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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물 없이 지낸 아바나의 첫 밤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1>
  2005-02-15 오전 11:48:51
  <프레시안> 뉴욕 통신원 김재명 분쟁지역전문기자가 3주 일정으로 쿠바와 볼리비아 현지 취재를 떠났다. 쿠바에선 피델 카스트로 혁명의 성과와 문제점, 미국-쿠바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고, 볼리비아에선 체 게바라의 무장 게릴라 근거지를 돌아보면서 그의 실패한 투쟁이 지닌 의미를 다시 새겨볼 계획이다. 이 현지취재는 시사월간지 <월간중앙>과 공동협찬으로 이뤄졌다. 편집자
  
  입국 비자 필요 없고 여행자 카드로만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중심이 돼 친미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쿠바혁명(1959년)이 올해로 46년을 맞는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죽임을 당한 지도 벌써 37년을 넘겼다. 1959년 쿠바혁명이 성공한 이래 지금껏 쿠바에선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아직껏 이루지 못한 혁명과제들은 어떤 것인가. 무엇이 쿠바혁명을 미완(未完)의 혁명으로 남도록 만든 요인들인가. 중남미를 자신의 텃밭으로 여겨온 초강대국 미국은 쿠바에게 어떤 존재인가. 쿠바의 일반 민초들과 지식인들은 쿠바혁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며, 아울러 미국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가. 체 게바라가 지구촌 젊은이들에게 인기 높은 까닭은 무엇인가. 그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오늘의 쿠바를 어떻게 평가할까.
  
쿠바 아바나 시내 전경 ⓒ김재명

  이런 물음표들을 지닌 채 쿠바 아바나 국제공항에 닿았다. 출입국 사무를 맡은 관리는 여권에다 쿠바 입국 사실을 나타내는 도장을 찍지 않는다. 그 대신 '여행자 카드'라 일컬어지는 조그만 입국서류에다 도장을 찍는다. 쿠바로 가기 전부터 이 여행자 카드 문제로 신경을 써야 했다. 쿠바 여행 안내책자엔 "쿠바 입국 비자를 받아도 되는 대신에, 이 여행자 카드를 들고 가야 한다"고 돼있다. 그렇다면 한국과 외교관계도 없는 쿠바에 들어가려면, 문제의 여행자 카드를 손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미국 식민지 유산을 지닌 건물들이 아바나 시내 곳곳에 있다. 건물 앞 차량들은 아바나 특유의 2인용 '코코' 택시들. ⓒ김재명

  미국에서는 쿠바행 비행기 표를 살 수가 없다. 캐나다나 멕시코로 가야 한다. 미 부시행정부는 미국인들의 쿠바행을 막기 위해 그런 원칙을 지키도록 여행사와 항공사에게 강요한다. 미국 안에 있는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 비행기 표를 사려 해도 불가능하다. 결제과정에서 구매자가 미국에서 발행된 신용카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캐나다항공에 전화를 걸어 표를 사려 해도, 미국에서 전화를 건다는 사실을 알면, "전화를 그만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필자에게 쿠바행 비행기 표를 판 캐나다의 한국인 여행사가 여행자 카드에 관한 정보에 대해선 깜깜했다는 점이다. 쿠바행에 대해 물어오는 한국인 손님이 그만큼 드문 탓이기도 했다. 답답했다. 필자의 쿠바 취재길에 합류하기 위해 서울에서 비행기 표를 산 K씨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캐나다의 쿠바 대사관에까지 전화를 걸어 "토론토 공항에서 쿠바행 비행기를 타기 바로 직전, 공항 출구(gate)에서 항공사 직원들로부터 그냥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공짜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서울로 K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한국여행사로부터 6만원을 주고(택배료까지 합쳐 7만원) 그 서류를 받았다"는 얘기였다. 와아! 항공사에서 거저 나눠주는 서류를 6만원이나 받고 팔다니....쿠바로 떠나는 날 아침 토론토 공항 출국장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문제의 그 여행자 카드란, 인천공항에 들어오기 앞서 비행기에서 나눠주는 입국신고서처럼 이름과 생년월일, 국적과 주소 따위를 적어 넣는 아주 간단한 서류였다. 쿠바에서 머물 주소는 일반적으로 아바나에 있는 호텔(Hotel in Havana) 쯤으로 적어 넣으면 됐다.
  
  쿠바가 입국비자를 요구하지 않고 여행자 카드라는 이름의 간단한 출입국 신고서로 갈음하는 까닭은 미국의 쿠바 봉쇄정책과 직접 관련된다. 쿠바의 주요 외화벌이 재원(財源)이 관광산업이다. 해마다 10만 명에 이르는 미국인들이 쿠바를 찾고 있다. 기후가 좋고 해변 휴양지가 많기 때문이다. 부시행정부 들어 미국은 쿠바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카스트로 체제 전복과 쿠바 민주화를 앞당긴다는 명분에서였다. 이에 따라 미국인이 멕시코나 캐나다를 거쳐 몰래 쿠바를 다녀온 사실이 드러나면 최고 25만 달러의 벌금, 징역 10년을 살도록 돼있다.
  
쿠바는 미국에서 이미 폐차된 지 오래인 중고자동차들의 박물관이라 일컬어진다. 1950년대 만들어진 자동차들이 매연을 뿜으며 다니며, 고장 나 길 한가운데 서있는 모습이 흔하다. ⓒ김재명

  미국 달러에 매기는 10% '카스트로 혁명세'
  
  법대로라면 미국인의 쿠바여행길은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모험이다. 법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쩌다 운 없이 쿠바를 다녀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미국인은 일반적으로 벌금 7천5백달러를 문다. 카스트로 정권은 그런 미국인 여행자들이 안심하고 쿠바를 다녀올 수 있도록 여행자 카드에만 입국사실을 기록한다. 그리곤 공항 출국심사장에서 여행자로부터 도로 그 서류를 걷어간다. 따라서 여권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
  
대중교통수단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터라, 2인용 자전거가 주요 교통수단이다. ⓒ김재명

  우리 한국인들이 쿠바로 미국 달러를 그냥 들고 들어갔다간 손해를 본다. 아바나 공항에서 일부 외국인들은 '카스트로 혁명세'를 바쳐야 한다. '혁명세'란 용어는 물론 없다. 사정을 잘 모르고 미국 달러를 갖고 입국한 사람들이 공항 환전소에서 달러를 현지 화폐로 바꾸려 하면, 10%를 무조건 뗀다. 달러가 아닌, 유로나 엔화를 갖고 들어가면 모두 제값을 쳐서 환전할 수 있지만, 달러는 90%만 값을 쳐주고 10%는 공제한다. 지난해 11월부터 이런 특이한 제도가 시행됐다. 카스트로 정권의 설명은 "쿠바를 달러경제의 압박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다.
  
  아바나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는 '20달러'의 정액요금을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달러'는 미국 달러가 아니다. 카스트로 정권이 지난해 11월 만들어낸 새로운 화폐인 '전환 페소'(Converted Peso)다. 이 돈의 가치는 미국 달러와 거의 같지만, 정확히 말해 10% 더 세다. 100 미국 달러를 환전소에 내면, 90 전환페소를 받는다. 그렇지만 쿠바 현지인들은 이를 그냥 '달러'라 일컫는다. 일반 쿠바국민들은 '모네다 나시오날'(moneda nacional)이란 이름을 지닌 '쿠바 페소'를 주고받지만, '전환 페소'도 함께 쓴다. 시골지역으로 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허름한 카페로 갈수록 '쿠바 페소'가 많이 쓰인다.
  
  우중충한 건물들, 몇십년 된 자동차들
  
  카리브해를 끼고 가로로 길게 뻗어있는 아바나는 얼핏 보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도시다. 바닷가를 따라 8km 길이의 말레콘(Malecon) 도로는 서울로 치면 강변도로같은 것이지만, 한켠에 인도를 만들어 연인들의 산책로로선 제격이다. 이 말레콘 도로를 건설한 이는 쿠바인들이 아니다. 1901년 쿠바를 식민지로 다스리던 미국인들이다. 아바나 시내 곳곳에 세워진 대리석의 멋진 건물들도 미국이 쿠바 식민통치를 위해 지은 것들이 많다(서울 경복궁 앞에 있던 옛 중앙청 건물이나 시청 건물이 일제가 지은 사실과 마찬가지다).
  
아바나의 건물들은 대부분 낡아 우중충한 모습이다. ⓒ김재명

  이 글 앞 문장에서 아바나를 가리켜 '얼핏 보면 아름다운 도시'라 했다. 도시로 들어가면, 결코 아름답지는 못하다. 건물들은 대부분 낡아 우중충한 느낌을 준다. 서울에 그런 건물들이 있다면, 벌써 페인트를 새로 칠했거나 허물어 버렸을 것들이다. 그런 건물들 속에 사는 이들은 방 하나를 여러 사람이 같이 나눠쓴다. 인구는 갈수록 늘어가지만, 주택을 새로 짓지 못하는 탓이다. 나중에 쓰겠지만, 아바나에 사는 한국인 교민(농업노동자로 80년전 이민 온 한국인의 후손) 집에 갔다가, 너무나 처참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쿠바의 여인들. 겉으론 화려해보이지만, 가난하기에 옷 한 벌로 몇 달을 버티는 여인들도 많다.   ⓒ김재명

  아바나의 차량들도 오래된 것들이라 매연을 시꺼멓게 뿜어댄다. 1950년대에 생산된 미국 승용차들이 버젓이 굴러다니는 것이 아바나이고 쿠바다. 그래서 쿠바는 '세계 중고 자동차 전시장'이라고 일컬어진다. 길 한가운데 멈춰 본네트를 열고 수리중이거나, 뒤에서 여러명이 차를 미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거리에서 우리 한국의 중고자동차들도 많다. 구형 소나타에서 티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국자동차들이 아바나 길을 메우고 있다.
  
  멕시코를 통해 들여온 이들 한국 자동차들은 쿠바에선 '좋은 차'로 꼽힌다. 워낙 미국차들이 낡은 탓에 상대적으로 새차라서 성능이 낫기 때문이다. 필자가 아바나에 머무는 동안 전세내 타고 다녔던 차도 현대자동차의 구형 소나타. 운전기사 헤르난데스는 "이 차가 너무너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부속품 구하기가 쉽지 않은 듯, "언젠가 소나타가 고장 나면 다른 차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50년대 미국산 자동차들의 부품은 쿠바에서 대용품을 자체 개발해 쓰기에 큰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
  
  아바나에서의 첫 밤은 세수는커녕 발도 씻지 못했다. 호텔에 물이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호텔 쪽 설명으론 그 지역 일대에 수돗물이 끊겼고, 낡은 수도관 탓에 그런 일들이 가끔 있다는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호텔 종업원들의 태도였다. 그들에게 물이 안나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주의경제 체제 아래 쿠바는 모든 것이 국유다. 부동산 개인 소유는 없다. 오로지 그 집에서 살 권리만 있다. 호텔도 국유고, 따라서 호텔 종업원들은 '국가공무원'이나 마찬가지다. 물이 안나와 손님이 불평을 하면, "다른 곳을 찾아봐라"는 정도지, 어디선가 물을 날라다 주려 애쓰는 눈치는 전혀 없다(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비슷했다). 이른바 사회주의적 복지부동(伏地不動)이다. 여러 모로 이번 쿠바 취재길이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애써 지우며 아바나의 첫 밤을 넘겼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2>
  2005-02-18 오전 10:13:20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900km. 알 카에다 포로들을 가둔 미 해군기지가 있는 관타나모로 가는 길은 멀었다. 버스를 타고 13시간 걸려 산티아고 드 쿠바를 가서, 다시 택시를 전세내 1시간30분을 달려 관타나모에 닿았다. 애당초 계획은 아바나-관타나모 사이를 하루 1회씩 오가는 국내선 비행기(비행시간 2시간30분)를 타고 가려 했다. 여행사에 가서 알아보니 앞으로 보름 동안엔 여유분 좌석이 없이 모두 팔린 상태였다. 비행기는 소형인데, 찾는 이는 많아서 그렇단다. 나중에 관타나모에서 들은 얘기로는, 예약된 비행기 손님의 대부분이 외국에서 호기심으로 관타나모를 찾는 단체 관광객들이었다.
  
  하는 수 없이 저녁 6시에 떠나 밤새 달리는 버스에 몸을 맡겨야 했다. 버스 안에는 대부분이 외국인들이다. 쿠바의 시외버스 노선은 두 가지다. 하나는 비아솔(Viazol), 다른 하나는 아스트로(Astro). 비아솔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선진국 수준의’ 높은 요금을 받는다. 쿠바 현지인들도 비아솔 버스를 탈 수는 있지만, 소득수준에 비해 엄청난 비아솔에 비해 훨씬 값이 싼 아스트로는 쿠바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수단이다.
  
  말이 ‘대중교통수단’이지, 쿠바 사람들이 아스트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려면 적어도 한달, 길게는 두세 달씩 기다려야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타려는 사람들에 비해 버스 대수가 많지 못한 탓이고, 이웃나라 베네수엘라 차베스정권의 우호적인 원유공급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쿠바의 기름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탓이다(쿠바-베네수엘라-미국의 미묘한 3각관계에 대해선 따로 살펴볼 예정이다).
  
  교육-의료는 천국, 교통은 지옥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에 가까운 쿠바군 검문소 앞에 놓인 쿠바국기와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 흉상. ⓒ김재명

  카스트로 혁명이 성공한 뒤 쿠바 사람들은 큰 변화를 실감해왔다.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 시절 미국인들은 쿠바 농지의 3분의 2를 소유, 현지 쿠바인들을 소작인 또는 저임금 농업노동자로 부려왔다. 카스트로는 그런 농지들을 모두 몰수, 국영농장으로 바꾸었다. 바티스타 정권 아래선 돈을 가진 집안에서만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으나, 카스트로 혁명으로 초중등 교육은 물론 대학교육까지도 거저가 됐다. 공부할 능력과 의욕만 있다면, 돈이 없어도 대학을 다닐 수 있다. 그런 덕에 현재 쿠바의 문맹율은 제로에 가깝다. 의료혜택도 쿠바혁명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입원비가 없어 병원 문턱에서 죽었다더라“는 얘기는 적어도 쿠바에선 들을 수 없다(쿠바의 교육과 의료체계에 대해선 이 연재에서 별도의 꼭지기사로 다시 다룰 예정이다).
  
