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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개념2-강준만과 진중권, 그리고 진보의 개념

강준만과 진중권, 그리고 진보의 개념
진보의 요건은 선지자적인 선취성 여부, 진보세력내 개별흐름 파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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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정치세력은 크게 수구세력, 중도세력, 진보세력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사실 진보세력 내부에도 상이한 흐름이 존재한다. 그러한 내부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 전의 민주노동당 내 열린우리당과의 관계 관련 문건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북한 핵무기 보유 선언과 관련하여 그 차이가 재차 확인되고 있다.

해당 사안별로 의견을 개진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문제는 그 뿌리가 매우 깊어서 단순히 각종 사안별로 논의하는 것은 본질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개별 사안에 대한 표면적 대립은 보이지 않는 다른 내부의 차이에 근거하고 있으며 결국 문제는 그 근본적 차이로 환원되어 버린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진보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번 글은 그 첫 번째로 해당 주장이나 정치세력이 진보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첫 번째 기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진보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선지자적인 선취성 여부이다.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 만인은 평등하기 때문에 노예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21세기의 누가 보더라도 진보적인 사고라고 인정할 것이다. 파시즘과 나찌즘이 발호될 무렵 이들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발언이 진보적이라는 데에는 이미 6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보았던 우리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다.

눈여겨 볼 것은, 이처럼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명징한 것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그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비유를 빌자면 당시대 사람들은 허구의 동굴에 갇혀 그 2차원적인 그림자가 본질이며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성화가 아닌데도 여성을 나체로 그렸다는 이유로 엄청난 사회적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현재의 관점으로 보자면 마네가 진보적이라기보다 그냥 상식적일 뿐이지만 당시에는 “과격”했던 것이다. “여성의 나체는 성화에서만”이라는 것이 절대 진리였던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국가보안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이러한 것의 살아있는 생생한 예이다. 과거에는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간첩 비슷하게 매도되었고, 실제로 처벌받기도 했다. 그 주장 자체가 금기시된 사회였다. 현재 국민의 반 정도가 국보법 폐지에 찬성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의식 발전의 증거이며 우리가 이 사안에 관해 평가가 바뀌고 있는 과도기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단언컨대 우리의 후손들은 21세기에 국가보안법이라는 구시대의 유물에 대해 폐지논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비문명성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지표로 기록할 것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천년이 흐른 후에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가 사는 지금 사회를 우리가 과거의 노예제도에 대해 그러하듯, 아니 그보다 더하게 야만적이고 후진적이라고 조롱할지 모른다.

예컨대, 우리와 동시대인인 라깡은 자본주의 체제는 정신분열적인 체제라고 하였다. 한 쪽에서는 1년에 8억 명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농산물의 값이 하락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농산물을 바다에 퍼붓고 있다. 한 쪽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병원하나 변변치 못한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 나마 있는 것마저 전투기와 미사일로 박살을 내고 있다. 그 파괴적인 군사예산의 2%를 10년만 투자하면 이 세계의 기아가 사라질 텐데도 말이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측면을 본다면 우리 사회가 불변할 것이고 존재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가진다는 생각이 1천년 후에도 동일하게 평가되기란 힘들 것이다. 서양의 한 사상가가 이런 의미에서 사회가 유기체라고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생물이 진화하듯 우리 사회도 진화한다는 판단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현존 사회와 현존 체제의 불합리한 바를 한발 앞서 지적하는 이런 선취성은 이처럼 당대에는 논란거리가 되지만 수십 세대가 지난 후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는다. 우리의 후손들은 현재에는 극단, 과격이라고 비난받는 주장을 선지자적인 진보적 주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소극적인 자를 진보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핵심적인 이유는 이러한 “선취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 백 가지 이유를 갖다 붙여 이라크 파병을 옹호하더라도 그런 주장이 진보가 될 수 없는 것도 여기에는 가까운 미래에는 상식이 될 “선취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해당 사안이 선취성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퇴행적인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예컨대 반미가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모든 선의 대변자이고 미국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았던 우리 사회에서 반미가 진보적으로 보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하지만, 미국을 증오해서 무고한 미국시민을 학살하는 테러리스트들의 경우를 본다면 반미는 진보가 아니라 증오를 유지, 증폭시키는 매우 퇴행적인 것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선취성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는 보다 세분화된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취성 여부”를 따지기 위한 그 하위 기준으로 “과잉/과소의 문제”라는 기준을 제시한다. 거칠게 말하면 해당 사회에서 과잉화된 주장을 재차 반복하는 것은 선취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진보적일 수도 없다.

