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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투사란 어떤 유형의 사람이어야 하는가?: 체르니셰프스끼의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해방 투사란 어떤 유형의 사람이어야 하는가?
체르니셰프스끼의 ≪무엇을 할 것인가≫




“정당에서는 필연성이 이미 자유가 된다. 그 결과 정당의 내부규율이라는 막대한 정치적 가치가 만들어진다. 이 규율은 성장잠재력에 대한 판단기준을 제공한다. 정당 생활의 요소로는 줏대(과거의 문화가 주는 압력에 대항한 저항), 절개(새로운 유형의 문화와 생활을 유지하는 데 대한 두려움 없는 의지), 긍지(더 고귀한 목적을 위해 활동한다는 자각)를 들 수 있다.” 이렇게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하나의 정당이 형성되는 데 필수적인 조건에 대해 간결하게 요약했다. 이 요약은 단순히 추상적 사유로부터 획득한 결론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요약의 지대한 의의는 그가 이끌었던 이탈리아공산당의 경험, 더 나아가 코민테른의 경험을 사유를 통해 일반화함으로써 도출한 결론이라는 데 있다. 운동의 새로운 혁신적 요소를 대변하는 노동해방정당은 자신이 대변하는 요소의 특징에 부합하는 성격을 확립함으로서만 형성될 수 있다.



줏대, 절개, 긍지



그렇다면 낡은 것이 가하는 어떤 타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보존할 수 있을 만큼 뿌리를 탄탄하게 내린 새로운 정당의 맹아가 창출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대변하는 이 정당이 붕괴되지 않고서 일관되게 성장하면서 낡은 것을 압도하고 낡은 것을 제거하는 데까지 이르기 위한 선결조건은 무엇인가? 처음 등장하는 새로운 것은 당연히 극도로 미약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이 새로운 것이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누리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오는 거대한 낡은 것에 굴종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수호할 수 있는 이유는 낡은 것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과 우월감, 단호한 의지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람시는 정당 생활의 요소로서 줏대, 절개, 긍지로 요약했던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필수적 요소를 아직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면 어떤 식으로도 새로운 것은 자신을 지켜낼 수 없으며, 불가피하게 낡은 것이 가하는 영향력에 의해 질식당하거나 포섭되어 사라지고 만다. 여기에는 탄압과 회유, 이데올로기와 정치, 문화와 도덕, 관습과 전통, 법과 의회 등 모든 유형의 직간접적 영향력이 포함된다.

새로운 운동의 성장 가능성은 이 줏대, 절개, 긍지가 얼마나 확고하게 자리 잡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만약 이 요소들이 충분히 자리 잡지 못했다면 성장할 수 없으며 살아남을 수도 없다. 노동해방정당의 맹아는 이 요소들이 일정한 수준으로까지 성장하여, 낡은 것이 행사하는 어떠한 영향력에도 굽힘없이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때에 이르러 정확하게 탄생한다. 즉 새로운 것을 반영하여 등장한 모든 맹아들이 생명력 있는 것으로 증명되지는 않으며, 그것이 일정한 발전단계에 도달하여 충분한 수준의 줏대, 절개, 긍지가 확립되고서야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노동해방정당의 맹아는 등장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정당의 맹아는 자신이 확립하고 있는 줏대, 절개, 의지를 부단히 보다 넓은 범위의 노동자계급에게로 확대시켜 나가며, 이런 방식으로 성장하면서 확고한 노동해방정당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러한 요소들이 확립되어 가면 노동해방운동은 강력한 내부규율을 확립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추구하는 과업에 대한 자신감과 부동의 확신, 고귀한 긍지에 입각한 활동은 강제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유지되는 것이며, 따라서 규율은 관료적 강제가 아니라 집단적 영향력으로 전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해방운동에서 각 구성원들의 행위는 성문화된 규약이 존재하느냐의 유무와는 전혀 무관하게 자유의지에 입각한 것이 되며, 규율은 필연성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입각하여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그 결과 노동해방 조직은 내부규율이라는 막대한 정치적 힘을 확립하게 되며, 이는 엄격하게 규율 잡혀 있으며 통일된 세력을 낳게 된다. 따라서 어떤 노동운동 조직의 성장잠재력은 그 조직에서 확립된 내부규율의 정도에 의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내부규율의 정도는 정확히 조직이 확립하고 있는 줏대, 절개, 의지 정도와 일치하며, 그것을 객관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노동해방정당을 건설하는 것이 당면의 핵심과제인 이곳 한국에서도 이제까지 새로운 것을 대변하고자 했으며 노동자당을 창건하고자 했던 크고 작은 무수한 세력이 존재해왔다. 하지만 지금껏 단 하나의 세력도 그러한 임무를 완수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단 하나의 세력도 노동해방정당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생명력 있는 맹아를 창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크고 작은 정치조류들이 쉴 새 없이 나타났지만 그 모든 조류들은 성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낡은 것에 의해 질식당해 붕괴하여 역사의 망각 속으로 사라졌거나, 아니면 낡은 체제의 영향력에 포섭되어 초라한 개량주의 세력으로 변질하고 말았다. 그것은 이들 모두가 낡은 것이 가하는 영향력을 이겨낼 만한 줏대, 절개, 긍지를 확립하는 데 실패했고 당연히 내적규율을 확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관된 노동해방 투사



그렇다면 한국노동운동에서 노동해방정당이 창건 가능한 시기는 언제에 이르러서일까? 그 시기는 부르주아적 요소들이 가하는 강력한 영향력에 맞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줏대, 절개, 긍지를 확립한 정치경향이 등장하는 시기일 것이다. 그것을 확립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일관되게 대변하는 노동해방 정치세력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 이 세력은 정당의 맹아를 확립할 만큼의 충분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한국의 노동해방운동이 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강철 같은 줏대, 절개, 긍지를 확립해야만 한다. 강철 같은 줏대, 절개, 긍지를 확립한 자들은 다름 아닌 노동해방 투사들이며, 이들이 구성하는 조직이 곧 노동해방정당이다. 우리 운동이 진정한 노동자당 건설을 위한 맹아를 형성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이유는 본질적으로 노동해방 투사들이 충분히 육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한 토대는 닦였다. 그것은 노동해방 투사들이 기반하고 있는 사상이 줏대, 절개, 의지가 꺼지지 않고 타오를 수 있도록 충분한 연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사상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현장활동, 문화, 도덕, 조직, 동지, 결혼, 관습, 가족 등 모든 측면에서 낡은 부르주아적 요소가 미치는 영향력에 단호하게 맞설만한 줏대, 절개, 긍지를 확립한 일관된 노동해방 투사로 자신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그런 투사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파악하기 위한 훌륭한 수단으로 1800년대 러시아의 혁명가였던 체르니셰프스끼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권유한다. 그것은 “체르니셰프스끼의 가장 위대한 공적은 올바른 마음가짐을 지닌 진지한 사람은 누구나 다 혁명가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욱 중요한 다음과 같은 것, 즉 혁명가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어야 하며 그는 어떤 행동규칙을 준수해야 하고, 어떻게 그의 목표를 수행해 나가야 하며, 그리고 어떤 수단에 의해서 그것을 달성해야만 하는가를 보여 주었다는 데에 있기”(레닌)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혁명적 의의를 지녔던 체르니셰프스끼의 이 소설은 당연히 자신을 단호한 투사로 단련시키면서 노동해방정당을 창건하고자 했던 위대한 노동운동가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플레하노프, 레닌, 트로츠키, 마야꼬프스키와 같은 러시아의 대표적 혁명가들은 이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레닌은 특별히 이 책을 좋아했으며, 그는 ≪맑스엥겔스전집≫과 나란히 이 책을 꼽아놓고는 틈만 나면 이 소설을 읽었다. 심지어 그는 1902년에 쓴 자신의 유명한 팸플릿 ≪무엇을 할 것인가≫의 제목을 바로 이 소설에서 빌려올 정도였다. 그는 “그 소설은 나의 형을 사로잡았고 나 또한 사로잡았다. 그것은 나를 완전히 압도했다. 그것은 당신의 전 생애를 내걸어도 좋을 만한 훌륭한 소설이다”라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자신이 받은 감명을 표현했다. 체르니셰프스끼의 소설은 단지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만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 아니었다. 맑스 또한 체르니셰프스끼 소설의 의의를 극찬했고, 직접 체르니셰프스끼의 전기를 집필하여 서유럽의 노동해방 운동가들에게 보급하려 했을 정도였다(건강상의 이유로 이 구상은 실현되지는 않았다). 맑스와 그의 아내와 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또 읽었으며, 자신들의 가족생활에서 이 소설이 제기한 규범과 생활방식을 따르려고 했다. 이처럼 당대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이 소설을 극찬했던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 소설이 노동해방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인적 요소로서 노동해방 투사들을 배양하기 위한 방도와 투사의 모범적 상을 뛰어나게 형상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노동해방정당 건설이라는 과업을 앞두고 있는 우리는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영감을 끌어내야만 하며, 이로부터 자신을 어떻게 단련해 나가야만 하는지에 대해 배워야 한다.



체르니셰프스끼



사실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가 그와 같은 혁혁한 의의를 획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체르니셰프스끼는 러시아에서 수많은 투사들을 양성하기 위한 적극적 목적을 가지고 이 소설에 착수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투철한 투사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 소설은 결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삶을 다루지 않는다면 이 소설의 의의를 완전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828년에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대 말에 이미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고 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맑스와는 독립적인 길을 따라 독창적으로 유물론을 받아들였으며, 러시아에서 유물론의 전통을 확립한 창시자였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에서 만든다.”(맑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이러한 유물론적 태도는 당시 러시아의 급진적 조류 중 바쿠닌주의로 대표되는 ‘주의주의’적인 관념론적 태도와 뚜렷하게 구별되면서 사상적으로 양대 경향을 형성하고 있던 체르니셰프스끼 사상의 근간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운동이 전진함에 따라 러시아에서는 체르니셰프스끼의 유물론적 입장이 지배권을 획득해 나가게 된다. 사실 맑스가 체르니셰프스끼의 전기를 집필하여 제1인터내셔널에 보급하고자 했던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인터내셔널에서 발호하던 바쿠닌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데에서 체르니셰프스끼의 유물론적 입장을 옹호하고 전파하는 것이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외부에서는 마치 러시아 운동이 바쿠닌주의를 지지하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었지만, 사실 이미 러시아에서는 바쿠닌주의의 관념론적 입장이 퇴조하면서 체르니셰프스끼의 유물론적 입장이 젊은 층의 다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따라서 ‘러시아 운동가들은 모두 나를 따르고 있다’는 바쿠닌의 허장성세를 폭로하면서 유물론적 입장을 전파하는 데 체르니셰프스끼의 소설처럼 효과적인 것은 없었던 것이다.

체르니셰프스끼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가 유물론적 세계관을 전파하는 데 기여한 측면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서는 제1인터내셔널에서 바쿠닌주의 입장에 섰다가 이후에 이 소설에 충격을 받아 무정부주의를 버리고 맑스주의로 전향한 쥘 게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파리꼬뮌 투사로서 망명 중이던 게드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는 자신의 ‘주의주의’적 입장을 버리고는 ‘유물론’을 받아들였다. 유물론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운동가의 주관적 의지만이 아니라 현실의 객관적 토대에 입각하여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맑스주의로 나아갈 수 있었고, 프랑스에서 맑스주의에 입각한 최초의 정당으로서 사회당을 건설하는 창립자이자 맑스주의를 프랑스에 보급하는 주역이 되었다. 이처럼 체르니셰프스끼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유물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소설은 곧 소설 형식으로 쓰인 유물론의 보고(寶庫)이다.

또한 체르니셰프스끼는 러시아에서 노동해방운동이 발생하기 이전 시기에 혁명적이며 적극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던 ‘인민주의 운동’의 주요한 지도자 중의 하나였다. 1851년에 교사가 된 그는 학생들에게 자유와 혁명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동시대인≫지에 참가하여 정치평론을 통해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나갔다. 레닌은 당시에 그가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해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농업개혁이 도입되기 시작했을 뿐인 당시에 (당시 그것은 유럽에서조차 아직 적절하게 해명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그처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당시의 러시아사회와 국가가 근로인민과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적대적으로 되고, 농민계급이 그들의 토지몰수와 파멸을 미리 예견하고 있던 사회계급들에 의해 지배,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르니셰프스끼와 같은 천재성이 요구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그는 이러한 농업개혁에 저항하고 그것을 저주했으며 그것이 실패하기를, 그래서 러시아 곳곳에서 계급투쟁을 고취시킬 충돌이 발생하기를 원했다.” 이처럼 체르니셰프스끼는 아직 혁명성과 진보적 의의를 잃지 않고 있던 19세기 러시아 인민주의 운동을 대표했다.

그의 영향력이 급진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높아져가자 짜르 당국은 1862년에 그를 체포하여 형무소의 강제노역에 처했다. 그러나 이런 박해도 그의 적극적인 활동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는 검열관의 부주의를 틈타서, 그리고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교묘한 방식으로 자기 주장을 서술함으로써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동시대인≫에 기고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여기저기에서 검열관을 속이기 위한 장치와 생략이 포함된 이 소설은 상당히 난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진지한 운동가들은 이 소설의 거대한 의의를 보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이 소설은 러시아 전역의 혁명적 지식인들을 뒤흔들었다. 이들은 이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능동적이며 위대하고 헌신적인 선각자들의 모습을 따라 인민의 운동 속으로 뛰어들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에 불탔다. 이른바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이 이 소설의 영향력 하에서 시작되었다. 이 소설을 통해 낡은 체제에 맞서고자 하는 줏대, 절개, 긍지를 발전시킨 무수한 젊은 운동가들이 기존 사회가 가하는 전통과 영향력, 억압을 모든 영역에서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이 책을 들고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한마디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후에 볼셰비키로까지 이어지는 러시아의 혁명적 전통의 표현이자 추동력이었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지 않고서는 레닌이 볼셰비즘 성립의 3가지 원천 중 하나로 규정한 ‘러시아의 혁명적 전통’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성공은 짜르 당국으로 하여금 체르니셰프스끼를 더욱 강력하게 억압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나마 누리던 약간의 집필권까지 박탈당한 채 20년간 강제노동과 유배에 시달리다, 1889년에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20여년의 감옥생활과 짜르 정부의 숱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전향하지 않았으며, 일관되게 투사의 자세를 견지했고, 모든 러시아 운동가들의 귀감이 되었다. 체르니셰프스끼는 유배 말년에는 맑스주의에 거의 접근했었다(그는 러시아 농촌공동체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발전을 보면서 그러한 결론에 도달해갔다). 만약 그가 유형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서유럽의 운동과 교류할 수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러시아 노동해방운동의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러시아 운동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체르니셰프스끼의 젊은 추종자들은 제1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지부를 건설했다. 이들은 무정부주의적인 바쿠닌 사상을 거부하면서 확고하게 맑스주의를 지지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플레하노프와 같은 러시아 노동해방운동의 1세대가 탄생했다. 이처럼 그의 삶 자체가 투사의 삶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부터는 이 소설에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노동해방 투사의 상’ 속으로 들어가 보자.



