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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실험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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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님의 [예상했던 대로] 에 관련된 글.

다른 때 보면 나름대로 합리적이라고 생각되었던 NL들도 북핵문제 - 처음에는 이 용어 또한 현실을 왜곡하는 듯하여 그 대신 북미핵공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 했는데, 현재 진행되는 상황은 북핵문제라는 용어가 타당함을 말해준다 - 만 나오면 자기 나름의 독특한 논리를 펼치곤 한다. 아니면 아예 침묵하거나...
  

민주노동당 판갈이뉴스에 실린 민경우의 기사도 그런 식이다. (그런데 통일연대에 있던 민경우 처장이 언제 판갈이 기자가 되었나.) 민경우 기자는 "최근 진행된 정황을 고려하면 핵 실험 발표가 단순한 정치공세가 아니라 실제 시행을 위한 사전 조치임은 명백"하단다. 다른 전문가들도 결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데, 이를 단지 불장난이라고 봐야할지...

 

북의 핵 실험 발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민주노동당 판갈이 뉴스, 민경우, 2006-10-04 21:50:31)
   
"북 핵실험 선언…대중국 견제 등 다목적 포석" (미디어오늘, 조현호 기자, 2006년 10월 03일 (화) 20:39:33) 
[전문가 의견] 라이스 동북아 방문 앞둔 분위기 환기용 
     

北, 미국 지연전술에 압박전술로 '되치기' (프레시안, 황준호 기자, 2006-10-03 오후10:58:39)
"핵실험 하게 된다" 북한 성명 의미는?  
  

북의 의도는 '미국 압박', 해법은 '미국 양보' (민중의 소리, 서정환 기자, 2006-10-03)
북한 핵실험 예고에 대한 전문가 반응 

    



이런 전문가 의견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는지, 민주노동당의 브리핑은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다. 나름대로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노력하긴 했는데, 노력 뿐이다. 이런 식의 말은 평상시에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북 외무성 핵실험 성명 발표에 대한 민주노동당 입장 (박용진 민주노동당 대변인 브리핑, 2006-10-04 10:44:07)
   
1.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민주노동당은 핵의 무기화 뿐 아니라 핵의 평화적 이용도 반대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한반도에 어떠한 방식의 핵무기도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 배비(配備)·사용의 금지한다는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2. 군사적 해결방식을 반대한다. 
  
3. 남북대화를 통한 정부의 적극적인 핵실험 행동 돌입 방지 노력을 촉구한다. 
  
4. 이 상황에서 미국의 사태악화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9.19 베이징 성명 이후 북핵 문제가 오히려 악화를 거듭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미국은 지금의 상황을 오히려 즐기고 있으며 엄중한 사태를 유도하는 정책을 갖고 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민주노동당은 대결적 상황을 조성하고 있는 미국의 태도를 강력히 비판하고 조속히 북미간 직접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를 미국 당국에 촉구한다.

 

이를테면 전진 정책위원회가 2005년 3월 15일에 작성한 바 있는 '북한 핵(무기)관련 '전진' 입장 정리를 위한 토론자료'의 내용은 관련 원칙들과 입장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오히려 이것이 이번 북한의 핵실험 발표에 대해서 더 구체적이다. 그 중 관련되는 일부만 옮기면 이러하다.
 

1. 어떠한 핵무기도 결단코 “자위(방어)용” 무기가 될 수 없다.
2. 핵무기에 의해 얻어지는 안전과 평화란 공포의 지속과 야만의 강요에 다름 아니다.
3. ‘전진’은 핵의 군사적 이용뿐만 아니라 핵의 평화적 이용에도 반대한다. 이는 당 강령에 담긴 정신임을 확인한다.
4. 만일 북한이 실제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이는 북한 정권의 존립을 위해 민족의 생존을 담보로 거는 위험한 도박이며, 한반도의 전쟁 위험을 더욱 가중시키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실수임을 분명히 한다. 이는 어떠한 논리로도 옹호될 수 없다.
5. 한반도 비핵지대화의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며 이의 관철을 위해 민족공동체 구성원과 주변국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6. 어떠한 상황에서도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공격은 용인될 수 없다. 미국의 조건 없는 불가침 선언이 사태 해결의 열쇠다.
11. 북한 정권의 핵무기 보유 선언은 정황적 논리로 해명될 수 없으며, 그 자체로 판단되어야 한다.
12. 진정한 자주성은 주변국들에 대한 물리적 위협이 아닌 연대와 공존의 정신에서 출발한다.
13. 지난 92년의 “비핵화 공동선언”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북한 당국의 행태는 규탄받아 마땅하다.
14. 소위 ‘벼랑 끝 전략’은 북한 당국뿐만 아니라 전 민족의 운명을 담보로 한 정치도박에 다름 아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위협과 기만이 아니라 평화적 수단과 민족 공동의 노력에서만 찾을 수 있음을 북한 당국은 명심해야 한다.
15. 북한 당국은 자신들의 행위가 동북아의 핵무장과 군비경쟁, 특히 일본의 재군사화 경향과 핵무장을 가속시키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17. 정부는 북한 핵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음의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1) 한반도 비핵화의 원칙 2) 미국을 비롯한 외국 정부에 대한 자주적 입장 3) 민족공동체의 협력을 통한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군축

24. 핵무기에 대한 원칙적인 입장은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의 문제다. 지금이라도 북한 핵무기에 대한 분명한 입장표명을 당의 권위 있는 의결단위를 통해 제출해야 한다.
25. 남북공조나 한미공조의 일방적인 강조는 편향일 뿐이면 “평화공조”가 당의 입장임을 분명히 한다.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핵무기에 대한 원칙적인 입장은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의 문제다.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라면, 핵무기 개발을 통해 국내외적 갈등을 해결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 단연코 반대해야 한다. 핵무기에 대한 입장은 진보정치와 보수정치를 가르는 기준 중의 하나이다. 자위든, 압박이든 핵무기, 핵실험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발상 자체는 절대 진보적이지 않다.

 

한가위 연휴라 그러한지 북한의 핵실험 예고에 대해 좌파진영의 입장 표명은 없다. 아니 좌파진영도 그렇고, 민주노동당 내에서도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서는 토론이 사그라든다. 진보진영의 모든 문제를 주사파와 북한으로 회귀시키는 몇몇 이들만이 꼴통 NL들과 말싸움을 벌일 뿐이다.

 

북한의 핵실험 예고에 대해 민주노동당이 단호하게 명백한 반대를 표명하도록 하는 당내 토론이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어떤 국가가 하든지, 무슨 목적으로 하든지, 모든 핵실험을 반대한다"는 우리의 원칙을 가지고 나서야 한다.

 

물론 거기에서 미국에 대한 고려가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요새 주말에 방영하는 외화 '커맨드 인 치프'(Command In Chief)에서 보면 미국이 아무 거리낌 없이 북한을 공격할 수 있음이 묘사되는데, 이는 절대 영화에나 나오는 얘기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것이 북한의 핵실험을 정당화하진 않는다. "반전 반핵 양키고홈!"을 외쳤을 때, 반핵이 '미국'의 '핵무기'만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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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5 04:19 2006/10/05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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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한 민주노동당, 어찌하오리까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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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1 05:35:36

이장규 동지가 영남노동운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연대와 실천> 10월호에 '무기력한 민주노동당, 어찌하오리까'라는 글을 썼단다. 윤재설 기자가 이를 레디앙에 옮겼다.

구구절절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다.

아마도 다슬이가 이장규 동지에게 부탁을 했겠지. 이런 글은 기관지에 실어도 좋았을 텐데...

나중에 본문을 담아와야겠다.

 

10. 4

이장규 동지가 당 홈페이지 당원토론방에 본문을 올려놓아서 이를 담아왔다.

 



"민주노동당 총체적 난국" 
어느 민주노동당 평당원의 분노…"비전의 공유, 구심력 확보가 필요하다"

2006년 09월 30일 (토) 15:10:05 윤재설 기자  yoonjs@redian.org

  

“지금 당의 모습은 총체적 난국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지경이다.”
 
민주노동당의 한 평당원이 당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영남노동운동연구소(소장 임영일)가 발행하는 <연대와실천> 10월호에 ‘무기력한 민주노동당, 어찌하오리까’라는 글을 기고한 이장규 민주노동당 경남도당 마산위원회 당원은 “민주노동당 당원으로서 최근 민주노동당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마디로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며 “5.31 지방선거의 패배 이후 민주노동당은 전혀 당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당원은 “어차피 선거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이거니와, 선거만으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선거에서 패배한 것 그 자체가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며 “문제는 선거가 끝난 이후 지금까지 당이 보여준 모습”이라고 주장했다.
 
