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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운위, 어디로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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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학운위와 나는 별다른 연결끈이 없다. 아니 지역의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싶어도 공식적으로는 관여할 통로도 없다. 그래도 지난 2년간의 학운위의 지역위원으로서의 활동은 학운위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운위의 틀을 보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견고한 보수의 실체를 실감할 수 있다.  

 
어제 다시 학운위 관련기사를 한겨레신문에서 보았다. 학운위가 문제가 안될 수 없겠지. 학교자치는 과연 가능할까. 학교, 교육현장도 제대로 하지 바꾸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전교조가 나름의 노력을 하지만 힘이 부친다. 소위 운동을 하는 이들도 여기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지 않고 있고... 무슨 쟁점이 생길 때만 신경 쓰는 척 할 것이 아니라 평소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바꿔나가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상의 변혁이 중요하다. 아래에 지역위원에 나갔다가 떨어진 이야기(벌써 한달이 다되어 간다)와 함께 학운위 관련 기사를 담아온다.
 
 
ㅇ 03-27 지역위원 경선에서 떨어지다
 
청룡초등학교 학운위 지역위원 선출에 나를 추천했다는 말을 민샘에게서 들었던 것이 저번주였고, 오늘 청룡초교에서 소견발표와 함께 경선을 치루었다. 교장 쪽에서 내놓은 2명과 함께 두 자리를 놓고 겨루는 것이었기에 떨어지는 게 불보는 뻔한 일이었다. 역시나 학부모들은 일치단결로 교장측의 후보 두명을 연기명으로 찍었고, 나는 낙선의 영광을 안았다.
 
소견발표 전에 대기하는 자리에서 12년 학운위원 경력의 50대 후반 여성과 전남 영암 출신인 40대 후반의 남성과 얘기를 나누었다. 둘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고 - 나 또한 마찬가지다 - 흔들리지 않고 소신있게 학운위를 이끌어가겠다는 얘기를 한다. 12년간 자신이 교육을 위해 얼마나 일해왔는지를 역설하는 동안, 도대체 여전히 학운위에 많은 문제가 있는데, 스스로는 도대체 뭘했는지 반성은 해봤는지 묻고 싶었으나 걍 참았다. 그리고 전교조 서울지부 초등위원장을 지낸 민샘에 대해 험담을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본질을 알 수 있었다. 앞에 했던 말은 사탕발림이었고, 안티전교조의 깃발아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둘 사이에 누구를 아느냐, 잘 안다, 누구는 어떻게 지내느냐, 몇년전에 어떤 학교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고, 교육위원들은 어떠했다는 말이 오가는 것을 보면서 학운위원이 무슨 대단한 자리라고 그렇게 하려고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들간에 거대한 네트워크가 살아움직이는 것이 눈에 잡혔다.
 
60대가 되는 그 여성은 자신의 교육에 대한 열정을 높이 사서 학부모들이 추천을 해서 오게되었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교육 윗선에서 학부모들에게 전화를 하는 등 사전작업이 있었다고 한다. 역시 말로 판단할 것은 못된다. 게다가 학교운영위원장 자리를 노리고 온 것이어서, 몇 차례의 투표끝에 자신이 짱을 먹지 못하자 그냥 나가버렸다는 말을 듣고서는 저런 사람이 학운위장을 했다면 큰일이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물론 위원장이 된 사람이 어떤 이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음 주 월요일에 이전에 학운위원을 했던 남부초교에서 새로 학운위원을 뽑아 회의를 하면서 전임 학운위원들이 잘했다고 감사패를 전달한다고 나보고 참석하란다. 얼떨결에 서무실장님의 전화를 받고 그러마고 했지만, 강의 끝나는 시간과 겹쳐서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 늦게 갈 듯하다고 다시 연락을 드려야 한다. 전화를 받은 때가 학운위원 후보 소견발표를 위해 대기하던 때여서 사정을 말했더니 아마 될 거라고 덕담을 해주었는데, 그게 씨가 되었는지도... 하긴 학운위원이 되지 않아서 공부에 더 전념할 수 있게 된 셈이라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ㅇ 03-31 남부초등학교에 다녀오다
 
학교운영위원 이취임식 때문에 남부초교에 갔다 왔는데, 부위원장을 잘 했다고 감사패까지 수여한다. 솔직한 맘은 이런 감사패를 주기보다는 이것을 학교를 위해 쓰는 게 더 좋을 텐데 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지역위원 자천제도가 있는 줄 알았으면 자천을 할 걸 그랬다. 물론 나를 도와주는 분도 없긴 하겠지만,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6학년 학부모가 지역위원으로 추천되었다니 도대체 어떻게 학교를 견제할 수 있을런지...
 
교장실에서 학교운영위원장이 된 전임교장과 한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누었다. 아니 설교를 들었다. 전교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게다가 초등학교도 단지 즐거운 학교가 아니라 경쟁력 있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에 대해 학교에 정말 가기 싫었던 나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어렸을 때에는 풍부한 상상력을 키워주고 가고 싶은 학교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노동귀족을 얘기하고 전교조의 정치화를 비판하길래 대공장 정규직노조가 비정규직을 포괄하고 이들과 함께 하려는 노력을 오히려 정치적이라고 하면서 탄압하고 있다고 얘기를 했다. 학교의 무기계약직 노동자들이나 임시직 교사 문제도 얘기하고 말이지.
 
이전에 교장으로 계실 때에는 전교조 샘들이 학운위원으로 있어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했나 보다. 이제 전교조 샘들도 다른 학교로 가고, 지역위원들도 학교장과 맘에 맞는 이로 채워졌으니 남부초등학교가 어디로 가게 될지 궁금하다.
 
그런 자리에서 식사까지 하면서 길게 있는 것은 불편할 듯하여 약속을 핑계로 그냥 빠져나왔다. 나름대로 신경써주신 서무실장님한테는 미안하지만 말이다. 아마 다른 학교운영위원들도 내가 자리하는 게 불편했을 거다. 
 



교장들 입김 ‘학운위 선거’ 쥐락펴락 (한겨레, 김소연 유선희 기자, 2008-04-13 오후 09:22:08)
교원위원 최다득표자 ‘탈락’ 코드맞는 후보만 임명
일부 사립학교 ‘파행’…학부모 후보에 사퇴 종용도

 
서울 ㅇ고등학교는 지난달 19일 교직원 60여명이 모여 학교운영위원회 교원위원 투표를 했다. 3명을 뽑는 선거에 7명의 후보가 나와 ㅎ 교사가 22표를 얻어 최다 득표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는 교원위원에서 탈락됐다. 최종 임명 권한이 있는 학교장의 결정에 따라 다음으로 득표수가 많은 교사 3명이 교원위원로 선출됐다. 투표에 참여한 ㅇ고 교사들은 “이럴 거면 왜 투표를 했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서울의 ㅊ고교도 지난달 15일 교원위원 선거에서 14명이 후보로 나와 ㅁ 교사가 38표를 얻어 최다 득표를 했지만 교원위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ㅇ고와 ㅊ고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교사들은 모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 조합원이다. ㅇ고 교감은 “규정에 학교장이 임명하도록 돼 있는 만큼, 교원위원을 꼭 득표순으로 선출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경기도 용인의 한 초등학교 학부모인 김아무개씨는 얼마전 학교운영위 후보로 등록했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학부모위원 선출일을 앞두고 교장이 김씨와 다른 학부모 2명을 불러 “학운위원에게는 경험이 중요하니 지난해 하셨던 분들이 계속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떨어지면 아이들 보기도 창피하니 되도록 선거는 피하도록 하자”고 사실상 사퇴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처음엔 학부모들 모두 사퇴를 거부했지만 다음날 아이가 교장실에 불려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국 학부모 한 명은 사퇴를 했다”며 “아이 문제가 걸린 상황에서 계속 고집을 피우기는 힘든 것 아니냐”고 말했다.
 
투표에서 최다 득표를 얻고도 교원위원으로 선출되지 못하거나, 운영위원으로 출마한 학부모에게 학교장이 사퇴를 종용하는 등 일부 학교에서 학교운영위 선거가 파행을 겪고 있다. 학교운영위는 예·결산, 급식, 학칙 제정, 교육과정 등 학교 운영의 전반에 참여하고 있는 법적기구로 학부모·교원·지역위원으로 구성된다.
 
조연희 전교조 사립위원장은 “국공립과 달리 사립의 경우 교장이 최종 임명권을 가지고 있어 득표순이 아니라 교장이 원하는 사람으로 위원이 채워진다”며 “폐쇄적인 사립이 그나마 공교육 기관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운영위가 제대로 작동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조 위원장은 “사립도 국공립 수준으로 제도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은자 참교육학부모회 자치위원장도 “교장이 학부모에게 사퇴를 종용하는 것은 명백히 불법인데도 아이에게 불이익이 갈까봐 학부모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며 “운영위가 대표성을 갖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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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 입맛대로…자율성 잃은 학교운영위 (서울, 이경원기자, 2008-04-14  8면)
 
서울의 A초등학교는 올해 학교운영위원회의 학부모 대표를 선출하기 위해 지난달 총회를 소집했다. 총회에는 400명이 넘는 학부모가 모였으나 학교 쪽은 아무런 설명 없이 학부모 대표 선출을 위한 투표를 사흘 뒤에 실시한다고 통보했다. 결국 학교에 영향력이 있는 학부모 30여명만 투표에 참여했다. 한 학부모는 “맞벌이 학부모가 이틀이나 시간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학교장이 내정한 대표를 선발하기 위해 교장과 친분이 있거나 자주 학교를 찾는 학부모만 모여 선거가 이뤄졌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매년 봄에 실시되는 학운위 선거에 대한 학부모의 불만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학운위는 학교 운영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해 교사와 학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학교의 주요 심의기구로 1999년 초·중등교육법에 의해 상설화됐다.
 