  쿠바혁명의 그런 바람직한 성공사례와는 대조적인 부분들이 있다. 도로, 교통, 인터넷, 수도, 전기, 전화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들(인프라)이 아직은 제대로 구축돼 있지 못하다. 특히 교통 사정이 열악한 편이다. 사회주의 통제국가인 쿠바는 주거이전의 자유가 없다. 수도 아바나에 살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마음 내키는 대로 이사갈 수가 없다. 평양에 살고 싶다고 신의주 사는 주민이 이삿짐을 맘대로 꾸릴 수가 없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이사를 가고자 하는 쿠바 사람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자리가 바뀌는 등 나름의 그럴듯한 사유를 제시하지 않을 경우, 거절당하기 십상이다.
  
  단기간의 여행은 허가 없이도 떠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동수단이 간단치 않다. 앞에서 적은 대로 아스트로 버스를 타려 해도 한달을 기다려야 한다. 기차표 얻기도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실정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쿠바에서 오토바이는 아무나 타는 교통수단이 아니다. 경찰이나 업무상 필요하다고 인정된 경우에만 오토바이를 탈 수가 있다. 주말에 경춘가도를 따라 질주하는 즐거움을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 행위는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해악으로 여겨진다. 쿠바 경찰이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도 한국 경찰처럼 크지 않아 기름 소비가 적은 것들이다.
  
  아바나 시내를 굴러다니는 1950년대 미국 차들은 너무 낡아 장거리는 엄두를 못 낸다. 이래저래 적절한 이동 수단을 찾지 못한 쿠바 사람들은 지나는 트럭을 세워, 짐칸에 서서 가기도 한다. 산티아고 드 쿠바에서 관타나모로 가는 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트럭에 빼곡히 실려가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산티아고 드 쿠바와 관타나모 사이는 85km. 차로 달리면 1시간 반이면 충분한 거리다. 그러나 비아솔이나 아스트로 버스 모두 두 차례만 오간다. 급한 일이 생긴 사람은 트럭에 올라 타거나 쿠바인들의 소득(월평균 10달러 미만)에 비해 턱없이 비싼 택시를 탈 수밖에 없다. 바가지를 썼는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관타나모 왕복에 85전환페소(지난번 글에 썼듯, ‘혁명세’ 10%를 감안하면, 실제로는 95달러)를 냈다. 이만한 돈은 쿠바 서민들의 열달치 소득이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전경. ⓒ김재명

  (독자 여러분들이 설마 하고 놀라겠지만, 쿠바인들의 소득수준은 너무 낮다. 경찰과 청소부 등 육체노동을 많이 하는 직종이 가장 많이 월급을 받는데, 그 수준이 30달러다. 대학교수와 의사가 20달러, 나머지 대부분의 직종은 10달러 안팎이다. 식량배급카드로 국가로부터 밀가루, 식용유, 설탕 등을 거저 공급 받아 생활비가 덜 든다. 그러나 그만한 소득으로는 문화생활을 즐기거나 냉장고나 텔레비전 등 상대적으로 비싼 가전제품을 사들이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많은 쿠바인들은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 나름대로 ‘요령’을 익혀왔고, 가전제품을 사들이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를 ‘생존술’이라 정의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따로 살펴보겠다.)
  
알 카에다 포로들을 가둔 캠프 델타 포로수용소. 같은 관타나모 기지 안이라도, 미 해군기지와는 따로 떨어져 있다. ⓒ김재명

  노래 ‘관타나메라’와 호세 마르티
  
  고구마처럼 동서로 길게 뻗은 쿠바의 동쪽 거의 끝부분 남쪽에 자리잡은 관타나모는 인구 20만의 제법 큰 지방도시. 관타나모란 이름 자체는 노래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Guantanamera, guajira Guantanamera, 관타나모 아가씨, 촌뜨기 관타나모 아가씨)로 우리 귀에 익숙한 편이다. 지난 1960년대 미 반전가수 피트 시거가 불러 널리 알려진 '관타나메라'는 오래 전부터 쿠바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다. 가사를 들여다보면, 한편의 아름다운 시를 떠올린다.
  
  이 노래의 가사를 쓴 이는 쿠바 시인이자 독립영웅으로 식민지 군대인 스페인군에 사살됐던 호세 마르티(1853-1895)다. 쿠바의 어딜 가나 사람들은 마르티의 동상과 마주친다. 쿠바의 관문인 아바나 국제공항의 정식이름이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이다. 카스트로 사회주의 혁명정권도 호세 마르티를 인민영웅으로 떠받들어 왔다. 카스트로 체제는 쿠바혁명의 정통성을 마르티와 연결시켜 풀이한다. 한 마디로 마르티는 '쿠바 혁명의 아버지‘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를 내려다보는 쿠바군 관할 고지로 오르기 위해, 그곳 군부대가 설치한 초소 앞에 갔을 때도 마르티의 흉상을 볼 수 있었다.
  
미 해군기지를 내려다 보도록 쿠바군 관할 고지에 설치된 망원렌즈. ⓒ김재명

  2001년 9.11 사건 뒤 6백명 넘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 포로들을 재판도 없이 가두어놓은 채 인권 침해시비를 낳아온 미 해군기지는 관타나모 도심지와는 뚝 떨어진 관타나모만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쿠바 취재를 계획했을 때부터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자체를 취재한다는 것은 엄두를 내지 않았다. 그곳은 전세계 미디어의 사각지대다. 부시행정부에 협조적인 미국의 보수적 TV 매체 팍스 뉴스(Fox News)조차도 관타나모를 직접 취재하진 못했다. 그저 펜타곤에서 제공하는 영상자료를 받아쓸 뿐이다. 그런 관타나모 기지를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쿠바군 관할의 마르티레스 고지다.
  
  고지에 오르려면 적어도 하루 앞서 지정된 여행사를 통해 신청을 해야 한다. 수수료는 5달러(보다 정확히 말하면 ‘전환 페소’). 이 이 5달러도 쿠바정부로선 그런대로 괜찮은 수입원처럼 느껴졌다. 9.11 뒤 관타나모는 관광상품으로 떠올랐다. 그곳 고지에서 필자를 맞이한 쿠바인 안내원은 군인이 아닌, 쿠바 관광청 소속 공무원이었다. 그는 “이곳을 찾는 단체 관광객들을 실은 버스들이 하루에 적어도 한 대꼴로 온다. 주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사람들이지만, 미국인들과 캐나다인들도 있다”고 설명한다.
  
  고지에서 관타나모 해군기지를 바라보는 광경은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필자가 갖고 간 300mm 렌즈로는 기지 안에서 오가는 사람의 움직임을 잡아내기 어려웠다. 고지에 붙박이로 설치해놓은 전망대로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안내원 설명에 따르면, “날씨가 아주 맑은 날이면 사람 걸어가는 게 보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날은 햇살이 한국의 가을하늘처럼 맑은 데도 그렇질 못했다. 현재 해군기지 안에는 군인 1천명, 관련 미국인 2천명이 머물고 있다.
  
  “혁명으로 미군 상대 술집과 창녀 사라졌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는 주권국가인 쿠바 영토 안에 파고든 미국 점령지다. 지난 1898년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필리핀과 더불어 쿠바를 빼앗으면서, 관타나모만 일대는 미 해군기지로 개발됐다. 쿠바가 1903년 ‘형식적인’ 독립국가로 됐을 때, 관타나모는 영구임대 계약으로 미국에 넘겨졌다(역사의 기록을 보면, 당시 미국은 쿠바인들에게 영원히 미군 점령지역으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미국의 쿠바내정 개입을 인정하고 독립을 얻을 것이냐,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강요했다. 쿠바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의 내정간섭을 합법화하는 조건으로 독립을 택했다).
  
1950년대 미군 술집과 창녀들로 흥청댔던 관타나모 시가지. 카스트로 혁명으로 술집과 창녀들은 모두 사라졌다. ⓒ김재명

  미국은 해마다 금화 2천개(지금의 화폐가치로 4천달러)를 지불하기로 한 관타나모 기지 임대차 계약조건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점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계약 쌍방이 함께 계약을 끝내기로 서로 합의했을 경우에 한해서만(if both parties mutually consent to terminate the lease)' 쿠바인들이 관타나모 기지를 돌려받을 수가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관타나모 기지는 영원히 미국인 것이다.
  
  1959년 1월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 불평등계약조건은 문제가 없었다. 쿠바혁명 뒤 카스트로 정권은 계약 파기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합법적으로 임대계약을 맺었는데 무슨 소리냐. 계약서를 잘 들여다봐라”며 딴전을 펴왔다. 카스트로 체제는 혁명이 성공한 바로 뒤 미 해군기지로 들어가는 식수와 전기를 끊고 소규모 총격전마저 벌였다. 그런 긴장관계 속에 쿠바정부는 미국이 해마다 관타나모 기지를 빌린 대가로 보내오는 4천달러 짜리 수표를 은행에 돌려 현금화하지 않았다.
  
  관타나모 사람들은 미 해군기지를 복합적인 감정으로 바라본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퇴직했다는 고메스(67)를 시내에서 만났다. 그는 1950년대 관타나모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1959년 카스트로 혁명 이전에 관타나모 시내엔 미 해군들로 늘 흥청댔다. 그들 때문에 이 지역경제가 흥청대긴 했지만, 부작용도 많았다. 술집이 즐비했고, 창녀들이 많았다. 술 취한 병사들이 지나는 여인들을 희롱하는 일도 잦았다. 쿠바혁명으로 그런 모습들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된 게 참 다행스런 일이다” 관타나모 주민들은 9.11 뒤 볼썽사납게 알 카에다 포로들을 가둔 채 인권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미 해군기지가 하루 빨리 쿠바에게 반환돼, 쿠바 해군기지로 거듭나야 한다고 믿고 있다.
  
 

 

체 게바라의 혁명 근거지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3>
  2005-02-23 오후 5:28:42
  쿠바에선 체 게바라를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거리엔 대형 게바라 초상화가 내걸려 있고, 곳곳에 게바라 관련 상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카리브 해의 파도가 시원스레 넘실대는 풍경이 바라보이는 아바나 고급호텔의 벽걸이 그림도 게바라다. 빈민가가 들어선 아바나 비에하 지역의 곧 쓰러질 듯 퇴락한 건물 안에 옹색하게 사는 도시빈민의 방에서도 게바라의 눈길과 마주친다. 지난 1967년 게바라가 죽임을 당했던 볼리비아에서도 쉽사리 체 게바라를 만난다. 볼리비아 내륙 제2의 도시 산타 크루즈의 토산품 가게를 들어서면, 어김없이 체 게바라 티셔츠와 그의 얼굴을 새긴 나무조각품들이 늘어서 있다.
  
  쿠바와 볼리비아뿐 아니다. 지구촌 어딜 가나 체 게바라와 만난다.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그의 브랜드라 할 별 달린 모자를 쓴 젊은이들, 가슴에 그의 얼굴을 문신으로 새긴 여인들, 그리고 평전을 비롯한 수많은 게바라 관련 책자들, 그의 얼굴을 담은 목걸이, 시계, 재떨이....지난해엔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다시 한번 대중의 가슴에 다가왔다.
  
  쿠바혁명 이어 남미혁명의 꿈
  
 
볼리비아 산악지대의 체 게바라 활동 근거지를 가리키는 팻말 ⓒ김재명

  1928년 6월 14일생인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스네스토 게바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북동쪽 로사리오에서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을 지닌 중상류 가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대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장래에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지닌 평범한 젊은이였다. 1950년, 1953년 두 번에 걸친 남미 여행길에서 게바라는 빈곤층 민중들의 고단한 얼굴들과 마주쳤다.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혁명을 생각하게 됐다.
  
  1956년 11월 게바라는 멕시코 툭스판에서 쿠바 정치망명객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82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향했다. 그러나 정부군 기습을 받아 15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에 대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게바라가 이끄는 일단의 무장군은 1958년 12월 28일 치밀한 작전과 대담한 공격으로 쿠바 중부도시 산타 클라라를 점령, 쿠바혁명 성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그 바로 뒤 바티스타는 미국으로 망명했고 1959년 1월 2일 혁명군은 수도 아바나를 접수했다. 그 뒤 1964년까지 게바라는 국제사회(특히 제3세계 비동맹권)으로부터 쿠바혁명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는 데 힘썼다. 유엔을 방문해 연설하고 러시아, 중국을 찾았다. 1960년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도 했다.
  
  1965년 4월 게바라는 “쿠바에서 내가 해야 할 의무를 다했으며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한 또 다른 투쟁을 이끌기 위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는 내용의 편지를 카스트로에게 보내고 아프리카 콩고로 떠났다. 제3세계의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을 바치겠다는 결의였다. 6개월만에 아프리카에서 비밀리에 쿠바로 돌아온 게바라는 다시 볼리비아를 남미혁명기지로 삼기 위한 준비작업을 벌였다. 기록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1966년 11월 3일 변장한 채 위조여권으로 라 파즈 공항을 거쳐 볼리비아로 입국하는 데 성공했고,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너 11월7일 낭카와수 강변의 혁명기지에 닿았다.
  
1966년말 낭카와수 강변에 세워진 체 게바라 혁명기지 터. ⓒ김재명

  낭카와수 강변에 남미 혁명기지 세워
  
  체 게바라가 남미혁명의 꿈을 가슴에 품고 볼리비아에 설치했던 근거지는 남미대륙을 위아래로 관통하는 안데스산맥의 기슭이라 할 저지대인 낭카와수 강변. 오가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외딴 지역이다. 그곳을 찾아가려면, 먼저 산타 크루즈에서 버스를 타고 6-8시간쯤 남쪽으로 달려 ‘라구아니스’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로 가야한다.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았다.
  
