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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어떻게 손봐야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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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글을 쓰는 건 대략 알겠는데, 전체적인 스킨을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관리자와 글쓰기 아래에 뭔가를 쓰든지, 아니면 그림이나 사진을 넣어서 공백을 메우고 싶은데,

스킨을 잘 못다루겠으니 이걸 어쩐다.

수정을 하고는 싶은데, 마음대로 안된다. 태그를 써서 해야 하는 것도 이제는 html을 다 잊어버려서 어떻게 할 줄 모르겠고...

걍 이대로 쓸란다.

디자인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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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8 09:45 2010/08/2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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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달,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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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평등에 관하여〉 로버트 달 지음·김순영 옮김/후마니타스·1만원/156쪽

이 책도 읽어보기는 해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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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평해!’ 분노의 외침이 공정사회 만든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 2010-08-27 오후 08:37:34)
평생 민주주의 연구한 노학자의 진단
‘소비 문화’가 후퇴시킨 정치적 평등
대중의 열정과 에너지로 되찾아야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 로버트 달 지음·김순영 옮김/후마니타스·1만원/156쪽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는 정치학자 로버트 달(예일대 명예교수)의 2006년 저작이다. 1915년에 태어났으니 91살에 쓴 책이다. 이 얄팍한 저작에는 평생 민주주의 연구에 분투해온 노학자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과 걱정과 비전이 응축돼 있다. 달이 이 책을 쓴 2006년은 조지 부시 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었다. 테러리즘과 전쟁을 벌인다며 미국 민주주의의 숨통을 틀어막던 암울한 시기였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후퇴하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인가? 아니면 다시 힘을 얻어 전진할 것인가? 연로한 학자는 이 책에서 자꾸 어두워지는 마음을 달래며 평생 공부한 민주주의 역사를 등불로 삼아 낙관으로 난 길을 찾아나간다
 
책의 제목이 알려주는 대로 지은이가 여기서 직접 탐구하는 주제는 ‘정치적 평등’이다. 민주주의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정치적 이상이라면, ‘정치적 평등’은 그 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적 전제조건이다. 정치적 평등은 민주주의라는 다소 추상적인 가치의 실현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수단이자, 민주주의가 얼마나 실현됐는지 그 정도를 재는 척도인 셈이다.
 
달은 지난 2세기 동안 민주주의와 정치적 평등이 놀라울 정도로 전진했음을 먼저 이야기한다. 1776년 7월 열린 제2차 대륙회의에서 채택한 미국 독립선언서는 이런 구절을 품고 있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곧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그러나 이 독립선언서를 채택하는 데 찬성했던 55명의 대표자는 모두 남성이었다. “여성은 그 시대의 법률상 아버지나 남편의 소유물이었을 뿐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도, 아프리카계 미국인도 처지는 다르지 않았다. 지난 200년 사이에 이들은 모두 백인 남성과 동등한 시민권을 얻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치적 평등을 진전시키는 동력 구실을 하는 것일까. 이것이 달이 이 책에서 던지는 가장 흥미로운 질문이다. 달의 질문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다. “실제로 정치적 평등을 확대하도록 특권계급과 하층계급을 밀고 가는 힘은 무엇인가? 왜 하층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상위의 특권층과 정치적으로 동등한 자로 대우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달이 이렇게 질문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다소 폭력적으로 요약하면 ‘이성이냐 감정이냐’ 하는 이분법에 가까워진다. 그는 “가장 탁월한 철학자들 가운데 일부”가 “이성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고 본다. 단적으로 그는 이마누엘 칸트를 지목한다.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에서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의무의 기반은 인간의 본성도, 그가 서 있는 세계의 환경도 아닌, 오로지 순수이성이라는 개념의 선험성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정말 ‘순수이성’이 정치적 변화를 일으키는 진정한 힘인가? 달은 여기서 칸트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거로 데이비드 흄의 주장을 제시한다. 흄은 <인간본성론>에서 말한다. “이성이란 열정의 노예이며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성은 열정에 봉사하고 그것에 복종하는 것을 넘어서서 결코 어떤 다른 역할을 자처할 수 없다.” 흄만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 정치철학자인 마이클 월저도 같은 말을 한다. 달은 월저가 <정치와 열정>에서 한 말을 인용한다. “평등이나 민족의 독립, 그리고 해방과 권리 인정을 위한 어떤 운동도 위계 구조의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투쟁적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한,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월저는 그 열정에 시기·분개·분노가 포함된다고 말한다.
 
달은 칸트가 아니라 흄과 월저의 편에 선다. 그렇다고 해서 달이 이성의 구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은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 … 분명히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달의 강조점은 이성의 앞면이 아니라 뒷면에 찍혀 있다. 그는 정의나 공정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것은 ‘순수이성’이 아니라, “동정심이나, 시기, 분노, 증오와 같은 정서 내지 감정”이라고 단언한다.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열정, 다시 말해 “이건 불공평해!”라고 외치게 만드는 절박한 느낌이 정치적 평등과 같은 도덕적 목표를 추구하도록 밀어붙이는 힘이라는 것이다.
 
달은 이어지는 장에서 정치적 불평등이 미국에서 점점 더 커지는 양상을 추적하면서, 그 근본적 원인을 ‘소비문화의 지배’에서 찾는다. 소비문화의 범람이 정치적 참여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문화적 흐름 위에서 조지 부시 정권의 일탈이 가능했다고 달은 생각한다. 9·11테러 이후 미국의 권력은 시민과 그 대리자인 의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대통령과 행정부에 과도하게 집중됐고, 이런 정치적 불평등의 확대는 미국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민주주의와 정치적 평등을 복구하고 전진시키려면 미국 시민들이 ‘소비주의 문화’의 자장을 이겨내고 ‘시민권 문화’를 되찾아야 한다. 달은 “그동안 미국인들이 잊고 살았던 것”이 있다며 “정치적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정책을 확실하게 채택하도록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한층 더 강력한 대중운동을 복원하는 일”이 그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런 대중운동을 어떻게 하면 일으킬 수 있을까? 여기서 바로 답하지는 않지만, 대중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잠복해 있는 감정, 곧 분노와 열정을 끄집어내는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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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불평등, 해소될 수 있을까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2010/08/27 06:26)
 
일생을 민주주의 연구에 매진한 로버트 달 미국 예일대 정치학과 명예교수는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후마니타스 펴냄)라는 비교적 짧은 분량의 책을 통해 앞으로 정치적 평등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예상한다. '민주주의'를 도달할 수 없는 이상(理想)으로 보고, 실재하는 현대 민주주의를 다두제(polyarchy)로 지칭하는 달 교수는 90세를 넘겨 쓴 이 책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인 정치적 평등을 가로막는 장애물들로 ▲정치적 자원, 기술, 그리고 불평등한 분배 ▲시간의 한계 ▲정치체제의 규모 ▲시장경제의 확산 ▲중요하지만 민주적이지 않은 국제 체제의 존재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심각한 위기 등을 들었다.
 