그러나 학운위 선거가 학교장이 내정한 대표를 뽑는 투표로 변질됐다는 지적이 높다. 학운위 위원들이 대부분 ‘학교장 편’이기 때문에 잘못된 학교 정책에 제동을 걸 수가 없다. 문제를 제기했다가는 자녀가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대다수 학부모는 눈치만 보고 있다.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회 전은자 교육자치위원장은 “학교 쪽이 학교 정책에 비판적인 학부모의 학운위 참가를 방해한다는 신고전화가 매년 수십건씩 걸려온다.”면서 “신고자들은 자녀가 받을 불이익 때문에 신원을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한다.”고 전했다.
 
학운위 선거 파행은 불법 찬조금 관행을 비롯해 학교의 ‘밀실운영’을 고착화시킨다. 학교장의 ‘코드’에 맞는 학운위 위원이 불합리한 학교 운영을 지적하기란 불가능하다.
 
경기도 파주의 B초등학교는 지난해 학운위 학부모 대표가 학부모회를 조직해 3월부터 두 달간 1700여만원의 불법 찬조금을 조성해 물의를 일으켰다. 찬조금은 보건실 리모델링 기금 등으로 사용됐다. 전 위원장은 “최근 학교 자율화 분위기가 팽배해지면서 불법 찬조금 신고 제보도 크게 늘었다.4월 초에만 20건이 넘는 제보가 들어왔다.”면서 “이는 제대로 된 학운위가 구성되지 못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지적했다.
 
전교조 현인철 대변인은 “학교는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심각한 ‘독재’가 벌어지는 곳”이라면서 “일부 학부모 대표와 학교장이 밀어붙이는 밀실운영에 참가하지 못한 학부모의 박탈감도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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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울뿐인 학교운영위원회 ([기고] 최원호 한영신학대학교 겸임교수(교육학박사) 2008년 04월 17일 (목) 14:18:33 미디어오늘)
  

지난 1999년 학교 운영의 자율성을 높이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도모하기 위해 학교운영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동안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학운위의 이미지는 그 긴 세월만큼이나 성장하지는 못한 것 같다. 법적 기구로서의 외형적인 모습과 실질적인 운영에 있어서는 초창기 때와 별반 달라질 것이 없다. 학운위 위원구성이나 선출방법, 운영방법 등 제도적으로는 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이다. 운영위 설립의 본래 취지에 맞도록 학교 자체적으로 얼마나 효율적이면서 자율적인 위원활동을 전개하고 학교와 교육발전에 기여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학운위 활동이 형식적인 행정절차에 불과하다면 이것은 행정을 위한 허수아비와 같은 옥상옥이 될 수밖에 없다. 학운위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위원 선출 방법을 보완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첫째는 교무위원 선출 과정이다.

현재 교무위원 선출 과정에서 학교마다 교원단체 간에 보이지 않는 알력은 학교 발전보다는 특정 교원단체의 정책 주장을 반영하고자 하는 데서 생겨난다. 학교 측에서는 특정단체에 소속된 교원이 교무위원으로 참여하지 못하도록 보이지 않는 힘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들에 대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때문에 생산적인 논의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반대를 위한 반대의 논리를 주장하고 있어 학사일정에 차질을 안겨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 측에서는 정당한 대응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들 역시 학교운영에 일방적으로 거수기 역할만 할 것이 아니라, 교원 대표로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생산적이고 정당한 일이라고 여긴다. 학교 측의 논리에 무조건 찬성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학부모 위원의 주장을 보완해 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특히 교무위원 선출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공립학교에서는 교원 간 경쟁이 치열하지만 사립학교는 외형적으로는 무작위 추천에 의해 투표결과 3배수를 선정하여 최종적으로 심의위원들이 결정하도록 하는 등, 대개는 학교 운영을 견제하는 교원이 아니라 학교측의 대변인 역할을 자청하는 교원이 뽑히게 되어 있어 공립과 동일한 형태의 개선이 필요하다. 학교운영에 걸림돌이 될 만한 돌출적인 언행을 일삼는다면 교무위원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교무위원의 선출이나 활동은 제도 시행 초기단계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지만, 결국은 학교방침대로 따라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기에 교원들의 참여 자체가 무의미해져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둘째, 학부모위원 선출 과정이다.

학부모위원 선출과정에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공식적으로 학부모위원은 관련 사항을 공지한 후 입후보자를 대상으로 하여 학부모 총회에서 직접 선출하고 있다.
 
물론 학교문화에 따라 정족수에 미치지 못하거나 정족수의 1.5~2배에 이르는 입후보자가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자진사퇴 등의 이유로 입후보자가 학부모위원 정족수에 일치하는 경우이다. 당연히 입후보자는 무투표로 당선된다. 학교 측에서 번거롭다고 생각하는 선거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있겠지만, 이렇게 되면 학교장의 의도대로 학운위를 구성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입후보자가 우연하게 정족수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특정 도시와 지역 그리고 학교문화 및 학교장의 역량에 따라 학부모의 관심이나 참여도가 차이가 있겠지만, 웬만큼 열성적인 학부모라면 한 번쯤은 학부모위원을 하고 싶어 할 것이다. 명예교사나 학급 또는 학부모회 임원 선출에도 적극적인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감투(?)인 학교운영위원을 기피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정작 학교장은 학교와 적극적인 협조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이해관계자를 추천받아 총회선출과정 자체를 기피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과정에서 입후보자를 설득해서 자진사퇴 하도록 종용하거나 기존의 임원을 대상으로 이미 학교 측의 각본에 의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관행처럼 굳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학교에서는 심지어 아이의 학교 성적, 학부모임원 경험, 모교 출신 부모, 동창회 등에 한하여 참여 자격을 선별적으로 부여하고 학부모 임원들을 중심으로 차기위원까지 내정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어, 무늬만 학부모위원이지 학교운영에 반대를 하거나 다른 안건을 제안하는 역할은 전혀 하지 못한 채 거수기 역할만 충실히 하다 임기를 마치는 것이 다반사다. 아이가 볼모로 잡혀 있기에 교무위원과 학교 측의 안건에 대해 견제하거나 학부모위원으로서 학교교육을 위해 중재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학교장의 독단적인 경영에 동조 아닌 동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학운위의 활성화를 위해서 아버지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맞벌이 부부의 참여가 가능하도록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배려가 있을 때 학부모의 참여가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셋째, 지역위원 선출 과정이다.

지역위원은 이미 선출된 학교운영위원의 추천에 의해 선출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학교장이 추천한 인사로 채워진다. 지역에 따라서는 지역위원 자체를 추천받기조차 힘든 상황도 있지만 특정 단체의 이권과 연관된 경우도 있어 문제의 온상이 되기도 하는 것은 위원전체가 학교장 측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어떻게 보면 지역위원이야 말로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학교 운영에 참여할 수 있음에도 그 특징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양측의 눈치를 볼 이유가 전혀 없어야 함에도 편향적인 입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지역위원 선출과정의 한계이다.
 
물론 대개의 학교들은 이 기능을 적극 활성화할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그렇지 못한 일부 학교는 학운위의 본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사례가 적지 않다. 입후보 과정에서부터 학부모회나 학교장이 내정한 대표를 선발하려고 일반 학부모의 참여를 차단하거나 학교장의 일방적인 후보사퇴를 권유하는 일들을 차단하기 위한 방안도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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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화 지침 상당수 ‘학운위 심의’ (한겨레, 유선희 김소연 기자, 2008-04-24 오후 10:20:49)
유명무실 수두룩…견제기능 의문 
  

 
» 전국 초·중·고교 514곳 학운위 운영실태
 

대부분 학교장 손에 좌지우지
서울시교육청의 ‘학교 자율화 세부 추진계획’은 폐지되는 지침을 보완하는 기능을 상당 부분 학교운영위원회 몫으로 넘기고 있다. 그러나 학교현장에서는 교장이 학운위가 결정한 사항을 마음대로 뒤집는 등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아, 학운위가 견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 심의·자문 못하고 형식적 운영
=학운위는 예·결산, 급식, 학칙 제정 등 학교 운영 전반에 참여하는 법적 기구지만 실제로는 교장의 뜻대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서울 ㅁ중학교는 지난해 학운위가 학교급식 직영 전환과 교복 공동구매를 결정했지만 교장이 이를 거부했다. 이 학교 한 운영위원은 “학부모 설문 결과 80% 이상이 동의했지만 교장이 ‘최종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고 버텨 결국 무산됐다”고 말했다. 서울 ㅅ초등학교는 지난해 학운위 결정에 따라 학교 운영에 대한 만족도 조사 결과를 소식지 형태로 발행할 예정이었으나 교장의 반대로 무산됐다.
 
서울의 또 다른 초등학교의 한 운영위원은 “회의록을 최종 검수하는 운영위원장 도장을 교장이 갖고 있다”며 “나중에 회의록을 보니 학교에 부정적인 발언은 다 삭제됐더라”고 전했다. 회의도 깊이 있는 토론이 이뤄지기보다는 결정사항을 통보하는 수준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서울 ㅅ중학교 한 학부모위원은 “4월 회의에서는 한 가지 안건을 처리하는데 5분도 안 걸렸다”며 “심의기구가 아니라 친목모임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 위원 선정도 교장 마음대로 =학운위가 제 기능을 못하는 데는 운영위원 선출이 비민주적인 탓이 크다.

