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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론에 대한 비판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반격을!
 맑스 코뮤날레 제1차 쟁점토론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를 보고

기관지노힘  제39호
송석현 (노동자의 힘 회원)


신자유주의 반동이 세계를 지배 통치하는 오늘날 맑스주의의 반격을 준비하는 하나의 움직임으로 맑스 코뮤날레가 조직되었다. 지난 5월 제1회 맑스 코뮤날레 학술문화대회를 마치고 나서 주요한 쟁점으로 떠오른 몇 가지 주제를 좀더 심도 있게 토론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 시도가 9월5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를 주제로 개최된 쟁점토론회이다.
이날 토론회 사회는 김세균 교수가 맡았으며, 손호철·윤수종·정성진·조정환 선생 등 4분의 진보진영의 학자가 발제 및 토론자로 나서 네 시간 여에 걸쳐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 지면에서는 이 날 토론에서 주되게 쟁점을 형성하였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내 나름의 문제제기와 의견을 덧붙이고자 한다. 토론 내용 중에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전적으로 나의 무지 또는 오해의 소치임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쟁점 1. 반세계화 운동은 과연 반동인가?

토론회는 손호철 선생의 대단히 도발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손호철 선생은 지난 수년 간 자신이 적극 참가했던 반세계화 운동이 반동적인 행위에 불과하다는 네그리와 하트의 저작 {제국}을 보고 쇠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제국}에 드러난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은 "자본주의적 지배가 훨씬 더 전지구적으로 되고 있다면, 자본주의적 지배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국지적인 것을 방어해야 하고 자본의 가속화하는 흐름에 장애물을 건설해야 한다"는 전통적 좌파의 주장이 반동적이고 해롭다는 것이다. 손호철 선생은 여기에 동의할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제국}의 핵심 가설 네 가지를 내세우면서 비판하였다: "제국과 지구화는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며 필연이다(가설1). 제국과 지구화는 역사적 진보이다(가설2). 따라서 반세계화(반신자유주의적 지구화) 투쟁은 역사적 반동이다(가설3). 우리의 대안은 (반지구화 투쟁이 아니라) 자본의 지구화를 가속화하는 것, 이를 통해 대항지구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1)지구적 시민권, 2)사회적 임금권, 3)재전유권(再轉有權)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가설4)."
손호철 선생은 위의 가설은 전적으로 정확한 것이며, 따라서 '제국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 가설을 인정하고 분명하게 논쟁할 것을 요구하였다. 먼저, 자본의 지구화를 가속화시키는 데 장애가 되는 WTO 반대, 자유무역협정, 투자협정 반대 투쟁 등이 반동적이며 해로운 것인가?
이에 대해서 윤수종 선생은 전혀 반동적인 것이 아니며 그와 같은 투쟁을 지지한다고 답변했다. 다만, 운동에 反=안티가 붙었을 때,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자율주의자들은 반대 투쟁을 경계하며, 권력에 반대하면서 권력을 닮아 가는 행태를 비판적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자율주의자가 보기에, 농민들의 WTO 반대 투쟁이 뭔가 새로운 기반을 만들 수 있다면 그와 같은 반대투쟁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윤수종 선생은 네그리도 같은 맥락이라고 하면서, 네그리는 제노바 투쟁을 '대항세계화' 운동으로 표현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자본의 지구화는 노동의 지구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화 찬성이 자본의 지구화에 찬성하는 것으로 곧바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조정환 선생은 '반동적reactive'이라는 표현은 능동적이지 않고 즉자적인 반발이나 소극적인 반작용적 실천 또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또, 국지성과 민족국가에 기초한 반세계화 투쟁과 다중(Multitudes)의 역능에 기초한 전지구적 반세계화 투쟁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데, 손호철 선생은 전자에 입각한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 조정환 선생은 반세계화 투쟁을 문제제기 차원과 문제해결(대안적) 차원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문제제기의 차원은 다중의 현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정치 경제 문화적 어려움을 호소함으로써 공동의 경험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표현이다. 여기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미국과 이태리에서의 반세계화 투쟁에 자율주의 활동가들이 동참하고 있다. 문제해결의 차원에서 보자면, 민족국가적 차원에서 풀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반동적, 반작용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만약 이와 같은 방향으로 간다면 동의할 수 없다.
그리고 조정환 선생은 자본의 지구화를 가속화하자는 네그리의 주장을 손호철 선생이 전적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했다. 즉,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운동이 잠재적으로 축적해 가는 다중의 추진력, 네트워크적 힘들을 통해 자본의 족쇄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 네그리의 의도이며, 이것이 대항지구화 투쟁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손호철 선생은 농민들의 WTO 반대 투쟁은 농민의 기본 생존권을 지키는 것이 우선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것은 비록 국지적이고 민족적인 것이지만 반대해서는 안 됨을 분명히 했다. 즉, "민족주의와 국지적 정체성이 억압성을 내재하고 있고 국제주의와 대항지구화라는 지구적 연대에 장애가 될 수 있지만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하여 국지적 것을 방어하는 반지구화투쟁은 그 나름의 진보성을 갖고 있으며 진보진영의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대표적인 사례로 시애틀 항쟁을 들었다. 시애틀 항쟁은 "{제국}이 바라는 대로 대항지구화를 촉진시키기 위해 '자본의 전지구화 과정을 가속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국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로부터 '국지적인 것을 방어하려 하고 자본의 가속화하는 흐름에 장애물을 건설'하려는 반지구화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 손호철 선생은 이와 같은 반지구화투쟁과 보다 적극적으로 민중적인 대항제국 건설에 도움이 되는 대항지구화투쟁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쟁점 2.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는 제국(Empire)인가, 제국주의(Imperialism)인가

