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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5] Adios nonino. ‘잘 가요, 할아버지’

Adios nonino. ‘잘 가요, 할아버지’

 

탱고의 ‘레퀴엠.’

현대 탱고의 거장 아스트로 피아졸라 곡 가운데 ‘보석 중의 보석.’

 

피아졸라는 1959년 10월에 ‘아르헨티나 탱고단’을 구성하여 푸에르토리코에 공연을 갔다가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뉴욕으로 돌아와서 부엌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합니다. 피아졸라가 38세 때입니다.

‘nonino’는 이탈리아말로 ‘할아버지’란 애칭이고, 피아졸라와 그 자녀들은 할아버지를 ‘노니노nonino’라고 불렀습니다. 할머니는 ‘노니나nonina’라고 합니다.

부친을 위한 장송곡, 혹은 추모곡인 셈입니다.

실제 ‘Adios nonino’를 들어보면 아버지에 대한 추억, 슬픔이 애절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 1980년 서독방송에서 피아졸라의 공연

http://www.youtube.com/watch?v=QCmP4bEJfOg

 

* 1983년 스위스 루가노에서 Cologne Radio Orchestra와 피아졸라의 실황 레코딩

http://www.youtube.com/watch?v=VTPec8z5vdY&feature=player_embedded

 

* 1989년 영국 BBC에서 피아졸라의 생방송 공연

http://www.youtube.com/watch?v=ccY5IcwWyV8

 

‘Adios nonino’는 1959년에 작곡된 이후에 20번 이상 다르게 편곡되고 수천 번 이상 연주될 정도로 유명한 곡인데, 피아졸라 스스로도 “아마도 나는 천사들에 둘러싸였던 것 같다. 나는 최고의 곡을 작곡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보다 더 잘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아마 못할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피아졸라 전기>에 따르면, 이 곡은 피아졸라 탱고의 역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형성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사실 어릴 때 클래식 음악과 재즈를 더 좋아했던 피아졸라로 하여금 탱고로 이끌어주고, 처음으로 반도네온을 사주었으며, 피아졸라에게 ‘아르헨티나인’이 될 것을 강하게 요구해 왔던 사람이 아버지였는데, 아버지의 죽음은 그 이전까지 자신의 내부를 지탱해 왔던 하나의 구조가 무너지는 것을 뜻했습니다.

아버지 ‘nonino’가 죽은 이후에 피아졸라의 창조성이 최대한 발휘되고, 과거 자신이 가져왔던 클래식 음악과 재즈에 대한 사랑을 탱고와 결합시키면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 내게 된 것입니다.

 

피아졸라는 1960년 6월에 뉴욕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향합니다.

그리고 뉴-탱고의 시대를 열어가게 됩니다.

“이제 나는 탱고에 대한 내 개념을 강조할 것이다. 나는 단지 소수 마니아를 위해 음악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양한 대중을 정복할 자신이 있다. 앞으로 지켜보면 알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습니다.

 

* 기타 4중주, Del Mar College Guitar Quartet, the University of Texas Brownsville Guitar Competition에서

http://www.youtube.com/watch?v=ns3_RlZNvpg

 

* 2006년 11월, Helycon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연주

http://www.youtube.com/watch?v=k36ifoCd_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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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내, ‘정파’는 어떻게 ‘정파’가 됐나

노동운동 내, ‘정파’는 어떻게 ‘정파’가 됐나

 

 

문제는 ‘정파’다?

 

‘정파’에 대한 융단 폭격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이 직면한 ‘총체적 위기’의 원인이 민주노조 내 ‘정파’때문이라는 비판들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진단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다시 ‘정파’의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 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과 지도부의 총사퇴로 민주노총의 위기 논란이 본격화되면서 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래 민주노조운동 역사에서 최대의 위기” 상황과 맞물리면서 위기의 주범으로 민주노조운동 내 정파의 ‘존재’, 정파간 ‘갈등’과 ‘나눠먹기’가 지목됐다.

 

내놔라하는 민주노조운동의 전현직 지도자들의 입에서, ‘정파’의 폐해를 우려하고 질타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노동운동 내 ‘정파’는 “이념도 없는 파벌”이고 “내용도 없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재창출하는 도구”이며, 오로지 “정파간 타협을 통한 미봉책, 땅따먹기식의 정파싸움, 서로의 발목을 잡으면서 민주노총의 힘을 소진”시켜 버리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정파의 ‘논리’는 “자기 식구 감싸기”에 불과하며, 굳건하고 고질적인 정파구도는 이제 “권력이 됐고 기득권이 되어”버려서,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은 “정파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대중조직의 주요 집행단위의 결정을 무시하고 자기입장을 가지고 흔들면 흔들리는 조직”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탄식이 뒤이어졌다.

