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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해야 할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는 속담이 이렇게 딱 들어맞는 경우가 또 있을까 싶다.


솔직히, 계란으로 바위치기/바람앞에 촛불이라고 생각했다. 평택투쟁을 볼 때도 비슷했던것 같다. 그런데, 막상 협상이 체결되고 나니. 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망연자실한 채로 넋이 나간듯 지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뭘 하려고 해도 참..의미가 없는 듯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저것 열심히 다른 일들을 벌여보려고는 하는데.. 이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싶다. 그래도 살아가긴 하겠지. 그런데, 살아지는 것인지, 살아가는 것인지를 구분하기는 당분간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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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A를 반대한다는 것.

Q. 당신에게 FTA는 무엇입니까? A. 모든 답변 앞에는 '사람을 죽이는데'가 들어감. 1. 정부가 앞장서서 하는 것. 2. 여러가지 방법을 쓰는 것. 3. 물 못 먹게 하는 고문하는 것(물 사유화). 4. 약 못 사먹게 하는 것(제약회사만 배불리기). 5. 때깔도 안나게 죽이는 것(광우병 소 먹었다가;;). 6. 길거리에 나앉게 해서 굶어 죽이는 것(NAFTA 체결 이후 노점상 급증, 빈민 급증). 7. 폭력을 쓰는 것(NAFTA에서는 국경을 넘다 죽은 사람들이 해마다 꾸준히 늘어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집회에 나갔다가 방패(!!!)에 맞아죽는다.). 8. 병에 들게 하는 것(아토피 등의 환경병은 물론이고, 비싼 약값 때문에 치료 못받아서 죽을 가능성도 높다. 인도는 물 사유화 이후 빈민들이 깨끗한 물을 사먹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수인성 전염병등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9. 지하실에서 넘어져서 죽게 만들 수도 있는 것(전력 사유화 되면 지하실에서 불 켜기도 무서울 듯 - 이거 진짜 괴담이다!). 10.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게 만드는 것(캐나다는 NAFTA 체결 이후 에틸사의 석유첨가제가 환경오염의 위험이 있어 규제했다가 제소당해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투자자-국가 소송 조항에 대한 사례로 자주 인용됨). 11. 일자리 찾다가 홧병나게 하는 것. 12. 이런거 쓰게 하면서 더 울화통 터지게 만드는 것!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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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타인들에게 편협한가.

비올님의 [내 상식으로는] 에 관련된 글.

* '타인들에게 편협한가.'라는 말이 문법상으로는 틀린 것 같은데, 그냥 저 단어를 꼭 쓰고 싶어서 그냥 둔다. 그러고 보면 언어라는건 참 무엇인가를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구나. 비리 교직원 새끼 하나의 목을 치면 나올 월급, 그 돼지들(돼지들아 미안!)의 판공비, 잔디깔고 벽돌깔며 떼 처먹은 더러운 돈. 그 돈은 결국 그들의 세련됨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외피에 처덕처덕 쳐 발라져 있겠지. 결국 지금의 사회에서 '돈 = 세련됨' 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는게 아닌가 싶다. 오늘, 말 안듣는 핸드폰 때문에 전화를 한 통 걸었다. 기껏해야 아이들 학비를 걱정하며, 생활비를 걱정하며 하루종일 귀가 부르트도록, 잔뜩 달아오른 뜨거운 수화기를 귀에 대며 지겹도록 전화를 받았을 그녀들에게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불편을 겪고 있는 고객이 친히 전화를 걸어 문의를 하는데 그녀들은 왜 내 말을 제대로 못알아 듣고 우왕좌왕 헤매고 있는거냐. 그녀들의 잘못이라면 그 따위 전화를 팔아먹는 기업의 잘못을 최전방에서 막아주고 있는 것일 뿐인데. 세련되지 못하고 내 말을 알아먹지 못하는 어리버리한 그녀들 때문에 하루종일 울화가 치밀다가, 문득 비올의 글을 보며 청소용역분들에게 구석지고 비좁아터진 휴게공간 하나 선심쓰듯 내밀며 '지저분하니 눈에 띄지 말아야지. 우리는 세련되고 깨끗한 공간을 원해'라고 생각했을 그 돼지들의 얼굴이 내 모습과 오버랩되어버렸다. 같이 싸우는 것과 내가 그들을 이해하는 것, 동화되는 것, 그리고 함께 하는 것. 정말 너무나 먼 길이구나 싶어 살짝 눈 앞이 아찔하다. 그래도, 세련된것 보다는 그 아줌마들의 인간미에 동화되고 싶은 작은 바램하나는 잃지 않겠다고 다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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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깔나게 글 쓰는 법, 누가 안 가르쳐 주나? OTL

월간 『사람』에 연재하는 "이것도 인권이에요"꼭지는 매월말 내게 심각한 두통을 선물한다. orz 그런데 정말 더 좌절할만한 상황이 발생했다. 비슷한 소재로 쓴 글인데 이렇게 맛이 다를수가!!! 누가 나한테 이렇게 글 쓰는거 안 가르쳐 주나요? 흑흑. 내가 쓴 글 나를 좌절시킨 문제의 그 글!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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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주민등록증 없이 여권발급 길 열려

오리님의 [오리의 우왕좌왕, 좌충우돌 쎄컨드 신분쯩 만들기] 에 관련된 글.