가령 정치체제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시민이 대표에게 결정을 위임할 필요성이 커지고 대표가 위임받는 권한의 양도 따라서 커지기 때문에 정치적 평등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시장경제 역시 시민들 사이에서 '자원을 둘러싼 엄청난 불평등'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정치적 평등을 위협할 수 있는 장애물로 언급됐다. 이어 저자는 최근 미국의 사례를 들어 정치적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내용과 약화된다는 내용의 두 시나리오를 내놨다.
 
테러 이후 권력이 대표에게 집중되고 있으며 소득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 첫번째 시나리오의 근거이며, 경쟁적 소비주의의 허무함을 미국인들이 깨닫고 적극적 참여가 바탕이 된 시민권 문화가 발달할 것이라는 기대가 두번째 시나리오의 바탕이다. 책은 미국에서 2006년에 발간돼 "로버트 달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등의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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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史·哲의 향기]정치적 평등은 과연 실현 가능한가 (동아, 이새샘 기자, 2010-08-28 03:00)
 
출간 당시 91세였던 저자는 이후 집필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를 평생의 연구 주제로 삼아온 노학자는 이 책을 통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정치적 평등이 과연 실현 가능한지를 묻고 있다. 대상으로 미국사회를 상정하고 있지만 한국사회에 적용하더라도 어색함이 없다.
 
저자는 우선 “모든 인간은 평등한 본질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본질적 평등’을 전제한다. 효과적 참여, 투표의 평등, 계몽적 이해의 획득, 의제에 대한 최종적 통제 등은 이상적 민주주의, 즉 정치적 평등이 보장되는 정치제도의 조건이다.
 
그러나 정치적 평등이 이성적으로 합당한 목표라는 점 그 자체가 인간 행동을 추동할 수 있을까. 저자는 순수이성만을 인간 행동의 유일한 추동력으로 파악한 칸트를 비판하며 “이성이란 열정의 노예”라고 말했던 흄의 논의를 받아들인다. 지난 수백 년간 사람들이 정치적 평등을 위해 투쟁하도록 만든 힘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 예로 ‘불평등 혐오’를 들 수 있다. 시기심이나 질투심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감정은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 비교해 자기 자신에 대한 보상이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데 대해 본능적으로 민감하게 느끼는 것을 뜻한다. 이 외에도 감정이입과 공감, 그리고 두려움이나 개인적 야심도 복합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수백 년간 지속적으로 증진돼 온 정치적 평등은, 다음 세기에도 그 성취를 계속 확대할 수 있을 것인가. 두 가지 결론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정치적 평등이 축소될 것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저자는 정치적 평등이 진작될 것이라는 희망 역시 버리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시장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동시에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 인간의 감정을 충족시키는 자본주의가 행복이나 복지를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다. 만약 이 같은 전환이 더욱 광범위하게 일어난다면 소비주의 대신 정치적 평등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시민권의 문화’가 우위에 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두 가지 전망을 제시한 채 어느 쪽으로도 명확히 결론짓지 않는다. 이 책은 다음 문장으로 끝난다. “아직은 아니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경쟁적 소비주의 문화에 내재한 공허함을 자각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권의 문화가 가져오는 보상과 도전 의식의 가치를 깨닫게 될 때, 그들은 미국을 저 멀리 잘 잡히지 않는 목표에 훨씬 더 근접할 수 있도록 만들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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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8 07:32 2010/08/28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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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불로그가 바뀌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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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잘 적응이 안된다.

내가 이미 기한을 넘긴 발표원고를 쓰고 있기에 시간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관리화면에서 보니 이미 티스토리 등에서 눈에 익었던 메뉴들인데,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으니, 이건 분명 여유의 부족 때문임에 틀림 없다.

 

쓸데없이 글을 길게 쓰는 퍼오는 나의 경우 더보기가 중요한데,

더보기는 어떻게 하나?

 

더보기는 이글루스와 비슷한 것 같다. 아닌가?

이거 이글루슨가 티스토리인가 더보기 사용하다가 글을 몇번 날려먹은 적이 있는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음악이나 그림파일 올리기는 어떻게 하나?

오, 위메뉴가 아니라 아래에 업로드 메뉴가 있구나. 

그림파일의 용량은 무제한인가. 일단 나와 관계가 있는 메털의 비밀에 관한 그림파일을 올려보자.

  

그렇다면 MP3파일은 어떻게 하지?

 

 --> 맨 아래에 처리한다.

 

뭘 올렸더니 엑박이 나오는데...

제대로 된 건지 모르겠다.

 

→ 제대로 나온다. 깨끗하게...

 

이제는 문서파일도 링크될 수 있는 것 같다.

문서파일로는 뭘 올려볼까나.

 

 

아무 내용이 없는 것으로 올렸는데, 이 또한 엑박이다. 문제가 뭐지?

글을 다 쓰면 제대로 나오려나.

이 파일의 용량은 또 어떻게 되나.

 

→ 역시 엑박이다. 문서파일은 아직은 올리지 못하는 건가. 업로드가능하다는 표시만 있어도 될텐데... 

 

이 정도로 중단하자.

 

참, 로그인 사용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네. 예전과 같이 한참 글을 쓰다가 날려먹은 기억이 있어서리...