새로운 인간형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은 베로치까, 로뿌호프, 끼르사노프, 라흐메또프이다. 베로치까는 평범한 한 여인에서 혁명가로 성장해 나가는 인물로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당시의 봉건적 러시아에서 여성은 사회의 낡은 찌꺼기들이 모조리 침전되어 이중 삼중으로 억눌림을 당하고 있는 존재였으므로, 베로치까와 같은 여성을 ‘평범한 사람에서 혁명가로 나아가는 전형’으로 도입한 것은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낡은 요소들에 맞서면서 새로운 요소가 성장해 나가는 전형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주인공들인 로뿌호프와 끼르사노프는 기본적으로는 완성된 혁명가의 상을 표현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들이지만 검열을 속일 필요성 때문에 그것을 순수하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따라서 불충분하게만 드러난 혁명가의 상을 보충하기 위한 주변인물로서 라흐메또프가 슬쩍 도입된다. 그와 로뿌호프, 끼르사노프를 결합시키면 그것이 바로 체르니셰프스끼가 제시하고자 했던 완성된 혁명가의 상이다.

이 소설에 등장한 혁명가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살펴보자. 그들은 공히 삶에 있어서 진지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인정할 수 없는 것에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들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어떤 어려움과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일관되게 추구하며, 단호하다. 낡은 사회의 관습이나 편견, 제약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들을 고려하지만 (가령 로뿌호프는 결혼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베로치까를 속물적이고 봉건적인 가정으로부터 해방시키며, 마찬가지로 자살극을 통해 새로운 신분을 얻음으로써 법률적으로 베로치까가 자유롭게 끼르사노프와 재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기발한 재치를 발휘한다) 그것들에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 돌파하면서 이겨나간다. 그리고 자신들 내부에서 새로운 유형의 문화와 생활을 확립하는 데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낡은 사회가 행사하는 압력에 대항한 저항의지로서 줏대, 새로운 유형의 문화와 생활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의 두려움 없는 의지로서 절개의 화신이다. 그런데 이들은 올바른 것과 그른 것(소설에서는 ‘이기주의 이론’이라고 재미있게 포장된 것)을 냉철하고도 극히 현실적인 유물론적 분석에 입각하여 구별해낸다. 그들은 대충 피상적으로 사고하면서 진지하지 못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사물의 바닥까지 파고 들어가는 충분하고도 심사숙고된 분석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며, 한번 결정된 것에 대해서는 단호한 추진력에 입각하여 행동에 옮긴다. 그들은 원대한 이상에 입각하여 행동하지만, 그 이상을 현실이 제공하는 실제 수단을 통해 구현하려 하는 유물론자들이다. 이 소설은 투사들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유물론적 방법을 채택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이 소설에서는 협동조합 작업의 우월성을 제기한다. 그런데 그것을 제기하는 방식은 추상화된 이론을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여공들이 노동하는 데에서 어떻게 집단 작업이 개인 작업에 비해 훨씬 더 효과적이며,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수행하는 노동이 자본가의 감독 아래 강제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에 비해 어떻게 더욱 높은 생산능력을 발휘하는가, 그리고 생활하는 데서도 어떻게 집단생활이 훨씬 더 유리한가를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방식으로, 심지어는 수학적 계산을 통해서까지 보여줌으로써 입증하는 방식이다. 또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현실을 마지막 하나의 요소에 이르기까지 냉철하게 분석한다. 최악의 가능성에 항상 대비하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그들은 말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하며, 말에 대한 책임성에서 확고하다. 그들은 유물론자이자 진지한 사람들이다.



솔직함



다음으로 그들은 자신과 동료에게 진실로 솔직하다. 그들은 자신과 동료를 기만하는 일이라고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맞대면하면서 오류를 인정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원인을 끝까지 파헤쳐 들어가서 실제적인 해결책을 마련한다. 그리고 잘못에 대해서는 남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엄격하게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동료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솔직하게 비판을 가하며 반대로 동료의 타당한 비판은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에게나 동료에게나 솔직하지 않는 것은 가장 커다란 죄악이며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에게는 자신이 택한 삶이 결코 희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런 삶을 택한 것은 그 삶이 자신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기 때문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통해 명예나 부, 높은 지위와 같은 어떤 대가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지 않으며, 단지 자신이 고귀한 목적을 위해 활동한다는 자각(긍지)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이 긍지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이다. 그들은 자신에게나 동료들 간에서나 이 긍지에 입각하여 엄격한 자발적 규율을 강제한다. 그들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상호간에서나 엄격하게 규율 잡혀 있지만, 이 규율은 타율적이거나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발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내적 결속력과 연대성은 강력하다.

가령 체르니셰프스끼가 혁명가의 상을 드러내기 위한 매개체로 설정한 사랑의 감정을 둘러싸고 베로치까, 로뿌호프, 끼르사노프가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 간에 취한 태도를 살펴보자. 로뿌호프의 도움으로 봉건적 굴레로부터 탈출한 베로치까는 그에 대해 커다란 존경심과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 로뿌호프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녀를 구원했고,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베로치까가 성장하여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립적인 인간으로 발전함에 따라, 그녀는 차츰 로뿌호프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기보다는 존경심과 고마움이 겹친 그런 감정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그녀는 로뿌호프와는 성격이 맞지 않았고, 오히려 로뿌호프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끼르사노프를 사랑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 진실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베로치까였지만, 점차 진실을 받아들이게 되며, 이를 솔직하게 로뿌호프에게 털어놓는다. 그녀는 독립적 인간으로 성장하면서 아무리 고통스럽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더라도 진실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솔직함을 얻어갔던 것이다.

진정 놀라운 것은 로뿌호프의 태도다. 로뿌호프는 베로치까가 꿈 이야기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어렴풋이 드러낸 진실을 예리하게 추적해 들어가서 먼저 깨닫는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 생활을 잃어야만 한다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베로치까가 아직 어린 상황에서는 자신이 훨씬 일찍 진실을 파악해야만 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자신을 질책한다. 또한 진실을 받아들이고는 끼르사노프와 베로치까의 결합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한다. 끼르사노프도 마찬가지다. 그는 베로치까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엄격하게 절제한다. 그는 동료인 로뿌호프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을 고려하면서 극도로 엄격하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린 것이다. 하지만 베로치까의 감정이 분명해진 이후에 그와 로뿌호프는 정말로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그들 사이의 동료적 관계는 조금도 손상 받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유로 자신의 불철저함을 들며 서로 책임을 지려 했지 동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하지 않았다.

로뿌호프와 끼르사노프가 취한 이러한 태도는 노동해방 투사들이 자신과 동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만 하며, 어떤 규율을 확립해야만 하는지를 보여준다. 자발적이지만 극도로 엄격한 규율, 자신에 대한 깊은 확신과 동료에 대한 깊은 존경에서 우러나오는 규율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이 규율을 지키지 못했을 때 자신과 서로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취하며, 어떤 기만도 거부하면서 솔직한 태도로 임한다. 즉 이들이 자신과 상호간에 맺는 관계는 노동해방운동, 노동해방정당에 필요한 자발적 내부규율이란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무엇을 할 것인가≫는 투사들이 가져야 할 덕목으로서 줏대, 절개, 긍지가 어떤 것인가, 이들 상호간에 집단적으로 맺어야만 하는 관계의 원칙과 자발적인 내부규율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사물을 유물론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소설의 시대적 제약



그런데 이 소설을 보는 데에서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당시의 러시아 인민주의 운동의 흔적과 시대적 한계가 이 소설에 불가피하게 배어있다는 점이다. 비록 체르니셰프스끼가 이미 유물론을 확립하고 있었으며, 당시 러시아에서는 가장 최초로 계급투쟁과 노동자계급에 주목한 운동가였지만 이 소설이 쓰인 1862년 당시 러시아의 시대적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우선 체르니셰프스끼가 이 소설을 쓰던 당시에는 아직 진정한 노동해방운동은 러시아에서 태동하지 않았으며, 아직 자본가계급이 진보성을 잃지 않았고 민주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것을 반영하여 이 소설에서는 자본가들이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급적 갈등은 형상화되어 있지 않다.

맨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상복을 입은 수수께끼의 여인은 테러리스트 혁명가(이 소설에서는 사냥꾼으로 묘사된다)를 남편으로 두었다가 남편을 잃은 여인이다. 인민주의 진영에서 테러리즘이 번성했던 것을 반영하여 체르니셰프스끼는 테러리스트를 혁명가의 한 부분으로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은 아직 러시아에서 노동운동이 등장하지 않았던 시절, 다시 말해 투사들이 노동자들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지식인 집단에서 배출되던 시절에 나왔다. 이것을 반영하여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당시에 대부분의 혁명가를 제공하던 특정한 배타적 집단, 즉 혁명적 지식인들이다.

아울러 당시는 러시아에서 노동대중의 투쟁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시기였다. 따라서 이 소설은 노동자들의 계급적 투쟁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이란 옷을 만드는 협동조합공장에 참여하는 여성노동자들뿐인데, 이들은 계급투쟁을 통해 해방되기를 추구하는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혁명적 지식인에 의해 만들어진 협동조합공장에 참여함으로써 해방되는 수동적 존재로 그려진다. 물론 이 협동조합공장을 묘사하면서 체르니셰프스끼는 베로치까가 이들을 자주적 존재로 대하고 그들이 스스로 집단적으로 공장을 운영하도록 배려하는 방식으로 묘사함으로써 노동자를 완전히 수동적인 위치로 격하시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소설은 지식인들이 ‘인민 속으로’ 들어가는 데에서 취해야만 하는 태도 즉, ‘인민의 해방은 인민 자신의 운동이다’라는 원칙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인민들, 특히 노동자계급 대중의 투쟁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시기에 이 소설을 썼고, 당연히 그들의 자주적 운동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그들 속에서 떠오르는 투사의 상을 그려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 소설은 당시 러시아의 하층, 다시 말해 가장 평범한 대중 속에서 발생하는 운동과 그 운동 속에서 배출되는 투사의 상을 그려내지는 못한다. 이 약점은 그의 한계라기보다는 그가 발 딛고 있는 시대의 한계였으며, 당시 러시아의 사회운동이 직면하고 있었던 불가피한 한계의 반영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소설을 시대적인 맥락을 고려하면서 읽어야만 하며, 시대가 변화한 지금에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는 가치 있는 것을 추출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 시대의 잣대와 기준으로 이 소설을 보려 한다면 아마 금방 식상해질 것이며,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시대의 맥박을 느낄 수 있으며, 운동을 역사적으로 고려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독자라면 이 소설의 가치를 꿰뚫어 보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어보라



이 소설의 한계는 시대의 한계였으므로, 그것은 시대가 전진함에 따라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 노동해방운동의 등장과 노동자계급의 자주적 투쟁의 발전, 그리고 노동운동의 전진에 따라 평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다수의 투사들이 떠오르게 되면서 러시아소설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이 변화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고리끼의 소설이다.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에서 이제 주인공은 평범한 노동자와 그의 가족이다. 주인공인 평범한 노동자가 거대한 계급투쟁에 참여하면서 노동해방 투사로 발전하는 과정, 마찬가지로 평범한 어머니가 아들의 영향 아래 투쟁에 눈떠가는 과정이 그 소설의 줄거리다. 여기서 노동자들은 더 이상 혁명적 지식인에 의해 위로부터 해방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계급투쟁을 통해 스스로 해방되어 가는 능동적인 존재이며, 투사는 특수한 사회집단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노동대중으로부터 떠오른다. 고리끼는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그 속에서 투사들이 배출되는 훨씬 발전한 운동단계에서 소설을 썼고, 당연히 그것을 반영했던 것이다.

이처럼 체르니셰프스끼의 소설과 고리끼의 소설은 전혀 다른 사회적 조건과 사회적 집단을 반영했다.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는 일치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소설 모두 ‘새로운 것’의 본질적 특성을 반영했다는 점에 있다. 그것을 다시 요약하면, 줏대(과거의 문화가 주는 압력에 대항한 저항), 절개(새로운 유형의 문화와 생활을 유지하는 데 대한 두려움 없는 의지), 긍지(더 고귀한 목적을 위해 활동한다는 자각)이다.

노동해방 투사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알고 싶은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어보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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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개념4-조갑제와 황장엽, 주사파와 민주노동당

조갑제와 황장엽, 주사파와 민주노동당
[진보의 개념4] 한국의 김일성주의자가 진보세력에서 이탈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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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무정부주의, 왈러쉬타인주의, 트로츠키주의 등을 간단하게 언급했는데, 김일성 주의에 대해서도 간략하게나마 논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그런데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몇 가지를 확인해두고자 한다.

우선, 혹자는 한국에 김일성주의자가 한 명도 없다고 할 수 있겠으나, 나는 적어도 한명은 있다고 생각한다. 상상하기도 힘든 살인범이 분명히 우리 사회에 살고 있고, 자신의 전 재산을 헌납하는 이름모를 독지가도 있듯이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는 마당에 특정한 사상, 즉 김일성주의를 받아들인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단정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고작 한 명을 가지고 어떠한 글을 쓴다는 것은 비정상적으로 보일수도 있겠으나 어차피 논쟁은 일대일일 경우가 많으니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아래에 밝히겠다. 이처럼 이 글은 한국에 존재하리라고 판단되는 한 명의 김일성주의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니 행여나 이 글을 보는 수구세력, 수구신문이 한 명을 만 명으로 잘못 읽고 호들갑을 떨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본론에 앞서 또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글의 한계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아직도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행여나 김일성주의자가 이 글에 반박을 하고 싶어도 그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제한적이다. 법에 의해 처벌받는 것을 각오해야 하기에 힘들고, 설령 무기명으로 내용이 전달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실어줄 인터넷 사이트도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류의 논쟁은 근본적으로 불공정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국가보안법 폐지만을 기다려 필요한 논쟁을 무기한 연기하는 것 또한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이제는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선언했고 이러한 문제를 논함에 있어 김일성주의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어느 정도의 타협선을 찾아 글을 전개할까 한다. 즉, 김일성주의의 틀린 점을 지적하기 보다는 왜 김일성주의와 김일성주의자가 서로 모순적인지, 왜 그들의 행보가 어리석은지에 대해 집중해서 논하려고 한다. 이 정도로 타협한다면, 김일성주의자의 반론이 없더라도 너무 일방적인 논쟁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이 글에서 말하는 김일성주의자란, 주체사상을 수용한 것, 더 구체적으로 김일성 수령론을 수용한 자를 일컫는다.

이런 김일성주의자는 그 가능성 면에서 한나라당 내에도 있을 수 있고, 조선일보 내에도 있을 수 있으며 민주노동당 내에도 있을 수 있다. 나는 한나라당과 조선일보 내에 있는 김일성주의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민주노동당 내에 있을 수 있는 한 명의 김일성주의자에 대해 논하도록 하겠다.

이러한 것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소지도 있으나, 이미 말했듯이 이는 민주노동당의 진성당원 7만 명 중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한 명의 김일성주의자에 대한 글일 따름이다.

