파업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대중파업은 민주노조로 하여금 민주노조이게끔 했던 주요 동력이자 투쟁수단이었다.

결의했지만 총파업이 철회되거나 무산된 경우도 있었고, 패배했지만 의미있는 총파업이 있었으며, 부분적으로 승리한 총파업도 있었다.

지난 25년간 총파업의 경험으로부터 몇 가지 교훈을 끄집어 내보자.

 

‘총파업’은 어떤 때는 우연적으로 출현하는 듯하고, 어떤 때는 지도부의 의식적인 준비의 결과인 듯하지만, ‘투쟁 경험’의 축적과 ‘계급역학 관계의 변화(커다란 국면적인 위기)’가 맞물리면서 현실화된다.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이 가능했던 것은 80년대 초중반 이후 투쟁 경험의 축적과 1987년 6월 민중항쟁이라는 계급정세의 변화 때문이었고, 1996~97년 노동법 개악저지 총파업투쟁이 가능했던 것은 90년대 초중반 이후의 투쟁 경험의 축적과 1996년 12월 26일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라는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총파업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멋대로 결정되고 선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역사적 필연성을 갖는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하는” 역사적인 현상이다.

 

‘투쟁 경험’의 축적과 ‘계급역학 관계 변화’의 산물

 

‘총파업’은 위로부터 지도부의 의식적인 계획을 통해서도, 아래로부터 대중들의 자발적인 투쟁을 통해서도 ‘시작’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도부의 의식적인 계획과 준비,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대중의 자발적인 투쟁동력이 결합되지 않으면 유지되고 진전될 수 없다.

특히 전략사업장이나 주요 지역 혹은 연맹의 투쟁 동력이 강고하게 중심에 설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1990년 전노협 사수 총파업투쟁의 경우, 대기업 노동자들(KBS노동자들의 방송민주화투쟁과 현대중공업 골리앗점거투쟁)을 중심으로 한 대중파업이 계열사의 연대투쟁으로 이어지고, 다시 주요 지노협을 중심으로 한 대중적 동맹파업의 결의를 당시 전노협 지도부가 받아들여 즉각 전국적인 총파업투쟁으로 조직했으며,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정치총파업이 중소사업장에서의 임금인상투쟁(경제파업)을 유리하게 강제해 나가는 형태로 정치파업과 경제파업을 단일한 계급투쟁으로 역동적으로 결합시켜 냈다.

총파업투쟁을 지도부가 선택 가능한 전술적 문제로만 바라보는 것은 관료주의적 방식으로 총파업을 바라보게 한다.

 

‘총파업’이 물론 모든 것이 준비됐을 때 가능한 것은 아니며,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투쟁과 마찬가지로 총파업투쟁도 ‘예측 가능한 수준과 범위를 뛰어넘을 수 있느냐’가 총파업의 유지와 발전에서 중요하다.

1996~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의 경우, 김영삼 정권이 12월 26일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켰을 때 노동자들의 어느 정도의 저항은 예상했다.

그런데 1997년 1월 4일, 예상을 뛰어넘어 금속노동자들이 파업을 재개했을 때, 바로 그 현실이 제조업과 병원노동자들, 서비스노동자들, 그리고 사무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불러일으켜 총파업 자체 속에서 노동자계급을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총파업 속에서 노동자계급이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했을 때, 그 힘 자체가 지배계급 내부에 균열을 만들어 내고, 시민사회진영을 노동자계급의 편으로 끌어오는, 계급적 힘관계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상대방이든 우리 자신이든, 예측 가능한 손바닥 안에서만 논다면 투쟁동력도, 힘관계의 변화도 이끌어낼 수 없다.

한마디로 ‘뻔해서’는 총파업의 유지 발전도 승리도 가능하지 않다.

 

예측 가능한 수준과 범위를 뛰어넘을 때 총파업 가능

 

‘총파업’은 그 자체로 국가권력에 대한 대중적인 정치투쟁 수단이다.

그런데 문제는 총파업을 의회주의적 압력수단으로 전락시켜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2000년 민주노총의 ‘총선투쟁과 총파업투쟁의 병행 결합’이라는 방침을 통해 처음으로 등장했다.

총파업에 대한 이런 방침은 총파업 자체가 만들어 내는 대중적인 정치적 긴장과 역동성을 거꾸로 지도부가 가로막아 버릴 가능성이 크다.

총파업은 노동자대중의 역동적인 전투성을 전제로 하는데 그러한 역동적인 전투성이 의회주의적 목표로 억제될 때는 투쟁동력이 소진되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

 

총파업은 대중적 정치투쟁이다.

그것은 우선 총파업 자체 속에서 조직된 노동자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시켜 내는 것이 관건이다.

그리고 곧바로 정치파업이 미조직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경제파업을 이끌어 낼 수 있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지금 민주노총 지도부는 어떤 의미로 ‘총파업’투쟁을 얘기하고 있는가?

2012년 12월 대선에서 야권연대를 위한 압력수단으로서의 총파업을 호소하고 있는가?

아니면 조직노동자들을 총파업을 통해 하나의 계급으로 결합시키고 나아가 광범위한 미조직 노동자들의 경제파업까지 결합시켜 하나의 계급의 단결시켜내면서 계급간 힘관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총파업을 호소하고 있는가?

만약 후자라면 민주노총 지도역량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노동자계급정당을 건설하려는 역량이 총결집해야 하고 함께 책임있게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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