 

아마 덩야님을 비롯한 진보넷 식구들이 수고를 했으니 이전보다는 나을 터, 조금 더 차분하게 살펴보고 이에 적응하련다.

일단 블로그 바뀐 것에 대한 감상은 여기까지...

 

→ 추가 하나 더. 과거의 글들이 모두 공개, 즉 발행으로 되어 있다. 메인에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했던 것까지 말이다. 이건 디폴트값의 문제일까.

다시 보니 메인에 노출시킨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이 구분되어 있다. 그러면 그렇지.

 

→ 다시 하나 더 '수정하기'를 누르면 저장되었다는 말만 나오고 관리화면 그대로 이다. 이건 또 무슨 문제? 그리고 더보기를 했다가 돌아가는 기능도 빠져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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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5 16:21 2010/08/2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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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평범한 사람들』(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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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저자인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이나 지그문트 바우만이 하는 주장과 비슷한 얘기를 하워드 진도 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슈테판 마르크스의 『나치즘, 열광과 도취의 심리학』(2009, 책세상)과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듯하다. 슈테판 마르크스는 브라우닝처럼 당시 독일인들이 처했던 상황과 행태를 일반화하지는 않는 듯하다. 물론 유사한 상황은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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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특수 상황선 누구라도 ‘악마’가 될 수 있다 (경향, 김재중 기자, 2010-08-20-21:31:10)
아주 평범한 사람들 |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 | 책과함께
  
연쇄살인범이 잡히면 그의 행위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그가 광기에 사로잡힌 악마라는 것인데 대다수 보통 사람의 감정적 반응이 이것이다. 이에 반해 그가 악행을 저지르게 된 상황적 요인이 있을 것이란 입장이 맞선다. 악행을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로 악행의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개인적 또는 집단적 행동, 특히 악행의 주요 원인은 증오심, 기질과 같은 심리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가 처한 특수한 상황 또는 사회적 구조인가라는 질문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어찌보면 전자의 입장이 훨씬 속 편할지 모른다. 그저 나하곤 전혀 별개의 나쁜 놈, 악마로 규정하면 끝이니까. 그러나 이런 해석은 반복되는 인류의 잔혹한 행동들,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학계의 논의도 크게 보면 비슷한 구조다.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사람들은 원래부터 극도로 유대인을 증오했거나 잔악한 사람들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위에서 시켰기 때문에, 즉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살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미국의 홀로코스트 전문 역사가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1992년 처음 발표한 <아주 평범한 사람들>(원제 Ordinary Men)은 이런 질문을 물고 늘어져 강력한 가설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제목에 등장한 ‘평범’이라는 단어는 의미심장하다.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수백만명을 죽게 만든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책에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을 주창했듯, 사악함이나 세뇌효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 등 심리적 요인이 잔혹한 행위의 결정적 원인은 아니었다는 결론을 암시한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은 학살 책임자나 피해자보다는 학살을 직접 수행한 말단의 당사자를 집중 추적한 연구서로 최초이기도 하다. 이 책이 나온 뒤 요나 골드하겐이라는 학자가 같은 자료로 브라우닝과 정반대의 결론, 즉 심리적 요인이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한 책을 출간하면서 꽤 유명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브라우닝은 개정판(98년) 후기에서 골드하겐의 공격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어 양자 사이의 논쟁의 뼈대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브라우닝이 발견한 ‘아주 평범한 학살 집행자들’은 나치 독일 당시의 ‘101예비경찰대대’. 101예비경찰대대는 1942~43년 폴란드에 투입돼 유대인 3만8000여명을 학살하고, 4만4200여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강제 이송했다. 명실상부한 ‘죽음의 부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독일의 중년 남성 500여명으로 구성된 101예비경찰대대 구성원은 대부분 열렬한 히틀러 지지자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반(反)나치 성향이 강한 함부르크 지역 출신이었다. 철저한 훈련과 이념교육을 받은 정예부대는커녕 대부분 군 복무 경험조차 없었다. 말 그대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브라우닝은 함부르크 검찰이 1960년대에 전직 101예비경찰대대원 125명을 취조한 기록을 분석,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학살 전문가’가 돼 갔는지 규명했다. 1942년 7월 처음으로 유대인 학살 작전에 나서기 직전 101예비경찰대대의 지휘관은 임무를 설명하면서 감당할 자신이 없는 사람은 빠져도 좋다고 말한다. 500여명 가운데 12~13명이 나왔다. 나머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유대인 1500여명의 머리통을 총탄으로 차례차례 날려버리는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물론 소극적으로 임하거나, 몇명 죽이고 나서는 빠져나온 부대원도 생겼다. 20% 정도가 열외를 택한 것으로 추정됐다. 놀랍지 않은가. 10명 가운데 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거니와 범죄자도, 적군도 아닌 민간인을 시체더미로 만드는 데 나선 것이다. 학살 작업을 거부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물론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 부대원들도 첫날의 경험을 한 뒤 극심한 스트레스와 역겨움을 호소했다. 부대로 돌아와 독한 술에 만취했고,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브라우닝은 말한다. “얼마 후 그들이 다시 사살 임무 앞에 서게 됐을 때 그들은 결코 ‘미쳐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점차 효과적이고 무감각한 학살 집행자로 변해갔다.” 대부분은 학살을 무덤덤한 일상으로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학살을 즐기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브라우닝이 발견한 요소는 ‘동조(同調)’와 ‘권위에 대한 복종’이었다. 대원들은 동료나 상관에게 ‘사나이답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체면을 중시했고, ‘최고위층의 명령’이라는 권위에 복종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임무에 대해 충격과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대부분 학살을 계속했다.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 공개적으로 비동조 행위를 보이는 것은 그들 대부분의 능력 밖에 있었다. 차라리 총을 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쉬웠다.”
 
