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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백혈병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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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평등의 경제학 - 09.06.25 경향
    흑무

어떤 백혈병 - 한겨레

   [세상읽기] 어떤 백혈병 / 이계삼

»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8년 전의 일이다. 내가 담임을 맡은 반에 백혈병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늘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개인용 식판을 따로 썼다. 큰 병을 앓는 아이를 둔 집안들이 그러하듯 몹시 가난했다. 감기만 걸려도 아이는 응급실로 실려 갔고, 무균실에 며칠씩 갇혔다가 회복되면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아이는 정이 그리웠으므로 마스크 뒤에서 언제나 웃으려 했고 늘 아이들에게 뭔가를 주려 했지만, 자주 외면당했다. 이 아이를 우리 반의 일원으로 자리 잡게 하려는 어설픈 노력으로 알게 된 것은 열네 살 소녀의 생에 깃든 깊은 슬픔이었다. 이를테면, 아이가 품고 다니는 연필 스케치 그림 속 소녀들은 무균실에서 함께 지내다 죽은 친구들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백혈병이란 드라마에 나오듯, 머리에 뒤집어쓴 털모자 하나로 표현되는 외상 없는 질병이 아니라, 집안 살림을 결딴내는 어마어마한 치료비와 항암 치료, 구토, 탈모, 응급실과 무균실, 검사 결과를 기다릴 때의 지옥 같은 초조함 따위의 캄캄한 기억의 덩어리들이다.

황유미, 이숙영, 황민웅, 이 세 사람의 이름을 혹시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들은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였고, 모두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죽었다. 10만명에 3.7명꼴로 발생한다는 이 희귀한 병이 한 기계를 놓고 짝꿍으로 일했던 20대 초반의 두 여성과 그 라인의 유지 보수를 담당한 엔지니어에게 발병했고, 이후 삼성반도체 백혈병 대책위에 접수된 발병 사례만도 22건이다.

재발한 병으로 몸도 못 가누면서도 억대에 가까운 치료비로 노심초사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던 황유미씨는 결국 스물셋에 죽었다. 투병중이던 황민웅씨는 아픈 몸을 이끌고 기어코 둘째의 출생신고를 했고, 얼마 뒤 죽었다. 지난 5월19일, 이들 세 사람을 포함한 삼성 백혈병 피해 노동자와 유가족들이 집단으로 제출한 산업재해 신청은 전원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그들이 작업중에 들이마시는 수십 종의 화학물질의 존재도, 내과학(內科學) 교과서에도 나온다는 백혈병과 화학물질의 명백한 상관관계도, 직접적 증거 없이 간접적으로라도 ‘상당인과관계’가 성립되면 산업재해로 인정한다는 대법원 판례도 소용없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은 우연이었다. 억대의 치료비도, 죽음 앞에 선 자의 산더미 같은 고통도 슬픔도 결국 각자의 책임이었다. 산재 신청을 하겠다는 황유미씨의 아버지에게 회사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버님, 삼성을 이기려고 하십니까? 이길 수 있으면 이겨보세요”라고.

그리고 열흘 뒤인 5월29일,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치러지던 바로 그 시간, 연매출 200조원대의 거대 기업의 경영권을 승계하는 데 고작 16억원의 세금밖에 내지 않은 기상천외한 사술은 대법원에 의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모든 것이 절묘했다. 6 대 5의 아슬아슬한 판결, 태산 같은 사퇴 압력을 버텨내시고 끝내 그 한자리를 지켜 주신 신영철 대법관님, 그 판결이 끝나고 나니 슬슬 신 대법관에게 물러나라는 뜻을 내비치시는 이 사건 1심 재판 삼성 쪽 변호인 출신의 이용훈 대법원장님.