서울 ㅅ고등학교는 올해 학운위원 선거에서 득표 결과와 상관없이 교장이 교원위원을 선정해 교사들이 직원조회에 불참하는 등 반발하고 있다. 이 학교의 한 교사는 “사립학교의 학운위는 전교조 교사들이 원천적으로 배제되고 교장과 생각이 같은 사람으로 채워져 결국 사조직처럼 운영되는 게 현실”이라고 털어놨다. 서울 ㅂ초등학교는 교장이 학부모위원에게 사퇴를 강요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 학교 한 학부모는 “6명을 뽑는 학부모위원 선거에 8명이 입후보하자 교장이 2명을 따로 불러 ‘선거는 불가능하니 알아서 하라’고 사퇴할 것을 요구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구논회 전 열린우리당 의원이 2006년 전국 초·중·고교 524곳을 표본조사한 결과, 77%인 393곳에서 투표없이 학부모위원을 뽑은 것으로 나타났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전은자 자치위원장은 “학교장 결정이 곧 학운위 결정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견제를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며 “심의기구에서 의결기구로 위상을 강화하는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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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7 04:38 2008/04/27 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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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남서 진보정당운동 카페 폐쇄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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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운영하던 카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카페 공지를 올렸다. 41명이 가입한 카페였는데, 생각한 것만큼 성과가 있진 않았다. 하나의 시행착오의 과정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게다가 전업활동가를 지향하는 입장에 있지도 않은 내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던 것이다. 앞으로는 내 스스로의 역량이나 활동부담을 고려해서 뭘 해도 해야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특히 다음에서 메일 말고 뭔가 하는 것은 참 쉽지 않다. 블로그도 그렇고, 카페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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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폐쇄 공지

안녕하세요.

별로 활동하는 것도 없었다가 뜬금없는 메일 보내서 죄송합니다.

서울남서모임이란 이름으로 카페를 만들었으면 관악, 동작, 구로, 금천의 다양한 동지들과 함께하려는 노력을 온,오프에서 벌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카페지기인 저부터 개인적인 상황 때문에 그리 열심히 활동하지도 못했고, 여기에 혼자 글을 올리는 것에 그쳤습니다. 한마디로 소통의 장이 되지 못했던 것이죠.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나름대로 함께하고자 했던 진보신당에 실망한 점도 작용하였고, 제가 여기저기에 있는 블로그나 카페에 신경을 쓰다보니 여기에 소홀했습니다.

 

지금은 진보신당의 홈페이지도 활성화되어 있고, 관악에서는 독자적인 홈페이지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원래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들면서는 새롭게 지역의 구획을 짜면서 함께 활동할 수 있는 틀을 만들고자 했는데, 그게 곤란할 것 같습니다. 특히나 제가 어제부로 진보신당을 탈당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진보신당을 탈당하다 참조) 그런 상황에서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이 카페를 유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듯 합니다.

 

이에 이 카페를 폐쇄하고자 합니다. 여기 가입되어 있는 회원분들과 상의를 해서 결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나, 어차피 최근에는 올라온 글도 없었고, 소통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었던 만큼 큰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5일 정도 기간을 갖고 폐쇄할 생각이오니 이에 대해 혹시 의견 있으신 회원분 있으시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아직 지역활동의 매개는 찾지 못했지만, 이 카페 외의 다른 방식을 모색해볼 생각이고요, 저의 정치에 대한 의견은 http://cafe.naver.com/livepol.cafe을 통해서 쓸 생각입니다. 물론 여기도 거의 제 개인 카페이지만요.    

카페 이름 : 서울남서 진보정당운동
카페 주소 : http://cafe.daum.net/jinbonamseo
카페 소개 : 보다 더 적색으로, 보다 더 녹색으로!! 관악, 구로, 금천, 동작 지역에서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꿈꾸는 이들의 모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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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7 03:40 2008/04/27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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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을 탈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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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진보신당에 가입했던 것은 성급했던 듯하다.
선도탈당파로서의 의무감에 가입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나에게는 "이 당이 아닌게비여"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진보신당의 돌아가는 분위기(중앙은 물론 지역도...)가 나와는 맞지 않았다. 
노동자중심성과 관련된 문제는 제껴놓고 얘기하더라도,
당원이 된 이들이 지속적으로 각성하고 정치의식을 키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자신이 가져왔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으로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부족하나마 진보정당이라면 가져야할 몇 가지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의 진보신당은 그러한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민주노동당보다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변화될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그 동안 계속 고민해오다가 탈당을 결심하게 되었다.
진보신당 홈페이지의 회원탈퇴 게시판에 이렇게 써넣었다. 
 
"진보신당이 제가 생각하는 진보정당의 상과 다르다고 보아 탈퇴합니다.
탈당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탈당한다고 해서 내가 노동자의 힘 중심의 변혁적 노동계급정당에 동의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 또한 진보신당과는 다른 편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진보정당운동을 아예 잊고 지내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진보적인 지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의식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및 비판과 함께, 지속적인 학습과 교육,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함께하는 조직(여기에서 치열한 토론이 진행되어야 한다)이 필요하다. 이 중에서 하나가 빠진다면 골방좌파가 되거나 계속 우경화되거나, 친목계원이 된다.
 
나에게 진보신당은 그런 조직을 주지 못하였고, 주지도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어쩌다 집회에 나가든지 무슨 모임에 나갔을 때 마땅한 소속이 없어서 뻘쭘해지는 양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관건인데, 이것은 좀더 고민해봐야겠다. 소속된 조직은 많은데, 딱히 나에게 어떤 정체성을 주는 정치조직은 없다. 물론 누구에게나 이런 조직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최근에는 거의 활동이 없고(아니 활동할 의사도 없고), 그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서 한 조직이라고 보기 힘든 ㅇㅇ이 나에게 답을 주지는 않는다. 
 
생각이 비슷한 몇몇 동지들을 계속 규합해내고, 함께 제대로 된 진보정당 건설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다. 이것도 시간과 정력이 요구되는데, 현재의 내 조건에서 과연 얼마나 여력을 낼 수 있을지...
 
덧붙여, 이제 진보신당 홈페이지 당원게시판에 올라오는 댓글도 보지 못하게 되는데, 시원섭섭하다. 댓글들 보면서 논의를 쫒아가지 못하고 있는 내가 좀 안타깝기도 하고, 열받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게 되어서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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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6 20:16 2008/04/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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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의 최근 상황에 관한 레디앙 기사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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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외 정당의 계기를 활용하여 과연 의제설정을 할 수 있을까. 현재의 홈페이지 분위기로 봐서는 아마 소수의 몇몇 활동가나 전문가를 중심으로 이뤄질 것 같은데... 스스로 뭘 만들어내기보다는 있는 밥상에 숫가락만 놓는 식으로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아마 이남신은 몰라도 노심이 당선되었으면 창조한국당이 보여주고 있는 문국현 정당과 비슷한 꼴이 되지 않았을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대중조직과의 관계가 느슨한 것을 감정으로 삼아야 한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진보신당의 구성원들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해 얼마나 심도 있게 고민해봤는지 의문이다.
 
의원 없는 정당은 사실 사회단체와 큰 차이가 없다? 여기서 의원은 국회의원만을 의미하는 모양이군. 게다가 국회의원 없이 훌륭한 활동을 벌여진 진보정당이 얼마나 많은데... 사실 의원 배출이란 활동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활동의 성과 아닌가. 앞으로 있을 선거에 초점을 맞추고 이에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정당의 활동이 그것 뿐이던가. 박상훈 대표에게 실망하게 된다. 그가 가진 지향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활동 노선을 근본적으로 쇄신해야 한다는 말은 누구나가 하는 말이다. 문제는 그 쇄신 방향이고, 무엇을 위한 쇄신인가의 여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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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외정당 가시밭길 어떻게 헤쳐가나 (레디앙, 2008년 04월 23일 (수) 18:18:08 정상근 기자)
[진보신당] "정책엘리트 양성, 연구소 만들어 지방선거 준비해야" 
 

원외 경험 이미 있어
이로서 진보신당은 5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조직적인 원외활동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고난의 길이지만 진보신당의 많은 당직자들은 이미 2000년 초 민주노동당에서 원외정당으로 활동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원외 정당 활동’에 대해선 오히려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장석준 정책팀장은 “법안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원내 활동에서 오히려 놓친 부분이 많았는데 원외정당의 계기를 활용해 교육, 주택 같은 문제들을 준비하고 이후 제도정치 과정 속에서 평가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와는 달리 민주노총과 같은 조직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고 진보의 선택지도 다양화된 상태다. 아직까진 노회찬, 심상정이라는 대중정치인에 기대 있지만 본격적인 원외정당 활동이 시작되면 진보적 대안으로서 진보신당을 인식시켜 나가야 하는 과제가 있는 것이다. 정치조직보다 시민사회단체로 보일 수 있는 것도 진보신당이 안아야 할 고민이다.
 