브라우닝은 “학살을 저지른 그들은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나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의해 결코 사면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우리가 ‘이해’했을 때 상당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브라우닝의 결론은 평범한 사람도-나를 포함해서-특수한 상황에 처하면 언제든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브라우닝도 “잔혹성은 개인적이고 성격적인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뿌리를 볼 때 사회적”이라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인용한 뒤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의 이야기에서 엄청난 불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이 당시의 조건 아래서 학살자가 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유사한 조건이 주어질 때 어떤 집단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브라우닝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우리는 세계 여러 나라 정부들이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자발적인 학살 집행자’로 동원한 사례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근대적 삶 속에 숨어 있는 잠재적인 위험이다”(지그문트 바우만)라는 명제는 불편하지만 진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이해가 홀로코스트 학살자의 책임을 덜어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학살 임무를 거부한 사람들도 소수지만 있었으니까. 이진모 옮김.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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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3 04:25 2010/08/23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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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의 '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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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이 진중권에 대한 장문의 글을 올렸다고 했을 때 어떤 매체에 글을 기고한 것으로 알았다. 그 동안 여유가 없어서 이를 살펴볼 생각조차 못했는데, 오늘 우연히 김규항의 블로그에 갔다가 김규항이 글을 짧게 시리즈로 올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규항의 '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시리즈는 몇 편까지 나올 것인가. 블로그에 올리는 것도 좋지만, 차라리 논문 비슷하게 한꺼번에 글을 쓰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진중권의 주장보다는 김규항의 글에 더 동의가 되는 것은 진중권이 극우꼴통들에 대한 대응과 비슷하게 김규항과의 논쟁(?)에 임했던 것이 설득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터이다. 게다가 김규항은 사회적 논의 비슷하게 사고하고 있는데, 진중권은 이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낮추어버린 것도 점수를 잃었다. 물론 내 정치적 입장이 이전부터 김규항 쪽에 조금 기울어져 있던 것도 작용하였다.
 
하지만 김규항이 자신의 논리를 이끌어내면서 전진을 묘사한 대목은 한편으로는 수긍이 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면적인 부분만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회원 중에 진보신당 당원이 많다고 해서 전진을 사민주의 조직으로 규정하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 노동자의 힘이 해산한 이후 김규항이 그 연장선상에 있는 노동전선이나 사노위 회원으로 계속 활동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진보신당을 통해 주된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고 해서 전진이 사민주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에 반박할 이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했는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나아가 김규항이 사회주의 지향으로 분류한 조직들이 과연 진보정당 밖에서 어떠한 유의미한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보여주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전진과 다른, 더 왼쪽에 있다고 언급된 정치조직들이 얼마나 구분되는지도 의문이다.
 
아마도 사노위 등이 제대로 된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편다면 진보신당 등에도 유의미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 어쩌면 김규항의 진중권과의 논쟁도 그런 범주에 포함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개인적인 문필활동이 아니라 조직적인 차원의 정치활동을 활발히 하여 진보신당의 우로 이동을 제어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시리즈는 글이 계속 올라오는대로 담아오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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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김규항 블로그, 2010/08/16 20:19)
 
예고한 재반박글 '이상한 나라의 진중권'을 올린다. 글이 좀 길고(70매 남짓) 종이 지면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여 짧게 잘라 하루에 서너 개씩 올릴 생각. 대략 10개 정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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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01 (김규항 블로그, 2010/08/16 20:19)
 
진중권 씨는 내 글 오류와 희망에 대한 반박글로 쓴 양가죽을 쓴 늑대에서 “진중권 씨를 비롯한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들”이라는 표현이 자신을 모욕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했다. 같은 글에서 “내가 자유주의자라는 것은 나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유주의자라는 말에 모욕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문제를 삼았으니 굳이 설명을 하면 이렇다.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들’이라는 표현은 그 표현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자유주의자’ 딱지를 붙이려는 것도 ‘진보신당에서 자유주의자들을 몰아내자’는 말도 아니다. 심지어 그들이 ‘좌파가 아니라 자유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진중권 씨는 자신이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걸 못 봐주”는 사람이지만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강력한 개입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전자는 선뜻 수긍이 가면서도 후자에 대해선 과연 그런가, 싶긴 하지만 어쨌거나 민주주의 양식에 근거하여 진중권 씨의 자신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인정하도록 하자. 일반적으로 개인의 자유는 존중하되 시장의 자유는 강력하게 통제되어야 한다고 보는 사람을 ‘자유주의적 좌파’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진중권 씨를 ‘자유주의적 좌파’라 하지 않고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라는 상대적인 표현을 사용한 건 그가 자신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당원들, 특히 자신보다 급진적인 당원들의 정체성을 존중하며 정당한 비판과 토론을 하는 게 아니라 매우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진중권 씨는 진보신당 내의 의견그룹인 <전진>의 한 내부용 문건을 검토(‘검열’이라는 말이 좀더 어울리겠지만)한 후 “전진은 사회주의자들”이라 판정하고, 나가거나 해체할 것은 요구했다.
 
나는 진중권 씨가 “80년대의 화석들” “닭짓 하는 사람들”이라 조롱하는 급진적인 좌파들 중에서도 이런 행태를 본 적이 없다. <전진> 역시 진중권 씨에게서 그런 부당한 공격을 당하면서도 그 또한 한 당원의 의견으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중권 씨의 행태는 옛 현실사회주의의 관료들이나 그걸 그대로 흉내 낸 80년대의 관념적 운동조직(진중권 씨가 몸 담았던)에서나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포스트모던을 설파하고 자신이 디지털 시대에 적응한 가장 세련되고 유연한 좌파임을 자임해온 진중권 씨의 이런 행태를 어떻게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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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02 (김규항 블로그, 2010/08/16 20:20)
 
또한 진중권 씨는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그룹”이라는 표현에 대해  “정체성은 동시에 ‘동일성’을 의미한다. 다른 모든 당원들을 제 형상대로 찍어내야 비로소 당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강박관념”이라고 했다. 놀랍다. 파시스트나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기 의사에 의해 자유롭게 입당하고 탈당할 수 있으며 당원의 정체성을 근거로 입당과 탈당 여부를 강제할 수 없는 현대적 민주주의 정치에서 정당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정당의 정체성’이란 진중권 씨의 말처럼 ‘정체성이 하나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지배적인 정체성’을 말한다.
 
