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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12/09
    늘어지게 자고 얘들하고 놀고 게임도 하고(2)
    모험가
  2. 2006/11/28
    레닌 육성이 나오는 연설모습을 보고 들었네!
    모험가
  3. 2006/11/08
    핵전쟁이나 전쟁이(4)
    모험가
  4. 2006/10/13
    벌거숭이 임금님
    모험가
  5. 2006/10/10
    정운영의 마지막 강의 '자본주의 경제산책'을 읽다가
    모험가
  6. 2006/10/09
    북이 핵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데...
    모험가
  7. 2006/10/03
    아! 설레어 기다리던 그 추석(4)
    모험가
  8. 2006/10/01
    이럴수가!!!(4)
    모험가
  9. 2006/09/27
    노기연에서 <세계화와 물>이 출간되었습니다.
    모험가
  10. 2006/09/11
    가을이 성큼...(6)
    모험가

난 추위가 좋다.

추위는 옷을 여미게 하면서 내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도 하는 것 같다. 인생이나 삶이나 역사를 진지하게 대면하게 해 주는 듯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쌍클한 추위가 좋다.

그러나 너무 추우면 내면의 성찰보다는 추위 그 자체를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애쓰느라

마음을 들여다 볼 여유를 갖지 못할 것이다.

 

난 가끔 경제적 어려움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이것이 날 운동에 붙들어매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시기에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다면 운동을 떠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가난한 민중의 일원인 나!

 

그러나 이 이상 더 어려워지면 내가 운동을 더 지속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극도의 추위가 그런 것처럼, 극도의 곤궁은 다른 여유를 주지 않을 것 같다.

지금 상태? 경계에 있는 것 같다.

 

사회진보연대가 8년만에 후원주점을 한다. 더 어려운 단체들도 있을텐데 미안하기도 하다. 더구나 우리가 같이하고자 하는 비정규직들에게 경제적 후원을 해 달라 할 수 없는 것도 문제다.

 

암튼 한다. 사회진보연대 활동가들 대부분도 극도의 곤궁으로 너머갈랑말랑하는 경계에 있다고 여겨진다.

 

사회진보연대가 이번 주점을 통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적당한 가난'을 확보할 수 있었으면 한다.

 

동지들의 적당한 관심을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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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지게 자고 얘들하고 놀고 게임도 하고

테레비도 봤다. 한 가지 일을 끝내서.

 

심신이 개운하다. 이런 날이 자주 있어야 하는데!

 

애들하고 노는 것은 왜 이렇게 좋지?

 

우리 주원이 어른 되면 걱정거리(군대도 가야하고 등등) 많아지니 안자랐으면 좋겠단다.

 

나도 우리 얘들이 지금 정도에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허나...

 

애들 혼내키는 일도 재미있다.

 

두 놈이 잘못해서(물건 어질러 놓는 게 대부분인데 계속해서 잔소리를 하고 손바닥을 때려도 안고쳐 진다. 고질이다) '손바닥 내' 하면 둘째 주효는 언제나 '나먼저' '나먼저' 한다. 손바닥을 싹싹 비비면서.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속담(?)이 왜 만들어졌는지는 우리 주효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놈한테 세게 때릴 수가 없다.

 

 

 

아 두 가지 일만 무사히 끝내면 연말이 오늘처럼 이렇게 개운할텐데...

 

당장 화요일 일이 문제네. 지금부터 열심히 해도 될까말깐데 계속 놀고 싶네. 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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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육성이 나오는 연설모습을 보고 들었네!

엠비씨에서 총 5부작으로 만들어진 러시아혁명 다큐멘타리 중 26일에 방영된 2부에서.

 

옛날 톨스토이의 육성을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듣고 놀랐는데... 그리고 그 내용도 어른 말 잘듣고 공부 잘 하라는, 여느 할아버지들도 다 할 법한 내용이어서 더욱 신기했는데.