진보신당 당직자들이 아직까지 원외정당의 기조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는 것도 이같은 것들을 포함한 고민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중앙당 개편과정이 곧 진보신당의 향후 노선과 활동방향과도 맞물려 있기에 짧은 시간 안에 생태, 평화, 평등을 연대로 묶어낼 수 있는 방안 선택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단체'로 인식될 위험 
부산지역은 대운하와 의료민영화 등을 주요 이슈로 삼아 현장 반대투쟁을 계속할 계획이다. 이창우 당원은 “미디어로부터 소외를 받는 것이 가장 걱정이 된다”며 “자체미디어를 만들든지 보다 적극적인 언론정책을 구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또한 풀뿌리 공동체 운동으로 내려가야 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이어 “지금 부산은 당원들이 자체적으로 ‘대운하 반대 까발리야호’ 자전거 행진을 계획해 오는 27일 출발할 계획이다”라며 “조만간 의료민영화와 관련해서도 보건의료시민단체 등과 함께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이 집중되어 있는 울산의 노옥희 광역대표는 “당이 너무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며 “지난 총선기간 동안 약속했던 것을 지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고 특히 비정규직 문제에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노조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 사이에 뿌리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며 “또한 시민단체들과도 소통하며 기초광역단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며 시민대중을 기반으로 비정규직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이봉화 당원은 “민주노총 등과 같은 대중조직과의 관계가 느슨한 것을 오히려 강점으로 삼고 노동자 정치세력화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티벳 문제와 같은 이슈에 자유로워진 측면이 있으나, 당의 역량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핵심 중요사안과 의제를 원내 진입까지를 목표로 선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풀뿌리 네트워크, 새로운 리더십, 정책엘리트 ...
그는 “현재 당원들을 중심으로 한 발랄한 흐름을 잘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역량의 총합을 계산해 정치기획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정치도 지역에 맞는 운동을 찾아 공통의 관심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지역조직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의 선창규 광역대표는 “진보신당이 정치적 역할을 분명히 설정하고 세부적으로 진로를 정확히 해석해 시민운동조직과 네트워킹할 필요성이 있다”며 “대전은 이전부터 노동운동은 물론 ‘마을 어린이 도서관’, ‘의료생협’과 같은 풀뿌리 운동 조직과 함께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용길 조직위원장도 “민노당의 경우 원외정당과 원내정당을 모두 다 겪어왔지만 원외에서 성공하다 원내에서 무너진 경우라고 볼 수 있다”며 “이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조급해 하지 말고 민노당 8년의 오류 시행착오 리스트를 만들어 당의 일상 활동의 체계를 세워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성공회대 조현연 교수는 진보신당의 원외활동 기조에 대해 “기존 정당들이 보여주지 못한 당원들 중심의 새로운 정당활동의 전형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진보신당 당직자들이나 활동가, 지도부가 어떻게 정당 프로그램과 같이 가게끔 만들어 내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진보정당은 대중들에게 미래의 꿈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데, 미래와 현재의 간극인 확실성의 딜레마에 있는 현실 대중들을 설득하고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마지막으로 “재창당 과정도 여러 논의가 있겠지만 시간을 단축시키는 것도 중요하다”며 “노동과 녹색 등 갈등과 긴장의 가치들을 진보의 재구성이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도 진보신당의 숙제”라고 말했다.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는 “의원 없는 정당은 사실 사회단체와 큰 차이가 없다”며 “앞으로 선거에 대비해 나갈 수 있도록 정책엘리트들을 양성하고 정책연구소를 개설해 재보궐선거에서, 또는 2년 후 지방선거에서 주민의 대표가 되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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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창당, 지방선거 전까지 여유 갖고 추진" (레디앙, 2008년 04월 24일 (목) 16:47:07 레디앙 기자)
노회찬 공동대표 "근본적 쇄신 필요…환경 중요하나 복지가 더 우선돼야"   
 

진보신당 노회찬 상임공동대표는 제2창당 시기와 관련해 “조만간 (제2창당)작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으나, 종료시점에 대해서는 “다음 지방선거 전까지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 대표는 24일 오전 불교방송 ‘아침저널’과 인터뷰에서 이 같이 밝히고 제2창당 추진 과정에서 “과거의 활동 노선을 근본적으로 쇄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대표는 <레디앙>과의 통화에서 창당 시기와 관련 발언에 대해 “지방선거 직전에 만든다는 뜻은 아니고, 이번에 만드는 진보정당이 마지막 진보정당일 테니 시간을 갖고 신중히 의논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표는 또 “지금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세력들이 대다수인데 이것만 가지고는 온전한 진보정당이 되기 어렵다”며 “과거 민주노동당과 별도로 진보정당 운동을 해 온 한국사회당이나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녹색운동과 정치를 결합시키려 노력해 온 사람들이 최대한 폭넓게 참여하는 제2창당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외연 확대가 충분히 이뤄진 가운데 제2창당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 대표는 새롭게 만들어지는 진보정당의 노선과 관련해 “환경 문제도 굉장히 중요한 의제로 수용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더 중요하게는 아무래도 먹고 사는 문제”라며 “교육, 의료, 주택 문제처럼 실생활과 관련된 정책을 현 정부와 차별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를 통해 “점점 몰락해가는 80%를 대변”하고 이를 위한 “정책 활동을 상당히 활성화시켜야 된다고”고 강조했다.

노 대표는 또 “우리 사회가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복지 부분이 좀 더 강화되어야 한다”며 “분배가 생산의 새로운 동력으로 될 수 있는 그런 구조를 만들어 내야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복지 국가를 추구하는 것을 국가의 주요 노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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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의 홈페이지가 정당의 홈페이지가 맞나 싶을 정도라고? 사실 정당의 홈페이지라고 보기 어렵다.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 지지자들의 모임 홈페이지라고 보면 딱이다. "엄숙하고 딱딱하기만 했던 기존 정당의 게시판, 당원 정치논객들의 싸움터이자 가끔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는 곳이 바로 각 정당의 당원게시판 또는 자유게시판"이라는 선입견도 과거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과 같은 홈페이지만 봤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런 열기는 물론 과거 개혁당이나 노사모의 홈페이지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미 이런 식의 열광은 존재한 바 있었고, 그것이 가진 한계도 극명했다. 그렇게 열광을 보냈던 이들이 지금은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조현연 교수의 언급처럼 "선거혐오증에 사로잡혀 있는 대한민국에서 당원으로부터 시작되는 의미 있는 변화"라고 보는 데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진보신당의 홈페이지를 놀이터 삼아 방문하고 글쓰는 이들은 선거에 더 매몰되었으면 되었지 그 반대는 아니다. 선거혐오증을 가진 이들은 아예 찾지 않는다. 
  
조현연 교수는 진보신당의 게시판이 활성화되어 있는 것을 보고 “기존 정당들이 보여주지 못한 당원들 중심의 새로운 정당활동의 전형이 나타나고 있"다고 판단한다. 아니, 대부분의 진보신당의 활동가들이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할 것 같다. 하지만 내 의견은 다르다. 물론 당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러한 흐름이 긍정적이라고 본다면 흡수해내면서 제대로 된 당원으로 만들어갈 것인가를 의식적으로 고민해야 하는데, 그러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과연 그렇게 참여한 이들이 얼마만큼 정치적으로 각성되었는지, 앞으로도 꾸준히 활동을 하도록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검토가 필요한 때인데 말이다. 막연한 낙관으로 지나치고 있는 건 아닌가.  
 
진보신당의 각 지역조직의 홈페이지가 부산의 경우를 제외하면 별로 활성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당원게시판 하나로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그렇다보니 발랄함을 내세우면서, 진지하거나 비판적인 고민의 지점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행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노골적인 자유주의적 분위기와 함께 변혁이나 사회주의를 말하는 이들에 대한 이지메는 할 말을 잃게 만들고 있다. 이런 부분은 눈에 안보이는 걸까. 좋은 게 좋은 것은 아닐터...
 
수없이 올라오는 수많은 그리 큰 의미를 갖지 않는 글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얘기를 배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하고자 한다면 맥락을 따라가면서 읽어주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 만큼 비효율적이라는 얘기이다. 그런 소통은 쟁점과 토론 게시판에서 할 것이고, 당원게시판에서는 그냥 편하게 떠들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라는 게 그렇게 무 자르듯 명확하게 구분되던가. 별 의미 없는 글이라도 원색적으로 낚시성 제목을 올려서 늘어가는 조회수 속에서 존재감을 확인받고 거기에 짧게나마 몇 개씩 달린 댓글 속에서 소통하고 있다고 자위하는 이들과 무슨 소통이 가능할까. 그들은 대부분 복잡한 정치현상을 단순한 구도로 치환하여 파악한다. 거참...
   
물론 민주노동당의 홈페이지를 보면 안타깝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거기에서도 나름대로 온라인 활동에 열성적이었던 이들이 있을텐데 말이다. 물론 더이상 온라인 활동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판단을 집단적으로 했을 리는 없고... 
 
자신들이 상대하면서 반박할 사람들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오프라인 활동에 바빠서일까. 민주노동당은 자신들이 쌓아놓은 컨텐츠의 장점마저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컨텐츠 개편을 통해 시선이 집중되도록 하는 것도 좋다. 과연 이런 부분들에 고민할 인력이 있기나 한 걸까. 
 
아무튼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이나 그 홈페이지가 보여주는 모습은 새로운 전형이라거나 바람직한 무엇이라고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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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양당 홈페이지 대비되네 (레디앙, 2008년 04월 22일 (화) 17:02:49 정상근)
진보신당 '총선 승리 정당 같아'…민노 '차분 또는 썰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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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5 06:28 2008/04/25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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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평전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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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평전을 드디어 다 읽었다. 그동안 연구실을 왔다갔다 하면서 짬을 내서 읽다보니 하루에 읽는 분량이 보통 30페이지, 많으면 50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아 시간이 꽤 걸린 셈이다.
 
사실 이 책은 사서 읽으려고 했는데, 학교도서관에 도서대출을 한 김에 이것까지 대출하여 읽게 되었다.
어디선가 보았던 이 책에 대한 평은 이현상 전기라는 것. 사실 내가 봐도 거의 일방적으로 이현상의 언행은 긍정적인 것으로 묘사되었다. 하긴 근 5년여에 걸친 빨치산 투쟁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그의 능력으로 보면 그렇게 묘사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그렇게 살아남은 신화적인 이의 전설이 남겨지는 것이겠지.
 
소설가 김성동 선생의 '남로당을 위한 변명'이라는 발문도 인상적이다. 체 게바라와 같은 공산주의 혁명가는 자본주의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면서 같은 공산주의 혁명가라도 이현상 선생 같은 이는 왜 상품으로 만들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 하지만 한국의 현실에서 아직도 빨치산은 완전히 복권되지 않았다. 아니 이명박 정부의 탄생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처럼, 이들의 복권가능성은 더 늦춰지는 것이겠지. 아직까지 이들은 위험인물이다, 북이 있는 한...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은 체 게바라보다 훨씬 뛰어난 빨치산 활동가였는지 모른다. 아마 그의 행적이 제대로 알려졌다면, 카스트로와 같이 자신의 과거를 빛내줄 동지가 있었더라면 아마 사정은 달랐겠지. 
 