여러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당원들이 존재하지만 지배적인 정체성이 정당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나라당에도 민주당에 더 걸맞은 정체성을 가진 당원이 있을 수 있고 진보신당에도 민주당에 더 걸맞은 정체성을 가진 당원이 있(을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 당원들이 당의 정체성에 문제가 되는가 안 되는가, 는 그런 당원들의 ‘존재’가 아니라 ‘영향력’에 달려 있다. 만일 한나라당에 민주당에 더 걸맞은 정체성을 가진 당원들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면, 다시 말해서 한나라당에 보수주의 정체성을 가진 당원보다 자유주의 정체성을 가진 당원들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면 한나라당은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 위기는 당연히 한나라당의 정당으로서 존립 위기로 이어진다.
 
오류와 희망은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다. 즉 진보신당이 존립 위기에 빠졌는데 그 주요한 원인이 정체성의 위기라는 내 의견을 사회적으로 제출한 것이다. ‘전진’을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그룹“이라 말한 건 진중권 씨 말대로 진보신당의 모든 당원들을 전진의 정체성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진보신당이 민주당 같은 자유주의 정당과 별개로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정체성의 위기를  보이는 현실을 전제로, 그런 흐름에 ‘대응하는 경향의 정체성을 가진 그룹’으로서 전진을 말한 것이다. "다른 모든 당원들을 제 형상대로 찍어내야 비로소 당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강박관념"은 실은 진중권 씨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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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03 (김규항 블로그, 2010/08/16 20:20)
  
더욱 심각한 문제는 진중권 씨가 당의 ‘이념감독관’으로서 “사회주의자들”이라 판정한 전진은 사회주의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회주의에 대해 조갑제 이상의 반감을 가진(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적기로) 진중권 씨의 눈에는 전진과 그들의 문건이 ‘완전 사회주의’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애석하게도 전진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사민주의자들이다. 자본주의 모순을 체제 변혁을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체제 안에서(의회 진출과 복지 증진 등으로) 극복하려는 사람들이다. 전진은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보편적으로 담고 있는 그룹인 것이다.
 
한국의 좌파들은 크게 진보정당(민노당, 진보신당)에 참여한 그룹과 참여하지 않은 좀더 급진적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그렇게 좌파진영 전체를 놓고 볼 때 전진은 가장 오른쪽의, 온건한 그룹에 속한다. 실제로 좀더 급진적인 경향의 좌파들 가운데는 ‘전진도 좌파야?’ 식의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런 전진이 진보신당에서 해체하거나 나가야 할 낡은 사회주의자들이라면 대체 진보신당의 정체성은 뭐가 되어야 할까? ‘진보정당이길 포기하고 자유주의 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설사, 전진이 진중권 씨 주장에 합치하는 낡은 사회주의자들이라 하더라도 누구도 그들에게 나가거나 해체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 전진이 당의 민주주의를 존중하며 비판과 토론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한다면 말이다. 민주주의란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서로 존중하면서 비판과 토론을 통해 좀더 나은 결과를 찾아나가는 사회 원리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는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존중하지 않고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태도에 반대한다. 우리가 우파를 존중하지만 극우는 사회의 적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래서다. 
 
진중권 씨는 자신이 “천성이 리버럴해서 국가가 개인의 권리에 침해하는 걸 못 봐주는 편”이라고 했다. 좋은 이야기고, 나 역시 그렇다. 그런데 그럼 사람이라면, 국가가 어떻고 이전에 다른 개인의 권리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사유와 상상력을 검열하여 이념을 재단하고 나가라 사라져라 요구하는 사람이 “타고난 리버럴이라 국가가 개인에 간섭하는 꼴을 못본다”고 말하는 건 해괴한 일이다. 사실 그런 태도는 2010년의 한국에선 한나라당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조갑제나 지만원 같은 아예 내놓은 극우 인사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라 부르는 건 모욕적인 딱지붙이기일까, 과분한 상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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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04 (김규항 블로그, 2010/08/16 21:08)
 
(사회주의니 사민주의니 하는 이야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행여 불편하게 생각하진 말기 바란다. 한국이란 나라는 참 이상해서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도 사민주의와 사회주의는커녕 자유주의와 좌파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간략한 설명을 올린 게 있으니 참고하시길.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민주의, 사회주의 )
 
현실 사회주의의 경험을 통해 국가 사회주의의 폐해가 확인되고 또 노동자들이 끝없이 자본에게 포섭되어감으로써 혁명을 통한 사회변화가 요원해지는 현실 속에서 사민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현명한, 그리고 가장 현실적인 좌파 노선으로 여겨진다. 밝히자면 나 역시 사민주의 노선의 미덕을 충분히 인정한다. 게다가 나는 체제 안에서 어린이 잡지를 발행하며 활동하고 있으니 반드시 사민주의와 대별되는 의미에서 사회주의 노선을 가져야 하는 상태에 있는 건 아니다. 그런 내가 굳이 진보정당에 입당하지 않고 사민주의 세력보다 사회주의 세력에 좀더 가까운 입지를 가지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이 사민주의 실현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사민주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아는 이야기지만 사민주의는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과 자본주의 체제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체제다. 사회가 성숙하고 자본가들이 계몽되고 선해져서 사민주의가 만들어진 게 아니라,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자본이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한 타협물로(자본주의 판이 깨지는 것보다는 이문을 줄여서라도 유지하려는) 선택한 게 사민주의 체제인 것이다. 물론 서유럽이나 북유럽 사회처럼 사민주의가 구현된 지 이미 오래인 사회들은 사민주의 사회의 운영 원리들이 ‘시민의 상식’으로 되어 있어서 강력한 사회주의 세력이 없어도 사민주의 체제가 유지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사민주의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회가 사민주의를 일부라도 구현하려면 사회주의 세력이 형성되어야 한다. 사민주의자들이 사회에서 가장 급진적인 세력으로 여겨지는 한 사민주의는 절대 구현될 수 없다. 한국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집권한 것도 그들보다 급진적인 세력, 즉 사민주의 세력이 수면 위로 오르기 시작하면서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한국 사회는 그런 간단한 이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말께나 한다는 사민주의자들 중엔 유럽 물을 먹은 사람들이 많은데 한국에서 80년대에 한껏 급진화되었던(레닌주의 혹은 스탈린주의까지) 사람이 유럽 사회를 체험하면 자극을 받는 게 당연한 일이다. 사실 북유럽 사회, 아니 서유럽 사회만 하더라도 한국과 비교하면 얼마나 훌륭한가. 그 사회를 보면서 내 평생에 이만큼만 되어도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런 것도 모르고 사민주의를 비웃으며 소련 따위 사회에 경도되었구나 얼굴을 붉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은 사민주의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피상적인 이해지만, 여전히 급진적인 좌파에 대한 냉소나 회의로 이어지기 쉽다.
 
