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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당선자 진짜 수준이하군요!

 

이명박이 당선이 유력해 진 이후 몇 차례 발언을 하고 있는데, “국민이 위대하다”, “국민을 섬기는 자세로 일하겠다”는 이야기 이외에 어떤 의미 있는 발언이나 당선소감도 없네요. 이명박의 발언 속에서 ‘민주주의’나 ‘인권’, 혹은 ‘정의’ 같은 단어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김대중이나 노무현은 그래도 빈말이라도 이런 단어를 가끔 쓴 것 같은데요.

내용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유머나 위트도 없고, 건조하고 메마른, 뚝뚝 부러지는 몇 마디 발언뿐입니다. 소설가 이외수가 “한글도 제대로 쓸 줄도 모른다”, 즉 맞춤법도 제대로 모른다고 비판했는데, 수준 낮은 발언은 더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선거과정에서 이명박 후보가 토론을 기피하고, 실제로 후보자들간에 의미 있는 토론이 거의 없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이명박의 언어는 돈과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의 언어,  다른 사람을 위해, 사회를 위해, 역사를 위해 고민하고 일한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의 언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당선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지지자들의 발언도 건조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열렬한 환호도 별로 없습니다. 이 명박에게 취직자리 부탁하러 온 사람들 같은 인상입니다.

이런 당선자와 지지자들게 이명박 대통령 당선이 이 사회와 현재의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캐묻는 것은 실례되는 짓이겠지요?

보수주의자 ‘경제대통령’이라지만 너무 한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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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같으면

이명박의 온갖 조잡스러운 비리와 삼성의 비자금에 대해

여론이 들끓고 지배세력을 타도하자는 이야기가 난무했을텐데...

그리고 한나라당 당사와 삼성사옥에선 점거농성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돌멩이 이상도 날라들었을텐데...

 

부르주아 민주주의 혹은 선거정치의 정착의 효과인지,

아니면 이런 항의의 일각을 형성했을 자유주의 세력의 몰락의 효과인지

도통 보수정치권과 독점재벌에 대해 대중적 항의를 찾아볼 수 없다.

 

민주노동당으로 상징되는 민중운동세력도 잠잠하니, 원.

열심히 표를 좇아다녀봐야 5% 내외 지지를 받을텐데...

뭔가 방향이 잘못 잡힌 게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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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 한수

어떤 말을 보태기가 그렇네요. 감상들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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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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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정체를 뚫는 방법

강원도 횡성(형이 새롭게 정착한 곳)에서 추석을 쇠고 올라오는 길이 최근 몇년 들어 가장 막혔다.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평소보다 시간이 3배나  걸렸다.

당연히 아이들이 짜증을 낼 수밖에.

 

초등학교 1학년짜리 둘째 아이 주효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엄마, 여기가 어디야? 왜 이렇게 안가?"

엄마가 대답한다. "응, 아직 양평이야! 차가 막혀서"

주효 왈, "맨 앞에 있는 차가 빨리 달리면 되잖아!"

우리 모두 "???"

 

우리나라 물리학자들이 교통정체의 원인을 연구하기로 했다는데,

이 물리학자들 우리 주효에게 좀 자문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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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의 구조적 위기의 가능성

참세상칼럼으로 실린 글인데 아래글과 마찬가지로 모아둔다는 차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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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이 8월 9일 발표한 ‘최근의 국내외경제동향’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 들어 있다. 즉 ‘미국경제 : 회복세’, ‘중국경제 : 고성장 지속’, ‘일본경제 : 회복기조 유지’, ‘유로지역 경제 : 성장세 지속’, ‘국내경기는 대체로 당초 예상한 회복경로를 밟아가고 있는 것으로 판단’.

내로라하는 국가나 경제권의 경제가 성장 또는 회복을 하고 있어서 세계경제 전망은 매우 밝고 한국경제도 ‘회복경로를 밟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즉 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문제로 전 세계 증권시장이 폭락을 하면서,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현재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 있다. 민간 경제연구소들은 하반기 성장전망을 낮추려 한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지난 토요일 미국 연방준비은행의 재할인율 인하로 미국과 유럽 증권시장이 오름세로 돌아서면서 증권시장의 폭락분위기가 약간 진정되었다고 하나 문제의 성격상 그렇게 단기간에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문제로 시작된 세계 금융시장의 동요는 한국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국경제에 경제위기가 또다시 찾아올 것인가?



 

이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한국경제 상태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우선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사실 한국경제는 아이엠에프 위기 이후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최근 몇 년동안 3-5% 대에 머물렀다. 국민총소득(GNI) 성장률은 이보다 2-3% 포인트 더 낮았다. 한국경제가 만들어내 수출하는 재화(예를 들어 반도체)의 가격은 하락하고 외국에서 수입하는 재화(예를 들어 원유)의 가격은 상승해 국민들의 실질 소득은 국내총생산 성장률보다 더 낮아진 것이다. 국민총소득 성장률이 국내총생산 증가율보다 낮은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인의 대외투자로부터 얻는 소득에 비해 국내에서의 외국인투자(약 반 정도가 미국계 자본이다)가 얻는 소득이 더 크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경제통계에 정확히 계상이 되지 않고 있는데, 외국인투자의 미배당 이익이 제대로 반영이 된다면 국민총소득 증가율 통계치는 더 낮아질 것이다. 또한 경기순환주기가 2년 정도로 짧아졌고 그래서 반짝 1년 정도 경기가 좋아지는가 싶으면 이내 다시 나빠지곤 한다.

 

마르크스 말대로 경제위기 혹은 공황의 궁극적 원인은 이윤율 저하인데, 현재의 상태와 앞으로의 전망을 위해서도 <그림1>의 그래프를 보면서 이야기를 해 보자. 매출액영업이익률에 유형자산회전률(=매출액/유형자산)을 곱해 계산한 제조업 유형자산영업이익률을 이윤율 대용으로 사용하자. 반도체 가격 변화의 영향이 커 보이지만 한국경제의 대략의 추세는 알 수 있다.

 

79-80년 경제위기로 낮아졌을 이익률은 3저호황이 시작된 해인 86년까지 일정하게 회복한다. 그 이후 89년, 92-93년, 96년, 98-99년, 2001년 저점을 형성한다. 최근년에는 2004년 이익률이 최고점에 이르렀다가 2005년 2006년 연속 하락하고 있다. 2004년의 높은 이익률과 96년과 2006년의 낮은 이익률은 반도체 가격 상승과 하락으로 경기상황에 비해 과도하게 높아지고 낮아진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 와중에 한국경제는 97-98년에는 구조적 경제위기와 89-90년, 92년, 2001년의 경기후퇴(순환적 위기)를 경험하고 2002년 이후에는 짧은 경기순환을 반복한다. 2007년 2/4분기에는 전기 대비 성장률이 약간 높아졌는데 앞서 이야기한 한국은행의 ‘국내외경제동향’은 이런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이윤율 추세선(들쭉날쭉한 실제 이윤율궤도를 평활하게 만든 가상의 선)이 하락하면서 이윤율이 급격히 하락할 때 구조적 위기가 발생하는데 그래프에는 나타나지 않은 79-80년과 97-98년의 경우가 그것인데, 97-98년엔 외환위기 금융위기까지 겹쳤다.