짐작컨대, 민주노동당 내에 한 명의 김일성주의자가 있다면 그는 아마 이런 이유에서 민주노동당을 택했을 것이다. 즉, 아마도 김일성주의자는 민주노동당이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 입장에서 사상의 자유를 논하고 북한에 가장 덜 적대적이라는 것을 이유로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려고 결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연유로 기독교인이 전도하듯 김일성주의를 전파하는 곳으로 민주노동당을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러하다면 김일성주의자는 엄청난 착각을 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중에 기본인 사상의 자유를 옹호한다고 해서, 남북화해와 평화공존을 위해 북한에 덜 적대적이라고 해서 김일성주의가 다른 곳보다 잘 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엄청난 착각이라는 것이다. 실제는 그와 정반대로 민주노동당이야말로 김일성주의가 퍼져가기에 가장 어려운 곳이기 때문이다.

진보세력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제일 앞장섰다는 것은 진보세력이 어떠한 형식의 사상 탄압, 양심 탄압, 정치적 자유 억제에도 반대한다는 것이다. 즉, 진보세력이 한국 내에서 이러한 기본적 민주주의적 가치의 수호에 가장 최선두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진보세력은 개인숭배, 정치적 자유 실종, 절차적 민주주의 무시로 대표되는 김일성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진보세력 내에서 김일성주의가 잘 퍼질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거꾸로 한국 내에서 김일성주의가 가장 잘 퍼질 수 있는 곳은 다름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서 무지한 집단이다. 구체적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결사 반대를 외치는, 몸은 21세기 사람이면서도 머리는 몇 세기 전의 사람들이 모인 그러한 곳이 김일성주의가 가장 잘 퍼질 수 있는 곳이다. 즉, 김일성주의자가 전략적 거점으로 삼을 곳은 수구세력, 수구신문의 내부라는 것이다.

김일성주의자에게 한 수 가르쳐 주겠다. 민주주의의 가치에 무지한 이런 이들이 현재 외치는 구호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 외피가 아니라 그 본질적인 사고체계에 주목해야 한다. 그 본질적인 사고체계가 동일하면, 이들을 거꾸로만 세워 놓으면 당신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수구세력의 싱크탱크를 자처하는 조갑제가 평양 주체사상의 거두 황장엽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민주주의 추종자에게 김일성주의를 이식하려면 그의 사상체계를 완전히 해체해야 하는 “고달픔”이 따른다. 하지만, 민주주의 대신 박정희교에 몸담아 개인을 숭배하는 것에 이골이 난 수구세력의 입장에서는, 김일성주의에서 김일성을 박정희로 대체하기만 하면 아무런 저항이 없다. 실제로 황장엽은 조갑제의 우상이 되기 위해 주체사상을 해체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김일성을 욕하는 것으로 그들은 굳건한 동지가 될 수 있었다. 그 사상적 뿌리가 동일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박정희교를 김일성주의로 “개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지 박정희라는 자리에 김일성을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박정희는 친일했고, 김일성은 항일했으니 김일성주의자의 포교가 효과를 볼지도 모르겠다. 박정희의 친일 행각이 너무나 자주 거론되어 맘이 상한 수구세력에게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도 아마 유익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민주노동당 내에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김일성주의자가 하루빨리 민주노동당을 떠나야 하는 첫째 이유이다.

김일성주의자는 그 이유에 다시 한번 주목해주기 바란다. 서두에 밝힌 대로, 김일성주의의 옳고 그름이 논거의 핵심이 아니다. 김일성주의자가 바라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서라도 진보세력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의 골자이다.

요컨대, 음습한 곳에서 독버섯이 잘 자라듯 김일성주의자는 수구세력을 주목해야 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최고로 여기는 진보세력 내에서 무엇을 해보겠다고 하는 것은 독버섯이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곳에서 잘 자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미련한 판단이다.

어쨌든, 한 명의 김일성주의자가 이러한 착각으로 민주노동당에 있다면, 그는 다른 한편 민주노동당의 발전을 바라고 있다고 보아야 맞다. 이는 그가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동의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세력이 융성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이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번 가정을 해보자. 어떤 우연한 계기로, 또는 민주노동당의 영향력을 약화시켜야 할 필요를 느낀 수구세력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검사의 끈질긴 수사로 민주노동당 내의 김일성주의자가 세상에 드러났다고 치자. 이것은 과연 민주노동당에게 득이 될까 해가 될까. 두말할 필요 없이 해가 된다. 그렇지 않아도 서구의 우파수준에도 못 미치는 정책이 과격하다고 공격받는 마당에 이런 사건은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해악을 끼칠 것이다.

따라서 민주노동당 내에 있는 한 명의 김일성주의자는 그 존재 자체로 민주노동당에게 해를 가져오고 발전을 저해한다. 사실, 이런 류의 사건은 한 명이면 족하다. 이 한 명이 민주노동당 내의 간부와 일면식이라도 있다면 파장은 더 클 수 있다. 이것이 한 명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김일성주의자에 대해 이런 류의 글을 써야 하는 다른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일성주의자는 정말 민주노동당을 위하는 마음에서 거기에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예에서 보듯이 그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민주노동당에게는 전혀 득이 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진정으로 민주노동당이 잘되는 것을 바란다면 지금 당장 민주노동당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김일성주의자가 민주노동당을 떠나야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우리나라에서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고 완전한 정치적 자유가 도래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 김일성주의자는 어떠한 행보를 보일까. 십중팔구 그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맞지 않는 민주노동당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퍼부을 것이다. 반대로 민주노동당의 절대다수는 이런 김일성주의자에 대해 체계적이고도 강력한 비판을 가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출당조치를 내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민주노동당 내에 김일성주의자의 존재가 알려져도 민주노동당에게 그렇게 큰 피해가 가지 않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이 김일성주의자에 반대하고 출당까지 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아 김일성주의자가 보이지 않게 숨어 있고, 들리지 않게 속삭이고 있다면 두 번째로 들었던 그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터질 수도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의 김일성주의자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철저하게 보호되고 있다. 김일성주의자가 백주대낮에 상식적인 토론을 벌인다면 그가 두렵기보다는 우습게 될 가능성이 많다. 현재 김일성주의자의 영향력이 1이라면 국가보안법 폐지 이후는 0.01로 줄어들 것이다.

그 존재 자체도 제대로 알 수 없고, 공개적 토론도 할 수 없어 제대로 된 비판과 출당조처 등이 없다는 것을 배경으로 김일성주의자가 민주노동당 내에 있다면 이건 공정한 게임이 되지 못한다. 김일성주의자도 표면적으로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바랄 것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지금 당장 야만적 국가보안법에 의해 보장 받는 당신의 지위를 반납하고 진보세력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기 바란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김일성주의자는 한국의 수구세력과 함께 국가보안법 폐지의 철저한 반대자라고 단언할 것이다.

이것이 김일성주의자가 민주노동당에서 나와야 하는 세 번째 이유이다.

아마, 김일성주의자는 이렇게 항변할지 모른다. “나는 김일성주의를 받아들이라고 할 생각이 없다. 다만, 과도한 친미, 과도한 북한 증오를 교정하는 데 목적이 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렇기 때문에 더 진보세력을 떠나 수구세력 내부로 가야 한다. 진보세력은 그 정도의 인식수준은 되며, 수구세력의 인식수준만 뒤쳐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김일성주의자가 설령 옳다고 하더라도 민주노동당을 대표로 한 진보세력을 떠나야 하는 이유였다.

그러면 김일성주의자는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을까. 글이 길어지는 관계로 이는 다음에 다루도록 하자. / 독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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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개념2- 참여와 진보의 위선 혹은 역설

참여와 진보의 위선 혹은 역설
[논단] 행복하지 않은 참여와 진보, 그리고 우리 안의 위선에 관한 성찰
 
김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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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진보, 폐품좌파, 금간 불판을 넘어
김대중의 정권교체와 노무현으로 이어진 민주정부의 연속 집권으로 우리 사회에 ‘참여’와 ‘진보’란 테제만큼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도 드물것이다.

그러나 87년 민주화 운동의 완성이라며 환호했던 노무현 정부도 어느덧 중반을 지나고 있는 지금, 개혁.진보진영은 두 테제에 얼마나 충실했고 얼마만큼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1/3쯤 채워진 물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기대수준의 차이만큼 다양할 것 같다. 현 정치판에서 그에 관한 논쟁도 곧바로 당돌벌이 소스밖에 되지 않을 것이란 점을 많은 이들은 경험적으로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그 성과의 정도를 말하기 전에 참여와 진보는 ‘마냥 좋은 것’ 또는 ‘그것만이 살 길’라는 일념으로만 달려온 것은 아닌지 자문을 해본다.

개혁.진보진영이 두 테제를 위해 앞만 보고 줄달음쳐 왔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겠지만 기실 우리가 선 자리는 여전히 출발선 언저리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야말로 단순한 참여와 진보가 아닌 ‘어떤 참여’, ‘어떤 진보’이어야 하는 가에 대한 답을 구체화해야 될 때가 아닐까.

‘참여’를 줄기차게 외쳤으나 정작 우리의 삶은 황폐화되었고, 신권력층으로 진입한 개혁장사꾼(개장사)들에게 개뼉따귀만 갖다 바친 참여는 아니었는지, ‘진보’를 강변했으나 관념적 희열을 위해 스스로의 삶은 내팽개친 채 주린 배를 움켜쥐고 단식을 해온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런 참여, 그런 진보가 과연 행복했는가. 국민의 93%가 빈부격차가 심각하고 생활수준은 더 나빠졌다며 절규하고 있다는 오늘의 여론조사가 말해주듯이 많은 이들의 답변이 뻔히 예상되지만 ‘그래도 세상은 전진하고 있다’고 우기면서 습관적인 자위, 히스테릭한 반응으로 정권 또는 기득권 옹위에만 몰입하는 경향도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참여해서 더 나은(진보적인) 세상으로 바꾸자’는 슬로건은 지금까지 꽤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그 집단적 열정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들이 지금 청와대까지 진출해서 쌍꺼풀(?) 수술하고, 재벌연구소 찾아가 경제 공부하며 폼잡는 사람들일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억압과 소외에 짓눌린 탓에 우린 참여와 진보의 참 의미를 돌아볼 새도 없이 남에게 돌던져 머리 터지게 해놓고 ‘그것도 내 자유다’라고 외치던, 해방공간에서 광분하던 민중들의 모습을 답습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머리를 위한’ 진보와 ‘생존을 위한’ 진보

세계가 놀랄 정도로 성장을 해왔고, 문명화되었다는 한국의 자본주의 사회는 오늘날 인구의 절대다수가 비정규직과 실직자, 신용불량자, 신빈곤층이란 ‘제3 신분’으로 떨어져 하루하루 생존의 위협속에 신음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양극화, 초극화로 명명되는 ‘빈곤의 문제’를 가장 심각한 과제로 올려놓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아이엠에프 경제위기 이후 ‘경제성장이, 주식시장의 활황이 덮어놓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란 단순한 사실을 깨닫고 의문을 갖게 되기까지 꼬박 50여년의 세월을 정권과 자본의 잘짜여진 프로파겐다에 현혹되어 충견역할에 머물러 왔던 것은 아닐까.

87년 민주화 운동의 결과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대중들이 가슴속에 품어왔던 ‘참여’의 열기를 쏟아내자 이제는 개장사들이 개혁을 팔아 권력의 중심에 들어서고 곧바로 기만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본색을 들어내며 개혁과 진보의 의미를 누더기로 만들어 버리는 걸 목도하고 있다.

개도 얻어맞을 골목에는 잘 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노 정권마저 임기 중반을 넘어서자 김영삼, 김대중 정권처럼 수구언론과 재벌가의 뒷골목을 드나들기 시작한다.

보다 선명하게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마저도 ‘그들도 권력의 중심에 서면’이라는 의문의 꼬리표를 달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진보를 꽃피우기 위해 국보법이라는 이념적 장벽을 걷어내는데 천명이 넘는 사람이 단식을 해가며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지만 비정규직 악법 철폐와 권리보장 입법 같은 정작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 진보에는 단식을 하며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이 별로 없다.

사회적 무관심에 답답해 죽을 지경이던 사람들이 이따금씩 분신과 자살을 하거나, 찬바람 쌩쌩 부는 고공 타위크레인에 올라가 호소했을 뿐이다.

머리를 위한 진보는 ‘단식’을 하지만 생존을 위한 진보는 ‘단념’을 잘한다.
과연 그런 진보가 누구를 위하여, 누구에게 행복해지기를 두려워 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서민대중의 삶의 질 개선과 행복을 최고의 목표로 하지 않는 진보와 개혁은 짝퉁이요, 위선이며, 쓸모없는 짓이라고 까지 말한다면 오바인가.

와각지쟁(蝸角之爭)

고문을 자행했다는 한 의원은 특종에 굶주린 언론에 의해 전국적인 화제거리로 만들어지지만 800만 비정규직의 현존하는 ‘생존고문’에 우리 사회는 별 관심이 없다.

권력의 처마끝에 주렁주렁 매달리고자 환장한 개장사들의 ‘참여놀이’에는 촌수도 없는 가계도까지 그려가며 분석해대지만 수백만명에 달하는 신용불량자, 실직자, 신빈곤층의 탄생 뿌리와 해결책에는 ‘재미없다’는 것이다.

이기명과 전여옥의 논개잡설 중계와 조갑제의 홈페이지나 뒤지고, 김용갑 의원의 입만 쳐다보며 써갈겨 대는 기자정신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가담항설(街談巷說)이나 즐길 요량이면 차라리 ‘정치 선데이서울’로 제호를 바꾸라고 권하고 싶다.

이런 현상은 비단 언론뿐만 아니라 서민대중은 물론 입만 열면 개혁과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까지 광범위하게 습성화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앞서 예로 든, 잡설에 가까운 정치기사에는 댓글놀이까지 즐기며 왁자지껄한 소동을 빚으면서 방학중 1000만원 짜리 해외연수를 떠나는 부자동네 아이들의 사교육비와 5만원 짜리 교습소를 찾아가는 아이들 그리고 무료급식과 교회 공부방을 전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발로 뛰며 스케치한 기사는 진보적 인터넷신문에 댓글 한 줄 없이 방치돼 있다.

어른들 기억속에 남아 있는 즐거운 방학이 어느덧 우리 아이들에게는 빈곤의 대물림 기간이 되었다는 기자의 고발에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갖고 분노하고 있는가. 틈만나면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우리는 진정 이 나라 교육을 말하고 있기는 한 것일까.

미꾸라지국 먹고 용트림하는 개혁장사꾼들 그리고 우리안의 위선

정치권 특히 열린우리당내에서 개혁파란 이미지만은 놓치고 싶지 않아 안달하는 사람들이 자당이 얼마나 ‘친기업적이고 반서민적인’ 실용주의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 지에 대한 고민과 반발은 커녕 뭐가 문제인지 조차도 모르는 듯 보인다. 이는 비정규직 정부법안을 대하는 그들의 무관심과 안이한 태도만 보더라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정부나 열린우리당의 경제관련 정책담당자들이 분배가 벗겨진 동반성장론의 가면을 쓰고 연일 수구 기득권에 가까운, 친기업 반노동자적 경향성을 노골화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그들이 개혁정당은 고사하고 중도정당에 몸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조차 넌센스(nonsense)이다.

