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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3월 말 산업재해 발생현황 - 노동부통계

1. 산업재해 발생현황

○ 총 괄

구 분

2009.3월말

전년 동기

증감

 

증감율(%)

○ 사업장수(개소)

1,500,284

1,407,569

92,715

6.59

○ 근로자수(명)

13,389,954

12,944,059

445,895

3.44

○ 재해자수(명)

21,509

22,343

-834

-3.73

․업무상사고자수

19,746

19,815

-69

-0.35

․업무상질병자수

1,763

2,528

-765

-30.26

- 사망자수

540

636

-96

-15.09

업무상사고 사망자수

340

365

-25

-6.85

업무상질병 사망자수

200

271

-71

-26.20

○ 재 해 율(%)

0.16

0.17

-0.01

-5.88

○ 사망만인율

0.40

0.49

-0.09

-18.37

- 사고 사망만인율

0.25

0.28

-0.03

-1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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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하루

행복한 하루


살아보니 행복이란 별난 게 아니었다.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아껴주는 누군가와
기분 좋은 아침을 맞는 것, 이것이 진짜 행복이다.
기분 좋은 아침을 시작하라!
행복한 아침은 행복한 하루,
행복한 하루는 행복한 일생이 된다.


- 차인태의《흔적》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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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백혈병 - 한겨레

   [세상읽기] 어떤 백혈병 / 이계삼

»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8년 전의 일이다. 내가 담임을 맡은 반에 백혈병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늘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개인용 식판을 따로 썼다. 큰 병을 앓는 아이를 둔 집안들이 그러하듯 몹시 가난했다. 감기만 걸려도 아이는 응급실로 실려 갔고, 무균실에 며칠씩 갇혔다가 회복되면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아이는 정이 그리웠으므로 마스크 뒤에서 언제나 웃으려 했고 늘 아이들에게 뭔가를 주려 했지만, 자주 외면당했다. 이 아이를 우리 반의 일원으로 자리 잡게 하려는 어설픈 노력으로 알게 된 것은 열네 살 소녀의 생에 깃든 깊은 슬픔이었다. 이를테면, 아이가 품고 다니는 연필 스케치 그림 속 소녀들은 무균실에서 함께 지내다 죽은 친구들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백혈병이란 드라마에 나오듯, 머리에 뒤집어쓴 털모자 하나로 표현되는 외상 없는 질병이 아니라, 집안 살림을 결딴내는 어마어마한 치료비와 항암 치료, 구토, 탈모, 응급실과 무균실, 검사 결과를 기다릴 때의 지옥 같은 초조함 따위의 캄캄한 기억의 덩어리들이다.

황유미, 이숙영, 황민웅, 이 세 사람의 이름을 혹시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들은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였고, 모두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죽었다. 10만명에 3.7명꼴로 발생한다는 이 희귀한 병이 한 기계를 놓고 짝꿍으로 일했던 20대 초반의 두 여성과 그 라인의 유지 보수를 담당한 엔지니어에게 발병했고, 이후 삼성반도체 백혈병 대책위에 접수된 발병 사례만도 22건이다.

재발한 병으로 몸도 못 가누면서도 억대에 가까운 치료비로 노심초사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던 황유미씨는 결국 스물셋에 죽었다. 투병중이던 황민웅씨는 아픈 몸을 이끌고 기어코 둘째의 출생신고를 했고, 얼마 뒤 죽었다. 지난 5월19일, 이들 세 사람을 포함한 삼성 백혈병 피해 노동자와 유가족들이 집단으로 제출한 산업재해 신청은 전원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그들이 작업중에 들이마시는 수십 종의 화학물질의 존재도, 내과학(內科學) 교과서에도 나온다는 백혈병과 화학물질의 명백한 상관관계도, 직접적 증거 없이 간접적으로라도 ‘상당인과관계’가 성립되면 산업재해로 인정한다는 대법원 판례도 소용없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은 우연이었다. 억대의 치료비도, 죽음 앞에 선 자의 산더미 같은 고통도 슬픔도 결국 각자의 책임이었다. 산재 신청을 하겠다는 황유미씨의 아버지에게 회사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버님, 삼성을 이기려고 하십니까? 이길 수 있으면 이겨보세요”라고.