포항건설노조 투쟁이나 한미FTA 저지투쟁, 판교의 고분양가 논란 등 각종 부동산문제나 사교육문제 같은 사회경제적 사안 등 당외의 각종 중요한 현안들에 대한 당의 대응은 “한마디로 ‘면피’ 수준에 지나지 않는 무기력함의 연속”이었고 당내에서는 “온갖 잡음들은 쉴 새 없이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무산으로 끝난 노동부문 최고위원 선거과정에서의 온갖 잡음들, 당사이전과 관련된 이런저런 내부적 혼란들, 열린우리당의 외곽조직에 적극 참여한 이를 당기위원장으로 선출했다가 당원들의 거센 비판에 부랴부랴 사퇴시킨 황당한 사태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건과 사고들이 끊이지 않았다”며 “외부적으로는 무기력하면서 내부에서는 사고만 치고 다니는 철부지나 다름없다고 말하면 지나친 표현일까”라고 물었다.
 
이 당원은 이런 문제의 원인과 책임을 온전히 현재의 당 지도부로 돌리거나 단순히 사람의 문제 또는 특정 노선의 문제로 보는 시각을 경계했다. 현재의 당 지도부만 문제가 되고 국회의원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고 현재의 무기력함은 정파를 막론하고 당내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다.
 
“핵심은 당적 구심력의 부재”
 
이 당원은 “핵심적인 문제는 당적 구심력의 부재”라고 주장했다. 당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구심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당 외부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열린우리당으로 대표되는 개혁세력과의 확실한 구별정립이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자신의 정체성이 불분명한 상태에서는 부동층에 대한 구심력이 작동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중노선 내지 반수구연대라는 미명 하에 현재의 어정쩡한 상태를 그대로 인정한 채 오히려 당이 중간지대로 옮겨가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일부 ‘운동권’의 관념일 뿐 자신이 주관적으로 중간지대로 옮겨간다고 대중들이 그걸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현 정권의 온갖 실정에 실망한 서민대중들에게 민주노동당도 그들과 비슷한 세력이라는 기존의 인식만 강화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 당원은 “진보와 사이비 개혁의 경계를 흐림으로써 사이비 개혁세력의 잘못까지 함께 덤터기를 쓰게 만드는 일임은 이미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입증됐다”고 덧붙였다.
  
오히려 “현 정권으로 대표되는 사이비 개혁세력과의 철저한 대립을 통해 그들과 우리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대중적으로 각인시켜야만 광범위한 서민대중들에게 진정으로 당적 구심력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당원의 주장이다.
 
그는 최근의 당기위원장 사태도 이런 측면에서 파악해야 한다며 “87년 이래의 ‘비판적 지지’의 망령을 완전히 청산하지 않는다면, 당 외부에 대한 구심력이 아니라 진보와 사이비 개혁 사이에서 동요하는 원심력이 더욱 확대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따로 노는 단위들, 전당적 사업이 없다"

이 당원은 더 나아가 외부적 구심력 즉 정체성이 불분명한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내부적인 구심력의 부재라고 강조했다.
  
즉 “당의 각 단위들이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연관성 하에서 움직이고 있지 못하고 원내와 원외, 중앙과 지역, 정책단위와 조직단위, A정파와 B정파 등 당 내의 거의 모든 단위들이 따로따로 놀면서 각자 알아서 고된 각개전투를 하고 있을 뿐 전체적인 기획에 의거한 전당적인 사업이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당원은 포항건설노조의 투쟁에 대한 당의 대응을 예로 들었다. 그는 “당이 해야 할 일은 단순히 현재의 투쟁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광범위한 서민대중들의 삶과 어떤 관련성을 가지는지 이야기하고 그들의 투쟁이 일반 시민들에게도 이익이 됨을 설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현재의 투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방어하는 것과 함께, 지금의 상황을 개선시킬 정치적·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며 이런 요구들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다시 정치적·조직적으로 접근하는 제반 과정” 즉 현장투쟁과 계급정치의 결합과정을 아우르는 것이 단순히 집회에 결합하는 차원을 넘어서 당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당적 기획 하에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포항건설노조 투쟁의 경우 다단계 하도급과 공사비 부풀리기로 대표되는 건설업종의 문제는 지자체의 각종 건설공사비를 과다지출하게 함으로써 시민들의 혈세를 낭비하게 만드는 주범이기도 한 점을 포착해 단순히 건설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들의 세금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었는데 “그들의 투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당의 역할임에도 정책이나 기획 등 어느 단위에서도 이런 노력이 제대로 이루진 것 같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 당원은 적정한 수준의 직접시공비율 의무화 및 다단계 하도급 시 고용의제 등 나름대로 갖고 있는 일정한 대안이 결국 시민들과 건설노동자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리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해당 의원실이나 당의 정책단위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고 당의 조직단위나 각 지역조직들은 이러한 대안을 담은 제도개혁요구나 관련조례제정 등을 매개로 해당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조직적으로 접근해 나가려는 고민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 당원은 포항건설노조 투쟁뿐 아니라 “어떤 사안에 대해 전체적인 당적 기획 하에서 의원실과 중앙당 및 지역조직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움직인 적이 없고, 그러다보니 당 내부적인 구심력이란 게 작동할 여지가 없었다”며 “결국 각자 알아서 자신이 관심있는 부분에만 신경쓸 뿐 다른 쪽에는 무관심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으며 당적 통일성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일종의 정파별·지역별 할거체제가 민주노동당의 현 주소인 것”이라고 일갈했다.

    

"총괄기획기능 획기적으로 강화돼야"

이장규 당원은 당적 구심력의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이 추후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한 기본적인 비전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안사회의 모습 같은 근본적인 주제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음 대선 이후 5~10년간 한국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보정당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공유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 당원은 기본적인 비전이 공유된 상태에서 “당내 각 단위의 유기적 결합을 위한 총괄기획기능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원래 민주노동당이 최고위원회 제도를 도입했을 때 최고위원회에 정치적 책임과 함께 총괄적인 전당적 기획의 임무도 부여했지만 최고위원제도가 일종의 자리나눠먹기처럼 되어버리면서 이러한 총괄기획 부분은 완전히 실종되어 버렸다며 제도를 바꾸든 사람을 바꾸고 보강하든 적절한 방법을 통해 총괄기획기능을 강화함으로써 일정한 시기의 핵심사안에 당내의 모든 단위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도록 해야 하며, 이를 통해 당의 내부적인 구심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장규 당원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전의 공유와 외부적, 내부적 구심력의 확보를 통해 민주노동당을 제대로 된 ‘당’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며 이는 또 하나의 창당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며 “한미FTA 반대투쟁과 내년 대선을 거쳐 2008년에는 제대로 된 진보정당과 산별노조가 이 땅에 들어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는 말로 글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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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기력한 민주노동당, 어찌하오리까? ]
  
총체적 난국에 빠진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 당원으로서 최근 민주노동당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마디로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5.31 지방선거의 패배 이후 민주노동당은 전혀 당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선거에서 패배한 것 그 자체가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선거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이거니와, 선거만으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문제는 선거가 끝난 이후 지금까지 당이 보여준 모습이다. 포항건설노조 투쟁이나 한미FTA 저지투쟁, 판교의 고분양가 논란 등 각종 부동산문제나 사교육문제 같은 사회경제적 사안 등등 당외의 각종 중요한 현안들에 대한 당의 대응은 한마디로 ‘면피’ 수준에 지나지 않는 무기력함의 연속이었다.
  
반면 당 내에서의 온갖 잡음들은 쉴 새 없이 터져나온다. 최근에 있었던 굵직한 것들만 들어보더라도 결국 무산으로 끝난 노동부문 최고위원 선거과정에서의 온갖 잡음들, 당사이전과 관련된 이런저런 내부적 혼란들, 열린우리당의 외곽조직에 적극 참여한 이를 당기위원장으로 선출했다가 당원들의 거센 비판에 부랴부랴 사퇴시킨 황당한 사태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건과 사고들이 끊이지 않았다. 외부적으로는 무기력하면서 내부에서는 사고만 치고 다니는 철부지나 다름없다고 말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지금 당의 모습은 총체적 난국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지경이다.
  
