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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0/08
    ‘공정한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푸르른 날
  2. 2010/01/22
    21c 한국사회에서 ‘인간’으로 살아남는다는 것
    푸르른 날
  3. 2009/06/01
    이건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
    푸르른 날
  4. 2008/10/20
    [펌] 한글자 대한민국(1)
    푸르른 날

‘공정한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공정한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코메디처럼 다가왔다.

‘공정한 사회!’

아니 ‘친기업 프랜들리’를 내건 MB 정권 아래서 ‘공정한 사회’라니?

거짓말과 말바꾸기를 밥먹듯이 하고,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병역 기피에서 한가닥 하는 인물들이 모인 이 정권에서 ‘공정한 사회’를 감히 입에 담다니?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웃고”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집권 후반기 국정 기조’라고 한다.

“기득권자에게 매우 불편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 될 지라도 “공정사회 기준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한민국 선진화의 윤리적 실천적 인프라”라고 포장을 한다.

게다가 거기에 “성장의 온기를 골고루 퍼지게” 하기 위해서라며 ‘친서민’을 덧붙인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국무총리와 장관 후보 몇 명 낙마시킨 것으로 ‘공정한 사회’가 올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거꾸로 MB 정권이 “공정한 사회를 말할 자격조차 있느냐”고 조롱하고 폭로한다.

근본적 정책전환이 아닌 6.2.지방선거 패배에 따른 정국을 반전시키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 하기도 한다.

오히려 ‘공정한 사회’를 위한 법질서 확립이란 명분으로 하반기 국회에서 MB악법 통과를 강행하려는 것 아니냐, 레임덕을 방지하기 위해 공직자에서 재계와 정치권,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사정 드라이브를 확장하려는 것 아니냐며 경계를 하기도 한다.

 

멈춰서는 안된다.

MB를 조롱하고 폭로하며 평가절하하고 경계하는데 멈춰서는 안된다.

‘반MB’에 갇혀서는 안된다.

오히려 주목해야 한다.

왜 친자본 정권인 MB정권이 겉치레라도 ‘친서민’, ‘공정한 사회’라는 국정기조를 내세우지 않으면 안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민심 이반’이다.

그런데 이 ‘민심 이반’은 MB만에 대한 이반이 아니다.

반MB=야당 지지가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의 삶을 무한 경쟁에 내몰았던 자본의 시장논리에 대한 민심 이반이다.

개발과 성장과 경쟁력이 우리 삶을 좀 더 낳게 해줄 것이라던 자본의 경쟁논리에 대한 전면적인 민심이반이다.

때로는 강제적으로 때로는 능동적으로 받아들였던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대한 대중적 반성이 이제 시작됐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중은 우선 ‘고통을 함께 나눌 소통’을 바라고 있다.

‘공정성’과 ‘사회 정의’를 요구하고 있다.

무한 시장경쟁이 아닌 ‘새로운 삶의 방식’, 즉 근본적인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

MB 정권은 바로 이 점에서 정권의 위기만이 아닌 자본주의체제의 위기를 직감하고 있다. 

그래서 바로 국정운영의 주도권과 정권의 재창출만이 아닌 자본주의체제의 위기관리 차원에서 겉치레라도 ‘친서민’, ‘공정사회’를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바로 같은 맥락에서 야당은 이러한 자본에 대한 민심이반을 반MB이라는 틀 안에 가두려 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부터 시작이다.

‘겉치레’에 현혹되지 않고 ‘반MB의 틀’을 벗어나 더 나아가야 한다.

‘공정한 기회’에 갇히지 않고 우리는 좀 더 발본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공정한 사회’를 갈망하는 대중들에게 묻고 함께 답을 찾으며 실천해 나가야 한다.

경제위기에 따른 비용을 전적으로 노동자와 민중들에게 전가하는 현실에서 과연 노동자와 민중이 정리해고와 실업, 노동강도 강화와 과로사, 산업재해와 스트레스 등을 벗어난 삶을 살 수 있는가?

벼랑끝 생존경쟁을 벗어날 수 있는가?

대기업, 은행, 그리고 대형유통업체가 소수에게 독점되는 사회에서 과연 공정한 분배가 가능한가?

주요한 권력기관과 기업의 경영진이 선출되지 않는 사회에서 과연 공정한 참여가 가능한가?

부가 교육을 통해 대물림되는 현실에서 과연 공정한 기회라는 것이 가능한가?

새로운 대안 사회를 꿈꾸는 사회주의자들이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는 상황에서 과연 공정한 체제 경쟁은 가능한가?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무한 시장경쟁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연 ‘공정한 사회’는 가능한가?

 

그래서 우리는 ‘반MB’가 아닌 ‘반자본의 전망’을 아래로부터 대중과 함께 현실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 가능성과 실력을 현실에서 검증해 나가야 한다.

우리가 바로 ‘새로운 대안적 삶의 가능성’ 그 자체로 서나가야 한다.