그리고 열흘 뒤인 5월29일,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치러지던 바로 그 시간, 연매출 200조원대의 거대 기업의 경영권을 승계하는 데 고작 16억원의 세금밖에 내지 않은 기상천외한 사술은 대법원에 의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모든 것이 절묘했다. 6 대 5의 아슬아슬한 판결, 태산 같은 사퇴 압력을 버텨내시고 끝내 그 한자리를 지켜 주신 신영철 대법관님, 그 판결이 끝나고 나니 슬슬 신 대법관에게 물러나라는 뜻을 내비치시는 이 사건 1심 재판 삼성 쪽 변호인 출신의 이용훈 대법원장님.

나는 이 글을 야간자율학습이 한창인 우리 반 교실에서 쓰고 있다.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땅으로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도덕, 최소한의 정의마저 쓰레기통에 처박힌 나라에서, 아이들은 이 가파른 삶의 한쪽 벼랑에라도 뿌리내리고자 환한 불빛 아래 공부라는 것을 한다.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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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의 경제학 - 09.06.25 경향

[정태인칼럼]성 평등의 경제학

 

 

 

“참 많은 반대가 있었을 텐데 어떻게 설득을 하셨나요?” 심상정 전 의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노르웨이 ‘아동 성 평등부’ 아르니 홀레 국장의 활기찬 설명으로 방은 후끈 달아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의 출산 전후에 부모 합쳐서 52주의 휴가, 그것도 월급의 80%를 지급하는 조건의, 부럽기 그지없던 법률도 그새 바뀌어서 7월1일부터는 56주란다. 과거에는 휴가를 준다고 해도 외면하던 젊은 남성들이 이젠 95%가 10주의 ‘출산휴가’를 즐기고 덕분에 출산율은 1.96으로 뛰어올라서 대체율(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출산율로 노르웨이에서는 2.1)에 거의 다다랐다.

출산율 끌어올린 노르웨이 정책

그뿐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실천이 요원한 ‘동일 노동, 동일 임금’ 문제는 이미 옛이야기란다.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노동을 해도 여자·남자의 임금이 서로 다르고,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반밖에 안되는 우리 처지에서 볼 때 노르웨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은 경이로웠다.

‘평등과 반차별 옴부드’(LDO)의 모니카 혹스 자문관에 따르면 노르웨이에서는 같은 고용주 아래서 간호사와 의사가 같은 수준의 관리자(예컨대 수간호사와 내과과장)가 되었을 때, ‘동일가치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을 적용하는 문제로 다투고 있다. 설령 시장에서 결정된 임금이라도 여성 위주의 시장과 남성 위주의 시장은 이미 성 중립적이지 않은 상태이니 차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안은 몇가지 사례를 놓고 지금 논쟁 중이지만 그의 말대로 ‘혁명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설마 반발이 없었을까? 홀레 국장의 대답은 단 한 마디였다. ‘생산성’ 즉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 전 사회의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사실로 모두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덧붙이기를 “그래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통계로 노르웨이의 생산성이 미국보다 20%가량 높다”고.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두 개의 그래프가 바로 떠올랐다. 한 나라에 100명의 여성과 100명의 남성이 살고, 둘의 생산성은 똑같은 분포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여성이건 남성이건 1, 2, 3, 4, …, 100에 이르는 생산성을 가진 사람이 한 명씩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남성만 고용한다면 그 나라의 평균 생산성은 50이다. 만일 성평등의 원칙에 따라 상위 50%의 남성과 상위 50%의 여성을 고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평균 생산성은 75로 뛰어오르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생산성 높이는 여성 경제활동

그럼 아이들은 누가 볼 것인가? 그래서 1년이 넘는 유급 출산 휴가를 부부에게 주고 여섯살까지는 전문 인력이 사실상 무료로 육아를 100% 책임진다. 이런 사회복지의 재원이 바로 높은 생산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공기업 이사회의 17%였던 여성 비율을 2년 만에 41%로 끌어 올리고 이제 민간기업의 여성 이사 비율도 같은 수준으로 높이는 협약을 맺은 노르웨이의 비결은 간단하다. 남녀 간의 생산성 분포가 동일하다고, 즉 잠재력이 동일하다고 가정하고 또 증명한 것뿐이다. 그래서 당연히 남성들도 행복하다.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고 높은 생산성 덕에 전체 고용이 늘어났으니 ‘여성의 천국’만이 아니라 노르웨이 국민 스스로 자부하듯 아이들을 필두로 ‘모두의 천국’이 된 셈이다. 우리의 난제 중 난제인 출산율 저하와 교육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다행히 우리의 여성 교육 수준은 이미 세계 최고다. 우리의 미래는 여성에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달려 있다. 괜한 삽질 좀 그만 하고….

<정태인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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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

배려



당신에게 선의를 가지고
정성을 들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 백이 있어도
그대 맘을 알아보고 그대에 맞게 배려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랑이 아니라면
당신은 그들의 사랑에 상처 받으리.