무엇이 문제의 핵심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선거 한 번 치르고 나더니 당적 활동을 아예 포기한 것도 아닐 텐데 문제의 핵심이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문제의 핵심으로 현재의 당 지도부를 지목하기도 한다. 물론 틀림없이 일리있는 지적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거니와 자칫하면 더 본질적인 문제를 놓칠 우려도 있다. 가령 현재의 당 지도부만 문제가 되고 국회의원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당 내의 잡음들이야 당 지도부가 일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문제이지만 외부적인 무기력함에는 국회의원들의 책임도 상당히 크지 않는가? 또한 현 당 지도부의 문제점이란 것도 단순히 사람의 문제나 특정 노선의 문제라고만 떠넘길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물론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당내 자주파 동지들 중 일부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한 가지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주파만이 문제고 평등파는 그다지 비판받을 게 없다고 생각하기엔 당의 현실이 전혀 그렇지 않다. 현재의 무기력함은 정파를 막론하고 당내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
  
필자가 생각하기에 핵심적인 문제는 당적 구심력의 부재이다. 이것은 당 외부와 당 내부 둘 다를 포괄한다. 당 외부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열린우리당으로 대표되는 개혁세력과의 확실한 구별정립이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문제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불분명한 상태에서는 부동층에 대한 구심력이 작동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대중노선 내지 반수구연대라는 미명 하에 현재의 어정쩡한 상태를 그대로 인정한 채 오히려 당이 그 쪽 -- 중간지대로 옮겨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건 일부 ‘운동권’의 관념일 뿐 자신이 주관적으로 중간지대로 옮겨간다고 대중들이 그걸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 정권의 온갖 실정에 실망한 서민대중들에게 민주노동당도 그들과 비슷한 세력이라는 기존의 인식만 강화할 뿐이며, 진보와 사이비 개혁의 경계를 흐림으로써 사이비 개혁세력의 잘못까지 함께 덤터기를 쓰게 만드는 일임은 이미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입증되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현 정권으로 대표되는 사이비 개혁세력과의 철저한 대립을 통해 그들과 우리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대중적으로 각인시키는 것이며, 그럴 때만이 광범위한 서민대중들에게 진정으로 당적 구심력이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의 당기위원장 사태도 이런 측면에서 파악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는 단순히 당내 문제만은 아니다), 필자가 앞에서 당내 자주파 일부의 근본적인 문제점이라고 언급한 것도 바로 이 부분에 대한 것이다. 87년 이래의 ‘비판적 지지’의 망령을 완전히 청산하지 않는다면, 당 외부에 대한 구심력이 아니라 진보와 사이비 개혁 사이에서 동요하는 원심력이 더욱 확대될 위험성이 있다.
  
따로 노는 당의 각 단위들
  
당의 외부적 정체성과 관련된 위의 내용들은 사실 그간 많이 지적된 것들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당 내부적인 구심력의 부재, 다시 말해 당의 각 단위들이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연관성 하에서 움직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원내와 원외, 중앙과 지역, 정책단위와 조직단위, A정파와 B정파 등 당 내의 거의 모든 단위들이 따로따로 놀면서 각자 알아서 고된 각개전투를 하고 있을 뿐 전체적인 기획에 의거한 전당적인 사업이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가령 얼마 전에 있었던 포항건설노조의 투쟁 과정을 생각해 보자. 당의 상당수 단위가 (범좌파를 자처하는 단위 중 일부까지도) 포항건설노조의 투쟁에 제대로 연대하지 못했다는 기본적인 비판도 물론 있어야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름대로 집회에 열심히 참가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당이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당이 해야 할 일은 단순히 현재의 투쟁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광범위한 서민대중들의 삶과 어떤 관련성을 가지는지 이야기하고 그들의 투쟁이 일반 시민들에게도 이익이 됨을 설득하는 것 - 즉 현재의 투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방어하는 것과 함께, 지금의 상황을 개선시킬 정치적/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며 이런 요구들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다시 정치적/조직적으로 접근하는 제반 과정 - 즉 현장투쟁과 계급정치의 결합과정을 아우르는 것이다.
  
현재의 당의 역량 상 너무 거창한 목표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어서 일정한 기획력만 담보된다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다. 다단계 하도급과 공사비 부풀리기로 대표되는 건설업종의 문제는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건설산업연구원 등 국책연구기관에서도 끊임없이 지적해온 사항이다. 당에도 단병호 의원실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자료가 있다. 또한 이는 지자체의 각종 건설공사비를 과다지출하게 함으로써 시민들의 혈세를 낭비하게 만드는 주범이기도 하다. (주1: 과다지출된 공사비가 건설노동자들에게 돌아가면 좋겠지만 전혀 그렇지 못하다. 최초 발주금액 중 직접 시공에 참여하는 말단하도급업체에 돌아가는 비중은 37%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63%는 시공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는 업체에 의해 중간착취된다) 즉 적절한 문제제기와 선전이 이루어졌다면 이는 일반 시민들에게도 충분히 설득력있는 주장을 할 수 있는 소재이다. 단순히 건설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들의 세금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림으로써 그들의 투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당의 역할임에도 정책이나 기획 등 어느 단위에서도 이런 노력이 제대로 이루진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적정한 수준의 직접시공비율 의무화 및 다단계 하도급 시 고용의제 등 이에 대한 현 수준에서의 일정한 대안도 나름대로 제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간단한 성명서 한 장 낸 것을 제외하고는 이런 대안이 있고 이것이 시민들과 건설노동자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리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해당 의원실이나 당의 정책단위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당의 조직단위나 각 지역조직들은 이러한 대안을 담은 제도개혁요구나 관련조례제정 등을 매개로 해당 노동자들에게 정치적/조직적으로 접근해 나갈 수도 있다. (주2: 가령 민간 차원의 공사발주는 법제화되어야 할 사항이어서 지역 차원에서 개입할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지자체의 공사발주에 대해서는 조례를 통하여 직접시공비율 의무화나 저가 하도급 금지를 규정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지자체 권한이므로). 물론 건설업체 및 관련세력들의 반발과 로비가 상당할 것이므로 실제 통과는 쉽지 않겠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예산낭비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시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을 수 있으며 건설노동자 및 덤프노동자 등 건설관련업종 종사자들에겐 직접적인 호소력을 지니게 된다. 이런 식으로 지역과 계급이 결합할 수 있는 지점들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이 지역 내에서의 진보정당의 핵심적인 역할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건설노조투쟁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사안들도 이와 비슷하다. 한 마디로 어떤 사안에 대해 전체적인 당적 기획 하에서 의원실과 중앙당 및 지역조직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움직인 적이 없고, 그러다보니 당 내부적인 구심력이란 게 작동할 여지가 없었다. 결국 각자 알아서 자신이 관심있는 부분에만 신경쓸 뿐 다른 쪽에는 무관심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으며 당적 통일성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일종의 정파별/지역별 할거체제가 민주노동당의 현 주소인 것이다.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당적 구심력의 부재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대답이 쉽지는 않다. 당 외부적인 것이든, 당 내부적인 것이든 나름대로 역사적인 근원을 가지는 것이거니와 오랫동안 지속된 것이어서 당장 한꺼번에 해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어느 정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문제는 옛날부터 있었던 것임에도 적어도 2004년까지는 나름대로 당이 상당한 성장을 이룩해왔거니와 이는 진보정당의 정치적 진출이라는 기본적인 비전들이 당내외에서 상당 정도 공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최소한 우리도 정치적 발언권을 획득해야 한다는 기본방향에 대해 대부분이 동의했기에 여기까지는 굴러온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최소한의 정치적 진출은 이룬 지금, 당이 추후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한 기본적인 비전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때의 비전이란 대안사회의 모습 같은 근본적인 주제라기보다는 중기적인 목표와 그에 따른 기본기획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다음 대선 이후 5~10년간 한국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보정당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공유되어야 한다. 마침 내년 말이 대선이니만큼 이는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최소한 비판적 지지라는 외부적 원심력의 작용은 이제 확실히 청산해야 한다.
  
이렇게 기본적인 비전이 공유된 상태에서 (그게 아니라 비판적 지지의 청산 정도 이외에는 다른 비전들이 공유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는 필요하다), 당내 각 단위의 유기적 결합을 위한 총괄기획기능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어야 한다. 원래 2003년의 당발전특위에서 최고위원회 제도를 도입했을 때는 이 최고위원회가 정치적 책임과 함께 총괄적인 전당적 기획도 맡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정당의 총괄기획이란 어차피 정치적인 판단과 긴밀히 연관되는 것이므로). 그런데 최고위원제도가 일종의 자리나눠먹기처럼 되어버리면서 이러한 총괄기획 부분은 완전히 실종되어 버렸다. 제도를 바꾸든 사람을 바꾸고 보강하든 적절한 방법을 통해 총괄기획기능을 강화함으로써 일정한 시기의 핵심사안에 당내의 모든 단위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도록 해야 하며, 이를 통해 당의 내부적인 구심력을 강화해야 한다. 최근의 한미FTA 반대투쟁은 이를 위한 일종의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전의 공유와 외부적, 내부적 구심력의 확보를 통해 민주노동당을 제대로 된 ‘당’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며 이는 또 하나의 창당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미FTA 반대투쟁과 내년 대선을 거쳐 2008년에는 제대로 된 진보정당과 산별노조가 이 땅에 들어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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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4 04:37 2006/10/04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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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된 민주주의, 괴물이 된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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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 거세된 민주주의, 괴물이 된 자본주의
원제: 『미국의 참주정: 자본주의와 미국의 쇠퇴 Tyranny in American Capitalism and National Decay』(London: Verso, 2004)
닐 우드 지음, 홍기빈 옮김, 개마고원, 2004.
 
