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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08
    재물무상 - 경향 09.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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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07/08
    이삭줍기- 경향 09.07.07
    흑무

재물무상 - 경향 09.07.07

[여적]재물 무상 


 김태관 논설위원

 

의롭지 않은 재물은 끓는 물 위에 뿌려지는 눈(雪)과 같다고 한다. 그것으로써 누리는 영화는 아침에 이는 구름, 저녁에 지는 꽃처럼 허망하다. <명심보감> 성심(省心)편에 보이는 표현이다. 재물은 무상(無常)하다. 땀흘려 쌓은 부라고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잃을 수도 있다. 부자가 삼대 가기 어렵다고 하지만 당대에서 몰락하는 경우도 숱하다. 재물이 얼마나 뜬구름 같은 것인지를 보여주는 옛 이야기가 있다.

120간짜리 사랑채를 쓰며 떵떵거리던 부자가 죽어서는 꽃상여도 못타고 떠나갔다. 기막힌 몰락의 주인공은 일제시대 때 전남 강진 출신 갑부 김충식이다. 4만석의 재력가인 그는 1930년대 경제계를 쥐락펴락했던 걸물이었다. 당시 세간에서는 “조선의 돈줄은 두 식(植)자가 쥐고 흔든다”고 입방아를 찧었는데, 화신백화점의 박흥식과 김충식이 그들이다.

김충식의 재운(財運)은 타고났던 것 같다. 미두와 골동품, 토지, 증권 등 손을 대는 대로 족집게처럼 대박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가 거부를 일군 것은 운 덕분만이 아니었다. 무학(無學)인 그는 20세 때 상경하여 종이장사를 하며 한푼 두푼 모으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학교 대신 시장에서 몸을 굴리며 이재에 눈을 뜬 것이다. 돈이라면 그는 동물처럼 달려들었고, 남들과의 송사도 마다 안했다. 일단 돈을 쥐면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얼마나 구두쇠인지 “정월 초하룻날 엽전 한 닢을 손에 쥐면 그 이듬해 초하룻날까지 쥐고 있더라”는 풍문이 떠돌 정도였다.

그렇게 모은 재산이지만 잃는 데는 한 세대도 걸리지 않았다. 태평양전쟁 때 쌀을 매점해 일제에 밉보인 탓이 컸다. 첫 아내와 사별한 뒤 네번이나 안방주인이 바뀐 가정의 불행도 한몫했다. 말년에 무의무탁한 김충식은 객지에서 병사해 상여조차 못타고 저승길로 떠났다. 고래등 같았던 120간짜리 집은 6·25 때 불에 타 사라지고 재산도 구름처럼 흩어졌다.

재물은 하늘이 잠시 내게 맡긴 것이라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맡겨졌던 재산 331억원이 사회에 돌려졌다. 본래 내 것이 아닌 재물을 내 것인 양 움켜쥐려는 것은 부질없다. 갑부 김충식은 엽전 한 닢도 놓지 않으려 했지만 하늘이 거둬가니 도리가 없었다. 재물을 부둥켜안으면 재앙이 앗아간다. 이것은 옛날 얘기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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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줍기- 경향 09.07.07


[손홍규의 로그 인]이삭줍기


요즘 같은 시절에 관에서 하는 말을 믿고 수돗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분들은 없으실 게다. 수돗물만 그런 게 아니다. 몇 해 전부터는 고향에서도 지하수를 그냥 마시지 않는다. 마을 뒷산 중턱에 아스팔트 도로가 생기면서 수질이 심각하게 나빠진 탓이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수십 년 동안 스며든 농약 때문에 이쯤이면 그리 되었으리라. 서울생활을 시작할 때, 사람들이 생수를 사먹는 걸 보고 얼마나 놀라워했던가. 물을 사먹다니! 지금은 나도 사먹는다. 그보다 놀라운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식당에서 밥을 사먹을 때마다 차림표를 유심히 살피곤 했다. 어딜 가나 공기밥 추가에 1000원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를 테면 4000원짜리 김치찌개를 먹으면, 그 가운데 밥 한공기가 3000원, 나머지 찌개며 반찬 따위가 1000원쯤 될 거라고 셈했기 때문이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억울했다. 4000원 가운데 겨우 1000원이라니. 어린 시절 추수가 끝나도 나는 들판을 떠나지 못했다. 밀레의 그 유명한 그림처럼 허리가 똑 끊어질 때까지 이삭을 주웠다. 더는 낱알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사위가 어두워져서야 들판을 떠날 수 있었고 그때 내가 손에 쥔 이삭은 한 줌에 불과했다. 밥 한 톨이라도 흘렸다가 주워 먹지 않으면 밥상머리에서 한참이나 보릿고개 운운하는 훈계를 들었다. 반발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삭 좀 줍지 않는다고, 밥 한 톨 흘린다고 굶어죽는 건 아니잖은가. 그러나 막상 내가 벌어 내 돈으로 밥을 사먹어야 할 때가 되자, 앞선 세대의 두려움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듯싶었다. 밥 한 공기 추가에 1000원일 뿐인데도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걸 보면 말이다. 살다보면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러니까 어느 도의 교육위원이란 분들이 급식비를 삭감하셨던 모양인데, 그렇게 폭력적으로 세상살이를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알게 된다. 이삭을 줍고 살아도 행복해지기 어렵다는 걸. 당신들이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우리 모두 배워왔듯이. 모질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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