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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무상 - 경향 09.07.07

[여적]재물 무상 


 김태관 논설위원

 

의롭지 않은 재물은 끓는 물 위에 뿌려지는 눈(雪)과 같다고 한다. 그것으로써 누리는 영화는 아침에 이는 구름, 저녁에 지는 꽃처럼 허망하다. <명심보감> 성심(省心)편에 보이는 표현이다. 재물은 무상(無常)하다. 땀흘려 쌓은 부라고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잃을 수도 있다. 부자가 삼대 가기 어렵다고 하지만 당대에서 몰락하는 경우도 숱하다. 재물이 얼마나 뜬구름 같은 것인지를 보여주는 옛 이야기가 있다.

120간짜리 사랑채를 쓰며 떵떵거리던 부자가 죽어서는 꽃상여도 못타고 떠나갔다. 기막힌 몰락의 주인공은 일제시대 때 전남 강진 출신 갑부 김충식이다. 4만석의 재력가인 그는 1930년대 경제계를 쥐락펴락했던 걸물이었다. 당시 세간에서는 “조선의 돈줄은 두 식(植)자가 쥐고 흔든다”고 입방아를 찧었는데, 화신백화점의 박흥식과 김충식이 그들이다.

김충식의 재운(財運)은 타고났던 것 같다. 미두와 골동품, 토지, 증권 등 손을 대는 대로 족집게처럼 대박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가 거부를 일군 것은 운 덕분만이 아니었다. 무학(無學)인 그는 20세 때 상경하여 종이장사를 하며 한푼 두푼 모으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학교 대신 시장에서 몸을 굴리며 이재에 눈을 뜬 것이다. 돈이라면 그는 동물처럼 달려들었고, 남들과의 송사도 마다 안했다. 일단 돈을 쥐면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얼마나 구두쇠인지 “정월 초하룻날 엽전 한 닢을 손에 쥐면 그 이듬해 초하룻날까지 쥐고 있더라”는 풍문이 떠돌 정도였다.

그렇게 모은 재산이지만 잃는 데는 한 세대도 걸리지 않았다. 태평양전쟁 때 쌀을 매점해 일제에 밉보인 탓이 컸다. 첫 아내와 사별한 뒤 네번이나 안방주인이 바뀐 가정의 불행도 한몫했다. 말년에 무의무탁한 김충식은 객지에서 병사해 상여조차 못타고 저승길로 떠났다. 고래등 같았던 120간짜리 집은 6·25 때 불에 타 사라지고 재산도 구름처럼 흩어졌다.

재물은 하늘이 잠시 내게 맡긴 것이라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맡겨졌던 재산 331억원이 사회에 돌려졌다. 본래 내 것이 아닌 재물을 내 것인 양 움켜쥐려는 것은 부질없다. 갑부 김충식은 엽전 한 닢도 놓지 않으려 했지만 하늘이 거둬가니 도리가 없었다. 재물을 부둥켜안으면 재앙이 앗아간다. 이것은 옛날 얘기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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