과거 자신의 관념적 편향과 그에 대한 자괴감이 여전히 급진적인 '촌스러운' 사람들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는 건 얼마간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혐오의 씨앗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발현되는가는 결국 그 사람의 인격과 지성에 달려있다. 가장 훌륭하게는 깊은 성찰을 통해 그런 혐오를 잠재우고 여전히 급진적인 좌파들의 진정성을 존중하며 그들의 존재가 자신의 소망하는 사민주의의 구현에 밑거름이 된다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렇지 못한 사람도 꽤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진중권 씨처럼 자신보다 급진적인 모든 좌파의 존재 자체를 공공연하게 부인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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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05 - '디지털 시대'의 진실 (김규항 블로그, 2010/08/17 14:28)
 
진중권 씨가 자신보다 급진적인 좌파의 존재 가치를 부인하면서 드는 가장 큰 이유는 대략 두 가지다. 낡고 비현실적이라는 것. ‘지금은 디지털 시대인데 한국의 좌파들은 농경 시대나 중공업 시대의 사고를 고수한다’ ‘존재하지도 않는 노동자 계급과 이미 폐기처분된 사회주의를 버리지 않는다’ 진중권 씨가 기회만 되면 반복하는 이야기들이다. 나는 한국의 좌파들이 낡고 비현실적인 경향을 갖는다는 데 일부 동의한다. 그러나 낡고 비현실적인 것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매우 경박한 것이다. 낡고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을 극복하는 힘과 가치가 들어있는 것도 있고 더할나위없이 세련되고 현실적이지만 현실을 더욱 미궁으로 빠트리는 것도 있다.
 
오늘 자본주의 사회가 농경 사회도 중공업 사회도 아닌 디지털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이야기는 누구도 굳이 부인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나 역시도 이메일과 구글톡을 가장 주요한 소통 수단으로 삼고 있고 강연 등으로 늘 전국을 돌지만 어딜 가든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상시 접속한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마치 SF영화에 들어와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디지털 시대를 형유하기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시장에서 생존하기엔 약점이 너무 많은 고래가그랬어의 발행인이기에 그런 디지털 도구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부리면서 그런 약점들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우리 삶의 이런 변화가 짐승과 다름없이 살던 인간이 불을 발견하고 도구를 사용하게 되는 변화처럼 인류 문명의 정상적인 발전의 산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렇게 세상이 뒤집혔다고 말할 정도로 디지털화하여 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본의 경쟁의 결과다. 그 경쟁의 결과로 자본은 점점 더 인간의 삶과 행복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는 첨단 상품들을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고, 그걸 구매하지 못하면 뒤쳐지고 가난한 것처럼 느껴지도록 선전하면서 무한경쟁 무한증식 하는 게 디지털 시대인 것이다. 디지털화가 가속되고 있다는 건 자본의 무한경쟁과 무한증식이 더욱 가속화, 거대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자본의 무한경쟁과 무한증식을 위해 만들어진 그런 상품들을 거부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회 체제 안에서 회사를 다니고 월급을 받아 사는 대개의 사람들이 그런 운동을 실천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대개의 우리가 디지털 사회에서 현명함을 잃지 않는 방법은 그런 디지털 문명의 장점들을 자본의 체제에 반하는 활동과 좀더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생산에 최대한 활용하면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가치들이 자본에 독점되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디지털 시대’니 뭐니 따위 자본이 대중을 현혹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을 되도록 ‘사용해주지’ 않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라는 구호가 가진 가장 사악한 측면은 마치 디지털 세상엔 종래의 계급적 억압이나 착취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자신이 한국의 거의 유일한 디지털 시대의 좌파임을 자임하는 진중권 씨는 ‘노동자 계급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야말로 그랬으면 정말 좋겠지만 정말 오늘 현실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가? 정말이지 참새 껌씹는 소리다. 이를테면 양극화가 심각하다, 라는 말은 박근혜 씨도 하는데 그 말은 곧 ‘계급적 격차가 더욱 커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양극화라는 말은 누구나 하면서도 계급이라는 말을 하면 이 사람은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군, 80년대 스타일이군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디지털 시대를 향유하고 있다는 환각 속에서 자본의 부속품으로 전락해간다. 무서운 대중조작이다.
 
물론 70년대나 80년대의 노동자 계급이라는 개념을 오늘 그대로 적용시키긴 어려운 부분이 있다. 노동의 형태도 산업의 구조도 많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자본의 정규와 비정규 분리지배 전략도 고전적인인 의미에서 노동자계급을 말하기가 어렵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계급이 사라져버렸거나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라는 자본주의의 뼈대 자체가 달라진 건 아니다. 쉽게 말해서 디지털 시대엔 계급이 사라진 게 아니라 계급의 양상이 변화한 것이며 자본의 억압과 착취가 사라진 게 아니라 억압과 착취의 양상이 달라진 것이다.
 
좌파에게 중요한 건 농경시대인가 중공업 시대인가 디지털 시대인가가 아니라 인간의 인간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존재하는가, 소외된 노동이 존재하는가, 이다. 농경시대든 중공업 시대든 디지털 시대든 디지털 할애비 시대든 계급적 억압과 착취가 존재하는 한 좌파의 임무는 그것과 싸우며 그런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가장 세련된 좌파는 ‘디지털 시대엔 계급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계급적 억압과 착취의 양상을 꿰뚫어보며 그것에 현혹되지 않고 싸우는 사람이다.
 