그들 또한 미꾸라지국 먹고 용트림해대는 잘 짜여진 개혁 프로파겐다로 연명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는 개판이고, 노조는 썩었다며 욕하고 뒤돌아서기 좋아하는 서민대중들은 어떤가. ‘비정규직 법안’이 자신들은 물론 향후 자녀 둘 중 하나는, 아니 둘 모두 심한 차별을 강요당하는 제3 신분으로 고착화하는 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얼마만큼 그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을까.

사회적 교섭 참여 여부를 놓고 시너를 뿌리며 저항하는 노조를 욕하는데만 몰두한 채 격렬한 대립의 원인이 정권과 자본, 언론의 일방적인 폭격에 맞서 비정규직 법안 개악을 저지하고 권리보장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전제 하에 전략, 전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던 건 아닌가.

노조를 관료화된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이기주의 집단이라고 비난해도 좋다. 그러나 자신들은 물론 자녀들의 먹고사는 미래가 걸린 비정규직 법안의 해악을 걷어내야 한다는 대명제의 당위성과 절박성마저 씹어 삼켜서는 안된다.

노 정권이 아무리 열녀전(개혁)을 끼고 서방질(보수화)해가며 국보법을 비롯한 4대 개혁입법을 누더기로 만들고, 기만했다고 해서 그 법안 취지의 당위성마저 부정되는 것이 아닌것처럼.

노무현 정권이 재벌, 수구언론과 한통속이 되어 탄생시킨 각종 친재벌적 정책들과 노동 관련법들이 향후 우리 사회 양극화의 심화와 서민대중의 삶의 질 개선을 영구적인 불구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과 비판적 참여 없이 훗날 그 결과를 고스란히 떠안고 ‘먹고살기 힘들다’는 푸념만 늘어 놓는다면 과연 양심적인 일인가.

새 이정표 세우기

이제 우리는 참여속의 진보라는 슬로건 자체보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참여이며 진보인가를 분명히 해야 될 때가 됐다. 서민대중의 삶의 황폐화를 의미하는 경제적 양극화라는 아젠다를 ‘우리 자신의 먹고사는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논쟁과 참여에 관심과 정열를 쏟아부을 때이다.

북핵위기가 고조될수록 한반도 평화와 통일 기반 구축을 위해서도 개성공단 사업 같은 남북경협 활성화라는 경제적 지렛대를 활용, 모두가 상생하는 길위에서 돌파구를 찾겠다는 진짜 실용주의다운 자세를 견지해야 옳지 않을까.

진보적 사회발전이란 정당한 ‘분노’들이 사회적 운동으로 또는 제도적으로 결집, 조직되어 하나의 강력한 힘으로 표출될 때 비로서 실현될 수 있다는 건 수많은 역사적 교훈을 통해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국민의 절대다수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염원하는 경제적 아젠다가 뚜렷하게 형성되었고, 개혁.진보진영은 진가를 발휘할 호기를 맞고 있음에도 자기모순적 시행착오와 분열, 도덕적 헤게모니마저 날려버릴 자중지란을 노정하면서 이렇다할 대응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에 따라 갈수록 보수화되는 정권과 자본의 의지대로 현 상황이 굴러가도록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듯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끝내 현재의 개혁, 진보정당이나 단체들이 성에 안차 ‘새로운 정치주체의 탄생’이란 큰 그림을 그려가야 한다면 비정규직, 실직자 등과 같이 제3 신분으로 굳어지고 있으면서 법과 노조에 의해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의 질 개선과 행복을 지켜주는 등대이기를 고대한다.

개혁.진보적인 단체와 언론매체, 지식인, 네티즌들의 분발을 거듭 당부하고 싶다.

물 한방울 없고, 넘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절망의 담벼락도 여럿이 손잡고 한뼘 한뼘 올라가 기어이 넘어서고 마는 진보 담쟁이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 편집위원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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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개념2-강준만과 진중권, 그리고 진보의 개념

강준만과 진중권, 그리고 진보의 개념
진보의 요건은 선지자적인 선취성 여부, 진보세력내 개별흐름 파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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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와 진보의 위선 혹은 역설
우리나라 정치세력은 크게 수구세력, 중도세력, 진보세력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사실 진보세력 내부에도 상이한 흐름이 존재한다. 그러한 내부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 전의 민주노동당 내 열린우리당과의 관계 관련 문건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북한 핵무기 보유 선언과 관련하여 그 차이가 재차 확인되고 있다.

해당 사안별로 의견을 개진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문제는 그 뿌리가 매우 깊어서 단순히 각종 사안별로 논의하는 것은 본질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개별 사안에 대한 표면적 대립은 보이지 않는 다른 내부의 차이에 근거하고 있으며 결국 문제는 그 근본적 차이로 환원되어 버린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진보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번 글은 그 첫 번째로 해당 주장이나 정치세력이 진보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첫 번째 기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진보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선지자적인 선취성 여부이다.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 만인은 평등하기 때문에 노예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21세기의 누가 보더라도 진보적인 사고라고 인정할 것이다. 파시즘과 나찌즘이 발호될 무렵 이들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발언이 진보적이라는 데에는 이미 6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보았던 우리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다.

눈여겨 볼 것은, 이처럼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명징한 것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그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비유를 빌자면 당시대 사람들은 허구의 동굴에 갇혀 그 2차원적인 그림자가 본질이며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성화가 아닌데도 여성을 나체로 그렸다는 이유로 엄청난 사회적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현재의 관점으로 보자면 마네가 진보적이라기보다 그냥 상식적일 뿐이지만 당시에는 “과격”했던 것이다. “여성의 나체는 성화에서만”이라는 것이 절대 진리였던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국가보안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이러한 것의 살아있는 생생한 예이다. 과거에는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간첩 비슷하게 매도되었고, 실제로 처벌받기도 했다. 그 주장 자체가 금기시된 사회였다. 현재 국민의 반 정도가 국보법 폐지에 찬성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의식 발전의 증거이며 우리가 이 사안에 관해 평가가 바뀌고 있는 과도기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단언컨대 우리의 후손들은 21세기에 국가보안법이라는 구시대의 유물에 대해 폐지논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비문명성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지표로 기록할 것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천년이 흐른 후에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가 사는 지금 사회를 우리가 과거의 노예제도에 대해 그러하듯, 아니 그보다 더하게 야만적이고 후진적이라고 조롱할지 모른다.

예컨대, 우리와 동시대인인 라깡은 자본주의 체제는 정신분열적인 체제라고 하였다. 한 쪽에서는 1년에 8억 명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농산물의 값이 하락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농산물을 바다에 퍼붓고 있다. 한 쪽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병원하나 변변치 못한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 나마 있는 것마저 전투기와 미사일로 박살을 내고 있다. 그 파괴적인 군사예산의 2%를 10년만 투자하면 이 세계의 기아가 사라질 텐데도 말이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측면을 본다면 우리 사회가 불변할 것이고 존재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가진다는 생각이 1천년 후에도 동일하게 평가되기란 힘들 것이다. 서양의 한 사상가가 이런 의미에서 사회가 유기체라고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생물이 진화하듯 우리 사회도 진화한다는 판단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현존 사회와 현존 체제의 불합리한 바를 한발 앞서 지적하는 이런 선취성은 이처럼 당대에는 논란거리가 되지만 수십 세대가 지난 후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는다. 우리의 후손들은 현재에는 극단, 과격이라고 비난받는 주장을 선지자적인 진보적 주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소극적인 자를 진보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핵심적인 이유는 이러한 “선취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 백 가지 이유를 갖다 붙여 이라크 파병을 옹호하더라도 그런 주장이 진보가 될 수 없는 것도 여기에는 가까운 미래에는 상식이 될 “선취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해당 사안이 선취성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퇴행적인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예컨대 반미가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모든 선의 대변자이고 미국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았던 우리 사회에서 반미가 진보적으로 보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하지만, 미국을 증오해서 무고한 미국시민을 학살하는 테러리스트들의 경우를 본다면 반미는 진보가 아니라 증오를 유지, 증폭시키는 매우 퇴행적인 것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선취성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는 보다 세분화된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취성 여부”를 따지기 위한 그 하위 기준으로 “과잉/과소의 문제”라는 기준을 제시한다. 거칠게 말하면 해당 사회에서 과잉화된 주장을 재차 반복하는 것은 선취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진보적일 수도 없다.

즉, 미국시민의 무고한 목숨을 목표로 하는 테러리스트 집단에서 반미는 분명히 과잉이기 때문에 반미는 전혀 선취성이 없다. 즉, 이 해당 사회에서 반미는 진보가 아니라는 말이다. 반면, 미군이 시민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도 변변한 조사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던 우리 사회에서 반미는 엄청난 과소였고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의 반미운동은 선취적이며 진보적이다.

국내의 자타칭 진보인사인 진중권 씨가 효순, 미선의 영정을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 걸었다고 비난했던 것은 이 사람이 우리 사회의 과잉/과소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성원 중 일부에게 반미는 과잉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 전체로 보자면 반미는 분명히 과소였다. 다른 나라 같으면 여중생 사건은 초기부터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몇 달이나 지나서야 겨우 쟁점화가 되었을 뿐이었다는 것이 그 명백한 증거이다.

물론 2005년 현재까지 우리 사회가 여전히 반미가 과소인지는 더욱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따로 쓸 기회가 있겠지만, 대략 본다면 일반적인 반미 감정은 과소단계를 지났으며, 각론에 있어서 미국에 대한 비판 의식을 본다면 여전히 과소의 단계라고 보여진다.

일반적으로 노동운동도 그 자체로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 때 정권 흔들기 용으로 자본가의 유도한 노동자의 파업은, 파업 자체가 항상 진보적인 것은 아니라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90년 대초 영국 한 군수회사의 노동자들이 자신이 실업자가 될 것을 각오하고 회사 폐업을 위한 파업을 한 것은 이러한 퇴행적 파업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우리사회는 분명 자본에 비해 노동 쪽이 취약하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노동운동의 선취성이 인정받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미래에도 항상 그럴 수만은 없다는 점을 확인하자. 비정규직 문제도 노동운동의 불균형성의 한 예이기도 하다.

강준만은 논쟁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던 지역문제와 수구신문의 이미지 조작술을 제기함으로써 진보적이 될 수 있었다. 강준만은 정치적으로 중도세력이지만 적어도 이 두 지점에 있어서 강준만은 국내 진보세력보다 더 선취적이고 진보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작년 총선 당시 호남의 지역감정을 이용하려는 정당을 신랄하게 비판하지 못하고,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던 감정적 이미지 덮어씌우기 방식으로 한 정치인을 매도하기 시작할 때 그는 더 이상 선취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못하게 되었다.

강준만의 이러한 몰락은 정치에 관한 한 우리사회가 아직도 증오의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보세력이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중도세력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수구세력의 이미지 덮어씌우기와 다른 차원으로 진보세력을 비판하는 중도세력을 보기 힘들다. 수구세력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증오만을 먹고 산다. 우리 사회의 건전한 정치토론은 과소이며 감정적 찌꺼기 배출로서의 정치토론은 과잉이다. 따라서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일체의 정치적 주장은 근본적으로 선취적일수도 진보적일 수도 없다.

이외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러 과소/과잉의 불균형이 곳곳에 있을 것이다. 개인의 신체적 차이를 우스갯거리의 소재로 삼는 것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으며, 어린이, 청소년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진보란, 선취성이란 이처럼 거대한 담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곳곳의 자질구레한 문제 속에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과잉/과소”라는 기준은 거시담론이 미처 포괄하지 못한 영역을 볼 수 있는 좋은 수단을 제공한다.

지난 90년 대 북한의 동포가 기아에 허덕일 때 진보세력이 아니라 종교단체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북한돕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우리 사회 진보세력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진보세력 내 한 그룹은 북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으며 다른 그룹은 북한이 기아에 허덕인다는 것을 북한을 깎아내리려는 수구세력의 여론몰이로 판단하여 이 운동에 적극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북한에 대해 과소와 과잉만이 있었던 것이 과거 진보세력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을 하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북한 증오” 과잉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우리 사회의 “북한 증오”가 과잉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하고, 우리 사회의 평화주의세력이 과소라는 것도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 내부의 과잉, 과소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진보세력의 주장을 입맛대로 취사선택하려는 수구언론이 신문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노동조합 비리에 접해 민주노동당이 격렬한 비난을 하지 못한 속사정도 사실은 이러한 전반적인 과잉/과소의 문제점을 고려했던 것이라고 할 때, 균형잡힌 태도가 필요하리라고 보여진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지 한 가지 잊지 말 것은 다른 정치세력과 마찬가지로 진보세력도 그 내부에서 배타적인 편가르기가 과잉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극단적 배타성만을 내세운다면 이는 바로 그 때문에서 선취적일수도 진보적일 수도 없는 것이다.

* 사실, 진보성, 선취성이 아니라 과잉/과소라는 기준틀을 제시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절대적 진보”라는 것을 상정하기 힘든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이를 중심으로 해서 “선취성”이 제기하는 진보에 관한 미묘한 문제에 대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 독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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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개념2-무정부주의와 윌러스타인, 진보의 선취성

무정부주의와 월러스타인, 진보의 선취성
[진보의 개념2] 진보의 ‘선취성’만으로는 진보의 ‘진정성’ 이룰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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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와 진보의 위선 혹은 역설
지난 글에서 진보성의 필수조건으로 선취성 여부가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선취성 여부”의 기준은 매우 미묘한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지금은 핵무기가 논란의 중심에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이런 논란은 코웃음거리밖에 되지 못한다. 군대와 경찰이라는 “국가의 폭력” 자체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들 입장에서는 핵무기로 논란이 이는 것 자체가 비겁이요, 본질 흐리기가 될 것이다. 이들이 보기에, 진보세력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을 격렬히 비난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문제는 국가라는 존재의 “합법적 폭력”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가리는 매우 교묘한 위장술일 따름일 것이다.

이러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입장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선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들이 진보적이지 않다고 판단하기란 어렵다. 인간이 몇 천년 후에도 지금과 같은 식의 군대와 경찰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국가의 모든 합법적 폭력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의 주장이 몇 천년이 흐른 후 어떠한 판단을 받을지 우리는 쉽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무정부주의자들을 진보세력에서 가장 선취적인 자들로 인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과연 어떤 점이 무정부주의자들에게 그러한 지위를 부여하는 데 우리를 주저하게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유사한 예를 좀 더 들어보자.

왈러쉬타인은 현존 세계의 발전을 전혀 “발전”이 아니라고 정의한다. 그에게 있어 의료의 진보는 다른 종류의 질병을 낳았으며, 제 3세계까지 포함한 지구촌 전체를 놓고 보면 우리는 지난 세기 진보한 것이 아니라 퇴보한 것이 된다. 그것도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퇴보한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그가 보기엔 칼 맑스도 산업성장주의에 오염된 비진보적인 사상가로 취급된다.

왈러쉬타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의 노동운동 내부의 정규직에 대한 비정규직 차별 문제는 너무나 사치스러운 논쟁으로 보인다. 그가 보기엔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그가 받는 월급의 적어도 절반을 아프리카의 굶어 죽는 어린 아이 돕기에 써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정규직/비정규직 논쟁 자체가 전 세계 기아문제를 가리는 교묘한 핵심가리기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일은 단지 학문이나 이데올로기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극좌파로 분류되는 유럽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유럽의회가 토빈세를 도입하는 문제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토빈세가 “공산주의자들이나 하는 과격한 일”이라고 공격해 왔던 미국 금융자본으로서는 대환영할 이런 일이 벌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논리적 일관성이 그 내부에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토빈세에 반대한 것은 “토빈세는 결국 유럽의 금융자본 좋은 일만 시켜주기 때문”이었다.