체 게바라 혁명기지 가까운 곳에 흐르는 낭카와수 강. 리오 그란데 강의 지류다. ⓒ김재명

  중남미에서 아이티와 더불어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히는 나라가 볼리비아다. 1인당 평균 국민소득이 연 9백 달러도 안 된다. 그러니 도로를 비롯한 사회기반시설 투자가 빈약할 수밖에 없다. 비만 조금 왔다 하면, 도로가 물에 잠기거나 끊기기 십상이다. 버스 승객들마저 힘을 합쳐 파인 도로를 흙이나 나무로 메우는 작업을 거듭하며 나아가곤 했다. 오후 1시에 산타 크루즈를 떠난 버스는 예정 도착시각 7시를 넘겨 밤 10시에야 라구니아스에 닿았다.
  
  문제는 다음날이다. 숙소에서 밤새 내리는 빗소리가 그치길 마음 졸이며 바라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하늘이 맑게 개인 아침이다. 숙소 주인의 주선으로 마을 주민으로부터 브라질산 4륜 구동차를 빌렸다. “차는 빌려 줄 수 있지만, 급한 사정으로 현장에 함께 갈 수는 없다”는 말에 운전대를 직접 잡았다. 볼리비아 군에 입대했다가 휴가차 나왔다는 주인집 아들과 그 남동생이 안내자로 따라 붙었다. 게바라가 설치했던 혁명근거지는 북쪽으로 50km쯤 떨어진 곳. 이 지역 일대를 흐르는 리오그란데 강의 한 지류인 낭카와수 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까지 닿는 데도 거의 3시간이 걸렸다. 비포장 도로 곳곳의 비포장 도로가 밤새 내린 비로 무너져 내렸거나 나무들이 쓰러져 있는 탓이었다.
  
체 게바라 혁명기지 터에 살고 있는 볼리비아 원주민. ⓒ김재명

  체 게바라의 혁명기지는 지금 누군가의 농장으로 쓰여지고 있다. 현장에 들어서니, 남루한 옷을 입은 소작인 부부가 맞아준다. 그들의 두 아들 가운데 동생은 신발도 없이 맨발로 다닌다. 그 꼬마에게 “체 게바라!”라고 말을 건네자, 그도 잘 알고 있다는 듯 환한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위로 향해 가느다란 손을 쭉 내민다. 체 게바라는 그곳에 함석지붕으로 된 가건물을 지어놓았다. 그래서 그 혁명기지는 게릴라들 사이에 통칭 ‘함석집’(zinc house)으로 일컬어졌다.
  
  볼리비아 현지세력과의 갈등
  
  체 게바라와 함께한 게릴라는 모두 50명. 국적별로는 쿠바인 18명(체 게바라 포함), 페루인 3명, 볼리비아인 29명이었다. 총인원이 50명에 지나지 않았던 까닭은 볼리비아 현지 좌익세력과의 협력이 이뤄지지 못한 탓이었다. 1966년 12월 31일 볼리비아 공산당 지도자 마리오 몬헤가 낭카와수 강변의 함석집을 비밀리에 방문, 체 게바라와 마주 앉았다. 몬헤는 “볼리비아 땅에서 벌어지는 혁명운동은 내가 지도해야 한다”고 고집했고, 체 게바라는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 따라 몬헤는 이미 게바라 대열에 합류한 볼리비아 출신 게릴라들에게 그만두라고 요구했고, 당시 쿠바에서 무장훈련을 받은 뒤 낭카와수로 향할 예정이던 볼리비아인들에게도 합류를 거부하도록 명령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자체의 사회혁명보다는 볼리비아를 혁명기지로 삼는 데 더 관심을 기울였다. 볼리비아를 근거지 삼아 그의 혁명을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들(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파라과이)로 수출한다는 점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제2, 제3의 베트남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은 그의 전략적 목표를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볼리비아 현지 좌익세력의 협조를 받아내지 못한 것은 게바라에겐 결정적 타격으로 작용했다. 볼리비아 공산당은 게바라를 모스크바와는 이념을 달리하는 ‘모택동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근거지를 잘못 골랐다“
  
  볼리비아는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른바 남미의 심장부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에 굳건한 혁명기지를 세움으로써 남미에 사회주의 혁명을 전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게바라는 볼리비아에 게릴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적어도 3년 전부터 사전준비작업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작업을 도왔던 인물이‘타니아’(본명은 하이데 타마라 붕케, 1937-1967년)란 이름을 가진 유태계 아르헨티나 여인이다. 1964년 체 게바라는 타니아를 볼리비아로 파견, 사전 탐색작업을 맡겼다(타니아는 1967년 3월 낭카와수 강변의 근거지에 왔다가 게릴라부대에 합류, 그 5개월 뒤 볼리비아 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볼리비아에서 극적으로 탈출, 쿠바로 돌아왔던 3인 가운데 한 사람인 폼보(아리 빌레가스)가 남긴 한 기록에 따르면, 체 게바라가 처음 세웠던 계획은 낭카와수 기지를 후방 안전기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실제 게릴라 활동무대는 그보다 훨씬 북쪽 지역의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그 지역들에서 무장활동을 펴가면서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쿠바에서 훈련 받은 볼리비아 게릴라들을 낭카와수 지역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그럼으로써 볼리비아 내륙을 위아래로 관통하는 안데스 산맥 줄기를 타고 혁명기지를 넓혀간다는 것이 체 게바라의 복안이었다.
  
체 게바라 게릴라 부대는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안데스 산맥 지류에서 볼리비아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김재명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을 폈던 볼리비아인 형제가 있다. 볼리비아 공산당원 출신으로 일찍부터 페루와 아르헨티나 산악지대를 근거로 반정부 게릴라활동을 폈던 ‘코코’(본명은 로베르토 페레도, 1938-1967년), 볼리비아 군 포위망을 가까스로 뚫고 살아남아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 무너진 조직을 정비하면서 재기를 노리던 중 사살됐던‘인티’(귀도 알바로 페레도, 1937-1969년)다.
  
  그 두 사람의 동생 오스발도 페레도는 현재 볼리비아 제2의 대도시 산타 크루즈의 시의원. 모스크바에서 의대를 나온 오스발도도 형들을 따라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게릴라 활동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볼리비아 산 속의 체 게바라가 날마다 일어난 일과 감상을 적은 남긴 ‘볼리비아 일기’에도 ‘코코와 인티의 동생이 다른 동지들과 함께 곧 합류할 예정’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볼리비아로 가기 위해 쿠바에 머물던 중 체 게바라 피살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울었다. 산타 크루즈 시의원 사무실에서 가진 오스발도 페레도(65)의 증언.
  
  “당시 많은 볼리비아 인들이 체 게바라 대열에 합류할 목적으로 쿠바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볼리비아 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대부분이 낭카와수 기지로 가지 않고 이탈했다. 1967년 10월 체 게바라가 죽은 뒤에도 극적으로 살아남았던 형 인티를 볼리비아 라파즈의 아지트에서 만나, 무엇 때문에 우리의 혁명투쟁이 실패로 돌아갔는가를 함께 논의했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볼리비아 공산당의 배신적 행위였다. 우리 형제들은 그런 볼리비아 공산당에서 스스로 탈당을 했지, 공산당 지도자 몬헤가 지배하는 당에서 쫓겨난 게 아니다. 몬헤는 배신자로서의 더러운 이름을 지닌 채, 지금도 어디에선가 살고 있다고 들었다. 우리가 생각한 또다른 실패요인은 볼리비아 내륙 낭카와수 강가의 혁명기지가 너무 인적이 드문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보안을 유지하기엔 적절할지 몰라도, 체 게바라의 사회혁명 이념을 일반민중에 퍼뜨리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노동운동과 혁명의 경험이 축적된 볼리비아 북부 코차밤바 같은 지역이 혁명 근거지로선 더 적절했을 것이다”
  
  게바라의 품성 말해주는 일화들
  
  볼리비아에서 죽임을 당하기 몇 개월 전부터 체 게바라는 몹시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다. 게바라가 남긴 <볼리비아 일기>에 따르면, 게릴라들은 볼리비아 특수부대의 포위공격을 견디느라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탈진해 쓰러지기도 했다. 일부는 스스로의 오줌을 받아마시기도 했다. 게바라의 몸도 갈수록 쇠약해갔다. 어렸을 때부터의 지병인 기침(기관지 천식)이 도져 그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도록 괴롭혔지만, 약은 없었다. 비밀 아지트에 숨겨두었던 기침약은 이미 볼리비아군의 수색으로 뺏겨버린 상태였다. 페레도는 체 게바라의 도덕적 품성과 관련,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한다.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의 펴다 죽었던 형제(코코와 인티)의 친동생인 오스발도 페레도. 그도 모스크바와 쿠바를 거쳐 볼리비아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김재명

  “형 인티가 볼리비아 보안군에게 사살되기 전 라파스의 비밀 아지트에서 내게 말해준 바에 따르면, 낭카와수 강변의 함석집 시절 체 게바라는 게릴라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다. 남들과 똑같이 주어진 의무를 다하려 했다. 식사 당번이나 청소 당번, 그리고 외곽 보초도 남들처럼 똑같이 섰다. 게바라는 그 무렵 기관지가 약해져 고생을 했다. 천식이 도지자, 동료들이 행군할 때 무거운 배낭 메는 일에서 체 게바라를 뺀 적이 있다. 그러나 게바라는 혁명전사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곧 배낭을 메고 앞장서 걸어갔다”
  
  다른 게릴라들에 비하면 게바라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튼튼한 편이었다. 그 시절의 체 게바라를 고민하도록 만든 또다른 문제가 게릴라 가운데 병약자와 부상자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움직이다가는 행군 속도가 느려, 볼리비아 추적군에게 몰살당할 위험마저 있었다. 페레도의 증언.
  
  “형 인티의 증언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부상자와 병약자들을 버리지 않았다. 게바라는 사단 규모의 볼리비아 군이 주둔 중이던 바예그란데를 기습, 약국에서 약품들을 얻어내 병약자들을 치료한다는 대담한 작전마저 세웠다. 그러나 미 군사고문단의 훈련을 받은 볼리비아 특수부대원들의 포위를 뚫지 못하고 끝내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부상자들을 버리는 쪽으로 결정했더라면, 아무리 볼리비아군의 포위가 삼엄했다 하더라도 나의 형 인티가 그랬던 것처럼, 게바라도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아 훗날을 기약할 수도 있었다고 믿는다”
  
  체 게바라가 콩고(1965년)와 볼리비아(1966-67년)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1960년대는 말 그대로 격동의 시대였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고, 유럽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변화와 개혁을 외치며 거리를 메웠다. 한편으로 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지구촌 곳곳에선 좌익게릴라들이 사회변혁을 꾀하고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켰던 체 게바라. 볼리비아를 근거지 삼아 남미혁명을 꿈꾸었던 체 게바라는 말 그대로 꿈을 좇았던 몽상적 행동가였나, 아니면 철저한 자기희생에 바탕한 휴머니스트였나.

 

 

 

 

 

  혁명아 체 게바라의 마지막 날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4>
  2005-02-28 오전 10:23:42
  체 게바라(1928-1967년)를 말할 때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280km 떨어진 인구 20만의 도시 산타 클라라를 빼놓을 수 없다. 그곳엔 체 게바라 혁명기념탑과 아울러 거대한 체 게바라 동상이 넓은 광장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리고 동상 지하에 만들어진 기념관 안엔 체 게바라를 비롯,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무장 게릴라활동을 펴다 죽은 17명의 혁명투사 시신들이 잠들어 있다. 볼리비아 정부군은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의 시신을 몰래 파묻었지만, 30년만인 1997년 다시 파내져 쿠바 산타 클라라로 옮겨졌다.
  
  쿠바 카스트로 정권이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 시신을 산타 클라라로 옮겨온 것은 바로 그곳에서 체 게바라가 쿠바혁명사에 커다란 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1958년 12월 28일 게바라 사령관이 이끄는 한 무리의 혁명군은 산타 클라라에 주둔하고 있던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의 군대를 공격했다. 그 다음날 무장열차에 타고 들어오던 정부군 지원부대를 기습, 항복을 받아냈다. 산타 클라라가 혁명군에게 점령당하고 쿠바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미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바티스타에게 “더 이상 당신을 도울 수가 없다”고 통보했고, 바티스타는 바로 망명길에 올랐다. 1959년 1월 2일 카스트로 혁명군이 아바나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결정적 분수령이 바로 산타 클라라 전투에서의 승리였다.
  
체 게바라가 사살된 볼리비아 라 이게라 마을의 담벽에 그려진 체 게바라 초상. ⓒ김재명

  그로부터 8년 뒤, 11개월에 걸친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게릴라활동(1966년 11월-1967년 10월)은 끝내 그에게 좌절과 죽음을 안겨주었다. 볼리비아 게릴라 시절 체 게바라는 현지 주민들을 만나면, 반드시 돈을 주고 먹을 것을 샀다. 그냥 빼앗는 일은 없었다. 체 게바라가 남긴 <볼리비아 일기> 1966년 9월 26일자 기록에 따르면, 체 게바라 일행이 그날 새벽 2,280미터 고지의 외딴 산간마을인 피카초에 들어서자 “농부들이 (우리들을) 매우 잘 대해주었다”고 적고 있다.
  