이현상 평전에는 지리산 빨치산, 남부군이 치룬 수많은 전투가 나온다. 내가 많은 그 당시에 있었다면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 이 질문은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본 동생이 한 것이다.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는 아무래도 산에 들어가서 빨치산과 같은 활동을 하진 못했을 것 같다. 소위 회색분자가 딱 맞다. 반드시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그래도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김태준, 유진오 등의 삶도 참 안타깝다.
 
일상에서 내가 가진 조그마한 안락과 즐거움, 편안함은 포기할 수 있고, 조금 더 불편하게, 비판적으로 살아갈 수는 있겠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그만큼 무엇인가 가진 것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수많은 사람들은 산에서 죽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이 바라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이상을 지금 구현하고자 하는 게 올바른가. 그리 정치적으로 옳다고 볼 수만은 없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어록을 암송하면서 거기에서 삶의 원칙을 이끌어낸 그들에게 '다른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이현상이 여순반란사건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것을 평전을 읽으면서 알았다. 어릴 적 서가에 꽂혀져 있던 여순반란사건을 다룬 소설책을 읽으면서 지창수, 김지회 등의 이름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 현대사 공부를 하면서 여순반란에 대해 다시한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폭력을 통해 그것도 국군과 우익들에 비하면 소규모일지라도 민간인에 대해 학살을 저지르면서 어떻게 혁명을 말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이현상의 원칙을 알게 되면서 나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다. 
 
남한에서 빨치산은 가능하지 않았고, 이현상과 남부군의 투쟁은 어쩌면 무모한 싸움이었다. 자신들이 어떻게 죽을 줄 알았으면서도 스스럼없이 그 길을 갔다. 지금 시기에 그 빨치산의 현장은 어디일까. 인터넷일까? 글쎄다. 멕시코의 반군들도 이제는 시들해져 버리지 않았던가. 현실적인 영향력도 상실하였고... 책상에는 마르코스가 쓴 저작이 꼽혀 있지만, 나에게는 그냥 흥미거리일 따름이다.   
 
파업을 통해 처음 그의 소설을 접했고, 이후에 경성 트로이카를 거쳐 이현상 평전까지, 안재성의 작품을 읽게 되었다. 이현상의 투쟁을 미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이러한 활동이야말로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북으로 올라갔던 빨치산들이 남부군을 결성하고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오는 장면이 있다. 남부군은 태백산 산정에서 1951년 새해를 맞았다. 거기에 나오는 한 대목.
 
서쪽으로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구름처럼 널려 있고 급경사진 동쪽으로는 멀리 드넓은 동해바다가 펼쳐진 정상을 지날 때, 어디서부터인가 김순남이 작곡한 <태백산맥>이 시작되었다. 꼬리가 보이지 않게 길게 늘어선 대열에서 계속 이어지는 노랫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소리개벽 2집 '동지여 굳세게' - 태백산맥  
 
태백산맥에 눈 내린다, 총을 들어라, 출정이다.
눈보라가 밀림에 우나 가슴 속에 피 끓는다.
높고 높은 산을 넘어 어둠에 묻혀서 사라진 길을 열고
빨치산이 영을 내린다, 원쑤를 찾아서 영을 내린다 
 
동지들의 흘린 피를 헛되이 마라 출정이다.
공화국을 그리다 죽은 그 얼굴이 떠오른다 
높고 높은 산을 넘어 어둠에 묻혀서 사라진 길을 열고
빨치산이 영을 내린다, 원쑤를 찾아서 영을 내린다 (영을 내린다 영을 내린다)
 
 
2절 가사는 책에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학부생 때 동아리에서 선배들에게 배웠던 노래이기에 기억을 하는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정말 빨치산이 된 느낌이었는데... 소리개벽의 노래는 그 때의 그 감흥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하긴 이 노래는 NL적 감수성으로 부르면 안될 것 같긴 하지만...
 
폭력이 없이 변혁은 가능할까. 자본마저 '진보를 향한 열정'을 얘기하고, '아니다'라고 말하는 소신이 세상을 바꾼다고 하는 판에 이미 변혁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하지만, 내가 바라는 '변혁'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을 해본다.
 
올해 시간이 나면 지리산에 가봐야겠다. 여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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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 불의의 세력과 사상에 대한 선전포고 (참세상, 안재성(소설가) / 2007년08월03일 11시33분)
[리얼리스트 작가 선언](3) - '이현상 평전'을 펴낸 소설가 안재성
   
세상에는 현실과 다른 헛소문이 떠돌곤 합니다.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괴담도 그 중 하나입니다. 벌써 십여 년 동안 여러 평론가들이 거듭해서 사실주의 문학의 죽음을 선언해 왔습니다.
 
진실보다는 자신이 세운 가설을 믿는 그들은 여전히 대중들에게 읽히는 것이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이라는 사실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이고 사적인, 실험적인 작품들이 한국문학의 주류가 되었다고 진단하고, 그런데 도부지 이런 작품들이 팔리는 기색이 없으니까 이제는 문학은 죽었다고 과감히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진단하는 의사는 당장 돌팔이로 매장될 텐데 멋대로 문학 전체의 죽음을 언도하는 평론가들은 교수로, 학장으로 승승장구하니 참 요상한 세상입니다.
 
사실주의 문학은 죽었다

그들이야말로 80년대 후반기 겨우 십여 편의 장편 노동소설이 나왔을 때, 마치 노동문학이 한국 문학판을 점거한 듯 호들갑을 떨던 사람들이었음을 생각하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닙니다만, 그들이 오늘날 한국 문단의 거의 모든 문학상과 출판사를 장악하고 자신들이 세우는 가상의 잣대에 맞지 않는 작품들을 걸러내느라 열심인 꼴을 보면 혐오스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오늘 한국 문학의 진정한 문제는 평론가들의 요설이나 출판사의 상업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에 있습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가진 무수한 독자들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써내지 못하는 우리 작가들의 문제라고 봅니다.
 
문제는 작가다

요즘 문학상 응모작의 절대다수는 관념적이거나 사적인 글들로, 사회와 역사에 대한 고찰이 들은 좋은 작품을 발견하기는 매우 힘든 게 사실입니다.
 
설사 좋은 작품이 있다 해도 응모작의 주류인 관념주의적인 작품들 중에서 하나를 뽑겠지만, 진보적 이념을 가진 작품들이 대중에게 다가갈 만한 흡입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불특정한 특정 다수가 아니라, 적어도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진 30% 정도의 진보적인 대중의 사랑조차 받지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결함입니다. 이는 명백히, 독자들을 흡인하지 못한 작가들의 능력의 한계이거나 혹은 판단의 잘못입니다.
 
별로 해보지도 못한 노동문학의 실패가 준 충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사실주의 문학을 부정하거나, 섹스나 폭력 같은 상업적인 기법들을 동원하면 읽히지 않을까 하는 얕은꾀에 빠져버리거나, 아니면 자기연민에 푹 빠져 너무나 무거운 주제를 너무나 무겁고 지루하게 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노동문학의 실패

무엇보다도, 작가들이 너무 게으른 건 아닐까요? 아무리 돈 벌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더라도 작가로 등재한 이상, 혹은 문예운동가로 나선 이상 혼신을 다해 좋은 글을 쓰려 노력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뛰어난 글재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시인, 소설가들이 생활을 이유로, 신변잡사들을 핑계로 거의 아무 작품도 쓰지 않고 술에 묻혀 세월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문학의 현실에 대한 장황한 진단을 하기 위해 이 편지를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리얼리즘 작가들을 질타하기 위해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리얼리즘 작가의 자기반성

어떤 위대한 개인도 그것을 밑받침해 주는 토대가 없으면 일어설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유구한 한옥의 전통 속에 부석사 무량수전이 만들어지고, 석조건물의 전통 속에 콜롯세움이 만들어집니다. 에디슨이 조선 땅에서 태어났다면 뛰어난 대장장이에 불과했겠지요.
 
오늘의 문학 풍토 속에서 진정으로 인간과 사회에 빛이 되는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지리멸렬하게 무너져가는 진보적 리얼리즘 작가들이 활동할 공간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저급한 문학풍토에 치어 자포자기하고 있거나, 정도를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겠다고 나섰다가 진흙수렁에 빠져있거나, 아니면 열의는 가지고 있어도 경험이 부족한 사람까지 포함하여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와 인권과 평화가 자리 잡기를 바라는 실천적 작가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서로를 격려하고 가르치고 배우고 힘을 모아 싸워나가는 조직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싸우는 조직이 필요

이를 토대로 다시 활발한 작품 활동이 이뤄진 바탕 위에 우리 중의 누군가는, 혹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역사에 길이 남을 좋은 작품을 쓸 수 있겠지요.
 
이제 리얼리스트 작가들이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그 자체가 이미 관념주의 문학에 대한 경고이며 이 땅을 지배하려드는 불의의 세력과 사상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민족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오만 잡다한 경향이 집합되어 있는 진보문학 진영과의 차별화입니다. 명백히 민중주의 문학운동의 복권이자 문학의 현실 참여에 대한 재 선언입니다.
 
현실참여문학의 재 선언

따라서 저는 기왕에 리얼리즘 문학을 했다 해서, 명망이 있거나 연배가 높다 해서 가입을 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70년대에 출판된 한국문학전집에 이름이 오른 작가 중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는지요?
 
명망이란 진실로 하찮은 것입니다. 우리는 작가들이 들어오고 싶다 해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좁은 문을 세우고, 꼭 필요한 사람들만을 선별하고 초청하여 들여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자신이 발전한다는 진단 이외의 예언을 결코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제는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오늘 이뤄지고, 또 오늘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내일은 현실이 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리얼리스트 작가들은 질곡에 빠져버린 한국 문학을 되살리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이제 리얼리스트 작가들이 모여, 오늘의 문학판을 뒤집어 버리고, 문학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 나갑시다! 그것은 꼭 필요한 일이고, 또 가능한 일입니다. 리얼리스트 작가들이여! 함께 합시다!  
 