즉, 미국시민의 무고한 목숨을 목표로 하는 테러리스트 집단에서 반미는 분명히 과잉이기 때문에 반미는 전혀 선취성이 없다. 즉, 이 해당 사회에서 반미는 진보가 아니라는 말이다. 반면, 미군이 시민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도 변변한 조사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던 우리 사회에서 반미는 엄청난 과소였고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의 반미운동은 선취적이며 진보적이다.

국내의 자타칭 진보인사인 진중권 씨가 효순, 미선의 영정을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 걸었다고 비난했던 것은 이 사람이 우리 사회의 과잉/과소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성원 중 일부에게 반미는 과잉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 전체로 보자면 반미는 분명히 과소였다. 다른 나라 같으면 여중생 사건은 초기부터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몇 달이나 지나서야 겨우 쟁점화가 되었을 뿐이었다는 것이 그 명백한 증거이다.

물론 2005년 현재까지 우리 사회가 여전히 반미가 과소인지는 더욱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따로 쓸 기회가 있겠지만, 대략 본다면 일반적인 반미 감정은 과소단계를 지났으며, 각론에 있어서 미국에 대한 비판 의식을 본다면 여전히 과소의 단계라고 보여진다.

일반적으로 노동운동도 그 자체로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 때 정권 흔들기 용으로 자본가의 유도한 노동자의 파업은, 파업 자체가 항상 진보적인 것은 아니라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90년 대초 영국 한 군수회사의 노동자들이 자신이 실업자가 될 것을 각오하고 회사 폐업을 위한 파업을 한 것은 이러한 퇴행적 파업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우리사회는 분명 자본에 비해 노동 쪽이 취약하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노동운동의 선취성이 인정받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미래에도 항상 그럴 수만은 없다는 점을 확인하자. 비정규직 문제도 노동운동의 불균형성의 한 예이기도 하다.

강준만은 논쟁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던 지역문제와 수구신문의 이미지 조작술을 제기함으로써 진보적이 될 수 있었다. 강준만은 정치적으로 중도세력이지만 적어도 이 두 지점에 있어서 강준만은 국내 진보세력보다 더 선취적이고 진보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작년 총선 당시 호남의 지역감정을 이용하려는 정당을 신랄하게 비판하지 못하고,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던 감정적 이미지 덮어씌우기 방식으로 한 정치인을 매도하기 시작할 때 그는 더 이상 선취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못하게 되었다.

강준만의 이러한 몰락은 정치에 관한 한 우리사회가 아직도 증오의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보세력이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중도세력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수구세력의 이미지 덮어씌우기와 다른 차원으로 진보세력을 비판하는 중도세력을 보기 힘들다. 수구세력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증오만을 먹고 산다. 우리 사회의 건전한 정치토론은 과소이며 감정적 찌꺼기 배출로서의 정치토론은 과잉이다. 따라서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일체의 정치적 주장은 근본적으로 선취적일수도 진보적일 수도 없다.

이외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러 과소/과잉의 불균형이 곳곳에 있을 것이다. 개인의 신체적 차이를 우스갯거리의 소재로 삼는 것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으며, 어린이, 청소년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진보란, 선취성이란 이처럼 거대한 담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곳곳의 자질구레한 문제 속에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과잉/과소”라는 기준은 거시담론이 미처 포괄하지 못한 영역을 볼 수 있는 좋은 수단을 제공한다.

지난 90년 대 북한의 동포가 기아에 허덕일 때 진보세력이 아니라 종교단체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북한돕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우리 사회 진보세력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진보세력 내 한 그룹은 북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으며 다른 그룹은 북한이 기아에 허덕인다는 것을 북한을 깎아내리려는 수구세력의 여론몰이로 판단하여 이 운동에 적극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북한에 대해 과소와 과잉만이 있었던 것이 과거 진보세력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을 하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북한 증오” 과잉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우리 사회의 “북한 증오”가 과잉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하고, 우리 사회의 평화주의세력이 과소라는 것도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 내부의 과잉, 과소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진보세력의 주장을 입맛대로 취사선택하려는 수구언론이 신문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노동조합 비리에 접해 민주노동당이 격렬한 비난을 하지 못한 속사정도 사실은 이러한 전반적인 과잉/과소의 문제점을 고려했던 것이라고 할 때, 균형잡힌 태도가 필요하리라고 보여진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지 한 가지 잊지 말 것은 다른 정치세력과 마찬가지로 진보세력도 그 내부에서 배타적인 편가르기가 과잉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극단적 배타성만을 내세운다면 이는 바로 그 때문에서 선취적일수도 진보적일 수도 없는 것이다.

* 사실, 진보성, 선취성이 아니라 과잉/과소라는 기준틀을 제시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절대적 진보”라는 것을 상정하기 힘든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이를 중심으로 해서 “선취성”이 제기하는 진보에 관한 미묘한 문제에 대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 독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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