  “식량을 빼앗지 않았고 예의 발랐다”
  
  피카초 마을은 열흘 뒤 게바라가 볼리비아 특수군에 붙잡힌 채 압송돼 와 사살 당했던 라 기에라 마을에서 3km쯤 떨어진 곳이다. 그 마을에서 체 게바라를 만났던 여인을 만났다. 이름은 알레한드리나 스모야(67). 오랜 찌든 가난 탓일까, 이빨이 하나만 남은 게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들려준 얘기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혀 죽기 열흘 전 그를 만났던 볼리비아 여인(피카초 마을). ⓒ김재명

  “그때 볼리비아 정부군들은 나쁜 사람들이 떼지어 다니니까 조심하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우리 마을엔 라디오 같은 게 없으니,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질 잘 몰랐다. 그런 어느 날(1966년 9월 26일) 새벽, 체 게바라 일행이 우리 마을에 들어섰다. 그들은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거칠고 거만한 볼리비아 군과는 달랐다. 그들은 우리에게 돈을 주고 식량을 사선 불을 피워 끓여 먹었다. 몹시 시장해 보였다. 지금도 체 게바라를 기억한다. 그는 비교적 건강이 좋아보였다. 내 어린 아들(시실로 바냐와, 당시 두 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씩씩하게 커야한다’고 말해주었다”
  
  1967년 10월 8일 라 기에라 마을 바로 북쪽 유로(Yuro) 계곡에서 부상당한 채 체포된 체 게바라는 곧바로 라 기에라 마을로 압송돼왔다. 그리곤 그 마을의 작은 학교에 갇혔다. 학교라야 교실 두 개뿐인, 한국으로 치면 분교(分校)쯤에 해당하는 학교였다. 그때 함께 붙잡혔던 ‘윌리’와 체 게바라는 각각 다른 교실에 갇혔다. 볼리비아 광산노조 출신으로 1932년생인 윌리의 본명은 시몬 쿠바. 모이세스 게바라가 이끄는 볼리비아 광부 12명과 함께 1967년 2월 체 게바라의 혁명기지인 낭카와수 강변에 이르렀다. 운명의 날인 1967년 10월 7일 체 게바라와 함께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됐다가 다음날 게바라보다 먼저 처형됐다.
  
  한 여교사의 증언하는 게바라의 최후
  
  체 게바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여인이 있다. 이름은 훌리아 코르테즈 오시우아가. 8년 전 교단에서 물러난 뒤 바예그란데에서 가정주부로 살고 있다. 그녀가 체 게바라를 만났던 날은 1967년 10월 7일. 체 게바라가 부상을 당한 채 포로가 돼 라이 귀에라의 한 작은 학교교실에 갇혀 있을 때였다. 훌리아는 그때 막 사범학교를 마치고 시골학교 선생으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체 게바라가 사살된 라 이게라 마을의 학교는 체 게바라 박물관이 됐다. ⓒ김재명

  20대 초반의 여인은 어느덧 50대 후반의 부인이 됐다. 그녀의 증언.
  
  “오후 어스름할 무렵 체 게라바가 다른 한 명의 포로와 함께 잡혀와 학교 교실에 갇히자,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을 지니고 모여들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체 게바라에게 가까이 가는 걸 막았다. 그렇지만 나는 에외였다. 나는 학교 선생이었고, 무엇보다 젊고 예뻤기에 군인들이 나를 막지는 않았다. 그때 체 게바라는 두 손이 뒤로 묶이고 두 발도 묶인 채 교실 벽을 바라보는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누더기나 다름 없이 헤어지고 찢어졌고, 신발은 군화가 아닌, 소가죽으로 만든 누런색 샌들을 신고 있었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에 따르면, 그는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다가 군화를 강물에 빠뜨렸다. 이어지는 훌리아의 증언. “게바라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다리는 총상을 입은 탓에 천으로 감싸고 있었다. 병사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나는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체 게바라가 결혼을 했는지, 아이들은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그에게 왜 이런 투쟁을 시작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가족들은 그의 투쟁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나의 이상(ideal)이 무엇보다 앞선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살아서 바깥에 나간다면, 당신같은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고 했다”
  
 
  체 게바라가 죽기 직전 앉아있었던 의자. ⓒ김재명
 
  1967년 체 게바라가 죽기 바로 직전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전 학교여선생 훌리아 코르테즈 오시우아가(57).   ⓒ김재명

  “게바라와 밤늦게까지 얘길 나누면서 우린 친구가 됐다. 기억나는 대로 그의 말을 옮긴다면 이렇다. ‘이 학교엔 아무것도 없다. 나는 학교를 새로 고쳐 짓고 현대적인 학교로 만들겠다. 그리고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대주겠다. 트랙터를 보내 길을 넓혀 주겠다.’ 나도 그때 형편이 비참하고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얘길 나누는데 한 볼리비아군 장교가 들어서더니, 나더러 나가달라고 했다. 무장군인들은 체 게바라를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가더니, 사진을 찍었다. 그때 게바라의 손은 앞으로 묶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먼발치에서 호기심 어린 눈길로 그를 지켜봤다. 게바라는 마치 아는 누군가가 마을사람들 속에 섞여있나 찾듯이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그리곤 나를 발견하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사진을 찍은 뒤 군인들은 다시 게바라를 교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조금 뒤 나도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게바라와 얘길 나누진 못했다. 게바라는 군인들이 지키고 보는 앞에서 나와 얘길 하는 걸 삼가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런데...(이 대목에서 훌리아는 잠시 울먹이는 표정이 됐다) 총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해보니, 그 총소리는 게바라가 아니라 그와 함께 체포된 윌리를 겨냥한 총소리였다”
  
  “엄마는 체 게바라에게 주려고 조촐한 식사를 만들었다. 그리곤 내게 갖다주라고 했다. 게바라는 배가 고팠던 듯 접시를 다 비웠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식사는 근래에 내가 먹어본 것 가운데 가장 맛있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 나는 빈 접시를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내게 밥을 먹으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식욕을 느끼지 못했다. 겨우 한두 숫갈을 뜨려 하는데, 총성이 들렸다. 나는 게바라가 죽임을 당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학교로 달려갔다. 이상하게도 그곳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게바라는 두 팔을 넓게 벌리고 눈을 뜬 채 죽어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훌리아는 그런 사실을 몰랐지만, 당시 현장에는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이 볼리비아군 장교들과 함께 헬기를 타고와 있었다. 당시 베트남전쟁으로 골머리를 썩이던 존슨 미 행정부와 볼리비아 군부독재정권은 체 게바라의 처리 문제를 놓고 머리를 맞댔다. 결론은 즉결처형 쪽이었다. 이미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된 체 게바라를 재판에 붙여 국제사회의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이나 볼리비아 양쪽 다 득보다 실이 크다는 판단에서였다.
  
  게바라는 사살된 뒤 다른 게릴라 동료 시신들과 함께 볼리비아 군 헬기로 바예그란데로 실려갔다. 바예그란데는 인구 8천명의 작은 도시. 게바라의 시닌은 그곳 세뇨르 드 말타병원의 세탁장에 눕혀진 채로 일반에 공개됐다. 그런 뒤 비밀리에 시 외곽 마우솔쿰 지역에 묻혀졌다. 세상엔 그의 시신이 볼리비아 밀림지대에 그냥 내던져졌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즉결처형된 체 게바라의 시신이 헬리콥터로 옮겨진 다음 일반에 공개됐던 세뇨르 드 말타 병원 빨래터 (바예그란데). ⓒ김재명

  쿠바와 아르헨티나 공동조사팀의 끈질긴 노력 끝에 체 게바라의 유해가 발굴된 것은 정확히 30년 뒤. 게바라는 함께 암매장됐던 동료 게릴라 유해 6구와 함께 쿠바 산타 클라라로 옮겨졌다. 볼리비아 혁명과정에서 죽은 다른 11명의 유해도 그 비슷한 시기에 옮겨졌다. 카스트로 정권은 게바라가 1958년 쿠바혁명 당시 바티스타 친미독재 정부군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던 산타 클라라에 거대한 혁명기념탑을 만들었고, 그 밑에다 게바라를 비롯한 볼리비아 혁명전사들의 시신을 안장해놓았다.
  
  성취의 땅 쿠바, 좌절의 땅 볼리비아
  
  30대 나이의 체 게바라가 사회혁명의 이상을 품고 투쟁했던 곳이 쿠바와 볼리비아다. 그 두 지역은 게바라 개인에겐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선다.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희망의 땅이었다면, 볼리비아는 좌절과 실패의 땅이다. 볼리비아는 게바라의 혁명적 이상이 움틀 곳은 아니었다. 산타 크루즈 국립대학에서 만났던 로헤르 뚜에로 교수(정치학)는 “우리 볼리비아 지식인들은 체 게바라에게 정신적 부채를 지고 있다”고 말한다.
  
 
  바예그란데 외곽 체 게바라의 시신을 몰래 파묻었던 곳. 1997년 발굴돼 쿠바로 보내졌다. ⓒ김재명

  게바라가 처형됐던 안데스산맥의 작은 마을 라이게라는 따지고 보면, 게바라를 돕기는커녕 외면했던 곳이다. 게바라가 1966-67년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투쟁하면서 날마다 하룻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기록해 남긴 <볼리비아 일기>의 한 기록(1967년 9월 27일)에 따르면, 피카초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아침을 때운 게바라 일행이 라 이게라 마을에 들어서자, “남자들은 다들 사라지고 몇몇 부인들만 남아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렇게 게바라를 외면했던 마을 사람들이 지금은 게바라 박물관이며 제법 큰 동상을 세워놓고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다. “이제와 체 게바라의 죽음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것이냐”는 눈총을 받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바라가 라이게라 마을에서 사살된 뒤 헬리콥터에 실려와 일반에 공개됐던 바예그란데(라이게라 북부 50km 지점에 있는 인구 8천의 작은 도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곳 문화센터가 만들어놓은 관광 프로그램은 체 게바라와 관련된 여러 곳들을 돌아보는 것이 전부라 할 만했다. 체 게바라의 시신이 놓여있던 세뇨르 드 말타병원의 세탁장, 그리고 동료 6명과 함께 비밀리에 암매장했던 시 외곽 마우솔쿰 지역, 그 지역 화가들이 그린 체 게바라 그림들을 전시해놓은 산타클라라 카페 등등...
  
  바예그란데 문화원 안에 있는 박물관 자체가 체 게바라 관련 유품과 지도들을 빼면 볼 것이 없을 정도다. 안데스 산맥말고는 이렇다할 관광자원이 없는 가난한 나라가 볼리비아다. 그런 까닭일까, 체 게바라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던 볼리비아가 다시 그의 죽음을 상품으로 팔아 달러를 벌어들이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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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만 칼럼

최근 미 연준 의장 그린스펀이 의원들에게 미 재정적자가 지속불가능하다고 경고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보장을 삭감하라는 조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부시가 단행하고 그린스펀도 동의한, 부자들에게 그 혜택이 주로 돌아간 막대한 세금삭감을 다시 환원하는 방법은 경제에 안좋다고 하면서...

그런데 크루그먼은 재정적자가 이렇게 커진 것을 공화당과 부시가 원했다고 하네요. 이를 빌미로 사회보장과 의료보장을 축소하려 하고 있지요. 이게 '맹수 굶기기'론이라 하네요. 어떻든 정부싸이즈를 줄이고 이를 민간에게 이전하겠다(부시정부는 사회보장의 일부를 개인들이 투자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지요! 부시가 이를 오너 소사이어티, 즉 소유자 사회라 했던가요?)는 부시정부의 신념은 확고한 데가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사회보장 혜택이 대폭 줄어든다는 것이 폭로되었고, 그래서 미국민들 다수가 이에 반대하고 있나 봅니다. 그래서 결국 세금 삭감 등으로 재정적자를 일부러 늘리고 이를 빌미로 사회보장을 축소하려는 '맹수 굶기기' 시나리오는 관철되기 어려울 것으로 크루그먼은 예측하네요. 결국 그린스펀이 예상하는 재정위기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이런 사태는 불편부당한 이미지와는 반대로 공화당과 부시를 줄곧 편들어온 그린스펀의 사기때문에 초래되었다고 맹공을 퍼붇고 있네요. 그리고 이 위기의 현실화는 이제껏 적자를 메꿔주던 외국자본이 재정적자 감축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갈 것을 알아채고 철수를 할 때이겠지요.

 

March 4, 2005
OP-ED COLUMNIST

Deficits and Deceit

By PAUL KRUGMAN





Four years ago, Alan Greenspan urged Congress to cut taxes, asserting that the federal government was in imminent danger of paying off too much debt.

On Wednesday the Fed chairman warned Congress of the opposite fiscal danger: he asserted that there would be large budget deficits for the foreseeable future, leading to an unsustainable rise in federal debt. But he counseled against reversing the tax cuts, calling instead for cuts in Social Security, Medicare and Medicaid.

Does anyone still take Mr. Greenspan's pose as a nonpartisan font of wisdom seriously?

When Mr. Greenspan made his contorted argument for tax cuts back in 2001, his reputation made it hard for many observers to admit the obvious: he was mainly looking for some way to do the Bush administration a political favor. But there's no reason to be taken in by his equally weak, contorted argument against reversing those cuts today.

To put Mr. Greenspan's game of fiscal three-card monte in perspective, remember that the push for Social Security privatization is only part of the right's strategy for dismantling the New Deal and the Great Society. The other big piece of that strategy is the use of tax cuts to "starve the beast."

Until the 1970's conservatives tended to be open about their disdain for Social Security and Medicare. But honesty was bad politics, because voters value those programs.

So conservative intellectuals proposed a bait-and-switch strategy: First, advocate tax cuts, using whatever tactics you think may work - supply-side economics, inflated budget projections, whatever. Then use the resulting deficits to argue for slashing government spending.

And that's the story of the last four years. In 2001, President Bush and Mr. Greenspan justified tax cuts with sunny predictions that the budget would remain comfortably in surplus. But Mr. Bush's advisers knew that the tax cuts would probably cause budget problems, and welcomed the prospect.

In fact, Mr. Bush celebrated the budget's initial slide into deficit. In the summer of 2001 he called plunging federal revenue "incredibly positive news" because it would "put a straitjacket" on federal spending.

To keep that straitjacket on, however, those who sold tax cuts with the assurance that they were easily affordable must convince the public that the cuts can't be reversed now that those assurances have proved false. And Mr. Greenspan has once again tried to come to the president's aid, insisting this week that we should deal with deficits "primarily, if not wholly," by slashing Social Security and Medicare because tax increases would "pose significant risks to economic growth."