사실 본질적인 문제로 따지자면 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도 진보세력에게는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어차피 좌파는 자본보다는 노동자의 편이기 때문이다. 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보기에 한국의 진보세력이 “재벌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노골적인 “자본가들의 구호”일 것이다. 중소자본가를 이롭게 하고 결국 한국 자본의 질을 높이려는 이런 구호는 “반노동자적인 구호”이고 그 뒤에는 “교활한 자본”이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우리가 무정부주의와 왈러쉬타인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는 진보를 옹호하면서 이들을 비판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이다. 현존 체제가 인류가 이룩한 최고의 체제이며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사고하는 보수주의자에겐 무정부주의, 왈러쉬타인주의, 트로츠키주의는 다른 진보세력과 함께 같이 묶어서 비판하면 되지만 진보세력 입장에서는 이 문제가 그리 녹록치 않다. 무정부주의와 왈러쉬타인주의의 과격성을 비판하자니 자신이 스스로 보수주의자가 되어 버린 느낌이고,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이제까지 해온 모든 주장이 너무나 “수구적”으로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진보세력은 그들의 주장이 너무 과격하다고 말하기가 꺼려질 것이다. 그 이유는 우선, 스스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보를 위해 싸웠던 일마저 과거 군사독재 정권으로부터 “과격”하다고 공격받아 왔기 때문일 터이다.
 
다음으로 일반적 진보주의자에게, 상대가 자신보다 더 한발 나갔기 때문에 즉 더 선취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비판해야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를 비판할 때 그들이 “틀려서”라고 하고 싶지, “너무 진보적이어서”라고 말하기를 주저하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의 근저에는 중도세력이나 수구세력과 같은 입장에서 무정부주의를 비판하기가 꺼려진다는 것도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이 진보인가”는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단지 그 내용의 선도성, 선취성, 본질성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판단컨대, 우리가 다른 준거틀을 가지지 않는다면 무정부주의, 왈러쉬타인주의, 트로츠키주의를 넘어서는 점점 더 근본적인 주장만을 하는 세력이 진보세력의 대표주자라고 하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앞서 제시한 (1) 선취성은 진보의 필요조건이기는 하나 충분조건은 아닐 수 있다는 판단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말해 진보는 필연적으로 선취성을 가지지만 선취성만을 앞세운다고 하여 모두 “진정한 진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선취성만을 내세운다면 진보는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포교에 힘쓰는 종교인에 비하면 종교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선취성과 함께 요구되는 진보의 다른 조건은 과연 무언인가.

이 문제는 다음 글에서 계속하기로 한다. / 독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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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개념2-어느 길이 가장 진보에 빨리 다가서나

어느 길이 가장 진보에 빨리 다가서나
[진보의 개념2] 진보세력은 선취성과 함께 현실의 운동성과 연관가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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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진보의 필수 조건으로 선취성 여부를 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정부주의, 왈러쉬타인주의, 트로츠키주의를 예로 들면서 선취성이 가진 함정을 지적하였다. 이 글에서는 그 함정의 본질을 살펴보고 선취성과 구별되는 진보의 필수적 요건을 살펴볼까 한다.

일반적으로 극좌파로 분류되는 이러한 세력들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무엇일까. 과격해서 일까. 물론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이건 분명히 문제가 있는 지적이다. 87년 당시 직선제 개헌도 “과격”한 것이었고, 김대중도 “과격”했다고 공격받았다. 과격하다는 주장은 색깔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프랑스가 월급의 50% 정도를 세금으로 내고 덴마크는 60%부터 시작하여 점점 올라가는데 이들 나라 수준으로 세제를 개혁하자고 하면 한국사회에서 엄청나게 과격한 주장이 된다. 맞다. 과격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도달해야할 사회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격하기 때문에 틀렸다는 주장은 그 주장의 합리성을 판단하기 이전에 선입관을 개입시키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피해야할 논거 방식이다. 이런 식이면 자비와 사랑을 핵심기치로 내건 석가와 예수도 과격하기 때문에 틀릴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은 한국에 맞는 진보주의, 진보세력 육성에 나서야 할 것이다. 표지는 안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생각의나무, 2001
실제, 본질적 의미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어떠한 형식의 폭력적 시스템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온전한 의미에서 인간다운 사회는 지구촌 어느 구석에서도 굶어죽는 이가 없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무정부주의와 왈러쉬타인주의, 트로츠키주의를 과격하다고 배척하는 것은 유의미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극좌파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여러 문제점이 지적될 수 있겠지만 핵심적인 문제는 하나로 압축된다. 그것은 이러한 주장이 그 내부에서 모순적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그 실현을 저지한다는 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이들의 주장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느린 방도를 제안하고 있다.

예컨대, 유럽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토빈세 도입 반대의 근거로 “유럽의 금융자본 강화를 도와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유럽의 금융자본을 약화시키는 목적이 그것을 미국 금융자본으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세계 금융자본의 약화, 통제가 그 목적이 될 것이다. 그러하다면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식의 통제로부터도 자유롭게 “날뛰는” 미국 금융자본을 통제하는 것이 결국은 유럽트로츠키주의자들이 바라는 유럽 금융자본의 통제도 용이하게 할 것이다. 결국 토빈세의 도입은 이러한 것을 가장 빨리 현실화시킬 방도이지만, 이들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목표를 가장 늦게 실현하는 길을 택하고 만 것이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무정부주의, 왈러쉬타인주의의 핵심적인 문제는 그러한 주의에 근거한 운동이 결국은 그 주의에서 말하는 바의 사회를 가장 늦게 현실화시킨다는 데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극좌파의 주장은 자기모순적이고 결국 무의미한 주장이 되고 만다.

결국 문제는 모든 주의주장은 “현실의 운동성”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야 된다는 것과 직결된다. 다른 말로 하면 결국 문제는 “어느 길이 가장 빨리 그 길에 이를 수 있는 길인가”로 압축된다.

이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를 놓쳤을 때 진보세력이든, 극좌파든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전 세계에서 현 한국 인구를 웃도는 5천5백만 명의 사망자를 낸 2차 대전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찌즘은, 초기에 그 가장 반대편에 있어야 할 좌파, 극좌파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았다. 극좌파, 좌파들은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공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배경은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지만, 핵심적으로는 레닌의 2단계 연속혁명의 본질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혁명 당시 러시아에서 (1)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공격하는 것은 (2) 사회주의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런데 후대의 좌파는 (2)를 보지 못하고 (1)만을 진리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요컨대, 파시즘 하에서는 파시즘을 끝장내는 것이 사회주의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이 흐려진 또 다른 이유는 우파입장에서도 파시즘을 타도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되기 때문이었다. 즉, “우파에게 득이 되는 것은 좌파에게는 독이다”는 선입관이 올바른 판단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요컨대 “무엇이 가장 빠른 길인가”가 모든 논의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이 본질적인 내용이 빠졌을 때 결국은 가장 늦게 가는 길을 택하는 우를 범하고 마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현실의 운동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운동성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을 때야만 진보가 진정한 진보가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의 운동성 쪽에만 집착하여 앞서 말한 “선취성”을 망각한다면 이는 또다른 역편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진보세력은 이 두가지 기준, 즉 선취성과 현실의 운동성 사이에서 끊임없는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보다 구체적인 예는 다음 글에서 다루고자 한다. / 독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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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d Flag

The Red Flag

1
The people's flag is deepest red,
It shrouded oft our martyred dead,
And ere their limbs grew stiff and cold,
Their hearts blood dyed its every fold.

Chorus:
Then raise the scarlet standard high.
Within its shade we'll live and die,
Though cowards flinch and traitors sneer,
We'll keep the red flag flying here.

2
Look round, the Frenchman loves its blaze,
The sturdy German chants its praise,
In Moscow's vaults its hymns are sung
Chicago swells the surging throng.

(Chorus)

3
It waved above our infant might,
When all ahead seemed dark as night;
It witnessed many a deed and vow,
We must not change its colour now.

(Chorus)

4
It well recalls the triumphs past,
It gives the hope of peace at last;
The banner bright, the symbol plain,
Of human right and human gain.

(Chorus)

5
It suits today the weak and base,
Whose minds are fixed on pelf and place
To cringe before the rich man's frown,
And haul the sacred emblem down.

(Chorus)

6
With heads uncovered swear we all
To bear it onward till we fall;
Come dungeons dark or gallows grim,
This song shall be our parting hymn.

(Cho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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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종합부동산세는 '변형된 부유세'인가


[ 심상정 생각 ] 심상정 의원 홈페이지에 올린 칼럼입니다

종합부동산세는 ‘변형된 부유세’인가
- 땅부자만 보유세? … ‘진짜부자’ 금융부자는 왜 모른 척 하나
- 부채 뺀 순자산총액 대상 …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실현해야

1. 종합부동산세의 도입을 둘러싸고 변형된 부유세가 아니냐는 비판 아닌 비판이 나오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부유세에 대한 모독이다.
구구단은 산수이고, 미적분은 수학이다. 숫자를 다룬다고 하여 이 둘을 같이 취급하지 않는다. 종합부동산세를 변형된 부유세라 주장하는 것은 구구단이 변형된 미적분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2. 부동산만 과세대상으로 하는 종합부동산세와는 달리, 부유세는 과세대상에 부동산, 주식, 채권, 예적금 등 모든 자산을 다 포괄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진짜 부자’들인 재벌총수 일가의 재산은 주로 주식 등 금융자산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별장 등과 같은 부동산의 상당부분은 공익재단이나 회사의 명의로 되어 있다. 따라서, 종합부동산세는 진짜 부자들에게는 거의 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특정지역에 사는 ‘적당한 부자’들에게만 힘을 발휘하는 골목대장 수준의 세금이라 할 수 있다.

3. 또 특정 자산에 대하여만 과세를 할 경우 자원배분 면에서 왜곡을 초래할 수가 있다는 점에서 부유세는 자원배분의 중립성을 유지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금융자산에 대한 과세제도가 매우 부실한 우리나라의 경우 부동산에 대한 과세만 강화할 경우 금융시장이 필요이상으로 과열 또는 왜곡될 우려가 있으므로 모든 자산에 대하여 통합하여 과세하는 부유세가 자원배분에 더 긍정적이다.

3. 부유세는 자산총액에서 부채총액을 뺀 순자산을 그 과세표준으로 하는 반면, 종합부동산세는 부동산가액을 그 과세표준으로 하여 개념상으로도 전혀 다른 세금이다. 예를 들어, 부유세와 종합부동산세의 과세기준이 모두 10억원 초과인 경우, ‘갑’은 11억원의 부동산을 취득하면서 취득자금 중 5억원은 부채로 조달한 반면, ‘을’은 순수하게 자기 돈으로 부동산을 취득한 경우를 보자. ‘갑’의 부동산 보유가액은 11억원이지만 순자산은 11억원 - 5억원 = 6억원이 되어 부유세의 과세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반면, 을의 순자산은 11억원이 되어 부유세 과세대상이 된다. 한편, 종합부동산세는 보유한 부동산가액만을 고려하므로 ‘갑’과 ‘을’ 모두에게 동일하게 부과된다.

4. 경제학에서는 소득을 소비지출과 순자산증가분의 합으로 본다. 따라서, 순자산에 대하여 과세하는 부유세를 소득세의 보완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한다. 소득세는 소득의 원천을 포착해야 과세할 수 있다. 그런데, 경제가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은 국가에서는 소득의 원천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탈세가 횡행한다. 이에 따라, 소득의 결과물로 누적된 순자산에 대하여 과세함으로써 소득세를 보완하고자 부유세가 최초로 도입된 것이다.

5. 부유세는 모든 자산을 과세대상으로 하며, 보유한 자산총액뿐 아니라 부채총액까지 고려하여 과세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종합부동산세 보다 훨씬 섬세하고 치밀함을 요구한다. 종합부동산세가 1층짜리 판잣집이라면 부유세는 3층짜리 대리석 건물이다. 부유세 준비 1단계로서 상장주식양도차익에 대한 과세, 금융소득종합과세 강화, 부동산 실거래가 기준 과세, 차명거래 금지, 자영업자 세원파악을 위한 간이과세폐지, 조세특위 구성 등을 목표로 하여 10개의 조세개혁 관련 법안을 발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6. 흔히, 이름 때문에 부유세를 ‘부자에게 세금을 많이 거두는 제도’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부유세가 정착되면 부자에게 그 소득에 걸맞게 세금을 거두는 것 외에 각 개인 및 법인이 보유한 자산 및 부채현황이 투명하게 파악되어 경제가 전반적으로 투명해지는 효과를 가져온다. 경제의 투명화에 미치는 부유세의 긍정적인 역할과 이로 인한 탈세 예방적 효과 때문에 부유세 자체의 세수 크기로만 부유세의 실효성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현재 부유세를 시행하고 있는 외국의 경우 전체 세수에서 부유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부유세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7. 과반수 의석을 지닌 여당이 1층 판잣집 정도의 종합부동산세 하나 갖고 쩔쩔 매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안쓰럽다. 이번 종합부동산세 도입으로 늘어나는 부동산 보유세수는 고작 3천억원 정도이다(종합부동산세 세수는 6-7천억원이지만 기존의 재산세 등이 편입되어 실제 순증가하는 세수는 3천억원 정도에 불과함). 그나마, 부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당정합의 조차 진통을 거듭했다. 얼마 전 정부여당이 주도하여 고가사치품에 대한 특소세를 폐지한 덕분에 4천억원의 세수가 감소하였다. 부자에게 4천억원의 세금을 깎아 주고 그 보다 적은 3천억원을 더 걷는데도 이렇게 우왕좌왕 하니 이들에게 개혁을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8. 또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은 차원이 다른 종합부동산세와 부유세를 동일시함으로써 부유세를 의도적으로 깎아 내리고 있다. 추후 종합부동산세가 도입된 경우를 대비하여 ‘종합부동산세가 도입되었으니 이제 부유세는 필요 없다’는 식의 여론을 조성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감지된다. 그러나 이것은 1층짜리 판잣집을 지어 놓고, 3층짜리 대리석 건물이라고 강변하는 것과 같다.