 

결론적으로 노무현정부의 자랑과는 달리 성장률로 본 한국경제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2007년 상반기 영업이익 상황은 2006년에 비해 그리 개선되고 있지 않은데, 최근의 짧아진 경기순환 주기를 생각한다면 외부 여건의 변화에 따라서는 한국경제는 언제든지 경기후퇴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 하겠다. 따라서 최근의 세계금융시장의 동요에 따라서는 2/4분기 성장세가 이어지지 않고 한국경제에 또다시 경기후퇴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 강도에 따라서는 당장은 아닐지라도 이윤율이 급격히 저하하여 구조적 경제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투기자본의 유출입으로 인한 환율변동성을 가늠해 보기 위해 외채통계와 순국제투자잔액통계를 알아보자.

 

2007년 1/4분기 대외채무, 즉 외채는 약 2,861억(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 3/4분기에 1,774억 달러였다), 대외채권은 약 3,789억 달러였고 이 둘의 차이인 순채권은 약 928억 달러이다. 순채권 규모는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 4/4분기에 -681억 달러였다가 2006년 1/4분기에 약 1,211억 달러로 최고규모를 나타냈다가 그 이후에 급격히 줄고 있는 것이다. 1/4분기 이후에도 대외채권 증가규모보다 대외채무 증가규모가 더 커서 순채권 규모는 현재 약 7-800억불 대를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외채무에서는 단기외채는 2007년 1/4분기에 1,297억불(외환위기 직전 1997년 2/4분기에 약 837억불이었다)이고 총외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 1/4분기에 45.3%에 이르렀는데 이 또한 외환위기 당시와 비슷한 비율이다.

 

대외채무과 대외채권에다 지분성 직접투자와 주식투자를 포함한 더 포괄적인 범주인 대외투자잔액과 외국인투자잔액과 그 차이를 나타내는 순국제투자잔액(2001년부터 통계가 작성되고 있는데, 이 액수가 마이너스인 미국에서는 이것을 외채라고 하기도 한다)은 2001년 4/4분기에 약 - 638억이었다가 2007년 1/4분기에는 - 2,092억 불에 이르렀다. 이 순국제투자잔액의 마이너스 규모도 계속 급증하고 있는데 미국식으로 치면 외채가 엄청나게 늘고 있는 것이다.

 

순국제투자 마이너스 규모가 이렇게 늘어나고 있는 것은 원화가치의 상승과 외국인투자에서의 엄청난 이윤 및 국내 주식시장의 급등 등에 그 원인이 있다. 최근 주식시장 폭락 와중에서 외국인들의 철수로 인해 엔화와 달러 대비 원화가치가 급격히 하락한 바 있다. 국제금융시장의 동요가 계속된다면 원화가치 하락(환율 상승)도 지속될 것이다. 이는 외채규모 증대 및 순채권규모의 축소와 순국제투자잔액의 마이너스 규모 증대와 관련이 있다 하겠다.

 

그러면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시작된 최근의 세계 금융시장의 동요와 그것이 미국 및 세계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간단히 알아보기로 하자.

 

미국의 CEPR(경제정책연구센타)의 딘 베이커는 주택시장 거품이 주택건설 감소라는 직접적 효과와 주택거품붕괴 및 주식시장 하락으로 인한 소비축소 효과(‘역자산효과’)를 더하면 국내총생산 감소 누적효과가 최저 3.1%에서 최고 7%에 이를 것이라고 추계하고 있다. 2006년부터 주택건설 감소의 효과가 약 국내총생산 1% 정도 발생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앞으로 국내총생산이 2.1%에서 6% 정도 추가로 감소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효과가 2년 정도에 걸쳐 발생하고 통상적으로 미국경제성장률을 3% 정도로 상정한다면 앞으로도 1년 또는 2년 제로 성장에 가까운 성장을 한다는 것이고, 만약 이 효과가 급격히 발생한다면 심각한 마이너스 성장이 나타날 것이고 3-4년에 걸쳐 나타난다면 1-2%의 낮은 성장이 지루하게 나타난다는 이야기다. 이 정도만 해도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에는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베이커는 주택시장 거품 붕괴로 인한 금융기관의 파산 및 이로 인한 금융위기는 별로 고려를 하지 않은 것 같다. 주택시장 거품붕괴가 심각하면 비우량 주택담보 대출 금융기관이나 몇 개의 헤지펀드 파산으로 그치지 않고 대형 은행들도 부실화할 수 있다. 이로 인한 금융위기의 효과는 기술적으로 계산해 낸 주택건설 축소효과나 ‘역자산효과’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유동성의 추가공급으로 해결되지 않을 ‘화폐기근’ 및 이로 인한 거래 및 생산 축소 등의 사태도 발생하지 말란 법이 없다.

그리고 베이커는 현재 미국이 엄청난 경상수지 적자를 내면서 세계의 수출품을 빨아들이는 최종소비자 역할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민의 소비축소는 중국 남미 아시아 일본 유럽의 대미 수출을 줄일 것이고 이는 이들 나라들의 성장을 떨어뜨릴 것이고 이것이 또한 미국의 이들 나라로의 수출을 줄일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취약한 몇 개의 개도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미국내 금융위기로 인한 전세계적인 교역 및 생산 축소와 이것이 다시 미국에 미칠 영향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사태가 난다면 그야말로 그것은 ‘세계대공황’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태는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가능성일 뿐이고 베이커가 예측한 최소한의 영향, 즉 한해 정도 제로성장에 가까운 성장에 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극단의 시나리오 중에 어느 것이 더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을까? 이 또한 미국경제의 현재의 상태와 일정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림2>는 미국의 비금융 법인부문 수익률인데 역시 이윤율의 대용으로 사용해 보자. 65년 최고치의 수익률을 보인 이후 70년, 74년, 80년, 82년, 86년, 92년, 2001년에 수익률이 저점에 이르렀다. 그리고 80년대 중반 이후 수익률 궤적은 추세선을 그려본다면 97년까지는 약간 우상향하는 모습을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 97년에는 70년 이후 최고의 수익률을 나타내고 있고 2006년의 수익율은 1997년의 수익률에 버금간다(이 점에 있어서, 그리고 80년대 중반 이후 97년까지의 이윤율 추세선이 우상향의 모습이라고 보는 점에서 필자는 앞서 참세상에 글을 쓴 정성진 교수와는 약간 다르다).