ㅋㅎㅎㅎㅎ 이런거 보고 웃으면 안되는데 기사를 보자마자 마구마구 웃어버렸다. 몇 달전 오리가 미친듯이 쎄컨드 신분증(운전면허증) 만들려고 돈도, 시간도 쏟아부은걸 생각하니 웃을 수밖에. ㅋㅋㅋ 오리한테 말해줬더니 뜨거운물만 부으면 바로 싸~악 뽑혀버릴 것 같은 얼마 안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을것 같은 표정으로 소리지른다. "내 70만원~~~~~~~~~~~~~~~~~!!!" ㅋㅋ 오리 미안해. 배아프게 하려던건 아니었어. :p


지문날인거부자 김성민 씨, 신분증 없이 여권발급 예정 김민재 기자 b19431939@jinbo.net / 2007년03월08일 13시45분 지문날인 없이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지문날인 거부를 이유로 신분증이 없었던 김성민 전 울산노동뉴스 기자가 여권발급에 성공했다. 김성민 씨는 국가기관에서 발급하는 신분증이 없다는 이유로 울산시청으로부터 여권 발급을 거부당하자 신분증 대신 네티즌 등으로부터 신원을 보장받는 방법으로 곧 여권을 발급받을 예정이다. 김성민 씨가 자신의 사진과 그간의 사정을 알리는 글을 통해 네티즌에게 신원보증운동을 펼친 후, 3주 남짓한 기간 동안 김성민 씨를 알고 있는 40여 명의 네티즌이 김성민 씨의 신원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댓글을 달았다. 또 김성민 씨는 사진과 최소한의 양식을 적고 신원을 확인한다는 서명용지를 만들어 시의원, 구의원, 정당인, 노조간부, 인권활동가 등 10여 명을 대상으로 서명을 받았다. 2월 28일, 김성민 씨는 다시 시청에 찾아가 여권발급신청서와 사진 1장, 그리고 ‘제 신분을 확인해 주실 분들을 찾습니다’라는 글과 댓글들, 장석대 변호사의 법률 검토 의견서, 신분을 확인한 서명지 등을 구비하여 여권발급을 신청했다. 이에 시청관계자는 외교통상부에 “지문날인거부로 인해 신분증이 없는 경우, 공인 등을 통해 신분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문의한 후 김성민 씨가 제출한 서류를 접수했다. 지난 2일 외교통상부는 “신청인과 여권 명의인이 동일인임을 확인하는 방법은 주민등록전산망 사진과 신분증의 대조가 가장 확실하고 보편적인 방법이나, 문의한 경우와 같이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거주지 읍,면,동장의 신원확인서 등으로 보충될 수도 있다고 판단됩니다”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동사무소 신원확인서 양식에 동장의 확인만 받으면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정건 울산시청 민원실 차석은 “김성민 시민의 적극적인 문제제기에 관련법을 검토한 결과, 여권발급에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는 법적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신분증이 없더라도 관공기관을 통해 신원이 확실한 시민이라는 사실이 증명되면 여권발급이 가능할 것이다”며 “외교통상부에 질의한 결과, 동사무소가 플라스틱 주민등록증으로 교체하기 전의 주민등록증이나 주민등록등본에 기재된 정보를 토대로 면접조사를 진행하여 신원을 보증한다면 여권을 발급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일이 시민의 불편을 덜어주는 모범선례가 될 것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김성민 씨는 “‘실명 댓글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연대의 힘’을 바탕으로 ‘국가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지 않은 공인’을 인정받으면 그것이 제 신분증”이라며 이번 일을 “아래로부터 모아지는 힘을 통해 국가기관의 일방적 신분확인제도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투쟁”이라고 평가했다. 또 “이를 계기로 자발적 연대운동과 불복종 저항운동의 흐름을 만들어갈 생각이다. 오는 3월 28일에 ‘기본권과 불복종 저항운동’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성민 씨는 조만간 동사무소에서 신원확인을 마치고 여권을 발급받을 예정이다. 이번 사례는 외교통상부가 지문날인을 하지 않고도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한 최초 사례로, 지문날인 거부 운동의 한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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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대한 예의

트랙팩님의 [나에게 (진보)블로그란 ?] 에 관련된 글.