 

그래서 “정파들의 민주노총에서 조합원의 민주노총으로 거듭나기 위해”, “정파의 폐해부터 투명하게 공개”해서 정파를 철저하게 “혁신”하거나 “해체”시켜야 하고, 아니면 “한국 노동운동을 재생시키려면 제대로 된 정파를 (재)형성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덧붙여진다.

 

‘정파’는 노선투쟁의 역사적 산물

 

물론 민주노조의 위기의 원인을 다 ‘정파’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정파가 다 똑같은 수준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도매금으로 평가할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피할 수는 없다. 또 그래서도 안된다. 지난 20여 년간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에서 ‘정파’의 역할은 중요했기 때문이다. 중요했기 때문에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곧 지난 20여 년간의 ‘정파운동의 위기’이며, 바로 ‘정파운동의 위기’가 민주노총을 총체적으로 무력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파’ 자체에 대한 진단과 평가가 마녀사냥식으로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 마치 자신은 정파적 질서와 책임으로부터 무관한 듯이 초월해서 양비론적으로 훈계하는 방식으로 진단과 평가를 하는 것은 더 더욱 곤란하다. 자칫 ‘정파’가 노동운동 내 노선투쟁의 역사적인 산물이고, 노동운동이 합법칙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점을 은폐하거나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정치적 허무주의를 조장함으로써 노동운동을 탈정치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정파의 ‘폐해’에 대한 진단과 평가가 아니다. 정파의 ‘실체’, 정파의 ‘노선과 입장’, 정파의 ‘실력’을 더욱 분명하게 대중적으로 드러내 놓고 공론화하고 실천적으로 검증하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위기가 ‘정파운동의 위기’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진단은 민주노조운동이 정파의 ‘발전’때문이 아니라 정파의 ‘미발전’ 때문에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진단이기도 하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그 안에 있는 아이까지 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정파’는 어떻게 ‘정파’가 됐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은 정파의 탄생과 발전, 그리고 그 분화 과정과 분리할 수 없다. 물론 1987년 이전에도 반독재 민주화투쟁과정에서 “통일과 민족 문제 중심으로 변혁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인가”, “남한 내 계급 문제를 중심에 둘 것인가”를 둘러싸서 ‘민족해방파(NL)’와 ‘민중민주파(PD)’ 등의 정파가 형성됐고, 여전히 이 두 흐름이 지금까지 노동운동 내에서 커다란 정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민주노조운동 내에서 ‘정파’가 ‘정파’로서 형성⋅발전⋅분화되어 온 것은 1990년대 초반 이후였다.

 

1990년 전노협이 출범한 이후 ‘전노협 사수’를 둘러 싼 두 차례의 총파업을 거치면서, ‘노동운동 위기론’이 전면적으로 제기됐다. ‘전투적 조합주의’를 둘러싼 노동운동 위기 논쟁 과정에서 주로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사회발전적 노동운동론’, ‘진보적 노사관계론’ 등이 제기됐다. 노동운동의 목표를 둘러싸서 변혁적인 ‘노동해방’의 기치를 계속 내세울 것인지, 변혁노선을 포기하고 체제내적 노동운동을 해나갈 것인지가 핵심적인 쟁점이었다. 그리고 이 때 형성된 노동운동의 목표에 대한 두 가지 노선적 경향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어 민주노조운동 내에서 ‘노선’의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민주노총의 출범 직후 1기 집행부가 내건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서였다. ‘사회개혁적 요구’를 전면에 내걸어 ‘사회적 합의’를 통해 국민적 지지를 획득해야 한다는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노선에 반대하며, 노동자의 ‘계급적 요구’와 ‘계급적 단결’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켜 나가야 한다는 ‘계급적 노동운동’노선이 제기됐다.

 

이러한 노선적 대립은 1996~97년 노동법개악 저지총파업 이후 총파업에 대한 평가와 노동자정치세력화를 둘러싼 입장의 차이로 분화되었다. 노동법개악저지 총파업의 패배가 노동자출신 국회의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 세력들은 이후 ‘국민승리21’을 거쳐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건설로 나아갔다. 이에 대해 노동자민중의 전면적인 투쟁으로 진전시키지 못한 지도부의 ‘국민주의적 노선’과 ‘유연한 전술’이 패배의 원인이었다고 평가한 세력들은 변혁적인 계급정당 건설로 나아갔다. 민주노조운동 내 노선의 차이와 분화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둘러 싼 차이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민주노조운동 내에서 ‘정파’간 분화와 갈등이 본격적으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과정은 1998년 1월 정리해고제 직권조인 이후 거세져가는 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 공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둘러싸서였다. 특히 당시 김대중 정권의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할 지 여부를 둘러싸서 정파간 입장의 차이와 대립은 첨예해졌다. 물론 겉으로는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차이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크게 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대세라고 보고, 자본의 틀 내에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가능한 방안을 모색해보자는 입장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 그 자체에 맞서 비타협적인 투쟁을 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으로 대별되었다. 현실에서는 이 두 가지 모두 현실화되지 못했고, 그 결과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더욱 깊어지고 확장됐다.