 

이번엔 혁명 직후의 레닌 육성을 듣다니 참. 얼굴모양과 눈매에 어울릴 목소리라면 카랑카랑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더군.

 

오래 살다보면 녹음되지 않은 사람(마르크스) 목소리도 들을 날이 올 수 있으려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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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이나 전쟁이

쌓여있는 핵무기 양이나 무기양에 비해서는 적게 일어나는 것(사실일까? 아,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죽을 죄를 짓는 것이겠지만요)은 (핵)무기를 만든 자본에게 정부에 무기를 납품하는 즉시 돈이 지불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이것들이 실제로 소비가 되어야 대금이 지불되어야 한다면 전쟁은 더 많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물론 무기에 따라서는 쌓이는데 한계가 있는(그래서 자본이 돈을 못버는) 것도 있고,  실제로 소비가 되어야만 새롭게 생산이 되는 것도 있고, 무기개발 예산에 자신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해서 끊임없이 전쟁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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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숭이 임금님

북한 핵시험과 관련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다음 이야기도 꼭 빠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북한 핵시험에 대해 기존 핵 보유국들은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북한 핵보유에 대해서 비난할 자격이 있는 나라들은 핵을 보유하지 않은, 더 나아가 핵보유 시도를 하지 않은 나라들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기존 핵 보유국들이 더 난리다. 미국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고, 비교적 핵을 최근에 가지게 된 중국, 인도, 파키스탄 마저 비난 일색이다. 후안무치도 이만저만 아니다. 이들은 자기네들은 핵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남들은 못가지게 한다. 

 

자신들은 핵을 가지게 되었지만 더 이상 확산은 안된다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남들이 핵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했어야, 즉 비핵국가들을 적대 혹은 배제하지 않았어야 했고, 자신들의 핵폐기 프로그램을 신속히 가동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은 하지 않고 무조건 다른 나라는 핵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핵 보유 시도를 하는 나라들을 비난만 한다.

 

또 가소로운 것은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은 자신들은 핵을 적절하게 관리 통제할 수 있지만 북한 같은 나라는 그런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관리 통제 능력으로 말하면 제국주의적 자본의 이익에 이끌릴 가능성이 높은 미국이 가장 문제가 되지 않을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북한 핵보유가 잘한 짓이라는 게 아니라 NPT 하에서 핵독점을 하고 있는 국가들의 행태가 웃기다는 이야기다.

 

최소한 이들은 북한 핵보유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이는 "임금님은 벌거숭이다"고 외친 어린이의 맑고 투명한 눈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어느정도 상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더라도! "임금님은 홀라당 빨개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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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의 마지막 강의 '자본주의 경제산책'을 읽다가

재미있거나 울림이 있는 부분을 발췌한다. 앞 장들을 읽을 때는 생각을 못해서 못했고.

정운영선생의 글은 학술적인 글일지라도 다른 학술논문과는 달리 논문투가 아니다. 유려한 수필같은 느낌을 준다. 기자출신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대중적 글쓰기의 노력의 소산인지 아니면 또다른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선생의 글이 쉽게 읽히는 것은 아니다. 예스럽고 함축적인 문장때문으로 보인다. 이번 책은 5장을 제외하곤 비교적 쉬웠다. 5장은 시간있으면 나중에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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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다른 무엇보다 문화에는 국경이 있어야 한다. 국경 철폐를 외치는 세계화 문화는 진정한 의미의 보편적 문화도 아니고, 각국 문화가 유기적으로 배치된 다원적 문화도 아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는 문화조차 온전하지 못하다. 세계화 문화는 세계화만큼 불결하다. 소비 만능의 저속한 양키즘이 세계 문화를 지배하고 세계화 문화의 표준으로 등장하면서, 각 민족의 고유문화는 저항 능력을 상실한 채 거기 유린당하기 때문이다. 여기야말로 지식인의 역할이 절실히 필요한 지점이다.