재미있는 책이다. 짧은 까닭에, 그리고 각주나 미주가 달려 있지 않은 에세이인 이유로, 단숨에 읽었다. 물론 3-4일 가지고 다니면서 읽은 것이니 좀 시간은 걸렸나.
이 책은 엘렌 메익신스 우드(Ellen Meiksins Wood)의 남편인 닐 우드(Neal Wood)가 지난 2003년 숨을 거두기 직전 탈고한 마지막 저작을 홍기빈이 옮긴 것이다.
 
이 책에서는 역사에 기록된 대제국들이 모두 몰락했고, 그 원인은 내부에서 비롯된 것으로, 탐욕과 민주주의라고 한다. 탐욕, 즉 화폐와 재산에 대한 욕심 자체와 이것이 사회 통합에 주는 영향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 그리고 민주주의와 그러한 물욕과의 관계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최근에 내 자신이 민주주의에 대해 관심이 많은 까닭에 목차를 보고 이 책을 집어 들었는데,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는데 도움이 되었다.


“고전 고대 이래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에는 탐욕과 민주주의란 모두 사회통합을 위협하는 파괴적인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번성하면서 탐욕은 점차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마침내 아예 사회적 조화와 질서의 기초로까지 여겨지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라는 개념도 21세기 초입에 이르면 사회적 단결의 궁극적 목적이자 단결을 보장하는 장치라고 믿도록 되었다. ... 새 옷으로 단장한 탐욕, 그리고 본 모습을 알 수 없을 만큼 변형되어버린 민주주의의 개념이 합쳐져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심장과 혼이 태어났고, 디들은 자본주의 발전에 꼭 필요한 독특한 원동력이 되고 말았다.” (26쪽)
 
목차
1장 눈앞에 닥친 위험
2장 위장되고 정당화된 탐욕
3장 송곳니가 뽑히고 모습이 바뀌어버린 민주주의
4장 자본주의라는 참주정
5장 사회적 퇴락의 징조들
6장 미국 정치의 공허함
7장 대안적 사회는 가능한가
  
닐 우드는 탐욕에 대한 종교적 경고에서 잘 드러나듯이 사회통합을 막는 암적인 요소인 동시에 자본주의 이전 시기에는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었던 ‘탐욕’이 18세기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 ‘이익’의 개념으로 변신하면서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등장하는 것에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닐 우드는 애덤 스미스가 왜곡 선전되어 왔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애덤 스미스는 상인들 및 제조업자들의 “얼토당토않은 질투심”, “인정사정 두지 않는 탐욕”, “독점을 향하는 정신” 등을 들어 “어느 쪽도 인류의 지배자가 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말하였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여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을 조화시키는 것은 오직 특정 조건들이 갖추어질 때에만 가능하다고 명확히 밝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말이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에서 한 번씩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았다)의 작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은 “완벽한 자유와 정의의 자연적 체제”라는 틀이 마련되는 것이며, 이러한 틀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자연적 체제’의 관건은 정부이며, 정부의 적극적인 활동이다. 상업사회에 있어서 정부는 사적인 경제활동이 훼방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루어지도록 법을 강제해야 하고, 경쟁이 벌어지도록 보장해야 하며, 독점을 방지하고, 자유무역을 촉진하고, 또 동시에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계약의 효력을 보장하고, 부채의 지불을 강제하고, 어떤 개인이라도 다른 개인의 활동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정부는 또한 공공의 비용을 써서 인간·재화·원자재의 이동을 촉진할 수 있도록 공공사업·도로·항만·운하 등을 세우고 유지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을 지지할 ‘자연적 체제’를 창출하는 정부의 가장 중요한 궁극적인 역할은 모든 계급의 청소년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대학과 각 교구의 학교들과 같은 공공기관들을 물질적으로 보조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공공의 이익을 목표로 하여 정부가 해야 할 일로, 정부는 소수만이 아닌 모든 시민들의 행복과 번영, 그리고 당연히 생산에 대한 소비의 우위를 달성해야만 한다.
따라서 스미스의 관점에 있어서 정부가 ‘보이지 않는 손’이 성공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는 개입의 기능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55-56쪽)
 
닐 우드에 따르면, 애덤 스미스의 이런 주장은 장기적으로는 ‘신의 섭리’가 작동하여 노동자들의 부당한 고통과 어려움을 막아줄 것이기에, 정부는 최소한의 기능만을 가져야 하며, 경제에 대한 개입은 삼가야 한다고 하면서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신의 섭리’에서 우러나오는 장기적인 이익의 조화라는 개념을 가져다 놓은 에드먼드 버크에 의해 바뀌어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개입을 통한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스미스의 단서조항도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버크 이후 도덕적 낙인이 찍힌 ‘탐욕’이라는 용어는 중립적이고 비난의 뜻이 없는 ‘이익’, ‘자기이익’, ‘이윤’ 등이 사용되었다.
 
“19세기 이후 현재까지 경제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이자 개인들의 상호의존, 나아가 사회적 통합의 진정한 기반이라고까지 여겨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탐욕’이 아닌 ‘이익’이라는 말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인간행동 최악의 특징이며 사회질서 유지에 심각한 위협이라고 여겨왔던 탐욕은 이제 점잖은 옷을 차려입고 전혀 다른 것으로 변장하게 된 것이다. ‘탐욕’은 멋진 양복을 걸쳐 입고 ‘이익’의 개념 뒤에 숨어서, 탈선적인 인간행동은커녕 정상적이며 또 정당한 사물의 질서가 되었다. 이제 자본주의적 심성이 거침없이 달려 나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된 셈이다.” (62-63쪽)
     
민주주의에 대한 닐 우드의 견해는 경청할 만하다. 이것은 더글라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 나오는 내용을 해설해놓았다고나 할까.
  
“아테네는 여자들이 모든 정치적 역할에서 배제되었고, 거류 외국인과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던 노예들을 배제한 결점이 있었으나, 그 당시로나 그 후 오랜 기간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모든 남자 시민들에게 가문·교육·재산·소득을 묻지 않고 완전한 정치 참여와 공직 취임의 권리를 보장한 특이성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가난한 자들의 지배”였다. 아테네에서의 빈부 차이도 현재 우리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리 과도한 편은 아니었다.
정치과정을 보자면,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모든 남자 시민들에 의한 직접지배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는 국가의 정책을 ‘주권적’ 의회에서 논쟁하고 거수투표로 결정하며, 주요 공직자들을 제비뽑기로 선정하고, 엄청난 규모의 민중배심원제도를 두는 등의 일들을 뜻한다. 의회에 참석하면 일당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가난한 시민들도 일자리가 없다고 해서 경제적 궁핍을 겪지는 않았다. ... 아테네인들에게 있어서 민주주의의 의미는 약하고 불행한 이들에 대한 동정심을 함축하는 것이었다.”(71-72쪽)
   
민주주의가 참주정을 막아주는 방패라고 찬양된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2세기 전까지만 해도 참주정을 두려워했던 대부분의 사상가들과 논평가들은 가장 목청 높은 민주주의의 비판자들이었다.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유명한 철학자들도 대부분 민주주의를 비판해왔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투키디데스,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세네카 등이 남긴 민주주의에 대한 비난의 말들은 실로 방대한 양을 이루고 있고, 옹호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오래오래 살아남아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아테네인들의 실험을 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최근까지도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평결은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이었다.”(73-74쪽)
  
“이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전개된다. 민주주의, 즉 인민의 직접 지배는 사회적 부패를 증대시키고 도덕적 타락에 적합한 조건들을 창출한다. 민주주의 하에서는 가난한 하층계급이 국가를 지배하며, 그 힘으로 자신들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자들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킨다. 이 군중들은 돈과 재산과 권력과 지위를 놓고 서로 싸우고, 또 예전에 그들보다 위에 있던 자들과 다툰다. 탐욕과 야망으로 인해 시민들은 서로 성공하기 위해 기를 쓰고 싸움질에 돌입, 급기야 공동의 선(common good)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민주주의는 순식간에 ‘폭도들의 난장판’(mob rule)으로 변질된다. 부패와 갈등은 점점 더 심해지고 그 와중에 매력적인 인물이 나와 민중들에게 인기를 얻어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하는 일이 흔히 벌어진다. 그러나 그런 자도 민중들의 호민관으로 자리 잡아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고 마침내 국가권력을 장악했을 때쯤에는 완전한 참주(tyrant)로서의 본색을 드러낸다.”(74-75쪽)
  
