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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개념2-어느 길이 가장 진보에 빨리 다가서나

어느 길이 가장 진보에 빨리 다가서나
[진보의 개념2] 진보세력은 선취성과 함께 현실의 운동성과 연관가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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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진보의 필수 조건으로 선취성 여부를 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정부주의, 왈러쉬타인주의, 트로츠키주의를 예로 들면서 선취성이 가진 함정을 지적하였다. 이 글에서는 그 함정의 본질을 살펴보고 선취성과 구별되는 진보의 필수적 요건을 살펴볼까 한다.

일반적으로 극좌파로 분류되는 이러한 세력들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무엇일까. 과격해서 일까. 물론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이건 분명히 문제가 있는 지적이다. 87년 당시 직선제 개헌도 “과격”한 것이었고, 김대중도 “과격”했다고 공격받았다. 과격하다는 주장은 색깔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프랑스가 월급의 50% 정도를 세금으로 내고 덴마크는 60%부터 시작하여 점점 올라가는데 이들 나라 수준으로 세제를 개혁하자고 하면 한국사회에서 엄청나게 과격한 주장이 된다. 맞다. 과격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도달해야할 사회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격하기 때문에 틀렸다는 주장은 그 주장의 합리성을 판단하기 이전에 선입관을 개입시키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피해야할 논거 방식이다. 이런 식이면 자비와 사랑을 핵심기치로 내건 석가와 예수도 과격하기 때문에 틀릴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은 한국에 맞는 진보주의, 진보세력 육성에 나서야 할 것이다. 표지는 안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생각의나무, 2001
실제, 본질적 의미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어떠한 형식의 폭력적 시스템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온전한 의미에서 인간다운 사회는 지구촌 어느 구석에서도 굶어죽는 이가 없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무정부주의와 왈러쉬타인주의, 트로츠키주의를 과격하다고 배척하는 것은 유의미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극좌파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여러 문제점이 지적될 수 있겠지만 핵심적인 문제는 하나로 압축된다. 그것은 이러한 주장이 그 내부에서 모순적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그 실현을 저지한다는 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이들의 주장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느린 방도를 제안하고 있다.

예컨대, 유럽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토빈세 도입 반대의 근거로 “유럽의 금융자본 강화를 도와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유럽의 금융자본을 약화시키는 목적이 그것을 미국 금융자본으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세계 금융자본의 약화, 통제가 그 목적이 될 것이다. 그러하다면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식의 통제로부터도 자유롭게 “날뛰는” 미국 금융자본을 통제하는 것이 결국은 유럽트로츠키주의자들이 바라는 유럽 금융자본의 통제도 용이하게 할 것이다. 결국 토빈세의 도입은 이러한 것을 가장 빨리 현실화시킬 방도이지만, 이들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목표를 가장 늦게 실현하는 길을 택하고 만 것이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무정부주의, 왈러쉬타인주의의 핵심적인 문제는 그러한 주의에 근거한 운동이 결국은 그 주의에서 말하는 바의 사회를 가장 늦게 현실화시킨다는 데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극좌파의 주장은 자기모순적이고 결국 무의미한 주장이 되고 만다.

결국 문제는 모든 주의주장은 “현실의 운동성”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야 된다는 것과 직결된다. 다른 말로 하면 결국 문제는 “어느 길이 가장 빨리 그 길에 이를 수 있는 길인가”로 압축된다.

이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를 놓쳤을 때 진보세력이든, 극좌파든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전 세계에서 현 한국 인구를 웃도는 5천5백만 명의 사망자를 낸 2차 대전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찌즘은, 초기에 그 가장 반대편에 있어야 할 좌파, 극좌파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았다. 극좌파, 좌파들은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공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배경은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지만, 핵심적으로는 레닌의 2단계 연속혁명의 본질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혁명 당시 러시아에서 (1)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공격하는 것은 (2) 사회주의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런데 후대의 좌파는 (2)를 보지 못하고 (1)만을 진리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요컨대, 파시즘 하에서는 파시즘을 끝장내는 것이 사회주의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이 흐려진 또 다른 이유는 우파입장에서도 파시즘을 타도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되기 때문이었다. 즉, “우파에게 득이 되는 것은 좌파에게는 독이다”는 선입관이 올바른 판단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요컨대 “무엇이 가장 빠른 길인가”가 모든 논의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이 본질적인 내용이 빠졌을 때 결국은 가장 늦게 가는 길을 택하는 우를 범하고 마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현실의 운동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운동성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을 때야만 진보가 진정한 진보가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의 운동성 쪽에만 집착하여 앞서 말한 “선취성”을 망각한다면 이는 또다른 역편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진보세력은 이 두가지 기준, 즉 선취성과 현실의 운동성 사이에서 끊임없는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보다 구체적인 예는 다음 글에서 다루고자 한다. / 독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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