나는 이 글을 야간자율학습이 한창인 우리 반 교실에서 쓰고 있다.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땅으로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도덕, 최소한의 정의마저 쓰레기통에 처박힌 나라에서, 아이들은 이 가파른 삶의 한쪽 벼랑에라도 뿌리내리고자 환한 불빛 아래 공부라는 것을 한다.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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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의 경제학 - 09.06.25 경향

[정태인칼럼]성 평등의 경제학

 

 

 

“참 많은 반대가 있었을 텐데 어떻게 설득을 하셨나요?” 심상정 전 의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노르웨이 ‘아동 성 평등부’ 아르니 홀레 국장의 활기찬 설명으로 방은 후끈 달아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의 출산 전후에 부모 합쳐서 52주의 휴가, 그것도 월급의 80%를 지급하는 조건의, 부럽기 그지없던 법률도 그새 바뀌어서 7월1일부터는 56주란다. 과거에는 휴가를 준다고 해도 외면하던 젊은 남성들이 이젠 95%가 10주의 ‘출산휴가’를 즐기고 덕분에 출산율은 1.96으로 뛰어올라서 대체율(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출산율로 노르웨이에서는 2.1)에 거의 다다랐다.

출산율 끌어올린 노르웨이 정책

그뿐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실천이 요원한 ‘동일 노동, 동일 임금’ 문제는 이미 옛이야기란다.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노동을 해도 여자·남자의 임금이 서로 다르고,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반밖에 안되는 우리 처지에서 볼 때 노르웨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은 경이로웠다.

‘평등과 반차별 옴부드’(LDO)의 모니카 혹스 자문관에 따르면 노르웨이에서는 같은 고용주 아래서 간호사와 의사가 같은 수준의 관리자(예컨대 수간호사와 내과과장)가 되었을 때, ‘동일가치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을 적용하는 문제로 다투고 있다. 설령 시장에서 결정된 임금이라도 여성 위주의 시장과 남성 위주의 시장은 이미 성 중립적이지 않은 상태이니 차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안은 몇가지 사례를 놓고 지금 논쟁 중이지만 그의 말대로 ‘혁명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설마 반발이 없었을까? 홀레 국장의 대답은 단 한 마디였다. ‘생산성’ 즉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 전 사회의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사실로 모두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덧붙이기를 “그래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통계로 노르웨이의 생산성이 미국보다 20%가량 높다”고.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두 개의 그래프가 바로 떠올랐다. 한 나라에 100명의 여성과 100명의 남성이 살고, 둘의 생산성은 똑같은 분포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여성이건 남성이건 1, 2, 3, 4, …, 100에 이르는 생산성을 가진 사람이 한 명씩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남성만 고용한다면 그 나라의 평균 생산성은 50이다. 만일 성평등의 원칙에 따라 상위 50%의 남성과 상위 50%의 여성을 고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평균 생산성은 75로 뛰어오르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생산성 높이는 여성 경제활동

그럼 아이들은 누가 볼 것인가? 그래서 1년이 넘는 유급 출산 휴가를 부부에게 주고 여섯살까지는 전문 인력이 사실상 무료로 육아를 100% 책임진다. 이런 사회복지의 재원이 바로 높은 생산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공기업 이사회의 17%였던 여성 비율을 2년 만에 41%로 끌어 올리고 이제 민간기업의 여성 이사 비율도 같은 수준으로 높이는 협약을 맺은 노르웨이의 비결은 간단하다. 남녀 간의 생산성 분포가 동일하다고, 즉 잠재력이 동일하다고 가정하고 또 증명한 것뿐이다. 그래서 당연히 남성들도 행복하다.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고 높은 생산성 덕에 전체 고용이 늘어났으니 ‘여성의 천국’만이 아니라 노르웨이 국민 스스로 자부하듯 아이들을 필두로 ‘모두의 천국’이 된 셈이다. 우리의 난제 중 난제인 출산율 저하와 교육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다행히 우리의 여성 교육 수준은 이미 세계 최고다. 우리의 미래는 여성에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달려 있다. 괜한 삽질 좀 그만 하고….

<정태인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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