 

그래서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2001년 이전까지 미국경제에서는 구조적 위기가 단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았다. 금융세계화 효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계 초민족적 자본은 자국노동자와 전세계로부터 막대한 이윤을 뽑아내고 있는 것이다. 2001년에 구조적 위기가 발생하였는데 73-4년과 81-82년의 구조적 위기에 비해서는 그 강도가 덜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위기는 발생했는데 97년 경에 정점에 달한 금융세계화의 긍정적인(자본에게!) 효과가 약해지고 그 부정적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또한 80년대 초반 저축대부조합 파산과 2001년 IT 버블붕괴는 구조적 위기로 연결되었고 87년 주가 대폭락은 구조적 위기로 연결되지 않은 점도 눈여겨볼 점이다. 전자는 이윤율이 상대적으로 낮아진 상태에서 금융위기가 구조적 위기로 이어졌고 후자는 이윤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상태여서 금융위기가 구조적 위기로 연결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는 이윤율이 높아 기업들이 내부이윤이 많으면 금융위기에 내성이 더 강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현재 미국자본의 이윤율은 매우 높다. 상반기의 이윤상황을 보면 사실 2006년이 정점이고 2007년은 이보다는 못할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매우 높은 상태다. 그만큼 금융위기에 대한 내성은 높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인한 금융위기는 금융세계화의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시점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구조적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반면에 현재 미국자본의 이윤율이 매우 높은 상태에 있다는 점에서 구조적 위기로 전화할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번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이윤율이 줄어들고 결국 구조적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하겠다. 더구나 중국경제가 활발한 성장기에서 불황기로 접어드는 등의 변화가 있다면 구조적 위기의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런 상황이 한국경제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국경제가 구조적 위기로 치달을 것인가? 이윤율 추세선의 우하향, 낮아진 이윤율, 외채규모 증대와 순국제투자자산의 마이너스 규모의 급증 등으로 취약해 져 있는 한국경제는 현재의 금융위기로 미국경제가 구조적 위기로 치닫는다면 당연히 구조적 위기로 빠져들 것이다. 주식시장 폭락 및 주택거품의 붕괴, 환율급등까지 겹쳐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구조적 위기에 빠지지 않고 경기후퇴에 머문다면? 그렇다 하더라도 2007년 2/4분기의 성장을 이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경제의 성장둔화 혹은 저성장 국면으로의 진입 등의 변수가 생긴다면 미국경제의 상태와는 무관하게 한국경제는 구조적 위기로 빠져들 것이다.

 

최근 한국경제의 3-5% 정도의 성장은 노동자 민중들에겐 그 효과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장기불황 속의 미미한 성장이었다. 앞으로의 상황은 이 보다 좀 더 어려워지거나 훨씬 어려워 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진행될 어떤 투쟁, 설사 그것이 선거투쟁일지라도 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고 노동자 민중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없을 것이다.

 

1992년 미 대통령 선거 시기의 클린턴 진영의 선거구호를 비틀어 보자.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야, 바보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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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시장 폭등의 정치경제학

참세상 칼럼으로 실린 글입니다.  참세상 블로그이지만 글을 모아놓는다는 차원에서 다시 옮겨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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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가 폭등하고 있다. 올들어 무려 37%가 올랐고, 멀게는 아이엠에프 위기가 한창이던 시절 종합주가지수가 279선까지 떨어졌다가 이제 2000선을 넘보고 있으니 그 때에 비하면 거의 7배로 올랐고, 보다 가깝게는 2003년 500선을 기준으로 하면 거의 4배가 올랐다. 물론 그 사이 99년 2000년의 코스닥 시장에서 엄청난 거품이 만들어졌다가 꺼지기도 하였다.

사실 주식시장의 폭등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중국, 태국, 터어키, 브라질, 러시아 등 ‘신흥시장’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보이고 있고, 미국 증시도 상승률은 덜하지만 대형우량주 30개 종목 지수인 다우지수가 최고치를 연일 경신하고 있다. 가히 세계적인 현상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아 보인다.

 



 

이런 증시폭등은 한국에선 대선을 앞 둔 시점에서 정치쟁점의 하나가 되고 있기까지 하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실패했다는 비판에 대해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은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왜 실패했느냐, 증시가 이렇게 좋은데 실패는 무슨 실패냐는 등의 항변을 하고 있다. 증시폭등을 ‘참여정부’ 비판에 대한 반비판 재료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증시폭등이 ‘좋은 경제상황’의 지표나 되는 것처럼.

이 같은 주가상승이 이후에도 지속될까? 이에 대해서는 ‘주가는 신도 모른다’, ‘주가의 향방을 점치는 것은 술 취한 사람의 다음 발자욱이 어디로 내디딜 것인가를 맞추는 것과 같다’는 속설을 소개하고 싶다. 이후 주가가 얼마만큼 오를 것인가, 언제 내릴 것인가에 대해서도 유사한 답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는 아닐 것이다.

주가가 너무 높게 오르고 있다고 때때로 경고를 하는 대가들의 ‘주가거품론’도 그 정확한 시점을 짚어내지 못하기는 매 한가지다. 미국에서 90년대 후반 주가가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었는데 로버트 쉴러라는 교수는 97년에 다우지수가 7000선이었을 때 미국증시를 “비이성적인 과열”이라 경고를 해 유명해졌는데 다우지수는 그 뒤에도 한참 오르다가 2000년 1,1700 선에 가서야 하강하기 시작하였고, ‘경제대통령’이라는 별칭이 붙었던 미 연방준비제도위원회 의장(한국은행 총재 격)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의 경우는 주식시장의 거품을 이야기하다 주가가 계속 오르니까 ‘신경제론’에 지지를 보내 주가상승을 정당화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가가 진짜 폭락을 하기도 하였다. 즉 주가가 거품인지 아닌지는 거품이 꺼진 뒤에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 민중들의 삶은 고용도 불안하고 임금도 잘 오르지 않아 이렇게 팍팍한데(이랜드-뉴코아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을 보라) 주가는 왜 오르고 있을까? 거칠게나마 몇 가지를 얘기해 보자.