- 유성용의《여행생활자》중에서 -

---- 아쿠. 그림이 예쁘다. 나도 이렇게 그림을 그릴줄 알면 좋겠다. 쓸 곳이 매우 많을 것 같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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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공동체

멋진 공동체


어렸을 때
아주 멋진 공동체 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공동체에 들어가 그곳의 일부가 된다.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육체적, 감정적,
정신적인 부분을 응원하고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만약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다면 그들은 나의 짐을
함께 져줄 것이다.


- 엘리너 와일리의《내 인생과 화해하는 법》중에서 -

 

------ 내가 활동하고 있는 이 공간, 이 공동체가 나와 다른 동지들을 응원하고 지탱하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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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싶은책 읽을책

핸드폰에 메모되어 있던 책들. 핸드폰 정리를 위함.

 

플뢰베르 - 통상관념 사전

호모스피리투스

피셔 파브안 - 위대한 양심

신영식  - 하나뿐인 지구

밤은 노래한다

맑스로 가는 길

토마스 만 - 마의 산

아기들은 어떻게 배울까

신자유주의의 간략한 역사

포스트 워

스위글싱어스 킹스싱어스

젊은 교사에게 보내는 편지

홉스봄의 자서전 - 미완의 시대

세계대공황

붕괴

세계금융고치기

이기현 - 고깔모자 피자가게

독서의 기술

리오휴버먼 - 자본주의의 역사 바로 알기

존 머피 - 금융시장의 기술적 분석

백무산 - 거대한 일상

슈퍼자본주의

심판

페스트

낙원섬에서 생긴 일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김영하)
뇌, 생각의 출현 (박문호)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리 호이나키)
나쁜 기업 (한스 바이스, 클라우스 베르너) 

세잔의 차 (그레그 모텐슨. 이레)

더 리더(베른하르트 슐링크)

라피크_팔레스타인과 나(팔레스타인평화연대 지음 , 메이데이 )

상식의 힘 (차병직/홍익출판사)

어늘날 밤, 전쟁기념탑에서 (페프/파랑새)

인저스티스 (브라이언 해리스 / 열대림)

잠들지 못하는 조선왕릉 (이우상/다할)

스프레차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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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이것은 사람의 말&quot; 6.9 작가선언



이것은 사람의 말   6.9 작가선언


작가들이 모여 말한다.
우리의 이념은 사람이고 우리의 배후는 문학이며 우리의 무기는 문장이다.
우리는 다만 견딜 수 없어서 모였다.

 

 


모든 눈물은 똑같이 진하고 모든 피는 똑같이 붉고 모든 목숨은 똑같이 존엄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은 극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절대 다수 국민의 눈물과 피와 목숨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한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다. 본래 문학은 한계를 알지 못한다. 상대적 자유가 아니라 절대적 자유를 꿈꾼다. 어떤 사회 체제 안에서도 그 가두리를 답답해하면서 탈주와 월경을 꿈꾸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 본연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차라리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다급한 마음으로 1987년 6월을 떠올린다. 박종철의 죽음이 앞에 있었고 이한열의 죽음이 뒤에 있었다. 그 죽음들의 대가로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힘겹게 그것을 가꿔왔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망각할 권리가 없다. 이명박 정권 1년 만에 대한민국은 1987년 이전으로 후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가 하나의 정부인 작가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조직도, 집행부도, 정강도 없다.
 


우리는 특정한 이념에 기대어 발언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아무런 이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중도실용주의’라는 가짜 이념은 집권 1년도 못 돼 폐기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도처에서 헌법 위에 군림하는 독재의 얼굴을 본다. 용산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짓밟는 와중에 여섯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고도 이명박 정부는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여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지만 저들이 행한 일은 위선적인 사과와 광범위한 탄압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론 장악을 기도했고 도심 광장과 사이버 광장에 차벽을 치고 철조망을 세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는 이 정부가 시대착오적인 색깔론과 천박한 관료주의로 문화예술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전직 대통령을 겨냥한 사상 최악의 표적수사와 비열한 여론몰이는 그를 벼랑에서 투신하게 하였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매장되었다.
 