 

이와 더불어 민주노조운동의 전략적 과제의 하나인 ‘산별노조’ 건설을 둘러싸서도 산별교섭과 조직형식 전환 중심으로 산별노조를 건설해 나간 입장과 아래로부터의 계급적 산별투쟁을 통해 산별노조를 건설해 나가자는 입장이 대별되었는데, 이 역시 두 주장이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민주노총의 ‘사회연대전략’을 둘러싸서, 사회연대전략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과 ‘정규직 노동자 양보론’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 아래서 민주당까지 포괄하는 반MB연합을 결성하자는 주장과 반MB연합은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의 연장이며 반신자유주의 진보대연합을 결성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 서로 논란을 벌이고 있다.

 

민주노조운동 전체가 ‘반자본’ 정파로 서나가야

 

이렇게 민주노조운동 내 정파는 우파-중앙파-좌파의 3분립 구도로 형성⋅분화되어 왔다. 정파의 역량과 실력의 한계 때문에, 또 정파운동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정파적 이기주의나 종파주의적 활동방식 때문에, 정파 운동이 때론 대중조직운동에 폐해를 끼치고 질곡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정파’의 형성과 발전과 분화는 민주노조운동의 질적 발전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정파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전망과 주장을 하는 정파냐’, ‘어떻게 활동하는 정파냐’, ‘어떻게 정치적 책임을 지는 정파냐’로 논의 지형을 구체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정파‘다운’ 정파로 서나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운동 전체가 한국사회에서 ‘반자본’ 정파로 굳건하게 서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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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c 한국사회에서 ‘인간’으로 살아남는다는 것

21c 한국사회에서 ‘인간’으로 살아남는다는 것

 

<진보교육>36호(2009.12.월호)

 

이렇게 2009년을 보낼 수는 없다

 

‘눈물’과 ‘분노’로 얼룩졌던 2009년 한 해도 다 가고 있다. 아니 ‘눈물’과 ‘분노’마저도 메말라 버리고, 오직 ‘두려움’과 ‘절망’만이 강요됐던 한 해가 지나고 있다. ‘용산 참사’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가 우리에게 강요한 것은 노동자와 서민을 삶의 터전에서 내쫓는 ‘구조조정’과 ‘재개발의 광풍’이 계속될 것이라는 ‘경제적 폭력’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었다.

생존을 위한 어떤 몸부림도 이른바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을 피해갈 수 없을 거라는 ‘공권력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 역시 뼈에 사무치게 강요됐다. 더 더욱 이러한 경제적⋅정치적 폭력을 얼마든지 은폐하고 왜곡하고 정당화시킬 수 있는, 사법부와 언론이라는 ‘또 다른 폭력’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 점이 우리를 절망으로 내몬 한 해였다. 그래서 대자본과 국가권력과 사법부와 언론의 지배동맹이 강요한,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눈물’도 ‘분노’마저도 뒤덮어 버리려 한 2009년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하지만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이 어쩔 수 없는가? 이 위기와 두려움과 절망의 시대에 그나마 살아남으려면 눈물도 분노도 거두거나 삭힐 수밖에 없는가? 거대한 지배동맹의 ‘폭력’ 앞에서 주눅 들고, 숨죽일 수밖에 없는가? 약간 비겁하게라도 눈을 감고 숨을 죽이고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는가? 살아남을 수는 있지만 진정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가?

그리고 다시 이 사회에 물어야 한다. 냉동고에 갇힌 용산 철거민들을 그대로 두고 이 한 해를 보낼 수 있는가? 감옥에 갇히고, 거리를 떠도는 쌍용차 노동자들을 방치하고 이 한 해를 보낼 수 있는가? 이렇게 2009년을 보낼 수 있는가?

 

죽거나 조금 비겁하거나, 아니면---

 

2009년은 우리에게 ‘위기’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었던 한 해였다. ‘나’ 혹은 ‘나의 가족’, ‘나의 직장’만이 아니라, ‘우리’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를 물었던 한 해였다.