우선, 주식가격이 장래 배당가능성과 무관하지 않다면 그리고 이 배당가능성이 현재의 이윤 및 이후 이윤증가율과 무관하지 않다면 주가상승은 기업이윤이 증대하고 있거나 혹은 증대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증대했거나 증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다. 신자유주의의 심화로 인해 노동조건이 열악해졌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바다. 특별히 2004년 이후 한국 노동자들의 생산성 증가에 비해 임금인상률은 매우 낮아졌다. 그리고 한미자유무역협정 등으로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가 증대할 것이라는 것 또한 우리 모두가 아는 바다. 주가가 안 오르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즉 주가상승은 노동자 민중들의 삶이 팍팍한 이유 그 자체에 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한국기업들의 이익은 한국노동자들의 착취에만 있지 않다. 이주노동자, 베트남, 동남아시아, 결정적으로 중국노동자들의 착취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이야기이지만 미국계 세계적 기업의 주가상승에는 한국 노동자들의 착취증대도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노무현정권 옹호자들이 주식시장 활황을 ‘참여정부’ 경제정책 성공의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정확히 그들의 계급적 본질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하겠다. 물론 미국의 5-60년대처럼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기업이익 둘 다 개선되던 시기가 예외적으로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노동조건의 악화 위에 기업이윤이 개선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둘째로, 주가상승은 이자율과도 관계가 있다. 이자율이 높으면 주가가 낮아지고 이자율이 낮아지면 주가가 높아진다는 게 일반적인 이야기다. 이자율 하락에는 아이엠에프 위기 이후 원화가치 하락으로 인한 지속적인 상품무역 수지 흑자에서 비롯된 경상수지(상품수지, 서비스수지, 소득수지를 모두 더한 것) 흑자의 누적으로 인한 통화증발(달러가 많아지면 그것이 원화로 바뀌어 시중에 풀린다) 효과, 미국의 경상수지의 적자의 확대(세계 각국이 달러를 많이 보유하게 되고 이것이 세계적으로 각국 화폐를 증가시킨다), 일본의 초저금리 지속, 신도시 건설 및 행정수도 이전 등으로 인한 토지보상비의 격증 등 여러 원인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투자부진도 이자율 하락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90년대 중반 과잉축적이 발생한 상황에서 신규투자가 쉽게 증대하지 않고 있기도 하고, ‘주주가치극대화’가 경영의 주요원리가 되면서 자사주 매입, 배당률 증대 등으로 투자가 부진하기도 해 저 이자율이 지속되고 있다. 이유야 어떻든 투자부진은 노동자의 고용성장을 더디게 하고 임금을 억제하게 한다. 현재의 주가상승이 노동자 민중에게 달갑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가상승이 노동자 민중들의 희생에 기초한 것이라는 위와 같은 사정과는 무관하게,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로 비아냥을 받아온 노무현은 이 주가상승을 자신의 정책의 성공으로 등치시키려 애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지 주가가 단기적으로 너무 급등하고 있어 걱정일 뿐. 얼마 전 노무현은 ‘돈을 빌려 주식을 사고 있는 행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경고성 메시지를 주식시장에 보내기도 하였다. 최근 증권사 사장들은 모임을 갖고 증시급등을 우려하긴 하였지만 특별한 대책을 내놓진 않았다. 사실 이들로서도 주식시장이 급등해서 폭락하기 보다는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장기에 걸쳐 천천히 오르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이다.

그러면 주식시장이 노무현과 증권사 사장들의 소망대로 움직여 줄 것인가?

누구도 확언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하나 이들의 소망이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우선, 한국의 자본의 이윤상황은 그리 녹녹치 않다. 한국자본주의의 대표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영업이익은 2003년을 기점으로 상당히 빠르게 하락하고 있다. 2007년은 전년보다 더 악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뚜렷한 반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아차는 올 봄 유동성 위기설까지 돌았다. 이들 기업을 대체한다는 포스코와 현대중공업의 이익상황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이윤감소를 커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포스코와 현대중공업, 아니 현재 한국경제의 활로인 중국경제는 과열 그 자체로 보인다. 중국 증시는 연초에 폭락을 하면서 그 징후를 보여주었다. 저임금에 시달리는 농촌출신 도시이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중국사회의 불안 또한 중국경제를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이라는 경고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자율 또한 서서히 오르고 있다. 국제적으로 이자율이 조금씩 오르고 있고 한국경제의 지속된 경상수지 흑자는 올해 거의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사실 현재 한국경제는 외채, 그것도 단기외채가 꾸준히 늘고 있다. 원화가치가 상승기조에서 하락기조로 바뀐다면(경상수지 흑자 소멸 및 엔화가치 상승 등 그 가능성은 다분하다) 이자율은 더욱 오를 것이다. 현재 주식시장에서 초민족적 금융투기 자본들은 지속적으로 주식을 매각하고 있다. 주가상승 이외에 원화가치 상승이라는 추가적인 매력을 이젠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편 현재의 세계적인 주가 폭등은 90년대 말의 정보기술산업(IT) 거품, 2000년대 중반의 주택시장 거품에 뒤이은 것이다. 크게 보면 현재의 주가상승도 미국 주도 세계자본주의의 조락(凋落)을 상징하는 한 지표라 하겠다. IT로 인한 신경제를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지금은 거의 없다. 주택시장의 거품은 이제 꺼지기 시작하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벌써 이로 인해 성장률이 현저히 하락하고 있고 베어스턴스의 두 개의 헤지펀드가 파산을 하였다. 미국보다 더 심한 거품이 낀 나라들도 많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주식시장이 커다란 상승을 할 때면 언제나 ‘신경제’니, 혹은 이번 장은 이전에 거품으로 꺼진 장과 어떤 점에서 다르다느니 온갖 변호론이 판을 쳐 왔다. 그러나 어김없이 거품은 붕괴하였다. 그 시기를 꼭 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주식시장도 거대한 거품을 쌓아가고 있어 그것이 터질 날이 머지 않아 보인다. 거품이 크면 클수록 그 붕괴의 잔해는 처절하다. 뒤 늦게 뛰어들어 무수한 시체로 쌓일 ‘개미’들, 이후 불어 닥칠 구조조정의 광풍에 스러질 노동자들, 세계적으로는 외환위기 금융위기로 실질적인 파산에 직면할 나라들(앞에서 열거한 브라질이나 터어키 등 신흥시장이 그 주요 후보가 될 것이다) 등등.

그러나 이런 사정을 감지하지 못한 채 노무현 정권은 이 기회를 틈 타 좋은 주식을 시장에 공급하겠다는 명분으로 발전사 등 몇 개의 공기업의 주식을 상장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고, 상수도산업을 공사화 민영화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발전회사의 장부가격 이하 매각과 물 값 인상이라는 금기마저 깨뜨리면서. 그런 점에서 거품붕괴의 시기가 대선 전일까 후일까 는 여러모로 중요해 보인다.

한편 더욱 중요한 문제는 세계적인 거품 붕괴 이후 미국주도 세계자본주의가 다시 자신을 추스르고 재기할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 민중의 투쟁을 통한 대안세계화의 싹이 돋아날 것인가의 갈림길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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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의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 만남 후기

 

'40년 만에 처음 만나는데 간단한 선물을 하나 해야지.'

약간 일찍 나가 백화점에서 와이셔쓰 하나를 샀다.

아는 곳이 없어서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날 때 한 번 가본 종각 근처 한식집에서 보자고 했더랬다.

가서 메뉴를 보니 가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일년에 두어번 보는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날 때면 언제나 나는 돈 내는 것에서는 '열외'여서 가격을 몰랐는데 보통 비싼 곳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랴! 비싸다고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할 수도 없고.

기다리니 선생님이 오셨다. 나보다 4년 선배들이 초등학교 동기동창 인터넷카페를 열고 있는데 그곳에서 선생님 최근 사진을 본 터였다.

그러나 나이가 드셔서 그런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신체가 작아 보이셨다.

반갑게 인사를 드리고 식사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40년 전으로 날아갔다.

김창주, 공정석, 공정렬, 송하빈, 신건호, 이남섭, 김용현, 김용태, 박주순, 박일수, 박근웅, 박익순 등 친구들 근황을 서로 묻고 대답했다.

이용환, 김형택, 오갑효 선생님, 그리고 이경하 당시 교장선생님 근황을 물었고, 우리 동네 출신 박상록 선생님 근황은 내가 알려드렸다. 이용환선생님과 이경하 선생님은 돌아가셨단다.