에서


"저는 신파조든 연속극이든 감동이 자꾸 사라지는 이 시대의 삭막한 풍경을 아자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가을에 집착하는 이유요? 폐기 처분 선고가 얼마 남지 않은 제 연배에게 가장 상징적인 계절이 가을이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1990년대는 제게 모멸과 배반의 시대였습니다. 저는 세칭 명문이라는 S대학교와 K대학교에서 각기 10여 년 이상 강사 생활을 했습니다. 한때는 40~50개의 학과에서 200~300명의 학생들이 제 강의에 몰려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993년께 이른바 엑스 세대(X-generation)가 나타나면서 강의실에서 학생이 쑥쑥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강의 선택의 기준도 무엇을 배워보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과목을 고르면 쉽게 학점을 따느냐로 바뀌는 듯했습니다. 정말 순식간의 변화였습니다.

다시 10년을 거슬러 1983년 그때쯤 저는 막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모든 첫 경험이 어색한 것처럼 저의 첫 강의도 어색했지만, 다행히도 제가 공부한 분야와 시대 상황이 잘 맞았습니다. 저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했고, 제가 알기로 한국 학생으로는 최초로 외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귀국 후의 현실은 아주 처절했습니다. 캠퍼스는 최루탄 가스로 항상 매캐했고, 어느 해 5월에는 학생들과 젊은 근로자들의 분신과 의문사가 무려 10여 건에 이르렀습니다. 확실히 1980년대는 분노의 시대였습니다. 그 치열했던 시대가 1990년대 들어 저렇게 변절한(?) 데에 우리는 그저 당황하고 허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60년대 통틀어 수출 상품의 3위에 오를 정도로 가발은 경제 성장에 ‘효자 노릇’을 했습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한강》을 보면 당시의 애처로운 사연들이 나옵니다. 엿장수는 고무신 떨어진 것이나 양은 냄비 뚫어진 것 대신 머리카락을 받았고, 전국을 돌며 시골 처녀들의 머리칼을 사들이는 전문 수집상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정조를 중히 여겼던 이 땅의 아낙네들이 돈 몇 푼 떨어진다고 쉽게 머리카락을 내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전 여성의 파마화’ 운동이었습니다. 수집상들은 흔히 파마 미용사를 동반하고 전국을 돌았는데, 그것은 파마로 이렇게 멋을 내줄 테니 어서 머리카락을 자르라고 ‘꼬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파마 유행에는 이렇게 조국 근대화의 애환이 스며 있습니다."


"전망은 점괘로 끝나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망 대신 희망을 얘기하고 싶은데, 2000년대 시작이 무엇보다 성찰의 시대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희망 사항입니다. 점괘 수준의 전망에서 보자면 서구학자들이 말하는 새로운 ‘유목 사회’의 도래가 그럴듯합니다. 유목민은 새로운 초지를 찾아 계속 움직이며, 긴 여행을 무사히 마치는 자만이 살아남습니다. 정착과 안정이 없는 이런 현실이 우리의 장래가 될 공산이 아주 큽니다. 학자들은 현대 유목민의 특징을 정보․통신 기술과 문명에서 찾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평생 직장이나 종신 고용이 사라진 현대인의 직업 불안에서 찾고 싶습니다. 이 직장에서 내보내면 저 직장을 찾아 기웃거리는 것이 유목민 생활과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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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 핵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데...

반전반핵평화를 위한 대장정이 시작되어야겠군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군사 세계화, 그리고 핵의 확산이 가져올 위험을 근본에서 제거해나가는 운동이 재활성화하지 않는다면 향후 10-20년의 세계가 누구 말대로 19세기말 20세기 초와 다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겠군요. 오히려 더욱 가공할만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지속되었어야 할 반전반핵평화운동은 죽고(소동구 붕괴 이후 평화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몇몇국가의 핵독점체제가 근본적으로 흔들리지 않으면서, 급기야 북한의 핵무장까지 불러들이지 않았나 싶네요.