'디지털 시대'의 진실은 삼성전자 광고판에 적힌 ‘디지털 노마드’라는 구호와, '디지털의 꽃'을 생산하는 먼지 하나 허용되지 않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으로 죽어가면서도 산재 판정조차 받지 못한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피눈물의 대비 속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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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06 - 인간에 대한 예의 (김규항 블로그, 2010/08/17 15:19)
 
진중권 씨는 한국의 좌파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그가 자신보다 급진적인 좌파를 비난할 때 가장 애용하는 단어인 “닭짓”이라는 말도 바로 그 비현실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무래도 진중권 씨는 좌파가 뭔지 모르는 것 같다. 좌파는 원래 비현실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좌파는 어지간히 양식있는 자유주의자들조차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접고가는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고 부여잡는 사람들이다. 좌파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진중권 씨가 말하듯 ‘폐기된 이념적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어쩔 수 없는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이다. 죄없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이렇게 편해도 되나하는 불편한 마음이야말로 좌파의 출발인 것이다. 그리고 그 불편한 마음을 기부나 자선 같은 한줌의 동정심으로 '해소'하는 게 아니라 그 현실을 변화시키려 '행동'하는 것, 그게 좌파다.
 
그래서 도무지 해결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문제에까지 비현실적으로 매달리는 것이다. 양식있는 사람들이 김대중 노무현 씨가 이명박에 비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말할 때, 굳이 그들의 한계와 기만성을 말하는 것 역시 인간성이 메마르고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 씨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접고 간 현실 속에서 고통받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김대중 노무현 씨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원망하며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고통이 내 가족에게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외면하는 건 인간성에 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80년대엔 진중권 씨가 말하는 이념적 도그마에 사로잡힌 좌파도 많았다. 진중권 씨 본인도 그런 좌파였 듯 말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좌파들은 더 이상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공장 정규직 노조와 그를 기반으로 한 직업적 좌파들을 빼고라면, 적어도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그런 좌파들은 다 떠났다. ‘극우세력이 강한 한국적 상황에선 자유주의가 좌파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과, 입만 벌리면 좌파가 얼마나 낡고 비현실적인지를 선전하는 ‘세련되고 현실적인’ 좌파 덕에, 그들의 활동은 대중들에게서 미디어에서 거의 전적으로 무시되었다. 그런 엄혹한 상황을 버텨낸 좌파들은 이념적 도그마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 가운데 진중권 씨가 조롱하듯 제 생애 안에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지리라 철석같이 믿는 사람도 없다. 그들이 여전히 급진적 좌파인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마저 떠나면 ‘어쩔 수 없는 현실’은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지만 어찌됐든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함께하는 유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진중권 씨가 경비행기를 소유하고 있고 “필리핀에 한 3년 비행기 타러 간다”고 할 정도의 생활을 하는 걸 두고 ‘좌파가 그럴 수 있는가’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좌파가 자신의 양식에 근거하여 고통받는 사람들과 삶의 격차를 되도록 줄이려 노력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걸 뒤집어 좌파가 뭘 하면 자격이 없고 몇평 이상 살면 좌파가 아니고 식으로 비난하는 건 부당하며 악용될 소지가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나는 진중권 씨에 대한 그런 비난에 분명히 반대한다. 그러나 좀더 안락한 환경에서 활동하는 좌파가 엄혹한 상황에서 활동하는 좌파에게 보여야 할 예의 는 있지 않을까? 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좀더 안락하게 활동할 수 있음에 대해 당연히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이념이고 운동이고 떠나서 인간이 인간에 대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 말이다.
   
그들이 세련되지 못하고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보인다면, 안 그래도 좌파가 무시되는 현실 속에서 그런 결점들이 행여 대중들에게 부정적으로 비쳐질세라 염려하면서, 그들이 좀더 세련되어질 수 있도록 좀더 효과적으로 현실과 접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오히려 좌파는 낡고 비현실적인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온세상에 전파하며, 유일하게 세련되고 현실적인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진중권 씨의 그런 언행이 문제인 또 하나의 이유는 매우 강력한 반공주의적 효과를 갖는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한국 사회는 반세기 동안 극우반공주의 세력이 사회를 장악하며 좌파를 말살해왔다. 극우반공주의 세력의 반공주의적 선전은 좌파를 ‘뿔 달린 괴물’로 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진행되고 시민의식이 높아지면서 한국의 반공주의는 그 양태가 바뀐다. 조갑제 류의 반공주의는 여전히 추악하게 느껴지지만 더 이상 새로운 효력을 갖지 않는다. 이제 좌파는 ‘뿔 달린 괴물’이 아니라 ‘쓸모없는 사람들’로 선전된다. 진중권 씨가 늘 말하듯 좌파는 ‘80년 운동권의 화석’이며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 계급에 매달리는 사람들’이며 급진적인 사유와 상상력은 ‘비현실적이고 어리석은 짓’이라는 등의 이야기들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극우인사가 하는 것보다는 젊을 때 좌파 이력을 가진 자유주의자가 하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현재 좌파를 자처하는 인사가 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래서 좌파는 문제가 있어도 서로 비판하고 토론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비판과 토론이 없으면 썩게 되어 있다. 당연히 비판하고 토론하되 그런 비판과 토론이 행여 반공주의에 악용되지 않도록 신중하고 사려깊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 모든 좌파들은 노선을 막론하고 적어도 그 정도의 분별력은 갖고 행동하고 있다. 아마도 단 한 사람을 빼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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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07 - ‘대중성 강박’과 ‘대중성’ (김규항 블로그, 2010/08/19 13:23)
 
어떤 이들은 내가 오류와 희망에서 ‘대중성’ 보다는 ‘좌파 정체성’이 더 중요하다고 '근본주의적으로' 주장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듯한데, 실은 그 반대다. 이를테면 “선거에서 연 이은 실패의 주요한 원인이 대중성 강박으로 인한 프레임 오류”라는 내 말은 ‘대중성을 좇느라 좌파적 정체성이 훼손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잘못된 대중성 추구로, 즉 최소한의 정체성조차 포기해버림으로써 대중성을 잃었다’는 말이다. 체제 안에서 활동하는 정당에 ‘선거에서 연 이은 실패’보다 더 ‘대중성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국면이 있겠는가?
 