그리고 우리 동네 몇년 선배들 중에 몇사람 이야기도 했고, 우리 동네 어른들 이야기도 했다. 누가 어떤 높은 자리에 올랐고, 누구는 고대 총학생회장까지 했는데 60이 넘었고 아직 결혼을 못했고 등등.

우리 동네 사정을 너무 잘 아셔서 어찌 그리 잘 아시냐 했더니 그 때는 가정방문이 많아서 대충 안다고 하셨다. 우리 동네는 집성촌인 상봉(우리집이 있는 곳), 집성촌이 아닌 중봉 하봉으로 나뉘어 있는데 중봉 하봉에 무슨 성씨 집이 대강 몇채 있는 것까지 아셨다.

그리고 내 바로 윗형은 알고 있었고 내 둘째형도 알고 계셨는데 내 형인지는 몰랐다고 하셨다. 내가 사실을 알려드렸더니 '그러냐'고 하시면서 둘째형과 자신이 군 교육청에 계실 때 에피소드도 얘기해 주셨다. 내용인즉슨 둘째형이 농협 출납계에서 일을 했는데 교육청으로 돈 보낼 일이 있었는데 돈을 너무 많이 보내 선생님이 도로 돌려보내줬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젊은 사람들 미팅하듯이 서로에 대해 캐물었다.

사실 나도 선생님이 어떻게 우리 학교에 오시게 되었으며, 가족은 어떠며, 이후 어떤 학교에서 일을 하셨으며 등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선생님 또한 나에 관한 것을 거의 모르니 그럴밖에.

선생님은 풍양초등학교에 4년 근무를 하셨단다. 그 후 교육청 근무를 몇 년 하셨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경기도로 전근을 와서 양평 어디에선가 교장으로 퇴임을 하셨단다. 아들만 넷인데 큰 아들이 나보다 4살 아래였다.

풍양초등학교에서 담임을 네 번 하셨기 때문에 선생님은 1학년 제자, 6학년 제자 등으로 분류해서 기억을 하시고 계셨다. 내가 1학년 때 자신이 담임이셨다는 것을 금방 이야기하실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연유였다.

1학년 제자 중에서 선생님을 찾은 사람은 내가 처음이란다. 어떻게 찾을 생각을 했냐고 고마워 하셨다.

난 풍양초등학교를 졸업을 못하고 서울로 와 나이가 들어 시골을 갈 때마다 면에 있는 초등학교를 들르고 학교를 들를 때마다 언제 김병선 선생님을 찾아 뵈야지 생각을 했는데 선생님은 40년 만에 자신을 찾아온 제자를 무척 고마워하셨고 신기해 하셨다. 사실 자신도 앞서 이야기한 우리 몇년 선배들과 만난 자리에 우리 동네 제자(내 조카뻘)를 보고선 내 소식을 물어봤다고 하셨다.

우리 학교는 내가 44횐가 되니 꽤 일찍 학교가 세워졌네요 했더니 일제시대 때 생겼고 다른 면에 비해 조금 늦었다고 하셨다.

내 얘기도 했다. 시민운동 하냐고 해서 아니라고 했다. 약간 걱정스러워 하셨다. 자기 조카도 대우자동차 노조에서 해고도 되고 노조운동을 했다(지금은 복직해서 회사를 '잘' 다닌다 하셨다.)고 하시면서.

시간이 좀 지나서 내가 나이든 어른들을 만나면 대개 물어보는 주제를 슬며시 꺼내 보았다. 해방공간 때 이야기.

해방공간 때 중학생이셨단다. 무척 고생을 많이 하셨단다. 친척 중에 경찰이 한 명 있었고, 선생님 집은 부자는 아니었는데 인근 4개 부락 중 유일한 기와집이어서 '지방폭도'(선생님 표현 그대로)의 표적이 되었단다. 그래서 밤이면 언제나 산으로 가셨단다. 밤에 활동하는 '지방폭도'를 피해서. 그리고 기와집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단다. 암튼 나로서는 약간 실망이었다. 선생님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조건이나 상황탓이었겠지만 그래도 '지방폭도' 편이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고. 한편으로는 황석영의 '손님'에서와 같은 화해나 해원 등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 해서 우익의 극악한 폭력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이후에도 우익의 폭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겠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폭력과 동일시하는 대중들의 의식이나 이데올로기를 그냥 모른 채 한다면 그것은 운동에 보탬이 안될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런 해원이나 화해가 어떻게 가능할지는 막막할밖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좀 더 하고 다음에 동창들을 모아 한 번 찾아뵙겠노라고 헤어졌다.

선생님은 물론 '그러지 말라', '제자들 부담주기 싫다'고 하셨다.

40년만에 다시 만난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과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렇게 1막을 내렸다.

버릇없기로 치면 두번째 가려면 서운해 할 난, 이 때도 결례를 범했는데 선생님과 식사하면서 술을 몇 잔 기울였는데 너무 반가운 나머지 선생님의 연령과 지위를 생각지 못하고, 술 마실 때 얼굴을 옆으로 약간 돌리는 '센스'를 발휘하지 못했으니... 선생님께서 약간 언짢아 하지 않으셨을까?! 그래서 다음날 메일로 안부를 물었는데 안쓰시는 메일인지 되돌아 와 전화를 다시 드리는 '센스'를 발휘하였지만, 이미 범한 결례가 커버가 되지 못할 것은 정한 이치. 다음부턴 이런 것도 좀 신경을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아 참 이번 만남을 계기로 어찌어찌 해도 또 한 놈의 동창과 연결이 되었다. 적당한 시간에 한 번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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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의 기억속의 몇 장의 사진과 넋두리

 사회진보연대에서 내는 '사회운동'에 쓴 글입니다. 6월항쟁과 관련한 여러 기사와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 읽어보니 불만스러운 점이 없지 않으나 6월 10일을 기념하면서 올립니다. 조금 깁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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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6월 10일,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 소속 조그만 단체 회원이자 증권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었던 나는 시청에서 열리기로 했던 6.10 국민대회(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결성 이후 첫 국민대회)에 참가했다가 하루 종일 최루탄과 백골단을 피해이리저리 쫒겨 다녔다. 물론 국민대회를 보지도 못했다. 당시엔 오늘날처럼 집회신고를 합법적으로 하고 성대하게 국민대회를 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어서, 중간에 성공회교회 안에서 국본 주요 지도자들 몇 분이 모여 국민대회를 치렀다는 소식을 듣고 그래도 대회는 치렀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을지로 입구 근처에서 텅빈 거리를 보며 오늘 투쟁도 이걸로 끝나는가 하고 아쉬워하고 있던 차, 퇴계로에선 싸움이 아직 진행중이라는 얘기를 전해 듣고 급히 퇴계로로 달려갔다.