그 누가 아닌 바로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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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c 한국사회에서 ‘인간’으로 살아남는다는 것

21c 한국사회에서 ‘인간’으로 살아남는다는 것

 

<진보교육>36호(2009.12.월호)

 

이렇게 2009년을 보낼 수는 없다

 

‘눈물’과 ‘분노’로 얼룩졌던 2009년 한 해도 다 가고 있다. 아니 ‘눈물’과 ‘분노’마저도 메말라 버리고, 오직 ‘두려움’과 ‘절망’만이 강요됐던 한 해가 지나고 있다. ‘용산 참사’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가 우리에게 강요한 것은 노동자와 서민을 삶의 터전에서 내쫓는 ‘구조조정’과 ‘재개발의 광풍’이 계속될 것이라는 ‘경제적 폭력’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었다.

생존을 위한 어떤 몸부림도 이른바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을 피해갈 수 없을 거라는 ‘공권력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 역시 뼈에 사무치게 강요됐다. 더 더욱 이러한 경제적⋅정치적 폭력을 얼마든지 은폐하고 왜곡하고 정당화시킬 수 있는, 사법부와 언론이라는 ‘또 다른 폭력’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 점이 우리를 절망으로 내몬 한 해였다. 그래서 대자본과 국가권력과 사법부와 언론의 지배동맹이 강요한,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눈물’도 ‘분노’마저도 뒤덮어 버리려 한 2009년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하지만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이 어쩔 수 없는가? 이 위기와 두려움과 절망의 시대에 그나마 살아남으려면 눈물도 분노도 거두거나 삭힐 수밖에 없는가? 거대한 지배동맹의 ‘폭력’ 앞에서 주눅 들고, 숨죽일 수밖에 없는가? 약간 비겁하게라도 눈을 감고 숨을 죽이고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는가? 살아남을 수는 있지만 진정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가?

그리고 다시 이 사회에 물어야 한다. 냉동고에 갇힌 용산 철거민들을 그대로 두고 이 한 해를 보낼 수 있는가? 감옥에 갇히고, 거리를 떠도는 쌍용차 노동자들을 방치하고 이 한 해를 보낼 수 있는가? 이렇게 2009년을 보낼 수 있는가?

 

죽거나 조금 비겁하거나, 아니면---

 

2009년은 우리에게 ‘위기’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었던 한 해였다. ‘나’ 혹은 ‘나의 가족’, ‘나의 직장’만이 아니라, ‘우리’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를 물었던 한 해였다.

저임금과 삶의 불안으로 고통받는 850만의 비정규 노동자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정규직 노동자들, 끝 모를 입시경쟁에 내몰리는 청년학생들, 직업 자체를 가져볼 기회조차 박탈당한 수백만의 청년실업자들, 저임금과 무권리 속에서 가장 바닥의 일을 떠맡은 45만의 이주노동자들, 400만이 넘는 금융피해자, 농업포기정책과 기업농 정책으로 하향 분해되는 300만의 농민들, 또 끊임없는 해체의 위협에 직면하면서 불안한 생업을 이어가야 하는 500만 자영업자들, 철거민과 노점상들--- 이들‘과 함께’, 이들‘이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물었던 한 해였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가”를 물어야 한다.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런 현실을 ‘나’만은 피할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아왔다. 10여 년전 IMF 외환위기 이후 ‘위기 극복’이라는 명분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이 전면화 될 때, 한국사회가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경쟁논리에 의해 철저하게 재편되어 나갈 때, 그래도 내가 ‘경쟁력’을 갖추면 나, 나의 가족, 나의 직장, 나의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열심히 일하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내일이 오늘보다는 좀 더 나아질 거라는, 그래서 두 눈 감고 버티고, 잔업특근 더하고, 투잡을 하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시간을 쪼개 자격증을 따고, 영어를 공부하고, 스팩을 늘리고 처세술을 익혀 몸 가치를 높힌다면, 그래서 남과의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앞서 나갈 수 있다면, 아니 최소한 밀리지는 않아야 나와 내 가족이 지금보다는 낫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가냘픈 희망을 가꾸며 살아 왔다. 나와 내 가족의 모든 희망을 ‘좋은 일자리’와 ‘집 한 채’와 ‘자식 좋은 대학 보내는 것’에 가두며 두 눈 질끈 감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환상’이었고 ‘욕망’이었다. 2008~9년 미국발 세계대공황은 다른 무엇보다도 경쟁에서 이겨 ‘혼자 살아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냉혹하게 보여주었다. 자본주의 경제공황은 우리들의 일자리와 임금, 민주적 권리만이 아니라 “좀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와 희망조차도 송두리째 앗아갔다. 우리들은 삶의 ‘근거’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삶의 ‘희망’조차도 빼앗기고 있다.

각 자 열심히 노력하면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실날같은 기대도 더 이상 부질없게 됐다. 20 대 80의 구조, 아니 10대 90이라는 사회적 양극화는 더욱 탄탄하게 구조화되었다. 재산과 소득은 물론 교육, 의료 혜택 등 경제와 사회 전 부문에 걸쳐 양극화와 불균형은 점점 심화되고 있다. 2009년 모든 갈등의 진원지였던, 한국 사회 전체를 대립과 갈등으로 몰아갔던 이명박 정권은 이런 경제위기 시기의 자본과 지배세력의 충실한 대변자일 뿐임이 확인됐다. ‘소통’보다는 ‘독단’과 ‘폭력’으로, 가진 자들을 위해 위기 비용을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전가시키는 철저한 신자유주의 정권일 뿐임이 명백하게 확인됐다.