악의 축 제거, 대테러전 등이 정권존립의 거의 유일한 근거였던 미국의 부시정권에게 커다란 타격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라크전의 수렁에 빠진 것에 이어.

 

그러나 우리로서는 쇠퇴하는 헤게모니를 무리하게 유지하고자 미국의 지배세력들이 어떤 행동을 벌일지 모른다는 거지요. 이북의 핵보유는 그런 점에서 한반도와 세계에 위험을 가중시키는 행위랄밖에 달리 규정할 수가 없군요. 북한이 이렇게 나오게 된 데는 북한 정권뿐만 아니라 전세계반전반핵평화운동세력의 무능도 한 몫을 했다고 자기비판을 당연히 해야겠고요.

 

지금부터라도 반전반핵평화대장정을 다시 시작해야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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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설레어 기다리던 그 추석

 

우리 어릴 적 동네 추석은 그네를 매기 위한 새끼 꼬기로 시작된다. 한 달 전 혹은 2-3주 전부터 기다려 오던 추석이 2-3일 뒤로 바짝 다가오면 초등학교 높은 학년 정도 되는 아이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볏짚을 걷는다. 양력으로 쳐 추석이 늦어 일부 가을걷이를 한 경우는 새 볏짚을,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작년 볏짚을 걷는다. 우리 집같이 농사가 적은 경우는 볏짚을 내놓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볏짚을 걷으면 동네 아이들은 어느 집 마당 한 귀퉁이를 차지해 밤 새 새끼를 꼰다. 하루 저녁이면 충분했는지 아니면 2-3일 걸렸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3-40년 전 불이 밝을 리가 없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새끼를 꼬면 보름달이 채 되지 못한 달이 둥실 떠올라 우리를 비쳐주었던 것 같다.

새끼를 다 꼬면 동네 안산에 수평으로 쫙 뻗은 가지가 있는 튼튼한 소나무를 찾아 그네를 맨다. 그 소나무 앞은 그네를 탈 때 거칠 것이 없어야 한다. 우리 동네 안산 초입에는 그네를 매기에 적당한 소나무가 있어서 대개 그 나무에 그네를 맸다. 간혹 조무래기들만의 ‘2부 리그’를 위한 그네를 매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침 차례를 끝내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네를 탄다. 아주머니들, 청년들, 그리고 아이들(우리 동네는 집성촌이어서 대부분이 가깝거나 먼 친척들이었다.)이 그네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네를 탄다. 대개 남자어른들은 그네를 타러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점잔을 빼느라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자랄 때만 해도 동네 남자어른들 중에는 점잔을 빼면서 양반 상놈, 남존여비 등을 따지는 봉건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 동네 아저씨 중에 지금은 돌아가신 관신 아저씨라는 분이 있다. 이 아저씨가 마을 회관에서 다른 동네아저씨들과 모여 쉬고 계셨는데 어디에서 ‘불이야’ 하는 소리가 나자, 긴 담뱃대를 물고 일어서서는 “어느 지저분한 집구석에서 불이 났다 하느냐”라고 했다는데, 정작 불이 난 집은 관신 아저씨 집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어머니를 비롯해 아주머니들이 모여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자주 들었는데 이런 점잔빼는 남자어른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조소였던 셈이다. 이런 분들이 아낙들과 조무래기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이들과 함께 그네를 탈 리 만무다.