이 모든 일에 적극 가담한 정치검찰과 수구언론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울린 종지기들로 고발한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굴종하고 죽은 권력에는 군림하면서 영혼을 팔고 정의를 내던진 정치검찰들, 증오와 저주의 저널리즘으로 민주화의 역사를 모독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조롱하는 수구언론에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가 저들과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혹해진다. 저들을 여전히 검찰과 언론이라고 불러야 하나. 곰팡이가 온 집을 뒤덮었다면 그것은 곰팡이가 슨 집이 아니라 집처럼 보이는 곰팡이일 뿐이다. 저 권력의 몸종들과 함께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와 보편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달려온 이명박 정권 1년은 이토록 참담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서 우리는 깊은 절망을 느낀다. 저들은 수치를 모르고 슬픔을 모른다. 수치와 슬픔을 아는 것이 사람이고, 사람됨이라는 가치에 헌신하는 것이 문학이다. 우리는 문학의 이름으로 이명박 정부를 규탄한다.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 이것은 과장인가?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종이와 펜이 있다. 그러니 동의하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끝내 저항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원을 갈아엎고 있는 눈먼 불도저를 향해, 머리도 영혼도 심장도 없는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저항할 것이다. 가장 뜨거운 한 줄의 문장으로, 가장 힘센 한 문장의 모국어로 말할 것이다. 사람의 말을,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이니까 해야 하며 사람인 한 멈출 수 없는 그 말을. 아름답고 정의로운 모든 문학의 마지막 말, 그 말을.


 

우리는 작가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글을 씁니다.
우리는 각자의 나라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의 바탕에 언제나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편에 섭니다.

우리는 모였습니다.
참혹한 오늘을 불러온 것도 우리이지만
참다운 내일을 만드는 이도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권의 야만에 분노합니다.
사람의 설 자리가 사라진 현실에 분노합니다.

우리는 보고 싶습니다.
이견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정치가의 얼굴을.
우리는 듣고 싶습니다.
아첨과 왜곡의 목소리가 아니라 공정하고 진실된 언론의 발언을.
우리는 느끼고 싶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확신과 자부를.
우리는 되찾고 싶습니다.
본래 우리 것인 광장과 집과 대지, 스스로 흘러 생명일 수 있는 강물을.
우리는 꿈꾸고 싶습니다.
그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는 사회,
양심과 이성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
자유와 평등은 원래 사람의 것이라 믿고 자라날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를.

우리는 입을 엽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입니다.

 





'한줄선언' 참가자 명단

강경희 강성은 강 진 고나리 고명철 고봉준 고인환 고찬규 곽은영 구효서 권 온 권혁웅 권현형 권희철 김경인 김경주 김경후 김 근 김나영 김남극 김남혁 김대성 김명기 김미월 김미정 김민정 김사과 김사람 김사이 김 산 김선재 김성중 김소연 김 안 김양선 김애란 김 언 김연수 김요일 김윤환 김이강 김이은 김이정 김자흔 김재영 김정남 김정란(소설가) 김지녀 김지선 남상순 맹문재 명지현 문동만 문혜진 박대현 박민규(시인) 박 상 박상수 박성원 박수연 박슬기 박시하 박연준 박정석 박창범 박형서 복도훈 박형숙 박형준 박혜상 방현희 배영옥 백가흠 백지은 서성란 서안나 서영식 서영인 서효인 서희원 성기완 손세실리아 손홍규 송기영 송승환 송종원 신용목 신해욱 신형철 신혜진 심보선 안상학 양윤의 양진오 여태천 오창은 우대식 원종국 원종찬 유용주 유정이 유형진 유홍준 윤성희 윤예영 윤이형 윤지영 이경재 이기성 이기호 이덕규 이도연 이동욱 이만교 이문재 이민하 이선우 이성미 이성혁 이순원 이시영 이신조 이 안 이영광 이영주 이용임 이용헌 이은림 이장욱 이진희 이 찬(평론가) 이현승 이현우(로쟈) 이혜경 이혜미 임수현 임영봉 임지연 장무령 전도현 전성욱 전성태 전형철 정여울 정영효 정우영 정은경 정주아 정한아(시인) 정혜경 정홍수 조강석 조동범 조성면 조연정 조연호 조용숙 조원규 조 윤 조 정 조해진 조형래 조효원 주영중 진은영 차미령 채 은 천운영 천수호 최성각 최진영 최창근 하성란 하재연 한세정 한용국 한지혜 함기석 함돈균 해이수 허병식 허윤진 허 정 홍기돈 홍준희 황광수 황규관 황호덕 총18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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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도...........- 경향 09.06.20

정치에도 ‘스프레차투라’가 필요하다(김학순 선임기자) - 경향 09.06.20 -------------------------

 

데코로, 스프레차투라, 그라지아. 이탈리아 음악가들은 17세기부터 이 세 가지가 어우러져야 감동적이고 장려한 연주가 완성된다고 여겼다. 데코로는 준비와 노력을 의미한다. 이는 연구, 확인, 리허설, 반복 같은 쓸데없어 보이기도 하는 힘든 작업을 통해 준비하는 외로운 과정이다. 스프레차투라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무척이나 쉬운 것처럼 세련되게 해내는 것을 뜻한다. 스프레차투라는 데코로 없이 불가능하다. 데코로와 스프레차투라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 자연스레 나타나는 게 우아한 아름다움인 그라지아다.