1. 사실은 별로 관련 없는 포스트를 하려다가.. 포스팅의 이유가 트랙팩의 주제와 관련이 있어서 여기에 슬쩍 얹어간다. 트랙팩도 하고, 글도 올리고.. 1타 쌍피라 할 수있;; 2. 게다가 실은 예전에 이런 낙서로 내 블로그에 대한 생각을 써본적도 있다. (재활용까지 하니 이건 1타 3피..?) 3-1. 왜 꼭 '진보블로그'냐? 라고 묻는다면, 글쎄. 아마도 쓰레기같은 덧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장점이지 않을까 싶다. 이건 나 말고 다른 많은 블로거들이 공감하는 부분일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가진 비윤리적 취향/성향이나 천박한 취미를 공개하기에는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언제 어디선가 갑자기 '이런 혁명적이지 못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니! 운동권으로서 반성하시오!'라는 날벼락 같은 댓글이 달릴 것 같아 겁난다. 솔직히, '겁난다'보다는 '귀찮다'가 맞는 말이겠지만, 이런 이유때문에 포스트에 대한 자기검열을 한다는 것은, 결국 1인 매체로서의 블로그의 성격을 아직은 충분히 이해하거나 활용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블로그를 '내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나보다. 3-2. 위의 내용과 연결해서, 솔직히 나는 '내 블로그에서는 이런거 못 받아준다!'라는 경고가 참 꼴사납다고 생각한다. 그럴거면 홈페이지는 어떠세요?라고 되받아주고 싶을 때가 있다. 블로그가 갖는 특별한 기능들(트랙백이나 RSS..에..또..아우 사실 나 이런거 완전 문외한인데!-공부가 귀차나요 -┎)을 고려해본다면 블로그는 철저히 소통, 연결의 공간으로서 활용되는 것이 정상이다. 홈페이지 만들려면 돈 들잖아!라거나 홈페이지 만들 줄 몰라서 그런다 왜?라는 답변이 돌아온다면 (즐~ 이라고 하진 않겠지만 ┒-) 블로그 서비스 개발자들의 서비스 개발 취지와 무관하게 서비스를 이용한다면 그건 사실 무임승차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한다. 혹여 오해를 빚을까봐 하는 얘긴데, 나는 컨텐츠 자체가 개인의 신변잡기로 채워져 있다고 뭐라 하는 것이 아니다. 블로그가 갖는 소통 가능성을 차단하는 행위에 대해 반대하는 것일 뿐이다. (아주 쪽팔린 얘기지만, 사실 난 맨처음 만들었던 블로그를 거의 미니홈피처럼 활용했었다. 트랙백 다 막아버리고, 댓글 설정도 다 막고, 친구 공개만 설정하고;;) 3-3. 뭐 그래도 저건 결국 내 생각일 뿐이므로, 누가 안 듣는다고 해서 뭐라 할 수는 없다. 물론, 논쟁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논쟁은 타인의 생각을 인정하지만 뭔가 논리적 해석이 되지 않을 때 반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지, 너 참 편협해서 잘났다는 식으로 들이대신다면 참 괴롭다. 그럴때는 나도 한 마디 하고 싶어진다. 비난은 너네 집에서라고 말이다. 4. 쓰고보니 참 싸가지 없는 말투로 썼다. 그런데, 이건 사실 내가 몰래(!) 좋아하는 어떤 블로거의 말투다. 그 블로그를 좋아한다고 하자니 참 정치적 생명(응?)이 끝장날까봐 차마 드러내놓고 좋아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투, 써보니 꽤나 재밌다. ㅎㅎㅎ


. . . . . . . 이거 쓰다가 까먹어버렸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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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겐 철저한, 나에겐 관대한.