그네가 길고 무거웠고, 그네가 놓인 곳이 산이라 아무래도 비탈이 져 있어 그네를 탈 때는 그네 양 옆에서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발을 채 올리기 전에 그네가 앞으로 나가버리려 해 불안하게 그네에 올라타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잖아도 그네를 탈 때면 무섬증이 이는데 이럴 때면 더구나 그네 밑이 휑하니 뚫려 시원한 느낌이 들다 못해  머리가 쭈뼛쭈뼛 섰다. 그래도 용기를 내 서 너 번 구르면 그네는 그야말로 ‘창공을 차고나가’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 동네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아무래도 가장 신기했던 것은 아주머니들이 그네를 타는 모습이었다. 평소에는 조용하게 일만 하시던 아주머니들이 까르르 까르르대거나 박장대소를 하면서 시끌시끌하게 노시는 모습도 신기한 모습이려니와, 그네를 타면서 치마를 펄럭이는 모습도 신기한 모습이었다. 평소 시어머니의 시선과 가부장의 권위에 짓눌려 있다가 이날만은 해방의 날이었던 것이다. 아주머니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웃어 제치고 큰 동작으로 그네를 구르는 모습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가끔 저게 우리 어머니와 큰 어머니, 그리고 사촌 누나의 모습일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청년들 아이들도 한데 어울려 그네를 타다 좀 지치면 아이들은 집으로 들어와 평소에는 먹어보지 못한 맛난 음식들, 송편과 호박떡, 세대와 가오리, 각종 부침이나 전 등을 주섬주섬 먹고는 다시 동네 앞으로 나간다. 그리고는 편을 갈라 각종 놀이를 하거나, 구슬치기도 하고, 껌도 사서 씹고, 풍선도 뽑아서 불었다. 풍선은 대개 뽑기로 사는데, 종이판 위에는 큰 풍선, 작은 풍선, 중간 것이 번호를 달고 걸려 있고, 종이판 사분의 일 정도 자리를 차지하는 밑에는 안쪽으로 번호가 적혀있는 동그란 번호표가 있어 선택해 떼어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재수가 좋으면 커다란 풍선이 걸리고, 운이 없으면 작은 풍선이 걸린다. 꽝은 없었고 아무리 못해도 작은 풍선을 차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커다란 풍선이 걸리면 왜 그리도 기분이 좋았는지! 그야말로 ‘기분이 째졌다’. 사실 나는 이 풍선 뽑기도 매 추석마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간혹 가야 한번씩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요즘이야 무슨 행사 있으면 공짜로 나눠주는 게 풍선인데... 하지만 요즘 아이들이 내가 어렸을 때 어쩌다 가질 수 있었던 풍선을 가지고 놀면서 느꼈던 ‘째지는 기분’을 알 수 있을까 모르겠다.

추석날 저녁에는 매년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콩쿠르 대회’, 즉 노래자랑 대회가 열렸다. 마을 노래자랑 대회치곤 이름이 너무 거창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참여하고 구경하는 사람들의 긴장이나 설레임으로 보면 오늘날 열리는 여느 세계적인 음악 경연대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인근 동네 노래 잘하는 처녀 총각들이 다 모여들었다. 대회준비와 심사위원은 대개 동네 청년들이 맡았는데, 개중에는 서울 등 대도시에서 돈벌러 갔다가 추석을 맞이하여 귀향한 청년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도시에서 돈을 벌어 성공을 했든 안했든 일정한 기부를 해야 했다. 콩쿠르 대회는 입장료를 받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노래가 허공으로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는지 흰 천막을 치고 진행했다. 그리고 바닥엔 멍석을 깔았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노래들이 있다. “이리이 가알까 저어리 가알까 차라리 돌아가알까 세 갈래기일 삼거리에 비가아아 내리이인다”(김상진의 ‘이정표 없는 거리’), “해다앙화 피고 지이는 섬마으으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가악 서언새에에엥님 열아홉살 섬새액시가 순정을 바쳐 사아랑한 그 이름은 총각선생님 서우울엘라앙 가지를 마오 가지이르을 마오”(이미자 ‘섬마을 선생님’),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아면 쓰으으라린 이별마안은 없었을 거어엇을”(남진의 ‘가슴 아프게’),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안개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배호의 ‘안개낀 장충단 공원’) 등등. 내가 기억하는 콩쿠르대회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는 단연 김상진의 ‘이정표 없는 거리’였다. “차라리 돌아갈까” 할 때 약간 허스키하면서도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꺾는 창법이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아마 그 해 연말에 가수왕 정도를 차지하지 않았을까.