 



 

깨진 돌과 돌을 실어 나르는 데 쓰인 리어카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많은 시위대들로 거리는 어지러웠지만 퇴계로는 말 그대로 해방구였다. 그리고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진압경찰을 격퇴시키기 위해 여기저기서 날아다니는 화염병으로 거리는 오히려 환했다. 여길 못들르고 집엘 갔으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 뒤 시위대는 조금 더 싸운 뒤 자연스럽게 명동성당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퇴계로와 거리도 가까웠지만 당시만 해도 명동성당과 천주교회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발언과 행동을 곧잘 해서 시위대는 농성장소로 자연스럽게 명동성당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니던 복음주의적 개신교 교회를 대학에 온 이후 어렵게 작파하고 교회를 한동안 다니지 않다가 군대에서 ‘졸병’의 권유가 있었긴 하지만 부대 근처 가까운 천주교회인 명동성당엘 나가기 시작한 데에도 천주교회와 명동성당의 이런 모습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6월 항쟁의 시작은 이랬다. 물론 이 날이 있기까지는 광주항쟁 이후 야당과 재야 및 학생운동 세력의 지속된 투쟁이 있었다. 굵직굵직한 것만 꼽아보아도 김영삼 26일 단식사건, 미 문화원 점거 투쟁, 신민당 결성 및 2.12 총선 투쟁과 개헌현판식 투쟁, 인천 대우자동차 투쟁, 구로동맹파업 투쟁, ‘서울대 연합시위 사건’, ‘인천 사태’와 이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일어난 권인숙씨 성고문에 대한 규탄 투쟁, 대학생 전방입소 거부투쟁, ‘건대사태’,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 투쟁’ 등. 정권은 이런 투쟁이 있을 때마다 텔레비전 특집프로그램 등을 통해 ‘공장과 학원가에 침투한 좌경용공 세력’ 운운하며 반공이데올로기를 전국민에게 주입시켜도 투쟁은 연이어 일어났다. 그리고 많은 조직이 생겨났고 투쟁과정에서 꼭 열혈 활동가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경찰서와 감옥엘 들락거려야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투쟁은 두 차례(87년 2월 7일, 3월 3일) 열렸는데 이 때 경찰에 잡혀 들어간 시위대 숫자가 각각 3-4000명을 족히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당시 운동조직에서 어떤 역할을 하면서 조직내외에서 오가는 중요한 정보들을 접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어서 정확한 이야기는 아닐 수 있겠으나 명동성당 농성은 요즈음의 농성과는 달리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진행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한다. 물론 농성자들 중에 일부 그런 생각을 가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당시에는 심야투쟁이 일반적이어서 심야투쟁의 자연스러운 연장으로서 농성투쟁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리고 이후 중요한 투쟁시기까지 투쟁에너지를 이어간다는 정도로 농성투쟁을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농성 첫날을 나도 함께 했는데 선전 홍보나 농성단 뒷바라지 등을 명동성당 청년단체 연합회원들이 분담을 했던 것만 보아도 농성주체들이 사전에 튼튼히 준비된 것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동성당 농성을 지속하여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를 철회시켜내겠다고 생각을 한 사람은 거의 없지 않았나 싶다. 당연히 국본 주요 관계자들이 결합을 하거나 결합을 하게 하려는 노력조차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농성 시작 초기에는 성당 출입이 자유스럽지 못하긴 했지만 들어오려고 마음을 먹으면 들어올 수는 있었고 명동성당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문화관’에서 농성을 하는 농성대오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나가는 이야기이지만 명동성당 농성대오에서는 뚜렷한 한 명의 ‘스타’를 배출했는데 그 분이 아직도 활동을 하고 계시는 ‘명동 할아버지’ 이천재 선생이시다. 그는 젊은 사람들 속에 있는 몇 안 된 나이 드신 분이었고 머리가 하해서 쉽게 눈에 띄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연설솜씨나 발언내용이 빼어나 농성단 안에서 유명해 졌다. 농성단 첫날 회의에서부터 매우 조리 있고 내용 있는 발언으로 좌중을 사로잡았는데 초자 활동가인 나에겐 매우 인상적이었다. 명동성당 청년단체에서 배정받은 선전홍보팀의 일원으로 밤에 잠깐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난 첫날 농성을 하고 아침에 명동성당을 나와 을지로 입구 근처 회사에 출근을 했다가 퇴근 이후 비밀스러운 길을 따라 명동성당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아직도 내 머리 속에 선명한 사진으로 박혀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명동성당 주변 을지로 등지는 명동성당을 들어오려는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낮부터 공방이 있었고 최루탄연기가 자욱했다. 당연히 길거리에는 사람들도 평소보다는 적었다. 그런데 어렵게 해서 성당 안으로 들어갔더니 성당 마당 하얀 돌 벽돌들 위로는 아직 채 지지 않은 6월의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고, 꽤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혹은 앉거나 혹은 서거나 각자 자유스런 포즈로 약간의 승리감에 젖어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 여기저기서 지원을 해서인지 빵은 성당 마당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거나 쌓여 있거나 했다. 자욱하고 매캐한 최루탄 연기로 뒤덮인 바깥 거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성당 안의 평화롭고 안온한 분위기. 한마디로 명동성당은 또 다른 해방구였던 것이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에서 오현우와 한윤희가 숨어살던 갈뫼의 분위기와 비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시끄러운 세상과 격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지극한 평화와 안온이라는 면에서 말이다. 아무튼 투쟁으로 쟁취한, 그리고 투쟁열기가 가득했던 해방구 퇴계로와 명동성당 안의 평화로운 해방구, 둘 다 87년 투쟁에서 잊지 못할 장면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약간 비쳤지만 당시의 투쟁은 요즈음처럼 몇 시에 시작해서 몇 시에 정리집회를 하고 하는, 일정한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의식(儀式)처럼 진행하는 박제화된 집회나 투쟁이 아니었다. 밤늦게까지 경찰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싸웠고, 을지로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퇴계로나 종로에서도 열심히 싸우고 있겠지 생각을 하고 싸웠고, 퇴계로나 종로에 있는 사람들은 을지로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 하고 싸웠다. 그리고 결의에 차 있었지만 신나게 싸웠다. 멀리 있는 백골단에 돌을 던지는 모습을 보노라면 흡사 멋들어진 춤사위였고, 얼굴표정은 자기가 세운 계획에 따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표정, 즉 결의와 성취감이 교차하는 표정 딱 그것이었다. 이렇게 오래 신나게 열심히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긴 하지만 확실히 최루탄과 백골단의 공이 컸다. 싸우다 운이 없으면 잡히기야 하겠지만 앞에서 날 호시탐탐 노리는 적과 그들의 책임자인 파쇼 전두환을 그냥 두고 뒤돌아서 집으로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87년 이후 도입된, 신고만으로 합법집회가 가능하게 된 집회신고제, 백골단 해체, 최루탄 미사용 등의 제도변화나, 문민정권의 등장 등은 민주주의적 공간을 넓힌 계기이기도 하지만 운동세력을 순치시키는 효과도 매우 컸다고 생각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후자의 측면이 더 커 보인다. 그런데도 운동세력은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분위기 속에서 별 생각 없이 순치의 길을 달려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또한 당시의 집회나 투쟁은 이렇다할 의식(儀式)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의식을 모르는 일반 시민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거리낌 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 요즈음, 조직원만의 모임이 아니라 대중집회나 대중투쟁이 의식처럼 진행된다는 것은 문제다. 의식(儀式)이 새로운 사람들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수단이 되지는 않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연단, 연설, 노래, 동작, 행진, 깃발, 투쟁방식 등 모든 부면에서. 대중집회나 대중투쟁이 의식을 집전하고 의식을 이해하는 사람들만의 행사로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명동성당은 촛불집회, 인근 지역 직장인들의 점심식사 때의 방문, 명동일대에서의 화이트칼라의 시위, 농성단 해산, 6월 18일의 대규모 2차 국민대회 등으로 이내 뚫렸다. 인천 답동 성당과 부산의 어디에선가도 농성이 진행되었지만 국면은 농성국면은 분명 아니었다. 6월 18, 6월 26일 2, 3차 국민대회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민중들의 대거 진출이 있었던 것이다.