토론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또 다른 핵심 쟁점은 과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나타나고 있는 현대 세계 자본주의를 '제국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정성진 선생이 신랄하게 '제국론'을 비판하면서 포화를 열었다.
정성진 선생은 '제국론'은 세계화 담론들을 들뢰즈·가타리의 포스트 구조주의 방식으로 재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은 비록 복수의 맑스주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고전 맑스주의와 대립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천적으로도 '제국론'은 혁명적 사회주의와 동떨어진 개량주의 정치의 헤게모니에 봉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성진 선생은 그 이유로 '제국론'이 노동가치론과 공황론을 무시함으로써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부정하고 있으며, 국가간 경쟁이라는 제국주의론의 핵심을 폐기함으로써 맑스주의 제국주의론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국가간 경쟁이 약화된다는 것은 오늘날 세계 현상을 봐서도 맞지 않으며, 이것은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의 새로운 버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또한, 미국 제국주의 지배 현실의 부정,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진보성의 부정, 세계화 찬양, 노동자운동의 중심성 부정 등을 들어 '제국론'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조정환 선생은 고전적 맑스주의 패러다임에서 얼마나 이탈했는가를 통해 '제국'을 봐서는 안 되며, 자신은 그와 같은 '틀'을 인정할 수 없음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제국 주권의 특징을 통해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제국'임을 논증하고자 했다: 1)제국적 질서 아래에서 생산은 공장 기반을 떠나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상품과 자본의 국제적 이동은 더욱 자유롭게 된다. 제국은 탈영토적 질서를 의미한다. 2)제국에서는 낡은 생산 기반, 유통 수단, 주권 기관들은 새로운 생산 기반, 유통 수단들, 그리고 주권기관들과 더불어 네트워크를 이루어 헤게모니적 명령 구조에 종속되는 총체적인 질서를 갖는다. 3)제국은 주권들의 합성체 혹은 혼합체이다. 통합세력으로서 미국-G8강대국들-군사, 경제, 정치, 금융, 무역 등에 걸친 이질적 연합체들, 절합세력으로서 초국적 기업들-지역적·영토적 민족국가들의 연합체, 대의세력으로서 개별 민족국가-미디어와 종교-NGO들의 주권합성체로 이루어진다. 이것들은 다중의 삶을 억누르고 통제하며, 포획하는 장치이자 '마디'이다. '제국주의론' 옹호자들은 '미국'만을 중심으로 본다. 이 주권합성체는 정치뿐만 아니라 정치·경제·문화 등 전 영역에서 삶의 생산과 재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삶 권력'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조정환 선생에 따르면, 각 마디들이 항상 순탄한 것은 아니다. 제국 속에서도 '경향으로서의 제국주의'는 살아 움직인다. 제국은 그 자체가 위기를 관리하는 시스템이며, 그래서 제국 네트워크의 각 단, 각 층에서 움직이는 마디들(기구들, 국가들, 기업들, 연합체들, 그리고 미국 등)을 절합하고 통합하는 일은, 그 과정 속에서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는 불안정성을 갖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국주의와 같은 낡은 경향들이 때로는 제국의 혼합적 총체성의 균형을 뚫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부시의 일방주의적 패권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제국적 주권 패러다임을 파괴하거나 대체할 힘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제국론'에 따르면, 부시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어 조정환 선생은 '제국주의론'을 객관주의적 발전단계론, 국가주의, 가치중심적 관점과 프롤레타리아트 희생자론에 입각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정환 선생에 따르면, 제국주의론은 자본/노동의 적대가 감추어지고 자본주의 한계내로 문제를 설정하는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제국주의론'이 '독점자본/비독점자본 간 갈등'의 해결이나 '중심부국가/주변부국가 간 갈등의 해결'로 문제의식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설정 속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능동성이나 자기가치화 능력을 갖지 못한 희생자로 묘사되며 그것이 혁명적 호명을 받을 때조차도 부르주아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동원되는 피동적 동원군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대 관계에서 적보다 우리의 행위에 주목하는 다중 주체의 대응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그러나, 손호철 선생은 현실 속에 '제국'의 '요소'와 '계기'가 현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낡은' 제국주의적 요소와 계기도 여전히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으므로 제국이 이미 우리의 현실이며 제국주의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잉일반화 내지 과장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미국의 자본 소유의 규모,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략 전쟁,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민국가의 위상, 그리고 보다 주요하게는 부시의 일방주의와 "중상주의적 제국주의"를 들었다. 또, "하트는 세계가 '제국'이 아니라 낡은 미국의 제국주의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세계를 자신들이 주장해온 '제국'으로 이끌어 가지 않는 '전세계 지배자들의 어리석음'을 통탄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현재 세계가 제국이라는 주장에 강한 의문을 던졌다.