콩쿠르대회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에피소드가 있다. 아마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직전 내 나이 일곱 살 나던 해,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약  삼년 전 해가 아닌가 싶다. 우리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이 모이는 곳마다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나에게 노래를 시키셨다. “아, 이 놈이 이번 콩쿠르대회에 나간단 말이오” 하시면서. 나는 내가 추석 콩쿠르대회 무대에 선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었다. 아버지 말씀이 “니 형이 서울에서 내려와 대회 준비를 하고 있으니 넌 참가비 안내도 돼. 노래만 잘 하면 돼”라고 하시니 믿을 수밖에. 아무튼 나는 동네어른들을 돌아다니면서 실컷 연습을 하고, 추석저녁에 콩쿠르대회에서 무대에 서기 위해 동네 조무래기들과 같이 멍석위에 옹기종기 앉아있었다. 물론 다른 아이들도 내가 노래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같이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차례가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잠결에 ‘박하순’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도 “하순아, 니 부른다. 나가”라며 등을 떠밀지 않는가. 후다닥 무대위로 뛰어올라 갔다. 그런데 조금 높이 설치된 마이크를 간신히 잡으려는 순간, 저 뒤쪽에서 어떤 ‘처녀’가 천천히 무대를 향해 오고 있지 않은가. 퍼뜩 ‘아, 내가 아닌갑다’하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구경하던 모든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웃어댔다. 올라오던 처녀가 당연히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아! 야속한 아버지. 그 뒤 기억은 정확히 없다. 아버지에게 왜 거짓말을 하셨냐고 내가 따지고 들었는지, 그리고 아버지께서 어떤 변명을 하셨는지도. 이 장면이 내게 남은 가장 강렬한 아버지 모습이다. 가난한 종손 집 막내아들로 태어나셔서 머슴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일만 하시다 조카딸을 시집보내고 나서 자신은 늦게야 결혼을 하시고도, 한량거리고 돌아다니신 큰아버지들을 대신해 집안 대소사를 챙기셨던 아버지, 집안 전체가 지원을 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조카가 고향에 오면 대처소식에 목말라 밤새 조카의 서울이야기를 들으셨다는 아버지, 좀 오래 사셔서 내가 어떤 청년과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좀 가르쳐 주셨으면 좋았으련만.

추석에 대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래도 추석이 어서 오길 손꼽아 기다린 것, 바로 그 자체다. 읍내 장에 간 어머니가 혹 사탕이라도 사오실까 하고 동네 입구에서 쪼그리고 기다리던 모양새로 몇날 며칠을 기다렸던 것 같다. 배고픈 시절이어서 평소에는 먹어보지 못한 맛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신기한 풍선과 껌들을 불거나 씹을 수 있어서였을까. 이것들도 작은 이유에 낄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추석을 전후해 동네에 스며드는 축제분위기가 어린 마음들을 그렇게 들뜨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당시만 해도 농촌이 붕괴되기 전이어서 마을에 사람들도 많았고, 연령대도 어린아이에서부터 청장년 노인들까지 고르게 분포해 있었다. 어린애 울음소리가 그친 지 오래고, 학교에 다닐 아이들이 없어지면서 폐교가 느는 오늘의 농촌에 비춰보면 그야말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풍성한 시절이었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추석 같은 큰 축제 때 각종 연희와 놀이를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것에 필요한 각종 도구들이 마을회관에는 고루 다 갖추어 있었다. 무엇보다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심적 시간적 여유들이 있었다.