9. 지난 5월 20일, KBS와 미디어리서치가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69.1%가 부유세 도입에 찬성하였다. 한 세목에 대하여 이렇게 찬성율이 높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 들여 진다. 이에 앞서 한겨레신문이 창간 16돌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우리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44.8%가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선택하였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는 39.2% 만이 선택하였다. 두 여론조사를 연결해 보면, 부유세에 대한 70%의 찬성율이 한국인이 바라는 미래의 사회상과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 북유럽식 복지국가를 바라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부유세는 단순한 하나의 세목 이상의 의미, 즉 보다 공평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평환 사회에 대한 열망의 상징이며 70%의 지지를 받고 있는 부유세를 이미 누더기가 된 종합부동산세와 동일시하는 것은 국민의 열망을 짓밟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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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훈 민주노동당조세담당정책연구원 '부유세와 조세정책'

민주노동당 조세 정책
윤종훈(정책위원)

1. 부유세 실현의 당위성과 일정

2. 민주노동당이 바라보는 세금

3. 소득재분배의 관점에서 본 우리나라 조세제도의 현황

4. 2004년 정기국회에서 입법 발의할 조세개혁과제 1
- 상장주식양도차익에 대한 양도소득세 전면 도입

5. 2004년 정기국회에서 입법 발의할 조세개혁 2
- 부동산 실거래가 과세를 위한 개정안

6. 2004년 정기국회에서 입법 발의할 조세개혁 3
- 금융소득종합과세 강화

7. 2004년 정기국회에서 입법 발의할 조세개혁 4
- 금융자산의 차명거래 금지를 위한 금융실명법 개정

8. 2004년 정기국회에서 입법 발의할 조세개혁 5
- 간이과세제도 폐지

 

 

1. 부유세 실현의 당위성과 일정

 

(1) 한국인이 바라는 사회와 부유세

 

□ 2004년 5월 한겨레신문이 창간 16돌을 맞아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플러스’에 맡겨 벌인 전화 여론조사에서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냐’는 물음에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라는 대답이 44.8%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39.2%)보다 우세하게 나타났음.

 

□ 한편, 2004년 5월20일, 한국방송(KBS)과 미디어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9.1%가 부유세 도입에 찬성했음.

 

□ 부유세에 대한 70% 가까운 찬성은 한국인이 바라는 미래의 사회상과 연결되어 있음.

 

- 미국식 자본주의 보다 북유럽식 복지국가를 더 선호하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부유세는 단순한 하나의 세목 이상의 의미, 즉 복지국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임.

 

- 따라서, 부유세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복지국가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며, 부유세의 실현은 단순히 새로운 세목 하나를 창출한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복지국가를 위한 첫걸음의 의미가 있는 것임.

 

(2) 부유세 실현을 위한 전제 조건

 

□ 정확한 자산 평가 및 세원 포착이 제대로 안 되는 현실에서 부유세는 실현성이 없다고 하지만 이는 반대로 부유세 도입의 강력한 근거가 되는 것임.

 

- 부유세가 최초 도입된 계기는 소득세의 보완적 기능에 있음. 현대적 의미의 소득세제가 정비되기 이전에 소득의 원천은 포착하기 어려운 반면, 부동산과 같은 가시적인 자산은 포착하기 상대적으로 쉬웠음. 예를 들어, 부동산으로부터 발생하는 부동산 소득은 포착하기 어려운 반면, 그 소득의 결과물로서 증가된 부동산 가액은 포착하기 쉬운 점 등을 감안하여 도입된 것임.

 

- 따라서, 부유층과 자영업자에 대한 세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재벌들의 변칙증여가 사회문제가 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부유세 도입의 정당성이 더욱 강하게 제기됨.

 

- 한편, 부유세가 도입되더라도 실효성이 있기 위해서는 자산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함.

 

- 부유세의 과세대상으로서 정확히 평가되어야 할 자산은 ① 부동산, ② 주식 및 채권 등 유가증권, ③ 예적금 등의 금융자산으로 나눌 수가 있음. 민주노동당은 부유세를 도입하기 이전에 이러한 자산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임.

 

- 부유세가 도입되면 1년에 한 번은 자산을 평가해야 하므로 부유세 자체의 세수입 효과뿐 아니라 다른 세목의 세수증대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도 수반할 것임.

 

- 부유세가 도입되면 세정이 복잡해진다고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다른 조세제도가 정착되고 부동산 및 금융거래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효과를 가져와 탈세 및 검은 돈에 의한 비리가 근절될 것임.

 

□ 부유세를 도입하는 것 보다 기존 세제의 강화를 통하여 세수를 확보하고 형평성을 제고하는 편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논리임.

 

- 참여정부의 조세정책에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문은 부동산보유세를 강화한다는 방침임. 그러나, 전국 평균 16%(약 1,500억원의 세수 증대) 정도의 재산세를 인상한 결과 강남구등 부유층이 중심이 된 조세저항에 직면하였고, 그 결과로서 종합부동산세 도입 방안이 애초에 비해 후퇴할 조짐을 보이고 있음.

 

- 이러한 현실에서 기존 세제를 하나씩 강화하여 필요한 만큼의 세수를 확보하고 형평성을 제고한다는 것은 탁상공론에 불과한 것임.

 

- 국민이 바라는 최소한의 복지수준을 충족시키기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서는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세원 발굴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것임.

 

(3) 부유세 실현 일정

 

□ 2006년 상반기에 부유세 법안을 발표할 계획임. 이에 따라 부유세 실현의 준비 1단계로서 이번 정기국회에 다음의 개혁법안을 입법 발의 할 것임.

 

- 개인이 보유한 주식을 정확한 파악하고 평가하기 위해 상장주식양도차익에 대한 양도소득세 과세 제도를 전면 도입할 것임.

 

- 부동산의 실거래가 평가를 위한 개혁법안으로서 1세대1주택 비과세 제도를 주택양도소득공제 제도로 전환, 양도소득세를 실거래가 기준으로 과세, 취득세 및 등록세의 과세표준을 실거래가로 전환, 부동산 이전등기시 실거래가를 등기부에 기재하는 방안 등을 도입할 것임.

 

- 예적금등의 금융자산 보유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금융소득종합과세를 강화할 것임.

 

- 차명거래를 금지하기 위해 금융실명법과 상속증여세법을 개정할 것임.

 

- 자영업자의 세원을 노출시키기 위해 간이과세제도를 폐지할 것임.

 

□ 비상장주식 평가방법의 개선, 채권 보유 현황의 파악 등과 같은 기타 개혁 과제는 2005년에 추진할 예정임.

 

2. 민주노동당이 바라보는 세금

 

(1) 복지의 수단으로서의 세금

 

□ 세금이 사회보장의 재원으로 쓰일 때 복지의 수단이 됨.

 

□ 신자유주의자들은 ‘분배를 강조하면 성장을 저해한다.’는 논리를 이데올로기처럼 퍼뜨리고 있는데, 실제로 분배가 성장에 끼치는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도 무시할 수 없음.

 

- 사회복지는 경기변동이 일어났을 때 특별한 대책을 세우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경기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함. 불황기에 정부가 실시하는 사회복지정책은 개인의 가처분소득을 증가시켜 유효수요를 증대시킴으로써 경제성장에 기여할 수가 있으며, 호경기에 누진적 조세제도는 개인의 소득증가분의 일부를 정부로 이전시킴으로써 경기과열을 자동적으로 조정하게 됨.
특히, 현재 한국경제 불황의 주요 원인이 국내의 소비수요의 부족에 있는 현실에서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큼. 일부에서는 부자가 돈을 써야 경기가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부자들은 고가수입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국내 소비수요 확대와 상관성이 크지 않음. 오히려 돈이 없어 생활필수품 조차 제대로 소비할 수 없는 서민들의 가처분소득을 증대시키는 분배정책이 현재의 상황에서는 경기회복에 더욱 더 큰 힘이 된다고 볼 수 있음.

 

- 사회복지제도는 막대한 자금을 정책적으로 동원할 수 있어 경제성장에 필요한 대규모 자본을 축적할 수 있음. 예를 들어, 국민연금기금을 대규모 투자사업에 동원한다면 경제성장의 기반조성에 기여할 수 있는 것임.

 

- 사회복지제도는 저소득자 또는 여성의 노동력 상실을 방지하고 손상된 노동력을 회복시켜 경제성장에 기여하고 있음. 예를 들어, 직장 내 또는 지역에 보육시설을 확장한다면 직장여성이나 자영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음.

 

- 사회복지제도는 관련 산업을 활성화시킴으로써 경제에 간접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고 있음. 영세민을 위한 임대주택건설이 건설경기의 활성화를 가져오고, 의료보호제도가 의료수요를 증가시켜 관련 산업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이 그 예임.

 

- 사회복지는 소득재분배기능을 통해 계층간의 대립을 피할 수 있게 하여 사회에너지를 경제성장에 집중시킬 수 있게 함.

 

- 사회복지는 개방경제체제하에서 긍정적인 투자 분위기 조성에 기여함. 한국에 근무하는 외국인 근로자와 그 가족들에게 한국인과 같은 수준의 높은 복지혜택을 부여할 경우 국제사회는 한국에 대해 호의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어 투자 유치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됨.

 

(2) 완전고용의 수단으로서의 세금

 

□ 민주노동당의 노동정책인 연대임금정책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은 완전고용 달성 또는 완전고용 근접 상태의 실현의 중요한 수단이 됨.

 

□ 연대임금정책은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의 원칙을 뜻함. 이 연대임금정책은 다음과 같이 산업합리화를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와 산업 전체의 생산성을 향상시킴.


임금                             기업의 수익성에 따라
                            A    결정되는 임금 수준

       C            O                D  연대임금정책에 따른 임금수준

                      초과이윤 
       B

 


                    M                   수익성

 

 

- 위의 그림에서 AB선은 연대임금정책 이전의 임금결정선이고, CD선은 연대임금정책 이후의 임금결정선임. AOD 부분은 수익성이 높은 기업이 얻는 초과이윤이고, BOC 부분은 수익성이 떨어지는 기업의 손실분임.
 
- 연대임금정책을 채택하면 수익성이 OM선 좌측에 있는 비효율 기업들은 시장에서 퇴출되므로 산업 전체를 보면 생산성 상승을 가져오게 됨.

 

- 문제는 비효율 기업의 퇴출로 발생한 실업자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인데, 여기서 저수익 부문에서 발생하는 실업자들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고수익 부문으로 이동시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됨. 이를 해결하는 것이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임.

 

-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불황기에는 공공부문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내고 호황기에는 산업간, 지역간 노동인력 수급의 불균형을 조정해 냄으로써 완전고용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말함..

 

- 이처럼 저수익 기업에서 발생한 일시적 실업자들에 대한 실업수당 지급, 불황기의 공공사업을 통한 재정지출, 노동시장 조정기능을 담당할 기구의 운영비 지출 등에 조달되는 세금은 완전고용의 수단이 되는 것임.

 

3. 소득재분배의 관점에서 본 우리나라 조세제도의 현황

  (자세한 내용은 ‘첨부 자료 1’ 참조)

 

(1) 소득불평등도의 국제비교를 통한 조세의 소득재분배 기능

 

□ 근로소득과 자영업소득, 재산소득, 그리고 사적이전소득의 합으로 정의되는 시장소득의 기준으로 소득불평등 수준을 국제적으로 비교하여 볼 때 우리나라는 매우 양호한 수준임.

 

- 시장소득 기준 OECD 평균 지니계수는 0.382인 반면, 1996년 기준 우리나라의 지니계수는 0.302임.

 

- 그러나, 시장소득에는 정부가 세금을 거두고, 그 재원을 바탕으로 공적이전지출을 시행하는 정부의 소득재분배 기능이 빠진 상태에서의 소득개념으로 시장소득의 지니계수가 조세의 소득재분배 기능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않음.

 

□ 시장소득에 공적이전소득이 더해지고 사회보장부담금과 직접세의 조세항목을 차감한 소득으로 정의되는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소득불평등 수준을 국제적으로 비교하여 볼 때 우리나라는 양호한 상태가 아님.

 

- 가처분소득 기준 OECD 평균 지니계수는 0.272인 반면, 1996년 기준 우리나라의 가처분소득 평균 지니계수는 0.298로 높은 편임.

 

- 가처분소득은 공적이전소득과 조세를 통한 정부의 소득재분배 역할이 고려된 소득개념임.

 

□ OECD 평균 시장소득 지니계수(0.382)와 가처분소득 지니계수(0.272)의 차이가 큰 반면, 우리나라의 시장소득 지니계수(0.302)와 가처분소득 지니계수(0.298)의 차이는 거의 없음. 이는 우리나라의 조세가 소득재분배 기능을 거의 하고 있지 못함을 뜻하는 것임.

 

(2) 우리나라의 2000년 이후 소득불평등도 변화추이

 

□ 우리나라의 2000년 이후 조세집중도 추이를 보면, 담배소비세를 제외한 전체 세목에서 조세집중도가 낮아지고 있음.

 

- 조세집중도는 소득계층별로 세부담이 얼마나 집중되어 있는지 나타내는 지표로서 일반적으로 조세집중도가 높을수록 조세부담이 고소득층에 치우쳐 있어 소득재분배 효과는 높다고 볼 수 있으며, 조세집중도가 낮을수록 소득재분배 효과는 낮다고 볼 수 있음.

 

- 조세집중도가 낮아지는 추이로 볼 때 2000년 이후 우리나라 조세의 소득재분배 기능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음.

 

□ 2000년 이후 총소득에서 소득세를 차감한 후의 지니계수를 보면 조금씩 상승하였음.

 

- 이는 소득공제 확대 및 세율인하로 2000년 - 2002년 동안 소득세 부담이 약 17.9% 하락하면서 생긴 결과로서 소득세율의 인하로 인한 세부담 경감이 주로 고소득층에 집중됨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것임.

 

(3) 현행 조세체계의 문제점

 

□ 2002년 기준 우리나라의 국세 중 간접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60% 으로서 외국(미국 6.7%, 일본 41.6%, 영국 42.9% 등)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임.

- 간접세 비중이 높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조세구조가 그 만큼 역진적임을 뜻하는 것임.

 

□ 2000년 기준 우리나라의 총조세 중 개인소득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14.6%로 OECD 평균 26.0%에 비교하여 매우 낮은 수준임.

 

- 2000년 기준 우리나라의 GDP 대비 개인소득세의 비중은 3.8%로 OECD 평균 10.0%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임.

 

- 개인소득세는 조세 중 가장 누진적인 조세로서 개인소득세의 비중이 높을수록 조세의 소득재분배 기능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음. 우리나라의 개인소득세 비중이 외국에 비해 지나치게 낮아 조세의 형평성에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됨.

 

(4) 결론

 

□ 조세부담률이 소득재분배에 미친 영향을 분석해 보면, 조세부담률의 상승은 세후 지니계수를 완만하게 하락시켜 소득재분배에 순기능을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연구결과임. 다만, 소득세의 증가율이 소비세의 증가율 보다 커야 하며 누진적인 소득세의 증가율이 클수록 소득재분배 효과는 더욱 더 커지게 됨.

 

□ 우리나라의 조세부담률과 국민부담률은 선진국에 비해 낮은 편이고, 향후 복지재정에 대한 수요의 증가를 고려할 때 조세부담률과 국민부담률이 추가로 상승할 여지가 있음. 다만, 소득세에 대한 추가적인 세원 확보를 통해 소득세의 비중을 높여야 조세의 소득재분배 효과를 제고하는 방향으로 조세부담률이 상승할 것임.

 

4. 2004년 정기국회에서 입법 발의할 조세개혁과제 1

  - 상장주식양도차익에 대한 양도소득세 전면 도입
 
(1) 상장주식양도차익에 대한 과세의 당위성

 

□ 현재 개인 소액주주의 상장주식양도차익에 대하여 과세하지 않음으로써 다음과 같은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됨.