Really? America prospered for half a century under a level of federal taxes higher than the one we face today. According to the administration's own estimates, Mr. Bush's second term will see the lowest tax take as a percentage of G.D.P. since the Truman administration. And don't forget that President Clinton's 1993 tax increase ushered in an economic boom. Why, exactly, are tax increases out of the question?

O.K., enough about Mr. Greenspan. The real news is the growing evidence that the political theory behind the Bush tax cuts was as wrong as the economic theory.

According to starve-the-beast doctrine, right-wing politicians can use the big deficits generated by tax cuts as an excuse to slash social insurance programs. Mr. Bush's advisers thought that it would prove especially easy to sell benefit cuts in the context of Social Security privatization because the president could pretend that a plan that sharply cut benefits would actually be good for workers.

But the theory isn't working. As soon as voters heard that privatization would involve benefit cuts, support for Social Security "reform" plunged. Another sign of the theory's falsity: across the nation, Republican governors, finding that voters really want adequate public services, are talking about tax increases.

The best bet now is that Mr. Bush will manage to make the poor suffer, but fail to make a dent in the great middle-class entitlement programs.

And the consequence of the failure of the starve-the-beast theory is a looming fiscal crisis - Mr. Greenspan isn't wrong about that. The middle class won't give up programs that are essential to its financial security; the right won't give up tax cuts that it sold on false pretenses. The only question now is when foreign investors, who have financed our deficits so far, will decide to pull the plug.


E-mail: krugman@ny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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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Clippings thursday , 3 march 2005...| 이라크소식

U.S. Military Dead in Iraq Rises to 1,500

By TODD PITMAN, Associated Press Writer
BAGHDAD, Iraq - The number of U.S. military deaths in the Iraq (news - web sites) campaign rose to 1,500 on Thursday, an Associated Press count showed, as the military announced the latest death of one of its troops.
The soldier was killed Wednesday in Babil province, just south of Baghdad, part of an area known as the "Triangle of Death" because of the frequency of insurgent attacks on U.S.- and Iraqi-led forces there.
The soldier, assigned to the 1st Marine Expeditionary Force, was killed in action "while conducting security and stability operations," the military said, declining to release more specific information.
As is customary in the military, the name of the soldier was withheld pending notification of next of kin.
U.S. troops are killed nearly every day in Iraq.
The latest death brought to at least 1,500 the number of members of the U.S. military who have died since the U.S.-led war in Iraq began in March 2003, according to an Associated Press count. At least 1,140 died as a result of hostile action, according to the Defense Department. The figures include four military civilians.
Since May 1, 2003, when President Bush (news - web sites) declared that major combat operations in Iraq had ended, 1,362 U.S. military members have died, according to AP's count. That includes at least 1,030 deaths resulting from hostile action, according to the military's numbers.
The tally was compiled by The Associated Press based on Pentagon (news - web sites) records and AP reporting from Iraq.

 

이라크에서 미군 사망자가 1500명으로 됐다

지난 목요일, 미군 사망자수가 1500명에 이르렀다.

지난 수요일 바그다드 서쪽의 "죽음의 삼각지" 중 하나인 바빌에서 한명의 미군이 추가로 사망해서.

미군은 거의 매일 이라크에서 죽고 있다.

적어도 1140명이 적대적 전투행위때문에 죽었다. 부시가 주요전투종료를 선언한 2003년 5월 1일 이래로 1362명의 미군이 죽었다.

 

Call for UN sanctions against Sudan
By AFP, 2 March
TWO US senators called today for the United Nations to place "hefty" sanctions on the Sudan government to end the "genocide" taking place in Sudan's Darfur region.
In a bill submitted to the US Senate, Republican Sam Brownback and Democrat Jon Corzine called for the US government to press the UN Security Council to set international sanctions against Khartoum.
They also called for US President George W. Bush to name a special envoy to deal with the Sudan situation.
Some 70,000 people have died and 1.6 million have been displaced in Darfur during the last two years, largely at the hands of the Khartoum-supported Janjaweed militia.
"The UN should vote to immediately levy hefty and serious economic and diplomatic sanctions against the government of Sudan, the government-sponsored Janjaweed, and any businesses or companies complicit through their government connections," said Mr Brownback.
"We must insist upon an arms embargo against the government of Sudan, travel restrictions on Sudanese government officials, and a freeze on the assets of companies controlled by the ruling party that do business abroad," he said.
In February Washington proposed new targeted UN sanctions for Sudan in what it called a bid to get all sides in the conflict to end the bloodshed.
Overnight, a Sudanese foreign ministry official expressed "astonishment" over the US proposal, while a senior Sudanese security official accused the US embassy in Khartoum of carrying out "hostile activities" against the country.
Last year Senators Brownback and Corzine pushed through the Senate a resolution that labelled the conflict in Darfur "genocide", while the UN continues to avoid the term in dealing with Sudan.

 

수단에 대한 유엔의 경제제재요구

3월 2일  AFP

 

Brave, Young and Muslim – The New York Times
By THOMAS L. FRIEDMAN

Published: March 3, 2005
he last couple of years have not been easy for anyone, myself included, who hoped that the Iraq war would produce a decent, democratizing outcome. And even in the wake of the remarkable Iraqi election, the toppling of the Lebanese cabinet and the reforms brewing in Egypt, it is too soon for anyone to declare victory. We're dealing with some very unstable chemicals. But what makes me more hopeful today is precisely what made me hopeful that the Iraq war might work out, and that is the number of Arab-Muslim youth I've encountered since 9/11 who have urged me to keep writing about the need for democracy and reform in their part of the world.
Of course, many Americans are surprised by this. America has treated the Arab-Muslim states for 50 years as a collection of gas stations. All we cared about was that their pumps were open and their prices low, and that they be nice to the Israelis. As long as the regimes did that, we said, they could do whatever they wanted "out back." They could treat their women however they wanted, they could write about America in their newspapers however they wanted, and they could preach intolerance of other religions all they wanted - just keep their pumps open and prices low and be nice to the Israelis. On 9/11, we got hit with everything that was going on "out back."
Since then, it's been clear to me that unless we partner with Arabs and Muslims to change their context, unless we help them create the free space for a war of ideas that will allow for a new discussion out front and out back, we're just begging for another 9/11. I always knew we had partners there, but the democratic movements that have now emerged have shown me just how many young people there want to give voice to their aspirations and achieve their full potential - something their governments and spiritual leaders have been blocking.
If you want to get a taste of what they sound like, read Irshad Manji's courageous book "The Trouble With Islam Today," and the letters and debates from young Muslims on her Web site (www.muslim-refusenik.com). Ms. Manji is a 36-year-old Canadian Muslim feminist who has dared to write a book calling for a reformation of Islam.
"There's no bigger idea for the Muslim world today - and consequently for all of us - than reopening the gates of independent thinking, or 'ijtihad,' " she said. "That's the main point of my book - to show that Islam once had a pluralistic tradition of critical debate and dissent, and that we Muslims need to rediscover this tradition to update Islam for the 21st century. That's not being radical. That's being faithful."
Born in Uganda of an Indian-Muslim father and a mother with Egyptian roots who emigrated to Canada, Ms. Manji is a frequent lecturer about diversity on college campuses. "Even before 9/11 and my book, I noticed that after my lectures young Muslims would gather at the side of the stage, wait for everyone else to leave and then walk over and say things like, 'Irshad, we need more voices to help open up this religion of ours, because if it doesn't open up we are leaving it.' That is what the clerics don't get. We're saving Islam by showing the emerging generation how they can be part of a pluralistic world and be faithful Muslims."
To that end, Ms. Manji has just launched what she calls Project Ijtihad. "The goal," she explained, "is to create a leadership center that will attract young, reform-minded Muslims to network with one another so they see that they're not alone, to develop the confidence to openly dissent with conformity in Islam and to learn about the golden age of Islam, when Muslims, Jews, Christians worked together to preserve and expand knowledge - something we're rarely, if ever, taught in our public schools or in our Islamic religious schools."
At the urging of students, Ms. Manji recently had her book translated into Arabic and Urdu and posted on her Web site. Young Arabs and Pakistanis are now downloading it in private and discussing it. This week she was approached by a small Arabic publisher who operates in Lebanon and Germany - and has just opened in Baghdad - offering to publish her book in Iraq!
"I can't help but appreciate the symbolism," she said. "Baghdad was the seat of the Islamic enlightenment from the eighth to 12th centuries. It was a crossroads of goods, services, big ideas."
This will take time to play out, and a decent outcome is not assured. But the good news is that young Arabs and Muslims are starting to have a very different conversation "out back," and more and more of them are demanding to have it out fr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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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디쁠로마띠끄-팔레스타인의 마지막 희망

Politician of conviction who speaks for all
Abu Mazen: Palestine’s last best hope

After the declarations at Sharm al-Sheikh this month, it seems Abu Mazen might pull off his gamble: a ceasefire with Hamas, Islamic Jihad and the al-Aqsa Martyrs Brigades, all integrated within the Palestinian security forces. But will Israel keep its promises? And will the United States and the international community give him the support he needs?


By Robert Malley, Hussein Agha



YASSER ARAFAT’S death will fundamentally transform the contemporary Palestinian land-scape, as his political ascent had shaped it. He was unique, and uniquely suited to his people’s condition after the 1948 war: defeated, dispossessed, dispersed, without a state to defend them, a territory to hold them or a political strategy to unite them.


Palestinians were divided by family, class and clan, scattered throughout the region and beyond, exploited by the competing purposes of many and prey to the ambitions of all. Because of his history and personality, charisma and guile, cajoling and bullying, luck and perseverance, Arafat came to represent them equally and became the face of the Palestinian people, to them and to the world.


His paramount goal was national unity, without which, he believed, nothing could be achieved. He was the bridge between Palestinians in the Diaspora and those on the inside, those who were dispossessed in 1948 and those who were occupied in 1967, West Bankers and Gazans, young and old, rich and poor, swindlers and honest toilers, modernists and traditionalists, militarists and pacifists, Islamists and secularists.


He was national leader, tribesman, family elder, employer, Samaritan, head of a secular-nationalist movement and deeply devout, aspiring to be the pre-eminent embodiment of each of these disparate groups, even when they held opposing views. His style was often criticised and disparaged but his pre-eminent position was seldom questioned. No Palestinian leader is likely to reproduce his kind of politics, almost certainly not under conditions of occupation, and not right now.


The man chosen to succeed him is in most ways different but in one critical respect the same. Mahmoud Abbas (Abu Mazen) is, like Arafat, a rarity: a genuinely national Palestinian figure, but in a radically dissimilar fashion. Where Arafat attained national status by identifying with and belonging to every constituency and factional interest, Abu Mazen did so by identifying with none. Arafat immersed himself in local politics; Abu Mazen floats above it, his service is to the national movement as a whole. Arafat - “the Old Man” - with his inexhaustible bravado, ruled through an overwhelming and overpowering rhetorical and physical presence.


Abu Mazen, unassuming and understated, a man of few words but many deeds, has made a career of running from the limelight. With Arafat’s passing, the politics of weightiness will give way to the politics of the light touch.


Arafat inhabited a Borgesian world where a thing and its opposite could cohabit the same point in space and time; where what mattered was the impact of language, not the meaning of words; where myths combined with facts to produce reality. Abu Mazen’s world is rooted in what is familiar and recognised as the order of things. His language is acceptable, more everyday, his reality far less animated by the ghosts of the past. Instead of the politics of ambiguous and creative intensity, he stands for the politics of cool and clear rationality.


A politician of conviction


Abu Mazen is a politician of conviction, which is to say not much of a politician at all until recently. He rarely schemes; his behaviour is, if anything, an outgrowth of his emotional and temperamental makeup, a feature that accounts for his many successes and not a few of his setbacks. Guided by a deep sense of ethics, repugnance for political expediency, and an exaggerated faith in the power of reason, he will seldom give in or fight back when rebuffed or slighted. Convinced that he has logic and reason on his side, and that logic and reason are the faculties that guide all others, he would much rather passively wait until people see things his way.


There is little of the manipulator, deceiver, or conspirator in him, which is perhaps why he is so unforgiving of the manipulations, deceptions and conspiracies of others. That was the key to his seesaw relationship with Arafat: because he did not hesitate to disagree with the Old Man, he chose seclusion over confrontation or compromise; because Arafat knew that Abu Mazen’s motives were sincere rather than opportunistic (unlike so many of his colleagues), he rarely lost trust in him and almost always forgave him.


Abu Mazen is also a profoundly pious Muslim. Inspired by Islam but allergic to its role in politics, he prays daily and fasts at Ramadan but publicises neither, feeling as he does that religion is a matter of private belief not public display, let alone public regulation. In his now regular dealings with leaders of Hamas or Islamic Jihad, this gives him an unmistakable edge; he is convinced that he is no less a Muslim than they are, and when he meets a self-proclaimed Islamist politician, he sees the politician, not the Islamist.


Most important, he holds to a core set of principles from which he is disinclined to depart or compromise. In autumn 1999, in the aftermath of Ehud Barak’s election as Israel’s prime minister, he presented US officials with a straightforward proposal for a final deal: a Palestinian state within the borders of 4 June 1967; East Jerusalem as its capital; and recognition of the principle of the refugees’ right of return. Within those parameters, and consistent with international legality, he left room for discussion. There would be minor and equitable swaps of land to take account of some Israeli settlements; provisions to allow Jews unimpeded access to their holy sites; and the right of return would be implemented in a manner that would not threaten Israel’s demographic interests.


But prior acceptance of the basic proposal was paramount, for without it there could be neither international legitimacy nor a just peace. The US and Israel ignored his suggestion. Negotiations followed a bazaar-like route of posturing and deal-making, unsecured by any core principle: the percentages of West Bank territory to be turned over by Israel varied wildly, as did the proposed allocation of sovereignty over East Jerusalem and the number of refugees allowed to resettle in Israel.