나중에 보니 우리 동네는 한 집 당 농사면적 등으로 보건대 상당히 가난한 동네에 속한 것을 알 수 있었고, 우리 집은 특히 가난했다. 농사가 주업인 동네에서 논 2마지기 밭 3마지기였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도 난 가난해서 불행하다는 느낌이나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곡식이 없어서 점심때는 언제나 고구마로 때웠고(고향에서 고구마점심이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서울 와서 고구마를 먹을 때면 언제나 구역질이 났었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고구마를 값비싼 돈을 주고 사먹을까 의아해 했다.), 저녁에는 흰 쌀죽을 쒀먹은 적이 많았는지 그게 싫어 부엌 문턱에 앉아 “엄마, 또 죽쒀?”라고 했다고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동정반 놀림반을 당했을 정도로 가난했는데도 말이다. 물론 내가 철이 덜 들어서 행이니 불행이니 그런 것 자체를 몰랐을 수도 있다. 어머니 아버지는 우리 다섯 형제와 누나 배를 곯릴까 두려워 노심초사 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어머니 아버지를 포함하여 추석이 되면 온 동네 사람들이 축제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서로 나누고 집단적인 놀이와 연희를 즐겼다. 동네 모든 사람들 얼굴에는 재미와 즐거움으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래서 그리도 설레어 추석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요즈음 추석엔 뭐가 남아있는가? 시장에서 사온 송편, 극장, 콘도, 캐러비언 베이, 해외여행. 도시인들의 추석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시골 추석도 신명이 나던 옛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다.

내가 어렸을 때와 현재의 한국사회를 비교해 보면 평균적인 경제적 풍요는 그야말로 천양지차다(물론 있는 사람은 있고 없는 사람은 없어서 오늘날도 어렸을 적 우리 동네 우리 집 같은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사회는 여전히 경제발전과 성장을 해야 한다고, 3만달러에 도달해야 한다고 야단법석이다. 주류언론은 매일 경쟁력이 어떻고 생산성이 어떻고 주가가 어떻고 떠들어 댄다. 오다가다 경제학을 조금 접한 사람으로서 이런 지표들을 전혀 무시는 할 수 없지만, 그러는 사이 사람 사이에 오가던 정이나 집단적인 문화나 신명 등은 전부 없어져버려 눈을 씻고 찾자 해도 찾을 수가 없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공동체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물질적인 부가 고르게 분배가 되는 것도 전혀 아니고 말이다.

공선옥 씨가 쓴 창비 주간비평(프레시안 참조)에 필받아 이 글을 쓰게 되었다(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두 번씩이나). 성장 성장 외치면서 우리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들을 얼마나 파괴해 왔는가, 한미FTA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의 취지의 글이었다. 이번 추석엔 사람들의 공동체가 진정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한 번씩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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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수가!!!

내가 이 블로그에서 쓴 글 중 가장 긴 글, 추종을 불허하게 긴 글, 약 5-6시간 고심고심해서 쓰던 글을 날려버렸다. 글을 쓰고 올리려니 로그인 한지 너무 오래되어서 다시 로그인하란다. 로그인하면 글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그런데 비밀번호를 잘 못쳤는지 로그인이 안되더니 다시 하니 글이 날라갔다. 아아아아아아아!!!!

추석과 관련한 추억에 관한 글이었다. 이를 다시 기억을 되살려 다시 써야 하나. 이런 사태를 우려해 글을 쓰다 아래아 한글에 복사를 하려했더니 안되더만. 아 이를 어쩌나.

내가 컴을 하면서 당한 가장 커다란 사고가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아, 이를 학습비용으로 치기엔 너무나 비싼 학습비용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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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연에서 <세계화와 물>이 출간되었습니다.