이렇게 항존하는 타락의 위협에 대한 해독제로 민주주의의 비판자들은 ‘사회적 건전성’을 획득하기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국가를 구조화하는 비전을 제시한다. 이는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것처럼, “사회적 신분의 차별을 뚜렷이 하여 법의 지배에 두는 국가, 궁극적으로는 유산계급이 지배하는 국가”였다. 그 기초를 이루는 것은 1인 지배, 소수 지배, 다수 지배의 형태를 결합시켜 군주정·과두정·민주정의 특징들이 서로 엮여 있어, 견제와 균형의 체제가 제도화된 ‘혼성 정체’(polity)였다. 이러한 ‘혼성 정체’를 통해 확립될 사회적 건전성이란 민주주의 사회에 만연한 부의 축적과 탐욕 대신 사회 전체가 넓은 의미에서의 교육, 그리고 사회적으로 우월한 유산계급이 베푸는 좋은 모범을 따름으로써 그들 지배계급이 규정하고 강제하는 바의 공공선을 좇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틀에서 민중들은 최소한의 역할과 발언권만을 부여받게 되어 절대로 민주정에서와 같이 국가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76쪽)
  
“미국 헌법의 아버지들은 민주정과 군주정에서 숨은 참주정의 가능성을 보고 특정한 혼성 정체의 형태를 옹호하는 열렬한 공화주의자로 변하였다. 헌법 초안자들의 목적했던 바는 민주주의가 아닌 공화국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들은 인민들의 직접지배나 모든 형태의 다수지배에 커다란 공포와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설계하고 제도화한 성문헌법에 나오는 정부 체제가 이념으로 내걸었던 것은 법의 통치, 견제와 균형을 제도화하는 권력분립, 상·하원 양원제 등이었는데, 이중 민중이 직접 선출하는 것은 오로지 하원뿐이었다. ... 이는 어떤 면에서도 전통적인 의미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음이 명백하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역시 그러한 것을 의도조차 하지 않았다. 미국헌법은 어떤 형태의 참주정도 예방하기 위한 천재적이고 정교한 실험으로, 사회적 건전성이라는 목표와 사회적 부패 방지, 그리고 유산계급의 안전을 결합시킨 저 유서 깊은 ‘혼성체’의 한 변형인 것이다. 정부에 있어서 민중들의 역할은 헌법에 의해 제한되었던바, 이것 하나만으로도 갓 태어난 미국을 민주주의로 부를 수는 없게 되었다. 이러한 미국헌법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갖추게 된 것은 오낸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다. 미국 헌법이 그 시작부터 민주주의 헌법이었으며, 따라서 미국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정부라는 것은 커다란 신화일 뿐이다.”(77-78쪽, 192-193쪽)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게 된 것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 노동자들의 저항 때문이며, 이로 인해 미국헌법도 점차 민주화되었다. 하지만 이는 제한적 의미의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초점을 두어 절차로 정의할 수도 있고, 포괄적인 사회적 평등에 초점을 두어 내용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는 전자의 절차적 의미로서만, 즉 정기적인 자유선거로 뽑힌 인민들의 대표들에 의한 정부라는 의미로서만 규정되고 있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민주주의적 정부란 법의 지배, 견제와 균형을 위한 몇 가지 헌법적 구조, 복수 정당의 경쟁, 그리고 인신·재산·언론·결사·종교의 자유 보장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유민주주의’에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다.”(79쪽)
 
“일반적으로 ‘다수의 지배’, 그리고 인민들이 어떤 형태로든 정부에 직접적인 역할을 맡는 것에 대한 모종의 뿌리 깊은 불신이 여전히 존재한다. 사회적 평등이라는 내용적 차원에서의 민주주의의 문제는 거의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 소득·재산·부의 불평등이 아찔할 정도로 치솟아 오르는 사회, 그래서 성장하고 있는 소수의 손에 점점 더 많은 부가 집중되고 있지만 도무지 개선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으며, 부자들 아니면 선거에 출마할 능력이 없는 그런 사회라면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일터에서의 민주주의 문제에 관심을 두는 이들은 더욱 적다.” (80쪽)
   
“사회적 권력의 분배와 관련된 내용적인 질문들은 완전히 무시된 채 개인의 권리나 자유의 보존과 같은 절차적인 측면에만 거의 전적으로 강조점을 두게 되면서, 민주주의라는 말의 의미는 이제 다수의 지배를 예방하고 억누르는 제도로 변질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100쪽)
  
나아가 민주주의의 내용을 자본주의 및 ‘자유시장’과 연관시켜 아예 똑같은 것으로까지 여기는 경우도 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공통점을 찾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관념화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자유시장은 이제 민주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었고, 아예 동일한 것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 자본주의란 개인 자유의 최대한의 신장이요, 특히 소비자들의 선택의 자유의 확장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자유시장과 정부 개입의 최소화라는 생각은 권위 있는 발언자에게서도 결코 빠지는 법이 없다.
자본주의는 개개인들에게 최대의 자유 - 이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이름붙여졌다 - 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또 다른 특징으로 마구 떠받들어진 법적·사법적 평등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개개인의 능력을 위주로 하는 사회 조직양식이다. ...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는 민주적이며 평등한 무계급 사회이다. 게다가 항상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하고 있어서 영원히 성장하고 진보한다. 진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뚜렷한 표식이다.” (28-29쪽)
  
“하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사실상 상극의 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의 영리 기업들, 그 사무실과 작업장은 본질적으로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장소이며 민주주의적 절차와 내용과는 심히 동떨어져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조직되고 운영되는 자본주의적 기업이란 사실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전형적인 자본주의 기업이라면 조직의 위에서 아래로 명령이 내려오고, 권력 피라미드의 아래층에 있는 이들은 질문이나 이탈 없이 그것을 집행한다. 물론 경영진이 하급자들에게 토론과 제안을 권장하는 일도 있고, 기업의 본질인 권위주의가 ‘팀 활동’이나 ‘팀의 단합정신’ 같은 구호를 끌어들여 사용함으로써 종종 본질을 흐리지만, ‘팀’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야말로 개인의 이해·의견·활동 등을 일하는 집단의 조화와 효율성에 종속시키고 협동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적인 것이다. 마차가 끄는 것이 말 몇 마리이건 팀 정신이 살아 있는 축구팀이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전자에는 채찍을 든 마부, 후자에는 코치와 주장이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적 기업에 ‘팀’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똑같은 공적인 관계를 일컬으면서도 불만을 달래고 기업의 권위적 구조를 슬쩍 감추며 노동력의 단결을 통해 더 충성하고 더 협력하여 생산성을 올리도록 채찍질하는 말장난일 뿐이다.”(81-82쪽)
  
“탐욕과 마찬가지로 한때 심한 질타를 받았던 민주주의가 이익 및 자기 이익이라는 새 옷 속에 숨어 있는 탐욕을 증진시키고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강화하고 추진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완결 짓는 매듭인 양 추가적으로 인정되고 찬양받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의 권위주의적인 관행을 은폐하고 합리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21세기 초의 ‘민주주의’란 이제 구호에 불과한 것으로서, 자본주의 기업과 그 확장의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은폐하고 자본주의 기업이 정부와 정치마저 지배하게 된 것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눈속임으로 전락해버렸다.”(84쪽)
  
“민주주의는 종종 입헌주의와 법치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두 개념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존중되는 것들이지만, 이론적으로나 실제상으로나 민주주의 정부와 아무런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85쪽) “입헌주의가 예로부터 참주정에 대한 안전장치로 여겨져온 것은 타당하나, 민주주의는 입헌주의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입헌주의의 원칙들을 체현하여 참주정의 발호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 아래 둘을 동일한 것으로 놓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100-101쪽)
  