This mode of negotiation was anathema to Abu Mazen, who believed that nothing good would come of it, and felt that it was counter-productive for Palestinians and, to the extent that it raised false expectations about the scope of possible Palestinian compromises, dishonest to Israelis. When his suggestion in the spring of 2000 for secret negotiations between non-officials from each side was spurned by Barak, and other, less suitable, Palestinian officials were selected to lead the talks, in essence he withdrew.


Uncomfortable with the way that negotiations had proceeded before the Camp David summit of July 2000 (1), Abu Mazen was adamantly opposed to the outbreak of violence that followed it. He had long viewed violence as pointless and unsound, a use of the weakest Palestinian weapon to assail Israel’s strongest flank. He estimated the cost-benefit of violence, and while the costs were high, benefits were few: Israelis closed ranks, the United States took sides,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urned its back, and the Palestinian Authority fell apart.


Means and ends meet


Abu Mazen believes the goal should be to engage with Israeli political groups, talk in a language that Washington understands, and rally the world to the Palestinians’ cause. To that end, Palestinians must stabilise the situation, restore law and order, rein in all armed militias, build transparent, legitimate centralised institutions and, above all, cease armed attacks against Israel. In his vision, means and ends mesh: if Palestinians make a fair case, they can get a fair hearing. Palestinian restraint should result in stronger international support and the Israeli public’s greater receptivity to logical demands.


His belief in persuasion and principle over violent pressure is risky and, to many Palestinians, reckless. As they see it, Palestinians did not militarise the confrontation, Israel did; in the opening weeks of the intifada, most casualties were Palestinian, not Israeli; when tentative and informal ceasefires were reached, Israel breached them; if the Palestinians were to stop fighting, they would unilaterally disarm, removing all pressure on Israel to compromise.


Abu Mazen’s different view is informed by his long experience with Israel. As part of a PLO team with Yasser Arafat and Khalil al-Wazir (Abu Jihad) (2), he oversaw contacts with Israelis in the 1970s. Although these began with fringe, anti-Zionist activists, they gradually included Arab-Israelis, the Zionist left, moderate former military officers and members of the Labour party. After the secret Oslo accords of summer 1993, Abu Mazen expanded his reach to include less obvious but, to him, more relevant forces: Likud and Orthodox Jews.


From those exchanges, he concluded that Israeli society was both intriguingly complex in its divisions and disarmingly simple in its aspirations: to achieve normalcy and security. He believed that Israelis, if offered those, would ultimately be willing to make the concessions required for a stable and just peace; his conviction strikes some Palestinians as the height of naivety, others as the pinnacle of pragmatism.


Abu Mazen, a man without a genuine following, has become a man without an effective opposition. This very much accounts for his smooth and uncontested path to power. Four years into a devastating armed confrontation with Israel, and with the loss of the only leader they have known, Palestinians are in shock, afraid and tired. Neither the public nor any significant constituent group is in the mood for a fight. Abu Mazen, who was the first choice of no single constituency, was every constituency’s natural choice. He is today the last Palestinian with national stature and historic credentials, the only one who can authentically speak on behalf of all. Any other leader would have caused a protracted, costly, and divisive struggle for succession. His election was less an exercise in conferring legitimacy than in confirming it.


Many divergent interests have coalesced around him. Palestinians frightened that Arafat’s death would bring further chaos see in Abu Mazen the reassuring symbol of personal security and collective stability. For the many exhausted by the intifada, he is viewed as the man most likely to bring calm and even perhaps some benefits. For militants hunted by Israel, he could be the man to negotiate an amnesty that returns them to normal life. Members of the business community and the social elite believe that he understands their needs and can create a climate more supportive of their commercial interests. Members of the entrenched bureaucracy that grew alongside the Palestinian Authority, resentful of losses since the uprising, hope Abu Mazen will restore them to the position they enjoyed after 1993.


Palestinian refugees and members of the diaspora, worried that their interests will be discarded once negotiations resume, are comforted by his origins in the now-Israeli town of Safad, his record of political struggle outside the territories and his long support for the right of return. There are some who have closed ranks around Abu Mazen because he is deemed to have been anointed by the only power that counts, the US, their preference being a reflection of the imagined preferences of others.


Strange bedfellows


Circumstances have made for strange bedfellows. With Israel’s scheduled withdrawal from the Gaza Strip, distrust between Palestinian West Bankers (who fear Gaza will go its own way) and Gazans (who fear their West Bank counterparts will seek to scuttle the disengagement) has worsened. Yet both sides rallied around Abu Mazen, who is regarded as beholden to neither and therefore unthreatening. Some expected that young Fatah members (3) would challenge him, but the succession came too soon; defying the established leadership of a deeply divided movement would have been too costly.


Instead, self-styled future leaders saw in Abu Mazen someone unaffiliated with any particular faction, a guarantor of continuity and, most of all, a transitional figure during whose rule others could prepare to take over. Old Arafat loyalists concerned for their positions, including members of the Fatah Central Committee, cling to him as insurance against the suspected ambitions of these newcomers.


Hamas and Islamic Jihad are well aware that his programme is incompatible with theirs, that he rejects violence and the existence of armed militias. But they have lived with him before and are confident they can do so again. They believe they know his ways - to coopt, not to crush. Convinced that Israel will not give him a fair chance and that he will fail, they can afford to wait for the next round while benefiting from an overdue respite. As for the US, Israel, Europe and the Arab countries, Abu Mazen not only believes in the agenda they claim to hold dear - ending armed attacks, building Palestinian institutions, asserting the rule of law - but, more significantly, he is thought of as the only Palestinian remotely capable of delivering it.


Among this wide array of domestic and international constituents, those who adhere fully to his political vision are few and those who believe he will ultimately see things their way are many. But for now, Abu Mazen is relatively free to speak and act on his own, freer than he or most others expected. Because they came to him rather than he to them, he is under surprisingly little pressure from groups that Arafat perpetually sought to placate - and who sought to tie his hands. Whatever competing centres of power once existed are for now dormant, unwilling or unable to form an organised and effective opposition.


Most important, he has achieved this position because, more than any other Palestinian leader today, his political inclinations are in harmony with his people’s immediate priorities: security and the desire for a normal life free of fear of Israeli attacks and Palestinian gangs; material betterment and resumption of basic economic activity; freedom of movement, to circulate again without constant roadblocks, curfews and humiliation. Palestinians now aspire to the conditions that prevailed before the intifada - the very conditions that precipitated it; Abu Mazen seems to them best equipped to restore those conditions.


Ariel Sharon has won the current round of the Israeli-Palestinian conflict. His goal, an old one, was for Palestinians to tire of their national struggle. To cause the impoverishment and despair of the Palestinian people was never his purpose as such, but he viewed that as a prerequisite to diverting the Palestinians’ concentration from political issues to mundane matters of more immediate concern. He appears to have achieved this ambition, an outcome Abu Mazen long predicted, which is why at the beginning of the armed intifada in 2000 he called for it to end. The uprising, he warned, would hurt Palestinians more than Israelis; ultimately, they would have to return to square one, cease the uprising and rebuild their lives, only more divided, battered and isolated than before.


Palestinian exhaustion suits both men’s purposes for now, though they differ sharply on what they intend to do with it. For Sharon, it provides a welcome means to depoliticise the Palestinian national movement; for Abu Mazen, it is a necessary phase before the Palestinian nation can be re-politicised a different way.


A time for unilateral steps


Abu Mazen has little hope that a comprehensive settlement can be reached with Sharon. Too much separates them, not least Sharon’s preference for a long-term interim agreement in which hard issues, such as the final borders, status of Jerusalem and fate of refugees, are indefinitely deferred. Abu Mazen believes that now is not the time for a bilateral agreement but for unilateral steps, with Israel withdrawing from Gaza and the northern West Bank, and Palestinians putting their house in order.


Negotiations leading to a permanent settlement remain his goal, but he does not think that the other side is ready yet. By rebuilding Palestinian institutions and the national movement, genuinely renouncing violence, rekindling international ties and clearly articulating basic and unalterable Palestinian requirements, he believes that the post-Sharon stage can be prepared for or even accelerated and that, meanwhile, his people will benefit from new and long-awaited tranquility.


This is a gamble. Abu Mazen’s support is as wide as it is fickle, reflecting circumstance far more than adherence to his person or programme. The current state of shock among Palestinians is likely to subside, their fear to abate and exhaustion to end, at which point more political demands - to release Palestinian prisoners, stop settlement construction or end the occupation - will be voiced.


As time passes, choices will have to be made - and enemies. Some who half-heartedly support Abu Mazen now will break ranks, there will be the prospect of an organised and effective opposition, and calls for renewed violence. Abu Mazen hopes that by then he will have produced stability, law and order, better standards of living, and freedom of movement, accumulating political capital more quickly than he spends it and compensating for the loss of support from some constituents by the consolidation of support from others.


To succeed, he is banking heavily on support from the international community, principally the US, to go beyond the immediate, material improvements in the Palestinians’ situation. Ending violence and implementing institutional reforms are causes he believes in and will carry out, no matter what, for the good of the Palestinian people. But he also sees an important side-benefit, which is to put President George Bush to the test and confront him with his words. More than once, Bush has said that reining in militant groups and democratising Palestinian society would lead to a two-state solution. If the Palestinians keep their commitments, Abu Mazen hopes, the US will have to do the same, putting pressure on Israel to make the political concessions he will need so much.


Abu Mazen is also relying on changes within Israel, expecting that the quieter situation he will create can lead to domestic pressure for a comprehensive deal, rather than popular contentment with the status quo. If that can be done quickly enough, Palestinian impatience can be managed and a return to armed confrontation averted. He must get enough movement, and fast enough, from Israel and the international community or the tired Palestinians might eventually tire of him as well.


Three critical differences


This is the same gambit he vainly attempted during his brief prime ministership (from 29 April to 7 September 2003). But with three critical differences: Arafat is gone, Palestinians are more willing to give Abu Mazen a chance, and Israel and the US have had time to learn from that unfortunate precedent.


Here the difference with Arafat is palpable. Abu Mazen stands where he does today because the popular mood is in tune with him, while Arafat stood where he did for so long because he laboured tirelessly to remain in tune with the popular mood. By actively engaging with every domestic Palestinian constituency, Arafat ensured that his status was impervious to circumstances; by remaining outside the fray, Abu Mazen is ensuring that his status will be tied to its constituents. He enjoys a power that is more nearly absolute yet more temporary. Unburdened by the need to cater to every constituency, his margin of manoeuvre is remarkably broad. But should the mood change, the US fail to pressure Israel or Israel fail to respond, the consensus that has swiftly formed around him will just as quickly evaporate.


He confronts two paradoxical challenges. Because his principal asset is international credit rather than domestic credibility, and because Palestinians are convinced that the US can get from Israel what they cannot, more will be expected of him than of Arafat. And, insofar as his backing is the result of popular fatigue, the more he succeeds in improving the situation, the more he risks losing support.


Among potential problems, two lie immediately ahead. The first is Israel’s disengagement from Gaza. This is not something he can oppose: land is being turned over to Palestinians and, for the first time in the history of the conflict, settlements are to be evacuated. Gaza, free of Israel’s presence, can be rebuilt and serve as a model for the rest of the occupied territories. But it also is something he cannot afford to embrace warmly: many of his people fear that with all eyes fixed on Gaza, the withdrawal there will be accompanied by a greater density of settlement blocs inside the West Bank, more Israeli construction in the strategic area of Jerusalem, and continued building of the separation wall, all part of a suspected broader plan to impose long-term, de facto borders that will divide the West Bank into cantons.


Balancing these considerations, Abu Mazen is likely to praise the Gaza withdrawal as an achievement that is part of the road map (4), keeping any coordination with the Israelis to a minimum and most international attention on the West Bank.


He knows the second imminent problem; the Israeli proposal to establish a Palestinian state with interim borders in Gaza and parts of the West Bank. Eager for a political achievement, and obsessed with the imperative of institution-building, the US and Europe are likely to press for his approval. Even some Arab countries, desperate for stability and any sign of progress, can be expected to join the chorus. But what some see as an Israeli concession, Abu Mazen sees as a trap, an attempt to defuse the conflict, deprive it of its emotional power, reduce it to a simple and manageable border dispute, and defer a comprehensive settlement. He will strive to find a way neither to alienate important international backers nor break faith with his own deep-seated conviction that the proposal is a ruse; he probably does not yet know how he will do it.


Power undoubtedly will affect him, as it affects all who sample it. Already, he has had to acquire, or feign, a taste for oratory and pressing the flesh, for which Arafat was famous. His political survival will require the kind of tough balancing act he disdained and generally left to Arafat: focusing on material improvement without neglecting political issues; maintaining Israeli and American confidence without losing that of Hamas or Islamic Jihad; disciplining the armed militias without crushing them; looking out for the older generation without disappointing the new; maintaining Fatah’s unity without being hamstrung by it; fulfilling the US’s demands without appearing to comply with all of its wishes; ending the violence without seeming to submit to Israel; and moving away from Arafat’s legacy without breaking with it.


Over time, the fundamental challenge will be to reconcile the many expectations he now embodies and channel the lukewarm backing he has from often competing groups into active support for himself and his policies. In this sense, he is both stronger and weaker than the electoral results indicate. The more than 60% who voted for him are not all faithful supporters, and the more than 30% who voted for his rivals do not constitute an organised or unified opposition (5).


There are unanswered questions. What will happen if Abu Mazen cannot deliver what the US and Israel require, or if Bush and Sharon do not produce what Abu Mazen needs? What if Abu Mazen is unable to reach a deal with Hamas, Islamic Jihad and Fatah militants, or if he reaches a deal but it does not hold, or if it holds but Israel continues its military attacks? What if the fragile political consensus around him breaks down or if violent infighting breaks out?


For now Abu Mazen is the object of often incompatible desires. A protector and a saviour, a transitional figure and a generation’s last best hope, the devil they know for some and the lesser evil for others: to Palestinians, Abu Mazen is all of these, all at once. He must wonder where his constituents have come from, how long they will stand by him, and what he has done to deserve their abundant and often cumbersome company.