 

- ‘땀흘려 일한 대가인 근로소득에 대하여도 세금을 거두는데, 주식투자로 돈 번 것에 대하여는 왜 세금을 걷지 않느냐?’ 는 반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함.

 

- 2%의 인원이 80%의 주식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상장주식양도차익에 대하여 소득세를 과세하지 않는 것은 이들에 대한 과도한 특혜이며 소득세의 소득재분배 기능을 포기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음.

 

- 법인의 상장주식 양도차익에 대하여는 과세하면서(상장주식 양도차익이 법인의 과세표준에 포함되어 법인세가 과세됨) 개인의 상장주식 양도차익에 대하여 비과세하는 것은 상장주식 소유자의 인격에 따라 차별 과세하는 것임. 이로 인해 사실상 법인이 주식투자를 하면서도 명의는 임직원 개인명의로 투자를 하는 변칙거래를 부추키는 결과를 초래함.

 

□ 상장주식 양도차익에 대한 비과세는 자원의 배분을 왜곡시킴.

 

- 이자 및 배당소득에 대하여는 과세를 하면서 상장주식 양도차익에 대하여는 과세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은행권 보다 주식시장에 자금이 더 몰리게 할 뿐 아니라, 배당을 목적으로 한 주식투자가 아니라 단기적인 시세차익을 목적으로 하는 투기적인 주식투자를 조장하고 있음.

 

□ 비상장주식의 이동상황은 국세청에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지만, 상장주식의 이동상황은 그렇지 못함. 비상장주식의 양도차익은 과세대상이지만, 상장주식의 양도차익은 과세대상이 아니기 때문임. 이로 인해 상장주식의 거래가 자금세탁이나 탈세의 도구로 변질될 가능성이 매우 많음.

 

(2) 상장주식양도차익 과세에 대한 반론

 

□ 상장주식양도차익에 대하여 소득세를 과세하게 되면 세후 수익률이 낮아지므로 주식시장으로부터 자금이 대규모로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는 반론이 제기됨. 특히, 우리나라의 주식시장에서 외국인의 비중은 매우 높으므로 외국인 투자자가 대량으로 이탈할 경우, 주식시장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주장함.

 

□ 이 제도의 도입으로 선의의 소액주주의 세부담이 증가함.

 

□ 1988년에 주식양도차익에 대한 과세제도를 도입했다가 증시가 폭락한 대만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제도를 섣불리 도입해서는 안 됨.

 

(3) 자금이탈로 주식시장이 혼란에 빠진다는 반론에 대하여

 

□ 상장주식양도차익에 대한 과세제도의 전면 도입으로 사실상 영향을 받게 되는 개인 소액주주가 보유한 주식의 시가총액은 전체의 13%에 불과함.

 

- 2003년 말 기준 시가총액 기준 주식소유 분포를 보면, 정부가 4.56%, 기관투자자 15.58%, 일반법인 18.75%, 외국인투자자 37.67%, 개인투자자 23.44% 임.

 

- 정부는 납세의무가 없으며 기관투자자와 일반법인은 이미 주식양도차익에 대하여 법인세를 납부하고 있음. 또한, 외국인투자자의 대부분은 조세협약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벌어들인 주식양도차익에 대하여 자국에서 자국 세법에 의거하여 세금을 내게 되므로 이 제도의 도입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 2001년 기준 26.4%의 개인투자자 중 대주주는 13.3% 이고 소액주주는 13.1% 임. 대주주는 현행 세법에 의해서도 주식양도차익에 대하여 과세되므로 사실상 13% 이내의 소액주주만 영향을 받게 됨.

 

- 일정한 액수의 소득공제제도(연간 일천만원)를 도입한다면 소규모로 건전한 투자를 하는 소액주주의 대다수는 보호가 될 것임.

 

□ 상장주식양도차익에 대한 과세를 반대하는 논리로서 대만의 실패 경험을 자주 인용하나, 대만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음.

 

- 처음부터 종합과세제도를 채택하였음. 이로 인해, 갑작스러운 누진율 적용과 종합소득세를 신고납부해야 하는 불편이 개인투자자들을 불안하게 만든 것임.

 

- 법인에 대하여도 새롭게 과세하게 되었음. 우리나라의 경우는 법인에 대하여는 이미 상장주식양도차익에 대하여 과세를 하고 있지만, 대만의 경우는 법인 역시 이때 비로소 주식양도차익에 대하여 추가적으로 세금을 내야 했으므로 개인과 마찬가지로 큰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음.

 

- 투자자들에 대한 충분한 사전 홍보 없이 시행 3개월 전에 전격적으로 발표함으로써 혼란을 가중시켰음.

 

- 이와 같은 실패 원인에 대하여 사전에 충분히 대비한다면, 큰 혼란 없이 주식양도차익 과세 제도를 정착시킬 수 있을 것임.

 

(4) 상장주식양도차익과세의 기본방향

 

□ 세무행정의 복잡성, 충격완화를 고려해 볼 때,  처음에는 신고분리과세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함.

 

- 다만, 원천징수 없는 단순신고분리과세일 경우, 과세가 납세자의 신고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어 적절한 세원관리가 어렵게 됨. 반면, 매 주식 양도시 마다 원천징수를 한다면 소득세가 거래세로 인식되어 주식거래를 저해하는 문제점이 있음.

 

- 따라서, 매분기 마다 증권회사에서 원천징수하고, 이를 근거로 납세자가 신고, 정산하는 원천징수후 신고분리과세가 바람직함.

 

□ 기존의 주식에 대한 양도소득세 표준세율이 20%이므로 그대로 준용하고, 소득공제액과 분기 중 양도차손이 발생할 수 있음을 고려하여 원천징수세율은 10%로 함.

 

□ 개인투자자들의 급격한 세부담 증가에 의한 자금이탈을 막기 위해 소액투자자들에게 기존의 양도소득기본공제 연 250만원 외에 추가로 연 750만원의 소득공제제도의 도입이 바람직함.

 

□ 당해연도 주식투자에서 손실을 볼 경우, 향후 1년간 양도차익에서 공제하는 것을 허용함.

 

□ 주식취득가액의 평가는 이동평균법으로 함. 수익률을 계산하는 증권회사의 전산시스템은 대부분 이동평균법에 의해 주식취득가액을 평가하고 있으므로, 이에 따르는 것이 제도를 조기 정착하는데 도움이 될 것임.

 

5. 2004년 정기국회에서 입법 발의할 조세개혁 2

  - 부동산 실거래가 과세를 위한 개정안
 
(1) 1세대1주택 비과세 폐지 및 주택양도소득공제 도입

 

□ 1세대1주택 비과세 제도는 부동산 실거래가를 파악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음.

 

- 1세대1주택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비과세되므로 양도자가 양도소득세의 신고의무가 없음. 이로 인해 과세관청이 그 거래가액을 수집할 수 없게 됨.

 

- 1세대1주택 비과세 제도는 양도자와 취득자의 상호견제기능을 상실케 하여 거래가액 은폐시도를 조장함. 양도자는 양도가액을 낮게 신고해야 유리하고 취득자는 취득가액을 높게 신고해야 유리한 것이 일반적임. 이러한 양도자와 취득자간의 이해충돌은 담합에 의한 가격조작을 어렵게 하여 실지거래가액의 신고를 유도하는 효과를 가져옴.

 

- 그러나, 양도자가 1세대1주택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거래가액을 어떻게 신고하던 상관이 없으며, 취득자 역시 장래에 1세대1주택에 해당될 것으로 기대하는 경우에는 역시 거래가액에 크게 상관하지 않아 상호견제기능이 상실되는 것임.

 

□ 1세대1주택 비과세제도는 조세부담의 형평성에도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음. 예를 들어, 지방에 1억원 짜리 소규모 주택 2채를 소유한 사람이 어느 한 주택을 양도하여 2천만원의 양도차익이 발생한 경우 양도소득세를 납부하게 되는 반면, 서울에 5억원 짜리 주택 한 채를 소유한 사람이 그 주택을 양도하여 1억원의 양도차익이 발생한 경우 양도소득세가 비과세됨.

 

□ 1세대1주택 비과세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주택양도소득공제 제도를 도입하면 대부분의 서민은 사실상 비과세의 혜택을 받게 됨.

 

- 주택양도소득공제 제도는 2 이하의 주택을 보유한 세대가 3년 이상 보유한 주택을 양도할 경우 2억원을 소득공제하는 제도임.

 

- 2000년부터 2003년 까지 주택양도소득 현황을 파악한 결과, 양도차익이 2억원을 초과하는 양도건수는 전체의 1%에 불과한 반면, 1%가 차지하는 양도차익은 전체의 30 - 90%를 차지하고 있음.

 

- 이는 주택양도소득공제액의 도입이 99%의 납세자에게는 실질적인 비과세 혜택을 주면서도, 나머지 1%를 대상으로 양도소득의 상당 부분을 과세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임.

 

(2) 양도소득세를 원칙적으로 실거래가 기준으로 계산

 

□ 부동산에 대한 양도소득세를 실거래가 기준으로 계산하도록 일원화해야 함.

 

- 다만, 취득가액의 실거래가 파악이 안된 상태에서 당장 이 제도를 시행할 경우에는 혼란만 가중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2005년 1월 1일 이후에 취득한 부동산부터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양도소득세를 계산하도록 한 후 취득가액의 실거래가에 관한 정보를 계속 누적시켜야 할 것임.

 

(3) 유상 취득하는 부동산의 취득세 및 등록세 과세표준을 실거래가 기준으로 산정함

 

□ 2005년 1월 1일 이후 취득하는 부동산부터 실거래가로 양도소득세를 계산하는 것과 보조를 맞추어 이때부터 유상 취득하는 부동산에 대한 취득세 및 등록세도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계산하도록 하고, 추후 국세와 지방세 과세당국 양쪽에서 신고가액을 상호 대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임.

 

□ 취득세 및 등록세의 세율은 기존의 1/2로 낮춤.

 

- 취득세 및 등록세의 과세표준을 실거래가 기준으로 할 경우 현재 보다 과세표준이 급상승하여 세부담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됨.

 

- 유상 취득하는 부동산에 대한 취득세 및 등록세의 세율을 1/2 정도 인하하여야 할 것임. (노영훈 저 “실지거래가격 신고에 따른 적정세율 추정 및 제도적 실행방안” 에 의하면, 취득세 과세대상이 되는 부동산의 과세표준을 실거래가로 전환할 경우 부동산 과세표준이 2.2배 정도 증가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음.)

 

(4) 부동산 등기에 관한 법률 개정

 

□ 부동산 관련 조세의 실지거래가액 과세원칙이 제대로 정착되려면 과세당국이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실거래가액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하는데, 부동산 이전 등기시 부동산등기부에 실제계약서에 의한 실거래가액을 공시하도록 하는 방법이 매우 유효함. 등기부에 거래가액을 기재하도록 부동산등기법 개정이 필요함.

 

□ 현행 제도상 이전등기 신청시 제출하는 검인계약서 상의 거래가액이 부동산 등기부에 기재되는 거래가액이 될 것이므로, 부동산등기특별조치법에 검인계약서를 허위로 기재할 경우 처벌하는 조항을 신설하여야 할 것임.

 

6. 2004년 정기국회에서 입법 발의할 조세개혁 3

  - 금융소득종합과세 강화
 
(1) 금융소득 종합과세 기준인하의 필요성

 

□ 2002년 8월, 헌법재판소는 소득세법 제61조 [자산소득합산과세]에 대하여 위헌 결정을 내렸음. 이로 인해 현재는 부부의 금융소득 합계액이 8천만원이 넘어야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에 포함되어 사실상 기준금액이 2배로 증가하게 됨.

 

□ 2004년부터는 소득세법에서 당연종합과세 대상 금융소득(비영업대금의 이익, 상장법인 대주주 배당, 비상장법인의 배당)을 규정한 조항이 삭제됨.

 

- 이로 인해 오직 금융소득이 4천만원을 초과하는 자만이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자가 됨. 이는 현 기준금액을 유지할 경우, 2002년 기준으로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자의 수는 일만오천명 정도의 수준이 됨.

 

- 전 국민의 0.03% 만이 대상자가 되는 금융소득종합과세 제도는 껍데기만 남은 제도일 뿐임.

 

□ 금융소득종합과세의 강화는 조세부담의 형평성을 제고함.

 

□ 금융소득종합과세의 강화는 차명거래를 효과적으로 방지함으로써 금융거래의 투명성을 제고함.

 

(2)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 인하시 추가 대상 인원 및 세수 추계

 

□ 자산소득합산과세에 대하여 위헌결정이 내려지기 전에도 금융소득종합과세의 기준이 너무 높아 기준금액을 2천만원 정도 내려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음. 따라서, 부부합산과세에서 개별과세로 바뀐 현 제도하에서는 그 기준금액을 1천만원 정도로 내려야 할 것임.

 

□ 금융소득종합과세의 기준금액을 1천만원으로 인하할 경우 대상인원은 약226,000명, 추가적인 세수는 약9천억원으로 추산됨.

 

(3)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 인하 반대론과 그 허구성

 

□ 금융소득종합과세를 강화하면 해외투자자금이 대거 빠져 나갈 것이라는 논리는 현실적인 국제조세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공론에 불과함.

 

-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각 조세조약에는 이자 및 배당소득 등에 대하여 제한세율이라는 제도를 두고 있음. 이는 해외투자자가 받는 이자나 배당소득 등에 대하여 일정 세율이상의 세율을 적용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임.

 

- 따라서, 금융소득에 대하여 해외투자자는 우리나라 세법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조세조약에 정해진 제한세율에 의해 세금을 내면 되는 것임. 우리나라가 맺은 조세조약에서 이자나 배당에 대한 제한세율은 대개 10 - 15% 수준으로 결정되고 있음.

 

□ 제도권 금융시장의 자금이 대거 빠져 나갈 것이라는 논리의 허구성은 이미 현실에서 검증되었음.

 

- 금융소득종합과세의 최초 시행을 앞 둔 1995년 말 - 1996년 2월의 기간 중에 이동한 자금은 약 6조5천억원으로 1995년 9월 기준의 개인보유 금융자산 잔액 442조원의 1.5%, 우리나라 금융시장 규모(비금융부문 보유 금융자산) 900조의 0.7%에 불과한 수준임.

 

- 금융소득종합과세가 재시행된 2001년말 기준 개인부문 금융자산 보유액을 보면 시행 전인 2000년말에 비해 오히려 늘어났음.

 

- 이러한 결과는 금융소득종합과세의 최초 시행 및 재시행으로 금융시장에 심각한 악영향 거의 없었다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는 것임.

 

7. 2004년 정기국회에서 입법 발의할 조세개혁 4

  - 금융자산의 차명거래 금지를 위한 금융실명법 개정
 
(1) 차명거래에 대한 제도적 허점

 

□ 현행 금융실명법으로 가명거래를 막을 수는 있지만, 주민등록증 등으로 확인되는 명의로 이루어지는 차명거래나 도명거래를 막는 데는 속수무책임.

 

□ 대법원 판례는 금융거래에 있어서 명의신탁약정의 효력을 매우 강하게 인정하고 있어 현행 법체계에서 차명거래를 막는 것은 매우 어려움.