이런 절망적이고 숨막히는 현실에서, 생존권을 위한 최소한의 몸부림조차도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MB정권 아래서 노동자와 서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아직 조금의 여유가 있다면 숨죽여 비겁해 지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세상을 바꿔서라도 함께 살아남기

 

다시 가다듬어 물어야 한다. 그런가? 죽거나 비겁하게 숨죽이거나 둘 가운데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가? 우리는 진정 무기력한가? 만약 우리가 과거와 같이 자본의 경쟁논리를 우리의 욕망으로 내면화해서 계속 살아간다고 하면 우리는 이런 현실을 피할 수 없다. 10 vs 90으로 양극화된 현실에서 90의 원인이 10이 아니라, 모든 90이 10될 수 있다는 헛된 기대와 환상과 결별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절망할 수밖에 없다.

MB 정권은, MB 정권의 독단과 폭력성은 바로 우리에게 내면화된 ‘경쟁 논리’와 ‘욕망’과 헛된 ‘기대’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후퇴’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구체화된 자본의 논리, 경제공황으로 드러난 자본의 위기 자체에 직접 대면해야 한다.

 

문제는 자본주의다. 위기에 직면한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가 문제이다. 우리의 욕망으로 내면화된 ‘자본의 경쟁 논리’가 문제다. 이 지점에 직접 대면하고, 성찰하고, 그래서 찾아야 한다. “함께 살아남을 방법”을. 내가 살기 위해 남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 ‘무한경쟁’,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세상을 끝장내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찾아내야 한다. 필요하다면, 세상을 바꿔서라도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 아니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면 세상을 뒤집어 바꿔야 한다.

2009년 용산과 쌍용차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이냐”고. “21c 한국사회에서 진정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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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

이건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

 

[현자노보 칼럼]2009.05.27.

 

이건 아니다!

‘만장용 죽봉’을 ‘죽창’이라며, 전원 검거하여 사법처리하겠다는 이명박 정권의 적반하장, 이건 아니다.

이건 더욱 아니다!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자와 민중들의 집회 시위가 ‘국가 브랜드’를 실추시킨다며, ‘국가브랜드’를 국민의 삶과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보는 이명박 정권의 철면피함, 이건 더욱 아니다.

이건 더더욱 아니다!

지난해 촛불집회에 참여한 1,800여개 단체를 불법폭력시위 단체로 지목하고,

반정부 투쟁 가능성이 있는 모든 집회를 사실상 불허하고,

금지된 집회를 강행하면 사전에 집회장소를 경찰차와 경찰병력으로 봉쇄하고,

이에 항의하는 기자회견마저 불법이라고 참가자를 연행하고,

최루탄을 다시 쏘겠다고 협박하고,

시민사회단체 단체 활동가와 네티즌 2,500여 명을 상습시위꾼으로 규정하여 검거할 계획을 세우고,

철지난 국가보안법을 다시 동원하여 통일단체 회원을 구속하고 ---

‘엄정한 법 집행’을 내세우며 미친개처럼 날뛰는, 이명박 정권의 막무가내식 탄압, 이건 더더욱 아니다.

거꾸로 가는 것은 벤자민 버튼의 시간만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도 거꾸로 가고 있다.

어떤 치장도 벗어버리고 ‘신자유주의 경찰국가’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아니다! 아니다! 미친 것이 결코 아니다.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기 위해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니다.

미친 것도 아니고 거꾸로 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두려움’의 표현이다.

지난해 꺼졌던 촛불이 다시 되살아오를까 두려워하고 있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들었던 촛불을 노동자와 민중들이 다시 들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다.

경제위기를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지 않고서는 극복할 수 없는 현실에서,

임금을 삭감하고, 구조조정하고, 해고하고, 실업자를 다시 양산해야만 이윤율을 되찾을 수 있는 이 자본주의 현실에서,

이러한 전가가 필연적으로 가져올 노동자 민중들의 생존을 위한 폭발적 저항에 대한 이명박 정권과 자본가 계급의 두려움의 표현이다.

올해 내에 구조조정을 강행하고,

가진 자들을 위한 입법을 완료하고,

집시법, 미디어악법과 비정규악법을 통과시키지 못한다면 지배계급과 보수세력 내부에서도 지지기반을 상실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이명박 정권의 ‘초조함’의 표현이다.

 

그래서 지금은 아니다.

침묵하고 지켜볼 때가 아니다.

위축될 때가 아니다.

지금은 그나마 가진 것을 지키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의 생존과 민주주의는 별 개의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후퇴는 생존권의 후퇴다.

용산 철거민만의 문제도,

대량해고를 앞둔 쌍용자동차 노동자만의 문제도,

박종태 열사와 화물 건설노동자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명박 정권의 노동자민중 죽이기, 민주주의 죽이기에 맞서 아래로부터 행동에 나서야 된다.

바로, 지금!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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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한글자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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