“민주주의가 대충 정당화될 여지가 생긴 것은 민주주의가 이미 아주 결정적인 부분에서 이빨이 뽑혔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의 지배”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게 된 민주주의는 이제 정부에 대해 각종 책략을 부리는 부유한 자본가들의 손에 꽉 잡혀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바뀌고 말았다. ... 민주주의의 절차적 측면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람에 민주주의의 내용에 있어서 결정적인 성격이 뒷전이 되어버렸고 대중들에게나 식자들에게나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가장 중요한 경제적 기능은 자본주의에, 정치적 기능은 그 파트너인 민주주의에 배당하는 식의 기묘한 노동 분업을 통해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부하로 전락해버렸고, 자본주의의 정치적 반영물이 되어버렸다. 민주주의는 점차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다른 모습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사회적 평등, 정치적 평등, 심지어 법 앞에서의 평등(절차로서의 민주주의의 특징이라고 그렇게도 떠들어온)마저 내다버림으로써, 민주주의는 이제 완전히 거세된 것이다.” (85-86쪽)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영양실조와 주택 부족에 시달리며 제대로 된 치료도 받을 수 없는 사회에서 과연 민주주의 작동에 필요한 다양한 활동에 시민들을 참가시키고 또 그들에게 충성심을 불어넣어 민주주의를 번영시키는 일이 가능할까?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문제들이 논의되는 방식을 보면, 오로지 이런 저런 절차들과 제도장치들에 사람들이 따라주는가 아닌가의 관점에서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절차 및 제도장치들이 작동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위와 같은 사회적 조건들이 과연 제대로 갖추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87쪽)
“미국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간격이 갈수록 넓고 깊게 벌어지는 불평등사회가 되어왔다. 민주주의에서 평등이 수평적 혹은 절대적 동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풍족한 자들과 가난한 이들 사이의 격차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은 분명히 ‘1인 1표’와 ‘법의 통치’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원칙 또한 부정하는 것이다. 경제적 권력이 소수의 손에 엄청난 양으로 집중되는 곳에서는 이들의 투표가 덜 부유한 대다수의 표보다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가지며, 또한 부자들에게 적용되는 법과 가난한 자들에게 적용되는 법이 다르게 된다.
평등이란 절차상의 규정들 이외에는 민주주의와 아무 관련도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경제적 의미에서의 평등이란 이제 더러운 말이 되어버렸고, 재빨리 ‘자유’라는 말로 대체되어버린다. 평등이라는 말이 두드러지지 않도록 최대한 밀어넣는 이들은 이 ‘자유’라는 말을 통해 사업과 기업활동에 있어서 정부 개입과 통제를 받지 않을 자유, 재산획득의 자유, 시장의 자유, 소비자 선택의 자유 등을 의미한다.
물론 자유는 민주주의에 있어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자유란 우리와 차이를 가진 모든 사람들을 향해 적극적이고도 정직한 관용을 함축한다. 하지만 이제 자유는 날마다 더 적은 숫자의 부자들이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이들의 숫자는 더 늘어가면서 그 격차가 벌어지는 사회에서는 본질적으로 공허한 개념으로 전락한다.” (179-178쪽)
  
제대로 발전된 체제로서 등장한 지 150년도 되지 않은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탐욕과 이기적 행위에 근거를 두면서 이를 ‘이익’, ‘자기 이익’ 등으로 바꾸어 민주주의라는 포장을 씌워 보편화시키고 제도화시켜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자본주의의 이념적 정당화와 사람들 마음속의 자본주의적 심성이라는 원동력은 예전에 사회적 질병으로 여겨지던 것을 그 정반대의 것으로, 즉 정치 공동체의 자연적 조건이요 사회적 건전성으로 변형시켜놓았다.
실로 역설적인 점은, 현실의 사회적 건전성을 재는 척도가 새롭게 바뀌는 바람에 새로운 형태로 지금 출현하고 있는 참주정이 은폐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발달된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문화라는 참주정으로,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속속들이 파고들어오는 이 새로운 형태의 참주정 앞에 가난한 자, 부유한 자, 약자, 강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88-89쪽)
 
“종래의 참주정과 새로운 참주정의 주요한 차이 중 하나는, 새로운 참주정은 구체적으로 인격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전의 참주정에서는 권력과 권위를 멋대로 휘두르는 자가 누구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업의 소유와 통제가 파편화되고 분산되면서 새로운 참주정의 진정한 건설자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조차 실질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자본주의적 기업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나 그 개인적 성향과 무관하게 경쟁과 이윤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지상명령이라는 비인격적 존재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비판적으로 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기들의 연금과 퇴직금을 고용주들이 쥐고 투자하고 있는 이상 꼼짝없이 자본주의적 질서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이 새 참주정의 놀라운 특징은 전체 체제에 우리 모두가 붙들려서 칭칭 엮여 있다는 점이다.” (105-106쪽)
  
닐 우드는 거세된 민주주의와 괴물이 된 자본주의에 장악된 미국이란 제국은, 긍정적 의미의 ‘외부의 공포’를 갖지 못한 로마제국이 멸망의 길에 들어섰듯이, 더 이상 어떤 경쟁자도 없는 유일의 초강대국이 됨으로써 스스로 종말의 싹을 잉태하게 되었다고 본다. 저자는 원래부터 부와 그에 따른 특권에 기반한 계급사회였지만 점점 더 그 성격이 강해지고 있는 미국의 빈부격차와 범죄율 등의 수치들을 낱낱이 들추며 그 징후들을 읽어내면서, 가장 주목할 것은 무엇보다 미국 정치의, 민주주의의 급격한 쇠퇴 혹은 타락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실업 관련 수치들은 선진 산업국들 중 가장 낮지만, 이는 상당히 진실을 숨기고 있는 수치들이다. 약 1,200만, 즉 전체인구의 5%가 실업 상태이며, 여기에 600만 명 정도가 ‘조건부’ 혹은 일시적인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약 1500만 정도가 수당도 없는 파트타임 직장이나 노동시간 단축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거기에 추가하여 300만 이상이 실업상태이지만, 수당지급 자격 미달이거나 일자리 찾기를 포기했다는 이유로 통계에 잡히고 있지 않다. 그리고 급속히 불어나고 있는 감옥에 있는 200만 이상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하여 실업, 파트타임 직장, 군대, 감옥 등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합칠 경우 전체인구의 10~15%에 달한다.”(118쪽)
  
“미국이 점점 더 부유해지고 제국주의적으로 되고 한줌의 부자들과 다수의 빈곤층으로 양극화된 계급사회로 변해가면서 동시에 시민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은 악화되어 왔다. 인구의 15%인 4000만 명 이상이 1년 내내 충분한 의료보험 없이 살고 있으며, 의료보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무려 700만에 이른다. 반면 형편이 괜찮은 이들과 부자들은 자신과 가족들에게 가지가지 항목을 포함하는 값비싼 건강보험을 사적으로 구입하든가 직장에서 얻든가 한다. 빈곤선보다 나은 생활을 하는 가정에서도 18세 미만의 많은 아이들이 의료보험이 없는 상태다. 그리고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는 고용주들이 피고용자들의 부양가족에 대한 의료혜택을 삭감하거나 없애버리기 때문이다.”(124쪽)
  
닐 우드가 지적하는 미국사회의 소비주의는 우리에게도 낯설지가 않다.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본질 자체가 이제 구매충동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이는 어떤 소매 유통업체의 구호에 잘 드러나 있다.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는 데카르트가 옛날에 주장한 것처럼 우리의 합리성을 빌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생각도 정신도 없이 그 저 영원히 계속되는 구매와 돈쓰기의 광란에 온몸을 던지도록 프로그램된 행위 메커니즘으로 전락한 덕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인 것이다. 신문·잡지·TV·전화·광고전단과 우편물·인터넷 등이 힘을 합쳐 우리 일상을 거대한 시장판으로 만들어버린다.”
“상품은 사고 나면 금방 낡은 것이 되며, 옷에서 자동차와 컴퓨터에 이르는 유행의 변화는 최신 상품을 더 많이 더 많이 사고자 하는 욕망에 불을 지른다. TV나 라디오를 끈다고 해도 사방에 넘쳐나는 광고로부터 피하거나 숨 돌리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버스와 택시, 심지어 경찰차조차 꿈에 나올까 두려운 유치찬란한 색깔의 광고로 도배가 된 채 굴러다닌다. 정부의 지원 삭감으로 재정난에 몰린 대학들 중에는 기업 후원자를 찾아서 실험실은 물론 화장실, 강의동에까지 그 후원자의 이름을 그대로 붙이는 일도 종종 있다.”(141-142쪽) 
  
소비주의에 비판에 더하여 삶의 속도에 대한 지적은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게다가 추석 연휴에 푹 쉬면서 재충전의 기회로 삼기보다는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을 처리할 기회로 여기면서 계속해서 일과 공부만을 생각하는, 지금의 나에 대한 따끔한 목소리이다. 지금 나는 메신저를 꺼놓았고, 연휴 때는 휴대폰도 꺼놓을 생각이다. 물론 괴로워도 슬퍼도 잘 울지 않는 캔디폰이기는 하지만...
   