 


Robert Malley is a former advisor to President Clinton and director of the Middle East and North Africa programme of International Crisis Group (Brussels). They have adapted this article from a text published by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Hussein Agha is a specialist in Israeli-Palestinian issues and Senior Associate at St Antony’s College (Oxford 

Original text in English

(1) See Alain Gresh, “Camp David’s thwarted peace”, Le Monde diplomatique, English language edition, July 2002.


(2) Founder, with Yasser Arafat, of Fatah in 1959, Abu Jihad was assassinated by the Israeli secret services in 1988, when he was coordinating the first intifada.


(3) See Graham Usher, “Dead end for the Palestinian resistance”, Le Monde diplomatique, English language edition, September 2003.


(4) Adopted on 30 April 2003 by the Quartet (UN, US, Russia, EU), it calls for the creation of an independent, democratic, viable Palestinian state in 2005 on the basis of UN resolutions; this will be based on the end of violence and of terrorism, democratic reforms by the Palestinian Authority and Israel’s withdrawal from Palestinian territories reoccupied since 28 September 2000.


(5) In the presidential election of 9 January, Abu Mazen won 62.35% of the votes; independent candidate Mustafa Barghouti 19.8%, Taysir Khaled of the Democratic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 3.5%, Bassam Salhi of the Palestinian People’s party (ex-communist) 2.6%, Abdelhalim al-Ashqar, independent Islamist 2.68%, Sayyed Barakah, independent Islamist, 1.27 %, and Abdelkarim Shoubeir, 0.67%; some 70% of registered voters took 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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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뉴스

Iraqi Media Monitoring tuesday, 1 march 2005...

Al-Sharqiyah TV 28 February

알-샤르키야 TV 2월 28일

 

Allawi criticizes US administration's decision to dissolve Iraqi army, other ministries, government departments ...
알라위는 미 행정부를 비판했다, 이라크 군대와 다른 장관, 정부부처 해산을 결정한...

 

Iraqi oil exports through Turkey still not resumed ...

터키를 통한 이라크 석유 수출이 여전히 재개되지 않았다...

Iraqi doctors say US forces used poison gases in Al-Fallujah during past two days ...
이라크 의사가 말했다, 미군이 독가스를 사용했다고, 팔루자에서, 최근 2일동안...

 

Crowded demonstration held in Al-Anbar university in protest against "practices of US forces against students and students" ...

알-안바르 대학에서 대중집회가 개최됐다. "학생들에 대한 미군의 행동"에 항의해서....

 

Iraqi rapid intervention forces, US forces carry out raid campaign in Samarra, arrest 12 "suspects".
사마라에서 미군의 습격에서.... 12명의 "용의자"를 체포했다.

 

 

Al-Iraqiyah TV 28 February

알-이라키야 TV,2월 28일

 

Arrest of terror suspects hailed by Iraqis. Video report highlights comments by Iraqis, reaction to Al-Iraqiyah TV coverage of confessions made by captured insurgents ...

 

Iraqi Media Monitoring wednesday, 2 march 2005...

Civilian driver killed in Al-Ramadi
US soldiers shot dead a civilian driver in Al-Ramadi on 1 March, reported Al-Sharqiyah TV. According to the channel, an eyewitness said that the driver was speeding toward a checkpoint, which prompted the US soldiers to open fire on him. The incident took place at 1100 local time (0800 gmt). In a separate incident, an explosive charge went off in central Al-Ramadi early on 1 March, killing three people in a civilian car. The circumstances of the incident had not been determined yet, said the report. (Al-Sharqiyah TV 1 Mar 05)

 

시민인 운전사가 라마디에서 죽었다

3월 1일 미군이 시민인 운전사에게 사격해 죽었다. 목격자는 운전사가 검문소를 고속으로 지나가자  미군이 그에게 사격했다고. ...

 

Siege continues in western Haditha as curfew imposed
US forces have been laying siege to the city of Haditha in the western Iraqi Governorate of Al-Anbar for the past six days, Iraqi Al-Sharqiyah TV reported on 1 March. According to the report, they imposed a total curfew on Haditha after ending their siege of the adjacent city of Al-Haqlaniyah. Eyewitnesses said that there were food and medicine shortages and that the only hospital in the city is running out of medicines. (Al-Sharqiyah 1 Mar 05)

 

하디타 서부에 대한 점령이 계속됐다, 통금이 시행되다..

미군은 이라크 서부 안바르주의 도시 Haditha에 대한 점령을 계속했다. 지난 6일동안,,, 목격자는 말했다, 그곳에서는 음식물과 의약품이 부족하다고, 그리고 도시의 유일한 병원은 약이 다 떨어졌다고.

 

Iraqi forces assume "greater responsibility" in militant search
Iraqi Chief of Staff Babakir Zebari said that the military operations in the cities of Al-Anbar Governorate in western Iraq were being coordinated, step by step, by the Iraqi Defence Ministry and the US forces' command. In a press statement reported by Iraqi Al-Sharqiyah TV on 1 March, Zebari disclosed that the Iraqi army had information that many Arab elements coming from outside Iraq were in Hit, Rawah and Anah, and were being protected by Iraqi armed groups. He added that two Iraqi divisions were deployed in Al-Anbar and in the surrounding areas and that they had taken on greater responsibility in pursuing the armed groups. He stressed that Abu-Mus'ab al-Zarqawi was in the Al-Anbar area. (Al-Sharqiyah 1 Mar 05)

 

 

Iraq oil revenues reach 13.4bn dollars - minister
Oil Minister Thamir Abbas Ghadban said that Iraq's total crude oil revenues since the fall of the former regime in April 2003 reached 13.4bn dollars. In a press conference covered by Iraqi Al-Sharqiyah TV, the minister said that Iraq's average production of crude oil during the past nine months reached 2.5m barrels a day. He added that the average export reached 1.5m barrels a day, mostly from the southern region. (Al-Sharqiyah 1 Mar 05)

 

 

Al-Mada [political daily published by Al-Mada Corporation]

Armed militants open fire at civilians in Mosul

 

 

IRAQI BROADCAST MEDIA PROG. SUMMARIES, 1 March 05

 

Al-Diyar Satellite Channel In Arabic, Baghdad, 1 March 05

In an article in The Wall Street Journal published on Monday, Iraqi Prime Minister Allawi criticizes US decision to dissolve Iraqi Army and government agencies after the war...

 

Human Rights Watch warns against US plan to deploy new anti-personnel mine system in Iraq...

 

Australian soldiers who fired at a civilian car in Baghdad acquitted. Australian official says the soldiers acted in accordance with military rules... Iraqi transport minister notes plan to build underground in Iraq...

 

US official says about 1,000 projects costing 5bn dollars now being implemented in Iraq as part of reconstruction...


 

Al-Sharqiyah Satellite Channel, Baghdad, in Arabic, 1 March 05

Iraqi oil minister says oil revenues since toppling of Saddam Husayn's regime reach 13.4 bn dollars; says average of Iraq's oil production in last nine months 2.5 million b/d; says sabotage attacks against oil installation cost 7bn dollars...

 

Iraqi chief of staff says Defence Ministry, US troops command coordinate military operations in Al-Anbar Governorate cities; says Iraqi army has information on presence of many Arabs coming from outside Iraq under protection of armed Iraqi groups; says Al-Zarqawi in Al-Anbar...

 

US troops besiege Al-Hadithah City in Al-Anbar Governorate; eyewitnesses say shortage of goods resulted...

 

Bulgarian sources say dangerous disease begins to spread among foreign soldiers in Iraq...


 

Al-Iraqiah Satellite Channel, Baghdad, in Arabic, 1 March 05

 

Iraqi army kills eight terrorists, two soldiers killed south of Baghdad; railway linking Baghdad and Basra comes under att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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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론에 대한 비판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반격을!
 맑스 코뮤날레 제1차 쟁점토론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를 보고

기관지노힘  제39호
송석현 (노동자의 힘 회원)


신자유주의 반동이 세계를 지배 통치하는 오늘날 맑스주의의 반격을 준비하는 하나의 움직임으로 맑스 코뮤날레가 조직되었다. 지난 5월 제1회 맑스 코뮤날레 학술문화대회를 마치고 나서 주요한 쟁점으로 떠오른 몇 가지 주제를 좀더 심도 있게 토론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 시도가 9월5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를 주제로 개최된 쟁점토론회이다.
이날 토론회 사회는 김세균 교수가 맡았으며, 손호철·윤수종·정성진·조정환 선생 등 4분의 진보진영의 학자가 발제 및 토론자로 나서 네 시간 여에 걸쳐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 지면에서는 이 날 토론에서 주되게 쟁점을 형성하였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내 나름의 문제제기와 의견을 덧붙이고자 한다. 토론 내용 중에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전적으로 나의 무지 또는 오해의 소치임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쟁점 1. 반세계화 운동은 과연 반동인가?

토론회는 손호철 선생의 대단히 도발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손호철 선생은 지난 수년 간 자신이 적극 참가했던 반세계화 운동이 반동적인 행위에 불과하다는 네그리와 하트의 저작 {제국}을 보고 쇠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제국}에 드러난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은 "자본주의적 지배가 훨씬 더 전지구적으로 되고 있다면, 자본주의적 지배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국지적인 것을 방어해야 하고 자본의 가속화하는 흐름에 장애물을 건설해야 한다"는 전통적 좌파의 주장이 반동적이고 해롭다는 것이다. 손호철 선생은 여기에 동의할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제국}의 핵심 가설 네 가지를 내세우면서 비판하였다: "제국과 지구화는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며 필연이다(가설1). 제국과 지구화는 역사적 진보이다(가설2). 따라서 반세계화(반신자유주의적 지구화) 투쟁은 역사적 반동이다(가설3). 우리의 대안은 (반지구화 투쟁이 아니라) 자본의 지구화를 가속화하는 것, 이를 통해 대항지구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1)지구적 시민권, 2)사회적 임금권, 3)재전유권(再轉有權)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가설4)."
손호철 선생은 위의 가설은 전적으로 정확한 것이며, 따라서 '제국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 가설을 인정하고 분명하게 논쟁할 것을 요구하였다. 먼저, 자본의 지구화를 가속화시키는 데 장애가 되는 WTO 반대, 자유무역협정, 투자협정 반대 투쟁 등이 반동적이며 해로운 것인가?
이에 대해서 윤수종 선생은 전혀 반동적인 것이 아니며 그와 같은 투쟁을 지지한다고 답변했다. 다만, 운동에 反=안티가 붙었을 때,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자율주의자들은 반대 투쟁을 경계하며, 권력에 반대하면서 권력을 닮아 가는 행태를 비판적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자율주의자가 보기에, 농민들의 WTO 반대 투쟁이 뭔가 새로운 기반을 만들 수 있다면 그와 같은 반대투쟁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윤수종 선생은 네그리도 같은 맥락이라고 하면서, 네그리는 제노바 투쟁을 '대항세계화' 운동으로 표현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자본의 지구화는 노동의 지구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화 찬성이 자본의 지구화에 찬성하는 것으로 곧바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조정환 선생은 '반동적reactive'이라는 표현은 능동적이지 않고 즉자적인 반발이나 소극적인 반작용적 실천 또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또, 국지성과 민족국가에 기초한 반세계화 투쟁과 다중(Multitudes)의 역능에 기초한 전지구적 반세계화 투쟁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데, 손호철 선생은 전자에 입각한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 조정환 선생은 반세계화 투쟁을 문제제기 차원과 문제해결(대안적) 차원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문제제기의 차원은 다중의 현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정치 경제 문화적 어려움을 호소함으로써 공동의 경험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표현이다. 여기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미국과 이태리에서의 반세계화 투쟁에 자율주의 활동가들이 동참하고 있다. 문제해결의 차원에서 보자면, 민족국가적 차원에서 풀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반동적, 반작용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만약 이와 같은 방향으로 간다면 동의할 수 없다.
그리고 조정환 선생은 자본의 지구화를 가속화하자는 네그리의 주장을 손호철 선생이 전적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했다. 즉,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운동이 잠재적으로 축적해 가는 다중의 추진력, 네트워크적 힘들을 통해 자본의 족쇄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 네그리의 의도이며, 이것이 대항지구화 투쟁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손호철 선생은 농민들의 WTO 반대 투쟁은 농민의 기본 생존권을 지키는 것이 우선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것은 비록 국지적이고 민족적인 것이지만 반대해서는 안 됨을 분명히 했다. 즉, "민족주의와 국지적 정체성이 억압성을 내재하고 있고 국제주의와 대항지구화라는 지구적 연대에 장애가 될 수 있지만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하여 국지적 것을 방어하는 반지구화투쟁은 그 나름의 진보성을 갖고 있으며 진보진영의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대표적인 사례로 시애틀 항쟁을 들었다. 시애틀 항쟁은 "{제국}이 바라는 대로 대항지구화를 촉진시키기 위해 '자본의 전지구화 과정을 가속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국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로부터 '국지적인 것을 방어하려 하고 자본의 가속화하는 흐름에 장애물을 건설'하려는 반지구화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 손호철 선생은 이와 같은 반지구화투쟁과 보다 적극적으로 민중적인 대항제국 건설에 도움이 되는 대항지구화투쟁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쟁점 2.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는 제국(Empire)인가, 제국주의(Imperialism)인가