6월 18일에도 잊혀지지 않은 장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신세계 앞 분수대 사건. 신세계 앞 분수대를 사이에 두고 남대문 시장과 신세계 앞 일대의 시위대와 최루탄 발사기로 무장한 채 소공동 쪽에 쫙 포진해 있던 전경들 사이에 돌과 최루탄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이 있었는데, 순간 전경들이 분수대까지 밀고오자 시위대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돌과 육탄전을 이용해 상당히 많은 수의 전경들을 고립시켜 장비도 회수하고 전경들을 분수대에 빠뜨려 버렸다. 그 때까지 전경들에겐 맨날 쫒겨 다니기만 했던 시위대들은 분수대에 빠진 전경들을 보고서 무척 통쾌해 했다. 우리가 이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조금 있다가 더 많은 전경들이 와서 다시 쫒겨나긴 했지만 말이다. 또 하나는 부산 시위 소식. 한참 이리저리 쫒겨 다니다가 저녁 4-5시 무렵이었을까? 식사를 하러 들어간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어느 식당 안의 텔레비전에서 전국 각 지역에서의 노도와 같은 시위대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어디 몇천, 어디 몇만 하는 보도가 이어졌는데 부산시위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규모도 10만으로 가장 많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더 인상적인 것은 텔레비전 화면에서 볼 수 있는 시위대의 분노와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부산 시위대 모습을 보고 이 정도면 이제 우리가 승기를 잡은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서울의 신세계 앞 분수대에서의 일시적이나마 작은 승리와 부산의 노도와 같은 시위대로 인해 6월 18일은 6월 항쟁의 결정적인 날이 되게 되었다.

6월 18일 이후 6월 26일 다시 한 번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마침내 지배세력은 6.29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연이어 7월에서 9월 사이의 전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문 대규모 노동자 파업투쟁이 일어났다.

그러면 당시 민중들은 왜 그렇게 떨쳐 일어났을까? 지금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인명진목사가 대변인이었던 ‘국본’이 결성되자마자 국민대회를 몇 번 개최하지도 않았는데도 지배세력이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민중들이 대대적으로 진출한 이유를 허약하디 허약한 ‘국본’의 지도력과 조직력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본’은 대대적인 진출을 할 결의에 차 있는 민중들에게 판을 열어주었을 뿐인 것이다.

민중들은 분명히 그 이전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이는 2.12 총선과 개헌현판식에 몰려든 민중들, 그리고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투쟁에 경찰서에 끌려가는 것을 불사하고 몰려든 민중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우선적으로는 전두환 등 지배세력의 파쇼통치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자유가 전혀 없었고 오로지 최루탄, 경찰력, 군대, 정보기관의 사찰 등 억압적 국가기구에 의해 정권이 유지되었고, 정권이 불러주는 내용을 앵무새처럼 떠벌이는 관제언론 및 어용지식인만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숱한 사람들이 군대에서, 학원가에서, 공장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죽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민중들은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이런 파쇼통치를 참을 수 없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둘째로는 경제적 모순의 심화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앞에서의 파쇼통치의 많은 부분도 이 경제적 원인과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한국자본주의는 이윤율이 하락하고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게 된다. 광주학살을 자행한 뒤 등장한 전두환정권은 강력한 경제위기극복책을 시행해나간다. 노동법 개악, 정부부문에서 대규모 해고 단행, 퇴직금제도 개악, 임금억제정책 등 노동에 대한 공격을 진행하였고, 물가를 강력히 통제하였다(전두환 정권이 벌인 ‘3대 부정심리 추방운동’ 목록에는 ‘물가오름세 심리’도 들어있었다). 86년 87년 상황에 오면 이런 노동에 대한 공격과 86년부터 불어 닥친 3저로 인해 자본의 이윤율은 급격히 개선되고 있었는데도, 이전부터 진행된 노동에 대한 공격과 임금억제책은 지속되고 있었다. 내수침체로 자영업자들의 상태는 매우 안좋았고, 조출, 잔업, 노동강도 강화로 칼라텔레비전과 VCR을 계속 실어내 수출대기업은 떼돈을 버는데 정작 그것을 만든 노동자는 빈털터리였던 것이다. 자영업자들 사무관리직들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노동자들은 7월에서 9월 사이에 작업장에서 노조결성과 파업투쟁을 벌이기 전 6월항쟁 거리시위에도 개별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86년 87년 민중들의 대대적인 진출에는 이런 정치적 경제적 배경이 있었고, 86년 2월 진행된 필리핀 민중혁명과 마르코스 축출도 한국민중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87년 투쟁에서 민중들은 무엇을 원했고 그것을 쟁취했는가? 부산 시위대를 가지고 얘기를 풀어보기로 하자. 우선 87년 6월 항쟁에서 부산시위대 규모가 커진 것은 김영삼과 연결해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광주 개헌현판식에 몰려든 사람들을 김대중을 빼고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런데 이 부산 시위대들은 김영삼을 지지하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통해 김영삼을 대통령 시키기 위해 대거 시위에 나섰을까? 난 그랬을 수 있었다고 본다. 아니 그랬다고 이야기하는 게 사태를 더 정확히 보는 것일 것이다. 여기서 한 발만 더 나아가 보자. 그러면 이들은 단지 김영삼을 대통령을 시키는 것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었을까? 여기엔 도저히 양보를 할 수 없다. 답은 ‘아니오’다. 그들은 김영삼을 통해서 특정한 자신들의 요구를 실현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파쇼 세력과 기구의 일소 등 민주주의의 신장 및 제 권리의 확대와 경제적 형편의 개선과 억압과 착취의 제한 및 철폐 등이었을 것이다. 김영삼은 이들의 요구에 부응했는가? 그 이후 정치적 과정을 보면 김영삼은 이들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물론 김대중도 6월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자신의 지지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국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상황 속에서 전두환의 정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정책을 실시했고, 민중생활의 어떤 측면에서는 전두환 때보다 더 못해지기까지 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카드는 노동자 민중들의 희생 하에 자본의 이윤율을 회복시키자는 ‘신자유주의’라는 카드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6월 항쟁에 참여하였을 민중들은 김영삼에 실망한 뒤에는 김대중을 지지하고, 김대중에게 실망한 뒤에는 노무현을 지지하고, 이젠 노무현에 실망하고 이명박을 지지하려 하고 있다. 왜 민중들은 계속해서 배반당하면서도 비슷한 정치인을 계속해서 지지하고 있는가? 혹은 속을 줄 알면서도 지지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왜 그렇게 생명력이 강한 것인가?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알면 이 글의 제목에 넋두리라는 단어가 들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넋두리삼아 몇마디 해 본다면 그 이유는 대안적 이데올로기, 즉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실질적 부재 때문이 아닐까? 이번 프랑스 선거를 보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치세력의 몰락의 끝은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강력하던 프랑스 공산당이 2% 지지도 못얻어 냈으니. 임시변통은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 혹은 또 다른 좌파 후보가 일정한 지지를 얻고 더 나아가서 그 이후 선거에서 오늘날의 이명박의 자리를 넘겨받을 수도 있을지라도 그것이 대수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민중들의 해방의 열망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없다면 민중들의 봉기를 맞이해서도 민중들의 해방의 열망을 여기저기로 흘려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87년 6월의 퇴계로와 명동성당의 해방구를 다시 만들어내기 위해서 내가 지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즈음에 87년을 경험한 ‘87년의 자식들’ 중의 하나로 ‘운동’에 뛰어들어 20여년이 흐른 지금, 답답해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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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40년 만에 다시 만난다, 바로 오늘!!