 '한국의 체 게바라' 이현상 선생의 평전  
 
이현상(1905~1953)의 생애가 [경성트로이카]의 작가 안재성에 의해 복원, 출간되었다. '한국의 체 게바라',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 '남부군 총사령관'... 그를 지칭하는 수식어에 비하면 그의 행적에 관해 알려진 것은 사실 전무하다시피 하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 분단된 후, 반공이데올로기에 휘둘려 우리 현대사에서 철저하게 왜곡,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현상. 분명한 것은, 그가 추구한 이상이 여러 가지 한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생전 그가 대항해 싸운 적들의 부당성을 희석시키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식민지 약소민족의 주권을 위해, 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인 일본과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여 모든 것을 바친 세계적인 혁명가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실로 그가 이끈 유격대의 규모와 전적, 그리고 그 끈질김은 세계의 민중혁명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  이현상 
 
그 자신이 노동운동에 투신하였거니와 일제 말기의 독립운동가들과 사회주의운동가들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왔던 작가 안재성은, 객관적이고도 논리적인 역사 인식에 바탕하여 누구보다 민족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던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영웅 이현상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다.
 
최후의 빨치산 대장 이현상의 삶과 투쟁의 기록
이현상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인 1905년 전북(현재는 충남)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4남2녀 중 다섯째(4남)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주이씨 양반가로 부친은 부농이었던 진사 이면배였다. 그는 중앙고보 재학 중이던 1925년부터 박헌영 등과 함께 공산당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1926년에는 6.10만세사건의 핵심인물로 지목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27년 휴학 중 상하이로 건너가 망명 청년들의 모임 '한인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1928년 8월 구속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일제 식민치하에서 총 12년간의 감옥 생활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에 적극 가담하며, 남로당 연락부장, 간부부장을 맡아 활동하였으나 미군정에 의해 공산당 활동이 불가능해지면서 박헌영 등과 함께 월북한다. 1948년 다시 서울로 내려온 그는 빨치산투쟁을 위해 그해 11월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이후 그는 '조선 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으로서 지리산 등지에서 치열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며, 수많은 전설을 만들어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경상도,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에 인공이 수립되자 부대를 이끌고 지리산에서 하산하여 낙동강전선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미군의 인천 상륙과 함께 다시 입산하여 빨치산 투쟁을 전개한다.
 
1951년 7월 그는 공식적으로 남한 빨치산 총사령관의 위치에 오른다. 그러나 1953년 북한에서는 한국전쟁의 휴전과 함께 남로당 계열이었던 박헌영, 이승엽 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된다.  그해 8월 6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열린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와 결정서 9호, 9월 6일의 결정서 10호에 따라 제5지구당은 해체되고 위원장이었던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빨치산 지도자로서의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다.
 
그리고 1953년 9월 17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의문의 총탄에 맞아 숨진 시체로 발견되어 화개장터 앞의 섬진강변에서 화장되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는 평범한 키에 언제나 과묵하고 우수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대원들을 아끼고 매사에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였으며, 남부군뿐 아니라 빨치산 모든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이현상에게 더 잘 어울리는 호칭은 선생님이었다. 그 수많은 대원들이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려 갈구했던 그래도, 큰 바위처럼 기대고 싶었던 선생님이었다. 적군이라도 교전 중이 아닌 이상 절대 죽이지 못하게 하고, 동지의 주검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눈보라치는 겨울 산중의 걸인 움막 같은 천막 속에서 추위에 떨며 홀로 책을 읽다가 스르르 지쳐 잠들곤 하던 영원한 선생님이었다. - 본문에서
 
그 어떤 일 앞에서도 화를 내는 일이 없고, 그 어떤 문제를 놓고도 장황하게 말하는 법이 없고, 당 이론에 관한 것이면 안 읽은 게 거의 없으면서도 토론을 즐기지 않았다는 분. 지쳐 쓰러진 대원의 짐을 손수 짊어지고, 대원들의 시체를 볼 때마다 땅속 깊이 묻어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유일한 반찬으로 마련된 고추장 한 보시기를 굳이 가져오게 해 손수 나뭇가지를 꺾어 일일이 찍어 먹였다는 분. - 조정래, [태백산맥]10권에서
 
일제시대, 조국독립의 일념으로 공산당운동에 뛰어든 이래, 평생을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지리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 이현상.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혜택을 버리고 혁명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춥고 배고픈 산속에서 죽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젊은 시절을 바친 그의 여러 행적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빨치산 투쟁 전적만으로 그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잔혹하다.


인간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인명존중의 정신이라는 거대한 수림 속에서 그것은 그저 작은 관목 한 그루일 뿐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영웅이자, 자신의 삶을 불태운 비운의 혁명가였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민중혁명가
오늘까지도 이현상은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한편에서는 일제시대부터 해방 후까지 삼십 년 세월을 민족의 독립과 계급해방을 위해 투쟁한 전설적인 영웅으로 떠받드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비현실적인 이념에 경도되어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공산주의자로서 그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범죄시해왔다.
 
그러나 이현상은 한국 현대사의 격류를 건너갈 때 반드시 딛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전설적인 민중혁명가이다. 일제 치하에서는 모진 고문과 회유, 12년간의 옥살이에도 불구하고 단 한순간도 변절하지 않았으며 해방 후 더욱 가혹해진 탄압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느 누구보다 민족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던 철저한 사회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였던 그는 오직 민족의 독립과 자립을 위해 외세와의 투쟁에 모든 것을 바쳤던 진정한 애국자요, 영웅이었다.
 
지리산에서 고군분투하던 이현상의 모든 직위와 명예를 박탈했던 북한은 이현상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섬진강에 뿌려지자 다시 영웅으로 복권시켰다. 북한은 그가 죽기 전인 1953년 2월 날짜로 이현상에게 영웅 칭호를 내렸으며 지리산으로 영웅훈장을 보냈다고 발표했다. 1968년에는 평양 신미동에 조성된 애국열사릉에 이현상의 묘지를 제1호로 만들었다. 시신 없는 가묘였다. 이후 북한이 제정한 제1호 열사증을 추서 받았으며 사망 삼십칠 년 만인 1990년 8월에는 다시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60여 컷의 화보 속에는 1990년대 중반, 최초로 공개된 이현상의 직계가족들 사진도 수록하였다. 북한의 대표적인 월간지 중 하나인 [금수강산]에 수록되었던 것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 시, 안내를 맡았던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을 비롯한 후손들의 현재 모습을 담았다.
 
김성동 선생의 발문은 [이현상 평전]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되살려준다. '남부군을 위한 변명' 이라는 제목으로 80매에 이르는 장문의 글에 담긴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참으로 깊고 생생하다.
 
김성동 소설가의 발문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체 게바라는 알아도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은 모른다. 마오쩌둥,호치민,티토,카스트로, 그리고 김일성은 알아도 이현상은 모른다. 게바라를 넣어서 위에 든 반제국주의 혁명가들은 모두 혁명에 성공해서 자신들이 꿈꾸었던 새 세상을 열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름답고 훌륭한 새 세상을 만들고자 30년 동안 밤을 낮 삼아 뛰어다녔던 불요불굴한 우리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은 그 꿈을 펼쳐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잘난 역사가들이 괄호 쳐버린 역사의 빈칸을 채워넣은 것이 작가 안재성이다. 이른바 역사가라는 이들은 이 엄청난 일을 해낸 작가 안재성에게 모자를 벗어야 한다. 그리고 따뜻한 위로의 말과 함께 박주일배라도 올려야 한다.
 
현기영 소설가의 추천의 말
삼천리 오대악 중에 유일하게 이성계의 등극을 반대하였다 하여 '불복산'이라고 불렸던 지리산은 조국 분단을 반대한 이현상 유격대의 항쟁으로 인해 또 한 번 '불복산'이 되었다. 민족 수난과 항쟁을 고스란히 보듬어 안은 지리산, 그 산의 얼굴을 닮은 이현상, 그는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조정래 소설가의 추천의 말
우리의 비참한 식민지사와 서러운 분단사를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핵심인물 중의 한 사람이 이현상이다. 그의 평전이 출간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민족통일을 절반쯤 이루어가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자료 도움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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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프레시안, 강양구/기자, 2007-08-15 오전 1:13:52)
[화제의 책] <이현상 평전>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저 라틴아메리카 혁명가 체 게바라는 알아도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은 모른다. 마오쩌둥ㆍ호치민ㆍ티토ㆍ카스트로, 그리고 김일성은 알아도 이현상은 모른다. (…) 아름답고 훌륭한 새 세상을 만들고자 30년 동안 밤을 낮 삼아 뛰어다녔던 불요불굴한 우리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 (소설가 김성동)
  
  이현상. 낯설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5년간 빨치산을 이끌었던 그는 지난 50년간 남쪽에서 존재를 부정당했다. 1980년대 후반 집중적으로 나온 빨치산을 소재로 한 반공 소설, 실화의 등장인물로 잠시 '상품'이 되기도 했지만 금세 잊혔다. 2000년 6월,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김대중을 안내했던 이가 그의 막내딸이라는 사실이 화제가 되는 정도였다.
  
  이렇게 완벽히 잊힌 이현상의 삶을 복원한 <이현상 평전>(실천문학사 펴냄)이 광복절을 앞두고 출간됐다. 21세기에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골수' 사회주의자의 삶을 되돌아보는 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왜 이현상을 '망각의 늪'에서 끄집어내느라 애를 써야 하는 것일까?  
     
  <이현상 평전>의 저자 안재성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수년간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정국을 연구하면서 '이현상'이라는 이름을 수도 없이 만났지만 따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이미 남한에 널리 이름이 알려졌고 북한에서도 영웅으로 등록돼 있는 이현상을 새삼스레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안재성이 이현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엉뚱한 이유 때문이었다. 1948년 10월 여수ㆍ순천에서 일어난 반란 사건을 추적하던 그는 순천에서 반란군이 살해한 이들의 숫자가 1700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맞닥뜨린다. 물론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명목 하에 군인, 경찰이 학살한 3000명~7000명의 민간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숫자다. 그러나 그는 충격을 받았다.
  