현재 상황은 진보신당이 ‘대중적 실용노선’에 성공하여 엄청 잘 되고 있는데, 내가 까탈스럽게도 그 정체성이 흐려지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는 게 아니다. 분명히 밝히자면, 나는 오히려 현재 진보신당으로선 정체성이 위험하지 않은 수준으로 흐려지더라도 일단 유의미한 수준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내가 문제 삼는 건 ‘대중적 실용노선’이 아니라 ‘실패한 대중적 실용노선’이다. 진보신당이 “진중권 씨를 비롯한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들”의 주도로 추구해온 ‘대중적 실용노선’이 매우 대중적인 듯 보이지만 전혀 대중적이지 않으며, 매우 실용적인 듯 보이지만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음을 ‘좌파의 일원’으로서 환기한 것이다.
 
며칠 전 진보신당 당원인 한 고등학생에게서 편지를 받았다.(전문은 여기에) 그는 진보신당이 대중성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대중들에게 진보신당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자유주의 세력의 위선'을 폭로해 나가는 게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한겨레 칼럼에서, 노회찬 당시 후보가 서울시장 선거 직전 토론회에서 하신걸 보고 비판하신 거에 백번 공감하는 편입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한나라당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과 같은 편인 것도 아니라는 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그런 거요.”
 
그의 말에 내가 진보신당에 하고 싶은 모든 말이 들어있다. 좌파는 물론 이명박을 반대하며 이명박과 싸운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그 싸움의 성과는 모조리 자유주의 세력이 차지하게 된다. “우리는 한나라당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과 같은 편인 것도 아니라는 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그런 거”가 중요한 것이다. 사실 노회찬, 심상정 씨가 '고작'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한국사회는 여전히 대중적 인지도가 선거 결과를 좌지우지 하는 사회다. 특정한 사람을 거명해서 안 됐지만, 지난 선거에서 국회의원이 된 유정현 같은 사람은 국회의원이 될 어떤 활동이나 이력이 없는 ‘연예’ 아나운서였다.
 
그런데 노회찬 심상정 씨처럼 대중적 인지도가 높을 뿐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신망이 높은(한국 정치인들 가운데 최고 수준이 분명하다) 사람들이 고작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보신당 후보이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이라는 당이 왜 굳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대중들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두 사람이 민주당 소속이었다면 이미 몇 선을 거듭하며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다.(‘강력한 대통령후보 노회찬’ ‘박근혜를 압도하는 여성 대통령 후보 심상정’,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지 않은가?)
 
촛불 광장에서도 두 사람은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의 정치인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망이 높았다. 그들은 반이명박의 스타였다. 그러나 그들은 ‘왜 이명박을 반대하는지’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데 성공했지만 ‘반이명박의 대안이 왜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인지’를 설득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평범한 한 사람이 진보신당을 지지하게 되는 과정은 두 단계로 이루어질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이명박을 반대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이명박을 반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민주당 지지를 넘어 굳이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조차 이르지 못한 사람이 진보신당을 지지할 가능성은 전무하니, 관건은 두 번째 단계다. 두 번째 단계를 만들어내는 건 진중권 씨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상식의 회복’이 아니다. 물론 ‘상식의 회복’이라는 구호는 어떤 좌파적 구호보다 훨씬 ‘대중적’이지만 대중들을 첫 번째 단계에 만족하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진보신당이 대중들에게 해야 할 말은 ‘상식의 회복’이 아니라 ‘상식의 회복만으로는 부족하다’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라는 ‘상식을 가진’ 자유주의 정권이 서민대중의 편이 아니었음을 대중들은 분명히 기억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세력은 ‘상식조차 없는’ 이명박과 자신들의 차이를 끝없이 부각함으로써, 즉 ‘김대중 노무현만큼이라도’라는 선전을 거듭함으로써 반이명박 정서를 모조리 독식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들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대승한 것도 오로지 그 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진보신당은 뭘 해야 할까? 이 고등학생의 말대로 “자유주의 세력의 위선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걸 폭로하지 못하면 죽 쒀서 개주는 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오류와 희망에서 지적하고 이 고등학생이 언급한 노회찬 씨의 서울시장 선거 직전의 인터넷 토론회는 ‘프레임 오류’의 극치였다. 선거를 한참 남긴 상황이라면 모를까, 선거 직전 아닌가. ‘한명숙이 아니라 노회찬이어야 하는 이유’만을 강조해도 모자랄 판에 줄창 ‘오세훈을 막아야 하는 이유’만 떠들어댔으니, 노회찬을 고려했던 사람들조차 ‘한명숙에게 표를 몰아주어야 한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토론회였던 셈이다. 물론, 토론회 자체는 진중권 씨의 독설과 재담으로 매우 ‘대중적’(!)이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민노당처럼 일찌감치 자유주의 세력에 줄을 서서 개평이라도 얻지 뭐 하러 독자 출마를 하는가? 이게 고도의 정치공학이 결부된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인가? 이게 ‘대중성을 잃더라도 좌파적 정체성을 사수하자!’는 근본주의적 주장인가? 농담이 아니라, 상황 설명만 있다면 고래가그랬어를 보는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는 간단한 계산이다.
 
그런 간단한 계산조차 안 된 ‘대중적 실용노선’이 오늘 진보신당의 위기를 만든 것이다. 그런 ‘대중적 실용노선’이 ‘왜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이어야 하는지’를 대중들에게 설득하는 데 실패하게 하게 한 것이다. 노회찬, 심상정 씨의 한국 정치인 최고 수준의 대중적 인지도와 신망을 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노회찬 심상정, 훌륭하고 능력 있는 정치인들이지만 이명박을 막으려면 그래도 민주당을 찍어야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당시엔 욕도 했었지만 이명박과 비교하면 얼마나 훌륭한 대통령이야!”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대중성 강박으로 인한 프레임 오류”라는 내 말은 바로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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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3 02:03 2010/08/23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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