 

□ 금융소득종합과세가 실효성 있게 정착된 경우 차명거래를 방지하는데 강력한 수단이 되지만 현행 금융소득종합과세는 이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있음.

 

□ 탈세, 탈법의 목적으로 명의신탁을 남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상속증여세법 제45조의2에는 명의신탁재산에 대한 증여의제 규정을 마련하고 있음. 그러나, 이 규정에 적용되는 자산을 “권리의 이전이나 그 행사에 등기 등을 요하는 재산(토지와 건물을 제외한다)”으로 제한하여 예적금 등의 금융자산을 제외시켰음.

 

(2) 금융실명법의 개정

 

□ 차명거래 및 도명거래 금지 조항을 신설함

 

□ 명의신탁약정의 효력을 무효로 하는 조항을 신설함

 

- 이로써 신탁자는 수탁자(명의인)에게 명의신탁약정을 근거로 하여 예금반환채권의 양도를 요구하지 못함. 다만 신탁자는 수탁자에게 다른 법에 의거하여 부당이득의 반환 청구를 행사하여 재산권을 되찾을 수는 있으나, 이 과정에서 명의신탁의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 후술하는 바와 같이 과징금과 기타 형사처벌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함.

 

□ 도명거래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신규 금융거래 체결시 명의인에게 금융거래의 체결 내용을 통보하도록 하는 조항을 두어야 함.

 

□ 이 규정을 어겼을 경우 과징금과 형사처벌 조항을 둠.

 

(3) 상속증여세법

 

□ 금융자산의 차명거래가 있는 경우 명의수탁자가 명의신탁자로부터 증여받은 것으로 보아 명의수탁자에게 증여세를 부과하는 조항을 신설함.

 

8. 2004년 정기국회에서 입법 발의할 조세개혁 5

  - 간이과세제도 폐지
 
(1) 부가가치세의 과세 체계

 

 ① 일반과세자 (세율 10%)

 

□ 일반과세자의 경우 매출업자가 세금계산서를 2장 발행하여 한 장은 매입업자에게 제공하고 나머지 한 장은 자신이 보관함. 부가가치세 신고기한에 매출업자와 매입업자는 각각 발행된 세금계산서에 근거하여 부가가치세를 신고납부하는데, 납부할 부가가치세는 매출세액(매출액 X 부가가치세율)에서 매입세액(매입액 X 부가가치세율)을 뺀 금액으로 산출됨.

□ 위의 표를 보면, 한 상품이 원재료공급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전달될 때 까지 4단계의 사업자를 거치게 되고 각 단계에서 사업자들은 각각 10의 부가가치세를 납부하게 되어 전체적으로 보면 40의 부가가치세를 납부하게 됨. 한편, 소비자가 상품을 구입할 때 원래 매입액 400과 부가가치세 40을 합한 금액인 440을 지출하게 되는데, 소비자가 지출한 부가가치세 40은 각 단계에서 사업자가 납부한 부가가치세의 합계액과 같음.

 

□ 즉, 부가가치세를 납부하는 주체는 사업자이지만 실제로 그 부가가치세는 소비자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임. 이와 같이 부가가치세를 납부하는 사람과 실제로 이를 부담하는 사람이 다르다고 하여 부가가치세를 간접세라 함. 

 

□ 한편, 부가가치세제의 중요한 기능은 크로스 체크에 의해 매출누락을 방지하는 것임. 세금계산서가 2장 발행되어 매출업자와 매입업자가 각각 보관하고 이를 근거로 각각 부가가치세를 신고하기 때문에 매출업자가 매출을 누락할 수가 없게 됨.

 


② 간이과세자 (세율 2% - 4%)


□ 간이과세자는 세금계산서를 발행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매출 누락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움. 매출을 누락하기 위해서는 매입시 세금계산서를 받지 않아야 함. 예를 들어, 매출을 50%로 축소 신고하였는데 매입시 세금계산서를 전부 받은 경우에는 매입액이 매출액 보다 더 큰 기현상이 나타나 매출을 누락한 사실이 발각될 수 있기 때문임.

□ 위의 표에서 보듯이 간이과세자가 납부하는 부가가치세는 2%의 세율이 적용되는 일부 사업자를 제외하고는 일반과세자 보다 더 많게 됨.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자가 간이과세제도를 선호하는 이유는 매출을 누락시킬 수가 있기 때문임. 사업자의 매출누락은 소득세 탈세로 곧바로 이어짐.

 

□ 한편, 간이과세자의 매출누락은 이들과 거래한 일반사업자들의 매출누락과 연결됨. 즉, 간이과세제도의 문제는 단지 간이과세자 당사자의 탈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세금계산서 수수질서를 무너뜨려 전반적으로 실물거래의 투명성을 해침으로써 자영업자 전체의 세원파악을 어렵게 함.

 

(2) 간이과세제도의 현실적 모습

 

□ 간이과세제도는 영세사업자들의 납세협력비용을 줄인다는 취지에서 도입되었으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탈세를 유도하는 부정적인 면도 가지고 있음.

 

□ 2002년 현재 간이과세자는 전체 사업자의 46.5%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이들이 내는 부가가치세는 전체 부가가치세수의 0.2%에 불과함.

 

-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로 볼 때, 연간 매출액이 4,800만원도 안되는 사업자가 46.5%를 차지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비정상적임.

 

- 간이과세자는 일반과세자와는 달리 세금계산서의 교부의무가 없어, 매출을 누락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함. 이러한 유혹 때문에 개인사업자는 가능하면 간이과세자의 우산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함.

 

□ 간이과세제도는 간이과세자 자신들의 탈세를 유혹할 뿐 아니라, 일반과세자와의 거래에서 세금계산서 수수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일반과세자들의 탈세를 유도하기도 함.

 

□ 개인사업자의 부가가치세 탈세를 위한 매출누락은 종합소득세의 탈세로 곧바로 이어짐.

 

- 과거 개인사업자의 탈세 규모를 추정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개인사업자는 50% 정도의 소득세를 누락시키는 것으로 나타남.

 

(3) 간이과세제도 폐지의 필요성

 

□ 간이과세자의 비율과 과세인원 비율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보면, 간이과세자의 비율이 낮아질수록 과세인원비율은 높아지고 있음. 이는 간이과세제도가 개인사업자의 소득파악에 역작용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임.

 

□ 간이과세제도를 폐지할 경우 영세업자의 세부담이 증가하므로 서민경제를 더욱 위축시킬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음.

 

- 현행 부가가치세법은 연매출이 24,000,000원 미만인 사업자는 부가가치세 납부의무가 면제되는데, 2002년 기준으로 이에 해당하는 사업자는 전체 사업자의 40%에 달함. 즉, 간이과세제도를 폐지하더라도 전체 사업자의 40%(자영업자의 43.7%)에 해당하는 영세사업자는 세부담이 전혀 증가되지 않음.

 

- 자영업자의 43.7%가 월매출이 200만원도 안된다고 신고한 비정상적인 현실에서 어느 정도를 영세업자로 보아야 하는지 기준을 잡기는 어렵지만, 단순히 1/3씩 나누어 영세업자 - 중간소득자 - 고소득자 로 분류한다고 했을 경우, 자영업자의 43.7%가 그대로 보호받는 개정안이 영세업자의 생존권에 큰 영향을 준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음.

 

 - 간이과세자에서 일반과세자로 전환될 경우, 모든 사업자가 다 부가가치세 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며, 가장 많이 늘어나는 경우도 연간 22만원 정도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자영업자가 간이과세제도 페지에 대하여 반대하는 이유는 부가가치세 부담 때문이 아니라 세원노출을 꺼려하기 때문임.

 

- 일부 자영업자가 간이과세제도의 폐지에 대하여 반대하는 진짜 이유가 역으로 조세정의 차원에서 반드시 실현시켜야 할 이유가 되는 것임.

 

□ 간이과세제도의 페지로 부가가치세 제도가 정착되어 자영업자의 세원이 제대로 파악될 경우 주로 고소득 자영업자의 세부담이 증가됨. 이는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온 자영업자와 근로소득자 간의 세부담의 불공평은 물론, 자영업자 내부에서의 불공평을 해결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임.

 

(4) 제도 정착을 위한 대안

 

□ 자영업자의 납세순응도를 높이기 위해 복잡한 세금계산서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하고, 세금계산서 발행 프로그램을 개인사업자에게 무료로 배포할 필요성이 있음.

 

□ 간이과세제도를 갑작스럽게 폐지할 경우 혼란이 생길 수 있으므로 법 개정 1년 후부터 시행토록 하며 유예기간 1년 동안 납세자에게 충분한 홍보기간을 가져야 할 것임.

 

□ 간이과세자의 급격한 세부담 증가를 완화시키기 위해 간이과세자가 일반과세자로 전환됨으로써 늘어나는 세부담 증가분의 일부를 3 과세기간 동안에 세액공제하는 보완제도를 도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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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세-무상교육-무상의료>의 실현 가능성, 문성준


1.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정책 실현 가능성


(1) 제시한 정책이 그 사회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가
(2) 정책을 추구하는 주체가 처한 권력 관계로 보아 정책을 도입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

(2)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민주노동당이 제시하는 90%의 정책·공약은, 당장은 실현 가능성 없음. 민주노동당이 '당'이 된 이유는 노동자·민중에게 필요한 정책을 '도입·실현'하기 위해 권력을 키우고자 함임.(지금의 권력관계에서도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정책을 일부 실현하기도 함. 이동보장법률 등이 그 예.)

어떤 정책이든, (2)의 기준과는 달리 (1)의 기준으로도 평가받음.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1)의 기준에 의한 평가도 사실은 이데올로기 투쟁임. 어떤 정치세력이 제시한 정책이 맘에 들지 않는 또 다른 정치세력은, 이를 부정하기 위해 온갖 '객관적 지표'를 제시해 가며 실현 가능성을 훼손함. 이는 우파나 좌파나 다 똑같음.(우파끼리 좌파끼리도 그러함. 민주노동당 내에서도 그러함.)

<현실 상황-그로 인한 문제점-정책 대안-정책 효과>를 논리적이고 일관성을 갖도록 구성하여 대중들에게 제시, 그들로부터 그 정책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 바로 정책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과정임. 이 과정에서 정책에 대한 지지 기반의 계급적 속성이 드러나게 되어 있음. 즉,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 보면 부르조아지들의 세련된 비판을 되받아칠 논리는 마련해야 하나, 그들의 세련된 비판 때문에 당정책을 심각하게 수정할 이유가 없음.(수정하면 계급적 속성이 무뎌져 당의 정체성이 수정될 수 있음. 즉, 지지 기반의 이탈이 형성되고 결국 지지 기반이 달라짐.)


2. <부유세-무상교육-무상의료> 정책의 실현 가능성


(1) <무상교육-무상의료>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획기적으로 국방예산을 감축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민주노동당의 주장임. 민주노동당 국가 예산 정책은 언제나 국방예산 감축을 적시하고 있음. 다만, 현재상황에서 국방예산을 아주 세세하게 분석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 현재의 정보 수집의 한계(국가권력에 대한 당의 권력의 약소함)를 고려한다면 앞으로는 더욱 적극적으로 국방예산의 감축(동아시아 평화 프로세스의 구체화와 함께)을 주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임.

(2) <부유세>로 얼마를 거둘 수 있는가

정하기 나름임. 민주노동당은 16대 대선에서 처음으로 <부유세> 과세 기준을 순자산 10억으로 제시했었는데, 3억으로 정할 수도 있고 30억으로 정할 수도 있음. 그리고 세율/누진율도 정하기 나름임. 따라서 사회적 필요에 따라 6조를 거둘 수도 11조(16대 대선에서 제시한 수치)를 거둘 수도 있음. '사회적 필요'가 곧 '사회적 쟁점'은 아님. 따라서 <부유세>의 '사회적 필요'를 어떻게 '사회적 쟁점'으로 형성하느냐에 따라 도입과정에서 부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세금을 거둘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음. 세수의 액수는 <부유세>라는 이름으로 미리부터 정해진 바가 아님.

(3) <부유세>만으로 <무상교육-무상의료> 재원이 마련되는가

민주노동당은 <부유세> 도입과 함께 이런저런, 그러나 상호 유기적인 조세 개혁으로 사회복지에 투여할 재원을 확보하는 바를 정책으로 삼음. <무상교육-무상의료> 등 사회복지 재원의 확보는, 돈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둔다는 조세 형평의 실현과 함께 불합리한(혹은 부당한) 세출을 줄임으로써 가능함. 즉, <무상교육-무상의료>의 재원을 <부유세>만으로 확보할 이유가 없음. 그리고, <부유세> 도입 등 조세 개혁과 국방비 감축은 충돌하는 정책이 아님.

(4) <부유세-무상교육-무상의료> 정책의 실현 가능성

<부유세-무상교육-무상의료>는 한국의 경제력을 달성했던 서구의 대부분 국가는 이미 도입하고 있는 정책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 따라서, '제시한 정책이 그 사회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가'라는 기준으로 볼 때는 한국사회에서 무리한 정책이라 할 수 없음. 다만, 민주노동당이 '정책을 도입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라는 기준으로 볼 때, 민주노동당은 더욱 성장해야 함. 앞서 말했듯이, 정책의 사회적 필요를 대중들에게 설득하여 지지를 획득하는 과정이 바로 정책 실현의 과정임을 확인할 때 비로소, 왜 민주노동당은 <부유세-무상교육-무상의료>를 주장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짐.

(5) 정책 도입에 대한 저항

<부유세> 등 조세 개혁 조치는 당연히 힘있는 자들로부터 저항이 큼. 마찬가지로 한반도 평화의 정착과 군축을 통한 국방예산의 획기적 감축 또한 힘있는 자들로부터 저항이 큼. <부유세> 도입에 대한 저항을 이유로 <부유세> 도입보다는 국방예산의 획기적 감축이 세수 확보에 더 현실적이라는 근거는 없음. 수구 꼴통을 없애버리면 당연히 공평한 과세와 평등한 재정 운용이 가능하나, '수구 꼴통 없어져라'라고 외친다고 수구 꼴통이 없어지는 게 아님. 민주노동당이 공평 과세로서 <부유세>를, 평등 재정으로서의 <무상교육-무상의료>를 외치면서 대중들로부터 지지를 얻는 과정이 수구 꼴통의 입지를 줄여 정책을 실현하는 과정임.


3. 결국에는,


<무상교육-무상의료>가 한국 노동자·민중에게 필요한 정책이라면, ①정책의 실현 경로를 합리적으로 구성하고 그 재원을 확보할 방안을 제시해야 하며, ②정책을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여 그 정책을 도입할 수 있는 힘을 갖도록 대중들로부터 지지를 획득해야 함.

<무상교육-무상의료> 정책이 이 사회에 필요하다는 점을 설파하여 지지를 얻는 만큼 정책 실현의 가능성이 증대되므로, 민주노동당이 <무상교육-무상의료>의 재원으로 주요하게 제시하고 있는 <부유세> 등 조세 개혁에 대한 저항을 이유로 현재의 당 정책을 '사기'라고 한다면, 민주노동당은 어떠한 정책도 제시해서는 안됨.(한반도 평화·통일, 미군 축출 등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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