  "아득한 절벽을 만난 기분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반민족적인 패악을 저질렀다 해도, 혹은 개인적인 원한을 맺었다 하더라도,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포로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무더기로 학살할 수 있다면 이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혁명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혁명은 증오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이런 안재성의 앞에 이현상과 5년 동안 지리산에서 함께한 생존 빨치산 대원이 나타났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이현상 선생님은 여순 사건을 봉기라거나 항쟁이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 수많은 인민과 혁명 역량을 훼손시킨, 크나큰 오류요 죄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이현상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현상, 타고난 혁명가  
  이현상의 삶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삶과 많이 겹친다. 게바라가 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해방을 위해 온몸을 던진 것처럼 이현상 역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풍족한 삶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독립운동의 길로 나섰다. 1926년 '6ㆍ10만세운동' 때 맨 처음 만세를 부른 이가 바로 22세의 이현상이었다.
  
  "역사는 자신의 존재에 의거하지 않은 지식인 출신 혁명가의 나약함과 우유부단함에 관한 많은 사례를 보여준다. (…) 그러나 역사는 그 반대의 경우도 무수히 보여준다. 자기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없더라도 타인에 대한 애정과 정의감만으로 기득권을 버리고 변혁운동에 띄어들어 아낌없이 죽어간 사례들이다.
  
  자신이 처한 부당한 현실에 분개하고 분노를 폭발시키는 일은 생존의 본능이지만, 타인의 고통에 분노하고 목숨까지 걸어 싸우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인이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지식인이거나 노동자이거나 아무 상관없이, 타인에 대해 얼마나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성품의 문제였다."

  
  이현상은 타고난 혁명가였다. 그가 평생 변절하지 않고 사회주의자로 살 것을 간파한 이는 바로 일본 경찰이었다. 학생 조직을 꾸리다 두 번째로 구속된 그를 심문한 일본 경찰은 이렇게 적었다. "일견 온순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음험한 자로서 과묵하며 의지가 대단히 강고함. 극렬한 사회주의자로서 의지가 매우 강고하므로 '개전할' 가능성은 없음."  
     
  이현상은 193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한다. 감옥에서 만나 의기투합한 이재유, 김삼룡 등과 함께 1933년 1월 결성한 '경성 트로이카'와 4년7개월의 옥살이를 끝내고 나오자마자 1939년 1월 다시 결성한 '경성코뮤니스트그룹'은 싹이 말라버린 1930년대 국내 항일운동의 빛나는 이름이었다. (☞관련 기사 : "나의 '경성 트로이카' 친구들")
  
  체포된 지 2년 만에 탈출한 이현상은 제3의 사회주의 항일운동 조직을 준비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해방된 지 사흘이 지난 1945년 8월 18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는 이현상, 박헌영, 이관술, 김삼룡, 이강국 등이 벅찬 감정을 안고 모인다. 그때만 해도 불과 10년도 안 돼 같은 민족, 같은 동지의 손에 대부분 목숨을 잃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48년 10월, 이현상은 남조선노동당 간부부장의 자격으로 우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놓고 우왕좌왕하고 있던 여수, 순천의 반란군을 수습해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일제 강점기 때 그가 했던 12년간 감옥살이이보다 훨씬 더 험한 5년간의 산중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나이 42세 때였다.
  
  빨치산 생활을 하던 5년 동안 이현상과 그의 동지들이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던 기간은 단 18일. 한국전쟁 중 북진하던 미군이 비껴간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에서 보낸 기간이었다. 나머지 기간에 이현상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덕유산, 백아산, 백운산, 소백산은 물론이고 전쟁 초기에는 낙동강을 건너 국군, 미군을 교란하는 역할까지 떠맡았다.
  
  이 기간에도 그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았다. "이현상 선생님은 교전 중이 아닌 이상, 포로로 잡은 군인이나 경찰을 절대 죽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토벌대에 협조하다가 잡힌 민간인은 물론, 경찰 첩자로 산에 들어왔다가 잡힌 사람들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인정이 참 많은 분이었지요. 그것 때문에 나중에 온정주의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전쟁은 끝났는가?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반야봉 남쪽 빗점계곡에서 이현상은 목숨이 끊어진 채 발견됐다. 경찰이 그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목에 여덟 발의 총알이 박혀 있었다. 그를 호위하다 열흘 전에 경찰에 잡힌 김진영, 김은석은 시신을 보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죽여주십시오." 이들을 본 경찰은 지리산이 떠나가라며 만세를 불렀다.
  
  이렇게 이현상은 비극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껍데기만 남은 그의 시신은 부패하지 않도록 방부제를 넣은 후 서울 시내에서 '전시'되었다. 그의 시신이 지리산 인근 섬진강 백사장에서 화장된 것은 1953년 10월 8일, 죽은 지 20일이 지난 후였다. 그의 장례는 항일운동에 평생을 바친 그의 삶을 존중한 토벌대장 차일혁이 치렀다.
 
   "이현상에게 더 잘 어울리는 호칭은 선생님이었다. (…) 적군이라도 교전 중이 아닌 이상 절대 죽이지 못하게 하고, 동지의 주검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눈보라 치는 겨울 산중의 걸인 움막 같은 천막 속에서 추위에 떨며 홀로 책을 읽다가 스르르 지쳐 잠들곤 하던 영원한 선생님이었다.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혜택을 버리고 혁명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춥고 배고픈 산속에서 죽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 인간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인명존중의 정신이라는 거대한 수림이 없었다면 자기희생의 마음을 지켜갈 수 없었다."

  
  비록 이현상은 지리산에서 운명했지만 그의 영혼은 반세기 동안 계속 현신해 왔다. 나이 어린 시다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며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저항했던 허세욱 등으로…. 이현상과 동료들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역사의 빈칸을 채워넣은 안재성
  
  <파업>의 작가 안재성(47). 안재성은 1986년 '노동3권 보장'을 외치며 분신한 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파업>을 통해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 받는 소설가다. 정화진, 방현석 등과 함께 노동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던 그는 1990년대 초반 돌연 펜을 놓았다.
  
  안재성은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돼 첫 수배를 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구로, 사북, 태백 등에서 노동운동을 하면서 누구보다도 19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다. 그런 그가 갑자기 '달라진 세상'에서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 그는 1990년대를 포클레인을 운전하며, 또 농사를 지으며 보냈다(☞관련 기사 : "2004년, 전태일이 살아 있다면…").
  
  그랬던 그가 2000년대 들어 한국의 근ㆍ현대사에 초점을 맞춘 글로 다시 돌아왔다. 특히 2004년부터 펴낸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 펴냄), <이관술 1902~1950>(사회평론 펴냄)은 이재유, 이관술, 김삼룡 등 그 이름조차 낯선 무명의 혁명가를 역사 속에서 불러내 큰 반향을 얻었다. 이번에 펴낸 <이현상 평전>도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관련 기사 : "그의 죽음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일까").
  
  소설가 김성동은 <이현상 평전>의 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역사가라는 사람들은 우리 조선의 혁명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 잘난 역사가들이 괄호 쳐버린 역사의 빈칸을 채워넣은 것이 작가 안재성이다. 이른바 역사가라는 이들은 이 엄청난 일을 해낸 작가 안재성에게 모자를 벗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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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리랑]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2008 12/16 위클리경향 804호, 김성동)
반란군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다 
 
평양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된 이현상 사진.
“소련 군정 치하의 평양에서는 ‘소련에서 공부하고 와야 고위직에 등용될 수 있다’는 말이 상식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때문에 북로당 선전부장 김창만과 간부부장 이상조 같은 노른자위 당 간부들, 남로당의 핵심 간부인 이현상과 김삼룡이 소련 유학을 위해 강동정치학원에서 러시아어 공부를 하고 있을 때인 1948년 7월 말 경이었습니다.”
 
박병률이 한 말이다. 박병률은 강동정치학원 원장을 설립 때부터 끝까지 지냈던 사람이다. 김국후 기자가 엮어낸 <평양의 소련 군정>에 나온다. 박병률은 말한다.
 
“평양에 있지 말고 남으로 내려가라”
“이들은 술자리에서 북조선의 최고지도자 문제를 놓고 입씨름을 벌였습니다. 김창만이 ‘곧 수립될 공화국에서 김일성 장군이 북조선의 최고지도자를 맡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순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현상이 ‘김일성은 인민무력부장 정도가 적당하고 최고지도자는 박헌영 선생이 맡는 것이 남북 인민들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이에 이상조가 ‘박헌영은 당파 싸움을 일삼는 종파주의자이기 때문에 지도자로는 절대 불가하고 빨치산 대장 출신인 김일성 장군만이 우리 조선을 이끌 수 있는 자격이 있다’며 맞섰습니다. 분위기가 험악해져 술자리는 패싸움으로 번졌고, 두 파는 강동정치학원에서 훈련용 총까지 들고 나와 서로 위협할 정도가 됐습니다. 이 패싸움은 즉시 소련군정 사령부에 보고됐고 소련 군정사령부는 중앙당 허가이에게 ‘진상을 조사한 후 엄벌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중앙당은 이들의 소련 유학을 취소하고 김창만 선전부장을 내각 간부학교 교장으로 좌천시켰으며, 이상조 간부부장을 군대로 발령하는 동시에, 이현상과 김삼룡은 평양에 있지 말고 즉시 남조선으로 보내라는 엄명을 내렸습니다.
 
당시 소련 군정은 이 사건을 ‘김일성파’와 ‘박헌영파’의 노골적인 대결로 보고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조선으로 밀려 내려간 이현상은 지리산 등지에서 빨치산을 지도하던 중 김삼룡은 지하에서 남로당을 이끌던 중에 각각 총살당하는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좌천된 김창만과 이상조는 나중에 복권되기는 했지만 결국 숙청됩니다.”
 