토론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또 다른 핵심 쟁점은 과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나타나고 있는 현대 세계 자본주의를 '제국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정성진 선생이 신랄하게 '제국론'을 비판하면서 포화를 열었다.
정성진 선생은 '제국론'은 세계화 담론들을 들뢰즈·가타리의 포스트 구조주의 방식으로 재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은 비록 복수의 맑스주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고전 맑스주의와 대립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천적으로도 '제국론'은 혁명적 사회주의와 동떨어진 개량주의 정치의 헤게모니에 봉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성진 선생은 그 이유로 '제국론'이 노동가치론과 공황론을 무시함으로써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부정하고 있으며, 국가간 경쟁이라는 제국주의론의 핵심을 폐기함으로써 맑스주의 제국주의론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국가간 경쟁이 약화된다는 것은 오늘날 세계 현상을 봐서도 맞지 않으며, 이것은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의 새로운 버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또한, 미국 제국주의 지배 현실의 부정,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진보성의 부정, 세계화 찬양, 노동자운동의 중심성 부정 등을 들어 '제국론'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조정환 선생은 고전적 맑스주의 패러다임에서 얼마나 이탈했는가를 통해 '제국'을 봐서는 안 되며, 자신은 그와 같은 '틀'을 인정할 수 없음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제국 주권의 특징을 통해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제국'임을 논증하고자 했다: 1)제국적 질서 아래에서 생산은 공장 기반을 떠나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상품과 자본의 국제적 이동은 더욱 자유롭게 된다. 제국은 탈영토적 질서를 의미한다. 2)제국에서는 낡은 생산 기반, 유통 수단, 주권 기관들은 새로운 생산 기반, 유통 수단들, 그리고 주권기관들과 더불어 네트워크를 이루어 헤게모니적 명령 구조에 종속되는 총체적인 질서를 갖는다. 3)제국은 주권들의 합성체 혹은 혼합체이다. 통합세력으로서 미국-G8강대국들-군사, 경제, 정치, 금융, 무역 등에 걸친 이질적 연합체들, 절합세력으로서 초국적 기업들-지역적·영토적 민족국가들의 연합체, 대의세력으로서 개별 민족국가-미디어와 종교-NGO들의 주권합성체로 이루어진다. 이것들은 다중의 삶을 억누르고 통제하며, 포획하는 장치이자 '마디'이다. '제국주의론' 옹호자들은 '미국'만을 중심으로 본다. 이 주권합성체는 정치뿐만 아니라 정치·경제·문화 등 전 영역에서 삶의 생산과 재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삶 권력'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조정환 선생에 따르면, 각 마디들이 항상 순탄한 것은 아니다. 제국 속에서도 '경향으로서의 제국주의'는 살아 움직인다. 제국은 그 자체가 위기를 관리하는 시스템이며, 그래서 제국 네트워크의 각 단, 각 층에서 움직이는 마디들(기구들, 국가들, 기업들, 연합체들, 그리고 미국 등)을 절합하고 통합하는 일은, 그 과정 속에서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는 불안정성을 갖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국주의와 같은 낡은 경향들이 때로는 제국의 혼합적 총체성의 균형을 뚫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부시의 일방주의적 패권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제국적 주권 패러다임을 파괴하거나 대체할 힘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제국론'에 따르면, 부시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어 조정환 선생은 '제국주의론'을 객관주의적 발전단계론, 국가주의, 가치중심적 관점과 프롤레타리아트 희생자론에 입각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정환 선생에 따르면, 제국주의론은 자본/노동의 적대가 감추어지고 자본주의 한계내로 문제를 설정하는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제국주의론'이 '독점자본/비독점자본 간 갈등'의 해결이나 '중심부국가/주변부국가 간 갈등의 해결'로 문제의식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설정 속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능동성이나 자기가치화 능력을 갖지 못한 희생자로 묘사되며 그것이 혁명적 호명을 받을 때조차도 부르주아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동원되는 피동적 동원군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대 관계에서 적보다 우리의 행위에 주목하는 다중 주체의 대응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그러나, 손호철 선생은 현실 속에 '제국'의 '요소'와 '계기'가 현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낡은' 제국주의적 요소와 계기도 여전히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으므로 제국이 이미 우리의 현실이며 제국주의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잉일반화 내지 과장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미국의 자본 소유의 규모,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략 전쟁,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민국가의 위상, 그리고 보다 주요하게는 부시의 일방주의와 "중상주의적 제국주의"를 들었다. 또, "하트는 세계가 '제국'이 아니라 낡은 미국의 제국주의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세계를 자신들이 주장해온 '제국'으로 이끌어 가지 않는 '전세계 지배자들의 어리석음'을 통탄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현재 세계가 제국이라는 주장에 강한 의문을 던졌다.

쟁점 3. 개량인가, 혁명인가?

정성진 선생은 '제국론'이 말하는 세 가지 요구, 즉 1)지구적 시민권, 2)사회적 임금권, 3)재전유권을 위한 투쟁은 분명 개량주의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과거 70년대 아우토미아의 '노동거부' 투쟁에는 혁명적 경향성이 있었는데, 지금 {제국}에서는 이마저 상실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제국론'이 '제3의 길'과 뭐가 근본적으로 다른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또, 개량이라는 것은 '국가'를 전제한 것인데, '국가주의'에 반대하면서 국가를 전제로 하는 주장을 한다는 것은 형식논리적으로도 모순임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조정환 선생은 지구적 시민권, 사회적 임금권, 정보적 힘의 재전유는 개량주의적 요구가 아니라 혁명적인 요구임을 강조했다. 지구적 시민권은 이민 이동 분산들 속에서 국가적 경계선을 철거하기 위해서 나온 개념인데, 시민권을 획득한다면 노동자 또는 다중 차원에서 단결하게 됨을 말했다. 자본에 의해서 분할 통치되는 상황에서 이것은 분명 혁명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회적 임금권은 자율주의 운동 이전 60년대에 나온 임금 형태로서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 삶에 적정한 수준의 임금을 받아내자는 것인데, 이 또한 매우 중요한 전략적 방안임을 역설했다. 끝으로, 정보적 힘의 재전유는 생산수단을 재장악하는 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성진 선생은 이 세 가지 요구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제국론'에서 국가를 매개로 주장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되물었다. 허공에 대고서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즉, 세 가지 요구 중에서 세 번째 '재전유' 부분은 추상적이라서 그렇고, 시민권과 임금권은 국가 매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현실은 국민국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이행기 강령의 설정 속에서 그와 같은 요구를 제기한다면 부정할 이유가 없으며, 이런 것이 없는 상황이라면 개량적이라는 점, 그리고 국가권력 문제, 즉 국가분쇄와 소멸의 문제 설정을 회피한다면, 또한 '개량주의'라고 말했다. 손호철 선생도 세계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국민국가 또는 국민국가간의 합의를 통해서 실현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통해 비록 혁명적인 주장이라고 할 지라도 국민국가 문제는 여전히 이슈로 남기 때문에 공허하다는 요지의 의견을 밝혔다. 이로써 쟁점은 자연스럽게 현대 세계에서 국민국가의 위상 문제로 넘어갔다.
이에 대해 조정환 선생은 국가를 매개로 한 문제가 아니며 어떤 국가가 이것을 보장해 주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전지구적 다중의 연합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며, 이것은 운동 주체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윤수종 선생도 '제국론'은 주민대중을 훈육하는 장치로 국민국가를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힘의 논리가 작동하며 힘 관계에서 대중들이 능동적으로 대항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깨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보완하였다. 계속해서 조정환 선생은, 제국 속에서 국민국가가 제국주의보다 쇠퇴한 것은 사실이며, 그렇다고 국민국가가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제국의 '명령'을 받아서 국민국가가 다중을 분할하는 것임을 주장했다. 또, 시애틀 투쟁 등이 미국이라는 국민국가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WTO 등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이 '제국'의 실재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제국'에서는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지역적 양극화가 아니라 계급적 양극화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항하는 국가의 자립성과 자립적 국가들의 연대'를 대안으로 사고하면서 그것을 노동계급에 의한 국가권력 장악에서 찾는 것은 이제 명령관계로 전화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착취관계의 폐절이라는 당면 과제를 미래로 유보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문제는 대안 정치의 전망과 노동자계급의 투쟁이다.

토론회를 지켜보면서 나는 '제국론'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설명하기도, 실천적으로 대항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을 하였다. 정성진 선생의 지적대로 '제국론'은 '제국주의' 국가간, 그리고 독점자본간의 경쟁과 갈등을 고려하지 않는 '초제국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에서 드러난 국민국가 간의 대립은 미국의 '어리석은 지도자'의 쿠데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독점 자본의 이해와 이해 관철을 위한 경쟁의 표현이라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분열과 대립의 구도는 중부유럽, 동유럽, 발트해 지역, 카스피해-카프카즈 지역, 중앙아시아, 중동을 잇는 지역의 자원과 정치군사적 지배력을 둘러싼 제국주의간의 쟁투를 의미하며 이것은 군사적 쟁투, 군수독점자본간, 석유독점자본간, 기축통화간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번 칸쿤에서의 사례를 보면, '주권합성체'의 한 영역인 WTO에서도 이들 국민국가(선진국 대 개도국) 간의 이해 대립이 완강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민국가의 조절 역할은 여전히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제국론'에서 말하는 '포획'과 '훈육'은 애초부터 국민국가의 가장 주요한 기능과 역할이었다. 자본의 노동에 대한 '포획'과 '훈육'은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가 원래부터 꿈꾸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는 자본이 자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지구화를 가속화할수록 성공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에 대항하는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점차 거세게 일어나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96-97년 총파업 투쟁, 02년 아르헨티나 항전, 서유럽에서의 무수한 파업 등에서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그것이 비록 일국에서의 투쟁이라고 해도 그것은 분명히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제국'이 부여한 위계와 명령으로 온전히 유지될 수 없다.
칸쿤에서의 투쟁은 '국지성'에 기초한 노동자 민중의 투쟁과 국제주의적 연대와 실천이 여전히 가장 중요한 투쟁의 지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물론 현재의 반세계화 투쟁이 넘어야 할 과제가 많은 것은 분명하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은 민족주의적 관념으로부터 반자본주의 계급 대립 관계에 입각한 투쟁으로의 뚜렷한 전회이다. 물론 '제국론'에서도 계급 적대와 자본의 착취를 폐절할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제국론'이 말하듯이 다중의 네트워크적 힘의 역능성을 통해서 실현된다기보다 사회적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대안 사회의 정치적 전망을 갖고서 반세계화 투쟁이 전면적으로 벌어져야 함을 의미할 따름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망을 구축하고 그것을 기초로 단결하고 국제주의적 실천을 벌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전망은 사회적 생산에 걸맞게 소유를 사회적으로 재전유하는 데에 중심성을 두고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성 위에서 미시적 억압과 폭력에 맞서는 투쟁을 조직함으로써 대안 사회의 상을 그릴 수 있다. '대항제국'은 운동의 중심성 없이 네크워크적 힘의 역능성을 과대평가하고 있을 뿐, '지구적 시민권'과 '사회적 임금권', 나아가 '재전유권'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중심 주체를 구축하는 데는 실패할 것으로 보인다. '제국론'은 그 대상에서 '지구'라는 거대한 설정을 하였지만, 주체의 운동에서는 중심없는 미시적 공간만을 파고든다는 느낌을 준다. 이래서는 대안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의 정치 전망은 노동자계급이 정치적 주체로서 낡은 부르주아 지배 장치를 대체할 새로운 권력을 대중적으로 창출하는 것이며, 이것에 복무할 노동자계급의 당파적 조직의 건설이 시급한 과제이다.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하여 일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노동자계급이 대안 사회 건설의 지도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투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를 타격할 수 있는 투쟁의 전망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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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환씨의 <제국기계비판>에 대한 단상

며칠전에 이 책을 2회독 하였습니다. 오래간만에 <전략 구상>에 관한 책을 보아서인지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 책은 우선 변화하는 현실을 새로운 개념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이라는데 우선 그 이론의 정합성을 따지기 전에 제게는 의미있게 느껴졌습니다.
<전략 구상>이라는게 사실 이 땅위에 두다리로 굳게 서서 꿈꾸는 작업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신영복씨의 [강의]에서도 공통으로 인식하고 있는 '저항의 거대담론'의 형성(조정환씨는 '공통의 언어, 공통의 정신'으로 표현하고 있더군요)이 역사적 과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요 테마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그동안 맑스에게서 '포섭(subsumption)'의 개념을 간과하였다.
형식적/실제적--->가상실효적
2. 제국주의론의 비판으로서 '제국론'- 변증법적인식으로서의 현실 : 계급투쟁과 자본의 자기운동
3.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태도 <--> 꼬뮤니즘
4. 변화한 현실-전 지구적 네트워크화에 대한 인식 그리고 새로운 역사 주체로서의 <다중>-계급에 대한 새로운 인식

너무 간단하게 정리 했나요^^;;
아무튼 이 책은 기존의 개념들의 한계를 비판하고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고 있습니다.

아참 가장 중요한 개념을 놓쳤군요. 위 논리 전개에 가장 핵심적 기반은 <자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풍성한 논의가 있어야 겠지만 현실 투쟁에 이러한 이론들이 어떻게 현실화 될 수 있을지가 우리의 관심사 입니다.

당장 떠오르는 문제 의식 몇가지를 지적하면

첫째, 우리는 개념화된,관념화된 적의 면상을 갈길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제국기계'와 '다중'의 갈등 구조에서 제국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반세계화 시위 같은)과
개별 민족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의 연관성/위계 등에 대한 실천적 이해가 요구 됩니다

둘째, 국가권력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저항과 현실 권력 분배(예를 들면 선거)의 관계
자율적 다중 자신의 투쟁과 현실 정치 권력 분점의 관계에 대한 실천적 이해

셋째, 자율성은 그동안 전위-대중운동의 주의주의적 편향을 비판하는 의미있는 잣대이지만
자율적 운동은 현실적으로 고립적이고 '제국기계'에 의해 각개격파 당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지 않나요. 자율이 자생생으로 오해되는 과정이 어떻게 극복될까요.
(조정환님의 말씀하시는 혁명은 분명 '아(我)와 비아(非我)간의 계급전쟁' 즉 권력을 유지
강화하려는 힘과 권력 자체를 협동으로 바꾸려는 힘의 무마될 수 없는 충돌입니다.)

현실 운동에서 이 이론의 화신을 보아야 좀 이해가 쉬울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투쟁중인 현자 비정규직 동지들 가운데 이 책을 실천적으로 읽는 분이 있다면 함께 이야기 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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