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1/23'에 해당되는 글 12건
나는 자전거를 못 탄다.
기술이 없어서 못타는 것도 있지만,
자전거를 타면 관절이 빨리 닳아서 타면 안되게 되어있다.
많이 걸어도 안되는데,
걷는 걸 무척 좋아해서 옛날에는 진짜 많이 걸었었지만,
덕분에 요새는 조금만 걸어도 많이 아프게 되었다.
예전에 에코토피아 갈때도 그래서 기차타고 갔었다.
자전거탈 수 있는 사람들 부러워...
자전거에 대한 글을 보면 외로운 느낌이 든다.
차를 팔아서 독일에 다녀온 뒤로,
개토는 거의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셈이다.
아니라고 해도, 사실은
차가 없으니 다니는 것이 어려운 거다.
휠체어같은 걸 이용하고 싶지만, 휠체어 타고는 집앞에서 500m 벗어나기도 쉽지 않을껄.
아옹... 건강한 사람들 부러워...
예전에 오토바이 뒤에 타 본적이 있는데,
자전거를 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오토바이 타는 것만큼 두근대지는 않아도
내리막길은 쿵쾅쿵쾅 쿵쾅쿵쾅 할거야...
가끔, 무척 걷고 싶다.
아파하지 않고 걱정하지도 않고, 주변의 눈치를 보지도 않으면서....
살짝 슬퍼졌다.
흴체어로 전국 일주 같은거 해볼까....
에비, 감정에 겨워 쓸데없는 소리하지 않기!
카이유와가 자신의 의견을 가미하여 전개시킨 그의 의견을 따르면, 인간은 노동을 통해 이성의 세계를 건설하지만, 인간의 내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자연은 본래부터 난폭하다. 그 폭력을 다스리기 위해 원시인들은 이성적 시간과 신적인 시간을 나눈다. 이성적 시간, 다시 말해 세속적 시간은 일상의 시간으로 금기를 준수하는 시간이다. 신성의 시간이란 축제의 시간으로 금기를 위반하는 시간이다. 성적인 측면에서 볼때, 신적 시간이란 성적인 방종의 시간이며,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살해금기를 위반하는 시간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그 신성한 시간이 점점 없어져가고 있다. 신성의 시간이 없어지면, 남는 것은 이성적 시간뿐이며, 이성적 시간만이 남게 되면, 폭력을 다스릴 방법이 없게 된다. 이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폭력이다. 바타이유는 카이유와의 이론을 받아들여, 현대 사회의 소회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금기 위반의 이론을 내세운다. 금기 위반의 시간이 많아지지 않으면, 폭력은 더욱 난폭해진다.........바타이유의 철학은 금기위반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는 철학이다. 그가 사드에 대해 계속 관심을 표명하고 포르노 소설을 계속 쓰는 것은 그런 이론적 성찰때문이다. 그는 가능성의 극단, 극단적 삶, 철학적 극단, 쉽게 말해 위반의 철학을 수용하지 못하는 철학은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위반이야 말로 인간 내부에 있는 폭력을 잠들게 하는, 아니 바르트의 말을 빌면, 폭력을 속이고 피해가는 한 방법이다.
p 305
그 문학은 사드, 아르토, 루셀, 초현실주의, 카프카, 바타이유, 블랑쇼로 이어지는 체험의 자리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육제적 죽음과 언어의 죽음을 동시에 맛본다. 그는 죽어가고 있다. 남아있는 것은 글쓰기의 모험뿐이다.
p 151
자기 소모적인 글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네르발은 계속 글을 썼으나 완성된 작품을 남기지 못했으며, 그것이 그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다.
p 152
사유하는 주체 대신 사유의 사유를 대상으로 삼으면, 진/위와 관계 없는 사유, 통일성이 없는 사유, 그러면서도 사유라는 점에서는 통일성이 있는 사유가 살아남을 수 있다. 그 사유라는 주제 체계 속에서는 누가 말하든 관계없다(베케트), 혹은 무엇을 말하든 관계없다. 사유란 "모든 체계 내에서 그것을 벗어나는 움직임" 자체이다. ............그 사유야말로 자신의 본질을 찾아 ?g황하는 시대의 문학, 자신의 본모습을 찾기 위해 항상 다시 시작하는 시대의 문학이라는 블랑쇼적 문학, 아니 문학적 체험의 본질 그 자체이다................................. 문학도 "글쓰는 주체로서 자신에게 말을 하여, 자신을 태어나게 한 움직임 속에서 온갖 문학의 본질을 다시 파악하려 애쓰는" 문학만이 그의 주의를 끌며, 철학도 "무한한 지평 위에 놓인 끝없는 작업"으로서의 철학만이 그의 주의를 끈다. 자신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는 사유야말로 모든 전도. 전복의 기본 원리이다.
체계에서의 벗어남은 지배적 규칙, 법칙에서의 벗어남이며, 그런 의미에서 지배적 권력에서의 벗어남이다. 사유의 사유는 체계에서의 벗어남이며, 권력에서의 벗어남이다. 그것은 역으로 모든 사유는 체계에 의해 권력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뜻한다.
권력이 담론을 조정하는 것은, 그것이 권력을 행사할 위험을 제거하고 그것 때문에 뜻하지 아니한 사건들이 생기는 것을 막고, 그것이 오래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권력이 담론을 규제하는 절차는 대개 세 부류로 나뉠 수 있다.........세번째 부류는 말을 하는 주체에 대한 제한이다. 담론의 보존, 생산, 분배의 법칙을 고수하는 담화회(한국의 예를 들자면, 판소리 전수회), 말하는 주체를 예속시키고 그들을 모아 집단을 이루게 하는 주의, 주장(계속 한국의 예를 들자면, 운동권의 주의, 주장), 교육 등이 그 예들이다.
p154~155
"오늘날의 글쓰기는 표현의 주제를 뛰어넘었다." 그것은 내용에 따라서라기보다는 시니피앙의 본질에 따라 놓여진 기호의 놀이이다. 그것은 언어의 한계를 자꾸 위반하고 넘으려 한다. 다시 말해 글쓰기는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행위의 과시가 아니라, 저자 대신에 시니피앙들이 솟아오르는 공간의 획득이다. 저자는 사라져가고 기호들의 놀이는 심해진다. 그러니 글쓰기는 당연히 저자의 죽음과 연결된다.
그런데 현대에서 작가의 삶은 작품 속에 들어가 불멸성의 근거가 되는 대신, 작품을 쓰면서 희생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글쓰기에는 개인성이 제외되고, 개인은 노동하다 죽는 누군가가 된다.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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