남조선 빨치산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4000여 명 빨치산 지도자와 빨치산을 양성하였던 강동정치학원은 1948년 1월 1일부터 1950년 6월 25일까지 2년7개월여 동안 존속하였다. ‘박헌영 학교’라고 불릴 만큼 남로당세가 강했던 곳으로, 평양 인근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면 대성리에 있었다. 박헌영이 비서로 있던 조두원(조일명)·사법상 이승엽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와서 1박2일 동안 학원생들을 격려하고 갔다고 한다. 박헌영의 세 번째 부인이 되는 윤레나(윤옥, 조두원 처제)도 학원생이었다고 한다. “리승엽이 강동정치학원 원생들을 무장시켜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남로당 숙청 때 걸고 들어갔던 죄목 가운데 하나다.
 
이현상의 죽음을 보도한 1953년 9월 <동아일보> 기사. <실천문학사(안재성, 이현상평전) 제공>
이현상이 맑스레닌주의 정치학습과 유격전을 그 내용으로 하는 군사학습을 익히던 이때는 남조선 일대가 내란 상태였다. 제주도에서는 4·3항쟁이 이어졌고, 태백산·소백산 같은 산악지대에는 농군들로 뭉쳐진 야산대가 군경 토벌대와 맞서 있으며, 전라도 곡창지대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이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5·10단선으로 단독정부를 세운 이승만은 친일 지주·자본가·관공리를 주축으로 당을 만들어 “땅을 달라! 쌀을 달라!”는 인민들과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었다.
 
이처럼 엄혹한 때에 남로당 총책인 김삼룡과 간부부장 겸 노동부장 이현상이 중앙당이 있는 서울을 비우고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48년 4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갔다가 7월 말까지 3개월 이상 머무는 것이니, 남로당 살림은 이주하·정태식에게 맡기고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려 했다? 그렇다면 고통받는 노동자·농민과 그 고통을 함께 해야 된다는 볼세비키 규율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이현상이야 유격전술을 배워 남조선에서 유격투쟁을 벌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당수권한대행인 김삼룡은?
 
고보생 이끌고 시위 주도하다 투옥
중앙당이 있는 서울로 돌아온 김삼룡과 이현상을 기다리는 것은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이승만정권의 경찰이다. 중요한 기밀서류 보따리를 들고 동가식 서가숙하던 남로당 중앙을 더 큰 곤경에 몰아넣는 사변적 상황이 일어나니, 이른바 ‘여순반란사건’이었다. 우익에서는 ‘반란’이라고 부르고 좌익에서는 ‘항쟁’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현상이 죽기 전날까지 은신했던 곳으로 알려진 빗점골 아지트 자리. 1953년 9월 18일 경남도당에서 온 조직책을 따라 산을 내려갔다가 시신으로 발견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박영발·송시백 등과 지내며 제5지구당 해산 작업을 했다. <실천문학사(안재성, 이현상평전) 제공>
남로당 중앙의 결의나 지원을 받아 일으킨 ‘당사업’이 아니었다. ‘제주도 폭도토벌’을 명령받은 14연대에는 좌익사상에 물든 군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장교들은 중앙당 소속이었고 하사관들은 전남도당 소속이었다. ‘붉은연대’로 불리던 14연대만이 아니라 그때 국방군에는 남로당 당원이나 당원은 아니더라도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내세운 남로당 정책을 지지하는 군인들이 많았다. 여기에는 까닭이 있다. 국방경비대로부터 비롯된 국방군에는 농촌 출신이 많았다. 거의가 살인적 고리 도조인 3·1제에 치를 떨며 지주의 땅을 얻어 부치는 소작농이나 고용농이라고 불리던 머슴 출신들이었으니, 기본계급 농민의 자식들이 남로당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반면에 경찰관들 가운데는 친일파가 많았다. 중앙 지휘부와 도경 간부급은 물론하고 경찰서장과 지서장까지 거의 일제시대부터 농민들을 괴롭히던 친일경찰들이었다. 빈농 출신 청년들은 국방군에 들어감으로써 우선 급한 숙식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경찰과 맞설 수 있는 군인 신분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에 하사관 이하 하급 군인들은 경찰관에 대해서 거의 본능적인 적개심과 증오감을 갖고 있었다.
 
“당적 죄악이며 당적 과오다.”
1948년 10월 22일 저녁, 순천역 앞에 도착한 이현상이 비통하게 부르짖었다는 말이다.
불바다를 이루고 있는 시내 곳곳에 널부러진 시신만 1000여 구가 넘었다. 이현상은 이 사태가 중앙당과 아무런 이음고리 없이 일으킨 커다란 과오로 보았다. 이승만 친일세력이 미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벌이는 제주도 양민 학살극에 동참할 수 없다는 민족·계급적 의분에서 일떠선 것이지만, 전략적 오류로 보았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완벽한 채비를 한 다음 객관적 정세가 임계점에 이르렀다는 과학적 판단이 섰을 때 일으켜서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인민봉기인데, 하사관 몇 명이 주동하여 일으킨 우발적 사태였던 것이다.
 
무고한 인민대중의 희생과 혁명역량의 감소를 가져올 뜻밖의 사태 앞에 망연자실하던 이현상은 우왕좌왕하는 반란군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비록 씻을 수 없는 당적 과오와 당적 죄악을 저질렀지만 반란군들은 반드시 살려내야 할 가치가 있는 혁명역량들이었다. 수많은 인명이 살상될 시가전을 피하여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는 이현상 앞에 놓여진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가시밭길이었다. 승산 없는 유격투쟁이었으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조국해방과 계급해방을 위하여 30년 가까이 싸워온 불요불굴의 혁명가 앞에 놓여진 ‘고난의 행군’이었다.
 
남·북 어느 쪽에서 죽였는지 의문
평양 근교 혁명열사릉에 만들어진 이현상의 가묘. 1972년 사망한 부인 최문기가 여기에 합장되었다. <실천문학사(안재성, 이현상평전) 제공>
이현상(李鉉相)은 1906년 전북(지금은 충남) 금산(錦山)에서 태어났다. 전주이씨로 이른바 양반의 집 자손인데 면에서 첫째 가는 부잣집 4형제 가운데 막내였다. 보통학교를 나와 고창에 있는 고창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2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한다. 졸업반인 5학년 때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이 돌아갔고 그 장례식인 인산(因山)날 터진 것이 6·10만세운동인데, 서울시내 고보생들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한 것이 이현상이다. 왜경에 체포되어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는데, 감옥을 나설 때는 이미 강인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감옥에서 여러 공산주의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맑스엥겔스 사상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인류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절대악인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고서는 조국의 해방도 노동자·농민을 머리로 한 인민대중의 행복한 삶도 이룰 수 없다는 확고부동한 사상을 갖게 된 그는 다음해 봄 밀항선을 타고 상해로 간다. 임시정부 난맥상에 실망하고 귀국한 이현상은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들어갔으나 4개월 만에 그만둔다. 28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고려공산청년회에 들어 학생 야체이카 책임자로 각급 학교 동맹휴학을 조직하다가 제4차조공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4년을 언도받는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나게 된 것이 이재유와 20살 어린 나이 때부터 이미 탁월한 조직가 면모를 보이던 김삼룡이다. 1933년부터 이재유그룹으로 서울 동대문과 용산에 있는 각급 공장에 적색노조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운동을 하다가 11월 ‘이재유그룹 검거사건’에 걸려 7년간 복역한다. 1940년 ‘경성콤그룹’에 들어 인민전선부를 맡아보다가 10월 체포되어 2년간 미결수로 있다가 병보석으로 나와 다시 지하투쟁에 들어간다. 해방이 되면서 남로당 노동부장이 되었고, 여순사태가 터지면서 중앙당 결정에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 남부군 곧 남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 된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5년 동안 벌였던 결사항전에 대해서는 안재성이 쓴 <이현상 평전>에 자세하게 나온다. 이현상이 지리산으로 들어간 것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다. 남조선이라는 지리적 조건 자체가 유격대투쟁이 불가능하다. 중국공산당 홍군이 강서에서 연안까지 368일 걸친 2만5000리 대장정 끝에 마침내 정권을 잡았다는 것은 그만큼 땅덩어리가 광대하여 유격전을 벌일 공간이 많았다는 것인데, 이현상유격군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기껏 사방 800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가 가장 중요한 화력 자체가 비교가 안된다. 세계 최강 미군 비행기가 끊임없이 퍼부어대는 최신무기 네이팜탄 파편만 맞아도 숯덩어리가 되는 판인데 이현상유격대 주무기는 갑오년 김개남(金開南) 장군 때 쓰던 화승대에 기껏 삼팔식장총이었다.
 
불뫼, 곧 화산(火山)이라는 아호를 썼던 이현상이 열반한 것은 1953년 9월 17일 밤 8시쯤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죽음에 대한 참모습은 오리무중이다. 토벌대로 나섰던 경찰과 군인들이 서로 자기네가 사살했다고 훈장과 포상금을 받기 위하여 싸웠는데, 분명한 것은 경찰과 군 어느 쪽에서도 그를 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계급해방과 민족통일을 위하여 신 벗을 사이 없이 밤을 낮 삼아 뛰어다녔던 이현상을 죽인 것은 누구인가? 남로당 숙청작업의 일환으로 이현상을 제거하라는 조선로동당 특명 받은 지리산 빨치산 가운데 누구거나, 북에서 직접 내려 보낸 특수공작대가 저지른 정치이데올로기적 살해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열 방 이상 총을 맞은 이현상이다. 시신 윗도리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 있다. 보리수 열매로 꿴 백팔염주와 볼셰비키 혁명사였다. 향수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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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4 02:11 2008/04/24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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