쟁점 3. 개량인가, 혁명인가?

정성진 선생은 '제국론'이 말하는 세 가지 요구, 즉 1)지구적 시민권, 2)사회적 임금권, 3)재전유권을 위한 투쟁은 분명 개량주의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과거 70년대 아우토미아의 '노동거부' 투쟁에는 혁명적 경향성이 있었는데, 지금 {제국}에서는 이마저 상실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제국론'이 '제3의 길'과 뭐가 근본적으로 다른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또, 개량이라는 것은 '국가'를 전제한 것인데, '국가주의'에 반대하면서 국가를 전제로 하는 주장을 한다는 것은 형식논리적으로도 모순임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조정환 선생은 지구적 시민권, 사회적 임금권, 정보적 힘의 재전유는 개량주의적 요구가 아니라 혁명적인 요구임을 강조했다. 지구적 시민권은 이민 이동 분산들 속에서 국가적 경계선을 철거하기 위해서 나온 개념인데, 시민권을 획득한다면 노동자 또는 다중 차원에서 단결하게 됨을 말했다. 자본에 의해서 분할 통치되는 상황에서 이것은 분명 혁명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회적 임금권은 자율주의 운동 이전 60년대에 나온 임금 형태로서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 삶에 적정한 수준의 임금을 받아내자는 것인데, 이 또한 매우 중요한 전략적 방안임을 역설했다. 끝으로, 정보적 힘의 재전유는 생산수단을 재장악하는 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성진 선생은 이 세 가지 요구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제국론'에서 국가를 매개로 주장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되물었다. 허공에 대고서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즉, 세 가지 요구 중에서 세 번째 '재전유' 부분은 추상적이라서 그렇고, 시민권과 임금권은 국가 매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현실은 국민국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이행기 강령의 설정 속에서 그와 같은 요구를 제기한다면 부정할 이유가 없으며, 이런 것이 없는 상황이라면 개량적이라는 점, 그리고 국가권력 문제, 즉 국가분쇄와 소멸의 문제 설정을 회피한다면, 또한 '개량주의'라고 말했다. 손호철 선생도 세계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국민국가 또는 국민국가간의 합의를 통해서 실현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통해 비록 혁명적인 주장이라고 할 지라도 국민국가 문제는 여전히 이슈로 남기 때문에 공허하다는 요지의 의견을 밝혔다. 이로써 쟁점은 자연스럽게 현대 세계에서 국민국가의 위상 문제로 넘어갔다.
이에 대해 조정환 선생은 국가를 매개로 한 문제가 아니며 어떤 국가가 이것을 보장해 주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전지구적 다중의 연합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며, 이것은 운동 주체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윤수종 선생도 '제국론'은 주민대중을 훈육하는 장치로 국민국가를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힘의 논리가 작동하며 힘 관계에서 대중들이 능동적으로 대항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깨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보완하였다. 계속해서 조정환 선생은, 제국 속에서 국민국가가 제국주의보다 쇠퇴한 것은 사실이며, 그렇다고 국민국가가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제국의 '명령'을 받아서 국민국가가 다중을 분할하는 것임을 주장했다. 또, 시애틀 투쟁 등이 미국이라는 국민국가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WTO 등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이 '제국'의 실재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제국'에서는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지역적 양극화가 아니라 계급적 양극화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항하는 국가의 자립성과 자립적 국가들의 연대'를 대안으로 사고하면서 그것을 노동계급에 의한 국가권력 장악에서 찾는 것은 이제 명령관계로 전화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착취관계의 폐절이라는 당면 과제를 미래로 유보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문제는 대안 정치의 전망과 노동자계급의 투쟁이다.