 

 



 

 1. 신간 안내


『세계화와 물』


데이비드 몰 외 지음/노기연/271쪽/가격 10,000원




2. 신간 소개


이 책은 2005년에 출간된 『공공의 물을 다시 주장하며 - 세계적인 성과, 투쟁, 비전』(Reclaiming Public Water - Achievements, Struggles, and Visions from Around the World)을 편역한 것이다. 세계화와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국제적 연구를 진행하는 <초국적연구소>(TNI, Transnational Institute)와 사회정의와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 기업권력을 감시하는 운동단체인 <유럽기업감시>(Corporate Europe Observatory)에서 펴냈다. 세계 20여개 나라의 수도시설 관리자, 물전문가, 노조활동가, 반사유화 운동가, 학자 등이 이 책에 참여하여 물 사유화 반대운동의 경험과 다양한 공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3. 대표 저자 및 기관 소개


데이비드 홀 그리니치 대학 국제공공노련연구소(PSIRU) 소장


<초국적연구소>(TNI, Transnational Institute)

현재와 장래의 세계적 문제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활동가 겸 학자들의 국제적 네트워크로서 1974년에 설립되었다. TNI는 민주적이고 공정하고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운동을 이론적으로 지원한다. 월든 벨로, 수전 조지, 보리스 카갈리츠키 등이 참여하고 있다.

http://www.tni.org 


<유럽기업감시>(CEO, Corporate Europe Observatory)

암스테르담에 소재한 연구조사 및 캠페인 단체이다. CEO는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환경을 위협하는 기업과 로비그룹들의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감시하는 활동을 한다. http://corporateeurope.org


<도서출판 노기연>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노기연)의 출판사 등록명이다.

노기연은 1991년에 설립되어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의 맥락에서 민주노조운동을 지지 지원하는 단체이다. 

문의전화 02-793-4022

이메일 wima@jinbo.net

홈페이지 http://wima.jinbo.net



4. 책속에서


“현재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민중 중심의 물 관리 시스템을 개선하고 확장하는 환경과는 정반대에 있다. 무역 자유화 및 신자유주의 개혁은 남반구 인구 대부분에게 실업과 경제 주변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누적된 영향은 핵심 공공서비스를 발달시키는데 근본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다. 지속적인 해결책은 이 발전 모델이 세계화의 다른 모델, 즉 공공적 해결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적이고 공공적인 해결방안으로 대체될 때에만 가능하다.”


5. 목차


- 발간사

- 책 머리에

- 서문/데이비드 홀

1부 - 성공적인 물 공공성

포르투알레그레: 공적이고 만인이 이용가능한 물

볼리비아: 협동조합에 의한 기본적인 상하수도 서비스 관리

물에 대한 민중의 대안: 인도 케랄라 주의 올라바나가 길을 보여 주다

공공-공공 협력: 말레이시아 물 관리의 대안 전략

근원으로 돌아가다: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물 서비스의 재-시영화

미국에서 물 규제와 관리의 민주화

독일: 계속해서 후퇴하는 물 서비스의 공공성?

아르헨티나의 수도 협동조합

콜롬비아 공공서비스 : 민주주의의 문제


2부 - 진행 중인 노력

브라질 헤시피 : 시민에 의한 상하수도 서비스 건설

볼리비아 코차밤바 : 물 전쟁 이후 <코차밤바 상수도 서비스>와 <물 위원회 연합>의 협력

베네수엘라: 민중 중심의 상하수도 서비스 쟁취투쟁 경험

시류를 거슬러: 가나 사벨루구의 공동체에 의한 물 통제

아르헨티나: 노동자 협동조합이 엔론 철수 이후 상황을 장악하다

남아프리카 : 공공-공공 협력 기반의 수도서비스 실험


3부 - 민중중심의 물 공공성을 위한 투쟁

우루과이: 물을 위한 사회적 투쟁의 승리

남아프리카 물 사유화 반대 투쟁

우크라이나: 빈곤과 사유화에 저항하는 여성 행동

슬로바키아 트렌신에서 수도 서비스 사유화의 교훈

마닐라에서 물 공공성의 가능성

인도네시아의 물 사유화

멕시코의 도시 물 관리

스페인 코르도바의 물 관리: 참여를 보장하고 효과적인 공적 모델

이탈리아 아브루초: 물을 지켜내는 투쟁, 시민 참여를 위한 투쟁


물 공공성 쟁취: 전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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