저임금과 삶의 불안으로 고통받는 850만의 비정규 노동자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정규직 노동자들, 끝 모를 입시경쟁에 내몰리는 청년학생들, 직업 자체를 가져볼 기회조차 박탈당한 수백만의 청년실업자들, 저임금과 무권리 속에서 가장 바닥의 일을 떠맡은 45만의 이주노동자들, 400만이 넘는 금융피해자, 농업포기정책과 기업농 정책으로 하향 분해되는 300만의 농민들, 또 끊임없는 해체의 위협에 직면하면서 불안한 생업을 이어가야 하는 500만 자영업자들, 철거민과 노점상들--- 이들‘과 함께’, 이들‘이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물었던 한 해였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가”를 물어야 한다.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런 현실을 ‘나’만은 피할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아왔다. 10여 년전 IMF 외환위기 이후 ‘위기 극복’이라는 명분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이 전면화 될 때, 한국사회가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경쟁논리에 의해 철저하게 재편되어 나갈 때, 그래도 내가 ‘경쟁력’을 갖추면 나, 나의 가족, 나의 직장, 나의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열심히 일하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내일이 오늘보다는 좀 더 나아질 거라는, 그래서 두 눈 감고 버티고, 잔업특근 더하고, 투잡을 하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시간을 쪼개 자격증을 따고, 영어를 공부하고, 스팩을 늘리고 처세술을 익혀 몸 가치를 높힌다면, 그래서 남과의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앞서 나갈 수 있다면, 아니 최소한 밀리지는 않아야 나와 내 가족이 지금보다는 낫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가냘픈 희망을 가꾸며 살아 왔다. 나와 내 가족의 모든 희망을 ‘좋은 일자리’와 ‘집 한 채’와 ‘자식 좋은 대학 보내는 것’에 가두며 두 눈 질끈 감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환상’이었고 ‘욕망’이었다. 2008~9년 미국발 세계대공황은 다른 무엇보다도 경쟁에서 이겨 ‘혼자 살아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냉혹하게 보여주었다. 자본주의 경제공황은 우리들의 일자리와 임금, 민주적 권리만이 아니라 “좀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와 희망조차도 송두리째 앗아갔다. 우리들은 삶의 ‘근거’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삶의 ‘희망’조차도 빼앗기고 있다.

각 자 열심히 노력하면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실날같은 기대도 더 이상 부질없게 됐다. 20 대 80의 구조, 아니 10대 90이라는 사회적 양극화는 더욱 탄탄하게 구조화되었다. 재산과 소득은 물론 교육, 의료 혜택 등 경제와 사회 전 부문에 걸쳐 양극화와 불균형은 점점 심화되고 있다. 2009년 모든 갈등의 진원지였던, 한국 사회 전체를 대립과 갈등으로 몰아갔던 이명박 정권은 이런 경제위기 시기의 자본과 지배세력의 충실한 대변자일 뿐임이 확인됐다. ‘소통’보다는 ‘독단’과 ‘폭력’으로, 가진 자들을 위해 위기 비용을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전가시키는 철저한 신자유주의 정권일 뿐임이 명백하게 확인됐다.

이런 절망적이고 숨막히는 현실에서, 생존권을 위한 최소한의 몸부림조차도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MB정권 아래서 노동자와 서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아직 조금의 여유가 있다면 숨죽여 비겁해 지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세상을 바꿔서라도 함께 살아남기

 

다시 가다듬어 물어야 한다. 그런가? 죽거나 비겁하게 숨죽이거나 둘 가운데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가? 우리는 진정 무기력한가? 만약 우리가 과거와 같이 자본의 경쟁논리를 우리의 욕망으로 내면화해서 계속 살아간다고 하면 우리는 이런 현실을 피할 수 없다. 10 vs 90으로 양극화된 현실에서 90의 원인이 10이 아니라, 모든 90이 10될 수 있다는 헛된 기대와 환상과 결별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절망할 수밖에 없다.

MB 정권은, MB 정권의 독단과 폭력성은 바로 우리에게 내면화된 ‘경쟁 논리’와 ‘욕망’과 헛된 ‘기대’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후퇴’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구체화된 자본의 논리, 경제공황으로 드러난 자본의 위기 자체에 직접 대면해야 한다.

 

문제는 자본주의다. 위기에 직면한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가 문제이다. 우리의 욕망으로 내면화된 ‘자본의 경쟁 논리’가 문제다. 이 지점에 직접 대면하고, 성찰하고, 그래서 찾아야 한다. “함께 살아남을 방법”을. 내가 살기 위해 남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 ‘무한경쟁’,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세상을 끝장내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찾아내야 한다. 필요하다면, 세상을 바꿔서라도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 아니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면 세상을 뒤집어 바꿔야 한다.

2009년 용산과 쌍용차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이냐”고. “21c 한국사회에서 진정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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