“갈수록 가속도를 더하면서 거의 발광에 가까운 문화를 낳고 있는 미친 듯한 삶의 속도도 미국 생활의 특징이다. 만사를 잊고 떠나 쉬는 일은 아예 불가능하며, 심지어 잠시 일에서 풀려나 숨 돌리는 일조차 갈수록 힘들게 되었다. 노동은 갈수록 빨라지고 힘들어지고 있다. 휴식과 안정은 이제 사라질 위험에 처했다. 컴퓨터와 핸드폰으로 업무가 계속되면서 우리는 사무실을 떠나 집에 있는 시간도 계속 침탈당하고 있다.
이 새로운 ‘상호연결성’(interconnectedness)은 우리의 안식과 사생활을 파괴하고 있으며, 만사를 잊고 쉴 기회도 빼앗아가 버렸다. 각종 업무와 사회생활에 필수품이 되어버린 핸드폰 덕분에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항상 연결 상태에 있게 된다. 컴퓨터의 사용도 언제 어디에서든 긴장을 풀 수 없게 한다. 가뜩이나 쥐들의 경주처럼 되어버린 미친 듯한 속도의 삶을 더 악화시킨다.
친구와 동료들에게 편지를 쓸 때 먼저 충분히 생각을 정리하여 조심스럽게 초고를 잡는 것에서 시작하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아침부터 밤까지 이메일로 융단폭격을 하며 살고 있으며,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내는 그런 메일들은 거의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옮겨 놓는 수준이다.”(143-144쪽)
 
“미국인들의 차에 대한 애착, 그리고 대부분의 장소에 차를 몰고 가야 한다는 필요 등으로 인해 우리의 문화는 무수한 면에서 구조가 바뀌게 되었다. 차에 대한 이러한 병적인 집착은 미국 사회의 다른 특징들은 계급 분열, 폭력, 소비주의, 미친 듯한 삶의 속도 등을 떠받치고 또 부추기는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한 기둥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차량 밀도가 치솟으면서 기차 등의 다른 대중교통 수단은 재정지원도 줄고 심히 쇠퇴했다. 풍족하거나 안락한 수준의 생활을 하는 자들은 집단으로 도심을 탈출하여 교외로 나갔으며, 이로 인해 미국 도시의 구조에도 심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도시 주변의 시골은 넓은 고속도로와 입체 교차로 등으로 경관이 망가졌다. 커다란 쇼핑센터가 고속도로 주변에 도처에서 솟아올라 교외 거주자들의 소비욕을 충족시키며, 거대한 주차장이 그 열성적인 구매자들을 수용한다.
이 자동차 광증(car mania)”은 물리적·인공적 환경을 바꾸어놓고 사회생활을 변형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공해와 관련 질병, 범죄와 폭력, “신나게 차를 모는” 십대들, 숱한 교통사고와 사망자를 낳는 해로운 현상이다.”(144-146쪽)
 
“미국인들은 점점 쇼핑과 은행 업무, 이메일과 온갖 종류의 정보를 인터넷에 의존하고 있다. ... 분명해진 것은 인터넷을 통한 교육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일수록 단순한 정보의 취득을 사유와 사색, 비판적 판단 등과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것들은 다른 학생들과 교사들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 관계를 쌓으면서 계발하고 배양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새로운 기술혁명으로 경제적 지구화가 크게 강화되기는 하겠지만, 노동시간 증가, 노동자들의 스트레스와 긴장의 증가에 수반되는 심각한 문제들도 있다. 어느 곳에서 날아든 메시지를 언제 사용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대단한 골치 아픈 문제가 되어 노동자들의 인내력과 기술을 심하게 갉아먹고 있다.”(151-152쪽)
 
미국정치의 공허함에 대한 닐 우드의 지적도 또한 미국화되어가는 한국의 정치에 시사점이 있다.
 
“최근의 연방선거에서 투표율이 이토록 저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시민들은 종종 부정직과 부패로 지탄을 받아도 그저 “임기응변의 능구렁이들”처럼 빠져나갈 뿐인 정치가들과 정치 자체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 또한 닮은꼴인 두 개의 정당을 놓고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유권자들은 과연 그 사이에서 뚜렷한 정책의 차별을 볼 수 있는가? 여기에서 무슨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선거는 그래서 보통 출마자들의 인간성 경연대회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182쪽)
  
“미국정치는 지난 몇 년간 국가적으로 심히 중대한 정치문제들에 대해서도 진지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충분한 자료와 정보에 기반을 둔 토론과 신속한 결단이 시급히 요청되는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의 근본 문제들은 무수히 많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정치가들은 핵심적인 문제들을 따지고 또 응수하는 그들의 책임을 저버리고, 대신 주변적인 문제들에 몰두하고 있다. 낙태, 안락사, 총기관련법, 군대 내 동성애자 등의 문제들은 물론 중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충분한 일반 의료보험 프로그램, 사회안전망과 주택의 확충, 빈곤 퇴치, 빈부의 격차 해소, 선거공영제, 인종 차별, 인권, 사형, NATO의 확장 등의 핵심적인 문제들과 과연 비교할 수 있는 것인가? 투표자들은 정치가들이 이 가장 중대한 문제들을 받아안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더 이상 이들에게 표를 던지는 수고 따위는 하지 않는다.” (186-187쪽)
   
“미국정치가 공허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시민들 생활의 많은 부분이 정치의 범위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경제’가 더욱 중요하며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그 모든 인간활동과 모든 사회관계는 경제의 ‘법칙들’에 종속되어 있으며, 주택에서 연금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많은 사회적 기능들이 시장의 지배에 내맡겨지고 있다.
또한 자본가들에게 엄청난 이윤의 원천이 되도록 용의주도하게 부양되고 발달되어온 미국의 대중문화 생활에도 그 원인이 있다. ... 정치나 정치문제들로 대중들을 일어나게 하고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나약하고 비겁한 대다수 현재 정치가들의 성격으로 인해 정치는 흥미도 없고 반복적이며 지루한, 결코 오락적이지 않은 것으로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정치 이슈들을 정말로 세밀하게 검토하고 열렬히 논쟁하는 이들이 워싱턴 중앙정부가 아닌 주 정부와 지방정부 수준의 좀더 좁은 범위의 대중들이라는 점, 교육·환경·교통 등과 같은 문제들에 진정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이들의 위원회 같은 곳이라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188-190쪽)
  
“미국 정치의 암담한 상태를 잘 보여주는 것은 기독교 우파가 전국적 차원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 빌리 그래험에 따르면, 미국은 이제 전 지구의 강대국이 되었는지라 악마의 주요 타깃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미국이 처한 여러 골치 아픈 문제들의 원인은 ‘악마’라는 것이다. 이 악마의 공격을 물리치고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모두 함께 종교로 돌아와서 기독교적 신념과 가치를 강화하여 우리 스스로를 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이러한 기독교 우파의 극단적인 보수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는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악마들이(주로 진보주의로 변장하여 나타나는데 최근 심각한 위협이 되도록 창궐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미국적인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 공격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악마들과 맞아 싸우기 위해 이들은 미국 남부와 로스앤젤레스, 미국 북서부에 걸친 도시 교외지역 등에서 공화당 조직에 확실하게 침투했다.” (194-195쪽)
  
홍기빈의 역자 후기 「‘미국적 가치’에 대하여」에 이러한 내용들이 나름대로 정리가 되어 있다. 역자는 미국화가 진행되어 일상의 안팎으로 속속들이 미국적 가치와 섞여들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을 비판’하는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는다. “우리 존재에 대한 성찰, 그리고 그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린 ‘우리 속의 미국’을 반성하지 않은 채 마이클 무어와 에미넴의 입심과 재치에 갈채하고 그저 부시와 네오콘에 대한 저주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행위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닐 우드가 취하고 있는 방법에는 미국적 가치에 대한 서양 정신사 전통으로부터의 내재적 비판,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어떠한 결과를 낳았고 그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띄게 되는가에 대한 고찰, 그리고 문명 쇠퇴론의 문제의식이 들어 있다. 닐 우드는 미국 사회 모순의 뿌리로서 자본주의를 지목하는 그의 관점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있으며, 자본주의에 점령당한 미국문명이 급격한 쇠망의 길로 접어들 것임을 암시한다. 물론 여기서 ‘자본주의 미국 쇠망’의 메커니즘은 ‘정치적 맑스주의’의 특징을 반영하여 ‘시민 도덕(civic virtue)의 쇠퇴’라는 관점에서 접근되고 있다. 홍기빈은 단지 자본 축적이나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주제에 갇히지 않고,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퇴락이라는 도덕적 관점에서 미국적 가치와 그 퇴락을 비판하고 반성할 수 있는 보다 폭넓은 윤리적 정신적 관점을 담아내고 있다고 파악한다.
 