어떤 문제든, 사실 원인은 그 문제를 느끼는 순간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꽤나 오랫동안 묵혀둔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작은 것이라고 그냥 넘겨버렸던 것이 큰 덩어리로 돌아와 목구멍에 턱 막혀버릴 수도 있고.. 어느쪽이건 간에,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원인들을 꼼꼼히 따지기 보다는 그 일이 불거진 순간 순간을 좀 더 꼼꼼히 돌아보며 당장의 대책을 찾곤 한다. 내 경우는 종종 사람들과의 수다를 통해 문제에 대한 내 감정을 해결하곤 했는데, 이걸 반복하다 보니 의문이 생겼다. 나와 수다를 떠는 사람들은 내 얘기만 듣고 내 의견에 동조해준다. 물론 솔직히 나는 아주 객관적인 사람은 아닐 것이다. 나도 내가 충분히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라는 점에 대해 인정하고, 내 말이 전달 될 때 얼마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려하지 못할 때가 있을것이라 인정한다. 그래도 사람들이 너무 쉽게 내 말에 수긍하고 인정할 때, 난 가끔 위안을 얻기 보다는 내가 점점 더 편협한 인간이 되는 것 같아 두려울 때가 있다. 어쩌면 그 동안 사람들에게 동조를 구해왔던 의견들이 한 번도 긍정적인 쪽으로 실현된 적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말로만 올바른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내 말이 옳다고 얘기 해줘도, 결론은 항상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나가지는 않으니 말이다. 어쩌면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생각만 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지금 이 순간 조차도 내 생각은 결국 옳았지만 단지 지쳤기 때문에 손을 놓고 있을 뿐이라고 합리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에겐 철저하고 나에게는 관대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자꾸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아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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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포스트 쏟아내기 신공

....을 펼치는 이유는 단 하나 뿐이다. 원고마감!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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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대한 이런저런 잡생각들.

얼마전 어떤 기자회견(그냥 대충 넘어가죠 -_-)에 갔다가 약간 기묘한 느낌을 받고 돌아왔다. 이래저래 아는 얼굴들이 많은 자리였고 그래서 열심히 기자회견을 구경(orz 저 원래 이런년이에요. 뭐든 '구경'하는 자세..)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남성활동가들이 별칭을 쓰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점. 실제로 내 주변에도 별칭을 쓰는 남성활동가들은 그리 많지 않다. 별칭이 없는게 아니라, 별칭을 활동명(활동할 때 본명을 대체할 정도로 사용하는 경우..정도)으로 쓰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별칭을 많이 쓰더라도, 공식적(?)인 소개때는 본명을 쓰는 경우도 있고.. 그게 차별적이라던가 뭐 그런 의미는 아니다. 다만, 남성활동가들이 별칭을 잘 쓰지 않는 어떤 이유가 있나 궁금한 것이다. 정말 자기 맘에 드는 별칭을 찾지 못해서?..라고 하기에는 별칭의 사용 비율이 너무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나는 별칭을 쓰기를 고집하는 편이다. 형식적인 이름이 필요한 경우(공문 등을 작성할 때)엔 가명을 쓴다. 솔직히 나는 내 본명이 싫다. 물론 이유없이 그냥 싫은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뭐 굳이 밝혀야 할 필요는 모르겠고;;) 레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면서 많이 받았던 질문은 1. 무슨 의미에요? 2. 왜 써요? 였다. 1번은 몇 번 반복해서 얘기했었는데 이제는 그 의미가 나한테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고, 2번은 답변의 내용을 계속 고민하다보니 이젠 슬슬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별칭을 쓰는 이유는, 내가 활동가로서 온전히 인정받는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별칭을 활용할 수 있는 공간에서 나는 활동가로서, 그리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연대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신뢰를 주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인지되기를 원한다. 누군가 나를 '레이'라고 부르는 것이 내게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물론 '활동가'와 '대중'을 쪼개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활동을 시작하고, 그리고 활동하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도 있다..) 본명을 쓸 때, 내게 떠오르는 것들은.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돈벌이도 되지 못하는 일이나 쫓아다니며 결혼도 하지 않고 부모님 친구분들에게 자랑거리도 되지 못하는 철없고 골치거리인 동생보다 집안에 기여하지 못하는 못난 첫째... 로 낙인찍혀있는 가족 안에서의 내 위치이다. 아버지가 첫째라고 무척 고심하면서 지으셨다는 내 이름이, 지금 내게는 무척 부담스럽고 큰 족쇄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특히 본명을 불렀을 때 주는 여성적인 느낌과 지금의 나의 이미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평가들은 내가 별칭을 더 고집하게 되는 이유를 만들어주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부모님의 바람을 담은 것이었다면, 지금의 내 별칭은 온전한 내 바람을 담은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런 내 사소한 고민이, 만약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나처럼 별칭을 쓰는 많은 활동가들이 공감할 수 있는 문제라면 그건 참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게 정말 내가 느낀대로 성별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이라면 그건 더 서글픈 일일 것이다. 그냥.. 그렇다. + 지금의 별칭이 온전한 내 바람을 담은것.. 이라고 했지만 내 별칭에 대해 앞으로 내가 얼마나 책임을 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노력해야겠지. 적어도 내가 '레이'라는 이름을 좋아하는 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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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제대로 살고 싶은데..

최근 포스팅 횟수가 현저히 줄고 있다. 활동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머리 속에 남는 생각도, 고민도 없나부다. 그러다보니 블로깅도 재미없어졌;; 아이고야. 빨리 돌아와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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