이 가운데 스프레차투라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인들이 높이 샀던 미덕이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탈리아 장인 정신의 뿌리다. 스프레차투라는 원래 ‘거만하게 굴다’ ‘경멸하다’ ‘싼 값을 매기다’란 뜻이었다. 르네상스기를 거치면서 ‘힘든 일을 쉽고도 노련하게 해내는 천재의 방식’을 지칭하는 말로 진화했다. ‘무심한 듯하지만 세심하게, 유유자적하면서도 능란하게’가 스프레차투라의 함축미다.

‘기술이 아닌 듯 보이는 기술’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기술을 숨기는 것이 기술’이라는 옛 라틴어 격언이나 ‘기술은 절로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로마 시인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의 말과 맥락을 같이한다. 요절한 천재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무기교의 기교’라는 모순어법으로 한국의 미를 평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은 그 재주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서툰 것처럼 보인다고 했던 노자의 ‘대교약졸’(大巧若拙)과도 상통하는 듯하다.

스프레차투라 정신을 처음으로 정리한 사람은 르네상스 시대의 궁정 문인이자 외교관이었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였다. 그는 1528년에 출간된 <궁정인>에서 귀족들의 예의범절을 상세하게 규정하면서 스프레차투라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궁정 신하는 뭐든지 태연하게 행동하도록 연습함으로써, 예술적 기교를 감추고 말과 행동이 꾸며냈거나 공들여 만든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한다. 힘들게 일을 행하고 그것에 계속 신경을 쓰는 것은 우아함과 기품이 없어 보이며 그가 어떤 일을 행하든 무시하게 된다.”

21세기에 접어들어 피터 데피로와 메리 데스몬드 핀코위시가 함께 쓴 <스프레차투라>(서해문집)에서는 이탈리아가 배출한 천재들의 이면에 감춰져 있는 각고의 피와 땀을 엿볼 수 있다.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작품을 창조하는 과정을 철저히 숨겼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에게조차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후원자에게도 자신의 작업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중간 과정을 공개하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걸작을 대면하는 순간의 경외감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시를 쓰거나 오페라를 작곡할 때, 그림을 그리거나 대리석을 매만질 때, 먼 바다를 항해하거나 의학을 연구할 때도 수많은 이탈리아 천재들은 스프레차투라를 생명처럼 여겼다. 엄청난 집중력과 끈질긴 노력의 산물이었음은 물론이다. 이탈리아 문명의 정수(精髓)인 기능성과 아름다움은 바로 스프레차투라에서 나왔다. 지은이들은 이를 ‘미학적 실용주의’라고도 표현한다. 기품 있는 귀부인의 이상적 덕목도 스프레차투라와 우아미(優雅美)였다.

스프레차투라 정신이 정작 요긴한 곳은 권력을 경영하는 정치권이다. 잔머리나 꼼수, 한건주의는 스프레차투라와 거리가 멀다. 기교의 정치는 한 수 위의 유권자들에게 금방 들통 나게 마련이다. 최고의 정치 기술은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정치공학의 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엔 ‘데코로’에 바탕을 둔 수준 높은 내공이 필수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T. S. 엘리어트는 교활, 표리부동, 비도덕적 책략, 무자비의 상징처럼 알려진 마키아벨리가 실제로는 가장 마키아벨리적이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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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침묵 - 경향 09.06.23

...........(생략)  박 전 대표는 “지도자의 철학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침묵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대선이 다가올 때까지 가능한 한 검증을 피하겠다는 신비주의 전략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친박 챙기기에 대한 의혹까지 겹치면 오해는 배가될 수 있다. ‘경제 대통령’ 구호에 함몰됐던 지난 대선은 교훈을 남겼다. 지도자의 철학에 대한 사전검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사실이다. 검찰이 방송작가의 개인적 e메일까지 뒤지고 공개하는 건 사상 검열이지만,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이는 다르다. 실력과 철학, 세계관에 대해 속속들이 검증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국가 지도자를 꿈꾸는 정치인의 침묵은 직무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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