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트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22/03

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22/03/28
    “역사가 나를 사면할 것이다” - 피델 카스트로의 죽음에 부쳐(2016.12.08.)
    푸르른 날

“역사가 나를 사면할 것이다” - 피델 카스트로의 죽음에 부쳐(2016.12.08.)

“역사가 나를 사면할 것이다” - 피델 카스트로의 죽음에 부쳐

 

2016.12.08.

 

‘그 때 쿠바에 갔다 왔어야 했는데---.’ 지난 11월 25일 쿠바의 혁명가 카스트로가 90세의 일기로 사망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2000년의 기억이었다. 당시 ‘노동자의힘’ 대표로 호주 시드니에서 개최된 ‘Marxism 2000’에 참석했을 때, 행사의 주관자인 호주 민주사회주의당(DSP, Democratic Socialist Party)은 그해 말 쿠바에서 개최될 국제연대 행사에 참여해줄 것을 제안했다. 1990년대 초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10여년간 쿠바가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나갔는지를 평가하는 국제컨퍼런스라고 했다. 당연히 카스트로도 참석해서 발언한다고 했다. 그 유명한 카스트로의 연설을 직접 들어볼 수 있고, 무엇보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을 전세계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어떻게 진단하고 어떤 대안을 모색하는 지를 직접 토론하고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행사여서 마음이 설랬다. 가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가지 못했다. 당시 조직 내 상황이 긴박했고, 국가보안법의 문제도 걸려 있어서 결국 포기했다. 지금은? 후회된다. 그 때 어떻게든 가봤어야 했는데.

 

쿠바 혁명의 역사는, 그리고 쿠바의 혁명가들(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은 1980년대에 자생적인 첫걸음을 내딘 남한의 초보 사회주의 활동가들에게 ‘혁명적 상상력’의 원천 가운데 하나였다. 1980년대~90년대에 나도 초보 사회주의 활동가로서 당시 몇 권 번역되지도 않았던 쿠바 혁명과 쿠바 혁명가들을 소개한 책을 읽으며 한국에서 혁명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모색했다. 1953년 소수의 젊은 혁명가들을 중심으로 독재자 바티스타정권에 맞서 몬카다 군병영을 습격한 그 결기가 놀라웠고, 1955년 법정에서 한 “역사가 나를 사면할 것이다”던 최후변론이, 그 용기와 열정이 내 가슴을 뜨겁게 했다. 7.26운동 조직을 이끌고 50년대 후반에 마에스트라 산맥을 중심으로 전개한 게릴라전을 보며, 후퇴할 산맥(?)이 없는 우리에게는 ‘노동현장이 산맥’이라고 판단했다. 1959년 1월 마침내 게릴라부대가 중심이 되어 반바티스타 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했을 때, 그 성공과 혁명 유지의 핵심적 동인이 아바나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의 총파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큐바혁명의 재해석>(바니아 밤비라)을 통해서 였다. 여느 혁명의 역사에서처럼 쿠바의 민주주의 혁명은, 민주주의의 철저한 진전을 통해, 토지개혁과 외국인 자산 몰수 등을 통해, 그리고 이에 개입하려는 지배계급과 미국의 반혁명 시도에 맞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갔다. 아니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만이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완성시킬 수 있고, 민주주의 혁명과 결합 없는 사회주의 혁명이 있을 수 없다는 점 역시 쿠바 혁명이 보여주었다.

 

사실 내가 더 궁금한 것은, 그래서 더 알고 싶은 것은 1959년 쿠바 혁명 이후의 쿠바였고,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의 쿠바 현실과 그들의 고민과 해법이었다. 그래서 2000년에 쿠바 국제컨퍼런스에 가고 싶었다. 당시 사회주의 활동의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사회주의권 몰락이라는 충격을 온 몸으로 맞부딪혀야 했던 남한의 사회주의 활동가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기회였는데---. 다행히 2000년대 들어 쿠바와 쿠바 혁명가들에 대한 책들이 번역되거나 쓰여져서 간접적으로나마 쿠바의 역사와 현실을 접할 수 있었다. 쿠바의 유기농․생태농업, 무상의료․기초의료, 문맹퇴지와 무상교육, 제3세계 국제연대 등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국내에도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요시다 타로), <또 하나의 혁명, 쿠바의 기초의료제도>(린다 화이트포드 등),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요시다 다로), <피델카스트로-마이 라이프>(이냐시오 라모네), <체게바라 평전>(장 코르미에) 등의 단행본을 통해 널리 소개됐다. 이 자체만으로도 쿠바가 경제봉쇄와 위기 속에서 어떻게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더 진전시켰는지를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위기 속에서 그 위기를 극복해나간 방식이었다. 그들은 1990년 3월부터 ‘사회주의를 계속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인가’라는 토론을 쿠바 공산당 당원만이 아닌 전국민이 참여하는 대중토론회를 열고 그 토론의 결과로 ‘제한적인 개혁․개방’의 길(국영기업의 분권화, 자영업 부활, 개인의 달러 보유 및 사용 허용 등)을 결정했다. 가장 위기의 시기(‘평화로운 시대의 특별 시기’)에 가장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 경제를 개혁해 나가는 방안을 전국민적으로 토론하고 합의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전에 다시 한 번 이런 토론회를 개최해서 수렴된 내용을 정리해서 ‘경제개혁’방안을 마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제개혁에 따른 여러 부작용도 드러나고 있고, 자칫 쿠바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질 우려도 제기되지만, 쿠바는 위기 극복 방식을 ‘핵미사일’ 대신에 ‘민주집중제를 통한 경제개혁’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온전히 쿠바의 민중들이 스스로 책임져나갈 몫이 될 것이다.

 

1950년대 이후 60여 년간 쿠바 혁명의 중심에 바로 혁명가 ‘카스트로’가 있었다. 이제 그가 혁명가로서의 한 일생을 마감했다. 카스트로는 생전에 자신의 개인숭배를 단호하게 반대했고, 집단지도체제를 통해 개인독재로 흐르는 것을 막아왔다. 몇 년 전 제작된 올리버 스톤 감독의 다큐 ‘카스트로’에서는 카스트로의 사망 이후의 쿠바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신이 죽은 후에도 쿠바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에 카스트로는 올리버 스톤 감독을 쿠바 민중들 속으로 데려가서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준다. 당시 쿠바 민중들의 목소리는 이번 장례식장에 모인 수십만명의 민중들의 목소리에서도 다시 되풀이됐다고 한다. “나는 피델이다”(Yo soy Fidel). 1955년 법정에서 울려퍼졌던 카스트로의 “역사가 나를 사면할 것이다”는 선언은 그의 죽음과 함께 이렇게 이루어졌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