여기에서 ‘살루스트의 정리’ 즉 “외부의 적에 대한 공포가 국가 내부의 통합을 증대시킨다”는 원리는 살루스트가 당대의 사회적 불화와 도덕적 타락을 설명할 원인을 찾기 위해 로마의 과거를 연구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홍기빈은 9·11 이후 미국의 지배계급이 이를 변질시켰다고 파악한다.
원래 살루스트가 관심을 두었던 것은 로마 공화정 말기에 만연했던 정신적 타락을 막고 고상한 시민도덕을 소생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외적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면서 이를 사람들 속에 잠들어 있는 고상한 감정과 공동체정신을 소생시킬 원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였으며, 이를 통해 도덕적 타락과 공화국의 쇠망을 예방하거나 최소한 그 속도를 늦추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지배계급은 그 정반대로 사람들의 정신적·도덕적 감각을 더욱 저열하게 마비시켜서 지배 체제를 위해 편리하게 조작 동원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살루스트의 정리를 그대로 따르기는 하되, 미국 전통 가운데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가치들을, 그것도 가장 단순 무지하고 사람들의 저열한 증오심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소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닐 우드는 마지막에 자본주의라는 참주정이 지배하는 미국에 대한 대안을 개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좋은 얘기들의 집합체이다. 문제는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가 그러한 대안의 가능성을 향하는 길을 따라갈 의사와 능력이 있는가인데, 닐 우드는 변혁을 향한 의지만 있다면 그러한 목표들을 달성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고도의 자기희생, 단호하고도 끈기 있는 단결행동, 엄청난 양의 땀방울 등이 요구되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개략적으로 그려낸 사회적 목표라는 것들은 인간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사회주의의 목표들이다. 인간들이 현재의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에 가득 찬 재산과 권력 확장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자본주의의 참주정을 그러한 사회주의로 대체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굳게 확립될 수 있을 것이다.”(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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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3 16:20 2006/10/03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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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계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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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지라고 세우는 것 같다.

 

이걸 알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왜 그랬는지...

 

그렇다고 조금 느슨하게 계획을 세우는 것은 양에 안차고...

  

다른 얘들은 프로포절을 위해 추석을 반납하고 설에 남아 머리를 쥐어 짠다는데,

나는 상대적으로 일찍 고향에 내려가기로 한데다가, 마무리할 다른 일들도 놓여 있다.

 

그냥 괜시리 짜증 난다.

 

누구한테, 아니 어디에 분풀이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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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3 13:21 2006/10/03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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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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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이웃인 전교조 샘 한 분에게 한가위를 맞아 안부게시판에 글을 쓰다 보니 길어지더군요. 나름대로 공유할 부분도 있을 듯하여 여기에 조금 더 보완하여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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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은 연구실에 있는 한 연구원하고 교원평가 및 전교조에 대해 토론을 했어요. 처음에 교육부에서 추석을 앞두고 2차 성과급이 교사들에게 지급되었는데, 지난 번 1차 때는 방학 막 들어가려고 하면서 지급하더니 이번에는 추석 때라고 하며 참 기만적이라고 얘기를 꺼냈다가, 교원평가 얘기가 나오게 된 거죠. 그 친구는 환경교육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교생실습도 했으며, 지금은 생계를 위해 학원에도 나가고 있는 연구원이예요. 저랑은 의견이 비슷한 부분이 많으면서도 약간 상이한 점이 있는데, 이상하게 나름대로 유연하다고 생각했던 제가 더 원칙적으로 여겨지게 되더라구요. 환경문제도 그렇고, 교육에 있어서도 그렇고요. 아마 제가 민주노동당과 관련이 있어서 나름의 좌파적인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랬겠지요. 사실은 그렇지도 않은데... 
    
오늘 논쟁꺼리는 교사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그는 전교조마저도 어떻게 교사들이 공부하도록 할 것인가에 대해 아무런 대안이 없고, 교원평가도 그런 차원에서 의미있다는 주장을 하더군요. 인성교육도 중요하지만, 지식전달도 중요한데, 교사들이 거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문제라는 것과 함께, 교육수요자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에 대해 저는 교원평가를 통해 지식전달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영국, 미국, 일본의 예를 보더라도 오히려 교원평가가 공교육의 질을 떨어뜨렸고, 일본에서는 부적격교원의 명목하에 기미가요 등의 제창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교원들을 쫓아내는 쪽으로 악용되었다는 점, 교원평가는 지금까지의 공교육 부실의 책임을 교사에게 전가하려는 교육부의 논리라는 것, 교육을 시장논리로 봐서는 안되며, 그런 점에서 교육수요자/공급자로 나누어 보는 것은 문제가 있고, 교사 또한 교육주체라는 점을 얘기했지요. 실질적으로 학부모, 학생들이 교육주체로 나서는 실질적인 학교자치가 이루어져야 하고, 지식전달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공교육이 정상화되지 않으며, 그렇게 지식만 쌓인 애들이 커서 무엇이 될 것이냐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고 했어요.  

   

이에 대해 그 친구는 그렇게 제도적인 측면만 말할 것이 아니라 실제 교사로서 자격이 없는 분들이 많고, 전교조를 빼놓고라도 80% 정도의 교사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라는 반박을 하더군요. 교사들은 수업 외에 업무의 과중을 핑계로 대지만, 사실 그게 노동자들의 잔업만큼 많은지 의문이고, 수업도 많아야 하루에 3시간 정도 밖에 안되는데, 교무실에 가보면 그 많은 선생님들 중에 공부하는 분들을 거의 못봤다는 거예요. 그리고 얼마전 전교조 분에게 교사들이 공부하도록 하는 방안에 대해 물었을 때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다는 답변을 들었다는 말도 하고요. 또한 과거에는 대학을 나온 교사들이 그보다 학력이 낮은 학부모들보다 더 많은 지식이 있다고 인정되어 별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학부모들의 학력이 훨씬 더 높은 경우도 있고, 영어 교과 같은 경우에는 학생들이 교사보다 더 발음이 좋고 영어를 잘하는 경우도 있는데, 교사들은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구태의연함에 머물러 있다고 했어요.

    

나아가 교사가 과연 노동자인가의 여부에 대해서도 의문시하고, 2달여의 방학 중에 교사들은 대부분 해외여행 등으로 놀러만 다닐 뿐 충전을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데, 이에 대해 과연 보수를 줄 필요가 있는지, 전교조가 주5일제를 주장하면서도 교과과정 개편에 대해서는 서로간에 자기과목을 줄이려 하지 않는 모순 때문에 말을 꺼내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말도 하더군요. 

    

저는 전교조 내에도 교사에 중점을 두는 입장과 교육노동자에 초점을 두는 입장이 존재하는 등 노선상의 차이가 있고, 보수나 업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교사 또한 노동자로 보는 게 맞다고 했어요. 연봉이 1억일지라도 자신의 노동을 팔아 생활을 한다면 노동자이며, 최저생활비 이하로 받더라도 자영업자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교사는 일종의 귀족노동자네요 라고 얘기하더군요. 이에 사실 교사들도 이중적이다, 이를테면 경제자유구역이 설치된다고 할 때 특히 여교사들은 정보인권문제나 교원평가 문제 등에 비해 그리 열의를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교사로서보다는 학부모로서 교육개방이 되면 자신의 아이도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교육노동자들의 이중성에 대해서 잘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지요.

    

그리고 해외여행에 대해서도 이 또한 나름의 충전이 아닌가, 즉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가 아니라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임금이 주어지는 것이고, 이는 노동을 하는지 여부와는 무관한 것이다, 당신의 논리대로 하면 일별로 짤라서 보수를 주는 성과급을 가정할 경우 일을 하지 않고 쉬는 토,일요일에는 임금을 주지 않는 게 타당하냐, 교수들의 경우에도 하계/동계 휴가기간 중에 보수를 주면 안되겠네요 하는 식으로 반박을 했는데, 조금 궁색했어요.

    

또한 학부모 학력의 상승에 따라 교사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 면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초등학교에 지역학운위원으로 참석해보니 학부모들의 학력은 높을지몰라도 교육에 대한 마인드는 여전히 후진적이고 자신의 자식만을 생각하는 편협함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던데, 이를 교육수요자의 요구라고 하여 그냥 수용하는 게 타당하냐고 반박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식전달 수준이 사교육에 비해 떨어지는 면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더군요. 결정적으로 교과과정 개편에 대해서는 제가 사정을 잘 모르니 뭐라고 말을 못하겠다고 했어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주5일 근무제에 맞게 전교조 차원에서 합리적으로 교과과정 개편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토론이 끝났는데, 저 또한 전교조가 많은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지만, 토론과정에서는 그렇게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하겠더라구요. 전교조를 옹호하는 쪽에 가서는 그 문제점을 떠들고, 비판하는 쪽에 가서는 이를 옹호하고... 내가 박쥐는 아닌지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면서 전교조가 좀더 잘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들구요.

    

요새는 젊은 교사들에게는 전교조가 인기가 없고 가입도 잘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참 씁쓸했습니다. 아직 전교조가 할 일이 많은데, 왜 지킬 것이 많은 '보수세력'으로 간주되는지...

   

나름대로 제 의견을 얘기하긴 했지만, 제가 교육에 대해 참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떠들다보니 길어졌네요. 전교조가 좀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교육개혁에 대해 고민을 했으면 해요.

   

한가위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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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2 20:25 2006/10/0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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