 

전화 준 것만도 고맙다고 극구 사양하시는데

내가 강권을 했다. 한 번이라도 만나고 전화를 드려도 드려야하지 않겠냐고.

 

암튼 나오시기로 했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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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을 보았다.

 큰아이하고 산책을 하다 예정없이 보게 되었다. 큰아이는 ‘캐러비언 해적’을, 난 ‘밀양’을. 작은아이가 어디 가고 없고 처는 출근해 일하고 있는데, 저녁에 집에 돌아올 작은 아이 돌 볼 생각도 안하고 영화표를 끊어버려 처한테서 한 소리 들었다. ‘치사하다’고.

칸에서 호평이 있다잖은가! 외국 영화제에서 무슨 상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영화를 우리 같은 속물이 안 봐줄 수 없지. 그리고 세속적이고 평범한 노총각 역을 한 송강호가 남편을 잃은 전도연에게 밀양, 즉 ‘비밀스런 햇볕’을 상징한다고 언론에서 들은 바 있어 이게 무슨 사랑인가(요새 두 사람 사이에 어떻게 사랑이 이루어지는가에 관심이 좀 있다) 호기심이 가던 터였다.

영화를 보는 중간 중간 그리고 영화를 보고 든 생각 하나! ‘칸’이 영화에 나오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의 여러 현상, 즉 어린이 웅변학원, 독특한 한국의 개신교, 커피배달(지방에 아직도 이런 게 있나? 자신 못하겠다) 등을 제대로 이해하고 호평을 했을까 아니면 주제만을 따라갔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가 송강호의 전도연에 대한 어떤 독특한 사랑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그 사랑은 일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세속의 삶의 한 구성요소로서 끌어들여진 것이었다. 

영화 내용을 이야기하긴 그렇고...

영화의 메시지? 구원은 ‘하늘’에 있는 게 아니라 여기 ‘세속’에 있다! 물론 내가 읽어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청준 원작(주인공이 아들을 유괴 살해한 유괴범을 신앙을 가지고서도 용서를 하지 못해 자살한단다)보다 영화로 각색된 이야기가 더 나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영화의 결론, 즉 신앙속에서 용서를 하겠다고 찾아간 아들의 살해범이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용서를 할 수 없는 처지에 몰린(?!) 후 신앙을 멀리하고 정신병원까지 갔다 온 신애(전도연 분)가 남편과 아들의 상실을 딛고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즉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암시를 주는 것들은?

첫째, 영화초반에 전도연과 사소한 불화를 겪는, 말실수가 잦은 동네가게 여주인과의 화해,

둘째, 전도연이 미장원에서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유괴범의 딸을 다시 만나 불편을 느끼는 것(이것은 약간 설명이 필요하다. 신의 장난 또는 운명, 즉 교통사고로 인한 남편과의 사별, 아무 죄 없는 아들의 유괴 및 피살 등의 피해자인 전도연을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아들 유괴자의 딸이다. 전도연은 이 딸이 사내아이들한테 맞고 있는 것을 유괴범의 딸이라는 이유로 외면했는데 영화끝에 예기치 않게 이 딸은 재등장한다. 정신병원을 나온 후 전도연이 머리를 자르러(정상적인 삶의 상징 혹은 개가의 상징?) 들어간 미장원에서 전도연의 머리를 자르는 이가 이 딸인데, 이 딸은 전도연의 머리를 자르면서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 눈물을 흘리면서 전도연을 불편하게 한다 - 전도연으로서는 아들의 살해자의 딸이어서 불편하고 그리고 종교를 통해 용서를 했다면서도 이 딸의 불행을 외면한 것 때문에 불편하다. 그래서 이 미장원으로 자신을 안내한 송강호와, 하늘에 대고 불만을 퍼붇는다).

셋째, 전도연이 머리를 자르면서 송강호에게 거울을 들게 한 것 등이다.

셋째 장면은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데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다 중간에 뛰쳐나온 전도연이 자신의 집 안마당에서 손수 거울을 앞에 두고 불편하게 머리를 자르고 있는데 송강호가 들어와서 거울을 들어주고, 신애는 그 거울을 보면 머리를 자르고 있는데 그 거울을 통해 작은 햇볕이 지저분한 마당 한 귀퉁이를 비춰준다.

원작 자체의 한계(이청준에겐 계급문제나 민족문제 등은 아예 안 보이는가? 구원이나 해방은 이런 것과 무관한 것인가?)를 딛고 세속의 삶을 주목하게 한 장점은 있지만 이창동의 이 영화 자체의 한계 또한 뚜렷하다. 영화적 주제의 선택이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다루고 있지 못하다.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두 주연 다 잘 한 것 같다. 전도연이 쉽지 않은 신애의 역할을 잘 했다는 얘기는 많고 나도 뭐 대체로 동의가 된다. 그러나 송강호의 역할도 쉽지 않아 보인다. 속물스러워 보이는 송강호의 평소의 모습(전도연이 정신이상 징후를 보일 때 딱 한 번 다른 모습을 보였다)을 누가 송강호만큼 연기해 낼 수 있을까?

영상? 오늘날 한국사회의 자질구레한 측면을 잘 옮겨놓은 것 같고 영화의 제목이 제목이니만큼 햇볕에 신경을 많이 써 촬영을 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 영화 누가 많이 볼까 싶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어떤 아저씨 왈, "에이, 시간만 배렸네" 하고 나가버리는 것을 보면.

 

* 영화를 찬찬히 본다고 봤는데 워낙 예술작품 독해력이 떨어지는지라 잘못보고 잘못해석한 데가 많으리라 생각되지만 난생 처음 영화감상평을 써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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