토론회를 지켜보면서 나는 '제국론'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설명하기도, 실천적으로 대항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을 하였다. 정성진 선생의 지적대로 '제국론'은 '제국주의' 국가간, 그리고 독점자본간의 경쟁과 갈등을 고려하지 않는 '초제국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에서 드러난 국민국가 간의 대립은 미국의 '어리석은 지도자'의 쿠데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독점 자본의 이해와 이해 관철을 위한 경쟁의 표현이라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분열과 대립의 구도는 중부유럽, 동유럽, 발트해 지역, 카스피해-카프카즈 지역, 중앙아시아, 중동을 잇는 지역의 자원과 정치군사적 지배력을 둘러싼 제국주의간의 쟁투를 의미하며 이것은 군사적 쟁투, 군수독점자본간, 석유독점자본간, 기축통화간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번 칸쿤에서의 사례를 보면, '주권합성체'의 한 영역인 WTO에서도 이들 국민국가(선진국 대 개도국) 간의 이해 대립이 완강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민국가의 조절 역할은 여전히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제국론'에서 말하는 '포획'과 '훈육'은 애초부터 국민국가의 가장 주요한 기능과 역할이었다. 자본의 노동에 대한 '포획'과 '훈육'은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가 원래부터 꿈꾸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는 자본이 자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지구화를 가속화할수록 성공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에 대항하는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점차 거세게 일어나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96-97년 총파업 투쟁, 02년 아르헨티나 항전, 서유럽에서의 무수한 파업 등에서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그것이 비록 일국에서의 투쟁이라고 해도 그것은 분명히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제국'이 부여한 위계와 명령으로 온전히 유지될 수 없다.
칸쿤에서의 투쟁은 '국지성'에 기초한 노동자 민중의 투쟁과 국제주의적 연대와 실천이 여전히 가장 중요한 투쟁의 지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물론 현재의 반세계화 투쟁이 넘어야 할 과제가 많은 것은 분명하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은 민족주의적 관념으로부터 반자본주의 계급 대립 관계에 입각한 투쟁으로의 뚜렷한 전회이다. 물론 '제국론'에서도 계급 적대와 자본의 착취를 폐절할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제국론'이 말하듯이 다중의 네트워크적 힘의 역능성을 통해서 실현된다기보다 사회적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대안 사회의 정치적 전망을 갖고서 반세계화 투쟁이 전면적으로 벌어져야 함을 의미할 따름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망을 구축하고 그것을 기초로 단결하고 국제주의적 실천을 벌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전망은 사회적 생산에 걸맞게 소유를 사회적으로 재전유하는 데에 중심성을 두고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성 위에서 미시적 억압과 폭력에 맞서는 투쟁을 조직함으로써 대안 사회의 상을 그릴 수 있다. '대항제국'은 운동의 중심성 없이 네크워크적 힘의 역능성을 과대평가하고 있을 뿐, '지구적 시민권'과 '사회적 임금권', 나아가 '재전유권'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중심 주체를 구축하는 데는 실패할 것으로 보인다. '제국론'은 그 대상에서 '지구'라는 거대한 설정을 하였지만, 주체의 운동에서는 중심없는 미시적 공간만을 파고든다는 느낌을 준다. 이래서는 대안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의 정치 전망은 노동자계급이 정치적 주체로서 낡은 부르주아 지배 장치를 대체할 새로운 권력을 대중적으로 창출하는 것이며, 이것에 복무할 노동자계급의 당파적 조직의 건설이 시급한 과제이다.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하여 일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노동자계급이 대안 사회 건설의 지도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투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를 타격할 수 있는 투쟁의 전망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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